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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lbgcolor=#2e8b57><colcolor=#ece5b6> 남송의 선무사 악충무왕(岳忠武王) 악비 | 岳飛 | |||
| 명 비황족 추존 황제 악성제군 | 岳聖帝君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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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생 | 1103년 3월 24일 | ||
| 북송 상주 탕음현[1] (現 허난성 안양시(安阳市) 탕음현) | |||
| 사망 | 1142년 1월 27일 (향년 38세) | ||
| 남송 임안부 (現 항저우) | |||
| 능묘 | 악왕묘(鄂王墓) |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colbgcolor=#2e8b57><colcolor=#ece5b6> 성씨 | 악(岳) | |
| 휘 | 비(飛) | ||
| 부친 | 수국공(隋國公) 악화(岳和) | ||
| 모친 | 주국부인(周國夫人) 요씨(姚氏) | ||
| 능묘 | 악비묘(岳飛墓) | ||
| 형제자매 | 동생 악번(岳翻) | ||
| 배우자 | 불명 | ||
| 자녀 | 5남 | ||
| 신장 | 170cm[2] | ||
| 자 | 붕거(鵬挙) | ||
| 작호 | 진왕(晉王) | ||
| 묘호 | 없음 | ||
| 관직 | 선무사(宣撫使) | ||
| 작호 | 악왕(鄂王)[3] | ||
| 시호 | 악무목왕(岳武穆王) | ||
| 악충무왕(岳忠武王) | |||
| 삼계정마대제 (三界靖魔大帝) | |||
| 충효묘법천존악성제군 (忠孝妙法天尊岳聖帝君) | }}}}}}}}} | ||
1. 개요
怒髮衝冠憑欄處 瀟瀟雨歇
성난 머리칼은 관을 뚫을 지경인데, 난간에 기대어 바라보니 쓸쓸히 내리던 비가 그치네.
抬望眼仰天長嘯 壯懷激烈
눈을 들어 하늘을 바라보며 크게 소리 지르니, 장사의 감회가 끓어오른다.
三十功名塵與土 八千里路雲和月
삼십년의 공명이 한낯 먼지에 불과하고, 팔천리 내달렸던 길도 그저 구름과 달빛처럼 흔적없구나.
莫等閒 白了少年頭 空悲切
더이상 기다릴 수 없다. 젊었던 머리칼은 어느새 희어졌으니 비감한 마음만 애절할 뿐.
靖康恥猶未雪 臣子恨何時滅
정강의 치욕은 아직 설욕하지 못했으니 신하로서의 한을 어느 때나 풀 수 있을 것인가.
駕長車 踏破賀蘭山缺
전차를 몰아 하란산[4]을 짓밟아 무너뜨리리라.
壯志饑餐胡虜肉 笑談渴飮匈奴血
배 고프면 오랑캐의 살로 배를 채우며, 목 마르면 흉노의 피를 마시리라.
待從頭 收拾舊山河 朝天闕
옛 산하를 다시 되찾은 후에야 천자를 만나 뵈러 가리라.
만강홍(滿江紅)
중국 북송 말기 ~ 남송 초기의 무장으로, 금나라에 대항해 싸웠던 남송의 명장이자 서예가이며 명나라 시기에 제군으로 추존되기도 했다.성난 머리칼은 관을 뚫을 지경인데, 난간에 기대어 바라보니 쓸쓸히 내리던 비가 그치네.
抬望眼仰天長嘯 壯懷激烈
눈을 들어 하늘을 바라보며 크게 소리 지르니, 장사의 감회가 끓어오른다.
三十功名塵與土 八千里路雲和月
삼십년의 공명이 한낯 먼지에 불과하고, 팔천리 내달렸던 길도 그저 구름과 달빛처럼 흔적없구나.
莫等閒 白了少年頭 空悲切
더이상 기다릴 수 없다. 젊었던 머리칼은 어느새 희어졌으니 비감한 마음만 애절할 뿐.
靖康恥猶未雪 臣子恨何時滅
정강의 치욕은 아직 설욕하지 못했으니 신하로서의 한을 어느 때나 풀 수 있을 것인가.
駕長車 踏破賀蘭山缺
전차를 몰아 하란산[4]을 짓밟아 무너뜨리리라.
壯志饑餐胡虜肉 笑談渴飮匈奴血
배 고프면 오랑캐의 살로 배를 채우며, 목 마르면 흉노의 피를 마시리라.
待從頭 收拾舊山河 朝天闕
옛 산하를 다시 되찾은 후에야 천자를 만나 뵈러 가리라.
만강홍(滿江紅)
자는 붕거(鵬擧). 시호는 충무(忠武).[5] 남송의 영종이 1204년에 악왕(鄂王)에 봉했기 때문에 흔히 악왕이라고도 부른다. 중국[6]의 대중들 사이에서는 민족 영웅이자, 명장으로 칭송받는 인물이며, 한국에서 이순신을 대하는 것과 같은 수준이다.[7] 국가를 지키려다가 마지막에 간신의 억울한 모함으로 죽었기 때문에 명나라의 명장인 원숭환과도 이미지가 겹치는 편이다.
명나라 만력제 시기 제호(帝號)인 삼계정마대제(三界靖魔大帝)[8]로 추존되었고, 곧 천존(天尊) 악성제군(岳聖帝君)의 신호가 추시되어 황제와 군신(軍神)을 겸하는 신황(神皇)의 반열에 등극했다.
다만, 현대에 들어와서는 중국 정부에서 다문화주의를 강조하여 역사 교과서에서 구국의 영웅이라는 평가를 지양하고 있으며 이와 별개로 불분명한 기록과 과장된 전공 때문에 학계에서도 비판을 받고 있다. 이런 것은 김덕령과 비슷하다.
지금까지도 중국인들의 사랑을 받는 시 「만강홍(滿江紅)」의 창작자이나, 만강홍은 진위 여부에 대한 논쟁이 심하며, 명대의 위작이라는 주장이 정설로 여겨질 정도이다. 따라서 악비가 만강홍을 지었는지는 불분명하며 되도록이면, 만강홍과 악비를 연결짓지 않는 것이 불필요한 시비나 갈등을 피하는 방법일 것이다.
2. 생애
1103년 하북서로(河北西路) 상주(相州) 탕음현(湯阴縣)[9]의 가난한 농민 가정에서 태어났다. 송사 <악비전>에 따르면 그가 태어날 때 고니처럼 큰 새가 지붕 위에 앉아서 이름이 비(飛)가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의 자도 비슷한 의미인 붕거(鵬擧)라고 지었다. 한편 악비가 태어난 직후 황하가 범람해 고향 마을이 박살났고, 그 과정에서 부친인 악화(岳和)가 홍수에 휘말려 익사하여 어머니 요씨와 함께 하북으로 이주했다.[10] 또 전술한 황하가 범람했을 때 그의 어머니가 악비를 안은 채로 커다란 바구니를 타고 홍수에서 살아남았다는 야사가 있다.악비는 어려서부터 용맹하며 기골이 장대하고 용력이 뛰어났다. 무술 스승 진광(陳廣)[11]에게 창술과 검술을, 주동(周同)[12]이라는 명궁에게 궁술을 배워 300척 밖까지 화살을 쏘고, 쇠뇌를 8석까지 감당할 정도로 뛰어난 활 솜씨를 갖추었다. 또한 학문 공부 역시 게을리하지 않아 손자, 오자 등을 밤낮으로 탐독했으며 역사서를 많이 읽었다고 전해진다.
1122년, 의용병으로 입대하여 개봉을 수비했으며 동경 유수(東京 留守) 종택(宗澤)의 눈에 들어 승진을 거듭했다. 1126년에 하남을 침공한 금군에 맞서 싸우다가 후퇴했으며 개봉이 함락당하자, 종택의 후임자였던 두충(杜充)과 함께 남하했다.
악비가 이끄는 군대는 반드시 승리하며 백성들에게 민폐를 끼치지 않아 악비가 지나는 마을의 백성들은 앞다투어 술과 고기를 바쳤으며, 악비군은 '악가군(岳家軍)'이라고 불렀다. 악가군이 얼마나 강했는지 금나라 병사들은 '태산을 흔드는 건 쉽지만 악비의 군사를 흔드는 건 어렵다.'라고 할 정도였다고 한다. 악비는 한세충, 장준, 유광세(劉光世) 등의 군벌들과 합세하여 금군의 공세에 맞서 싸웠으며 구릉 지대가 많은 강남의 이점을 살려 금의 철기군을 효과적으로 격퇴하였다.
악비는 정원장군(靖遠將軍), 1134년 청원군 절도사(淸遠軍節度使)를 거쳐 1136년 선무부사(宣撫副使), 1137년에는 선무사(宣撫使)로 임명되었으며 하남의 일부 지역을 수복하고 양양(襄陽)의 방위를 책임졌다. 이후 중원 수복을 위해 악주에 군대를 주둔시킨다.[13]
악비는 시종일관 북벌을 주장했고, 이 때문에 주화론자들인 왕백언, 황잠선, 진회 등과 매우 심한 갈등을 빚었다. 진회는 매번 승전을 거듭하는 악비를 극도로 경계하였으며 악비를 비롯한 주전파 군벌들은 주화파 관료들과 지속적으로 충돌한다.
기록에 따르면 악비는 4번에 걸쳐서 북벌을 했다. 마지막 4번째 북벌 시기의 악비는 악가군을 이끌고 금나라 군대를 여러 번 쳐부수고 낙양과 정주 등을 회복했으며, 북송의 수도였던 개봉에서 불과 40여 리 떨어진 주선진까지 점령했다. 이때 금나라 대장 올출은 여러 번 패전하자 개봉을 버리고 퇴각하려고 했으나, 한 문관의 만류로 개봉을 끝까지 수비한다. 그 문관은 올출의 말고삐를 잡으며 "예로부터 간신이 조정에서 전횡하면 외지에서 아무리 능력 있는 장군도 공을 세우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곧 송나라 내부에 변란이 일어날 것입니다."라고 했는데 올출은 문관의 말을 들었다.[14]
악비는 원래 술을 좋아했지만, 전시에는 이를 금했다. 그런 악비는 금나라 수도 근처의 황룡부까지 진격하면 병사들에게 거나하게 먹자고 약속하고 다음 싸움에 임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악비는 금 왕조와의 충돌을 피하려 하는 주화파 재상 진회와 더 큰 마찰을 빚게 되었다. 진회는 1141년, 군제 개편을 명목으로 기습적으로 당시 군벌들의 지휘권을 모두 박탈하고 모든 병사들을 중앙군 휘하로 전속시킨다.
남송의 황제 고종의 마음도 진회 쪽에 더 기울어져 있던 터라 그를 12번이나 불러 소환시키고[15], 악비는 양자인 악운, 악가군 간부였던 장헌과 함께 투옥되었다. 악비는 결국 39세의 젊은 나이로 감옥에서 처형당했다. 죽기 전에 유언으로 "나의 결백한 마음은 하늘의 태양처럼 밝을 것이다."라 하였다. 그가 어떻게 죽었는지는 명확히 알려진 바 없는데, 일설에는 교수형에 처해졌다고 하지만, 대체로 사약을 받아 사사당했을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이때 악비의 전우이자 또 다른 주전파인 한세충이 "악비의 죄상이 무엇입니까?"라며 따지자, 진회는 "아마 있을지도 모르오"(막수유, 莫須有)라는 궁색한 대답을 했고, 이에 기가 막힌 한세충은 "고작 그 세 글자로 천하가 납득하겠소이까?!"라며 일갈했다.
악비를 죽인 일 때문에 진회는 민심을 잃었다. 그래서 지금도 진회를 비난하는 속담이 있을 정도로 진회는 중국인들이 가장 미워하는 사람 중 하나다. 또한 당대에도 진회의 평은 좋지 않았다. 진회는 재상들을 이간질해 권력을 잡고, 전횡을 일삼았으며 반대파들을 무자비하게 탄압해 진회에 대한 세간의 비판이 극심했다. 진회를 이용해 군벌들을 쳐내고, 악비 숙청에 대한 오명을 진회에게 뒤집어 씌운 황제조차 진회의 권력을 부담스러워 한다는 평이 나올 정도로 진회의 권력은 막강했다.
진회가 죽자, 그를 따르던 도당들은 효종(孝宗) 대에 숙청당하거나 좌천당했고, 진회의 일족은 무사했다. 효종이 진회의 일족을 몰살했다는 이야기는 역사 왜곡이며, 진회의 가문은 영종대에 진회의 왕작을 추탈당하고 충헌이란 시호를 유추라는 나쁜 뜻을 지닌 시호로 격하당한 것, 주전파들의 견제를 받아 좌천당한 것 외에는 딱히 큰 억압을 당하지 않았다.[16]
진회가 권세를 누리던 시절과 비교하면 가세가 많이 기울긴 했지만, 과거 시험을 치지 못한다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진회의 손자인 진훈(秦壎)은 예부 · 공부 상서를 지냈고, 진훈의 아들로 진회의 증손자인 진 거(秦鉅)는 영종(寧宗)대에 치주(蘄州) 통판(通判)으로 금군의 침공에 대비하여 성곽을 수축하고 병력을 조련하는 한편, 선정을 펼쳐 백성들의 존경을 샀다.
금의 대군이 치주를 침공하자, 진 거는 이에 맞서 1달 이상을 버텼으며 성문이 뚫린 뒤에도 성안 시가지에서 계속 저항했다. 그러다 도저히 막을 수가 없다는 사실을 깨닫자, 진 거는 관고(官庫)에 불을 지르고 불길 속으로 뛰어 들었다. 문무를 겸했음에도 간신의 자손으로 손가락질 당하며 자기 능력을 다 펴지 못했고, 조정의 관료들까지 색안경을 끼고 바라보는 처지에 국가를 위해 자신을 희생한 것이다. 이 전투에서 진거의 차남 진준(秦浚), 삼남 진휘(秦瀈)도 부친과 함께 전사했다.
이처럼 진회는 죽어서 오명을 받고 그 자손들까지 손가락질당했으며 악왕묘에 동상이 세워져 부인과 함께 오물을 뒤집어 쓰고 있는 반면, 악비는 미천한 신분으로 백성들의 존경을 받아 죽어서는 최고의 시호와 왕으로 추존되는 영광을 누렸다.[17]
효종이 즉위한 뒤, 악비에 대한 신원이 이뤄졌다. 1178년, 송 효종은 무목(武穆)이란 시호를 내리고 구국의 영웅으로 대우했다.[18] 1204년, 영종은 왕으로 추존하여 항저우의 악왕묘(岳王廟)에 배향하고, 시호를 충무로 개정했다.[19]
3. 악비의 무덤
악비의 무덤은 항저우시 시후구에 있으며 중점문물보호단위로 지정되어 있다.#악비의 시체를 진회가 훼손할 것을 염려한 외순이라는 옥지기가 시신을 자신의 집에 있는 나무 밑에 묻었고, 자신이 죽을 무렵 아들에게 그 사실을 알렸다. 후에 악비의 억울한 누명이 벗겨져, 효종 때 악비의 묘는 크게 지어졌고 1204년 과거 고종 때 있던 일을 재평가하여 악비를 악왕(鄂王)으로 추봉하고 커다란 동상도 만들어지게 되어 무덤은 악왕묘(鄂王墓)란 이름이 붙게 되었다. 그리고 매국노 진회는 물론 그 부인 왕씨, 묵기설,[20] 장준[21]과 함께 무릎 꿇고 있는 동상이 만들어져 악비 동상 앞에 놓이게 된다.
참고로 아내의 동상까지 만들어진 것은, 진회가 악비를 죽일 죄명을 찾지 못해서 고민할 때, 아내의 조언으로 처형을 결심하게 되었는 이야기가 전해지기 때문이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하도 부부에게 침을 많이 뱉어서 지금 악왕묘를 가보면 동상에 침을 뱉지 말라는 팻말이 걸려 있다. 근데 사람들이 아직도 싫어하는지 침이나 쓰레기 투척은 예사고 오물 투척도 툭하면 일어난다고 한다. 사실 침을 뱉지 않는 목적을 정말로 달성하고자 한다면 동상을 아예 치워버리면 되는데, 그러지는 않고 팻말을 걸어놓는 선에서 방치하고 있는 것은, 공산당 당국에서 어느 정도는 용인하고 있는 거라고 볼 수 있다.[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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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침을 뱉지 마시오 진회와 그 일당의 동상 |
초기에는 이러한 사태로 오물이 넘치자 현장에서 관리할 수 있는 공안들을 배치했다. 그런데, 정작 그 공안들이 더 적극적으로 오물을 투척하거나 심지어 경비용으로 준 총으로 내려치는 등의 문제가 있어 현재는 상시로 공안을 배치하지 않고 있으며 적발되더라도 공안이 오물 투척을 한 사람을 폭력을 안 쓰고 팔짱 끼고 끌고 가는 수준에서 그친다고 한다.[23] 하지만 악왕묘 역시 문화대혁명의 마수는 피해가지 못해서, 홍위병들이 악비의 묘를 파헤치고 유골을 불로 태워 재로 만들어버리는 만행을 저지르기도 했다고 한다.[24]
4. 재평가
4.1. 정치적 재평가
악비는 몽골족이 중원을 지배하던 원나라 시절에는 잊혔으나, 명대부터 악비에 대한 숭배가 크게 심화되었다. 홍무제는 원 왕조를 몽골 초원으로 몰아낸 업적과 악비를 연관지어 악비를 신격화하는 것으로서 자신의 위업을 드높이려 했다.만력제 시기에는 삼계정마대제충효묘법천존악성제군(三界靖魔大帝忠孝廟法天尊岳聖帝君) 이라는 시호를 붙여주었다.
명대까지 호국 영웅으로 존경받은 악비의 위상은 악비와 대립했던 여진족의 후예인 만주족이 세운 청나라 시기에 쇠락했다. 자신들이 선조로 칭한 금 왕조에 맞서 낙양까지 진격한 신화적인 영웅을 숭배하는 것이 청 황실에게는 부담스러웠던 것. 그래서 청 왕조는 악비에 대한 숭배보다는 관우에 대한 숭배를 더욱 강화하는 조치를 내렸다.
다만, 백성들이 악비를 숭배하는 것을 잘 알고 있던 청의 황제들은 악비의 후손들에게 상과 관직을 내렸으며 강희제(康熙帝)와 건륭제(乾隆帝)는 남순 중에 항주 악왕묘를 참배하기까지 했다. 그래서 악비의 후손으로 여겨지는 이들은 청대에 별다른 탄압을 받지 않고 나름대로 권력과 영화를 누렸다.
강희 연간에 오삼계(吳三桂)의 난을 진압하는데 공을 세운 악승룡(岳昇龍)은 천진 총병(天津 總兵)에 사천 제독(四川 總督)까지 지냈고, 그 아들인 악종기(岳鍾琪)는 연갱요(年羹堯)의 후임으로 천섬 총독(川陝 總督)에 영원 대장군(寧遠 大將軍)을 역임했다. 그러나, 악종기는 한인 주제에 군권을 쥐고 있다는 이유로 만주인들의 견제를 받았고, 준가르 전쟁에서 실책을 범한 것을 빌미로 탄핵당하고 삭탈관직되었다. 이후, 악종기는 건륭 연간에 사천 총독으로 복귀했다.
중국이 수립된 뒤에는 악비에 대한 정부의 인식과 처우는 이전과는 다른 형태로 변화했다. 중국 정부는 정치적으로 통일적 다민족국가론이라는 개념을 만들어냈고, 한족 중심주의를 상징하는 악비는 정부의 방침과 잘 맞지 않아서 정부 차원의 기념 사업은 대폭 축소되었다.
문화대혁명 시기에는 여러 왕조의 영웅들과 마찬가지로 전국에 있던 사당이나 목상이 홍위병에게 박살났다.[25] 항저우시에 있던 악왕묘도 홍위병에게 훼손당했다. 이때 파괴된 악왕묘는 문화대혁명이 끝난 직후인 1979년에 서둘러 복원되었다.
당시 홍위병들은 민족주의나 팽창주의를 봉건주의의 잔재로 보고 맹비난했기 때문이다. 또한 악비는 여러 차례 농민 반란 진압에 참여했기 때문에 민중 사관을 표방하고 모든 농민 봉기를 기의(起義)로 서술하는 중국 정부의 성향에도 다소 맞지 않는 부분이 있었다.[26]
중국 공산당이 악비를 폄훼하기 위해 악비와 대립했던 진회를 높이 평가한다는 이야기도 있으나, 이는 전혀 근거 없는 주장이다. 대중적으로는 여전히 진회를 한간으로 치부하고 있으며, 학계에서 그간 맹목적으로 비난받아 오던 주화파와 고종에 대한 재평가가 이뤄지고 있는 있는 것을 왜곡한 것이다.[27][28][29]
이렇게 청대부터 악비 숭배는 축소되기 시작했으며, 다민족 국가를 표방하는 중국 정부가 소수 민족의 정서를 고려하기 시작하면서 악비에 대한 찬양은 상당히 사그라들었다. 이를테면 교과서에서 '한족의 영웅' 이라 표현을, '중국의 영웅' 등으로 소수 민족들을 고려한 표현으로 바꾸는 식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 초등학교의 어문 교재에는 악비의 행적이 실리고 있으며, 이는 악비가 체제를 뛰어넘어 중국인들의 존경을 받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말하자면 김유신이나 계백이 서로 적으로 싸웠지만, 현대 대한민국에서는 지역을 불문하고 모두 존경을 받는 것과 마찬가지 사정이니 이것이 무슨 한족 패권주의나 국수주의의 발로는 아니다.
무협 소설로 이름난 김용도 아주 세심하게 공을 들여 찬사를 바친 인물이기도 하다. 사조 삼부곡은 모두 악비와 연관이 있으며, 그의 의지가 이어져 명나라 건국으로 이어지는 것으로 서술하고 있다.
4.2. 군사적 재평가
악비가 당대의 명장이었다는 사실 자체는 부정하기 어렵다. 악비는 금군의 공세를 여러 차례 격퇴하고 전선에서 상당한 전과를 거두면서 남송의 방어에 크게 기여했다. 사후 충무(忠武)라는 시호를 받고 왕으로 추봉되어 민간 신앙의 대상에까지 오른 것도 단순히 후손들이 작성한 행장이나 후대의 미화만으로 만들어진 명성이라고 보기는 어렵다.다만 군사적 능력과 별개로 악비에게도 분명한 한계가 있었다. 당시 남송군은 장수 개인에게 병력이 강하게 종속되는 군벌적 성격을 띠고 있었는데, 악비의 악가군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악비는 조정의 명령이나 전체적인 전략보다 자신이 판단한 군사적 목표를 우선하는 모습을 여러 차례 보였으며, 이 과정에서 다른 방면군과의 협조나 조정의 전략과 충돌하기도 했다. 이러한 독자적인 군 운용은 경우에 따라서는 송군 전체의 작전 계획을 흔들 수 있는 위험요소이기도 했다.
여기에 악비가 억울하게 죽은 충신의 상징으로 자리 잡고 후대에 숭배되면서 그의 군공 역시 점차 확대되었다. 실제로 악비가 참여하지 않았거나 그가 단독으로 이룬 것이 아닌 전과까지 악비의 공적으로 돌려지거나, 다른 남송 장수들의 활약이 상대적으로 축소되는 경우도 나타났다. 특히 악비가 거의 혼자서 금나라를 멸망 직전까지 몰아붙였으나 조정의 명령 때문에 북벌을 포기했다는 식의 후대 이미지는 실제 당시의 군사적 상황보다 크게 과장된 측면이 있다.
따라서 현대에는 악비를 단순히 완벽한 명장이자 간신에게 희생된 비운의 영웅으로만 바라보기보다, 뛰어난 야전 지휘관이었던 동시에 군대가 장수 개인에게 종속되던 남송 초기 군벌 체제의 한 축이었으며, 전략적·정치적으로도 적지 않은 문제를 안고 있던 인물로 평가하려는 시각이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재평가는 악비의 실제 군공을 부정하는 것이라기보다, 후대의 충신 숭배 과정에서 덧붙여진 과장과 신화를 걷어내고 그의 군사적 성과와 한계를 함께 살펴보려는 데 가깝다.
4.2.1. 악비 열전의 신빙성 문제
정치적 문제와 별개로, 학계에서는 오래전부터 악비의 전공에 대해서도 사료 비판을 통한 재검토가 이루어져 왔다. 오늘날 널리 알려진 악비의 전공 가운데 상당수는 악비의 후손들이 작성한 행장을 주요 근거로 한다. 정사인 《송사》의 〈악비전〉 역시 이러한 자료를 상당 부분 받아들였는데, 보병 수백 명으로 수만 명의 기병을 격파했다는 식의 비현실적으로 과장된 전과가 적지 않아 기록의 신빙성을 그대로 받아들이기는 어렵다는 지적이 제기된다.실제로 《송사》 〈고종본기〉와 《금사》(金史) 등 다른 사료에는 악비가 패배하거나 후퇴한 기록도 여러 차례 나타난다. 반면 〈악비전〉에 기록된 전공 가운데에는 다른 사료와 교차검증되지 않거나 동시대의 주요 사서에 아예 등장하지 않는 사례도 적지 않다. 대표적인 것이 악비의 최대 전공 가운데 하나로 꼽혀 온 주선진 전투이다. 남송 초기의 역사를 기록한 《건염이래계년요록》(建炎以來繫年要錄)[30]이나 송·금 전쟁의 주요 사료를 집대성한 《삼조북맹회편》(三朝北盟會編)[31]에는 이 전투 자체가 기록되어 있지 않다.
〈악비전〉의 전과를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이유도 여기에 있다. 기록만 놓고 보면 악비는 8천 명으로 조성의 10만 대군을 격파하고, 주선진에서는 불과 500명으로 완안올출이 이끄는 10만 대군을 물리친 인물이 된다. 또한 800명으로 왕선 등이 거느린 도적 50만 명을 남훈문에서 격파했다는 기록까지 등장한다. 일부 전투는 〈고종본기〉에서는 악비 측의 패배나 후퇴로 기록되어 있는데도 〈악비전〉에서는 승전으로 서술되는 등 정사 내부에서도 기록이 서로 엇갈린다. 따라서 이러한 숫자와 전과는 후대의 과장이나 전승이 상당 부분 섞였을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살펴볼 필요가 있다.
실제 악비가 패배를 전혀 경험하지 않은 상승장군이었던 것도 아니다. 마가도(馬家渡)에서 금군과 교전한 뒤 종산으로 물러난 사례를 비롯해 반군 토벌 과정에서 패배한 적도 있었으며, 상관인 왕언(王彦)이나 장준(張浚)의 지시를 따르지 않고 독자적으로 출전했다가 패전한 사례도 전한다. 반대로 금나라 측의 기록에서는 악비가 오히려 대군을 이끌고도 금군에 패배한 것으로 묘사되기도 한다. 《금사》 〈완안앙전〉에는 완안앙(完顔昂)이 8천 명으로 악비의 10만 대군을 격파하고, 다시 1천 명의 병력으로 악비의 대군에 맞서 성을 지켜냈다는 기록이 있다. 물론 이 역시 적국 장수의 전공을 강조하는 열전의 성격상 병력 수치까지 그대로 신뢰하기는 어렵지만, 적어도 악비가 후대의 전승처럼 거의 모든 전투에서 일방적인 승리를 거두었다고 보기는 어렵다는 점을 보여준다.
악비가 신격화되는 과정에서 다른 남송 장수들의 전공이 악비의 공적으로 흡수되거나 상대적으로 축소되었다는 지적도 있다. 대표적인 사례가 순창 전투다. 순창에서 금군의 대공세를 직접 막아낸 주역은 유기였으며, 서부 전선에서는 오개·오린 형제를 비롯한 관서·사천계 장수들이 금군을 견제하고 있었다. 악비 역시 구원군을 움직였지만 순창 전투 자체에 직접 참가한 것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후대의 악비 전승에서는 이러한 전투들이 악비의 북벌과 연결되면서 마치 그가 직접 지휘하여 거둔 전과인 것처럼 묘사되는 경우가 생겼다.
이러한 재평가가 진행되면서 남송 초기에 활약했음에도 악비의 압도적인 명성에 가려졌던 다른 장수와 관료들의 역할도 다시 주목받고 있다. 유기·유광세·장군 장준·문신 장준·종택[32]·충사도[33]·한세충 등이 대표적이다. 특히 한세충은 남송 건국기의 수많은 전투에서 장기간 활약했고 여러 사서에서 뛰어난 군공을 확인할 수 있는 인물임에도, 후대에는 악비의 상징성이 지나치게 커지면서 상대적으로 대중적 인지도가 낮아졌다. 이에 현대에는 악비만을 남송 초기의 독보적인 명장으로 보는 시각에서 벗어나 한세충을 비롯한 여러 장수들의 전공을 함께 평가하려는 경향이 강해지고 있다.
종택에 대한 평가 역시 마찬가지다. 과거에는 겁이 많은 고종과 황잠선·왕백언 등 주화파가 종택의 개봉 환도와 북벌론을 묵살함으로써 중원 회복의 기회를 놓쳤다는 설명이 널리 퍼졌다. 그러나 당시 금군은 이미 송군의 하남 방어선을 여러 차례 돌파해 남양 일대까지 진출했고, 개봉 역시 계속해서 직접적인 위협을 받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고종이 개봉으로 돌아갔다면 금군이 우회기동으로 퇴로를 차단해 정강의 변과 비슷한 사태가 재현될 위험도 있었다. 실제로 종택이 죽은 뒤 금군은 송군의 방어선을 무너뜨리고 고종을 양주에서 항주 방면까지 추격하면서 거의 사로잡을 뻔했다.[34]
따라서 개봉 환도를 둘러싼 갈등 역시 단순히 고종의 비겁함이나 종택의 선견지명만으로 설명하기보다는, 황제가 전선 가까이에 있어야 하남의 군심과 방어체계를 유지할 수 있다고 본 종택과 황제의 신병을 보전하면서 장강 이남에서 장기적인 방어체계를 구축해야 한다고 판단한 고종 사이의 전략적 인식 차이로 보는 편이 타당하다.
4.2.2. 부족한 처세술?
악비가 숙청당한 원인 가운데 하나로 부족한 처세술을 거론하는 주장도 있다. 대표적인 것이 이른바 건저의(建儲議)로, 악비가 고종에게 황태자 책봉을 건의했다가 황제의 노여움을 샀다는 이야기다. 악비로서는 국가의 후계 구도를 안정시키자는 취지였겠지만, 황제의 입장에서는 세력이 커진 무장이 황위 계승 문제에까지 개입하려는 것으로 받아들였고, 이를 계기로 고종이 악비를 경계하면서 주화론을 주장한 진회를 더욱 중용하게 되었다는 식의 설명이다.이러한 이야기는 과거부터 신문 사설이나 소설, 인터넷 커뮤니티 등을 통해 널리 퍼졌지만 실제 정황과는 맞지 않는다는 지적이 많다. 당시 황태자 책봉을 건의한 사람은 악비 한 명만이 아니었고, 누인량(婁寅亮)을 비롯한 문관과 장준 등 다른 무장들도 비슷한 건의를 올렸다. 따라서 악비의 황태자 책봉 건의 자체를 훗날 숙청의 직접적인 원인으로 연결하기는 어렵다. 무장이 황위 계승이라는 조정의 중대사에 의견을 제시한 것이 정치적으로 신중하지 못한 행동으로 받아들여질 수는 있어도, 그 자체가 특별히 황제의 역린을 건드린 행위였다고 보기는 어렵다.
악비의 처신과 관련해서는 그가 정치 사정에 어두운 나머지 재상 이강(李綱)을 잘못 비난했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이강은 금나라의 북송 침공 당시 문관의 신분으로 개봉 방어를 주도해 금군을 물리친 인물로, 남송 건국 이후에도 높은 명망을 유지하고 있었다. 고종 역시 이강의 강경한 대금 정책을 부담스러워하면서도 그의 명성과 민심을 고려해 재상으로 기용할 정도였다. 이런 인물을 황잠선·왕백언 등 주화파와 동일하게 취급하며 비난했다면 당시 정치 상황에서 상당한 실책이었다는 것이다.[35]
그러나 악비와 이강의 관계를 살펴보면 이러한 설명 역시 과장된 측면이 있다. 두 사람이 초기에는 서로에 대한 오해로 관계가 좋지 않았던 것은 사실이지만 이후에는 이를 풀고 협력했다. 악비는 1132년 이강의 지휘 아래 호광 일대의 반군 토벌에 참여했으며, 1136년에는 이강이 양양 방면에서 금군과 싸우던 악비에게 군량과 군수물자를 적극적으로 지원하기도 했다. 따라서 악비가 정치적 무지 때문에 이강을 주화파로 오인해 끝까지 적대했다는 설명은 실제 양자의 관계와 맞지 않으며, 초기에 있었던 불화가 후대에 확대되어 전해진 것으로 보는 편이 자연스럽다.
악비가 실제로 강하게 비난했던 대상은 왕백언(汪伯彥)과 황잠선 등 당시 대표적인 주화파 인사들이었다. 이들은 남송 건국 초기의 고위 관료이자 정계의 실력자들이었는데, 악비는 금나라에 대한 소극적인 대응과 화의론을 공개적으로 비판했다. 결국 이러한 행동이 조정에 알려지면서 악비는 한때 관직에서 물러나야 했다. 이런 사례를 보면 악비가 정치적으로 항상 신중한 인물이었다고 하기는 어렵지만, 후대에 알려진 것처럼 황태자 책봉 문제나 이강과의 불화 때문에 스스로 고종의 분노를 자초해 숙청당했다는 식으로 단순화하는 것 역시 실제 정황과는 거리가 있다.
4.2.3. 전략적 사고가 부족한 영웅?
악비가 뛰어난 장수이자 남송에 충성을 다한 인물이었다는 점은 부정하기 어렵다. 종택(宗澤)이 죽은 뒤 두충의 휘하에 있던 악비는 두충이 금나라에 항복하자 이를 따르지 않고, 뜻을 같이하는 병사들을 이끌고 송군으로 복귀했다. 이후에도 줄곧 남송 조정에 충성을 지켰다. 이는 송·금 전쟁 초기에 자신의 이해관계에 따라 양국을 오가던 일부 군벌이나 도적 세력과는 분명히 다른 모습이었다.군사적 공적도 상당했다. 금군의 공세로 양양 일대가 함락되면서 장강 중류 방어선까지 위협받자 악비는 양양을 비롯한 여러 지역을 수복하고 장강 이북으로 진출해 하남 방면까지 전선을 밀어 올렸다. 이러한 승리는 송군의 사기를 높이고 남송이 수세에서 벗어나 공세로 전환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특히 양양이라는 전략적 요충지를 되찾고 장강 이북에 작전 기반을 마련한 공을 인정받아, 악비는 불과 30대 초반에 남송의 주요 장수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양양 전선을 맡는 핵심 지휘관으로 성장했다.
다만 악비에게는 지나치게 공격적이고 독단적인 면이 있었다는 비판도 있다. 그는 상관이나 조정의 지시와 다른 판단을 내리고 독자적으로 병력을 움직인 적이 있었으며, 이 과정에서 패배하거나 전체 작전에 부담을 준 사례도 있었다. 전근대 군대에서 지휘관이 상급자의 명령을 무시한 채 임의로 부대를 움직이는 것은 전선 전체의 작전 계획을 흔들 수 있는 중대한 문제였다. 설령 결과적으로 승리를 거두더라도 이러한 행동이 반복되면 다른 방면군의 배치와 보급 계획까지 차질을 빚을 수밖에 없었다.
대표적인 사례로 건염(建炎) 4년인 1130년의 초주(楚州) 구원전이 거론된다. 당시 완안종필이 이끄는 금군이 남하하자 악비는 초주를 구원하기 위해 움직였으나 금군의 압박을 받아 어려움을 겪었다. 이 과정에서 악비의 독자적인 행동이 장강 방어선 전체에 부담을 주었다는 비판도 있다. 다만 당시 남송군의 지휘체계 자체가 아직 제대로 정비되지 않았고 각 군이 독립적으로 움직이는 경우도 많았던 만큼, 이를 모두 악비 개인의 독단성 때문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악비의 공격적인 성향을 둘러싼 논란은 1140년 북벌에서 가장 두드러진다. 순창 전투에서 유기가 금군을 격파하는 등 각지에서 송군이 잇달아 성과를 거두면서 남송은 한동안 전장의 주도권을 되찾았다. 악비 역시 하남으로 진격해 여러 지역을 수복하고 개봉과 가까운 곳까지 전선을 밀어 올렸다. 그러나 남송 조정은 송군이 지나치게 깊숙이 진격할 경우 보급로가 길어지고 금군의 기병이 역습할 가능성이 커진다고 우려했다. 특히 넓은 평야가 많은 하남은 보병 비중이 높은 송군이 기병 중심의 금군을 상대로 장기간 싸우기에 불리한 지역이었다.
결국 조정은 각 방면군에 철수를 명령했고 다른 장수들도 이에 따라 병력을 물렸다. 악비는 한동안 공세를 이어갔지만 조정에서 거듭 철군 명령이 내려오자 결국 회군했다. 이것이 후대에 이른바 금자패반사(金字牌班師)로 알려진 사건이다. 민간 전승에서는 고종과 진회가 하루에 열두 차례나 금자패를 보내 승승장구하던 악비를 강제로 불러들였고, 이 때문에 눈앞에 둔 개봉 수복과 북벌의 성공이 좌절되었다고 전한다. 그러나 실제 사료만으로는 금자패가 정확히 몇 차례 내려졌는지, 당시 악비군이 어느 정도까지 진격했는지 명확하게 확인하기 어렵다.
이 과정에서 벌어졌다는 주선진 전투 역시 마찬가지다. 후대의 전승에서는 악비가 소수의 병력으로 완안종필의 대군을 크게 격파하고 개봉 함락을 눈앞에 두었다고 묘사한다. 그러나 《건염이래계년요록》이나 《삼조북맹회편》 등 주요 사료에는 주선진 전투가 후대에 알려진 모습 그대로 기록되어 있지 않다. 따라서 악비가 금군 주력을 격파하고 개봉 수복을 눈앞에 둔 상황에서 황제의 명령으로 모든 것을 포기했다는 설명도, 반대로 조정의 명령을 무시하고 무모하게 진격하다가 대패해 가까스로 탈출했다는 설명도 그대로 사실로 단정하기 어렵다.
다만 남송 조정이 북벌 확대를 우려할 만한 현실적인 이유가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남송은 건국 초기부터 십수 년 동안 금나라와 전쟁을 이어갔고, 전란과 민란으로 인구·농업·재정 기반이 크게 흔들린 상태였다. 장강 이북에서 영토를 넓게 수복하더라도 이를 지키기 위해서는 주둔군과 군량, 말, 무기, 성곽 보수비 등을 계속 투입해야 했다. 전선을 하남 깊숙한 곳까지 밀어 올릴수록 이러한 부담은 더욱 커질 수밖에 없었다.
실제로 대표적인 주전론자였던 이강(李綱)조차 무조건 북진만을 주장한 것은 아니었다. 군을 재정비하고 방어선을 안정시킨 뒤 필요하다면 일시적으로 화의를 맺어 국력을 회복하고, 이후 다시 북벌을 준비해야 한다는 현실적인 방안을 제시하기도 했고 이때문에 후대에 주화파로 오인되기도 했다. 결국 남송에 중요한 것은 몇 개의 성을 빼앗는 것 자체가 아니라, 수복한 지역을 장기간 지켜낼 수 있느냐는 문제였다.
당시 국내 사정도 좋지 않았다. 북송 말에는 방랍의 난을 비롯한 대규모 민란이 일어났고, 남송 건국 이후에도 각지에서 반란과 도적이 끊이지 않았다. 전쟁으로 농업 생산과 세수가 줄어든 상황에서 대규모 군대를 계속 유지해야 했기 때문에 조정의 재정 부담도 막대했다. 중앙정부가 각 군에 필요한 군량과 급료를 충분히 지급하지 못하는 일도 잦았다.
그 결과 남송 초기의 여러 장수들은 군비를 자체적으로 마련하는 과정에서 민간에 큰 피해를 주기도 했다. 《송사》에는 장준의 군대가 이동하자 주민들이 산속으로 피신했다거나, 한세충의 군대가 지방에서 약탈하고 관리에게 돈과 군량을 강제로 거두었다는 비판이 기록되어 있다.[36] 한세충의 부하들이 황실 물품을 빼앗고 간관을 위협한 일을 비판하는 기록도 남아 있다.[37] 이는 남송 초기의 군사체제가 국가 재정만으로 유지되기 어려웠고, 그만큼 장수들에게 군사·경제적 권한이 크게 집중되어 있었음을 보여준다.
이런 상황에서 악비가 북벌을 확대하면서 병력과 군수물자를 더 지원해 달라고 요구한 것은 군사적으로 이해할 만한 일이었다. 그러나 조정 입장에서는 이미 여러 차례 보급 문제로 장강 이북 작전을 중단한 상황에서 다시 대규모 물자와 병력을 투입해야 한다는 부담이 컸다. 악비에게는 개봉을 수복하고 더 나아가 중원을 되찾을 기회로 보였겠지만, 조정에는 전선을 어디까지 넓히고 어느 지점에서 멈출 것인가라는 국가 전체의 문제가 걸려 있었다.
따라서 악비와 남송 조정의 갈등을 단순히 용감한 북벌파 악비와 겁 많은 주화파 조정의 대립으로만 보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악비의 승전이 남송의 존립과 전세 회복에 크게 기여한 것은 사실이지만, 전투에서 이긴다고 곧바로 전쟁에서 이기는 것은 아니다. 점령한 지역에 병력을 주둔시키고 보급로를 유지하면서 금군의 반격까지 막아내야 비로소 영토 수복의 성과를 지킬 수 있었다. 남송 조정이 우려한 것도 바로 이러한 장기적인 전선 유지 능력이었다.
그렇다고 이를 근거로 악비를 전술에는 뛰어났지만 전략적 안목은 부족한 장수나 원균과 다를 바 없는 지휘관으로 평가하는 것도 지나치다. 악비가 명령을 어기거나 공격적인 작전을 고집한 사례가 사료에서 확인되고, 조정이 그의 북벌 확대를 경계한 데에도 재정과 병참이라는 현실적인 이유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악비는 양양 수복을 비롯해 남송의 방어선을 안정시키고 여러 해 동안 대규모 야전군을 지휘한 장수이기도 했다. 단순히 전략적 판단력이 부족한 무모한 지휘관이었다면 이러한 중책을 오랫동안 맡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현대의 송사 연구에서도 악비를 흠결 없는 영웅으로 신격화하는 시각에서는 상당히 벗어나 있지만, 반대로 그를 무모한 군벌로 깎아내리는 견해가 일반적인 것도 아니다. 등광명(鄧廣銘)·왕증유(王曾瑜) 등 악비와 송대 군사사를 연구한 학자들은 후대의 소설·행장·민간 전승에서 덧붙여진 내용과 사료로 확인할 수 있는 실제 공적을 구분하면서도, 악비를 남송 초기의 중요한 야전 지휘관으로 평가했다.
특히 금자패반사와 주선진 전투는 사료가 제한적인 데다 후대의 영웅담이 크게 덧붙여진 사건이므로 어느 한쪽의 극단적인 해석을 그대로 받아들이기 어렵다. 악비가 승승장구하며 개봉 함락을 눈앞에 두었는데 고종과 진회가 아무 이유 없이 이를 막았다는 전통적인 설명도 지나치게 단순하지만, 반대로 악비가 황명을 거듭 무시하고 무모하게 진격하다 대군을 잃고 겨우 살아 돌아왔다는 주장 역시 확실한 사료에 근거한 통설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따라서 악비와 고종 사이의 갈등은 개인적인 용기와 비겁함의 대립이라기보다, 적극적인 공세로 전황을 뒤집으려 했던 전선 지휘관과 제한된 국력 안에서 전선을 유지하고 왕조의 존립을 지켜야 했던 중앙정부 사이의 전략적·정치적 충돌로 보는 편이 타당하다. 악비의 공격적인 성향은 남송에 여러 차례 중요한 승리를 안겨준 원동력이었지만, 동시에 조정에는 보급 부담과 전선 확대라는 위험요소로 받아들여졌다. 이 두 측면을 함께 살펴봐야 악비의 군사적 역량과 한계를 균형 있게 평가할 수 있다.
4.2.4. 통제 불능의 군벌
남송 초기의 군대는 유랑민과 도적, 자경단, 낙오병 등으로 구성되어 질적 수준이 나쁘고 군율이 제대로 세워지지 않았으며 조정에서 군비를 대어주지 못해서 약탈하는 일이 일상적이었다. 이는 명장으로 칭송받는 한세충, 장준(무관), 유광세, 악비 등도 예외가 아니었다. 악가군, 한가군 운운하며 높은 군기를 칭송하지만, 이는 소설 속의 일로서 현실 세계에서는 지방관들을 겁박해 관고의 물자를 빼앗고 민가를 약탈하고 있었다.조정에서 군비를 대어주지 못하고 통제가 어려우니 남송 초기의 군대는 거의 사병에 가까웠고 위에 언급한 남송의 '명장'들은 몇 만씩 되는 사병들을 거느리고 있는 격이었다. 민간 전승과 소설에서는 악가군, 한가군이란 명칭을 긍정적으로 사용하지만, 송 태조 시기에 이런 명칭이 붙은 부대가 있었다면, 즉각 사령관을 직위 해제하고 참수한 다음에 부대를 해체해서 여타 부대에 분산 배치했을 것이다. 황제의 군대가 O가군(家軍) 운운하는 사령관의 사병 집단이 된 셈인데, 진교역(陳橋驛) 병변으로 일어난 나라에서 이게 말이나 될 법한 일인가?
한세충, 유광세, 악비, 장준(무관), 유기 등 남송 장성들 간의 사이가 좋지 않았던 것도 문제였다. 한세충은 특히 유광세와 사이가 좋지 못해서 유광세의 병력을 빼앗거나 군량 창고에 불을 지른 적이 있으며 양자는 황제가 여러 차례에 걸쳐 화해를 요청했으나, 이를 따르지 않았다. 한세충이 장준에게 구원을 요청했다가 장준이 무시해서 한세충의 군대가 위험에 처한 적도 있었다. 장준은 또한 한때 부하였던 악비가 자신과 동급이 된 것이 불만이었고, 악비 또한 한때의 상관이었던 장준을 불편해하여 양자가 다툼을 벌이는 일도 있었다. 게다가 악비는 갈등을 빚던 의병장과 그 병력을 도륙하기도 했었다.
이 때문에 조정은 큰 곤란을 겪었다. 당대 송군의 방침은 조정의 통제하에서 각 군이 유기적으로 협력하면서 대규모 작전을 수행하는 것이었다. 광활한 전선을 유지하고, 가공할 기동력을 지닌 금군의 기마 군단에 맞서 싸우기 위해서는 이러한 방식이 적합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래서 조정은 금군이 침공을 해오거나, 공세로 전환할 때면 작전을 수립하여 천섬의 오개, 오린, 양양의 악비, 회수 일대의 유광세, 장준, 한세충 등의 사령관들에게 명령을 하달하고 각 군이 상호 협력하면서 금군과 맞서 싸우게 했다. 그러나, 각 군 사령관들의 불화와 지나친 독립성은 대규모 작전의 수행을 어렵게 했다.
이 문제에는 악비의 책임도 일부 존재했다. 초주를 구원하러 갔다 고립되어 패전한 것도 장준과의 불화와 악비의 기질 때문이었다. 전선 재정비와 방어를 위한 목적으로 12번씩이나 퇴각을 명해도 듣지 않고 제멋대로 싸우러 나간 게 악비였다. 집단군 수준의 거대 병력을 지휘하는 사령관이 전공과 명성에 집착하고, 뒷감당은 다른 이에게 넘기고 있었던 것이다.
남송의 사정이 나아져 군비를 나름대로 지급할 수 있게 된 뒤에는 군벌들이 기생충마냥 나라를 좀먹기도 했다. 국가 안보를 위해서는 무신들이 이끄는 군부가 중요하고 초창기에 군비를 잘 지급해 주지 못한 것도 있으니 군대를 우대해 줬는데, 기고만장해진 군벌들이 선을 넘기 시작한 것이다. 이들은 마치 청대의 삼번처럼 엄청난 양의 군비를 요구해댔고 거만하게 굴었다. 군벌들이 요구하는 막대한 전비를 확보하기 위해 조정은 증세를 해 인민을 쥐어짜야 했고, 이는 또 다른 반란의 시작으로 이어졌다.
남송의 군벌들은 통제 불능에 충성심도 의심스러웠다. 방위를 맡은 유광세가 명을 어기고 멋대로 퇴각해 황태후가 포로로 잡힐 뻔하고 비빈들이 위험에 처한 일도 있고, 고종 본인이 왕백언, 황잠선 등의 간신과 강리 같은 환관을 중용한 것 때문에 분노한 묘부(苗傅), 유정언(劉正彦) 등이 반란을 일으켜 고종을 퇴위시키고 일시적으로 정권을 잡은 묘부의 난도 있었다. 이 사건은 황제측이 한세충을 비롯한 여러 군벌들을 포섭하는 데 성공해 충성파 군벌로 반란군을 제압하는 것으로서 마무리 되었다. 묘부, 유정언의 난 외에도 남송 초기에는 무수히 많은 군사 반란과 배신이 일어났다.
그래서 황제와 조정은 군부를 통제하기 위해 병권을 제한하거나 회수하려 했지만, 군부의 격렬한 저항에 휘말렸다. 1137년에 여러 장군들을 이간질하여 군부를 분열시킨 다음, 병권을 회수하려 했다가 무려 4만이나 되는 병력이 금 왕조에 투항하는 회서병변(淮西兵變)이 일어났다. 이 사건으로 방어선이 붕괴해 국가 존망이 위태로워지자, 황제는 장준(무관)에게 회서를 방어할 것으로 명했는데 장준은 임지에 부임한지 얼마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황명을 거부했다.
악비에 대한 숙청도 군벌 통제책의 일환이었다고 보는 게 옳다. 위의 문단에서 언급한 12 금자패 사건은 악비가 벌인 여러 가지 기행 중의 한 사건에 지나지 않는다. 금자패 사건 이전에도, 악비는 지속적으로 조정의 명을 무시하고 멋대로 군을 움직였다. 다른 장군들이 명을 받들 때, 악비가 이를 무시한 일도 꽤나 있었으며 황제가 직접 친필 조서를 써서 수십 번씩 명을 전해도 무시하기 일쑤였다. 악비가 조정의 명을 따랐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고종은 악비가 승전했다는 것보다 명을 받들었다는 것에 더 기뻐할 지경이었다.
유광세의 병력을 달라고 했다가 황제가 장준에게 이를 넘기자, 어머니의 상을 이유로 진영을 무단 이탈한 일도 있다. 국가 안보에서 가장 중요한 요충지를 방위하는 군단의 사령관이 기분 나쁘다고 죽은 어머니를 팔아 탈영을 한 것이다. 송 왕조 초기였다면, 하나 하나가 능지처참을 해도 모자를 죄들을 남송 중흥의 명장들은 태연하게 수백 번씩 저지르고 있었다.
금자패 사건 이후, 고종은 그간 추진하던 병권 회수 정책을 가속했다. 황제 입장에서 바라볼 때, 평소에도 수십 번씩 명령을 들으라고 조서를 전해야 하는 데다 12번이나 금자패를 받은 뒤에서야 대군을 이끌고 돌아오는 사령관이 이번에는 진교역과 같은 일을 할지, 다시 군영으로 돌아갈지 알 수가 없었다. 병권 회수는 필연적인 조치였던 것이다.
그래서 조정은 악비, 장준, 한세충의 군권을 회수하는 령을 내렸다. 그런데, 장준과 한세충은 곧바로 명을 따른 반면, 악비 혼자 명을 받고도 1주일 동안 미적거리다 조정에 나아갔다. 이로써 세 사람은 황제의 재가를 받은 뒤에 병력을 운용할 수 있게 되었다. 이 사건은 고종, 진회 일당이 국가 영웅을 탄압한 사건으로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는 통제 불능 상태의 군벌들로부터 군권을 회수해 최고 사령부와 정부가 군 통수권을 확립한 사건이었다. 이후, 악비는 다시 병권을 되돌리려 한다는 모함을 받아 죽었다. 국가 영웅의 비참한 최후였다.
위와 같은 행적을 보면, 악비에 대한 통제와 병권 회수는 필연적인 것이었다. 물론, 고종과 진회가 기록을 윤색했을 가능성이 있기에 정사의 기록을 곧이 곧대로 믿을 수는 없지만, 당시 남송군의 상황을 고려해 볼 때에 악비가 다른 군벌들처럼 행동했을 가능성은 매우 농후하다. 따라서 악비는 명장이며 충신으로 국난의 위기에서 나라를 구해낸 영웅이었지만, 전략에 대한 안목이 좁고 전공에 집착하며 제멋대로 구는 군벌이었다.
남송은 군벌이 될 수 있는 악비를 제거했기에 오랫동안 존속할 수 있었다. 훗날 남송과 똑같은 처지에 놓인 남명을 생각해 보면 군벌들의 발호를 허용하는 것은 상당히 위험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남명은 처음부터 군벌들에게 왕조의 운명이 좌지우지된 국가였다. 남명의 초대 황제 홍광제부터 군벌들에 의해 추대되었고 그들은 홍광제를 추대한 공을 내세워서 병권을 장악해버렸다. 강북사진에 임명되어서 남명 조정의 통제도 받지 않았다. 거기다 좌량옥이라는 군벌은 권력욕이 강해서 반란까지 일으켰고 이때를 틈타 청나라가 침공해오자 대다수 군벌들은 남명을 버리고 청나라에 붙었다. 즉, 군벌을 제거하려고 한 송고종과 진회의 생각이 옳았던 것이다. 군벌을 제거하고 병권을 회수한 남송은 존속 기간이 152년이고 군벌이 발호하고 병권을 회수하지 못한 남명의 존속 기간은 18년에 불과했다.
5. 기타
- 조선의 개국공신이었던 이지란/퉁두란, 청나라의 시조 누르하치가 그의 먼 직계 후손이라는 주장이 있다. 족보상으로 따지면 악비 쪽이 한참 조상님이 된다고. 청해 이씨 족보에서는 남송의 명장 악비가 간신 진회의 참소로 죽게 되자 악비의 다섯째 아들인 악정(岳霆)이 화를 피해 북쪽으로 올라가 여진족 행세를 하게 되었다고 밝히고 있다. 이 주장을 따르면 이지란은 악비의 7대손이 된다.
또한 그 이지란의 여진족 사촌의 후손이 청나라의 전신인 후금을 건국한 누르하치라고 한다. 정확히는 이지란의 출신이 여진족 중에서도 건주여진 출신인데, 종형제 중 하나가 같은 부족의 아이신기오로 먼터무이고, 그의 6대손이 누르하치. 하지만 머나먼 직계 후손 누르하치가 세운 나라가 금나라의 명목상 후신인 후금, 즉 청나라가 되고 말았다. 실제 청나라에서는 알게 모르게 악비 신앙을 탄압하고 그 대신 충의대제 관성제군을 밀어줬다고 한다.
물론 청나라 황실이나 청해 이씨가 정말 악비의 후손인지는 도저히 알 수 없다. 당시 사람들은 온갖 영웅들의 후손을 자처하기도 했으므로 일방적인 주장일 가능성도 높다. 하지만 원숭환이 역적으로 몰린 후, 원숭환의 아들 원문필이 청나라에 귀순하여 원가(袁佳)씨의 성을 받고 만주족으로 민족을 바꾸어 팔기군 장수로 활약한 바 있으므로 개연성이 없는일은 아니다.
물론 이씨와 악씨 후손들의 하플로그룹을 검사해서 정말 악비 후손인지 검사해 본다면 모르겠으나 현재의 생물정보학으로도 유전자추적은 200-300년이 한계이며, 악비처럼 800년 이상 될 경우에는 가망이 없는 이야기다.
- 등 뒤에는 젊었을 때 새긴 정충보국(精忠報國)[38]이라는 문신이 있었다고 한다. 일설에는 이 문신을 어머니가 새겼다고도 하나, 진위 여부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그래도 후대 기록에서 선비나 장수들이 정충보국 하면 악비부터 언급하는 걸 보면 진위여부와는 별개로 후대인들에게는 사실로 여겨졌던 것으로 보인다.
- 중국에 악비사당이 지역마다 흔하다. 고향 안양시의 악비사당은 중점문물보호단위 겸 4A급 여유경구로 지정되어 있다.
- 이름이 같아서인지 야사에서는 장비의 환생이라는 드립이 나오기도 한다.
- 훗날 세월이 흘러 명나라 시대에 원숭환이 악비와 똑같은 최후를 맞았다. 한편 청나라 때는 악비의 후손인 악종기가 조정에 출사하여 군인으로 복무했는데, 이 사람이 악비의 후손이라는 말을 듣고 증정이라는 시골 선비가 조상님을 본받아 멸만흥한을 하자며 꼬셨지만 정작 당사자한테부터 이상한 놈 취급을 받고 악종기에 의해 직접 옹정제에게 보고가 들어가며 일대 파란이 일었다.
- 악가권(岳家拳)이라는 권법을 창시해 악가군에게 보급한 개조(開祖)로도 알려져 있다. 무술의 원류에 관한 상당수의 이야기가 그렇듯 진위는 확실하지 않지만, 적어도 악가권 자체는 수백 년간 큰 변화 없이 보존되어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 악가권 외에도 각종 무술을 창시한 개조로 이야기되고 있다. 이 악가권을 계보에 해당하는 권법의 대표적인 유파는 형의권이라 전해지고 있다.
- 유탸오(油條)라는 튀김빵의 유래는 악비에 대한 이야기에서 비롯되었다. 진회는 명장인 악비를 모함해 죽였고, 이로 인해 중국 역사상 손꼽히는 간신으로 취급받게 되었다. 임안(자금의 항저우시)의 한 간식 가게는 진회에 대한 증오심에 특이한 빵을 만들었다. 진회 부부를[39] 밀가루로 빚어 신나게 두들겨 패 반죽한 뒤, 하반신이 뱀처럼 보이게 등을 붙여 한쌍으로 꼬아서 기름에 넣고 튀겼다고 한다. 이 이야기에서 유래한 음식이 유탸오다. 문자 그대로 진회를 튀긴다고 유작회(油灼檜)라 불렀다. 그러나 당시에는 서슬퍼런 진회 측의 감시를 피해 유작귀(油炸鬼)라고 돌려 불렀고, 도리어 진회가 이 별명으로 불리게 되었다. 지금도 광동어를 사용하는 광둥성과 홍콩 등지에서는 저 빵을 표준 중국어식의 유탸오가 아닌, 유작귀의 광동어 발음인 야우짜꽈이라고 부른다.
6. 대중문화에서
- 김용의 무협 소설 중에서 남송 시대를 무대로 하고 있는 《사조영웅전》, 《신조협려》에는 악비가 쓴 병법서인 무목유서가 등장한다. 사조영웅전 본편에서는 주로 무목유서 안에 수록된 무공에 관련된 이야기가 나오며 곽정이 이것을 익히게 되는데, 후일 신조협려에서 중년이 된 곽정이 양양성을 몽고군으로부터 수호할 때는 곽정이 왕년에 무목유서로 병법을 공부했다는 말이 나온다. 일개 무림인이었고 딱히 두뇌형 캐릭터도 아니었던 곽정을 의병 비슷한 신분이긴 하지만 국가수호의 명장으로 키워낸 것이 악비가 남긴 병법서라는 떡밥.
- 민중의 사랑을 받는 악비인 만큼 야사도 몇 가지 전해져 내려오는데 그중 하나는 악비의 성품을 보여준다. 아직 관직에 오르지 못했던 청년 시절의 악비가 어느 부자집에 하룻밤 신세를 졌는데 그 집은 전염병으로 아리따운 딸과 하인들만 남고 가족들이 모두 죽은 상태였다. 딸이 울며 가족들의 시신을 수습하고 자신을 아내로 거둬달라 청하였다. 그러나 올곧은 악비는 부모의 허락도 없는데 함부로 홀로 남은 여성을 아내로 거둘 수 없다며 거절하고, 대신 시신만 수습하여 극진하게 제를 올렸다고 한다. 그리고 다음 날 딸이 악비와 작별인사를 하며 말하길, "선비님은 죽은 사람을 불쌍히 여겨 시신을 거두고 제를 올려주셨으니 훗날 그 이름이 빛날 충신이 되실 것입니다. 하지만 산 사람인 저의 청을 거절하시고 거둬주시지 않으니 그 끝이 좋지 못하실 듯합니다."라는 말을 남기고 악비가 떠나자 자결을 했다고 한다. 그리고 과연 악비는 남송의 충신으로 길이 남았지만 결국 모함을 받아 죽게 되었다고 전해지는 야사가 있다.[42]
- 만화 소녀침경(화타위전)에서는 송고종에게 북벌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진회가 이를 반대하자 황궁에서 퇴청한 후에 진회와 신경전을 벌이는데, 진회가 금나라에게 이길 수 없고 금나라에 있는 송휘종, 송흠종을 죽일 것이라 하자 분노하고 다음날에 9족과 함께 처형된다. 목만 남은 채로 살아 있다가 엔란(앵란)으로부터 죽은 자를 사흘간 살릴 수 있는 금황구침을 맞고 좀비인 상태에서 살아나면서 엔란과 함께 나머지 금황구침 8개를 찾기 위해 여행을 떠나며, 한세충과 함께 메이의 조부, 메이의 숙조부로부터 의학을 배우지는 않았지만 의술, 명성을 흠모해 속가제자가 되었고 진회와도 동문이라고 한다.
- 소설로는 위에서 언급한 설악전전이 제일 유명하지만 퀼리티는 기대하지 말자. 스토리 라인은 판타지급으로 아주 역사와는 거리가 멀고[44] 파워 밸런스도 엉망이라 전쟁의 승부는 우주급 맹장이 아니면 법술을 쓰는 종교인들이 좌우지한다.
- 웹소설 나 혼자 소드 마스터에서도 등장한다. 검마(나 혼자 소드 마스터) 항목 참조.
- 게임 장난바이징투(江南百景圖)에서는 묘사가 논란이 되기도 했다. 중국 논란을 보도한 국내 제도권 기사 물론 무덤에 오물 투척도 일어난다지만 논란은 된 듯.
- 2023년 설날 개봉한 장이머우 감독의 영화 만강홍: 사라진 밀서에서는 악비가 죽은 이후를 다루는데, 직접 등장하지는 않는다. 이양천새가 주연을 맡았다. 굉장히 흥행해서 수익 45억 4568만 위안을 기록하며 중국 역대 박스오피스 6위에 기록되었다.
- 게임 활협전에서는 악비가 죽은 지 80여 년이 흘렀지만 아직도 그를 존경하는 송나라 사람들이 많다. 송나라의 영원한 아이돌이라고 보면 된다. 그리고 3번의 걸친 무림맹의 결성 중에서 2대 무림맹이 바로 악가군의 결성과 관련이 있는데, 서무림맹의 증문과 동무림맹의 홍봉왕이 끝내는 악비에게 고개를 조아리고 악가군에 힘을 보탰다. 하나 진회가 악비를 참소하여 죽인 후, 증문은 잠적하고 홍봉왕은 불문에 귀의하였으며 악가군은 허무하게 와해되었다. 등장인물인 엽씨 남매는 악가군 소속이었던 엽씨 가문의 후예로 악비의 보물에 대한 실마리를 품고 있으며, 후반부에 중요하게 등장하는 보스급 인물은 아예 악가군 소속으로 꽤 장수한 인물이다.
- 게임 Limbus Company에서 과거 명성 있던 해결사로 언급된다.
- 크루세이더 킹즈 3의 확장팩 천하 DLC에서 송나라 역사적 인물로 출연한다.
-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 4 악비의 유산 DLC에서 등장한다.
6.1. 삼국지 시리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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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국지 12, 13, 14 |
코에이의 삼국지 시리즈에서는 고대무장으로 나온다. 일러스트도 39세의 나이로 죽었기 때문에 미청년으로 나왔다. 물론 삼국지 한정으로 미래무장이다. 능력치는 정치력 빼고 삼국지 무장들과 고대무장들, 심지어 삼국지 시리즈에 잠시 등장했던 노부나가의 야망 시리즈의 무장들보다 능력치가 매우 좋다. 상술되어 있듯 악비에 대한 재평가 논란이 있지만 적어도 이 게임 속에선 대놓고 먼치킨형 능력치를 보여준다. 11편에서부터 지력이 78으로 내려가나 12편에서 80대 중반으로 늘어나며 거의 완전체가 되었다. 그리고 12편부터 미래무장[45]이 대거 삭제가 되었는데 악비만 나온다.
삼국지 9에서의 능력치는 통솔력 95/무력 91/지력 87/정치력 56. 보병, 기병, 궁병 관련 전법은 각각 2개 이상에 궁기병, 지식, 모략, 책략 관련 병법은 1개인 완전체 무장이다. 의리와 지력이 높으니 이간지랄과 허보도 안 통한다.
삼국지 10에서는 지력 80, 정치력 37으로 내려가고 매력 97이 추가되었다. 특기 수는 14개이며 주로 장합과 조운과 비슷한 편이다.
삼국지11에서는 통솔력 95/무력 91/지력 78/정치력 31/매력 98의 능력치이다. 지력이 70대 후반으로 너프됐지만 특기가 통찰이기 때문에 계략이 먹히지 않는다. 말 그대로 개사기 무장이다. 다만 병종적성은 창적성 S 외에는 병기 빼고 올A란 점으로 밸런스가 어느 정도 맞는 편이다. 아무리 창병적성이 S지만 창장이 아니면 거의 방어력이 약한 부대에 불과하고, 가능한다면 지도를 가진 무장과 조합하여 병과적성(극병, 노병, 기병)를 키워주는 게 좋다. 친애무장은 관우와 강유. 혐오무장은 초주이다.
삼국지 12에서도 젊은 일러스트로 등장한다. 능력치는 전작보다 상승하여 통솔력 99/무력 91/지력 86/정치력 31이고 병종은 기병. 전법은 의용병으로 안 그래도 기병 자체가 완전체 병종이라 무시무시한 성능을 자랑한다. 또 내정 특기는 연병, 병심, 감시, 보수, 일기에 신무장을 제외하면 유일하게 호걸과 귀모 특기를 동시에 가진 무장이다. 게다가 기병이라 신속도 있다. 매력 삭제로 인한 보상책인지 지력이 꽤 높아져서 군사 특기를 얻으면 군사로 사용해도 좋다.
삼국지 13에서도 등장한다. 능력치는 12편 시절과 마찬가지로 통솔력 99, 무력 91, 지력 86, 정치 31. 특기는 훈련 9, 순찰 9, 위풍 7, 신속 8, 분전 9, 연전 9, 공성 5, 수영 7, 일기 8, 호걸 8, 귀모 4에 병과적성은 창병이 S이며 기병과 궁병이 A다. 전법은 손견의 고유전법인 사자분신, 중신특성은 창술조련이다. PK 들어서는 이상위명으로 비장군을 부여받았는데, 악비와 어울리는 위명이지만 천하명장이 더욱 사기인 위명인 데다 악비와 더 잘 어울리는 듯하고, 단어의 뜻만으로는 충용의열 위명도 악비와 잘 어울리니 바꿔주는 것도 좋을 것이다.
삼국지 14에서는 통솔력 96/무력 92/지력 78/정치력 31/매력 95의 능력치로 11에 비해 매력이 3 떨어지고 통솔력과 무력이 1증가했다. 개성은 황금개성인 투장과 통찰 그리고 호걸, 불굴, 담력을 보유하고 있고 전법으론 단기구, 연노, 대갈, 교란, 구축을 보유하고 있는 매우 좋은 무장이다.
삼국지 8 리메이크 with 파워업키트에서는 한번의 플레이로 도독 보주를 모두 개방하면 해금된다. 능력치는 통솔 96/무력 92/지력 78/정치 39/매력 95이다. 기재는 범용 기재로 공격 측으로 출진 시 공격력이 30 상승하는 맹공, 병사수가 절반 이하가 되면 공격력이 150 상승하는 불굴을 받았다. 같은 고대무장들 중에서 항우와 기재가 똑같다. 전투 전법은 육상군의 전법을 고루 갖추고 있으나 그 중에서도 보병에 특화되어 있다. 최종 전법인 창금이 레벨 2에, 군사 특기 중 위풍 레벨 1이 있어 보병 전투력이 손견에 버금갈 정도다. 또 기병과 궁병은 각 전법을 2개씩만 가지고 있어 맛보기 수준인데 비해, 실제 역사에서 북벌을 수행해 양양과 장강을 수복한 전적이 있어서인지 수군 레벨과 전법들을 제법 높은 레벨로 갖추고 있어 수군 전투력이 꽤 강한 것도 특징이다.
6.2. 영걸전 시리즈
삼국지조조전 Online에서 무목악왕의 패라는 계보의 미등장 데이터로 남았다. 병과는 중기병. 능력치는 무력 94, 지력 79, 통솔 99, 민첩 88, 행운 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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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의(竇儀) · 여여경 · 유희고 · 석희재 · 이목 설거정 · 심륜 · 노다손 · 송기 · 송웅 265권 「이방등전(李昉等傳)」 266권 「전약수등전(錢若水等傳)」 이방(李昉) · 여몽정 · 장제현 · 가황중 전약수 · 소역간 · 곽지 · 이지 · 신중보 · 왕면 · 온중서 · 왕화기 267권 「장굉등전(張宏等傳)」 268권 「시우석등전(柴禹錫等傳)」 장굉 · 조창언 · 진서 · 유식(劉式) · 유창언 · 장계 · 이유청 시우석 · 장손 · 양수일 · 조용 · 주영 · 왕계영 · 왕현 269권 「도곡등전(陶穀等傳)」 도곡 · 호몽 · 왕저 · 왕우(王祐) · 양소검 · 어숭량 · 장담 · 고석 270권 「안간등전(顏衎等傳)」 안간 · 극가구 · 조봉 · 소요 · 고방 · 풍찬 · 변후 · 왕명 · 허중선 · 양극양 · 단사공 · 후척 · 이부(李符) · 위비 · 동추 271권 「마영종등전(馬令琮等傳)」 마영종 · 두한휘 · 장정한 · 오건유 · 채심정 · 주광 · 장훈 · 석희 · 장장영 · 육만우 · 해휘 · 이도(李韜) · 왕진경 · 곽정위 · 조연진 · 보초 272권 「양업등전(楊業等傳)」 양업 · 형한유 · 조광실 · 장휘 · 사초 273권 「이진경등전(李進卿等傳)」 이진경 · 양미 · 하계균 · 이한초 · 곽진(郭進) ,우사진, · 이겸부 · 요내빈 · 동준회 · 하유충 · 마인우 274권 「왕찬등전(王贊等傳)」 왕찬 · 장보속 · 조빈(趙玭) · 노회충 · 왕계훈 · 정덕유 · 장연통 · 양형 · 사규 · 전흠조 · 후지 · 왕문실 · 적수소 · 왕신(王侁) · 유심경 275권 「유복등전(劉福等傳)」 유복 · 안수충 · 공수정 · 담연미 · 원달 · 상사덕 · 윤계륜 · 설초 ,정한 조도, · 곽밀 ,부사양 이빈(李斌), · 전인랑 · 유겸 276권 「유보훈등전(劉保勳等傳)」 유보훈 · 등중정 · 유반 · 공승공 · 송당 · 원곽 · 번지고 ,곽재, · 장병(臧丙) · 서휴복 · 장관 · 진종신 · 장평 · 왕계승 · 윤헌 · 왕빈(王賓) · 안충 277권 「장감등전(張鑒等傳)」 장감(張鑒) · 요탄 · 삭상 · 송태초 · 노지한 · 정문보 · 왕자여 · 유종 · 변곤 · 허양 · 배장 · 우면 ,장적, · 난숭길 · 원봉길 · 한국화 · 하몽 · 신지례 278권 「마전의등전(馬全義等傳)」 마전의 · 뇌덕양 · 왕초(王超) 279권 「왕계충등전(王繼忠等傳)」 왕계충 · 부잠 · 대흥 · 왕한충 · 왕능 · 장응 · 위능 · 진흥 · 허균 · 장진 · 이중귀 · 호연찬 · 유용 · 경전빈 · 주인미 280권 「전소빈등전(田紹斌等傳)」 전소빈 · 왕영 · 양경(楊瓊) · 전수준 · 서흥 · 왕고 · 이중회 · 백수소 · 장사윤 · 이기 · 왕연범 281권 「여단등전(呂端等傳)」 282권 「이항등전(李沆等傳)」 283권 「왕흠약등전(王欽若等傳)」 여단 · 필사안 · 구준 이항 · 왕단 · 상민중 왕흠약 · 임특 · 정위 · 하송 284권 「진요좌등전(陳堯佐等傳)」 285권 「진집중등전(陳執中等傳)」 286권 「노종도등전(魯宗道等傳)」 진요좌 · 송상 진집중 · 유항 · 가창조 · 양적 · 풍증 노종도 · 설규 · 왕서(王曙) · 채제 287권 「양려등전(楊礪等傳)」 288권 「임중정등전(任中正等傳)」 양려 · 송식 · 양사종 · 이창령 · 조안인 · 진팽년 임중정 · 주기 · 정림 · 강준 · 범옹 · 조진(趙稹) · 임포(任布) · 고약눌 · 손면 289권 「고경등전(髙瓊等傳)」 290권 「조이용등전(曹利用等傳)」 고경 · 범정소 · 갈패 조이용 ,손계엄, · 장기(張耆) · 양숭훈 · 하수은 · 적청 ,장옥 손절, · 곽규 291권 「오육등전(吳育等傳)」 오육 · 송수 · 이약곡 · 왕박문 · 왕종 292권 「이자등전(李諮等傳)」 이자 · 정감 · 하후교 · 성도(盛度) · 정도 · 장관 · 정전 · 명호 · 왕요신 · 손변 · 전황 293권 「전석등전(田錫等傳)」 전석 · 왕우칭 · 장영(張詠) 294권 「장우석등전(掌禹錫等傳)」 장우석 · 소신 · 왕수(王洙) · 서언 · 유식(柳植) · 섭관경 · 풍원 · 조사민 · 장석 · 장규 · 양안국 295권 「윤수등전(尹洙等傳)」 윤수 · 손보 · 사강 · 엽청신 · 양찰 296권 「한비등전(韓丕等傳)」 한비 · 사항 · 장무직 · 양호 · 양휘지 · 여문중 · 왕저 · 여우지 · 반신수 · 두호 297권 「공도보등전(孔道輔等傳)」 공도보 · 국영 · 유수 · 조수고 · 곽권 · 단소련 298권 「팽승등전(彭乘等傳)」 팽승 · 혜영 · 매지 · 사마지 · 이급 · 연숙 · 장당 · 유기(劉夔) · 마량 · 진희량 299권 「적비등전(狄棐等傳)」 적비 · 낭간 · 손조덕 · 장약곡 · 석양휴 · 조사형 · 이수 · 장동 · 이사형 · 이부(李溥) · 호칙 · 설안 · 허원 · 종리근 · 손충 · 최역 · 전유 · 시창언 300권 「양해등전(楊偕等傳)」 양해 · 왕연(王沿) · 두기 · 양전(楊畋) · 주담 · 서적(徐的) · 요중손 · 진태소 ,마심 두증, · 이허기 · 장부 · 유헌경 · 진종역 · 양대아 301권 「변숙등전(邊肅等傳)」 변숙 · 매순 · 마원방 · 설전 · 구감 · 양일엄 · 이행간 · 장빈 · 진염 · 이유 · 장병(張秉) · 장택행 · 정향 · 곽진(郭稹) · 조하(趙賀) · 고적(高覿) · 원항 · 서기 · 장지 · 제곽 · 정양 302권 「왕진등전(王臻等傳)」 왕진 · 어주순 · 가암 · 이경(李京) · 여경초 · 오급 · 범사도 · 이현 · 하중립 · 심막 303권 「장온지등전(張昷之等傳)」 장온지 · 위관 · 등종량 · 이방(李防) · 조상 · 당숙 · 장술 · 황진(黃震) · 호순지 · 진관(陳貫) · 범상 · 전경 304권 「주위등전(周渭等傳)」 주위 · 양정(梁鼎) · 범정사 · 유사도 · 왕제 · 방해 · 조영숙 · 유원유 · 양고 · 조급 · 유식(劉湜) · 왕빈(王彬) · 중간 305권 「양억등전(楊億等傳)」 306권 「사필등전(謝泌等傳)」 양억 · 조형 · 유균 · 설앙 사필 · 손하 · 주태부 · 척륜 · 장거화 · 악황목 · 시성무 307권 「교유악등전(喬維岳等傳)」 교유악 · 왕척 · 장옹 · 동엄 · 위정식 · 노염 · 송단 · 능책 · 양담 · 진세경 · 이약졸 · 진지미 308권 「상관정등전(上官正等傳)」 상관정 · 노빈 · 주심옥 · 배제 · 이계선 · 장단 · 장후 · 장길 309권 「왕연덕등전(王延德等傳)」 왕연덕 · 상연신 · 정덕현 · 우연덕 · 위진(魏震) · 장질 · 양윤공 · 진희 · 사덕권 · 염일신 · 근회덕 310권 「이적등전(李迪等傳)」 311권 「안수등전(晏殊等傳)」 이적 · 왕증 · 장지백 · 두연 안수 · 방적 · 왕수(王隨) · 장득상 · 여이간 · 장사손 312권 「한기등전(韓琦等傳)」 313권 「부필등전(富弼等傳)」 314권 「범중엄등전(范仲淹等傳)」 한기 · 증공량 · 진승지 · 오충 · 왕규 부필 · 문언박 범중엄 · 범순인 315권 「한억전(韓億傳)」 316권 「포증등전(包拯等傳)」 317권 「소항등전(邵亢等傳)」 한억 포증 · 오규 · 조변 · 당개 소항 · 풍경 · 전유연 318권 「장방평등전(張方平等傳)」 319권 「구양수등전(歐陽修等傳)」 320권 「채양등전(蔡襄等傳)」 장방평 · 왕공진 · 장변 · 조개(趙槩) · 호숙 구양수 · 유창(劉敞) · 증공 채양 · 여진 · 왕소(王素) · 여정 · 팽사영 · 장존 321권 「정해등전(鄭獬等傳)」 정해 · 진양(陳襄) · 전공보 · 손수 · 풍직 · 여회 · 유술 · 유기(劉琦) · 전의 · 정협 322권 「하담등전(何郯等傳)」 하담(何郯) · 오중복 · 진천 · 왕렵 · 손사공 · 주맹양 · 제회 · 양회 · 유상 · 주경(朱京) 323권 「울소민등전(蔚昭敏等傳)」 울소민 · 고화 · 주미 · 염수공 · 맹원 · 유겸 · 조진(趙振) · 장충 · 범각 · 마회덕 · 안준 · 상보 324권 「석보등전(石普等傳)」 325권 「유평등전(劉平等傳)」 석보 · 장자 · 허회덕 · 이윤칙 · 장항 · 유문질 · 조자 유평 · 임복 · 왕규 · 무영 · 상역 · 경부 · 왕중보 326권 「경태등전(景泰等傳)」 경태 · 왕신(王信) · 장해 · 장충 · 곽은 · 장절(張岊) · 장군평 · 사방 · 노감 · 이위 · 왕과 · 곽자 · 전민 · 시기서 · 강덕여 · 장소원 327권 「왕안석등전(王安石等傳)」 왕안석 · 왕안례 · 왕안국 328권 「이청신등전(李淸臣等傳)」 이청신 · 안도 · 장조(張璪) · 포종맹 · 황리 · 채정(蔡挺) · 왕소(王韶) · 설향 · 장절(章楶) 329권 「상질등전(常秩等傳)」 상질 · 등관 · 이정(李定) · 서단 · 건주보 · 서탁 · 왕광연 · 왕도 · 왕자소 · 하정신 · 진역 330권 「임전등전(任顓等傳)」 임전 · 이참 · 곽신창 · 부구 · 장경헌 · 두변 · 장괴 · 손유 · 허준 · 노사종 · 전상선 · 두순 · 두상 · 사린 · 왕종망 · 왕길보 331권 「손장경등전(孫長卿等傳)」 손장경 · 주항 · 이중사 · 나증 · 마중보 · 왕거경 · 손구 · 장선 · 소심 · 마종선 · 심구 · 이대림 · 여하경 · 조무택 · 정사맹 · 장문 ,진순유 악경 유몽, · 묘시중 · 한지 · 초건중 · 장힐 · 노혁 332권 「등원발등전(滕元發等傳)」 등원발 · 이사중 · 육선 · 조설 · 손로 · 유사웅 · 목연 333권 「양좌등전(楊佐等傳)」 양좌 · 이태(李兌) · 심립 · 장섬 · 장도 · 유충 · 유근 · 염순 · 갈궁 · 장전 · 영인 · 이재 · 요환 · 주경(朱景) · 이종 · 주수륭 · 노사굉 · 단후 · 양중원 · 여양굉 · 반숙 334권 「등원발등전(滕元發等傳)」 서희 ,이직(李稷), · 고영능 · 심기(沈起) · 유이 · 웅본 · 소주 · 도필 · 임광 335권 「충세형전(种世衡傳)」 336권 「사마광등전(司馬光等傳)」 337권 「범진전(范鎭傳)」 충세형 사마광 · 여공저 범진 338권 「소식전(蘇軾傳)」 339권 「소철전(蘇轍傳)」 340권 「여대방등전(呂大防等傳)」 소식 소철 여대방 · 유지 · 소송 341권 「왕존등전(王存等傳)」 342권 「양도등전(梁燾等傳)」 왕존 · 손고(孫固) · 조첨 · 부요유 양도 · 왕암수 · 정옹 · 손영 343권 「원강등전(元絳等傳)」 344권 「손각등전(孫覺等傳)」 원강 · 허장 · 등윤보 · 임희 · 장지기 · 육전 · 오거후 · 온익 손각 · 이상(李常) · 공문중 · 이주 · 선우신 · 고림 · 이지순 · 왕적 · 마묵 345권 「유안세등전(劉安世等傳)」 유안세 · 추호 ,전주 왕회(王回) 증탄, · 진관(陳瓘) · 임백우 346권 「진차승등전(陳次升等傳)」 진차승 · 진사석 · 팽여려 · 여도 · 장정견 · 공결 · 손악 · 진헌 · 강공망 · 진우 · 상안민 347권 「손고등전(孫鼛等傳)」 손고(孫鼛) · 오시 · 이소기 · 오사례 · 왕한지 · 황렴 · 주복 · 장순민 · 성도(盛陶) · 장형 · 안복 · 손승 · 한천 · 공정신 · 정목 · 석단 · 교집중 348권 「부즙등전(傅楫等傳)」 부즙 · 심기(沈畸) ,소복, · 서적(徐勣) · 장여명 · 황보광 · 석공필 ,장극공, · 모주 · 홍언승 · 종전 · 도절부 · 모잠 · 왕조도 · 장장 · 조휼 349권 「학질등전(郝質等傳)」 학질 · 가규 · 두순경 · 유창조 · 노정 · 연달 · 요시 · 양수 · 유순경 · 송수약 350권 「묘수등전(苗授等傳)」 묘수 · 왕군만 · 장수약 · 왕문욱 · 주영청 · 유소능 · 왕광조 · 이호 · 화빈 · 유중무 · 곡진 · 유격 · 곽성 · 가암 · 장정(張整) · 장온 · 왕은 · 양응순 · 조륭 351권 「조정지등전(趙挺之等傳)」 조정지 · 장상영 · 유정부 · 하집중 · 정거중 · 안요신 · 장강국 · 주악 · 유규 · 임터 · 관사인 · 후몽 352권 「당각등전(唐恪等傳)」 당각 · 이방언 ,여심 설앙 오민 왕안중 왕양 조야 조보(曹輔) 경남중 왕우(王㝢), 353권 「하율등전(何㮚等傳)」 하율 · 손부 · 진과정 · 장숙야 · 섭창 · 장각(張閣) · 장근(張近) · 정근 · 우문창령 · 허기 · 정지소 · 공원 · 최공도 · 포유 354권 「심수등전(沈銖等傳)」 심수 · 노창형 · 사문관 · 육온 · 황식 · 요우 · 누이 · 심적중 · 이백종 · 왕해 · 하상 · 엽조흡 · 시언 · 최단우 · 유율 · 채의 355권 「가역등전(賈易等傳)」 가역 · 동돈일 · 상관균 · 내지소 · 엽도 · 양외 · 최태부 · 양급 · 여가문 · 이남공 · 동필 · 우책 · 곽지장 356권 「유증등전(劉拯等傳)」 유증 · 전휼 · 석예 · 좌부 · 허돈인 · 오집중 · 오재 · 유병 · 송교년 · 강연명 · 채거후 · 유사명 · 장정(蔣靜) · 가위절 · 최언 · 장근(張根) · 임량 · 주상 357권 「하관등전(何灌等傳)」 358·359권 「이강전(李綱傳)」 하관 · 이희정 · 왕운 · 담세적 · 매집례 · 정진(程振) · 유연경 이강 360권 「종택등전(宗澤等傳)」 361권 「장준전(張浚傳)」 종택 · 조정(趙鼎) 장준(張浚) 362권 「주승비등전(朱勝非等傳)」 363권 「이광등전(李光等傳)」 주승비 · 여이호 · 범종윤 · 범치허 · 여호문 이광 · 허한 · 허경형 · 장각(張愨) · 장소(張所) · 진화 · 장유(蔣猷) 364권 「한세충전(韓世忠傳)」 365권 「악비전(岳飛傳)」 366권 「유기등전(劉錡等傳)」 한세충 악비 유기(劉錡) · 오개 · 오린 367권 「이현충등전(李顯忠等傳)」 368권 「왕덕등전(王德等傳)」 이현충 · 양존중 · 곽호(郭浩) · 양정(楊政) 왕덕 · 왕언 · 위승 · 장헌 · 양재흥 · 우고 · 호굉휴 369권 「장준등전(張俊等傳)」 370권 「왕우직등전(王友直等傳)」 장준(張俊) · 장종안 · 유광세 · 왕연(王淵) · 해원 · 곡단 왕우직 · 이보 · 성민 · 조밀 · 유자우 · 여지 · 호세장 · 정강중 371권 「백시중등전(白時中等傳)」 백시중 · 서처인 · 풍해 · 왕륜(王倫) · 우문허중 · 탕사퇴 372권 「주탁등전(朱倬等傳)」 주탁 · 왕륜(王綸) · 윤색 · 왕지망 · 서부 · 심여구 · 적여문 · 왕서(王庶) · 신병 373권 「주변등전(朱弁等傳)」 374권 「장구성등전(張九成等傳)」 주변 · 정망지 · 장소(張邵) · 홍호 장구성 · 호전 · 요강 · 이태(李迨) · 조개(趙開) 375권 「등숙등전(鄧肅等傳)」 376권 「상동등전(常同等傳)」 등숙 · 이병 · 등강 · 장수 · 부직유 · 풍강국 상동 · 장치원 · 설휘언 · 진연 · 위강 · 반량귀 · 여본중 377권 「상자인등전(向子諲等傳)」 상자인 · 진규(陳規) · 이릉 · 노지원 · 이구(李璆) · 이박 · 왕상 · 왕의 · 진각 378권 「위부민등전(衞膚敏等傳)」 위부민 · 유각 · 호순척 · 심해 · 유일지 · 호교수 · 기숭례 379권 「장의등전(章誼等傳)」 장의 · 한초주 · 진공보 · 장학 · 호송년 · 조훈(曹勛) · 이직(李稙) · 한공예 380권 「하주등전(何鑄等傳)」 하주 · 왕차옹 · 범동 · 양원 · 누소 · 구룡여연 · 설필 · 나여즙 · 소진 381권 「범여규등전(范如圭等傳)」 범여규 · 오표신 · 왕거정 · 안돈복 · 황귀년 · 정우(程瑀) · 장천 · 홍의 · 조규(趙逵) 382권 「장도등전(張燾等傳)」 383권 「진준경등전(陳俊卿等傳)」 장도 · 황중 · 손도부 · 증기 · 구도 · 이미손 진준경 · 우윤문 · 신차응 384권 「진강백등전(陳康伯等傳)」 385권 「갈필등전(葛邲等傳)」 진강백 · 양극가 · 왕철 · 엽의문 · 장패 · 엽옹 · 엽형 갈필 · 전단례 · 위기 · 주규 · 시사점 · 소수 · 공무량 386권 「유공등전(劉珙等傳)」 387권 「황흡등전(黃洽等傳)」 유공 · 왕린 · 황조순 · 왕대보 · 금안절 · 왕강중 · 이언영 · 범성대 황흡 · 왕응진 · 왕십붕 · 오패 · 진량한 · 두신로 388권 「주집고등전(周執羔等傳)」 389권 「우무등전(尤袤等傳)」 주집고 · 왕희여 · 진양우 · 이호 · 진탁 · 호기 · 당문약 · 이도(李燾) 우무 · 사악 · 안사로 · 원추 · 이춘 · 유의봉 · 장효상 390권 「이형등전(李衡等傳)」 이형 · 왕자중 · 가원 · 장강 · 장대경 · 채광 · 막몽 · 주종 · 유장 · 심작빈 391권 「주필대등전(周必大等傳)」 392권 「조여우전(趙汝愚傳)」 주필대 · 유정 · 호진신 조여우 393권 「팽귀년등전(彭龜年等傳)」 팽귀년 · 황상 · 나점 · 황도 ,주남, 임대중 · 진규(陳騤) · 황보 · 첨체인 394권 「호굉등전(胡紘等傳)」 호굉 · 하담(何澹) · 임율 · 고문호 · 진자강 · 정병 · 경당 · 사심보 · 허급지 · 양여가 395권 「누약등전(樓鑰等傳)」 누약 · 이대성 · 임희이 · 서응룡 · 장하 · 왕원 · 왕질 · 육유 · 방신유 · 왕남 396권 「사호등전(史浩等傳)」 397권 「서의등전(徐誼等傳)」 사호 · 왕회(王淮) · 조웅 · 권방언 · 정송 · 진겸 · 장암 서의 · 오렵 · 항안세 · 설숙사 · 유갑 · 양보 · 유광조 398권 「여단례등전(余端禮等傳)」 399권 「정각등전(鄭瑴等傳)」 여단례 · 이벽 · 구화 · 예사 · 우문소절 · 이번(李蘩) 정각 · 왕정수 · 구여 · 고등 · 누인량 · 송여위 400권 「왕신등전(王信等傳)」 왕신(王信) · 왕대유 · 원섭 · 오유승 · 유중홍 · 이상(李祥) · 왕개 · 송덕지 · 양대전 401권 「신기질등전(辛棄疾等傳)」 402권 「진민등전(陳敏等傳)」 신기질 · 하이 · 유재(劉宰) · 유약(劉爚) · 시중행 · 이맹전 진민 · 장조(張詔) · 필재우 · 안병 · 양거원 · 이호의 403권 「조방등전(趙方等傳)」 404권 「왕약해등전(汪若海等傳)」 조방 · 가섭 · 호재흥 · 맹종정 · 장위 왕약해 · 장운 · 유약(柳約) · 이순신 · 손봉길 · 장영(章穎) · 상비경 · 유영 · 서방헌 405권 「이종면등전(李宗勉等傳)」 406권 「최여지등전(崔與之等傳)」 407권 「두범등전(杜範等傳)」 이종면 · 원보 · 유불 · 왕안거 최여지 · 홍자기 · 허혁 · 진거인 · 유한필 두범 · 양간 · 전시 · 장복 · 여오 408권 「오창예등전(呉昌裔等傳)」 409권 「고정자등전(高定子等傳)」 410권 「누기등전(婁機等傳)」 오창예 · 왕강 · 진복 · 왕정 고정자 · 고사득 · 장충서 · 당린 누기 · 심환 · 조언약 · 범응령 · 서경손 411권 「탕숙등전(湯璹等傳)」 412권 「맹공등전(孟珙等傳)」 탕숙 · 장중진 · 모자재 · 주비손 · 구양수도 맹공 · 두고 · 왕등 · 양섬 · 장유효 · 진함 413권 「조여담등전(趙汝談等傳)」 414권 「사미원등전(史彌遠等傳)」 조여담 · 조여당 · 조희관 · 조언눌 · 조선상 · 조여환 · 조필원 사미원 · 정청지 · 사숭지 · 동괴 · 엽몽정 · 마정란 415권 「부백성등전(傅伯成等傳)」 부백성 · 갈홍 · 증삼복 · 황주약 · 원소 · 위진(危稹) · 정공허 · 나필원 · 왕수(王遂) 416권 「오연등전(吳淵等傳)」 오연 · 여개 · 왕입신 · 상사벽 · 호영 · 냉응징 · 조숙원 · 왕만 · 마광조 417권 「교행간등전(喬行簡等傳)」 418권 「오잠등전(呉潛等傳)」 교행간 · 범종 · 유사 · 조규 · 사방숙 오잠 · 정원봉 · 강만리 · 왕약 · 장감(章鑑) · 진의중 · 문천상 419권 「선증등전(宣繒等傳)」 선증 · 설극 · 진귀의 · 증종룡 · 정성지 · 이명복 · 추응룡 · 여천석 · 허응룡 · 임략 · 서영수 · 별지걸 · 유백정 · 김연 · 이성전 · 진위 · 최복 420권 「왕백대등전(王伯大等傳)」 왕백대 · 정채 · 응요 · 서청수 · 이증백 · 왕야 · 채항 · 장반 · 마천기 · 주습 · 요호신 · 대경가 · 피룡영 · 심염 421권 「양동등전(楊棟等傳)」 양동 · 요희득 · 포회 · 상정 · 진종례 · 상무 · 가현옹 · 이정지 422권 「임훈등전(林勳等傳)」 임훈 · 유재소 · 허흔 · 응맹명 · 증삼빙 · 서교 · 도정 · 정필 · 우대년 · 진중미 · 양성대 · 이지효 423권 「오영등전(吳泳等傳)」 오영(吳泳) · 서범 · 이소 · 왕매 · 사미공 · 진훈 · 조여주 · 이대동 · 황순 · 양대이 424권 「육지지등전(陸持之等傳)」 육지지 · 서록경 · 조봉룡 · 조여등 · 손몽관 · 홍천석 · 황사옹 · 서원걸 · 손자수 · 이백옥 425권 「유응룡등전(劉應龍等傳)」 유응룡 · 반방 · 홍근 · 조경위 · 풍거비 · 서림 · 서종인 · 위소덕 · 진개 · 양문중 · 사방득 426권 「순리전(循吏傳)」 진정 · 장륜 · 소엽 · 최립 · 노유개 · 장일 · 오준로 · 조상관 · 고부 · 정사맹 · 한진경 · 엽강직 427·428·429·430권 「도학전(道學傳)」 주돈이 · 정호 · 정이 · 장재 · 소옹 · 유현 · 이유 · 사량좌 · 유초 · 장역 · 소병 · 윤돈 · 양시 · 나종언 · 이동 · 주희 · 장식 · 황간 · 이번(李燔) · 장흡 · 진순 · 이방자 · 황호 431·432·433·434·435·436·437·438권 「유학전(儒學傳)」 섭숭의 · 형병 · 손기 · 왕소소 · 공유 · 공의 · 최송 · 윤졸 · 전민 · 신문열 · 이각 · 최이정 · 이지재 · 호탄 · 가동 · 유안(劉顔) · 고변 · 손복 · 석개 · 호원 · 유희수 · 임개 · 이구(李覯) · 하섭 · 왕회(王回) · 주요경 · 왕당 · 진양(陳暘) · 소백온 · 유저 · 홍흥조 · 고항 · 정대창 · 임지기 · 임광조 · 양만리 · 유자휘 · 여조겸 · 채원정 · 육구령 · 육구연 · 설계선 · 진부량 · 엽적 · 대계 · 채유학 · 양태지 · 범충 · 주진 · 호안국 · 진량 · 정초 · 이도전 · 정형 · 유청지 · 진덕수 · 위료옹 · 요덕명 · 탕한 · 하기 · 왕백 · 서몽신 · 이심전 · 엽미도 · 왕응린 · 황진(黃進) 439·440·441·442·443·444·445권 「문원전(文苑傳)」 송백 · 양주한 · 주앙 · 조인기 · 정기 · 곽욱 · 마응 · 화현 · 풍길 · 고적(高頔) · 이도(李度) · 한부 · 국상 · 송준 · 유개 · 하후가정 · 나처약 · 안덕유 · 전희 · 진충 · 오숙 · 황이간 · 서현 · 구중정 · 증치요 · 조간 · 요현 · 이건중 · 홍담 · 노진 · 최준도 · 진월 · 목수 · 석연년 · 소관 · 소순흠 · 윤원 · 황항 · 황감 · 양파 · 안태초 · 곽충서 · 매요신 · 강휴복 · 소순 · 장망지 · 왕봉 · 손당경 · 당경 · 문동 · 양걸 · 하주 · 유경 · 포유 · 황백사 · 황정견 · 조보지 · 진관(秦觀) · 장뢰 · 진사도 · 이치 · 유서 · 왕무구 · 채조 · 이격비 · 여남공 · 곽상정 · 미패 · 유선 · 예도 · 이공린 · 주방언 · 주장문 · 유엄 · 진여의 · 왕조 · 엽몽득 · 정구 · 장얼 · 한구 · 주돈유 · 갈승중 · 웅극 · 장즉지 446·447·448·449·450·451·452·453·454·455권 「충의전(忠義傳)」 강보예 · 마수 · 동원형 · 조근 · 소함 · 진전서 · 첨량신 · 이약수 · 유겹 · 부찰 · 양진 · 장극전 · 장확 · 주소 · 사항 · 손익(孫翊) · 곽안국 · 이연 · 이막 · 서규 · 진구 · 조불시 · 조령성 · 당중 · 서휘언 · 상자소 · 양방예 · 증고 · 유급 · 정양 · 여유성 · 곽영 · 한호 · 구양순 · 장충보 · 이언선 · 조립 · 왕충식 · 당기 · 이진 · 진구도 · 최종 · 임충지 · 등무실 · 위행가 · 염진 · 조사가 · 역청 · 호빈 · 범왕 · 마준 · 양진중 · 고가 · 조우문 · 진인 · 허표손 · 진륭지 · 왕익 · 이성지 · 진원규 · 장순 · 범천순 · 우부 · 변거의 · 진소 · 윤옥 · 이불 · 윤곡 · 조묘발 · 당진(唐震) · 조여석 · 조회 · 조양순 · 강재 · 마기 · 밀우 · 장세걸 · 육수부 · 서응표 · 진문룡 · 등득우 · 장각(張珏) · 고민 · 경사충 · 왕기 · 장흥조 · 곽호(郭滸) · 오혁 · 이익 · 조사륭 · 진쉬 · 황우 · 학중련 · 유유보 · 우호 · 위언명 · 유사영 · 적흥 · 주필 · 공즙 · 이긍 · 능당좌 · 양수중 · 강예 · 곽선 · 사마몽구 · 임공재 · 황개 · 손익(孫益) · 왕선 · 오초재 · 이성대 · 도거인 · 고영년 · 국사복 · 손소원 · 증효서 · 조백진 · 왕사언 · 설경 · 손휘 · 송창조 · 이정(李政) · 강수 · 유선 · 굴견 · 정담 · 요흥 · 장기(張玘) · 왕공 · 유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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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창 전홍숙 481권 「남한세가(南漢世家)」 482권 「북한세가(北漢世家)」 483권 「호남·형남·장천·진세가(湖南荊南漳泉陳世家)」 유창(劉鋹) 유계원 주행봉 · 고보융 · 유종효 · 진홍진 484권 「주3신전(周三臣傳)」 한통 · 이균 · 이중진 485·486·487·488·489·490·491·492권 「외국전(外國傳)」 서하 · 고려 · 교지(정조 → 전여조 → 이조 → 진조) · 대리 · 점성 · 진랍 · 포감 · 막려 · 삼불제 · 도파 · 발니 · 주련 · 단미류 · 천축국 · 우전 · 고창 · 회골 · 대식국 · 층단국 · 구차 · 사주 · 불름국 · 유구국 · 정안국 · 발해 · 일본 · 당항 · 토번 493·494·495·496권 「만이전(蠻夷傳)」 계동만 · 매산동만 · 성주만 · 휘주만 · 남단주만 · 무수주만 · 황원주만 · 여동만 · 환주만 · 서남이 · 여주만 · 공부천 · 풍파만 · 보새만 · 미강만 · 동만 · 석문부 · 남광만 · 보패만 · 무주부 · 유주만 · 검주만 · 시주만 · 고주만 · 육수만 · 준자만 ||<tablealign=center><tablebordercolor=#2e8b57><tablebgcolor=#2e8b57> ||
[1] 相州 湯陰縣.[2] 출처 전문가들의 연구 결과 나온 키이다.[3] 사후 60여 년 뒤 권신이자 재상이었던 한탁주가 북벌을 준비하면서 추존을 주도했다. 아마도 고향이 같은 허난성 안양시라서 더 적극적이었다는 설이 있다. 다만 후대에 개정되지 않은 걸 보면 당대 여론도 부정적이지는 않았다는 추측이 가능하다.[4] 닝샤 후이족 자치구에 위치한 산으로 서하가 이곳에 근거지를 두었다. 따라서 북방 야만족들을 격멸하겠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5] 1178년 송효종이 무목(武穆)이란 시호를 내렸는데, 1225년 송이종이 시호를 충무(忠武)라고 바꾸었다. 중국 인물 중 충무(공/후)란 시호를 받은 대표적인 인물로는 동료 한세충, 제갈량과 곽자의 등이 있으며 시법에 따르면 무목 역시 무관의 시호로는 충무, 충장과 함께 최고위급의 시호이다.[6] 특히 한족[7] 이순신 역시 난중일기에서 감찰을 명분 삼아 수군 지휘관들을 징계하던 유몽인을 진회 같다며 비난했으며 제갈량과 악비와 같은 일을 하고 싶다는 의지를 기록하기도 했다. 악비 역시 역사에 남은 충신이다보니 제갈량처럼 이순신이 높게 평가한 것으로 보인다.[8] 출처[9] 현대의 허난 성 안양 탕음현[10] 악화가 살아남아 악비가 8살이었을 때에 재회했다는 설도 있다고 한다.[11] 악비의 외조부 요대옹(姚大翁)이 고용했다.[12] 수호전의 주동(朱仝)과 혼동하지 말자. 애당초 한자부터 다르다.[13] 오늘날 우한시 우창구. 악주는 양양과 함께 나중에 남송 정권의 또 다른 요충지가 된다. 서쪽으로는 사천, 북쪽으로는 경호 방면, 동쪽으로는 양회 방면을 원조할 수 있는 요충지였다.[14] 그러나 사실 이 악비의 북벌에 관한 기록은 대부분 악비의 후손이 쓴 일종의 행장인 금타졸편(金佗稡编)과 금타속편(金佗续编)에 기초하기 때문에 거의 믿을 수 없는 기록들이 대부분이다. 예를 들어 주선진 전투만 봐도 그 출처는 악비의 후손이 쓴 행장과 송사 악비 열전 정도가 전부이며 앞의 기록들 외에는 과연 주선진 전투는 실제로 존재하는지, 정말로 존재했다면 그 규모는 어느 정도였는지조차 확실한 게 아무 것도 없다. 다른 기록들을 보면 금나라와 송나라는 이 당시 일진일퇴를 거듭하고 있었고, 주선진 전투는 설령 실제로 있었던 일이라고 해도 단순히 당시에 있었던 수많은 전투 중의 하나였을 가능성이 높다. 또한 주선진 전투의 병력에 대해서도 악비군은 5백 명인데 금나라의 군사를 10만 명으로 잡아 엄청난 대첩인 것처럼 묘사하지만 만약 이 묘사가 사실이라면 이런 대단한 전투를 치러 악비가 이겨 카이펑의 코앞에서 금나라의 주력을 박살내고도 송나라는 이후 수도를 수복하려는 아무 움직임도 없었고 다른 사가들은 하다못해 주선진 전투에서 이겼는데 송나라군이 카이펑으로 왜 진군하지 않았느냐는 비판도 없고 어떤 이유인지는 몰라도 송나라가 카이펑을 되찾을 수도 있었던 이 사건을 그냥 무시해버렸다는 황당한 결론이 나온다.[15] 열두 번 퇴각을 명하는 금패를 내려 소환했다는 뜻으로, '십이도금패'라는 일화로도 잘 알려져 있다.[16] 진회의 가족과 관련된 의혹으로는 진회의 양자인 진희(秦熺)가 사서를 편찬하며 부친의 악행을 대부분 삭제했다는 것이 있다. 그와 별개로 진회는 죽어서도 수난을 당했는데, 남송 말기의 명장 맹공(孟珙)이 진회의 무덤을 지나갈 때마다 휘하의 병사들에게 똥과 오줌을 싸라고 지시를 했고 병사들 또한 진회를 증오했던 것은 마찬가지였던지라 거리낌 없이 진회의 무덤가에 똥과 오줌을 매일같이 싸대서 그의 무덤은 취총(냄새나는 무덤)이라는 불명예스런 별명까지 얻었다.[17] 오죽했으면 후손인 진대사(자는 간천)조차도 "사람들은 송 왕조 이후로 "회"라는 이름을 부끄러워했고 나는 지금 악비의 무덤 앞에서 "진"이라는 성 때문에 참담해 하는구나!" 라면서 자신의 조상인 진회를 매우 깠다.[18] 최고의 시법은 충(忠), 무(武), 장(壯), 목(穆) 네 글자 중에 구성된 '충무-충장-장목-무목'인데, 악비는 덕분에 무관의 최고급 시호인 충무(忠武)와 문관의 최고급 시호인 무목(武穆)을 모두 받게 되었다.[19] 효종의 즉위하자, 악비의 자손들은 아버지의 억울함을 풀어달라고 계속 상소했으며 효종은 이를 받아들여 악비를 신원하고 후손들에게 관작을 내렸다.[20] 万俟卨, 여기서 万俟는 만사가 아닌 墨棋(mo qi)와 같은 발음으로 묵기라 읽는다. 진회를 도와준 간신. 후에 일을 잘못해 쫓겨나 유배 생활을 했다가 진회 사후 재상으로 돌아왔다. 그의 고향에서는 이를 부끄럽게 여겨 묵기라는 성씨를 모두 개성(改姓)해버렸고 그 성씨는 현존하지 않는다.[21] 원래 항전파였으나 나중에 악비를 배신했다.[22] 그러나, 진회의 아내와 관련된 이야기는 야사이며 고종이 진회의 반대를 무릅쓰고 악비에 대한 처형을 밀어붙였다는 설도 있다.[23] 공안들도 충신인 악비를 존경하고 한간인 진회를 증오하는 사실은 마찬가지다. 즉 침을 뱉고 오물을 투척한 사람들을 체포는 해야겠는데 그렇다고 큰 잘못도 아니니만큼 대충 요식행위로 가볍게 연행하는 수준으로 그치는 것.[24] 이 행위가 지금도 비난을 받는 이유는 마오쩌둥이 목숨 걸고 지키라는 특명을 내렸을 정도로 아끼는 문화유산이었다는 사실이다. 정작 홍위병들은 본인들이 믿고 따른다던 지도자의 명까지 무시해 버린 것. 마찬가지로 원숭환의 무덤 역시 마오쩌둥이 심혈을 기울여서 보존하라고 지시했음에도 홍위병이 파괴해 버렸다. 홍위병이 얼마나 막장인지를 증명하는 사례이다.[25] 사실 악왕묘는 전란 중에 여러 번 파괴되었다가 1918년 중화민국 시절 다시 재건된 것으로 역사적 가치는 높지 않다.[26] 사실 공산주의자들은 대체로 국제주의를 주장하기 때문에 민족주의와는 거리가 멀며, 도리어 민족주의를 배격하는 편이다. 1920년에 이뤄진 외몽골의 독립은 중국 입장에서는 영토 상실이었지만, 유명한 좌익 문필가이자 고전학자였던 곽말약이 독립을 찬양했을 정도였다. 사실 중국 공산당 내부에서도 장아이핑 같은 민족주의 성향의 당원들은 이를 상당히 아쉬워 했지만, 공산주의의 종주국이었던 소련이 주도한 일이라 대놓고 반대하기는 어려웠다. 공산당의 개국공신인 장아이핑 장군은 문화대혁명 기간에 참모들에게 "외몽골은 원래 중국땅이었어"라고 말했다가 홍위병들에게 "봉건주의 반동분자"으로 비판받아 두들겨 맞고 숙청당했고, 5년간 감방에서 지내다가 석방되었으나 후유증으로 인해 다리를 저는 불구가 되었다. 반대로 장제스의 중화민국은 끝까지 몽골 독립을 인정하지 않았고, 장제스가 죽을 때까지도 몽골 공화국의 영토를 자신들의 영역이라고 주장했다.[27] 정부에 의해 검열되는 바이두 백과에서는 진회를 중국 역사상 가장 유명한 간신중의 하나로 기술하고 있다. "是中国历史上著名的奸臣之一" 중국언론의 한 기사에서는 진회를 민국시절에 일본에 붙은 한간인 왕징웨이에 비유하기도 한다. #[28] 이러한 주장은 중국 정부의 사관에 반발을 품는 민족주의자들로부터 제기되었다. 소수 민족사까지도 중국사로 편입시키는 중국 정부의 입장상 소수 민족사를 다룰 때 갈등 요소(정복 왕조의 침공이나 민족 갈등으로 인한 충돌 등의 역사)는 회피하려 하고 소수 민족 정권에 우호적인 서술도 다소 기입하기 때문에 이러한 점에 불만을 품고, '정부가 하다하다 이젠 진회같은 놈까지도 재평가한다'라는 식의 허수아비 공격을 하는 것이다.[29] 일부 역사학자들은 진회의 대금 유화책을 송나라의 한계 때문이라는 연구 결과를 내놓기도 하며, 이러한 연구 결과를 보고, 진회를 옹호한다며 오독하는 일이 일어나고 있지만, 학술적인 연구를 정부의 공식 입장으로 보는 것은 무리한 일이며 별다른 근거 없이 학자들의 연구 성과를 비난하는 것도 올바르지 못한 일이다.[30] 남송의 이심전(李心傳, 1166~1243)이 저술한 편년체 역사서. 전 200권으로, 1127년부터 1166년까지 남송 초기 약 40년간의 역사를 기록하였다.[31] 휘종·흠종·고종 3대의 치세를 중심으로 12세기 송나라와 금나라 사이의 전쟁과 강화 교섭을 기록한 책이다. 남송의 서몽신(徐夢莘)이 200여 종의 자료를 바탕으로 편찬한 전 250권의 편년체 역사서로, 1194년에 완성되었다.[32] 1059~1128. 북송 말에서 남송 초에 활동한 장군이다. 하남에서 군사를 수습해 개봉 방어를 지휘하고 고종에게 지속적으로 북벌과 개봉 환도를 주장했다. 임종 때까지 "강을 건너라!"(過河! 過河!)고 외쳤다는 일화가 유명하다. 악비 또한 한때 종택의 휘하에서 활동했다. 중국의 전통 햄인 화퇴와 관련된 전승도 남아 있다.[33] 충사도(种師道)는 충세형·충악 등과 함께 서북 변경에서 대대로 군공을 세운 충씨 무장 가문의 대표적인 인물이다.[34] 당시 금군의 남진 속도는 매우 빨라 개봉과 강회 일대를 넘어 절강까지 단기간에 진출하였다.[35] 당시 송나라에서는 영토를 빼앗고 정강의 변을 일으킨 금나라와 화의를 주장하는 인사들이 강한 비난을 받았으며, 특히 강경한 주전론자들 사이에서는 주화론 자체가 매국에 가까운 행위로 받아들여지기도 했다.[36] 《송사》 권27 〈고종본기〉: "而俊自明引軍至溫,道路一空,居民皆逃奔山谷。世忠逗遛秀州,放軍四掠,至執縛縣宰以取錢糧。"[37] 《송사》 〈등강전〉: "世忠無赫赫功,祗緣捕盜微勞,遂亞節鉞。今其所部卒伍至奪御器,逼諫臣於死地,乃止罰金,何以懲後?"[38] "진심으로 충성해 나라에 보답한다."라는 뜻이다.[39] 아내까지 빚어서 팬 이유는 진회가 악비를 처형하도록 부추긴 것이 그 아내였다고 알려졌기 때문이다.[40] 덤으로 한세충도 특별출연했다.[41] 단, 여기서 원문 언급은 악왕묘가 아닌 악묘로, 악비가 아닌 오악(태산, 화산, 숭산, 형산, 항산)을 지칭할 가능성이 높다.[42] 임진왜란 초기 탄금대에서 싸우다가 전사한 신립과 관련해서도 이 비슷한 야사가 전한다.[43] ...였다고는 하나 소설 자체에 병맛스런 전개가 많은 편이라 오히려 정사를 뼈대로 하고 적당한 오리지널 요소와 소설의 요소들을 아주 약간 섞었다고 하는 게 다 타당하다.[44] 칭기즈 칸이 한세충과 대결을 벌리는데 신분 설정이 훗날 황제가 될 쿠빌라이 칸의 아버지라서 쉴드가 자동으로 쳐지는가 하면, 악비가 죽자 금나라가 침공하는데 악비의 아들의 반격으로 금나라 본토까지 쳐들어가서 항복을 받아낸다는 등등 초월적인 전개가 보인다.[45] 고숙, 양대안, 진경지, 위지공, 진경, 이세적, 진양옥, 정성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