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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4-16 20:35:11

권길



權吉
1550년(명종 5) ~ 1592년(선조 25)

1. 개요2. 상세

1. 개요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안동 권씨 추밀공파이다. 자는 응선(應善).

조선 개국공신 1등에 녹훈된 권근의 6대손이다.

2. 상세

1550년 아버지 권익(權翊)과 어머니 상주 박씨(尙州 朴氏) 박종원(朴宗員)의 딸 사이에서 무녀독남으로 태어났다. 일찍이 음서로 출사하여 상주목 판관(判官:종5품)에 올랐다.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한 직후 이일경상도 순변사에 임명되어 문경현을 거쳐 상주목에 도달하자, 상주목사(尙州牧使:정3품) 김해가 이일의 행차를 맞이하러 나간다는 핑계로 산골짜기에 숨어 들었고 여러 백성들도 달아나기 시작했다.[1]

이때 권길은 꿋꿋이 상주에 남아있었는데, 이일이 군대를 이끌고 상주에 도착했을 때 아무도 없자 권길에게 분을 토하며 병력으로 모아오지 않으면 참수형에 처하겠노라고 으름장을 놓았다.
상주에 아무도 없다는 것은 군인이 신의를 얻지 못했다는 것이오. 그러니 하룻밤을 줄테니 병력을 모아오지 않으면 참수를 행할 것이오.
그러자 권길은 밤새도록 상주읍성 주변의 촌락 및 산길을 두루 돌아다니며 수백 명의 농민을 모았다. 이일은 그들이 모두 농민인 것에 불만을 표했지만 목숨을 살려주었고, 또 창고의 곡식을 내어 흩어진 백성들을 유인해 또다시 수백 명을 얻고 나서 가까스로 천여 명의 군대를 모집했다.

그날 저녁 순변사 이일과 함께 상주 북쪽 냇가에서 진법을 연습하던 중 선산도호부를 거쳐 도착한 왜군에 의해 척후병으로 나갔던 군관 박정호(朴廷瑚) 등이 사살당했고, 이윽고 크게 집결한 적에게 포위되어 고전하다가 결국 상주목 호장(戶長) 박걸(朴傑)과 종사관(從事官)인 홍문관 교리(校理:정5품) 윤섬(尹暹), 홍문관 수찬(修撰:정6품) 박지(朴箎), 방어사 종사관인 병조 좌랑(佐郞:정6품) 이경류(李慶流) 등과 함께 전사했다. 이때 순변사 이일은 군관 한 명, 어린 종 한 명과 함께 도주하였다.

사후 1675년(숙종 원년) 현재 경상북도 상주시 만산동에 있는 충렬사(忠烈祠)에 호장 박걸과 함께 배향되었고[2], 승정원 좌승지(정3품)에 증직되었다가 1882년(고종 19) 이조판서(정2품)에 추증되었다.#
[1] 사실 선조실록에 따르면, 1592년 6월 29일까지만해도 조정에서는 권길이 상주목사 김해와 함께 달아나서 은신해 있는 것으로 파악했다.선조 25년 6월 28일 6번째기사선조 25년 6월 29일 7번째기사 다만, 선조수정실록에는 선조 25년 4월 14일 8번째기사에서 이미 권길이 상주 전투에서 전사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2] 순조 25년 9월 16일 1번째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