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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4-18 23:28:11

상주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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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朝]: 조선군의 승리 / [日]: 일본군의 승리 / [明]: 명나라군의 승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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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주 전투
尙州戰鬪
시기 1592년 6월 4일 (음력 4월 25일)
장소 조선 경상도 상주
원인 조선의 경상도 제1방어선 붕괴.
교전국 조선 파일:조선 어기.svg 일본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1920px-Goshichi_no_kiri_inverted.svg.png
지휘관 경상도 순변사 이일
경상도 조방장 변기(邊璣)
상주 판관 권길
종사관 박호(朴篪)†
종사관 윤섬(尹暹)†
종사관 이경류(李慶流)†
고니시 유키나가
소 요시토시
병력 800명~900명[1] 18,700 명
피해 방어군 궤멸 피해 규모 불명
결과 상주 함락, 경상도 방어선 붕괴 시작.
영향 경상도 방어선 전체 붕괴.

1. 개요2. 전투 이전 3. 전투 전개4. 규모?5. 창작물에서

1. 개요

임진왜란 중 벌어진 전투. 이 전투로 인해 경상도가 완전히 왜군에게 넘어갔다.

2. 전투 이전

4월 14일 동래성이 함락되면서 개전 2일만에 조선군의 제1방어선은 붕괴했다. 4월 17일에는 낙동강 하류 작원잔도에서 방어전을 벌이던 밀양 부사 박진의 군대마저 왜군의 양동 공격에 무너졌다. 4월 17일 아침에 왜침을 보고받은 조정은 이일순변사로 임명해 대구에서 적을 요격할 것을 명했다. 4월 18일 밤 4경(2시~4시) 무렵 퇴궐한 이일은 60여 명의 군관을 거느리고 먼저 내려갔고 별장 유옥(兪沃)이 남아 군사를 모집해 뒤따랐다.[2] 또한 도망친 이각(李珏)을 대신해 성응길(成應吉)을 경상좌병사로, 조대곤(曺大坤)을 대신해 조경(趙儆)을 경상우병사로 임명해 내려보낸다.[3] 또한 유극량(劉克良)과 변기를 경상도 조방장으로 임명해 각각 죽령과 조령을 지키게 했다.

본래라면 이일이 지휘해야 할 군사는 제승방략 체제에 따라 주변 지역에서 대구로 모인 군사들이었지만, 대구에 모인 병사들은 한양에서 내려오는 지휘관을 기다리다가 왜군이 엄청난 진격 속도로 4월 18일 이미 코앞인 밀양에 도달해버린 탓에 지휘관이 도착하기 전에 흩어져 버렸다. 이일도 대구를 포기하고 대신 상주에서 요격하기로 결정한다. 하지만, 이일이 상주에 도착했을때 문경 현감 신길원(申吉元)은 왜군과 맞서 싸우다 중과부적으로 전사했으며[4] 개령 현감 이희급(李希伋), 선산 부사 정경달(丁景達), 의흥 현감 노경복(盧景福) 등은 모두 달아나 어디에 있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상주 목사 김해(金澥)도 이일을 영접한다는 핑계로 도망쳤으며, 판관 권길(權吉)은 선조 실록에서는 김해와 함께 도망쳤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선조 수정실록에는 이일의 명령으로 농민 1000여명을 모집한 것으로 나온다.

징비록에선 이일이 끌어모은 군사가 800명~900명 정도라고 밝혔고 고니시가 히데요시에게 보낸 서한에선 1,000여명을 베었고 조선군 일부가 뒤쪽의 숲으로 달아났다고 적은걸 보아 대략 1,000여명 선으로 추정된다.

3. 전투 전개

4월 24일. 이일이 한창 습진 훈련을 시키고 있을 때 한 백성이 이일에게 왜군이 코앞에 왔다고 알렸다. 문제는 이 백성이 조용히 청해서 보고한게 아니라 온 군영에 그냥 떠들고 다녔다는 점이다. 이일은 하루동안 기다렸다가 왜적이 나타나지 않자 제승방략 금령 27조 중 18조에[5] 따라 농민을 참수했다. 훈련을 계속 진행하던 중 고을의 성안 몇군데에서 불길이 치솟자 척후로 군관 박정호(朴廷瑚)를[6] 보냈지만 왜군이 군관을 총으로 쏘아 죽이고 목을 베어갔다.[7] 이 광경을 본 조선군은 전투를 시작하기도 전에 사기가 떨어졌고 왜군은 숫적 우위를 앞세워 조총을 쏘며 접근했다. 조선군은 궁시로 대응했으나 훈련도 및 사기 부족으로 왜군에 제대로 닿지도 못했다. 왜군이 사면에서 포위하여 압박해오자 이일은 갑옷과 구군복을 전부 벗어 던지고 도망쳤고 도망가지 않고 남아서 싸우던 군사들은 모두 전사했다. 이일은 변기와 함께 충주의 신립 진영으로 후퇴했다. 이일의 종사관 박호와 윤섬, 변기의 종사관 이경류, 판관 권길은 끝까지 싸우다 전사했다. 박호는[8] 경상도 관찰사 김수의 사위였는데, 자신이 경상도에 내려와 있으면 장인인 김수도 용감하게 싸울 거라 생각해 이일의 종사관에 자원했다. 왜군에게 전사했다고도 하고, 스스로 칼로 목을 찔러 자결했다고도 한다.

조선군은 1,000여명에 이르는 전사자를 냈으나 고니시가 히데요시에게 다 잡지는 못했다고 밝혔고 조정의 임란일기에도 이일과 함께 빠져나온 변기가 이끈 소수의 패잔병과 조우했다는 내용이 있는 걸로 미루어 볼 때 일부는 후퇴로 빠져 나온 것으로 보인다.

4. 규모?

신흠의 상촌집에선 이일이 상주까지 내려가면서 중간에 4천의 병력을 모병했다고 나와 있다. 충청도 관찰사 윤선각이 6월에 상주와 탄금대에서 충청도 병사 중 1만을 잃었다고 장계를 올린 것을 보면 이일이 완전히 빈손으로 상주에 내려온 것인지는 속단하지 않고 생각해볼 여지가 남아있다.

단 상주 전투 자체는 상주에서 모집한 병력을 훈련시키던 도중 일어났기 때문에 전투 당시의 조선군 규모가 1천 이하인것은 확실해 보인다. 그와 별개로 그 4000명의 행방이 불확실하다는 것도 규모 파악에 혼란을 주는 부분인데 이일은 도주 중에 조령을 정탐하던 신립과 마주친 것으로 나오며, 조령에는 방어사 변기도 있었기에 만약 이일의 뒤에 4000명이나 버티고 있었다면 이런 해프닝은 아귀가 맞질 않기 때문.

5. 창작물에서

이일의 농민 참수는 엄연히 제승방략 규정에 따른 행위로 훈련도가 떨어지는 병사들을 다잡기 위한 일종의 고육책으로 볼 수 있지만 만화고 개설서고 드라마고 간에 항상 이일 본인의 감정적인 행동으로 그려진다.

조선왕조 오백년 임진왜란편에는 배경부터 전투까지 11화~12화에 단편적으로 묘사된다. 한양에서 선병안대로 모병을 진행하지만 유생들과 서리들만 모집에 응하고 겨우 300명의 병력도 모으지 못한채 단기로 전장으로 떠나는 이일의 어려운 상황이 나오며 제승방략체제의 모순을 역설한다. 상주에서도 척후도 운용하지 않다가 순식간에 털리고 이일이 단기로 달아난 후 병졸의 옷을 입고 변장하여 신립의 앞에 나타난다.

불멸의 이순신에서는 20초 정도의 전투 장면과 내레이션으로 설명된다. 조선군의 전열이 무너지는 와중에 이일이 달려드는 왜병 하나를 베어넘기며 퇴각을 지시한다.

드라마 징비록에서는 백성이 왜군이 코앞에 왔다고 알려주자 이일은 군심을 어지럽혔다면서 참수하려고 했는데, 그 백성이 사정하자 하루만 기다리기로 한다. 그러나 왜군이 오지 않아 참수하고 군졸 두 명이 정찰을 나갔다가 왜군을 발견하지만 제대로 보지는 못한데다가 왜군이 온 것을 알렸다가 백성이 이일에게 죽은 것 때문에 두려움에 싸여서 이를 알리지 않았다. 결국 방비도 하지 않은 상태에서 소규모의 조총 부대가 와서 공격하자 병사들은 혼비백산해서 모두 도망치거나 저항할 틈도 없이 당했으며, 이일은 도망치면 죽이겠다면서 수습하려 했지만 이일도 투구가 조총에 맞아 떨어지는 바람에 기어가서 도망친다.

반면 원로 작가 김성한의 소설 7년전쟁에서는 전반적인 상주 전투의 양상을 잘 그리고있다. 이일에 대한 서술도 꽤 괜찮은 편.

조선시대 배경의 대체역사를 다룬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킹덤에서는 경상도 관찰사 안현이 불과 500여명의 군사로 일본군 주력 병력 3만 여명을 격퇴한 사건으로 묘사된다. 통상적인 전투방법이었으면 일본군에게 밀렸겠지만 여기서는 수망촌의 병자들을 죽인 뒤 생사초로 되살리는 방법으로 생사역들을 동원했기에 일본군 본진까지 격퇴할 수 있었던 것. 그 덕에 일본군의 공세는 경상도에서 좌절되었고 왜란도 끝난 것으로 나온다.[9]


[1] 징비록 기록. 넉넉히 잡아 천여명으로 잡기도 한다.[2] 징비록에선 군관이 모이지 않아 이일이 3일간이나 한양에 머물렀다고 적었으나 기재사초에선 4월 21일에 이일이 문경에서 장계를 올렸다고 적고있다. 아무래도 뒤에 남아 군사를 모은 이일의 부하 유옥을 이일과 혼동한 모양이다.[3] 국조보감에는 변기가 경상좌병사로 임명되었다고 나오는데 오류로 보인다.[4] 온 몸에 큰 부상을 입은 채로 사로 잡혔다. 왜군은 그의 사지를 절단해 죽였는데, 죽을때까지 왜군을 꾸짖으며 관인을 넘기지 않았다.[5] 적의 침략을 보고서도 자세히 살피지 아니하고 적의 형세를 정탐할 때에 상세히 보지 아니하고(근무 태만) 돌아와서도 돌아왔다고 보고하지 아니하거나 많은 것을 혹은 적다고 말하거나 적은 것을 혹은 많다고 말하는(허위보고) 자는 참형에 처한다.[6] 16세때 호랑이와 맨몸으로 격투했다하여 맹호장군으로 불렸다.[7] 이후 박정호의 가족들은 그의 시신을 찾지 못해서 대신 그가 니탕개의 난을 진압하러 종군했을 때 집에 보냈던 동상으로 떨어진 손가락을 가지고 장사지냈다.[8] 17살에 장원급제했는데, 이는 조선역사상 최연소 기록이었다. 시험관인 박순은 박호가 너무 어려 부정을 의심해, 따로 불러 그의 문재를 시험했는데 막힘없이 자신이 낸 운에 따라 시를 짓자 감탄하였다.[9] 그래서 작중에서 경복궁이 초토화되지 않고 멀쩡히 남은 것으로 등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