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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예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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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여자 농구선수에 대한 내용은 서예원(농구선수)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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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colbgcolor=#fff,#191919>서예원(徐禮元)
숙부(肅夫)
본관 이천 서씨
출생 1548년(명종 3)
사망 1593년(선조 26) 음력 6월 29일
경상도 진주목
(현 경상남도 진주시)
서훈 선무원종공신 1등, 병조참의 추증
부모 부친 - 서형(徐詗)
모친 - 박유경(朴有敬, 1512 ~ ?)[1]
형제자매 3남 2녀 중 3남[2]
누나 - 서태임(徐太任, 1531 ~ ?)
큰형 - 서선원(徐善元, 1537 ~ ?)
작은형 - 서인원(徐仁元, 1544 ~ 1604)
여동생 - 서계임(徐季任, 1550 ~ ?)
부인 이겸(李謙)의 3녀 전주 이씨[3]

1. 개요2. 생애3. 사후

1. 개요

임진왜란 시기 활동한 조선군 장군이다.

고조는 동복현감 서운이고, 증조는 하동현감 서백이며, 할아버지는 주부 서관이고, 부친은 종사랑(從仕郞:정9품 문관의 품계) 서형(徐詗), 모친은 밀양 박씨 박의령(朴義齡)의 차녀인 박유경(朴有敬)이다. 위로 누나 서태임(徐太任), 큰형 서선원(徐善元)과 작은형 서인원(徐仁元), 여동생 서계임(徐季任)이 있었다.

2. 생애

2.1. 임진왜란 이전

서예원의 출생지는 알려져 있지 않으나 1548년(명종 3) 태어나, 1572년(선조 5) 제2회 별시 무과에 병과 33위로 급제하였다.# 1585년(선조 18) 12월 함경북도 회령의 보을하진 병마첨절제사(甫乙下鎭兵馬僉節制使:종3품)를 맡고 있던 서예원은, 80여 명의 기병을 거느리고 두만강을 건너 여진족의 근거지를 정탐하러 깊숙이 들어갔다가, 여진족에게 습격받고 수하를 거의 잃은 채 겨우 포위망을 탈출해 돌아왔다. 이후 그는 패전의 책임을 지고 함경북도 종성(鍾城)에 유배되었는데, 이에 대해 조헌이 상소를 올려 비판했다.
아, 성은은 하늘과 같아서 생장(生長)시키지 않는 것이 없어 사형의 죄에 해당되는 자라도 또한 삼복(三覆)을 시행하여 형벌이 조금이라고 의심스러운 단서가 있으면 반드시 널리 공의를 거두어 살리는 길을 찾습니다. 심지어 송아지가 슬프게 울어도 성려를 다하고, 타락(駝酪: 우유)의 진상을 감함에 동산속의 초목이 모두 생기를 띠게 되는 법인데, 유독 이 70여 명의 목숨은 죽음의 경지에 닥쳤는데도 누구 하나 애석하게 여기는 사람이 없습니다. 동해에 한 원부(怨婦)가 있자 3년 동안 큰 가뭄이 들었다 하는데 금년 봄의 가뭄과 우박도 이 일 때문이 아니라고 할 수 없는데 어찌 군사를 잃은 일개 서예원을 잡아 가두기만 한 일로 되겠습니까.
(중략)
사람이 한 몸을 갖고 있으면서 꼭 해야 될 일이 많고, 한평생 학문을 하더라도 오히려 허물을 적게 하기가 어렵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그런데 서인원의 학문은 오랜 세월 깊이 수양한 공력도 없으면서 남의 장단점을 논하는 데 몰두하고, 자신을 책망함에는 엄격하지 않고 남은 가혹하게 질책하며, 선악을 논하는 말이 자신의 실천과는 거리가 멀고 좋아하거나 미워하는 마음은 권세의 향방에 따르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의 아우 서예원(徐禮元)은 몰래 장수의 을 간음하여 무인들로부터 개돼지 취급을 받았고, 그 때문에 여러 해 동안 과거 응시를 정지당하자 인원이 늘 새벽에 무관의 집에 찾아가 문안하면서 해금(解禁)을 부탁하였습니다. 그뒤 무과에 급제하고서는 장수의 천거에 오르기를 도모하였고, 금오(金吾)에 들어가게 되자 아예 관소의 자리를 비워두고 서울에 머물면서 갖은 계략으로 벗어나기를 도모하였습니다.
선조수정실록 선조 19년 10월 1일자 기사

조헌은 이후에도 서예원의 일을 들어 동인을 맹비난하는 상소를 올렸다.
(조헌이 상소를 올리길) 서인원(徐仁元)과 심대(沈岱)는 지금 동인(東人) 중의 거벽(巨擘)이다. 심암(沈巖)이 죽음을 모면한 것은 심대가 그 아우인 때문이오[4], 서예원(徐禮元)이 형(刑)을 바로 받지 않은 것은 서인원이 그 형인 때문이며, 심암을 추천한 자는 유전이오, 서예원을 기용(起用)한 자는 이산해이다. 이로써 말한다면 심암의 패군(敗軍)은 곧 유전의 패군이오, 서예원의 패사(敗事)는 곧 이산해의 패사이다. 심암이 비록 죽었으나 두 사람이 오히려 살아 있으니, 남북(南北) 사람들 중에 어느 누가 명령을 달게 받으려 하겠는가. 우선 이 두 사람부터 파출(罷黜)시키고 급히 중사(中使)를 보내 박순(朴淳)과 정철을 소환하여 조권(朝權)을 위임하고 세자 책봉을 의논해야 한다고 하였다.
선조실록 선조 21년 1월 5일자 기사
유전(柳㙉)은 장수를 천거함에 있어 오로지 뇌물만을 숭상하였으므로 심암(沈巖)이 패하여 군사가 몰살되었고 상벌(賞罰)을 내림에 있어 오직 성세(聲勢)만을 보았으므로 서예원(徐禮元)이 적병을 불러들였습니다. 약방(藥房)의 제조(提調)로 있으면서는 군부의 병환을 대수롭지 않게 보았으며, 중국(명나라)에 사신으로 가서는 군부의 명을 크게 욕되게 하고도 벼슬의 제수에는 사양하지 않았으니, 나라를 망치고 집을 패망시킨 뒤에야 그만두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를 만민이 모두 우러르는 정승의 지위에 앉혀두고 반드시 어진이를 해치고 나라를 병들게 하시니 자못 원신(遠臣)으로서는 이해하지 못할 일입니다.
(중략)
우서(禹瑞)는 이제신(李濟臣)의 말을 듣지 아니하고 경솔히 싸우다가 군사를 잃었고, 게다가 함몰당한 수효를 숨겼으니 마땅히 죽여야 했는데도 죽이지 않았습니다. 서예원(徐禮元)은 앞서 일을 그르친 죄가 있는데 북쪽 지방이 그 때문에 공허(空虛)하게 되었고, 뒤에는 항복한 자를 죽인 죄가 있었으니 당연히 목을 베어야 할 것인데도 목 베지 않았습니다. 신립(申砬)은 품계(稟啓)하지 않고 마음대로 죽인 작은 허물이 있기는 하나 자기의 몸을 돌보지 않고 용감히 적에게 돌진한 공은 한(漢)나라의 비장(飛將)이라 할 만한데 사론을 편벽되게 주장하여 언초처럼 오랫동안 폐기했을 뿐만 아니라, 혹 단도제(檀道濟)처럼 죽이려고 하기도 하였습니다.
선조수정실록 선조 22년 4월 1일자 기사

선조는 이러한 조헌의 상소를 신하들에게 보이지 않고 불태운 뒤 다음과 같은 비망기를 내렸다.
지금 조헌의 소(疏)를 보니, 이는 인요(人妖)[5]라 하늘의 견책이 지극히 깊으니, 두렵고 놀라움을 금할 길 없다. 이 어찌 과인(寡人)이 현상 명경(賢相名卿)을 지성으로 대우하지 않고 직무를 전적으로 위임하지 않았던 소치가 아니겠는가. 더욱 부끄러움을 금할 길 없다. 이 소(疏)를 불가불 내려야 하겠지만, 또 차마 내릴 수도 없다. 이 소가 한번 내려가면 그 손상되는 바가 매우 클 것이므로 아예 내가 그 허물을 지고 이미 소각시켜 버렸으니, 사관(史官)은 나의 허물을 대서(大書)하여 후세를 경계하였으면 한다.
선조실록 선조 21년 1월 5일자 기사

이후 서예원은 여진족 니탕개(尼湯介)가 국경을 넘어 경원부(慶源府)를 점령하자 백의종군해 공을 세워 평안북도 곽산군수에 임명되었고, 다시 경상남도 김해부사로 옮겨졌다. 고종 대에 서예원을 추증할 것을 청한 의관 안종덕의 상소에 따르면, 서예원이 니탕개의 난 때 종군하여 많은 전투에서 승리하자 선조가 그를 가상히 여겨 그의 화상(畵像)을 그리도록 명해 그것을 보고는 김해부사에 임명했다고 한다. 그러나 당대 기록엔 이를 입증할 내용이 전혀 없어서, 후세에 미화된 것일 가능성이 높다.

난중잡록에 따르면 니탕개의 난에서 율보리를 유인해 생포했다고 한다.

2.2. 임진왜란

임진왜란이 발발한 직후 일본군김해성을 공격했을 때, 서예원은 초계군수 이유겸과 함께 성을 수비해 적군의 3차례 공격을 막아냈지만, 적군이 4번째 공격을 가할 때 이유겸이 달아나버리자 그 역시 성을 버리고 탈출했다. 이후 순찰사 김수(金守)에게 간 서예원은 김해성이 함락된 경위를 진술했고, 김수는 이유겸을 잡아들여 처형시켰다. 비변사는 "가는 곳마다 패전했으니 용서해서는 안되지만 지금은 한창 왜적과 대치하고 있는 때이니 우선 백의종군시켜 뒷날에 공을 세우도록 하자."고 주청했고, 선조는 이에 따랐다.

백의종군 처분을 받은 서예원은 의병장 김면 휘하에 들어가 중위관이 되었다. 그 후 그는 김면 휘하에서 지례현 전투와 장곡역 전투에서 전공을 세웠다.
김면이 전 부사 서예원 등을 거느리고 지례현을 불지르면서 공격하여 창고에서 버티고 있던 왜적들을 불태워 죽였는데, 살아남은 왜적들은 금산으로 도망쳤습니다. 이에 김면은 화구(火具)를 다시 준비하면서 금산의 의병인 소모관 성균관 박사 여대로, 가장 권음성 등과 더불어 그 고을에 있는 적들을 협공할 계획을 하고 있습니다.
학봉집
대장이 고령을 향해 가고자 했으나, 왜적들이 지례에 주둔하고 있기에 포기하고 감조에서 진을 치고 전 부사 서예원과 전 만호 황응남을 좌, 우의 위장으로 각각 임명해 장곡역에서 전투를 벌였다. 활을 쏘아 맞힌 적이 10여 명이었으나 참수하지는 못했다.
학봉집

그 후 김해부사에 복직한 서예원은 1593년 4월 진주목사에 부임했다. 이는 경상도 초유사 학봉 김성일의 추천에 따른 것이었는데, 이에 대해 사관은 다음과 같이 혹평했다.
김시민의 병이 심해지자 김성일이 서예원(徐禮元)을 대신하게 하였다. 서예원은 완력은 있으나 어리석은 겁쟁이로 재능이 없는데, 그의 형 서인원(徐仁元)이 명사(名士)이기 때문에 특별히 발탁하여 변수(邊帥)를 삼았었다. 그가 북도(北道)에 있을 때에는 수급(首級)을 거짓으로 만들어 공을 자랑하여 직질이 올랐었으므로 조헌(趙憲)이 매번 상소하여 그의 죄를 논하였었다. 이때에 이르러 김해부사(金海府使)로 성을 버리고 도망하였다가 김성일을 따라다녔으므로 김시민을 대신하였는데, 이때부터 진주성의 수비는 다시 전일과 같지 못하였다.
선조수정실록 선조 25년 10월 1일자 기사

반면 학봉 김성일은 자신의 저서 학봉집에서 서예원을 높게 평가했다.
진양의 방비가 조금이나마 견고한 것은 실로 목사 서예원의 힘이었다.
학봉집

2.3. 제2차 진주성 전투

2차 진주성 전투가 벌어질 무렵, 서예원은 명군 지대 차사원(明軍支待差使員)으로서 진주판관과 함께 명나라 장수들을 대접하는 임무를 맡느라 경상북도 상주에 있었다. 이에 대해 류성룡은 다음과 같이 밝혔다.
신이 서울에 있을 적에 목사(牧使) 서예원(徐禮元)이 명군 지대 차사원(明軍支待差使員)으로 함창(咸昌)에 와서 있기에 즉시 이문(移文)하여 ‘진주가 곧 왜적의 공격을 받게 되었는데 성을 지키는 관원이 어찌 멀리 나와 있어서야 되겠는가.’ 하고, 속히 돌아가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지체하고 돌아가지 않다가 적이 가까이 왔다는 것을 들은 뒤에 겨우 입성하여 방비 등의 일을 미리 조처하지 못한 것이 잘못의 첫째입니다.
선조실록 선조 26년 7월 21일자 기사

창의사 김천일도 서예원이 뒤늦게 돌아왔다고 보고했다.
신이 이달(6월) 14일에 진주성(晉州城)에 도착하였는데, 목사(牧使) 서예원(徐禮元)이 중국군 지대(支待)하는 일로 나갔다가 저물어서야 돌아왔습니다. 그와 함께 변란에 대처하는 여러 가지 일을 상의하여 결정하였습니다.
선조실록 선조 26년 7월 10일자 기사

서예원이 왜 명나라 장수들을 대접하려고 상주로 갔는지는 실록에는 나와 있지 않지만, 안방준의 '진주서사'에는 그 이유를 짐작할 만한 대목이 있다.
이날(19일) 상주에 주둔하고 있던 명장(明將) 부총병(副總兵) 왕필적(王必迪)과 상주목사 정기룡진주성으로 찾아와, 성지(城池)의 방어시설을 두루 살핀 뒤 천혜의 요새임을 격찬하고, 총병 유정의 선견(先遣) 원병부대가 대구부에 출동하여 이미 함양에 도착하였음을 전하였다. 그러나 실제 부총병 왕필적의 함양 원정군 파견 약속은 하나의 허언에 불과하였다
진주서사

이에 따른다면 서예원이 상주로 가서 대접한 명나라 장수는 왕필적인 것으로 짐작되며, 그가 왕필적을 대접한 것은 명나라군진주성을 구원하도록 부탁하고자 한 것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조정이 그를 '명군 지대 차사원'으로 삼은 까닭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었을 것으로 보이지만, 정작 명군은 진주성 전투가 벌어지는 내내 일본군에게 경고만 할 뿐 군사 행동을 하지 않았다.

선조실록에 따르면, 서예원은 이후에 벌어진 제2차 진주성 전투에서 추태를 일삼았다고 한다. 6월 26일 서예원이 적의 기세에 겁을 먹고 당황하자, 김천일은 서예원을 경질하고 의병 부장 장윤을 가목사(假牧使)로 삼았다고 한다. 그리고 6월 28일 새벽에 일본군이 야습했을 때 서예원이 야간 경비를 소홀히 하는 바람에 성이 뚫려 함락될 위기에 몰리자, 김해부사 이종인이 크게 노해 서예원을 꾸짖고 성 안 사람들을 모두 모아 필사적으로 싸워 수많은 적을 사살했다고 한다. 그리고 6월 29일, 전날 적에게 탄환을 맞고 죽은 황진을 대신해 순성장(巡城將)에 임명된 서예원은 겁을 먹고 전립(戰笠)도 벗은 채 말을 타고서 눈물을 흘리며 순행해 병사 최경회가 병사들을 동요시킨다며 죽이려 했다가 그만두고, 장윤으로 대신 순성장을 삼았다고 한다. 그러나 장윤이 얼마 안 가 탄환에 맞아 죽고 성이 무너지자, 서예원이 먼저 달아났고 제군이 일제히 붕괴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실록에는 이와 상반되는 내용들도 실려 있다. 가령 황해도 방어사 이시언은 진주성에서 가까스로 살아나온 정로위(定虜衛) 인발(印潑)이 진주성이 함락된 경과를 설명했다는 내용을 보고했는데, 거기엔 진주목사 서예원이 김천일에 의해 경질되었다는 이야기는 없었다. 사실 일개 의병장이 진주성을 수비할 총체적인 책임을 맡은 목사를 하루아침에 경질하고 진주성 전체를 통솔한다는 건 이치에 맞지 않으며, 실록에는 진주성에 입성했을 당시 조정이 그에게 그러한 권한을 부여했음을 알려주는 기록이 존재하지 않는다. 선조수정실록 선조 26년 6월 1일자 기사에는 김천일과 최경회가 도절제(都節制)가 되었고 김천일은 의병을 통솔하고 최경회는 관군을 통솔했다는 기록이 있지만, 선조실록을 비롯해 당대 사료에서 이런 사실이 있었음을 교차검증해줄 자료는 존재하지 않는다.

또한 진주성 함락 후 사망자를 조사한 경상우도 관찰사 김늑(金玏)의 보고에 따르면, 진주성 전투에서 전사한 진주목사의 군사가 2,400명, 진주병사의 군사가 420명, 충청병사의 군사가 97명, 창의사 김천일의 군사가 60명, 복수 의병장 전사의의 군사가 50명, 적개 부장(敵愾副將) 이잠의 군사가 50명, 표의병(彪義兵) 이계년의 군사가 30명, 웅의대장(熊義代將) 정원한의 군사가 11명, 영광의병(靈光義兵) 심우신의 군사가 12명, 분의장(奮義將) 강희열의 군사가 50명, 방의대장(方義大將) 강희보의 군사가 30명, 현웅군대장(玄雄軍代將) 정충훈의 군사가 20명, 채의대장(蔡義代將) 정운호의 군사가 10명이었으며, 진주목사의 군사는 그 외에도 성에 많이 들어와 있었다고 한다. 다시 말해 진주목사 서예원은 김시민이 전사한 후 부임하여 3천명 가량의 병력을 이끌었던 것이다. 이 정도 군대를 갖춘 목사가 일개 의병장에게 경질되고 진주성의 군대 전체가 김천일에게 지휘를 받았다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

그리고 임진왜란 당시의 영의정이자 도체찰사인 류성룡은 "진주성 함락의 책임이 서예원에게만 있는 게 아니다"라고 주장했다. 그는 서예원이 성에 빨리 들어오지 않아 방비를 굳건히 하지 못한 게 '첫째 잘못'이라고 지적하면서도 다른 이유들도 들었다.
제장(諸將)들이 객병(客兵)을 거느리고 한 성 안에 많이 모였는데 통제(統制)하는 사람이 없어 각각 제 주장만 고집하여 분란(紛難)을 면치 못했던 것이 잘못의 둘째이며, 제장들이 당초에 사세를 헤아리지 못하고 경솔히 함안(咸安)으로 나아가서 진을 치고 있다가 적병이 크게 이르자 낭패(狼狽)하고 도망해 돌아와서 적으로 하여금 승세(勝勢)를 타게 한 것이 잘못의 셋째이며, 정진(鼎津)에 군사를 진열시키고 굳게 지켰다면 적이 사면(四面)에서 함께 진격하여 오지는 못했을 것인데, 모두 버리고 떠났으므로 적병이 수륙(水陸)으로 함께 진격하였고 진주가 함락되기 전에 의령(宜寧)·삼가(三嘉)·단성(丹城)·진해(鎭海)·고성(固城)·사천(泗川) 등지에 적이 구름처럼 모여 원병(援兵)의 길이 막힌 것이 잘못의 넷째입니다.
최원(崔遠)·선거이(宣居怡) 이하 장수의 거느린 군사가 모두 도피(逃避)하고서 한 사람도 나오지 않았으므로 진주 사람들이 밤낮으로 구원병을 갈망하며 하늘에 호소하고 빌었으나 끝내 한 명의 구원병도 오는 자가 없어 드디어 함몰(陷沒)되었고, 온 성안이 도륙된 참상은 차마 말할 수 없습니다. 제장은 진주가 함락되었다는 것을 듣고 모두 궤산(潰散)하여 지나는 고을마다 창고의 곡식을 어지럽게 노략질하였는데, 최원이 거느린 군사의 작란(作亂)이 더욱 심했다 하니 매우 가슴 아픕니다.
선조실록 선조 26년 7월 21일자 기사

또한 류성룡은 징비록에서 "김천일이 진주성 함락의 주요 원인이었다"고 비판했다.
김천일이 거느린 군사는 모두 서울의 시정에서 모집한 무리들이고, 김천일도 또한 전쟁에 관한 일은 알지도 못했으면서 자기 고집이 지나치게 심했으며, 더구나 서예원을 평소부터 미워하여 주인과 손이 서로 시기하고 호령이 어긋나게 되어 이 때문에 패전한 것이다. (중략) 김천일의 군사가 북쪽 문을 지키다가 성이 이미 함락되었다고 지레 짐작하고 가장 먼저 무너져 버렸다. 이때 촉석루에 가 있던 김천일과 최경회는 서로 손을 잡고 통곡하던 끝에 남강에 투신하여 죽고 말았다.
징비록

서예원이 진주성이 함락되었을 때 맞이한 최후에 대해서는 다음 3가지 기록이 있다.
(왜적이) 진주목사 서예원과 경상우병사 최경회의 수급을 염장하여 명호옥(名護屋)에 있던 풍신수길에게 보내니 그는 다시 이것을 경도(京都)에 보내 효시케 하였다. 이에 앞서 서예원은 죽기를 두려워하여 숲 속에 숨어 있다가 우희다(宇喜多)의 가신 강본추지승(岡本推之丞)이라는 사람이 찾아내어 목을 베었으나, 누구인지를 몰랐다가 뒤에 알고 크게 기뻐하였다고 한다.
진양군사
목사가 급한 나머지 사이 길을 통해 빠져나가 강을 건너려고 했으나, 홍수에 밀려 떠내려가는 것을 모리수원(毛利秀元)의 수병(手兵) 강본권지윤(岡本權之允)이 달려가서 목을 베었다.
가등청정전(加藤淸正傳)
그때 적들이 장차 곧바로 진주(晉州)로 향하려 하자 서예원은 급히 성으로 돌아가 적들과 여러 번 싸웠는데, 27일이 되어 외부의 지원이 끊어져 먹이와 군량이 모두 떨어지는 통에 군사들과 말이 굶주려서 싸울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서예원은 여전히 기운을 가다듬고 싸움을 지휘하여 동쪽 성문을 지켰습니다. 충청병사(忠淸兵使) 황진(黃進)과 의병장(義兵將) 장윤(張潤)이 탄환에 맞아 죽고 적들이 성으로 달려들어 성이 그만 함락되자, 서예원은 북쪽을 향해 4번 절을 하고 남쪽 문에 가서 앉았습니다. 적들이 항복시키려고 하니 이에 예원은 꾸짖으면서 항복하지 않았으며, 적들이 칼로 찌르는 바람에 그만 죽고 말았습니다.
맏아들 서계성(徐繼聖)은 2명의 남자 종 금이(金伊), 춘년(春年) 그리고 관아의 종 5명과 함께 곧장 앞으로 내달려 치면서 싸워 적 수십 놈을 죽이고, 모두 적의 칼에 맞아 죽었습니다. 처 이씨(李氏), 맏며느리 노씨(盧氏), 시집가지 않은 딸, 그리고 여종 몇 사람은 모두 얼굴을 가리고 몸을 묶은 다음 앞을 다투어 강에 뛰어들었습니다.
고종실록 고종 38년 8월 6일자 기사

서예원의 최후가 적을 피해 달아나다가 주살된 것이었는지, 아니면 장렬한 전사였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다만 서예원이 자신의 가족들과 함께 성에 들어갔다가 모두 죽고 그의 머리가 베어져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전해진 것만은 분명하다.

3. 사후

임진왜란이 종식된 후, 서예원은 선무원종 1등 공신(宣武原從功臣)으로 추록되었고 병조참의(贈兵曹參議)로 추증되었다. 또한 고종 때 의관 안종덕의 상소가 받아들여져 경상남도 진주의 창열사(彰烈祠)에 김천일, 황진, 최경회 등 진주성 전투와 관련된 장수들과 함께 제향되었다.


[1] 박의령(朴義齡)의 차녀로 함양옹주의 고손녀다. #[2] #[3] 양녕대군의 5대손.[4] 1587년 1월 고토와 히라도의 왜구들이 손죽도를 침공해왔을때, 녹도 만호였던 이대원(李大源)이 전라좌수사였던 심암에게 미처 보고하지 않고 출진해 왜구 몇명의 수급을 벤다. 이에 심암은 이대원이 전공을 독차지했다고 시기하여, 피로에 지친 병사 100명만 거느리게 하여 왜구와 싸우도록 한다. 이에 이대원은 날이 밝으면 싸우겠다고 했으나 심암은 기어이 출진시켰고 결국 이대원은 전사한다. 이대원은 죽기 전 자신의 손가락을 잘라 저고리에다 혈서를 쓴 후 이를 하인에게 주어 이것을 장례하도록 부탁한다.[5] 정상에서 어긋난 짓을 하는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