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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朝]: 조선군의 승리 / [日]: 일본군의 승리 / [明]: 명나라군의 승리 |
어란포 해전 於蘭浦 海戰 | ||
<colbgcolor=#C00D45,#01454F><colcolor=#f0ad73,white> 시기 | 1597년 (선조 30년) 10월 8일 (음력 8월 28일) | |
장소 | 어란포 앞바다 | |
교전국 | <rowcolor=black> 조선 (수세) 승 | 일본 (공세) 패 |
주요 인물 | 지휘관 이순신 (충무공) | 지휘관 구루시마 미치후사 |
병력 | 전선: 13척 | 전선: 8척 |
피해 | 피해 규모 없음 | 피해 규모 없음 |
결과 | 일본 수군의 조선 수군 및 이순신 발견 | |
영향 | 벽파진 해전 발발 |
[clearfix]
1. 개요
어란포 해전(於蘭浦 海戰)은 1597년 10월 8일(음력 8월 28일)에 이순신이 삼도수군통제사로 복귀한 이후 치른 첫 번째 해전이다.2. 배경
8월 28일 (음력 7월 16일), 칠천량 해전으로 조선 수군이 와해되었다.9월 3일 (음력 7월 22일), 배설이 이순신에게 합류하였다.
9월 13일 (음력 8월 3일), 이순신이 삼도수군통제사로 재임명되고, 사천 곤양을 떠나 군영을 옮겼다.
9월 23일 (음력 8월 13일), 전라좌수영 여수 본영을 비우며 군영을 옮겼다.
9월 28일 (음력 8월 18일), 회룡포(장흥군 회진면)로 군영을 옮겼다. 여기에서 배설이 숨겨둔 12척의 배를 인수해, 총 13척이 되었다.
9월 30일 (음력 8월 20일), 이진(해남군 이진리)으로 군영을 옮겼다.
10월 4일 (음력 8월 24일), 어란포(해남군 어란리)로 군영을 옮겼다.
3. 전개
10월 8일 (음력 8월 28일)- 새벽 6시, 적선 8척이 뜻하지 않게 들이닥쳤다.
- 조선 수군이 모두 두려워 겁먹고, 특히 배설은 피하여 물려나려 했다.
- 이순신은 꼼짝하지 않도록 명령하고, 적선이 가까이까지 오고 나서야 호각을 불고 깃발을 휘둘러 따라잡으려 했다.
- 양측은 갈두(해남군 송지면 갈두리)까지 추격전을 했고, 일본선이 더 빠르자 더 뒤쫓지 않았다.
- 갈두 멀리 너머의 적선 50여척이 보였다.
- 이에 돌아와서 긴급히 짐을 싸서 저녁에 진을 장도(노루섬)으로 옮겼다.
4. 결과
이 전투로 인해 일본수군 정찰대가 조선수군이 아직 13척 남아 있으며, 이순신이 돌아왔음도 알게 되었다. 또한 배설을 비롯해 칠천량 해전의 PTSD에 빠져 있는 조선 수군을 이순신이 일갈하여, 판옥선이 일본 소선들은 충분히 압도한다며 사기를 드높인 계기가 되었다.이 전투 당일은 노루섬으로, 다음날 벽파진으로 조선 수군은 후퇴하였고, 일본군은 이를 추격하여 10월 17일(음력 9월 7일)에 벽파진 해전이 전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