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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포 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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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일본군 대규모 상륙), 일본군 진격 시기
1592년 <colcolor=#f0ad73,whi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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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朝]: 조선군의 승리 / [日]: 일본군의 승리 / [明]: 명나라군의 승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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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포 해전
釜山浦 海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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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이순신 장군 부산포해전.png

▲ 이순신 4차 출동 7전 7승[1]
시기 1592년 (선조 25년) 9월 1일
장소

조선 경상도 부산포
원인 일본군의 해상 퇴각로 차단[2]
교전국 <rowcolor=black> 조선
(공세)
일본
(수세)
주요
인물
지휘관

파일:조선 어기.svg 이순신 (충무공, 전라 좌수사)
파일:조선 어기.svg 원균 (경상 우수사)
파일:조선 어기.svg 이억기 (전라 우수사)
파일:조선 어기.svg 정운 (녹도 만호)
파일:조선 어기.svg 권준 (순천부사)
파일:조선 어기.svg 배흥립 (흥양현감)
파일:조선 어기.svg 어영담 (광양현감)
파일:조선 어기.svg 신호 (낙안군수)
파일:조선 어기.svg 김완 (사도첨사)
파일:조선 어기.svg 이순신 (무의공, 방답첨사)
파일:조선 어기.svg 우치적 (영등포 만호)
파일:조선 어기.svg 황세득 (장흥부사)
파일:조선 어기.svg 나대용
파일:조선 어기.svg 송희립
파일:조선 어기.svg 이영남
지휘관

파일:토도 가몬.svg 도도 다카도라
파일:구키 가문 문장.svg 구키 요시타카
병력 조선 함대: 169척
- 판옥선: 74척
- 거북선: 3척
- 협선: 92척

조선군: 9,000명
일본 함대: 470척 (군함)
일본군: 약 18,000명 (추정)
피해 사상자: 31명
- 전사자: 6명
- 부상자: 25 명
전선 128척 침몰
사상자: 수 천명 ↑ (추정)
결과 조선 수군의 승리
영향 일본군의 해상작전 완전 봉쇄 및 보급난 심화
1. 개요2. 배경
2.1. 꽁꽁 틀어박혀 조용한 일본군2.2. 일본군 물자가 해안에 모이다
3. 전개
3.1. 이순신의 4차 출동3.2. 부산포로 향하는 길목(포구)에서 일본군과 6번의 전초전3.3. 조선 수군의 공격을 받아 불 타는 부산포
4. 의의5. 후대의 인용6. 대중매체에서7. 관련 문서

[clearfix]

1. 개요

임진왜란 초기 1592년 (선조 25년) 임진년 9월 1일 전라좌도 수군절도사 이순신이 이끄는 조선 수군 연합함대가 당시 일본군의 본영이자 전진기지였던 부산포[3]를 공격하여 일본군을 크게 무찌르고 승리를 거둔 해전이다.

이 해전 한번으로 일본군의 본영이자 전진기지였던 부산포가 크게 타격을 받아 전선 최소 130척이 침몰되는 막대한 피해를 입었으며 이 해전 이후 일본군은 본영이자 전진기지인 부산포 조차도 언제든지 조선 수군에게 공격을 받아 무너질 수 있다는 두려움이 생겨나 공포에 벌벌 떨게 되었다. 이 해전에서 전라좌수영 최고의 돌격장 녹도만호 정운이 일본군의 대조총에 맞아 전사했다. 스스로에게도 매우 엄격하기로 유명했던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유일하게 이 해전 만큼은 높이 평가하고 매우 만족해 하였으며 본인이 직접 임진년의 대첩이라고 칭했을 정도로 어마어마한 해전이었다.

2. 배경

2.1. 꽁꽁 틀어박혀 조용한 일본군

8월 중순(음력 7월 초순), 이순신의 3차 출동의 한산도 대첩(8월 14일, 음력 7월 8일)과 안골포 해전(8월 16일, 음력 7월 10일)으로 일본 수군은 전선이 도합 100여척이 침몰되는 궤멸적인 피해를 입는다. 이에 일본의 태합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격노한 뒤 일본 수군에게 해전 금지령을 내리고, 일본 수군은 1달이 넘게 본영이자 전진기지 부산포에 틀어박혀 남해안 일대에서 아무런 움직임을 보이지 않는다.

게다가 일본군의 전라도를 향한 파상공세도 불구하고 웅치, 이치, 금산 등에서 진격이 모두 저지되어, 조선 수군은 전라도 육지 방어를 믿고 공세로 전환할 자신감을 갖게 되었다.

2.2. 일본군 물자가 해안에 모이다

9월 중순(음력 8월 초순), 일본 육군이 한양에 주둔하던 가토, 기무라, 오카모토 등의 부대를 경상도로 이동시켰다. 병력은 김해로, 물자는 부산으로 주로 운반하였다. 또한 당시 부산포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주력부대 8,000명과 전선 470척이 증원되어 해안 요충지에 배치되었다.

조선군은 일본군의 이런 움직임을 본국으로 철수하려는 것으로 판단했다. 그리하여 경상 우도 순찰사 김수가 전라 좌도 수군 절도사(전라좌수사) 이순신에게 "위로 침범한 적도들이 낮에는 숨고 밤에 행군하여 양산, 김해 등지로 잇달아 내려오는데, 짐짝을 가득 실은 것으로 보아 도망치는 낌새가 현저하다" 라고 하여 해상 도주로를 차단해 줄 것을 요청한다.

3. 전개

3.1. 이순신의 4차 출동

9월 6~28일(음력 8월 1~23일), 전라좌수사 이순신과 전라우수사 이억기는 당초 출동 계획보다 일찍 함대를 재편, 연합함대를 구성하여 전라좌수영 본영 여수에서 합동훈련을 실시한다. 일본군 본영을 공격하는만큼 훈련에 매진하여 만반의 준비를 갖춘다.

9월 29일(음력 8월 24일), 전라좌수사 이순신은 전라우수사 이억기와 함께 전라좌수영 본영 여수에서 출발했다. 경상우수사 원균은 다음날인 10월 1일(음력 8월 25일)에 사량에서 합류했다. 조선수군 연합함대는 도합 판옥선 74척, 협선 92척으로 합계 166척이었다.

9월 30일(음력 8월 25일), 당포에 도착해 1박했다. (오늘날 통영 산양읍)

10월 1일(음력 8월 26일), 비바람이 거세게 몰아쳐 그대로 정박해 있다가 날이 저물 무렵 거제도 쪽으로 나아가서 1박했다. 거제 내해를 정찰하며 매복은 없는지 상황을 살폈다.

10월 2일(음력 8월 27일), 좁은 거제 내해를 신속히 통과하여, 밤에 원포와 제포를 지났다. (오늘날 창원 진해 원포동 케이조선항 / 경남 창원시 진해구 제덕동)

10월 3일(음력 8월 28일), 가덕도에 도착하자 일본군이 도망갔다. 가덕도의 천성진성에 거점을 삼았다. (오늘날 가덕도 천성항)

3.2. 부산포로 향하는 길목(포구)에서 일본군과 6번의 전초전

10월 4일(음력 8월 29일)
10월 5일(음력 9월 1일)

3.3. 조선 수군의 공격을 받아 불 타는 부산포

조선수군 연합함대는 장사진, 즉 1렬의 종대 대형으로 초량목을 통과해 부산진 포구 안으로 뚫고 들어갔다. 조선 수군 연합함대에 압도당한 일본군은 배를 버리고 육지로 달아나 아군 병력이 방어하고 있는 해안 진지에 뛰어들어 필사적인 저항을 시도하였다. 이에 조선 수군은 해안 진지에서 저항하는 일본군에게 화포로 포격을 가하여 견제하는 가운데, 포구에 방치된 일본군의 전선들을 향해 각종 총통을 쏘아 집중적으로 포격하였다.

양 함대의 전선수를 비교하면 약 3대 1의 비율로 조선 수군이 열세였고 지리 조건도 일본군들은 언덕을 의지하여 높은 곳에서 낮은 곳을 향하여 공격[4]하지만 조선 수군은 해상에서 완전히 노출되어 적군에 매우 불리한 여건이었으나, 거듭된 패전으로 일본군이 조선 수군에 겁을 먹고 사기가 떨어졌다는 점이 이런 불리한 면을 보완하였다.

일본군이 사기가 높았다면, 옥포 해전 당시 도도 다카토라한산도 대첩 당시 와키자카 야스하루처럼 전 함대를 동원해서 조선 수군을 공격해왔을 것이다. 그러나 상당수 병력이 해안과 산 언덕에 숨어서 바다로 나오지 않고 조총과 활, 그리고 노획 및 보급 등으로 확보한 각종 화포로 공격을 했다는 것은 그들이 해전을 두려워했다는 증거이다. 이미 앞서 5개 포구에서도 일본군은 조선 수군과 맞닥뜨릴 때마다 배를 버리고 육지로 도망가기 바빴다.[5] 또한 방어 목적만 두고 보면 예나 지금이나 육상에서 주요 거점을 요새화하여 해상의 적 선박에 대응하는 방식은 상당히 강력한 해상 거부 전략이었다.

부산포 해전에서 일본군 함대 최소 130여 척을 격침시키는 큰 전과를 올렸고 부산성을 목전에 뒀지만 이순신은 육지로 일본군을 추격하거나 상륙 작전을 통해 부산성을 탈환하려는 시도를 하지 않았다. 이는 이른바 "단병 접전", 즉 현대어로 표현하자면 "근접 백병전"에서 조선 수군의 기량이 일본군에 비해 불리했으며[6] 부산까지 항해하는 바람에 병사들도 많이 지친데다, 지금까지 조선 수군이 화력에서 우세했기에 이겼던 것이지 병력에서 우세했던 것은 아니며 일본군과 달리 말이 없었기에[7] 육전을 하기에는 여러 모로 무리가 많았기 때문이다.

이 전투에서 조선 수군의 피해는 전라좌수영 소속 돌격장 녹도 만호 정운을 비롯하여 전사 6명, 부상자 25명이었으며, 전투 후 이순신은 가덕도에 이르러 3도 수군을 해진하고 그날로 귀항하였다. 수치로만 보면 적군에 비해 피해가 거의 없는 수준의 대승이었지만 녹도 만호 정운이 전사한 타격이 컸는데, 전라 좌수군이 지휘관급 인물을 잃은 것은 처음이기도 했거니와 특히나 정운은 평범한 장수가 아니라 조선 수군 최고의 돌격장으로 늘 돌격대장을 맡아온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이듬해 1593년 5차 출동 웅포 해전 당시 그가 살아있었다면 그의 활약으로 상륙하여 웅포를 점령할 수 있었을 거라는 의견도 있다.

4. 의의

이순신이 지금껏 해왔던 승전 중에서도 가장 높이 평가했던 승전으로써 스스로에게 제일 엄격했던 이순신이 이 정도로 만족하며 장계를 올릴 정도로 어마어마한 전투임은 두 말할 것 없으므로 대첩이라는 수식어를 붙여도 전혀 과함이 없다.

다음은 이순신이 쓴 승전 장계이다.
전후 네 차례 열 번의 접전에서 번번히 승전을 거두었으나 장수들의 공로를 논한다면 이번 부산 해전보다 더 큰 것이 없었습니다. 이전에는 적선의 수효가 많아야 70여척을 넘지 못했사온데 이번에는 적의 소굴에 470여 척의 전선이 늘어선 가운데에서도 (우리 수군이)위풍 당당하게 뚫고 들어가 하루 종일 공격해 적선 100여 척을 격파했습니다. 그래서 적들로 하여금 간담이 서늘해지고 목을 움츠리게 하여 두려움에 떨게 했습니다. 비록 수급을 취하진 못하였으나[8] 힘써 싸운 공로는 지난 전투에서보다 훨씬 더 컸습니다.
부산포파왜병장

이 단 한 번의 해전[9]으로 하삼도의 일본군은 반신불수가 되었다. 이후 1597년 칠천량 해전으로 조선 수군이 궤멸되기 전까지 일본군은 그 어떤 곳에서도 단 한 발짝도 전진하지 못했다. 평양까지 승승장구하며 진격한 고니시 유키나가가 그대로 평양에 주저 앉아 있다가 조명 연합군에 밀린 것도 이순신에 의해 해상 보급로를 차단당했기 때문이다. 또 호남 역시 일본군의 침입으로부터 안전할 수가 있었다. 이 전훈을 일본군은 진지하게 받아들여 정유재란 때에는 전혀 다른 전략[10]을 세우게 된다. 가히 조선군의 대반격이라 할 것이다.

또한 부산은 임란이 터진 직후 일본군이 점령하면서 일본의 조선 침략 기지의 역할을 하게 되었다. 한마디로 부산이 조선 침략에 있어서 중요한 요지였다는 것이다. 또한 부산은 일본군의 본진이기 때문에 조선 수군이 쉽사리 쳐들어오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이 부산포 해전은 적의 본진을 바다에서 타격한 전투였고, 이로 인해 본진도 안전하지 않다는 인식을 심어 주었는데 이것은 엄청난 전과이다.

본진이 적에게 위협받는데 함부로 많은 병력을 출정 시킬수도 없거니와 본진을 구원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작전 범위도 좁혀질 것이며 이미 출정한 병력들 또한 마음껏 싸울 수 있을리가 없다. 또한 해상로는 전투의 목적 뿐만 아니라 병력과 물자를 실어나르는 수송로도 겸하고 있는데 본진 앞바다까지 적이 쳐들어온다? 물자 걱정은 물론 본국으로 돌아갈때가 매우 염려되고 걱정되었을 것은 너무도 뻔하다.[11] 따라서 최근 역사학자들은 임진왜란을 끝낸[12] 결정적인 전투를 이 부산포 해전이라고 인정하고 있다.

이 해전의 승리를 기려, 1592년 음력 9월 1일을 양력 10월 5일로 환산하여 부산광역시는 10월 5일을 '시민의 날'로 지정하고 있다.

5. 후대의 인용

강력한 연합군 함대가 한국 동남부에 위치한 부산항 입구에 정박한 일부 일본 함대를 공격하여 적함 80여척 중 27척을 격침시키고 나머지는 도주했다. 이후에 벌어진 전투에서도 전투함과 수송선을 포함한 70여척의 일본 함선이 이 연합국 함대에게 포착되어 섬멸되었다. 일본군 함대에 가해진 이 강력한 타격들은 한국에 주둔한 일본 육군을 고립시키고 본토 기지에서 차단시켰다.(잠시 뜸을 들이고) 며칠간 진행된 이 해군 작전은 1592년 여름에 수행되었으며, 연합군 함대를 이끈 지휘관은 한국의 이순신 제독(the Korean Admiral Yi Sun-Sin)이었다. 이처럼 역사적으로도 일본 해군은 이미 큰 패배를 맛보았던 것이다.
1944년 10월 9일, 진주만 미 해군 기지에서 시행한 브리핑 中
체스터 니미츠 해군원수가 원수계급이 부여되기 2달 전인 1944년 10월 9일에 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의 무패 선전을 반박하는 의미로 10월 10일 뉴욕 타임스에 올려지는 인터뷰에서 정황상 이 해전을 언급하며, 이순신에 대한 서술이 나온다.
뉴욕타임즈 아카이브. 보려면 로그인을 해야한다.

6. 대중매체에서

마침내, 임진년 9월 1일 오후 2시. 이순신이 이끄는 조선 수군은 부산 일본군 본진에 대한 공격을 시작했다.
부산 해전에서 이순신이 선택한 진형은 장사돌진(長蛇突陣)이었다.
이에 일본군은 지형지물을 최대한 이용, 유리한 위치에 화포를 설치하여 일제 포격을 감행했다.
곡사화기는 지대가 높아질수록 그 사거리가 길어진다는 특성으로 볼 때,
부산 해전은 이순신의 함대에겐 결코 유리한 싸움이라 볼 수 없었다.
이순신이 장사진을 선택한 이유는 여기에 있었다.
육지로부터 가해질 화포 공격에 최대한 노출되지 않을 수 있는 진형이 바로 장사진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수 만에 이르는 적이 육지로부터 집중포화를 쏟아부었으므로, 이 진형조차도 안전할 수 없었다.


임진년 9월 1일 부산 해전.
이 해전은 옥포, 당포, 한산으로 이어지는 제해권을 장악했던 이순신이 왜군의 심장부인 부산을 공격함으로써
남해안의 제해권이 모두 조선 수군에게 있음을 만천하에 공포한 전투로써의 의의를 갖는다.
이 날 분멸된 왜선의 수 만도 백여 척에 이르니, 실로 장쾌한 대첩이었다 할 것이다.
이 날 전투에서 조선 수군 측은 31명의 전상자를 냈으니,
단 한 명의 전사자도 내지 않았던 옥포 해전에 비한다면 크나큰 피해라 할 것이다.
이 사실만으로도 이 전투가 얼마나 치열했는가를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내레이션
2004년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에서는 78회에서 나왔으며, 해전의 전체적인 흐름을 담기보다는 정운이 전사한 것을 묘사하는 데 치중했다. 총탄에 맞아 전사한 실제와 달리 배에 날아든 비격진천뢰로부터 부하들과 배를 지키기 위해 포탄을 감싸안고 폭사한 걸로 각색했다.[13] 또한 부산포 해전이 있기 전의 과정을 시작으로 조정과 이순신의 갈등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수급을 취하지 않았는데 어찌 승전으로 보느냐는 의견과 전선을 백여척 넘게 격파했으니 승전이라는 의견이 갈린다.[14]


2015년 드라마 징비록(드라마)에선 전투 없이 정운의 전사만을 다룬다.

2022년 영화 한산: 용의 출현에서는 영화의 주 내용이 한산도 대첩이므로, 끝에 짧게만 나온다. 작중 이순신은 '압도적인 승리가 필요'하다고 판단, 적의 본진을 강습하기로 하여 조선 수군이 정박한 일본 함대를 포격, 분쇄하는데, 도도 다카도라가 해전으로 응전하지 못하고 진영 중앙의 왜성에서 이를 지켜보는 장면으로 나온다. 정운의 전사는 나오지 않으며, 안골포 해전에 이어 3차 출정의 최종전으로 처리되었다.

7. 관련 문서



[1] 조선 수군의 맹렬한 공격을 받아 침몰한 일본군 함대의 피해 규모이다.[2] 자세한 사항은 본문을 참조.[3] 지금의 부산광역시 동구 일대[4] 당시는 화력이 포물선을 이루는 곡사형 화기였기 때문에 고지대에서의 포격은 엄청난 화력적 이득과 사거리적 이득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순신은 놀랍게도 단 한척의 판옥선도 격침되지 않았다.[5] 이순신은 당시 일본군에게는 공포일 수 밖에 없던게 이순신을 만날 때마다 졌다. 그것도 석패 수준의 패배는 없고 대부분 완패였다. 그럼 또 조선 수군에게는 의미 있는 피해를 줬냐면 그것도 아니다. 적함을 격침은커녕 전투불능 수준의 손상을 주기도 어려웠다. 결국 만나는 족족 일방적으로 왕창 두들겨 맞는다는 얘긴데 그걸 알고도 섣불리 싸움을 걸기는 힘들었을 것이다.[6] 불멸의 이순신에서도 일본인은 어렸을 때부터 수련을 하기에 단병접전에 강하다고 소개되며, 조선 통신사들의 사행록 중에서도 원중거의 화국지를 비롯해 일본이 검을 잘 만든다는 사실과 함께 이러한 면을 소개한 것이 있다. 애초에 당시 일본군은 전국시대의 수많은 전쟁을 겪으며 실전으로 단련된 질 좋은 군대였다.[7] 육군을 지원하는 등의 예외를 제하면 함선에 말을 실을 필요가 없다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8] 당시 왜군의 수급은 의외로 가치가 꽤나 있었다 장수들에게는 공훈의 증거였고 백성들에게는 관아에 가져다주면 현상금처럼 보상을 받았다. 학자들마다 가치의 기준은 다르지만 당시 1달 병사 급여보다 수급 몇개가 훨씬 가치 있었을 거라는 의견에는 모두 동의한다 그래서 이순신은 수급을 베려다가 적을 놓치는 경우를 매우 싫어했고 염려했기에 부하들에게 "너희의 공로는 내가 낱낱히 조정에 고할건이니 수급에 연연하지 말고 적 소탕에 힘쓰라"고 지시를 내렸고 병사들은 그를 따랐다.[9] 사실 해전이라기보다는 현대적 의미의 "강습"에 가깝다.[10] 임란 때에는 빨리빨리 치고 올라가는 게 목표였다면, 정란 때에는 한반도 남부를 점거하여 자신들의 영토로 굳히는 것. 그리고 정란 전략은 방어선에 대한 직접적 침공이 아닌, 치밀한 이간질로 이순신부터 적 수뇌부에서 치워버린 뒤에 직접적으로 쳐들어왔다. 또한 임진왜란 당시 조선군이 재건된 것은 전라도가 무사했기 때문으로 본 일본군은 남원성 전투황석산성 전투에서 이기고 전라도 감영이 있는 전주에 입성한다.[11] 어디까지나 만약의 경우지만 명과 수륙 협동이 이루어져 본진인 부산포를 점령했다면 바닷길도 틀어막힌 상황에서 보급마저 원활하지 않아 왜군들은 철저히 고립되었을 것이고 끝내 항복했을 가능성이 적지 않다.[12] 임진왜란이 끝나고 뒤 이어 정유재란이 벌어진 것이다.[13] 한편 이 대목에서 일본군이 비격진천뢰를 쓰니 고증 오류라는 해석도 있는데, 70화에서 와키자카가 도도와 구키에게 조선군 화포를 노획했다며 자랑을 하고, 조선군 포로를 협박해 화포 사용법을 알아내고서 살해한 뒤, 자신의 병사들에게 매일 화포를 훈련하라고 닦달하는 장면도 극중에 같이 나오기 때문에 빼앗은 것을 사용했다고 보면 무리가 없다. 극중에서도 개연성이 딱히 어긋나지 않기도 한 것이, 옥포해전 이전에 원균이 싸우지도 않고 판옥선을 자침시키고 도주한 뒤에 경상우수영을 무혈입성하여 점령한 도도 다카도라의 대사에서도 알 수 있다. 도망가면서 무기고에 고스란히 남겨둔 총통들을 보고서 이런 화포를 가지고도 써먹지 못하는 장수의 수준을 알만하다며 원균을 조롱하는 장면을 통해 극 중의 부산포 해전에 나온 화포의 출처는 원균이 한심하게 도주하면서 고스란히 바친 화포라고 볼 수 있다.[14] 전선은 수군에 있어 기병의 말처럼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이다. 말 없는 기병은 보병에 편성할 수라도 있지 수군은 전함이 없으면 손가락이나 빨 수 밖에 없다. 또한 왜군은 제해권이 빼앗겨 더 이상 전함을 보충하기가 심히 어렵게 되었다. 전함 한척을 건조하는데 과거나 현재나 엄청난 자원이 든다는 것을 감안하면 확실한 승전이 맞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