| <colbgcolor=#c00d45,#94153e><colcolor=#f0ad73> 판내시부사 겸 상선 김처선 金處善 | |
| 출생 | 1421년 |
| 충청도 전의현 (現 세종특별자치시 전의면)[1] | |
| 사망 | 1505년 5월 14일 (향년 84세)[2] |
| 한성부 경복궁 (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사직로) | |
| 본관 | 전의 김씨[3] |
| 직업 | 환관 |
| 국적 | |
| 종교 | 유교(성리학) |
| 붕당 | |
1. 개요
조선 시대의 유명한 환관.
세종대왕부터 연산군까지 무려 일곱 왕을 섬겼으며 최고위 내시인 판내시부사 겸 상선을 역임한 인물이었다.
2. 생애
내시는 일반적으로 10세 전후에 소환[4]이 돼 17세~21세 전후에 정식 품계를 받았다는 것을 근거로 볼 때 세종 말년에 내시로 입궐한 것으로 추정된다. 죄명은 알 수 없으나 문종 때 내시에서 쫓겨나 경상도 영해(寧海, 지금의 영덕)로 유배되었다가, 단종이 즉위할 때 사면되어 1453년(단종 1년) 유배에서 풀려나고 1454년(단종 2년) 내시에 복직되었다.1455년(단종 3년) 수양대군에 의해 금성대군이 죄명을 받아 유배된 일에 연루되어 다시 내시에서 쫓겨나 유배되어 본향의 관노가 되었다가, 계유정난 이후 1457년(세조 3년)에 유배에서 풀려나 1460년(세조 6년) 음력 5월 원종공신(原從功臣) 3등에 추록되었다. 그러나 1460년 음력 10월과 1464년(세조 10년)에는 내시 일에 태만했다는 이유로 곤장을 맞았고, 1465년(세조 11년)에는 시녀를 데리고 한양에 가다가 환관 이운, 최해와 막걸리를 마신 후 취해서 종로 한복판에 뻗어있던 사건을 일으켜 국문을 당하고 이운, 최해와 함께 감금당하는 등[5] 세조 때는 여러 문제를 일으켰는데,[6] 그러다가 성종 때에 이르러서는 말을 전달한 공로와 의술로 대비를 치료한 공로 등으로 다시 인생 역전하여 자헌대부에 올랐다.
연산군이 즉위한 이후에는 1504년(연산군 10년) 음력 7월 16일 무례한 일을 했다는 이유로 하옥되어 곤장 100대를 맞았고, 1505년(연산군 11년) 음력 4월 1일 연산군과 같은 자리에서 술을 마시던 중, 술김에 임금에게 폭언을 퍼부었다가 죽임을 당했다. 김처선의 죽음에 대해 실록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환관 김처선을 궁궐 안에서 죽이고, 아울러 그 양자 이공신(李公信)도 죽였다. <연산군일기 연산군 11년 음력 4월 1일자 1번째 기사>
"내관 김처선이 술에 몹시 취해서 임금을 꾸짖었으니, 가산을 적몰하고 그 집을 헐어 물웅덩이로 만들고 그 본관인 전의(全義)를 혁파하라."라고 전교하였다. <연산군일기 연산군 11년 음력 4월 1일자 2번째 기사>
처선의 죄는 바깥 사람들이 알지 못하나, 사람들이 말하기는 "왕이 처선에게 술을 권하매, 처선이 취해서 옳은 도리로 간언하는 말을 하니, 임금이 노하여 친히 칼을 들고 그의 팔다리를 자르고서 쏘아 죽였다."라고 한다. <연산군일기 연산군 11년 음력 4월 1일자 3번째 기사>
김처선이 연산군을 꾸짖은 구체적인 언사나 연산군이 김처선을 죽인 구체적인 행위는 실록에 명확히 기록되어 있지 않으나, 궁궐 안(禁中)에서 죽였다는 기록을 보면 국법에 따라 공식적으로 처형한 것은 아님을 알 수 있다.
다만, 궁궐 밖 백성들 사이에서는 김처선이 목숨을 걸고 부패와 향락에 빠진 연산군에게 일침을 가하다가 노한 연산군에게 칼로 팔다리가 잘리고 활에 맞아 죽었다는 식으로 이야기가 퍼지면서 김처선에 대한 영웅화가 이뤄지기 시작했다.
이런 이야기를 근거로 해서인지 중종 때는 찬집청에서 김처선이 베임을 당했다는(被誅) 말을 들었다고 기록되었고, 한참 시간이 흘러 200년 뒤 영조 때는 김처선을 복권하면서 활에 맞아 죽었다(被射殺)고 기록되었다.
조선시대의 야사 모음집인 연려실기술과 이 자료의 출처인 조신이 지은 소문쇄록에는 김처선에 대한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한다.
환관(宦官) 김처선(金處善) 김처선은 관직이 정2품이었다. 연산주가 어둡고 음란하였으므로 김처선이 매양 정성을 다하여 간하니, 연산주는 노여움을 속에 쌓아 둔 채 겉으로 나타내지 아니하였다. 일찍이 궁중에서 임금이 처용(處容) 놀이를 하며 음란함이 도를 지나쳤다. 김처선은 집안 사람에게, “오늘 나는 반드시 죽을 것이다.” 하고 들어가서 거리낌없이 말하기를,“늙은 놈이 네 분 임금을 섬겼고, 경서와 사서를 대강 통하지마는 고금에 전하처럼 행동하는 이는 없었습니다.” 하였다. 이에 연산주가 성을 참지 못하여 활을 당겨 쏘아서 갈빗대에 맞히자, 김처선은 “조정의 대신들도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데 늙은 내시가 어찌 감히 죽음을 아끼겠습니까. 다만 전하께서 오래도록 보위에 계시지 못할 것이 한스러울 뿐입니다.” 하였다. 연산주는 화살 하나를 더 쏘아 맞쳐서 공을 땅에 넘어뜨리고, 그 다리를 끊고서 일어나 다니라고 하였다. 이에 처선은 임금을 쳐다보면서, “전하께서는 다리가 부러져도 다닐 수 있습니까.” 하자, 또 그 혀를 자르고 몸소 그 배를 갈라 창자를 끄집어 내었는데, 죽을 때까지 말을 그치지 아니하였다. 마침내 그 시체를 범에게 주고 조정과 민간에 ‘처(處)’ 자를 말하지 못하게 하였다.[7]
이 사건 이후로도 연산군은 김처선을 극도로 혐오했는지 밑도 끝도 없이 복수를 꾀하였다. 예를 들어 김처선의 아내와 이공신의 아내를 관비로 삼고 7촌 관계의 친족들까지 벌을 주는가 하면, 김처선 부모의 묘도 뭉개버리고 집은 헐어버린 후에 집터를 물웅덩이로 만들었으며 김처선의 본관인 전의(全義)도 없애버렸다. 김처선의 이름에 들어갔던 '처(處)'자의 사용을 기피하여 24절기 중 하나인 처서(處暑)를 조서(徂暑)로 바꾸고 그토록 좋아하던 처용무(處容舞)의 이름까지 풍두무(豊頭舞)로 바꿔버릴 정도였다. 또한 관리나 군사들 중 김처선이란 이름을 가진 사람들에게 개명을 명하는가 하면 권벌이라는 사람이 과거 시험에서 처(處)자를 썼다고 '합격을 취소하는 사례'(이 사람은 3년 뒤인 정묘년에 재수하여 붙었다고 한다.)도 있었으며 성몽정이 상소에 처(處)자를 써서 국문을 당하다가 천만다행히도 법 제정 이전에 썼다고 국문을 취소한 사례도 있었다.
어찌됐든 연산군이 중종반정으로 쫓겨나고 중종이 즉위하자 김처선의 행적을 기리자는 상소가 올라오지만 중종은 의외라면 의외로 "김처선은 술 처먹고 주정 부리다가 죽은 건데 무슨 놈의 공신?"이라는 식으로 이를 모두 무시한다.[8] 아무래도 중종은 연산군이 아무리 폭군이라 해도 자기 이복형인데다, 일개 내시가 감히 술 먹고 왕에게 폭언을 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 생각했던 것으로 보인다.
실제 상기된 중종실록 7년 12월 4일 갑진 2번째 기사의 내용 전문을 보면, 찬집청에서 김처선과 김순손이 연산군에게 직언을 하다 살해당했다고 하는데 사람들이 그들의 행적에 대해 자세한 사실들을 잘 모르니 잘 아는 사람을 찾아 물어서 자세한 사실 관계를 확인해서 두 사람의 행적을 곧 편찬될 '속삼강행실도'에 싣자고 했는데도, 중종은 김처선과 김순손에 대해 자신도 자세한 사실을 모를텐데 김처선은 술에 취해서 망령된 말을 하다 죽은 것 뿐이고, 김순손은 본 의도가 연산군에게 직언을 한 것이 아니라는 부정확한 발언을 하며 그들의 행적에 대한 자세한 조사와 포상을 애써 거부하는 면모를 보였다.
또 환관 김처선 뿐만이 아니라 김순손의 행적 조사와 포상도 거부한 것을 보면 자신은 연산군 재위 기간 무서워 아무 말도 못하고 목숨을 부지하는 것에 급급했는데, 김처선과 김순손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연산군에게 직언을 하다 죽은 것에 열등의식을 가져 그들에 대한 자세한 행적 조사와 그에 따른 포상을 거부했을 가능성도 상상해볼 순 있다. 중종이 실제 재위 기간 어떤 면에선 대인배스럽다가도 어떤 면에선 상반된 찌질한 소인배의 모습도 모두 보여줘서 일견 그럴듯하다.
일각에서는 환관을 공신으로 추증하였다가 향후 환관들의 권력이 세질 것을 염려한 중종이 어쩔 수 없이 안한거라는 주장도 한다. 실제로 인종 사후 명종이 즉위하여 수렴한 성렬대비(문정왕후)를 등에 업고 권력을 휘두른 박한종이라는 환관이 나타났음을 생각해보면 일리는 있는 주장이다.
이렇게 여러 말들이 있지만, 어찌됐든 김처선은 당대부터 "자신의 목숨을 아끼지 않고 향락에 빠진 연산군에게 직언을 하다 죽은 충신"이라는 식의 인식이 퍼져 있어서, 중종반정 직후부터 그의 재평가가 이뤄졌으며 약 240년 뒤 영조 시절 이르러선 그의 고향에 그의 공적들을 기리는 정문(旌門)까지 세워진다.
3. 대중매체에서
- 1995년 KBS 드라마 <장녹수>에서는 배우 이낙훈이 연기했다. 특히 최후는 야사의 기록을 반영해 화살을 여러 발 맞으면서도 연산군에게 끝까지 목숨을 바쳐 직언하는 모습으로 그려졌다.
- 1996년 SBS 드라마 <임꺽정>에서는 원로배우 장인한이[9] 연기했다. 이 드라마에서 김처선은 월산대군의 처 박씨와 강제로 동침한 연산군을 보고 그의 악행을 하나하나 열거하고 하늘이 두렵지 않냐며 직언하다 가슴에 화살을 맞는다. 칼을 빼든 연산군이 "남자 구실 못하는 놈이 입만 살았다"며 분노하자 "소인 남자 구실 못하는거 생각 말고 임금 구실이나 잘하라"고 맞받아치다가 칼에 맞아 최후를 맞는다. 참고로 이 드라마도 유동윤 작가가 썼는데 김처선의 나이 고증이 제대로 되었다는 것이 아이러니. 아무래도 공동집필한 작가인 김원석 작가의 시나리오였던 것으로 보인다.
- 1998년 KBS 드라마 <왕과 비>에서는 배우 김성환[10]이 연기했다. 후배 내시 김자원에게 자기 물건들을 물려준 다음 연산군에게 직언한다. 직언에 격분한 연산군은 그래도 어린 자신을 업어 키운만큼 정이 든 사이라 쫓아내는 것으로 처리하려 했지만 끝까지 충언을 하자 결국 격분하여 그를 처형하도록 명한다. 최후는 야사대로 화살을 맞는 것으로 묘사.
- 2005년 개봉한 영화 <왕의 남자>에서는 배우 장항선이 연기했다. 연산군을 진정으로 아껴주는 몇 되지 않는 충실한 심복으로 묘사된다. 연산군 역시 처선의 잔소리에 진저리를 치기는 하지만 처선을 믿고 아낀다. 후반부 처선도 없는데 연산군이 비몽사몽하며 한 말도 "처선아! 연회를 열자꾸나"였다. 군신 관계보다는 잔소리꾼 삼촌과 막장 조카 정도. 주연 광대인 장생과 공길 일당을 궁중에 스카웃한 장본인이기도 한데, 원랜 간악한 중신들을 걷어내고 연산군이 세상을 제대로 바라보게 하기 위한 속셈이 있었으나 현실은 되려 연산군의 광기만을 돋우는 결과를 낳게 된다. 이후 연산군에게 진심 어린 직언을 했으나 분노를 사서 쫓겨나고, 연산군에 찍혀 다음 날 목이 날아갈 처지에 놓인 장생을 감옥에서 풀어주면서 놀이판은 끝났다며 공길은 버리라고 한다. 후반부에 반정 세력들이 그를 포섭하기 위해 접근을 시도했으나 거절했고, 반정이 일어나기 직전 스스로 목을 매어 자결한다. 참고로 실제 역사와 달리 연산군에게 직언을 하다 활을 맞아 죽는 역할은 영의정 성준과 좌의정 이극균의 역할로 넘어갔다.
- 2007년 SBS 드라마 <왕과 나>에서는 배우 오만석이 연기했다. 주인공으로 등장했으나 각색이 심하게 되어 실제와는 많이 다른 모습으로 그려진다. 성종 즉위 이후부터 내관을 지낸 것으로 묘사되며 실제로는 딸뻘인 폐비 윤씨와 비슷한 나이로 설정되어 그녀를 평생 동안 사모하는 인물로 묘사되었다. 폐비 윤씨의 자식인 연산군을 어려서부터 돌봐준 인물로 중종반정으로 귀양간 연산군이 어린 시절 김처선과의 추억을 회상하며 후회하는 장면으로 막을 내린다.
- 네이버 웹소설 <전하와 나>의 주인공 이의윤의 모티브다. 본명은 서현우로 할머니 수술비를 마련하기 위해 별궁을 털려다 체포되었으나 황태자였던 이의윤의 도움으로 석방된다. 이 일로 이의윤이 황제의 눈 밖에 나서 죽음을 당할 뻔하자 그에게 평생 충성을 맹세하겠다는 의미로 충신의 대명사 김처선으로 개명한다. 이의윤의 동생인 선혜공주와 이어져 처남과 매부 사이가 되었고 이의윤이 황제가 된 후에는 부마 겸 비서로 일하고 있다.
- 대체역사소설 <명군이 되어보세!>에서는 주인공 연산군[11]이 주색잡기는 즐기지 않지만 무기 개발에 힘을 쏟고 왜와 여진족과 전쟁을 거듭하며 패도를 걷자 전쟁광스러운 행보에 대해 직언을 한다. 연산군이 김처선의 말을 무시로 일관하자 임금에게 전쟁터에서 매일 함께 하던 사람이 갑자기 사라진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알려주기 위해 사냥터에서 짐승인 척 하고 수풀에 숨어있다가 연산군이 쏜 총에 맞아 죽는다. 이 사건이 연산군에게 영향을 주어 방어전으로 돌아서는 계기가 되지만 신하들에게는 직언에 분노한 임금이 직접 총으로 쏴 죽였다는 소문이 퍼진다.
[1] 1914년 전의현이 연기군으로 편입되어 전의면이 되었고 2012년 연기군 일대가 세종특별자치시라는 신설 광역자치단체에 흡수되면서 세종특별자치시 전의면이 되었다.[2] 현재는 평균보다 조금 더 긴 수준이지만 당대 기준으론 굉장히 장수한 나이다. 세종 때 태어나서 연산군 때 죽었으니 7명의 임금 시절을 살았고 7명의 임금을 모셨으니... 거기다 연산군에 살해당하지 않고 1년만 더 버텼다면 중종반정으로 중종 때까지 살았을 가능성도 있다. 달리 말하면 연산군은 자기 할아버지뻘 되는 사람을 무참히 죽였다는 소리.[3] 김처선이 살해된 이후 전의 김씨 대부분이 자취를 감췄다.[4] 어린 환관.[5] 다만 그 다음 날 세조가 더 큰 죄를 지은 환관 최호, 김중호를 때려 죽이면서 김처선 등은 용서해 주었다.[6] 김처선이 후에 연산군에게 직언을 하다가 죽은 것을 감안할때 세조의 왕위 찬탈과 학살에 대해 좋지 않은 생각을 가지고 세조를 부정적으로 보아서 그런 행동들을 한 것 같다는 추론이 가능할 것이다.[7] 출처: https://db.itkc.or.kr/dir/item?itemId=BT[8] 《중종 실록》 권17 7년 12월 4일 갑진 2번째 기사.#[9] 일제강점기 말기 연극 데뷔를 한 이래 1960년대까지 연극 활동을 주연으로 주로 하다가, 1960년 정창화 감독의 '햇빛 쏟아지는 벌판'으로 스크린에 데뷔한 뒤부터는 주로 비중이 낮은 조연과 단역으로 활동했다. 2007년 타계했다.[10] 다음 작품인 명성황후에서는 악역인 민겸호 역을 연기한다.[11] 이 소설의 연산군은 21세기 현대 시대에서 온 주인공이 빙의하여, 폭군은 커녕 명군이 된 상태였다. 그래서 승하한 후에 무종(武宗)이라는 그럴싸한 묘호까지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