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모에 미러 (일반/밝은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4-09-17 16:50:10

도쿠이 미치유키

구루지마 미치유키에서 넘어옴
파일:이나바 가몬.svg

得居通幸(とくい みちゆき)
(1557년 ~ 1592년)

1. 개요2. 생애3. 대중매체에서

[clearfix]

1. 개요

센고쿠 시대의 무장이다.

2. 생애

구루시마 성주(来島城主)였던 무라카미 미치야스(村上通康)의 장남. 다른 이름으로는 미치토시(通年), 미치유키(通之), 미치히사(通久) 등으로도 불린다. 도쿠이 씨에 입적하여 이를 계승하였으므로, 아버지 무라카미 미치야스가 1567년에 사망한 후에도 가독을 상속받지는 못했다. 가독을 승계한 것은 사남 무라카미 미치후사이다.

1582년에 동생 무라카미 미치후사[1]와 함께 오다 군에 항복했다가 무라카미 타케요시 등 고노 가문에 남아있던 무라카미 수군에 공격을 받았고 무라카미 수군을 돕는 모리 가문에게도 공격을 받았으며, 1584년 2월에 모리 가문이 이요 국으로 출병해 3월 17일에 모리 가문 측의 장수인 시시도 모토타카가 에라 성을 공격하자 미치토시는 에라 성, 카시마 성에서 저항했다.

1585년에 히데요시의 시코쿠 정벌 때 선봉이 되어 에라 성을 중심으로 한 3천여 석의 영지를 받았으며, 1587년의 큐슈 정벌, 1590년의 오다와라 정벌에도 참전했다.

1592년에 임진왜란에 출정했다. 당포 해전에서 수군의 지휘관으로 첨전했는데 이순신의 조선 수군이 먼저 거북선으로 근접해서 미치유키가 탄 왜장선을 격파하는 도중에 미치유키는 저항하다가 중위장 권준(權俊)이 쏜 화살에 맞아 쓰러졌고, 이때를 노린 사도 첨사 김완과 군관 진무성이 병사들을 이끌고 적선에 올라타 일본군과 교전을 벌이면서 도쿠이 미치유키는 이때 전사했다. 사후 김완과 진무성이 그의 목을 베었다. 일본군 장수 도쿠이 미치유키가 죽자, 일본군 병사들은 전의를 상실하고 배를 버리며 육지로 도망쳤다.

전투 직후 조선군이 그의 배를 수색할때 구루지마의 부채를 습득했다고 한다. 이 부채는 보통 부채가 아니라 도요토미가 친필 서명까지 새겨서 그에게 하사한 황금 부채로, 이순신이 선조에게 전리품으로 보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이 부채는 함께 참전했던 가메이 고레노리의 것이라는 게 정설이다.

코바야카와 타카카게와 서로 주고받은 편지가 남아있는데, 이 편지를 주고 받은 시기에 대해 논란이 되고 있다.

후사가 없었으므로 그의 영지는 본가인 구루시마 미치후사에 더해졌다.

3. 대중매체에서

파일:external/img.bemil.chosun.com/20140615023404.jpg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 구루지마에게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모두 모자량으로 퇴각한다....!
거기서 원군과 합류할 것이야....!
당장 전열을 정비하고 가메이에게 기별을 해! 이순신 그놈은 내가 꼭 죽인다. 그놈 뿐만 아니라 내 손에 걸리는 조선놈이란 조선놈은 한놈도 남김없이 모조리 다 씨를 말린다.[2]
파일:/data9/2005/8/20/35/%B3%AA%C0%C7%C4%AE.jpg
파일:/data10/2005/8/20/168/%BA%D2%B8%EA%C0%C7%B1%B8%B7%E7%C1%F6%B8%B61.jpg


[1] 이 무렵 미치후사는 성명(城名)인 구루시마(来島) 씨로 바꾼다.[2] 사천 해전에서 이순신에게 패전한 후 이순신을 자신의 손으로 꼭 죽이겠다고 하는 말.[3] 동생인 구루지마 미치후사와 더불어 1인 2역이다.[4] 협공하기로 했던 자신의 부하들이 조선수군의 유인에 걸려 배가 당포에 좌초 되었어도 제시간에 도착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베어버리고 심지어는 말리려는 부하까지 베어버리는등 몰상식한 행동을 하다가 도도 다카토라가 와서야 멈추게 된다.[5] 다이묘와 군소 영주를 가르는 기준은 영지의 석고(수취량)가 1만석 이상인지였다.[6] 드라마 내에서도 면전에서 미치유키가 도도를 무시하며 모욕적인 언사를 내뱉고 나가자 도도의 부관이 해적 출신 주제에 감히 다이묘인 자신의 상관을 업신여긴다며 분개하는 장면이 있다. 도도 또한 분노한 듯 했으나 자신의 처지가 다른 장수들이 승승장구하는 와중 별 것도 아닌 조선군에게 처음으로 패배한 패전지장이었기에 차마 따지지 못하고 울분을 삭히는 것으로 묘사된다.[7] 실제로 시마즈 요시히로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개가 되어 조선 정벌에 참여한 후 시마즈 요시히사는 그런 요시히로를 가문의 수치로 여겼다.[8] 주요 작중 시점이 사천 해전으로부터 1달 뒤였기 때문에 사천 해전 이틀 뒤에 발발한 당포 해전에서 미치유키가 전사했으므로 등장할 일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