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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朝]: 조선군의 승리 / [日]: 일본군의 승리 / [明]: 명나라군의 승리 |
1. 개요
죽산전투/상주전투는 경기도 안성시와 경상도 상주군에서벌어진 전투이다.2. 죽산에서 패배하다
당시 죽산은 소모사(召募使) 변이중이 1593년 1월에 자기 휘하 병력 2000명 + 홍계남의 병력 500 합계 2500의 병력으로 1차 공격했으나 크게 패한 상태였다. 변이중은 죽산 공격 과정에서 '복개전차대'라고 불리는 특이한 병기를 만들었는데 황소가 끄는 철갑 덮개를 씌운 수레로서 총알을 막아내는 일종의 현대의 장갑차와 비슷한 역할을 하는 병기였다.복개전차대는 안성 주민들과 천안, 아산에서 모은 소 200여 마리를 사용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실록에 따르면, 일본군이 칼을 휘두르며 마구 베자 아군이 패해 흩어졌고 불을 던져 수레를 태우니 수레 위의 군사들이 모두 죽었다고 한다.(선조 수정 실록 27권, 선조 26년 2월 1일 병술 12번째 기사)[1]
3. 황진의 활약으로 죽산 전투에서 승리하다
황진은 천여 명의 병력을 이끌고 후쿠시마 군에 대해 여러 차례 기습 공격을 감행해 승리 및 군량을 탈취했다.결국 이에 견디다 못한 후쿠시마는 안성을 공격해 황진 군을 잡으려고 전군을 이끌고 죽주산성에서 나왔는데, 이를 매복해 격퇴하고는 오히려 빈집이 되다시피한 죽주산성을 점령했다.
이렇게, 황진은 칠본창으로 유명한 후쿠시마 마사노리군 4000여명과 대치하여 일본군의 죽산 이북으로의 진격을 막았다.
4. 상주전투에서 또 승리를 거두다
적이 퇴각하자 공이 적의 뒤를 추격하였는데 상주(尙州)의 적암(赤巖)에 이르러 적과 전투를 벌여 연거푸 승리를 거두었다.
- 국조인물고 권54 왜난시 입절인(倭難時立節人) 피구인부(被拘人附)
이에 후쿠시마는 음죽(이천시의 남부 지역)으로 퇴각하려했으나 역시 여의치 않자 경상도 방면으로 총퇴각하였고 황진은 경상도 상주까지 계속 추격해서 이를 대파했다.- 국조인물고 권54 왜난시 입절인(倭難時立節人) 피구인부(被拘人附)
5. 결과
죽주전투/상주전투는 조선의 승리로 막을 내리게 된다.[1] 참고로 변이중은 본래 문관이지만 병기 제작에 특기가 있었는지 화차도 300량이나 만들어 권율에게 전해주어 행주 대첩의 승리에 크게 기여했다. 이를 변이중 화차라 하는데 조선 화차 발전에 크게 기여한 것으로 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