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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2-27 04:32:26

제2차 진주성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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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c0c0ff,#00003f> 제2차 진주성 전투
第二次晋州城戰鬪
파일:Siege of Jinju 1593.png
장소
조선 경상도 진주성
시기 1593년 7월 19일 ~ 27일 (음력 6월 21일 ~ 29일)
장소 조선 경상도 진주목 진주성
원인 명(明)과의 협상을 위한 일본의 무력 시위 및 보복전.
교전국 조선 파일:조선 어기.svg 일본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1920px-Goshichi_no_kiri_inverted.svg.png
지휘관 경상우병사 최경회
충청병사 황진
진주목사 서예원
사천현감 장윤
김해부사 이종인
거제현령 김준민
진주판관 성수경
진주판관 최기필
창의사 김천일
복수의병장 고종후
공조좌랑 양산숙
적개의병장 이잠
복수의병장 오유
의병장 민여운
의병장 강희보
의병장 강희열
의병장 황대중
우키타 히데이에
가토 기요마사
고니시 유키나가
소 요시토시
고바야카와 다카카게
모리 히데모토
시마즈 요시히로
시마즈 토요히사
다치바나 무네시게
쵸소카베 모토치카
나베시마 나오시게[1]
쿠로다 칸베에
쿠로다 나가마사
다테 마사무네
이시다 미츠나리
오타니 요시츠구
시마 사콘
모리 카츠노부
카타기리 카츠모토[2]
호소카와 다다오키
아리마 하루노부
오무라 요시아키
마쓰라 시게노부
고토 스미하루
마츠이 오키유키†
다카하시 무네하스
모리 히데카네
쓰쿠시 히로카도
다카하시 모토타네
아카츠키 다네나가
이토 스케타카
세가와 히다카즈
아사노 나가마사
아사노 요시나가
오타 도모스케
야마다 도조
이나마 사다미치
아카시 노리자네
벳쇼 요시하루
히토츠야나가 가유
다케나가 시게토키[3]
하토리 가즈타다
다니 모리토모
이시카와 사다미치
미야베 나가히로
가키야 츠네후사
키노시타 시게타카
병력 약 관군 의병 도합 6,000명
민간인 24,000명
92,972명[4]
피해 전멸 피해 규모 불명
결과 진주성 함락. 일본군의 진주성 군민 대거 학살.

1. 개요2. 제2차 진주성 전투의 배경
2.1. 일본군의 보복전 준비2.2. 지원 의지가 없었던 명군2.3. 수성과 포기 사이에서
3. 양측 병력 구성 및 진주성의 지리4. 제2차 진주성 전투의 전개
4.1. 전투 전야(6월 15일 ~ 6월 20일)4.2. 6월 21일4.3. 6월 22일4.4. 6월 23일4.5. 6월 24일4.6. 6월 25일4.7. 6월 26일4.8. 6월 27일4.9. 6월 28일4.10. 6월 29일
5. 7월 이후 전라도의 상황6. 민간인의 항거7. 끌려간 포로와 탈출한 생존자8. 제2차 진주성 전투의 영향
8.1. 패전 책임 논란8.2. 정평구의 비거?
9. 제2차 진주성 전투를 묘사한 대중 매체10.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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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임진왜란 중이던 1593년 음력 6월 22일부터 29일까지 벌어진 전투. 단일 전투 기준 임진왜란 최대 규모의 전투이며 또한 가장 많은 사상자가 나온 전투로 추정되기 때문에 진주성의 혈전이라고도 불린다.

일본군의 경우 참전 장수 명단을 보면 클라스가 장난이 아니다.[5] 동원한 병력 역시 9만명이 넘는 숫자인데 이는 당시 강화협상에 따라 부산포로 퇴각한 일본이 점령지를 최소한 유지만 할 수 있는 수준의 병력만 남기고 지상의 모든 가용 전력을 싸그리 모아온 것이나 다름없다. 그야말로 히데요시가 전설이 된 불사신을 죽이기 위해 모든 걸 걸었던 셈이었다.[6] 조선의 경우 승산이 없어보이는 상황에 상당수의 무장들이 구원을 포기하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장수와 의병장들이 진주성을 지키기 위해 사지에서 모든 걸 걸었으며 그야말로 단두대 혈전이라 해도 무방하다. 이 전투에 대해 일본군을 따라와 조선에 머물던 한 왜승(倭僧)은 "조선의 용감한 사람들은 모두 이곳에서 죽었다."는 글을 남겼을 만큼 일본으로서도 간담이 서늘했던 전투였다.
파일:external/www.segye.com/20090414000461_0.jpg
진주성 전도
내성과 외성이 있고, 남쪽엔 강이 있으며, 서쪽에 절벽이 있어 평지읍성치고는 매우 견고한 성이다. 다만 전쟁 직전 확장해 쌓았던 동문 쪽에 대한 방어력 문제가 임진왜란기에 지속적으로 제기되었다. 그러나 2차 진주성 전투 때 먼저 떨어진 곳은 방어력이 약한 동쪽이 아니라 북장대 쪽이다. 현대에는 외성(초가집으로 보이는 집들이 바깥의 성벽으로 보호되는 지역)은 허물어졌고 내성만 남아있다.

2. 제2차 진주성 전투의 배경

2.1. 일본군의 보복전 준비

1593년 1월 6일 ~ 9일에 걸처 벌어진 4차 평양성 전투 (또는 '평양성 수복')은 일본군에게 크나큰 충격을 안겨주었으며, 흔들리던 전황이 확실히 조선 측에 기우는 하나의 계기가 되었다. 이전까지 일본군은 보급의 어려움 속에서도 간신히 대등한 수준의 전국을 펼치고 있었지만 이때를 기점으로 완전히 열세에 처한 것이다.

평양의 패전으로 인해 북상했던 일본군이 서울로 총퇴각한 결과 안그래도 식량이 부족하던 서울의 일본군은 심각한 식량난에 빠졌으며, 각지의 성들 사이의 교통로가 자주 끊어지면서 위기감이 고조되었고 혹독한 추위까지 이르러, 벽제관 전투에서 반전이 일어나나 했던 전황은 행주 대첩으로 인하여 완전히 조선 - 명 연합군 측으로 넘어간다. 심각한 손실을 더는 견디지 못한 일본군은 결국 3월달에 부산포로 총퇴각한다. 임란 개전 후 1년만이었다.

히데요시는 부산포로 퇴각한 이후 4월부터 경상우도 및 전라도 공략을 명령하면서[7] 동시에 화전 양면책을 구사해 6월 초엽부터 명나라 측에 화친 협상을 시도한다. 프로이스의 일본사에 따르면 히데요시는 전라도 공격, 그에 앞서 진주성을 함락시키는 것이 협상에서 우위에 설 수 있는 조건이라 본 듯 하다.
히데요시는 조선에 출병한 제장들에게 전라도를 공격하고, 12개의 성새(성과 요새)를 쌓을것을 명령했다. 하지만 제장들은 먼저 성새를 건축해야 한다는 견해라서 구로다 간베에를 히데요시에 파견해 뜻을 전하기로 했다. 히데요시는 적어도 한번은 전라도를 공격하고 나서 사자를 보내야한다며 제장들을 비겁자라고 불렀다. 구로다 간베에에게도 격노해 접견하려조차 하지 않고 봉록과 저택을 몰수했다. 이에 구로다 간베에는 삭발한뒤, 오랫동안 쌓은 공적이 사라졌다면서 조스이(如水)라 칭하고[8] 조선으로 돌아갔다.(프로이스 일본사)
또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전투에 적극적이지 않은 다이묘라고 판단된 오토모 요시무네 및 하타 노부토키, 시마즈 다다토키에 대해 꾀병을 부리는 등포스팅 참조 전투에 적극적이지 않았다는 이유로 영지를 몰수했고 시마즈 요시히로에게는 전년도(임진년)처럼 아무런 공적도 쌓지 못한다면 가문이 끊길 것이다는 협박을 하는 등[9] 참전 다이묘들을 닥달했고, 이에 영지를 몰수당하고 가문이 끊길지도 모른다는 공포에 빠진 참전 다이묘들은[10] 하다못해 진주성이라도 함락시켜 전공을 세움과 동시에 히데요시의 분노를 피하고자 했다.

이렇게 일본군의 진주성 공격이 결정되었다.

2.2. 지원 의지가 없었던 명군

이때에 명나라는 평양성 수복전을 통해 전쟁 목적, 즉 만주로 전쟁이 확대되는 것을 막는데 성공하여 참전의 일차 목적을 달성하자[11] 더이상의 전역 확대를 막고자 일본과 협정을 맺고 조선에서 빨리 떠나고 싶어했다.[12] 조선 측은 이러한 화친 기도에 몹시 반대했으나 상국의 권위를 활용해 주도권을 잡은 것은 명이었다. 단지 유격 오종도(吳宗道)만이 휘하 군대를 이끌고 한양에서 남하했으나 죽산에서 함몰 소식을 듣고 귀환한다.

이런 과정 속에서 일본군의 위와 같은 분위기가 강화 협상을 맡은 심유경에게 파악되게 된다. 심유경은 이에 공격 중지를 강력하게 요구했으나 고니시 유키나가는 어쩔수 없다는 답변을 했으며,[13] 어떻게 해서든 진주성을 공격하는 것은 불가피하니 차라리 진주성을 빈 성으로 만들면 피해가 없을 것이라는 답변을 한다.
『我日本往晋州兵馬三十萬, 恐不能當, 修書密報。』 今本府之民, 預避其鋒銳。 彼見城空人盡, 卽撤兵東回 해석 - 이번에 진주로 가는 우리 일본 군대가 30만 명이나 되니 아마도 당해내지 못할 것이다. 편지를 보내어 은밀히 알려』 진주 백성들로 하여금, 미리 예봉(銳鋒)을 피하게 하라. 그렇게 하면 우리 일본 군대도 성이 텅 비고 사람이 하나도 없는 것을 보고는 곧 철병(撤兵)하여 동쪽으로 돌아올 것이다. - 선조 실록 40권, 26년(1593 계사 / 명 만력(萬曆) 21년) 7월 10일(임술) 8번째 기사

이에 명군은 일본군의 의도가 명백하니 조선측에 진주를 방어하지 말것을 권하기까지 했다. 명군이 진주성 구원의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한 것은 6월 말이었다. 난중잡록에 따르면 이여송은 경상도, 전라도 일대 명군에게 진주성 구원을 지시했다고 하고, 선조 실록에서도 7월 10일이 돼서야 양도의 병력을 진주성 구원을 위해 파견하고 또한 서울에 주둔중인 명의 주력군 중 18,000명을 끌고 가겠다는 이여송의 약속이 나온다. 그러나 대구, 남원, 상주에 있던 명군을 다 합친다 해도 14,000명에 불과할 뿐이었고, 이미 전쟁 목적을 달성했다고 여긴 명군 장수들은 진주성 구원 명령에 따르지 않았고 이여송 또한 차일피일 출발을 미루기만 했다.

2.3. 수성과 포기 사이에서

그래서 진주성 방어를 조선이 스스로 해야하는데 문제는 조선도 딱히 방도가 없었던것이다. 이미 1년여의 전투를 벌인 끝에 조선 측의 여력이 많이 소모되었을 뿐만 아니라 명군의 군량을 대면서 많은 국력 소모가 존재했다. 그래서 선조를 비롯한 조선 측은 일본군이 지구전으로 밀어붙이면 아무리 진주성이 요새라 해도 답이 없다면서 명군에 몇번씩이나 구원 요청을 했다. 하지만 대부분 무시당했을 뿐더러 때가 늦기도 했다.
상이 정원에 전교하였다.“진주의 일이 매우 위급하다. 지금의 적세를 보건대 실로 심상치가 않다. 적들이 만약 진주 근방에 있는 사방의 고을을 다 함락하고서 진영(陣營)을 벌여 놓고 군대를 나누어 주둔시켜 내외의 교통을 끊고 지구전(持久戰)으로 오랜 시일을 두고 괴롭힌다면 아무리 성을 잘 지키더라도 종당에는 스스로 지쳐 죽고 말 것이니, 오늘날 진주를 구원하는 일은 일각이 급하다. 경략에게 품첩(稟帖)할 것을 이미 전교하였거니와, 전에 이미 구원을 청하기는 하였지만 제독에게는 계속 구원을 청하는 것이 좋을 듯하니 함께 품첩을 보내도록 하라.”- 선조 실록 1593년 7월 13일자

당시 분위기는 '여긴 도저히 못 막을 곳.'이었다. 실록 및 다른 기록을 보면 '여기는 지킬 수 없으니 후퇴해서 병력이라도 보존해야 한다'와 '설령 못 지킨다고 해도 끝까지 싸워야 한다'가 충돌하고 있음을 말하고 있다.

그때 막 도원수가 된 권율은 진주성을 지킬 수 없다고 생각하였고, 전라 병사 선거이(宣居怡)와 영천 군수 홍계남(洪季男)이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말하기를 ‘적은 많고 우리는 적으니, 물러나 안 쪽을 지키는 것만 못하다.’라고 주장(선조 수정 실록 27권, 선조 26년 6월 1일 갑신 3번째 기사)했다. 의병장으로 이름을 떨치던 곽재우도 이런 병력차는 도저히 중과부적이라고 생각했는지 "차라리 자결을 하면 했지 저런데서 개죽음은 못하겠다". 면서 진주성 구원을 포기한다.
“오직 임기 응변할 수 있는 자만이 제대로 군사를 부릴 수 있고 지혜로운 자만이 적을 헤아릴 수 있는 것입니다. 지금 적병의 성대한 세력을 보건대, 그 누구도 당하지 못할 기세를 떨치고 있는데 3리(里)밖에 안 되는 외로운 성으로 어떻게 방어하겠습니까. 나는 차라리 밖에서 원조를 할지언정 성에 들어가지는 않겠습니다.”하니, 좌순찰사(左巡察使) 김늑(金玏)이 그를 꾸짖기를,“그대가 대장의 명을 따르지 않으면 군율(軍律)에 어쩌려는가.”하자, 곽재우가 말하기를,“이 몸이 죽는 것은 족히 아까울 것이 없으나 전투 경험이 많아 노련한 군졸들을 어떻게 차마 버릴 수 있겠습니까. 라고 했다.”-선조 수정 실록 27권, 선조 26년 6월 1일 갑신 3번째 기사

반면에 일부 장수와 군인, 소수의 의병들은 기어이 진주성으로 들어갔다. 사실 2차 진주성 전투는 딱히 기습도 아니었고 양측 모두 전투가 벌어질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기에 진주성의 군인들은 충분히 피신할 시간이 있었다. 그러나 진주성 방위군 측은 명군과 다른 조선군 장수들의 이러한 권고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진주에 남아 싸울 것을 결의했다. 이들은 일본의 진정한 의도를 알 수 없고, 무슨 이유든 진주가 함락되면 전라도가 위험하므로 계속 진주를 방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의병장 김천일은 "호남은 나라의 근본이고 진주는 실로 호남의 울타리이다."라며 진주를 지킴으로서 호남을 보호할 것을 주장하고 대답을 기다리지 않은 채 곧장 진주성으로 들어갔다고 한다. 그는 진주성에 들어간 직후 조정에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신이 이달(6월) 14일에 진주성(晉州城)에 도착하였는데, 목사(牧使) 서예원(徐禮元)이 중국군 지대(支待)하는 일로 나갔다가 저물어서야 돌아왔습니다. 그와 함께 변란에 대처하는 여러 가지 일을 상의하여 결정하였습니다. 15일에 전라 병사 선거이(宣居怡), 조방장(助防將) 이계정(李繼鄭), 충청 병사 황진(黃進), 조방장 정명세(鄭名世), 경기 조방장 홍계남(洪季男), 경상 우병사 최경회(崔慶會), 복수 의장(復讐義將) 고종후(高從厚)들이 잇따라 달려왔는데, 다음날 전라 순찰사(全羅巡察使) 권율(權慄)이 전라 병사와 각항(各項)의 장령(將領) 등에게 전령(傳令)하여 모두 나아오게 하므로 제장(諸將)이 일시에 달려가니 성중이 흉흉하여 이 때문에 일이 누설되었습니다. 신이 최경회·황진 등과 더불어 겨우 수합(收合)하였으나 3천 명에 불과하였습니다. 성안은 넓은데 이처럼 주린 군사로서는 방어하기가 쉽지 않으니 지극히 우려됩니다. 대개 진주는 바로 전라도의 보장(保障)인데 순찰사 이하가 방어를 철수하여 산음(山陰)으로 옮겨 갔으니 더욱 우려됩니다.
선조실록 선조 26년 7월 10일자 기사

더군다나 당시 1차 전투의 승전으로 인해 영남 지역의 백성들 및 인근의 백성들 사이에 '일본군으로부터 도망치기는 어렵고 진주성은 견고해서 함락 안된다' 라는 소문이 번져 수만의 백성들이 그곳으로 몰려들었다. 그들의 느린 피난 속도는 일본군의 진격으로 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고, 가장 안전하다고 생각되는 피난처로 진주성을 떠올리는 수 밖에 없었다. 어쩌면 전라도를 지키는 길목이라는 명분과 함께 수성의 동기가 하나 더 늘었을 수도 있다. 일본군을 피해서 온 백성들을 차마 버릴 수 없었을 것이다.

조선군의 지휘관들이 거의 패배해 죽을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인지했으면서도 밀려오는 피난민과 성내의 백성들에게 피난 권고를 제대로 하지 않은 것을 비판하는 글이 넷상에 존재한다. 하지만 이런 비판은 말도 안되는 것이, 민간인들의 피난 속도는 정예화 된 10만의 병력으로부터[14] 결코 자유로울 수는 없었고 당시 소수의 조선군 병력은 옹성 없이는 그런 상황을 막아낼 수 없었다. 권고한다고 해서 진주성으로 몰려드는 주민들을 통제할 수 있었을지는 의문이다.[15] 만약에 진주성에서 전투가 없었더라면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압박을 받던 일본군은 어떻게든 전공을 만들기 위해 인근의 조선 백성들을 공격하여 학살했을 것이고[16], 인근 백성들 또한 일본군 병력이 집결하면서 흉흉한 기운을 풍겨대는 걸 눈치채기는 어렵지는 않았을 것이다.

국조인물고를 보면 곽재우가 황진에게 제발 진주성을 포기하라고 말했으나 이를 따르지 않고 끝내 진주성에서 전사해서 곽재우가 슬퍼했다는 내용도 있다. 황진의 경우 당시 웅치 전투이치 전투등 여러 전투에 참여하여 전공을 세우던 명장 중 한명이었으며[17], 충청도 절도사의 직책까지 오른 장수였다. 조정에서도 그만한 장재를 이런 데에 소모시킬 생각은 없었고, 그가 참가한다 했을 때 '아니, 그 지위에 있는 사람이 담당 구역아닌 곳에 왜 목숨걸고 감? 님은 거기서 죽기 아까운 인재임. 가지 마셈.' 라며 말리는 분위기였지만 그는 죽음을 각오하고 참여했다.[18]
당초에 황진이 진주(晉州)로 나아가려 할 때 의병장(義兵將) 곽재우가 황진을 만류하며 말하기를, “진주는 외로운 성(城)이니 지켜낼 수가 없다. 그리고 공은 충청도 절도사를 맡고 있는 만큼, 진주를 지키다 죽는 것은 직분에 걸맞지 않는다.”고 하였으나, 공은 말하기를, "이미 창의사(倡義使)에게 승낙하였으니, 비록 죽는 한이 있어도 식언(食言)할 수는 없다."고 하였다.[19] 이에 곽재우가 공의 뜻을 되돌릴 수 없다는 것을 알고는 마침내 술잔을 나누며 서로 작별하였는데, 뒤에 공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서는 애통해하며 슬퍼해 마지않았다. 아! 공과 같은 사람이야말로 정말 열장부(烈丈夫)라고 해야 할 것이다. (국조인물고, 권54 왜난시 입절인(倭難時立節人) 피구인부(被拘人附)

즉, 2차 진주성 전투에 참전한 의병장과 관군 장수들은 (어차피 거기 있었어야 하는) 서예원 빼고 다들 죽을 것을 각오하고 사지(死地)로 온 것이다. 임진왜란 사상 최대의 혈전은 이렇게 시작된다.

3. 양측 병력 구성 및 진주성의 지리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이미 3월 10일 경상도 상주 주변, 부산포 주변, 상주와 부산포의 연결선상의 축성 및 병력 배치, 수군 배치와 더불어 진주성 공략군으로 37,100명의 병력을 편성할 것을 명령하고 있었다. 이때에 이 진주성 공략군에는 마에다 토시이에, 우에스기 카게카츠 등 5대로급 영주들이 다수 배치되어 있었으나, 정작 이들은 다들 알다시피 바다를 건너오지도 않았기 때문에 아직은 탁상공론에 불과했다.

그러나 4월에 일본군이 부산포 일대로 총퇴각한 직후 히데요시의 진주성 공략군 편성은 구체화되었으며, 5월 20일 구체적인 공략군을 편성, 공격 명령을 내린다.

이때에 일본군 구성은 다음과 같다.[20] 다른 임진왜란 전투에서는 고니시 유키나가가토 기요마사 같은 일본 기준으로 볼 때 애송이 다이묘들이 주력이었으나 이 전투에서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진주성을 무조건 함락시키라는 특명을 내렸기에 다테 마사무네 같은 거물 다이묘[21]도 참전하게 되었다.

합계 92,972명

그야말로 10만 대군. 사실상 일본군과 주요 무장 전체가 휘하 병력을 이끌고 참전하였다고 볼 수 있다. 공성전에 직접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일본 수군도 동원되어 수로를 통한 조선 수군의 배후 공격과 진주성 구원을 견제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1대, 2대, 3대와 4대, 5대 연합 부대는 추첨에 따라 한 부대는 주변에서 동원될 지 모르는 구원군을 방어하고 나머지 세부대는 성을 공략할 것을 명령하고 있다.[25]

이에 대응한 조선군은 최소 3,000명, 최대 15,000명까지 추산이 가능하다. 그러나 정확한 숫자는 밝혀지지 않았다. 제2차 진주성 전투 5개월 전 진주에 머물던 김성일 휘하 병력 수는 15,000명에 달하나 이 병력 전체가 진주성 방위군이었을 가능성은 많지 않다는 점에서[26] 이것을 진주성 방위군 총수로 계산하는 것은 어려움이 따른다. 진주성에 입성해 전투를 치른 조선군의 병력 수 추정은 선조 실록 7월 16일 기사와 7월 22일 경상우도 감찰사 김늑의 진주성 전투 파악 전사자 수를 비교해 확인할 수 있으나, 김늑 자신이 말했다시피 일본군이 근처에 있었기 때문에 전사자 수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다. 게다가 이 전투 이후 진주성에서 생존하여 돌아온 조선 측 장수는 한명도 없었다. 결과적으로 입성한 관군 및 의병 총 숫자는 아무도 확실히 알지는 못한다.

조선군 병력 추정치

입성시 파악된 병력의 수와 파악된 전사자 수가 상당히 차이나며, 특히 원래 진주성 방위를 맡았던 '본주군'의 총수가 몇명이었는가, 진주성 방위 준비를 할 때에 이 병력도 헤아려졌는가는 논란거리이다. 현재는 기본적으로 진주성에 배치돼 방어하던 주둔군인 본주군이 어림잡아 2,400명 ~ 3,000명. 김천일, 최경회, 황진 등이 입성하면서 끌고 들어가 규합한 병력이 2,800명 ~ 3,000명, 이후 일본군이 진주성을 포위하기 직전까지 입성한 의벙 및 관군 수 미상, 도합 6,000명 ~ 7,000명 정도가 진주성 방어에 나선 것으로 파악된다. 총 규모는 진주 대첩의 2배에 육박했으나 병력 수에 비해 지나치게 지휘관이 많고 지휘 체계 단일화에 어려움이 있었지 않은가 여겨진다. 실제로 이는 조선 측이 추후에 분석한 패전 원인이기도 하다.[34] 물론 이건 싸우다 죽은 사람들에게 책임을 물을순 없으니 변죽을 올린거고 가장 큰 패인은 그냥 숫적 열세였다. 강을 끼고 있다지만 그래봤자 평지 읍성인데 10만에 육박하는 대군을 막아낸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일이었다.

명목상 지휘권은 진주 목사인 서예원에게 있었으나, 이전에도 도주 의혹이 있는 등 겁이 많고 능력이 모자랐던지라 의병장 김천일이 사실상 성 전체의 방위 사령관을 담당하고, 최경회와 황진, 장윤 등이 실 지휘를 맡았다.

그외에 다수의 일반 백성들이 있었는데, 진주 대첩의 영향으로 진주성이 함락되지 않을 것이라 여겨 더 많은 백성들이 입성했다고 한다. 조선 측 기록에는 약 6만, 일본 측 기록에도 진주성에서 죽은 자가 3만에 달한다는 것으로 볼때 수만, 어쩌면 3만 이상의 백성들이 진주성에 입성했다가 성이 깨지면서 대다수가 목숨을 잃은 것으로 보인다.

명군 유정 휘하의 임호가 이끄는 수만의 병력으로 진주성을 구원했다가 다치바나 무네시게, 고바야카와 히데카네 등에게 격파되었다.

진주성 남쪽은 험준한 절벽 아래에 큰 강이 흘러 공성이 아예 불가능했고, 서쪽도 절벽이 있어 방어에 수월했다. 북쪽은 3개의 못(대사지)으로 된 큰 늪지대가 형성되어 있었는데, 일본 측 사료인 《일본전사 조선역》에 따르면 폭이 약 100m, 길이가 700m ~ 800m에 달하는 수준이었다. 그러나 동남쪽 부분은 선조 24년 경상도 관찰사 김수가 성을 확장해 지었는데, 지나치게 넓고 아래로 내려 쌓아서 방위가 취약해졌다고 한다.[35] 이러한 동쪽의 약점을 보강하기 위해 서쪽에서 동쪽으로 참호를 파고 다시 남쪽으로 강에 연결되게 만들었으며[36], 동문 밖에 제방을 쌓아 성첩으로 삼았고, 또한 서북쪽도 대사지가 미치지 못하는 지역이 취약점으로 존재했는데 이지역의 방위를 강화하기 위해 호를 깊게 파서 물을 담아 취약점을 보강하였다.

또한 진주성 주위에는 4개의 작은 산성이 존재했다. 이들 산성들은 진주 대첩 당시 외곽에서 진주성과 호응하는 조선 측 병력의 거점으로 기능하여 승리에 이바지하였으나, 이때에는 너무 일본 측 병력이 많아 제대로 기능하지 못했다. 이러한 외곽 산성은 다음과 같다.

4. 제2차 진주성 전투의 전개

4.1. 전투 전야(6월 15일 ~ 6월 20일)

일본군은 6월 15일 군을 출발시켰다. 15일 당일 함안을 점령하고, 16일 반성을 차지했으며, 18일 정진을 건너 의령을 점령하였다. 일본군이 전진해오는 상황에서 이미 늦었다고 판단했는지 명군의 장수 유정부장인 왕필적과 상주 목사 정기룡이 19일 성에 들어와 "유 총병(유정)의 군사는 성의 외곽에서 지원하고자 하는데 그 선봉은 이미 삼가에 도착해 있으니 경들은 잘 방어를 하라" 하고 격려하고 돌아갔다.

4.2. 6월 21일

일본군 기병 200여 명이 동북쪽 산인 순천산에 올라가 성 주변을 정찰하고 군대를 투입해 진주성 주변에 해자를 메우는 일에 착수했다. 또한 인근 제현에 군대를 분산 주둔시켰는데, 수정 실록에 따르면 사방 수백 리에 달했다고 한다.

4.3. 6월 22일

아침 8시경에 일본군 기병 500여 명이 북산에 올라가 군세를 과시했고, 이후 10시에 일본군 본대가 도착했다. 일본군 제 4대, 제 5대 연합군은 개경원 산허리에 진을 치고 외부의 구원군을 저지하는 임무에 들어갔으며, 나머지 군은 향교 길가로 늘어서 진주성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일본 측 사료에 따르면 최종적으로는 동문은 우키타 히에이에가 지휘하는 제 3대가, 북쪽은 가토 기요마사가 지휘하는 제 1대가, 서쪽은 고니시 유키나가가 지휘하는 제 2대가 포진하였다 전한다.

일본군은 먼저 도착해 공격을 시작했다. 낮의 1차 공격에 대응해 조선군이 일본군 30여 명을 쏘아 맞추차 일단 물러났고, 초저녁에 다음 부대가 도착하자 일본군은 다시 공격, 저녁 10시에 물러났으며, 밤 12시에 다시 진격했으나 황진, 이종인, 장윤, 김준민, 오유, 이잠, 강희보, 강희열 등 조선군 장수들이 진두지휘로 방어전을 펼친 끝에 새벽 4시에 물러났다. 특히 순성장 직을 맡은 황진이 대활약했다고 한다.

또한 이때 일본군은 진주 대첩 당시 상당히 곤욕을 맛보았던 외곽 해자를 메꾸는 작업에 들어가, 서북쪽과 동남쪽에 둘러친 해자의 물을 빼고 흙으로 매꾸어 공격 루트를 만들었다.

이날 저녁 호위병 부장 강희보가 김천일에게 구원을 요청하는 전령을 파견할 것을 건의했고, 이에 강희보의 부하인 임우화를 파견했으나 일본군에게 붙잡혔다. 일본군은 이 전령을 결박한채로 공격조 맨 앞에 내세워 심리전을 전개하였다고 한다.

4.4. 6월 23일

일본군은 해자를 메꾸는 일을 마무리한 다음 죽창공성용 기구를 동원해 공격했으나 조선군의 격렬한 반격에 격퇴되었다. 조선군은 낮에 세번 싸워 세번 다 격퇴했고, 저녁에는 네번 싸웠으나 네번 다 격퇴했다.

4.5. 6월 24일

전날의 맹공 직후 일본군은 잠시 휴식을 취하면서 5천, 6천여를 전진 배치해 마현 쪽에 포진했고, 500명 ~ 600명 남짓을 동쪽에 전진 배치했다.

4.6. 6월 25일

동문 쪽 해자까지 마저 메꾸는 데 성공한 일본군은 이곳에 작은 언덕을 쌓고 정루를 설치한 다음 성을 내려다보며 사격전을 시도했다. 이에 황진이 진두지휘하여 진주성 안에 마찬가지로 언덕을 만들어 현자 총통을 올리고 맞사격전을 벌여 이를 격파했다. 이날의 공격도 23일과 마찬가지로 낮에 세번, 밤에 네번 있었으나 일본군은 모두 격퇴당했다.

이때에 고성의 의병장 최강, 이달 등이 진주성 구원을 시도했으나 일본군의 규모가 크고 경계가 삼엄해 접근에 실패했다. 오히려 최강이 이끄는 의병군 300명은 일본군의 역공에 포위 섬멸 당할 위기에 처하기도 했으나 최강의 분전으로 빠져나올 수 있었다.

4.7. 6월 26일

이날에는 일본군이 생가죽으로 짠 나무 방패(맨틀리트 계열로 추정된다)를 만들어 화살과 총탄을 막으면서 성을 허물기를 시도했다. 이에 성에서 바위와 나무를 아래로 굴려 막아냈다. 또한 동문 쪽에 높은 망루를 만들고 그곳에서 화공을 시도해 성 안쪽 초가집이 상당수 불타는 피해를 입었다. 이런 상황이 전개되자 목사 서예원은 겁을 먹고 우왕좌왕했고, 이에 김천일은 장윤으로 하여금 가목사를 삼았다.

직후 장마비가 내려 궁시가 풀어지고 병사들이 피곤해했다. 이에 일본군은 '대국의 군사도 장차 항복할 것인데 너희 나라가 감히 항거하는가?' 하는 글을 던지자 '우리는 죽음을 무릅쓰고 싸울 따름이다. 천명 30만이 지금 너희들을 추격하여 남김없이 무찌를 것이다.' 고 답했고, 이에 일본군은 '당장(唐將)[37]은 이미 모두 물러갔다.' 하는 등 심리전을 지속적으로 걸어왔다.

이날에도 밤낮으로 쉬지않고 공격해온 일본군을 격퇴하는데 성공했다.

4.8. 6월 27일

가토 기요마사 군과 구로타 나가마사 군이 귀갑차를 만들어 성을 공격했다. 이를 김해 부사 이종인이 진두지휘해 격퇴했다. 또한 동문과 서문 양쪽에 언덕을 쌓고 누각을 만든 후 사격전을 벌였는데 이런 공격에 조선군은 전사자가 300명에 달하는 큰 피해를 입었다. 순천 의병장 강희열도 이런 저격에 의해 전사했다.

초저녁에 일본군이 다시 북문을 공격해 성문 위로 올라오기까지 했지만 이종인에 의해 격퇴되었다.

4.9. 6월 28일

전날 저녁 일본군이 공격해왔던 북쪽 성곽 쪽에 일본군이 밤 사이 몰래 성벽에 접근해 성벽을 무너뜨리려 함과 동시에 기습을 감행했다. 이때의 경계를 맡은 것은 서예원이였는데 겁먹고 제대로 돌아보질 않아서 성벽 자체에 심각한 대미지를 입은 것. 이에 이종인은 경계에 소홀했던 서예원을 책망했다. 이날에도 하루종일 일본군은 대공세를 벌였으나 이 또한 격퇴당했다. 그러나 이날 수성전에서 가장 큰 공이 있었던 황진전과를 확인하다가 숨어있던 일본군에 의해 저격당해 사망한다.
다음날 적이 또 동쪽과 북쪽의 성을 침범하여 크게 전투가 벌어졌는데, 종인이 다시 크게 싸워 물리쳤다. 황진(黃進)이 순행차 이곳에 이르렀다 성 아래를 굽어보고 말하기를, "적의 시체가 참호에 가득하니 죽은 자가 거의 1천여 명은 되겠다."하였다.
그런데 이때 적 한 명이 성 아래에 잠복해 있다가 위를 향해 철환(鐵丸)을 쏘았는데, 판순(板盾)을 뚫고 진의 이마에 맞아 진이 즉사하였다. 황진은 용략(勇略)이 여러 장수 가운데 으뜸이었으므로 성안에서 그를 의지하였었는데, 그가 죽자 성안이 흉흉해지며 두려워하였다.
(선조수정실록 27권, 선조 26년 6월 1일 갑신 5번째기사)
보다시피 조선왕조실록에 황진이 저격당해 전사했다고 분명히 기재되어 있다. 50m 이내의 거리라면 조총으로 저격하는 것도 가능하다.

황진의 허무한 전사와 서예원의 무책임함으로 인한 북쪽 성벽의 약화는 사실상 진주성의 운명을 결정지은 치명타로 일컬어진다.

4.10. 6월 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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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날, 황진을 대신해 서예원을 순성장으로 삼았지만 서예원이 겁을 내며 울고 다닌다고 해서 경상 우병사 최경회는 서예원을 참하려고 하다가 그만두고, 대신 장윤을 순성장으로 삼았지만 곧 전사했다.

이날 폭우가 내려 동문이 무너져 일본군이 난입해오자 이종인이 이를 일시 저지하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일본군이 다시 귀갑차를 활용해 북쪽 성벽도 무너뜨리려 시도, 정오 무렵 기여코 이에 성공하면서 북쪽을 담당하던 창의군이 무너졌고 결국 이쪽으로도 일본군이 난입하면서 진주성은 함락된다. 수성장 김천일과 그 아들인 김상건, 최경회와 고종후, 최기필 등은 물에 뛰어들어 자결을, 김준민 이하 장수들 대다수는 싸우다 전사했으며 이종인은 적병 둘을 껴안고 남강에 투신했고 목사 서예원은 도망치다가 잡혀 죽었다. (일본측 기록에서는 목사가 싸우다 부상을 입고 나무에 앉아 있는 것을 공격해 죽였다고 한다.)

조선 측 기록에 의하면 진주성이 함락되면서 죽은 자가 6만여, 일본 측에서는 이것이 과장된 기록이라고 주장하지만 정작 일본 측 자신의 사료에서도 음덕기에서는 진주성에 인구가 3만이고 그중 강으로 도망친 수백을 제외한 나머지 전부가 죽었다고 기록되 있으면 또한 일본전사 조선역에서는 일본군이 취한 수급만 2만이 넘고[38] 그 외에 엄청난 수의 포로를 포획했으며 익사한 자의 수도 헤아릴 수 없었다고 하고 있다. 실제로 임란 후 진주 일대의 인구가 너무 급감해 행정 구역이 개편되기까지 했다.

살아남은 자는 황대중 등 극소수에 불과했다. 여기서 포로로 잡힌 강우성은 일어 교육책자인 첩해신어를 쓴 바 있다. 전투 후 일본군은 진주성을 철저히 허물어 평야로 만들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5. 7월 이후 전라도의 상황

7월 13일 조선 측은 권율로 하여금 다시 한번 진주성 구원을 명했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아닌 게 아니라 조정에서 명군에게 부산진을 공격하게 하는 등 구체적인 진주 방어책을 내놓았을 때는 이미 진주가 함락된지 열흘이나 지난 뒤였다.
비변사가 아뢰기를, “삼가 권율(權慄)의 장계를 보니 왜적이 온갖 방법으로 진주를 공격하고 있는데, 명군(明軍)은 아직까지 달려가서 구원하지 않고 있다고 합니다. 왜적과 대진(對陣)하고 있는 외원(外援)으로는 오직 선거이(宣居怡)·이천(李薦), 홍계남(洪季男) 뿐으로 그 형세가 매우 외롭고 약하다고 합니다. 품첩은 이미 정사(正寫)하였습니다. 권율의 생각은 다만 요해처(要害處)를 지켜 호남을 보전하고자 할 뿐, 군사를 보내어 진주를 구원할 의사가 없는 듯합니다. 진주를 구원하는 것이 바로 호남을 보전하는 길이니, 이런 뜻으로 급히 권율에게 하유하소서.”하니, 상이 따랐다. -선조 실록 40권, 선조 26년 7월 13일 을축 8번째 기사

진주성을 함락한 일본군은 군대를 몇개로 나누어 전라도로 몇 차례 진입시도를 해서 하동과 사천 등을 약탈하면서 남원구례 방면으로 진격했다. 하지만 남원성 방어태세에 들어간 명나라군과 홍계남의 반격을 받고는 그대로 돌아가 버린다. 전력을 기울여 진주성을 함락한 것과는 달리 몇 차례 전투만 치루고 그냥 돌아간 것으로 보아 당시 일본군이 적극적으로 전라도로 진격할 생각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아무튼 조선왕조실록에 전투기록이 남아있는 것으로 미루어 아래 나오는 장흥부사 유희선으로 인한 소요사태와는 별개로 일본군이 전라도 남원 방면으로 진입시도한 것도 사실이다.
이때 낙 참장(駱參將, 명나라 장수 낙상지를 말함)은 남원에 있으면서 성지(城池)를 수축(修築)하여 죽음으로 지킬 계획을 하고, 포수(砲手) 3백 명을 파견하여 취성(鷲城)에 진을 친 다음 영상(嶺上)에 기치(旗幟)를 많이 벌여 놓고서 불을 들어 호응하게 하였다. 홍계남(洪季男)이 군사를 거느리고 영(嶺)을 내려가다가 적의 선봉(先鋒)을 만나 길에서 적을 공격하여 수십 리를 가며 싸우다가 구례(求禮)·광양(光陽)에 이르러 오랫동안 크게 싸우니 적이 물러갔다. 1기는 사천(泗川)·고성(固城)으로 향해 가서 분탕질을 했고, 1기는 삼가(三嘉)·의령(宜寧)으로 향해 가서 공사(公私)의 가옥(家屋)을 불태우고 돌아와서 함안(咸安)·창원(昌原) 등지에 주둔하였으며, 1기는 포로로 잡은 남녀와 복물(卜物)을 싣고 김해(金海)를 향해 돌아갔다.
(선조실록 40권, 선조 26년 7월 16일 무진 5번째기사 )
적병이 갑자기 구례현(求禮縣)에 들이닥쳤다. 불의에 적이 이르렀으므로 사민(士民)들이 태반이나 상해를 입었는데, 적은 마을을 불태우고 성곽을 무너뜨렸다. 남원(南原)의 군민(軍民)이 이 소식을 듣고 놀라 흩어져 하룻밤 사이에 성을 비우고 빠져나갔다. 적병이 또 곡성(谷城)에 들어가 주민을 거의 다 살략(殺掠)하였다. 명나라 장수 낙상지(駱尙志)·사대수(査大受)·송대빈(宋大斌) 등과 우리 나라 장수 홍계남(洪季男) 등이 모두 물러나 진을 쳤는데, 조금 후에 유정(劉綎)이 군사를 보내 남원을 구원하였다. 낙상지·송대빈 등 여러 장수가 비로소 우리 나라 이빈(李蘋) 등과 더불어 남원성에 들어가 지키니, 적이 마침내 군사를 철수해 진주로 돌아갔고 인하여 해상으로 돌아가서는 다시 강화의 일을 의논하였다.
(선조수정실록 27권, 선조 26년 7월 1일 계축 2번째기사)[39]
위의 일본군 진입시도와는 별개로 전라도 복병장으로 하동현 서쪽 5리 나루터인 두치진을 수비하던 장흥 부사 유희선이 진주성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광양, 순천 지역으로 도망쳐 왜군이 쳐들어온다고 떠들어 댔고 이에 전쟁 공포에 휘말린 일부 백성들과 병사들이 도적떼가 되어 약탈과 방화를 저질렀다. 이 소요 사태는 전라도 남부 전체로 확대되어 조선군의 보급 사정을 더욱 어렵게 만든다.(선조실록 42권, 선조 26년 9월 6일 정사 8번째기사, 서애집, 난중일기)[40] 류성룡은 책임을 물어 유희선의 참수를 건의했다.

6. 민간인의 항거

당진현감 송제의 부인 구씨도 남편을 따라 죽었고, 송제가 포로로 잡혀 죽기 전에 송덕이, 송덕린에게 형인 송인에게 편지를 전해달라고 했으나 이 두 사람이 어떻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기록이 없다.

어린 소년인 정열은 할아버지 정관윤이 죽자 적진에 돌진하다가 죽었으며, 할아버지 김개와 손자 김덕련도 함께 죽었다. 아버지 송건도, 아들 송국평은 가동 30여 명으로 제1차 진주성 전투 때 공을 세웠는데, 이번에도 진주에서 항거하다가 죽었다. 54세의 문귀생도 죽고 진사 이운과 함께 의병을 일으킨 참봉 안흥종도 이 때 죽었으며, 선비 하계선, 최언양도 전사했다.

정대보는 만 명을 당해낸다는 장사로 김시민 휘하에 진주 전투에 참가해 공을 세웠는데, 이 때도 참가하면서 수십 명을 쓰러뜨리고 사망했다. 돌팔매꾼 조씨는 원래 함안에 살았고 1백여 명을 쓰러뜨렸다.

정기룡의 아내 정씨는 손가락을 깨물어 피로 적삼에 글을 쓴 후 집안사람을 통해 정기룡에게 상황을 알리게 하면서 시어머니, 시누이와 함께 촉석루로 가서 강에 투신했다.

수문장 정천계의 아내 이씨는 왜군이 말에서 끌어내리려 하자 끝까지 저항하다가 살해당했고, 16세인 이씨의 딸은 어머니가 당하는 것을 보고 연못에 투신했다. 승사랑 정승업의 아내 최씨는 붙잡히자 왜적을 꾸짖다가 죽었으며, 의금부 도사 이번의 아내 황씨도 칼을 들고 싸우다가 죽었다.

허진의 아내 김소사는 친정 아버지를 죽이려 하자 몸으로 막으면서 막대기로 왜적을 공격했다가 죽었으며, 정훈의 아내 이씨는 남편이 죽자 왜적을 꾸짖다가 두 팔이 잘린 채로 죽었고, 효자인 이경훈의 아내 성씨는 전투가 끝나고 이경훈과 함께 산골로 피난하다가 적에게 붙잡혀 이경훈이 먼저 살해당하자 포로로 끌려가다가 강물에 투신했다.

이유해의 아내 하소사는 집현산에 숨어있다가 왜적에게 붙잡혀 포로로 끌려가다가 강의 절반 쯤에 이르자 아기를 업은 채로 투신했으며, 9살의 딸은 물에 빠져 함께 죽고 19살의 친정 여동생은 적과 싸우다가 죽었다. 선비 정삼성의 아내 강씨는 왜적이 산 속으로 들어오면서 어머니가 먼저 죽고 왜적에게 꾸짖다가 죽었으며, 김선명의 아내 정소사는 산 속에서 붙잡혔다가 낭떠러지에 투신했다.

강순의 딸 강소저는 산 속에 숨었다가 붙잡혔다가 죽었고, 보인 채학의 아내 변씨, 한응의 딸 한소저, 선비 강순의 아내 하씨, 강세진의 아내 김씨도 절개를 지키고 산 속에서 죽었으며, 선비 강검의 아내 정씨는 산 속에서 왜적을 꾸짖다가 죽었다. 선비 윤여훈의 아내 최씨, 정희성의 아내 정씨, 부장 유홍의 딸 유소저, 첨사 김진의 아내 강씨도 붙잡혔다가 죽었다.

수군 장억수의 아내는 일찍이 과부였지만 왜적에게 붙잡히자 죽었고, 평민 김소사는 밤 중에 적을 피해 달아나다가 사지가 잘려 죽었으며, 이형복의 아내는 함안으로 피난하다가 적에게 붙잡혀 죽었다. 하증의 어머니 강씨도 항거하다가 죽었고, 안몽량, 안광윤, 안몽구의 어머니는 아들과 함께 의령을 피난하다가 적에게 붙잡히자 자결했다.

7. 끌려간 포로와 탈출한 생존자

오타 쥬리아는 고니시에게 붙잡혀 일본에서 가톨릭을 믿었고, 카운 비센테도 끌려가 그레고리오 데 세스페데스가 신학교로 보내 가톨릭을 배우게 했다. 홍호연은 이 전투 당시 어린 나이로 개떼에게 둘러쌓인 것을 나베시마가 구출해 일본으로 끌고 갔고, 나베시마의 아들인 나베시마 카츠시게의 글 스승이 되었다.

임진왜란이 끝나고 국교를 정상화하고 포로 쇄환 문제에 대해 추진했는데, 이 전투에 참여했다가 포로로 잡힌 김춘복이 통역관을 통해 귀국자에 대한 보호 대책에 대해 호소했다.

비거를 만든 것으로 알려진 정평구는 비거를 타고 탈출했다고 하지만, 비거가 부서져 그 부상으로 죽었다는 이야기도 있어서 자세한 것은 알 수 없다.

훗날 군자감정을 역임한 강우황은 이 전투 당시에는 어렸는데, 아버지 강기룡이 전사한 것을 알고 진주성에 들어가 동생 강계황과 함께 진주성으로 들어가 아버지의 시신을 수습하고 시묘를 하다가 왜적에게 붙잡혔고, 부산 동래까지 끌려갔다가 탈출해서 고향으로 돌아갔다.

황진의 육촌동생 황대중이 이 전투에 살아남았다가 남원 전투에서 전사했으며, 최홍우는 작은 아버지 최경회에게 성이 함락되기 전에 최경회의 그림과 언월도를 받으면서 뒤를 이어 의병을 일으킬 것을 부탁받아 성을 탈출했고, 의병장 임희진의 아들 임달영, 임준영은 성이 함락되기 전에 탈출했다.

인발은 황진 휘하의 군관으로 충청도 보령에 살았고 6월 15일에 함안에서 진주성으로 들어갔으며, 신북문을 지키다가 화살이 떨어져 성 밖으로 뛰어내려 시체 속에 묻혀 있다가 밤을 틈타 몰래 빠져나와 진주성이 함락된 상황을 조정에 보고했다. 함양 등 인근 군, 현의 병사는 최경회 소속으로 대부분 죽었으나 이인년, 선응남 등 몇 명만 살아남았으며, 회덕현령 남경성은 성이 함락된 날에 왜적에게서 푸른 바지를 빼앗고 머리를 단발로 깎아 왜적처럼 갈고리를 꿰어차고 적에 섞여 웅천까지 돌아갔다.

이로, 이탁영, 하명, 정경운 등이 살아남아 각기 이 전투에 대한 기록인 용사일기, 용사일록, 진주성일기, 고대일록을 저술했다. 전령으로 파견되었다가 왜적에게 붙잡힌 임우화는 전라도로 공격하는 왜적에게 끌려 다니다가 하동에서 탈출해 고향인 광양으로 돌아가 안방준에게 이 전투에 대해 알려줬다.

남원에서 온 3백여 명 중 몇 명만이 겨우 살아남았고, 정기수는 이렇게 산 장령으로 후에 병자호란에도 참전해 공을 세웠다

하증의 동생 하변은 적에게 붙잡혔다가 하증이 밤낮으로 살릴 계획을 세워 무사히 돌아왔으며, 안몽량, 안광윤, 안몽구는 어머니가 죽으면서 서로 죽으려 하자 적들이 내버려두고 떠나면서 살아남았다.

8. 제2차 진주성 전투의 영향

일본군이 2차 진주성 전투를 벌인 목적은 1차 진주성 전투의 원한을 갚고,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분노도 피하고, 조명 연합군에 심리적 타격을 입혀 강화 협상을 유리하게 이끌기 위해서, 전라도 점령이 아닌 처음부터 진주성 하나만 노리고 움직였을 가능성이 크다.[41]

2차 진주성 전투로 인해 전라도로 들어오려는 왜군의 기세가 멈췄다는 평가는 현대에 와서 생긴 대중의 평가일 뿐인 것은 아니다. 왜란 직후에도 이러한 평가가 있었다. 물론 이것이 실제로 그러했는지는 별개이다.

이 전투로 인해 전라 좌의병은 지휘부가 전멸했고 전라 우의병은 병력 대부분을 상실해 전국의 의병 중 가장 전력이 강했던 호남 의병대는 사실상 와해된다. 이때 전사한 사람들은 18세기 호남 절의록 편찬 때 대거 이름을 올린다. 또한 위에서 서술한 대로 경상도 남서부 지역 및 진주 인근의 인구가 급감하는 바람에 행정구역을 재편하게 된다.

왜군의 피해는 불명이다. 물론 왜군의 의도와는 별개로, 진주성이 2차 전투에서 함락되기는 했으나 거의 10만의 군대를 상대로 열흘을 버텼기에 왜군 입장에서는 이번에도 무시하기 어려운 피해가 났을거라는 추측을 해볼 수는 있다. 위에 나와있는 왜군의 해자를 메우는 등 공성 전개 과정에 조선 측이 가만히 놀고 있었을리는 없다. 위키백과에서는 일본군의 전사자수가 13,000여명으로 나와있는데 여기에 대한 출처는 불명이다. 전략상으로 볼 때 전투 한번에 이정도의 손실이면 더 이상 군을 움직이기는 어려운 수치인 것은 맞다.

진주의 관기였던 논개가 촉석루에서 왜장을 끌어안고 같이 죽었다는 야사가 유명하며 진주 목사 서예원을 1차 전투에서 자신들을 물리친 김시민으로 착각한 왜군이 그의 목을 베어 일본에 보냈다는 이야기도 있다.

전사자들을 모시기 위한 사당이 남성동에 존재하는데 이름이 창열사이다.

8.1. 패전 책임 논란

류성룡은 자신의 저서인 《징비록》에서 "김천일은 의만 높고 재주가 없어서 졌다"는 식으로 묘사하고 있는데, 이에 대해 안방준은 스스로 써낸 《진주서사》 에서 '류성룡 그사람이 진주성 무너진 걸 순 김천일 책임으로 돌렸는데 뭔 생각인지 모르겠다' 면서 깠다. 이로 인해 진주성 함락 책임 논란이 벌어졌는데, 이러한 논란에는 당파성[42]이 있다. 또한 윤근수 등은 징비록에 대해 '잘된건 죄다 자기 공으로 돌려서 이거 공평하지 못하잖아' 하면서 투덜거리기도 했다고 한다.

이때 전사한 사람들의 후손들은 당시 방어의 중심이 누구였느냐 및 패배의 책임을 놓고 서로의 조상을 비난하며 싸우고 있다(주로 김천일과 서예원의 후손들). 2000년에 서예원의 후손이 서예원을 변호하는 장문의 글을 쓰기도 했다. 이런 논쟁이 계속되는 이유는 일차적으론 김천일이 지휘관으로서 유능했다고 보기 힘들고, 또한 서예원은 무능한 장수라고 보기 어렵기 때문. 서예원은 북방에서 여진족과 싸울 때도 용맹 하나는 입증했고 김해성 전투 이후 백의종군했을 때 김면 휘하에서 김성일도 인정할 정도로 혁혁한 공을 세웠다. 또한 황진이 전사하기 전까지 아무 문제 없다가 황진이 전사한 후에 문제가 발생했다는 점에서 알 수 있듯, 방어를 지휘한 핵심은 황진이었고 그와 공조해서 작전할 때는 모두들 나름대로 유능하게 잘 대처했다는 사실이다. 애초에 왜군이 너무 많았기 때문에 누가 지휘권을 잡았더라도 6,000의 병사만으로 끝까지 92,000의 왜군을 막아낼 순 없었다.

8.2. 정평구의 비거?

제2차 진주성 전투는 후대에 떡밥 하나를 남겼는데 바로 정평구의 비거가 그것이다. 이규경의 <오주연문장전산고>에 비거에 관한 내용이 기록되어있는데, 정평구라는 사람이 비거를 만들어 진주성이 함락되기 전에 사람들을 이끌고 나왔는데 30여 리를 날았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정평구의 비거에 대한 기록은 조선 후기 실학자 신경준의 <여암전서>, <차제책>에도 기록되어있고, 정평구의 고향인 김제 군지에도 비거를 이용해 정평구가 왜군을 농락했다는 기록도 남아있다. 이를 조정에 보고했으나 조정에서는 하늘을 나는 물건이 있다는 것을 터무니없이 여겨서 무시해버렸다는 것.

일련의 기록으로 미루어본다면 정평구가 뭔가를 만들었을 개연성은 충분한 듯하다. 다만 그것의 정체가 뭐냐가 문제인데 이규경의 기록에 풀무가 등장하는 것이나 1인승이 아니라 여러 사람이 탔다는 기록으로 미루어 아마도 열기구 같은게 아니었을까라는 추측을 하기도 하고 당시의 기술 상 연에서 발전한 행글라이더 같은게 아니었나라는 추측도 있지만[43] 설계도 등이 남아있지 않아 명확하지는 않다. 200여년 뒤에 윤증의 증손자인 윤달규도 정평구의 비거와 비슷한 것을 만들었다고 한다.

9. 제2차 진주성 전투를 묘사한 대중 매체


허생전의 어떤 이본에서는 나가사키에 간 허생이 진주성 전투에서 살아남은 일본군 병사가 낙오하여 산을 넘다 진주성에서 아들을 잃은 노파에게 죽을 위기에 처하는데 그가 자신도 일본에 노모가 있다고 목숨을 구걸하자 노모의 다른 아들이 저자가 왜인이긴 해도 효성이 있는 듯 하니 살려주자 하여 여차저차 하다 보니 그 일본군 병사와 함께 일가가 일본으로 이주하여 정착하게 되었는데 그 후손을 만나는 내용이 있다.

신암행어사에서는 마치 온 조선이 다 함락된 후 최후의 6만명이 결사 저항하다 죽은 것 정도로 후기에 묘사했다.

2차 진주성 전투를 조명한 사극은 MBC 조선왕조오백년이 유일하다. 임진왜란 편 33회 후반과 34회 전체를 할애하여 집중적으로 묘사했다. 당시에 활용 가능했던 거의 모든 방송 기술이 총동원되어 지금의 눈높이로 봐도 어마어마할 정도의 대규모 접전을 제대로 묘사하였다. 특히 조선군이 사용하던 승자총통까지 구현했다. 눈물나는 스케일의 퓨전 사극으로 연명하는 지금의 MBC를 생각하면 격세지감이 느껴지는 부분. 전투에 참전한 장수와 의병장들의 면모를 하나하나 잘 묘사했으며 특히 최후에 왜군 둘을 한꺼번에 껴안고 기록 그대로 "김해 부사 이종인이 여기서 죽노라!"를 외치며 남강에 투신하는 이종인의 최후는 명장면이다. 배경의 고증 오류가 일어났는데 당시 전투는 여름에 벌어졌는데 겨울눈이 내리는 데에서 찍혔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6개월을 기다릴순 없긴하다.

징비록은 34회에서 배경 상황만 묘사하고 전투는 내레이션으로 처리했다. 조선 쪽 지휘관 다수가 구원을 포기한 사안은 언급하지 않고 명군이 현실적으로 구원할 수 없었던 정황도 무시한 채 조선 길들이기를 위해 일부러 출병하지 않은 것으로 왜곡했다.

임진록1의 일본군 8번째 임무가 2차 진주성 전투이다.

1990년대 중엽에 나온 국내의 모 인문 역사 서적에서는 임진왜란 와중에 이순신과 조선 수군의 역할을 철저히 폄하하고 이 제2차 진주성 전투야말로 임진왜란의 행방을 좌우했다며 마치 독소전쟁에서 스탈린그라드 전투와 같았다는 식의 평가를 했으나 저자의 관점이 너무나 편협하여 설득력이 낮다. 애초에 그 서적의 관점부터가 지나치게 탈민족주의에 치우져 있고 역사학계에서 아무도 진지하게 취급하지 않는 이순신 폄하론을 대놓고 했던 터라...

10. 기타

황현필이 2편의 영상으로 이 전투를 다루었다.[44]

[1] 한국의 마지막 황태자비인 이방자 여사의 외가 쪽 조상이다.[2] 시즈카타케 칠본창의 일원 중 한 명[3] 타케나카 한베에의 사촌이다.[4] 부산, 기장, 김해, 거제 등에 남아 명과 조선의 역공에 대비한 병력은 23,226명. 이 수치는 전쟁 지속 여부를 판단하기 위해 파견된 봉행 이시다 미츠나리가 누차 실사해서 나온 수치라 신뢰성이 높다.[5] 다테 마사무네와 같은 거물급 다이묘들과 함께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양자 우키타 히데이에,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후계자였던 친족 고바야카와 히데아키처럼 자신의 수족과도 같던 인물들이 참전했으며, 조슈번의 다이묘 모리 데루모토의 양자 모리 히데모토와 모리 가문의 두 기둥으로 불리던 코바야카와 타카카게가 참전했고, 사쓰마번의 다이묘 시마즈 요시히로가 참전했는데, 조슈번을 지배하던 모리 가문과 사쓰마번을 지배하던 시마즈 가문은 훗날 삿초 동맹을 맺어 메이지 유신을 주도했다. 그렇게 조슈번은 일본 육군의 기원이 되었고, 사쓰마번은 일본 해군의 기원이 되었다. 시마즈 요시히로의 시마즈 가문 같은 경우는 아키히토 상황의 외할머니 가문이며, 나베시마 나오시게영친왕 부인 이방자 여사의 외가 가문이기도 하다.[6] 물론 김시민은 1차 전투 막바지에 사망했으나 일본측은 이를 모르고 있었다.[7] 수도 주둔군을 모두 철수시키는 대로 목소의 성(진주성)을 포위하고 공격용 산을 쌓는 등의 조치를 잘 처리하여 성 안의 적을 모두 죽인 뒤, 적국(전라도), 백국(경상도)에서의 승부를 끝내고 지역간의 연결되는 성을 쌓아 서로 지켜야 할 것입니다.- 아사노가 문서, 4월 22일 히데요시의 사인이 들어간 편지에서[8]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군사였던 구로다 간베에는 임진왜란 확전에 반대하는 입장이라 이 일로 히데요시의 노여움을 받게되어 출가해 법명인 조스이(如水)를 사용하게 되었다는 뜻이다.[9] 직접적으로 편지를 보낸건 아타카 히데야스였으나, 편지 내용에는 '국가의 전투를 잘 수행한다면 시마즈 씨의 영지가 계속되겠지만 그렇지 않으면 영지가 뺏길 것이 불보듯 뻔하다' 는 이시다 미츠나리의 글귀가 존재했다. 출처는 사쓰마 구기잡록[10] 나고야에서 대기하던 도호쿠의 다이묘 모가미 요시아키는 '목숨이 있는 중에 다시한번 모가미 땅을 밟고 싶고 그 땅의 물을 한잔 마시고 싶다' 면서 하소연하는 편지를 고향에 보냈다. 참고로 요시아키는 전쟁이 끝날 때까지 바다를 건널 일이 없었다.[11] 출처 : 「임진왜란과 한중관계」, 한명기 교수 저[12] 무엇보다 당시 명나라는 대규모 반란인 발배의 난과 양응룡의 난이 발생한터라 이를 진압해야 했기에 조선에 병력을 계속 파견할수가 없었다.[13] 사실 틀린말이 아니었던것이 히데요시의 진주성 함락 의지가 확고한터라 고니시도 반대했다가는 반역자로 간주되어 안전이 위험해질 상황이었다.[14] 당시 조선군은 전기에 비해 너무나 약화된터라 부산으로부터 북진한 일본군에 의해 조선군의 저항에도 불구하고 한양이 20일 만에 함락되었다.[15] 당시 참전자들은 권고만 하고 자기들 일은 다 했다며 도망칠 정도로 졸렬하지는 않았다는 의미다.[16] 방위군 입장에서는 성만 점령하고 물러나겠다는 적의 말을 믿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일본군 입장에서도 그냥 성을 점령했다는 장계 하나만으로 전공을 보고했을 가능성은 적다.[17] 그가 용인전투에 처음 참전했을 때는 종6품 현감이었지만, 1년 뒤의 2차 진주성 전투 직전에는 종 2품 절도사에 오늘 정도로 공적을 인정 받았다.[18] 전라좌수사 이순신은 황진의 전사 소식을 듣고 말하길, "황진이 죽었으니, 나랏일이 어긋나게 됐다."고 했다. 진주성 함락보다도 황진의 전사를 더 크게 본 것이다.[19] 본래 밖에서 협력하려고 했는데 김천일이 성의 어려운 사정을 설명하며 들어갈 것을 결심했다고 한다.[20] 임란 초 일본군 병력 구성과 비교해 보면 임진년 1년동안 일본군이 얼마나 큰 피해를 입었는가도 짐작할 수 있다. 물론 충원 병력(가토 기요마사가 자기 영지에 충원 병력과 물자를 보내라는 명령을 내리는 편지가 남아있다.)이 불분명하기 때문에 정확하지는 않다.[21] 다테 마사무네는 2차 진주성 전투 당시 겨우 26세로, 나이와 연륜만으로는 도요토미 히데요시도쿠가와 이에야스에 비해 한참 애송이였으나, 그 어린 나이에도 도요토미에게 개겨본 전적이 있으며, 이후 둘에게 비벼보기 일보직전까지 갔던 대다이묘다. 실제로도 다테 가문은 에도시대 이후 도쿠가와 가문에 이은 일본 2인자 가문이 되었다.[22] 하시바 히데카츠는 임란 초기에 거제도에서 병사하였다.[23] 이 목록의 인물들은 군소 다이묘들이다. 더불어 우키타 히데이에는 총대장이지만 실 지휘는 가신들이 맡았기에 명단에 없는듯하다.[24] 타케나카 한베에의 사촌.[25] 진주성 남쪽은 남강에다 절벽이라 공격이 불가능하다.[26] 그러나 완전히 없는 것도 아니다.[27] 논개일화에서 언급되는 그 인물이 맞다.[28] 선조 실록 26년 7월 16일자 황해도 방어사 이시언의 치계[29] 특기할 점이라면 이 사람은 한쪽 다리를 저는 장애인이였다. 선천적인게 아니라 병환에 든 노모의 치료를 위해 자기 다리살 일부를 약으로 썼기 때문이며 학살 와중에도 살아남았고 이순신 휘하에 종군하다가 전투 중 남은 다리마저 다치고 말았다. 체찰사 이원익의 요청으로 육군에 배속돼 남원 전투에서 이복남과 함께 전사한다.[30] 김시민의 후임 진주 목사. 전사한 이후 일본군에 의해 참수되었는데 일본군은 어처구니 없게도 이 서예원의 수급을 김시민의 수급이라고 보고하며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헌납했다.[31] 비거의 발명가로 알려진 사람이다.[32] 사망 후 서얼이라 해서 참판으로 추증되었지만 선조가 이런 상황에서 족계를 따지는 건 미온하다 지적하여 형조 판서에 추증되었다(선조 실록 26년 8월자)[33] "이종인(李宗仁)은 적 일곱을 사살하고 일어나서 보다가 이마에 철환(鐵丸)을 맞고서 죽었으며, 경상 병사(慶尙兵使) 최경회(崔慶會), 거제 현령(巨濟縣令) 김준민(金俊民)도 성이 함락되던 날에 철환을 맞고서 죽었습니다. 김해 부사(金海府使) 이종인(李宗仁)은 성이 함락되어 군사가 흩어지자 연달아 대전(大箭)을 발사하여 적 일곱을 죽이니 적이 약간 주춤하였는데, 잠시 뒤에 철환을 맞고 죽었습니다. 당인(唐人)의 품첩(稟帖)에는 ‘종인의 용맹이 삼군(三軍)의 으뜸이었다. 진주 사람이 전투를 도와줄 것을 청하자 종인이 연거푸 적 다섯을 쏘아 죽이니 적이 모두 도망하였다. 적이 또 큰 궤(櫃)를 만들어(귀갑차다. 오늘날의 장갑차.) 밀고 들어오자 종인이 화살 수십여 대를 쏘아 모두 궤에 맞히고 계속하여 기름 부은 섶을 밑으로 던지자 그 섶이 모두 그 박힌 화살에 걸리어 궤에 불이 붙으니 적은 불을 끄기에 정신이 없었는데, 종인은 이때 8명의 적을 쏘아 죽였다.(반지의 제왕 레골라스마냥 머신건 수준으로 활을 쐈다는 뜻이다.) 그날 밤 초경(初更)에 북문(北門) 쪽이 위급하여 다시 종인에게 구원을 요청하니, 종인은 그 수하(手下)와 더불어 적을 쏘아 물리쳤다. 그날 밤에 적은 성의 돌을 뽑아내고서 새벽에 돌을 뽑아낸 구멍으로 쳐들어오니, 종인은 궁전(弓箭)을 버리고서 다만 창도(槍刀)를 가지고 적을 쳐죽였는데 시체가 산처럼 쌓였다. 적이 약간 물러갔을 때 신북문(新北門)의 창의군(倡義軍)이 형세가 다급함을 보고서 신북문을 버리고 촉석루로 달아나자 적이 드디어 성을 넘어 들어왔는데 종인도 철환을 맞고 죽었다.’고 하였습니다. ."[34] 선조 실록 27년 3월 무술조. 이 기사에서 류성룡은 '각자의 군사가 많아 호명이 일치하지 않았기 때문'에 결국 패전했으며, 인적 구성이 잘 되어 있었다면 워낙에 큰 성이니까 함락까지는 되지 않았을 거라고 말하고 있다.[35] 임란 후 진주성을 다시 쌓았을 때 이쪽 성곽은 안으로 다시 들여 쌓게 된다.[36] 현재는 일본군이 공성 당시 이 지역을 메꾼 상태 그대로여서 넓게 탁 트여 취약부가 확연히 드러나 있다.[37] 명나라 장수. 일본은 관용적으로 중국에 대해 '당나라'라는 표현을 쓴다.[38] 다시 말해 민간인을 대량으로 학살했다는 소리다.[39] 선조수정실록효종때인 1657년에 편찬된 것으로 이때 사관들은 임란 당시보다 후대의 역사가들이라 아래 나오는 유희선으로 인한 소요사태도 당연히 알고 있었을 것이다. 설마 선조실록도 안 읽어보고 선조수정실록을 쓸 리는 없으니까. 그럼에도 일본군이 구례와 남원 등에 진입시도한 일을 기록한 것으로 보아 백성들 소요사태와는 별개로 실제 일본군이 전라도에 진입을 시도한 것 자체는 사실로 보인다.[40] 순천과 광양 지역이 이때 큰 피해를 입었는데 이 두 지역은 전라좌수영 소속의 고을이라 당시 순천부사였던 권준과 광양현감 어영담은 한산도에 주둔하고 있어 상황 수습이 불가능했고, 난중일기에는 이 소식을 들은 이순신 장군이 두 장수를 각 해당 지역으로 보내 상황을 확인케한다.[41]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명령은 진주성을 시작으로 한 전라도 진출이었지만, 일선의 왜장들은 진주성이나 확실하게 점령하자라는 분위기가 팽배했다.[42] 류성룡은 동인 계열 중에서도 남인의 핵심 인물인 반면 안방준 및 김천일은 서인 계열의 인물.[43] 오늘날에도 바람이 강한 날엔 커다란 을 날리다 사람이 같이 날아가기도 하니 적당히 개량하면 그 시대 기술력으로도 날 수 있을 가능성이 높다.[44] https://www.youtube.com/watch?v=6iNUN8nh5gghttps://www.youtube.com/watch?v=_dp3gRLA5Zw