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대 시마즈 당주 시마즈 요시히로 島津義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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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3a3c4f><colcolor=#fff> 출생 | 1535년 8월 21일 |
사쓰마국 이자쿠성 (현 가고시마현 히오키시) | |
사망 | 1619년 8월 30일 (향년 84세) |
오스미국 카지키 (현 가고시마현 아이라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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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마즈의 가몬(家紋), 동그라미에 열십자(丸に十文字)[1] |
1. 개요
일본 센고쿠 시대와 에도 시대의 무장이자 다이묘. 시마즈 4형제 중 둘째로 사쓰마 시마즈 가 제17대 당주이다.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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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하십시오.3. 기타
- 임진왜란 당시 가장 많은 조선의 도공(陶工)들을 끌고 간 것으로도 악명이 높다. 특히 정유재란은 '도자기 전쟁'으로도 불린다. 당시 일본에서는 차를 즐기는 다도가 융성해 전투 이후 포상으로 다기[2]를 내려주기도 하는 등 좋은 다기에 대한 수요는 높았으나, 이에 비해서 당시 일본의 도자기 기술은 낙후돼서 조선의 막사발조차 일본에서 예술품 대우를 받을 정도였다. 그런 조선 도자기는 다이묘들에게 권력과 부의 상징이였다. 시마즈는 일본으로 귀환하면서 전라도 남원성에서 박평의(朴平意)·심당길(沈當吉)을 비롯한 80여 명의 조선 도공들을 납치하여 끌고 갔으며, 심당길의 후손들은 일본 3대 도자기이자 세계 도자기의 명품으로 이름난 사쓰마 도자기를 굽는 심수관가(家)라고 불린다. 박평의 역시 도공으로서 심당길의 친구였으며 같이 일본에 끌려가 대대손손 도자기 산업에 전념하여 번창하였으나 1886년 12대손 박수승(朴壽勝)부터 도고(東鄕) 가문의 족보를 구매하여 개성하였는데 그의 아들이 바로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제 58·63대 외무대신을 역임하였던 도고 시게노리(한국명 : 박무덕(朴茂德))이다. 13대손 이후부터 가업이었던 도자기 산업에서 손을 떼고 정치를 새로운 가업으로 잇고 있다.
- 조선에서의 악명과는 다르게 본인 휘하의 가신과 부하, 병사들에게는 자상한 덕장이였다. 시마즈는 병사들과 모여 같은 난로로 추위를 견뎠으며, 임진왜란 당시 한반도의 정신이 나갈것 같은 수준의 혹독한 추위로 다른 다이묘들의 군대에서 동사자가 속출할 때 시마즈군에서는 단 한 명도 동사하지 않았을 정도로 충분한 보급을 해주면서 사기를 끌어올렸다고 한다. 또한 가신이 아이를 낳으면 초대해서 축하도 하고, 아이를 무릎에 직접 앉혀놓고 덕담도 해주며 축복을 내려줬었다. 또한 부인을 상당히 존중하고 사랑한 애처가였고, 아내에게도 임진왜란 당시 편지를 자주 보내면서 자신이 죽더라도 가문과 아이들을 위해 강하게 살아달라며 당부하기도 했다. 이렇듯 덕장이자 가신들의 신망이 매우 높았기 때문에 시마즈의 퇴각이라는 극한의 돌격퇴각이 가능했다.
- 임진왜란 당시 빛의 강도에 따라 동공의 크기가 달라지는 고양이의 특징을 이용해 시간을 파악하고자 고양이 7마리를 조선에 데리고 갔는데, 아들 시마즈 히사야스가 이 고양이들을 매우 아꼈다고 한다. 이 중 두 마리만이 살아돌아왔고, 가고시마에는 이 고양이들을 모신 신사가 있다.
- 임진왜란 당시 조선 호랑이 사냥하면 유명한 인물은 가토 기요마사이나, 시마즈도 도요토미의 명령으로 호랑이 사냥에 나서기도 했는데 당시의 기록화가 남아있다. 부하들을 이끌고 나갔다가 비가 내리는 통에 조총도 못 써먹고, 두 마리를 잡기는 했지만 인명피해는 피할 수 없어서 수 명이 사망했다고 한다. 히데요시에게 호랑이 가죽과 고기를 바친 공로로 감사장을 받기는 했지만, 그 후로는 호랑이 사냥은 금지되었다고 한다.
조선출병 시마즈군 호랑이사냥도(朝鮮出兵島津勢虎狩絵巻)
- 도요토미 히데요리 생존설에 단골로 등장한다. 오사카 전투 패전 이후 오노 하루나가, 사나다 노부시게, 키무라 시게나리 등이 도요토미 히데요리와 함께 사쓰마로 도망갔다고 하는데, 에도 시대 초기의 소설인《사나다 삼대기》에도 등장하는 걸 보면 꽤 오래된 떡밥인 듯하다. 당시 오사카 등지에서 히데요리가 사쓰마로 도망갔다는 동요가 유행했다. 세키가하라 전투 당시 우키타 히데이에를 숨겨주었던 일이 있어 이런 소문이 생겼을 법하다.
- 시마즈 요시히로가 본국 사쓰마 외에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받은 하리마국의 작은 영지에서 영지 관리를 돕던 인물에게 시마즈 가문의 성씨와 가몬을 하사한 일이 있는데, 그 인물의 후손이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한 일본의 유명 기업 시마즈 제작소의 창립자 시마즈 겐조라고 한다. 그래서 회사 로고로는 시마즈 가문의 가몬을 사용한다.
4. 대중매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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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하십시오.[1] 이 가몬은 '구쓰와'라고 부르며, 일본식 '말의 입에 다는 재갈'이다. 본래는 붓으로 쓴 '十'자인 '쥬지몬'이었으나 이후 위와 같은 형태로 바뀌었다.(참고)[2] 다도에 쓰이는 용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