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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3-28 18:30:51

김처선

金處善
1421년(세종 3) ~ 1505년(연산군 10)

1. 소개2. 생애3. 대중매체에서

1. 소개



조선시대의 유명한 환관.

세종대왕부터 연산군까지 일곱 왕을 섬겼으며 최고위 내시인 판내시부사 겸 상선을 역임한 인물. 충청도 전의현(현 세종특별자치시 전의면)[1] 사람이다.

2. 생애

세종 시절 내시가 되었으며 이후 문종경상도 영해로 유배되었다가 1453년(단종 1년) 귀양이 풀리고 1454년 직첩이 되돌려졌으나 1455년 금성대군의 옥사에 연루되어 삭탈 관직당하고 유배되어 본향의 관노가 되는 등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다. 1457년(세조 3년)에 다시 복직되어 1460년 원종공신(原從功臣) 3등에 추록되었으나 이후 세조로부터 시종이 근실하지 못하다는 이유로 미움을 받아 자주 곤장을 맞았다. 그러나 이후 성종 때에 이르러서는 의술에 능하여 대비를 치료한 일로 다시 인생 역전하여 자헌대부에 올라갔다.

연산군이 즉위한 이후에는 연산군의 시종이 되었다. 1505년 연산군이 음란한 인 처용희를 추며 방탕하게 놀고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갑자기 김처선이 술을 먹고 몹시 취해 왕에게 "이 늙은 신(臣)이 4분의 임금을 섬겨왔으나 고금을 돌이켜도 이토록 음란한 왕도 없었사옵니다."라고 간언하였다고 한다. 김처선이 내뱉은 이 말에 노한 연산군은 직접 김처선에게 을 쏘아 쓰러뜨린 다음 다리를 잘랐다. 아래는 연산군이 그의 다리를 벤 후의 상황.
연산군 : 어명이다! 일어나서 걸으란 말이다!
김처선 : 전하께서는 다리가 부러져도 걸으실 수 있겠습니까?
이는 신하들을 밥먹듯이 죽여대는 연산군에게 "신하의 팔다리와도 같은데 그런 신하들을 함부로 죽이면 왕이 제대로 된 정치를 할 수 있겠는가?"라는 의미로 말했다고 볼 수 있다.

근데 김처선이 연산군에게 한 직언은 실록에는 언급되지 않았고 모두 야사에 나온 것으로 보인다. 실록에서는 김처선이 술먹고 어떠한 직언을 했는지 일절 언급되지 않았고 단지 그냥 술을 먹고 왕을 꾸짖었다고 기록돼 있다. 이렇듯 사실 세간에 알려진 김처선의 간언 내용과 최후는 대부분 야사에 의존한 것이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연산군이 죽였다 정도로 살해 당일의 기록이 간략하다. 활에 맞아 죽었다는 것도 의문인데 중종 때 베어 죽었다는(주살) 구절이 나오고 한참 시간이 흘러 200년 뒤 영조가 김처선을 복권하면서 그제서야 활에 맞아 죽었다고 기록이 바뀐다.

연산군은 죽어가면서까지 자신에게 직언을 하였던 김처선을 극도로 혐오하였으며 때문에 김처선이 숨을 거둔 이후에도 밑도 끝도 없이 복수를 꾀하였다. 그의 시신을 범의 먹이로 주고 양아들인 이공신을 처형하고 7촌 관계의 친족들까지 벌을 주는가 하면 김처선의 이름에 들어갔던 '처(處)'자의 사용을 금지하는 바람에 그토록 좋아하던 처용무의 이름까지 풍두무(豊頭舞)로 이름을 바꿔버릴 정도였다. 김처선 부모의 까지 헐어버리고 집은 밀어버린 후에 터를 연못으로 만들었다. 또한 전국의 김처선이란 이름을 가진 사람들에게 개명을 명하는가 하면 권벌이라는 사람이 과거 시험에서 처(處)자를 썼다고 '합격을 취소하는 사례'(이 사람은 3년 뒤인 정묘년에 재수하여 붙었다고 한다.)도 있었으며 성몽정이 상소에 처(處)자를 써서 국문을 당하다가 천만다행히도 법 제정 이전에 썼다고 국문을 취소한 사례도 있었다. 심지어 그의 본관인 전의(全義)도 없애버렸다.

그가 세상을 떠난지 1년 후 중종반정이 일어나면서 다시 복권되기에 이르지만 중종은 그를 썩 좋게 보지 않았던 것 같다. "김처선은 술처먹고 주정부리다가 죽은 건데 무슨 놈의 공신?"이라고 반문했다는 기록이 있어서인지 중종은 김처선의 행적을 기리고자 하는 사림들의 상소를 모두 무시한다.[2] 중종은 연산군처럼 막 나가지는 않았지만 그 역시 왕자에서 임금이 된 만큼 왕실의 권위를 추구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아무래도 중종의 생각으로는 연산군이 아무리 폭군이라 해도 일개 내시가 감히 왕에게 폭언을 퍼부은 것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여겼던 듯하다. 일각에서는 환관을 공신으로 추증하였다가 향후 환관들의 권력이 세질 것을 염려한 중종이 어쩔 수 없이 못하였다고 보기도 한다. 실제로 인종 사후 명종이 즉위하여 수렴한 성렬대비(문정왕후)를 등에 업고 권력을 휘두른 박한종이라는 환관이 나타났음을 생각해보면 일리있는 주장이다. 어쨌든 그의 최후는 진정한 왕의 남자로서 왕을 위해 목숨을 아끼지 않은 충신답다고 할 수 있기에 중종반정 직후부터 그의 재평가가 이루어졌으며 240년 뒤 영조에 이르러 그의 고향에 공적을 기리는 정문(旌門)이 세워졌다.

3. 대중매체에서



[1] 1914년 전의현이 연기군으로 편입되어 전의면이 되었다.[2] 《중종 실록》 권17 7년 12월 4일 갑진 2번째 기사. http://sillok.history.go.kr/id/kka_10712004_002[3] 이 소설의 연산군은 21세기 현대 시대에서 온 주인공이 빙의하여, 폭군은 커녕 명군이 된 상태였다. 그래서 승하한 후에 무종(武宗)이라는 그럴싸한 묘호까지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