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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17 21:25:07

구루시마 미치후사

파일:KurushimaMichihusa.jpg
구루시마 미치후사
파일:이나바 가몬.svg
구루시마의 8겹 3줄 가문[1]

[ruby(來島通總,ruby=くるしまみちふさ)](내도통총)
1561년 ~ 1597년 10월 26일

1. 개요2. 생애3. 대중매체에서

1. 개요

센고쿠 시대의 무장.

2. 생애

구루시마 성주(来島城主)였던 무라카미 미치야스(村上通康)의 사남. 이요국[2] 출신이다. 무사로써의 관위는 이즈모노카미(出雲守)로[3] 고산공실록에도 "구루시마 이즈모노도노(來島出雲殿)"로 등장한다.

형인 도쿠이 미치유키는 도쿠이 가에 입적하여 이를 계승하였으므로, 아버지 무라카미 미치야스가 죽자 1567년에 미치후사가 가독을 상속받았다. 아버지 미치야스가 고노씨의 중신이었기에 미치후사도 구루시마 무라카미 중신들의 보좌를 받으며 외할아버지인 고노 미치나오(河野通直) 측에서 일했지만, 막부 측근과의 치교 권한 내지 정치 파벌 등의 문제로, 모리 포위망이 절정에 다르던 겐키 연간인 1570년에 고노 가문에 반기를 들었다. 미치나오와 친척 관계인 모리 가문에게는 호의적인 스탠스를 취했으며, 오토모 소린을 공격하자 모리 가문에게 원군을 파견했다. 후에 모리 포위망이 어느 정도 풀어지자, 고노 가문과는 화친하였다.

1576년에는 가신 무라카미 요시츠구를 파견해 제1차 키즈카와 전투에서 오다 가문의 수군을 무찔렀으며, 1582년에 재차 코우노 가문에서 이반, 하시바 히데요시의 권유로 오다 가문에 항복했다. 모리 가문에서 우라 무네카쓰, 무라카미 모토요시 등을 시켜 공격하자, 이에 대항하지 못하고 본거지에서 쫓겨나 히데요시에게 몸을 의탁하였다. 히데요시가 무라카미씨 중 가장 먼저 항복하였다고 성(城)명인 구루시마(来島)라고 부르며 중용하므로, 이때 구루시마 씨로 고쳤다. 이후 모리 가문과 히데요시의 화친 후 영지로 복귀했다.

1584년쯤 구루시마 수군으로 복귀했다가 1585년에 히데요시의 시코쿠 정벌 때 코바야카와 타카카게 휘하에서 선진에 서서 종군했으며, 이요 국의 노마, 가자하야군 내에서 1만 4천 석의 지행을 수여받았다. 1587년에는 규슈 정벌 때 모리 가문 휘하에 속해 부젠국의 우루쓰 성을 공격하고 1590년에는 오다와라 정벌 때 구키, 가토 가문 등과 함께 수군을 편성해 오다와라 성을 해상에서 공격했으며, 1592년의 임진왜란, 1597년의 정유재란에 참전했지만 1597년에 명량 해전에서 선봉장으로 참전했다가 명량의 물살 변화와 이순신의 지휘로 미치후사가 탄 대장선은 난전에서 격파당해서 전사했다.

명량 해전 때 전사한 마다시(馬多時)라는 인물로 추정된 후보들 중 한 명으로 안골포에서 투항했던 항왜 준사가 과거 자신의 상관이었던 마다시의 시체를 알아보았다. 이순신은 부하 김돌손을 시켜서 마다시의 시체를 건져냈고, 준사가 마다시의 얼굴을 보고 그가 맞다는 것을 확인하자 이순신은 그 시체를 토막내어 걸어서 일본군의 사기를 완전히 꺾어버렸다.

형인 미치유키[4]는 자식을 남기지 못해서 그 후손은 아예 단절되어 버렸고, 미치후사의 집안은 차남인 나가치카(長親)가 이었다. 나가치카는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서군에 일시 가담했지만 아내의 백부가 동군 진영에 합류한 후쿠시마 마사노리였던 덕에 목이 날아가는 대신 기존 이요국의 영지를 몰수당하고 규슈 동쪽 산간 지방 분고국(豊後国)의 모리 번(森藩)으로 전봉당해 그곳의 번주가 되었다.[5] 에도 막부 말기 조슈 번 번사로 금문의 변 때 모리 군을 지휘했다 전사한 키지마 마타베는 그의 후손이다.[6]

무라카와 고헤이(村川浩平) 박사가 1996년2013년에 발표한 논문 《하시바 씨 하사와 도요토미 성 하사》와 《덴쇼 분로쿠·게이초 시기 무가서임과 도요토미 성 하사》에 따르면 구루시마 미치후사가 시점은 확실하지 않지만 히데요시로부터 도요토미(豊臣) 성을 하사받았다고 주장하였다.

3. 대중매체에서


[1] 물결 모양으로 알려져 있으나 이 가문은 이나바 가문으로 구루시마와 도쿠이 가의 물결 모양은 이후 3줄이 일자로 개정되었다.[2] 지금의 에히메[3] 이즈모국은 지금의 일본 시마네현 동부를 가리킨다.[4] 도쿠이 미치유키는 동생인 미치후사보다 먼저 죽었는데 당포 해전에서 이순신의 조선수군이 먼저 거북선으로 근접해서 미치유키가 탄 왜장선을 격파하는 도중에 미치유키는 중위장 권준(權俊)이 쏜 화살에 맞아 쓰러졌고, 사도 첨사 김완과 군관 진무성이 적선에 올라타 적장의 목을 베었다. 왜장 도쿠이 미치유키가 죽자, 왜군은 전의를 상실하고 육지로 도망치기 시작했다.[5] 그래도 석고 기준 1만 4천석이므로 영지의 규모 자체는 이전과 동일했으므로 기존 근거지를 잃었다는 것만 제외하면 크게 피해를 보지는 않은 셈. 이후 나가치카의 아들인 미치하루(通春)부터 구루시마 씨의 한자를 '来島'에서 발음이 동일한 '久留島'로 바꿨다.[6] 모리(毛利) 씨의 조슈 번(長州藩)과 쿠루시마(久留島) 씨의 모리 번(森藩)은 발음이 '모리'로 동일할 뿐 특별한 관계가 없다. 게다가 기지마 마타베에(来島又兵衛, 来島를 구루시마로 읽지 않고, 兵衛는 그 한자에서 알 수 있듯이 보듯 관직명에서 유래된 것이다)는 원래 키타무라 코우지로(喜多村光次郎)인데 来島又兵衛政常(政常의 읽는 법이 마사츠네와 마사토키 둘 다 가능하고 문헌상 발음이 알려져 있지 않으므로 이하에서는 한자로만 표시한다)의 딸과 결혼하면서 서양자가 되면서 입양으로 기지마(来島) 씨가 되었고, 나중에 政常이 사망하자 가독과 함께 누대의 이름인 又兵衛까지 승계하여 기지마 마타베에 마사히사(来島又兵衛政久)로 개명하였던 것이다. 물론 서양자도 가독을 승계한 것은 맞으니 혈연이 이어져 있지 않더라도 그를 키지마(来島) 씨의 후손으로 보는 것까지는 허용될 수 있겠으나, 한자만 来島로 동일할 뿐 읽는 법조차 다른 키지마(来島) 씨가 모리 번(森藩)의 쿠루시마(久留島) 씨와 관계가 있을 만한 아무런 사정이 보이지 않으므로, 별도의 출처가 제시되지 않는 이상 그를 쿠루시마 미치후사(来島通総)의 후손으로 볼 수는 없다. 다만 출처가 제시될 경우 유효할 수도 있으므로 삭제 대신 삭선처리함.[7] 보병, 기병, 철포[8] 유병준은 형인 구루지마 미치유키와 더불어 1인 2역을 맡았으며 두 캐릭터의 차별을 위해 목소리 톤과 행동을 달리 하고 미치후사의 눈 부분에 따로 분장을 했다. 미치후사는 사망 당시 30대였는데 작중 미치후사는 전혀 30대 같지 않은 미스가 있다. 배역을 맡은 배우 유병준의 나이가 많았을 뿐이지 드라마 설정으로도 와키자카 야스하루도도 다카토라보다 어리고 계급도 낮은 36세의 젊은 장수였다.[9] 미치후사가 이순신에게 반격을 당하고 밀려나 있는 곳에 깃발이 있었는데 이순신이 칼을 휘두르자 깃발이 썰려나가는 간접적인 묘사가 나온다.[10] 일본에서는 스고 타카유키, KBS 방영분에서는 탁원제가 더빙을 맡았다. 스고와 탁원제는 〈작안의 샤나〉에서 같은 일본 무사인 천목일개를 연기했다. <명량>에서는 일본어로 연기했는데 류승룡의 일본어 발음이 영 좋지가 않았다는 평가를 받았고 이 때문인지 일본에서 상영되었을 때는 다른 일본인 배역과 마찬가지로 재녹음되었다. KBS에서 방영했을 때는 일본인 배역은 전부 한국어로 재녹음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