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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천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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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2018062815221467.jpg
이름 김천일(金千鎰)
자(字) 사중(士重)
건재(健齋), 극념당(克念堂)
본관 언양 김씨[1]
출생 1537년 1월 10일
전라도 나주목 동부면 흥룡동
(현 전라남도 나주시 송월동 흥룡동마을)[2]
사망 1593년 6월 29일[3](향년 56세)
경상도 진주목 성내면 이동
(현 경상남도 진주시 본성동 진주성)
시호 문열(文烈)

1. 개요2. 생애
2.1. 임진왜란 이전2.2. 의병장으로서의 활동2.3. 제2차 진주성 전투
3. 평가

[clearfix]

1. 개요

조선 중기의 성리학자, 의병장.

2. 생애

2.1. 임진왜란 이전

1537년 1월 10일 전라도 나주목 동부면 흥룡동(현 전라남도 나주시 송월동 흥룡동마을)의 외가에서 아버지 진사 김언침(金彦琛)[4]과 어머니 양성 이씨[5] 사이의 무녀독남으로 태어났다. 흥룡동은 고려 태조의 제2비 장화왕후고려 혜종의 고향이기도 한 곳이다. 고조부는 감찰(監察) 김석산(金石山, 1422 ~ ?), 증조부는 목사(牧使) 김순형(金順炯, 1458 ~ ?), 할아버지는 주부 김윤손(金潤孫, 1486 ~ ?. 5. 12)이며, 친가는 전라도 담양도호부 창평현 동면 동촌리(현 전라남도 담양군 창평면 유천리)에 있었다.

김천일은 명종 대와 선조 초의 유학자인 이항(李恒)의 문하에 들어가 학문으로 명성이 있었으며, 김인후(金麟厚)·유희춘(柳希春) 등과 교유했다. 과거에 응시하지 않고 초야에 묻혀 지내다가 선조 1년(1568년) 조정으로부터 관직을 제수받았으나 거절했다. 이후 선조 6년(1573년) 학행(學行)으로 발탁되어 군기시주부(軍器寺主簿)로 임명되었으며, 뒤이어 용안 현감에 임명되었고, 뒤이어 사헌부 지평에 발탁되었으나 선조 11년(1578년)에 당대의 폐단에 대해 극력 아뢰다가 임실 현감으로 좌천되었다.

이에 대해 사헌부가 지난번 학행으로 부름을 받은 신하를 즉시 외관에 보직하여 사람들이 실망하고 있으니 김천일을 체직하여 상당한 직에 제수하라고 건의했지만, 선조는 "어진 사람을 등용하는 것은 백성을 다스리기 위해서인데 백성 다스리는 데 쓰지 않고 어디에 쓰겠는가? 그런 말은 할 필요가 없다. 윤허하지 않는다."며 거부했다. 이후 담양부사, 한성부 서윤, 수원부사를 역임한 김천일은 군자감 정(軍資監正)으로 발탁된 후 선조 22년(1589년)에 정여립의 난과 관련해 국가와 백성을 안정시킬 방안을 논하는 상소를 올렸다.
《서경(書經)》 오자지가(五子之歌)에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니 근본이 튼튼하여야 나라가 편안하다.’ 하였는데 이는 만고에 밝게 게시한 교훈입니다. 신이 요즘 역적 괴수의 흉모 비계(兇謨秘計)를 살펴보니, 위를 범하는 죄악을 자행하고자 하여 먼저 나라의 근본이 흔들린 것을 엿보고 음모를 교묘히 내어 전하께 백성의 원망을 전가시키려고 오래도록 못하는 짓이 없었으나 조정 신하들이 그것을 깨닫지 못하였고 전하께서도 알지 못하셨습니다.

대개 6~7년 동안 스스로 지식이 많은 것을 뽐내어 사대부를 속이고 당로의 무리와 체결하여, 몸은 외방에 있으나 멀리서 조정의 권세를 잡고 조정에서 계획하는 일을 참여해 의논하지 않은 것이 없었습니다. 비변사의 공론을 빙자하여 나라를 망치려는 속셈을 이루려 하였고 권세잡은 정승을 사주하여 해마다 서남 지방에 사신을 보내게 하였고 곤궁한 백성을 침학하여 재산을 탕복(蕩覆)시켰으므로 서남 지방의 근본이 크게 무너졌습니다. 게다가 변방을 실하게 한다고 가탁하여 6도(道)에 살고 있는 사변(徙邊)되었던 백성들을 일시에 모두 추쇄(推刷)하기 위하여 1백여 년 허접(許接)한 불명확한 사람을 침독(侵督)하여 잡아 가두고 엄한 형벌을 성화보다 더 급박하게 가하였습니다. 어리석은 백성들이 참혹한 화와 연좌의 죄를 눈으로 직접 보고는 앞을 다투어 도망하여 온 마을이 텅 빈 곳이 있기에 이르렀습니다. 고난을 겪으며 유리(流離)하는 즈음에 임금을 원망하는 소리가 구천(九天)에 사무침으로써 6도의 방본(邦本)이 여지없이 좌절되었으니 이것은 역적이 원망을 생민에게 전가하기 위한 술책이 들어맞은 결과인 것입니다.

다행히 하늘에 계신 조종(祖宗)의 영령이 명명(冥冥)한 속에서 말없이 도와주심을 힘입어 이미 원흉을 제거하고 이어 요승(妖僧)을 주륙(誅戮)하였으며 그 밖의 도당들도 차례로 주륙하게 되었으니, 저 살 곳을 잃은 불쌍한 백성 가운데 혹 유혹에 빠진 자가 있더라도 무지한 무리를 어찌 다 주벌할 것이 있겠습니까. 또한 천지가 만물을 생성(生成)하는 인애한 마음을 넓혀서 용서하고 ‘위협에 의해 마지못해 따른 사람은 지죄하지 말라. ’는 의의를 취하여 용서함으로써 위구(危懼)스런 의심을 제거하고 이산된 마음을 수습하는 것이 곧 불을 끄듯이 급함을 구제하는 오늘날의 계책입니다.

신이 시골에 있을 때에 기황(飢荒)이 든 백성이 조석 사이에 곧 흩어지게 된 것을 보았고, 또 적변(賊變)으로 달마다 소동이 있었는데, 적을 체포하여 호송하는 군사가 굶주려 쓰러지면서 부르짖으며 원망하는 소리가 도로에 전파되어 귀로 차마 들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지난 번 진소(陳疏)하는 내용에 이미 대략을 진달하였습니다. 그 뒤, 잇따라 듣건대 남쪽 지방 백성의 소요가 다시 전일보다 더 심하고 연좌되어 갇힌 사람이 열읍(列邑)의 감옥에 가득 차고 체포하는 군졸이 원근의 도로에 충만하다 하였습니다. 이처럼 추운 때를 당하여 사뭇 지식(止息)될 기약이 없으니, 옥중에는 얼어죽는 원망이 응당 많을 것이고 노상에는 반드시 굶어죽는 자가 깔리게 될 것입니다. 나라의 근본이 흩어져 무너지는 근심이 곧 이처럼 극심한 지경에 이르렀는데, 역적이 나라에 재앙을 끼치려 했던 계책은 오히려 이미 죽은 뒤에도 행해지고 있으니 더욱 한심합니다. 어찌 근본을 튼튼히 하는 정치를 속히 도모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또 생각건대 근일 조야(朝野)가 패란(敗亂)스러운 해독은 마치 병든 사람이 독한 약제를 거듭 먹고 난 뒤 화평(和平)한 약제를 써서 편안하게 하지 않을 수 없는 것과 같은 경우입니다. 저 적당(賊黨)의 초사(招辭)가 사대부에게 언급되어 무고(誣告)당하는 원통함이 있을까 염려되니, 지극히 공정하고 지극히 밝은 논변으로 지극히 성스럽고 지극히 어지신 덕을 온전히 베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무리들은 사적으로 혼암(昏暗)함에 가리워져 마침내는 그의 술책에 떨어져서 망령되이 서로 추장(推奬)함으로써 역적으로 하여금 세력을 의지하여 위엄을 펼쳐 반역의 화를 선동질하게 하였으니 진실로 그 죄를 피할 수 없습니다만, 역모에 같이 참여한 것으로 죄를 추궁하여 극형에 처하기에 이른다면 아마도 실정을 추궁하는 법전에 어긋날 것 같습니다. 더구나 정여립과 원수가 되어 이 사실을 온 나라 사람이 함께 아는 자도 있으니 더욱 초사의 거짓을 증험할 수 있습니다. 그 밖에 원래 대단한 연좌가 아닌데도 말이 힐문하는 무리에게 간련(干連)됨으로 인하여 오래도록 감옥에 갇혀 있는 자도 많으니, 얼어 죽는 원통함이 없지 않습니다. 바라건대 성자(聖慈)께서는 인애(仁愛)를 베풀어 자세히 살피소서. 신은 임금을 사랑하고 나라를 근심하는 마음을 견딜 수 없습니다.

삼가 살피건대, 밖으로는 나라의 근본이 이미 손상되었고 안으로는 심복(心腹)이 무너지게 되었습니다. 만일 급급히 수습하여 진정하는 방도가 없으면 치란(治亂)의 기틀이 오늘날에 당장 판정되어 사태가 매우 급박하게 될 것이니, 이것이 신이 감히 입을 다물고 있지 못하는 까닭인 것입니다.
선조실록 선조 22년 11월 1일자 기사

2.2. 의병장으로서의 활동

이후 관직에서 물러나 나주에서 은거하던 김천일은 선조 25년(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여 적의 대군이 북상해 서울이 함락되고 국왕이 파천했다는 소식을 접했다. <창의사 김공 정렬사 비(倡義使金公旌烈祠碑)>에 따르면, 김천일은 한양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접하자 울부짖고 통곡하며 거의 까무러칠 정도까지 되었다가 이윽고 떨쳐 일어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내가 통곡만 하면 무슨 소용이 있는가. 나라에 난리가 일어나서 군부(君父)가 파월(播越)하고 있는 때에 세신(世臣)인 내가 새처럼 뿔뿔이 흩어져서 목숨만 건지려고 해서는 안 될 일이다. 나는 장차 의로운 군사를 일으켜 난리 속으로 뛰어들 것이다. 가령 강하고 약한 면에서 상대가 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때는 오직 죽음이 있을 따름이니, 죽지 않고서는 나라에 보답할 길이 전혀 없다.

이후 그는 고경명, 최경회, 박광옥(朴光玉) 등에게 글을 보내 의병을 일으킬 것을 제안했고, 뒤이어 나주에서 송제민(宋濟民)·양산숙(梁山璹)·박환(朴懽) 등과 함께 의병 300명을 모아 북쪽으로 출병했다. 선조수정실록에 따르면, 당시 김천일은 체질이 허약해 병이 많아서 갑옷의 무게도 이기기 어려웠으나 국난에 비분강개하여 한양을 탈환하려는 뜻이 굳건해 뭇사람들로 하여금 적과 대치하여 목숨을 내걸고 싸우게 할 수 있었다고 한다.

수원에 도착한 김천일은 수원의 독성산성을 거점으로 삼고 일본군에게 귀순한 순왜를 처형하는 동시에 유격전을 전개해 일본군을 상대로 여러 차례의 전투를 치렀다. 그 중 금령 전투(金嶺戰鬪)에서는 적병 15명을 참살하고 많은 전리품을 노획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 기록은 '창의사 김공 정렬사 비'에만 기재되어 있고 임진왜란 시기의 다른 사료들에는 없어 교차검증이 되지 않아서 신빙성이 의심된다.

선조 25년(1592년) 7월, 김천일과 전라 병마 절도사 최원(崔遠)은 수원에서 인천으로 진을 옮기고 전라 감사 이광에게 군대 지원을 요청했다. 이에 이광이 이유의(李由義)·선거이 등에게 일부 병력을 맡겨 김천일 등을 지원하게 했지만, 양측의 군사가 오래 머물자 도망가는 사졸이 많았다. 결국 김천일 등은 강화도로 들어가 바다를 의거해 지키면서 민심을 안정시켰다. 그 후 김천일은 부하 양산숙(梁山璹)·곽현(郭賢) 등에게 장계를 줘서 조정에 보내 그간의 사정을 설명했고, 조정은 그의 공로를 기려 창의사(倡義使)라는 군호를 수여했고 장례원판결사(掌禮院判決事)에 임명했다.

김천일이 보낸 장계의 자세한 내용은 기록이 미비해 알 수 없지만, 전후사정을 볼때 강화에서 한양 탈환을 도모하겠다고 밝혔던 듯하다.
상이 이르기를,
(중략)
"전일 김천일(金千鎰)이 강화(江華)에 있을 적에 날짜를 정하여 적을 친다고 했는데 내가 그때 의주(義州)에 있으면서 그 말을 듣고 실소를 금치 못했다."
선조실록 선조 26년 12월 4일자 기사.

당시 조정은 그런 그의 호언장담을 기대했고, 김천일은 과연 그 기대에 부응하는 듯했다. 8월 6일, 김천일은 전라 병마 절도사 최원의 지휘하에 강화부사 윤담, 월곶진 첨절제사 이빈 등과 함께 배를 타고 진격해 토성으로 퇴각한 일본군 200여 명을 사살하고 수급 92두를 획득했다. 그러나 얼마 후 다시 장단에 주둔한 일본군을 공격했다가 일본군이 뭍으로 오르도록 유인한 후 습격하자 크게 패했고, 김천일 등은 겨우 몸만 빠져나와 강화도로 퇴각해 이후로는 다시 뭍으로 나오지 못했다. 이에 선조는 김천일에 대해 불만을 토로했다.
"파견할 만한 사람이 있으면 그를 보내야 한다. 대신이 간다 하더라도 어떻게 경성 사람들을 알 수가 있겠는가. 김천일(金千鎰)은 장담만 하고서 이뤄 놓은 일이 없으니 이는 무슨 까닭인가. 대신이 아니더라도 품계가 높은 재신(宰臣)을 보낼 수 없겠는가? 여럿이 의논하여 결정하라."
(중략)
또 이르기를,
"김천일의 군대는 몇 명이나 되는가."
하니, 충간이 아뢰기를,
"천일의 군대는 반이 유생(儒生)이어서 누차 패전하여 유명 무실합니다. 다만 우성전(禹性傳)이 거느린 군사가 매우 숫자가 많고 윤정(尹瀞)이 거느린 군사가 5천여 명입니다. 이들 군사는 모두 삼강(三江) 하구의 사람들로 용맹스러워 쓸 만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김천일 등이 의기는 있으나 용병에 능하지 못하여 일을 할 수가 없다."
선조실록 선조 25년 10월 11일자 기사

게다가 당시 강화도에 있던 최원 휘하 조선 관군은 모두 짚이나 풀로 만든 옷을 입고 있어서 조정에서 면포를 보내 겨울에 동사자가 없도록 조치해야 했다. 김천일의 의병 역시 관군보다 하등 나을 것이 없었다.
상이 이르기를,
"강화(江華)의 제군(諸軍)은 어찌하여 한번 들어가고는 다시 나오지 않는가?"
하니, 이덕형이 아뢰기를,
"최원(崔遠)의 군사는 둔취(屯聚)한 지가 오래이고, 김천일(金千鎰)의 휘하에는 적을 막을 만한 사람이 없기 때문에 아무 일도 할 수가 없습니다."
하였다.
선조실록 선조 25년 11월 19일자 기사

김천일은 이러한 암담한 상황에 낙담했는지 자신에게 중병이 있어 보전하기 어렵다면서 이빈에게 휘하 군대를 맡기고 싶다는 뜻을 내비쳤지만 비변사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이에 대해 사관은 다음과 같이 평했다.
사신은 논한다. 김천일은 당초의 거조가 큰일을 할 듯했는데, 한번 싸워 보지도 않고 외딴섬에 들어가 스스로 보전할 계책을 세웠으니 애석하다.

이듬해 1월 22일, 김천일은 조정에 한양을 탈환하기 위해 기회를 기다리고 있다는 내용의 상소를 올렸다.
경도(京都)의 백성들이 이미 고국을 그리워하는 마음이 간절하여 다투어 내응하기를 바라는데, 그 수효가 수천 명에 이를 것입니다. 비록 적이 진치고 있는 데 대응하여 대략 부오(部伍)를 나누고 각기 그 장수를 정하긴 하였지만 합당함을 얻기는 어렵습니다. 단지 그 가운데 조금 나은 자를 차출하고 가끔 신임할 만한 사람을 보내어 몰래 엿보게 하면 틀림없이 병력을 통합할 수 있을 것이니, 외부에 흩어져 있는 왜적을 격파한 연후라야 도성 안에 점거하여 있는 적을 들어가서 공격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아직 거사하지는 않고 기회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선조실록 선조 26년 1월 22일자 기사

또한 김천일은 왜적이 명종의 묘인 강릉(康陵)과 중종의 왕후 문정왕후의 묘인 태릉(泰陵)을 도굴하려다 실패했다고 보고했다.
12월 16일에 적이 기병과 보병 50여 명을 거느리고 또 성중의 주민 50명을 뽑아 강릉(康陵)과 태릉(泰陵)에 가서 능을 팠지만 능 위에 회(灰)가 단단하게 막혀서 깨뜨리지 못하고 날이 저물어 파하고 되돌아왔으며, 또 대원군(大院君)의 묘소에 가서 팠지만 뚫지 못하고 되돌아왔습니다. 사포서(司圃署)의 종 효인(孝仁)이 당초에 ‘능침(陵寢) 속에 금은(金銀)을 넣어 간직하였다.’고 사주하였으며, 사헌부 서리(司憲府書吏) 최업(崔業)이 왜의 서원(書員)이 되어 전적으로 능을 파는 일을 관장하여 방리(坊里)의 인정(人丁)을 뽑았다고 합니다.
선조실록 선조 26년 1월 22일자 기사

이에 조정은 운천군 이신(李愼) 등에게 두 능의 안위를 살피고 돌아오라고 지시했고, 이신은 2월 20일에 돌아와 보고했다.
광릉(光陵) 두 능은 능과 석물이 모두 전과 같으나 정자각(丁字閣)의 창과 벽이 여기저기 파손되었고 재실청(齋室廳)이 반은 소실되었으며, 봉선전(奉先殿)의 창과 벽이 여기저기 파손되었습니다. 영정은 한 중이 청결한 곳으로 옮겨 밤낮없이 지키면서 지금까지 봉안하고 있다고 합니다. 강릉(康陵)은 대왕의 능은 여기저기 불탄 흔적이 있고, 왕후의 능은 모두 불에 탔습니다. 두 능의 석물은 모두 전과 같고 정자각은 소실되었습니다. 태릉(泰陵)은 능 전면이 반쯤 파졌고 난간석의 전면이 반쯤 파손되었습니다.
선조실록 선조 26년 2월 20일자 기사

후에 김천일의 명령을 받고 중종의 묘인 정릉을 수습한 덕양령(德陽令) 이충윤, 이준경(李峻慶)이 조정에 당시의 상황을 증언했다.
신은 창의사(倡義使)의 진중(陣中)에서 시종 종군(從軍)하고 있었는데, 금년 4월에 선릉(宣陵)과 정릉(靖陵)의 참변을 처음 들었습니다. 주장(主將) 김천일(金千鎰)이 종실(宗室)을 초치(招致)하여 봉심(奉審)할 사람을 모집할 때, 신은 성묘(成廟)의 4대손으로서 몸을 돌보지 않고 자원(自願)하여, 이준경 및 군사 30명을 거느리고서 17일 진시(辰時)에 적진(賊陣)을 뚫고 가서 3경에 정릉에 도착하여 봉심하니, 분묘(墳墓)가 파헤쳐져 있었습니다. 신들이 곡한 뒤에 아병(牙兵) 서개똥(徐介同)으로 하여금 먼저 광중(壙中)에 들어가서 찾아보게 하였더니, 시체(屍體) 1구(軀)가 광중 안에 있다고 하였습니다. 엉겁결에 당한 일이라서 어찌할 바를 몰라 신이 입고 있던 초록색 갑철릭[甲天益] 한 벌과 이준경이 입고 있던 아청(雅靑)색 유철릭[襦天益] 한 벌과 백색 여단오(女短襖) 한 벌을 벗어 이준경 등으로 하여금 염습(斂襲)을 하고 묶게 하였습니다. 그런 다음 광중을 깊이 파고 시체를 묻고서 기와장으로 덮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선릉의 두 능침(陵寢)으로 가서 찾아보았으나 아무 물건도 찾을 수 없었습니다.
선조실록 선조 26년 8월 24일자 기사: 덕양령 이충윤이 정릉의 일에 관해 공초하다.
신은 창의사 김천일의 군사인데, 창의사가 적수(賊藪) 중에 다른 사람은 자기가 제거하기가 어려울 것이라고 여겨 신으로 하여금 정릉을 봉심하라고 하였습니다. 즉시 덕양령과 함께 관악산(冠岳山)에서 내려갔는데 봉상시(奉常寺)의 종 서개똥으로 하여금 길을 안내하도록 하였습니다. 그러나 길을 잃고 헤매던 중에 덕양령과 개똥은 먼저 함께 갔으므로 신은 어렵게 뒤쫓아가서 보니 덕양령은 이미 능소(陵所)에 도착해 있었습니다. 덕양령이 신을 맞으며 말하기를 ‘옥체(玉體)가 광중 안에 있다.’고 하였습니다. 신은 ‘누가 들어가 보았느냐?’고 물었더니, 덕양령이 ‘개똥이 들어가 보았다.’고 하였습니다. 신이 ‘나리[進賜]는 어찌하여 들어가 보지 않았는가.’고 물었더니, 덕양령이 ‘나는 심증(心症)이 있어서 이런 곳을 전부터 가까이하기 어려웠다.’ 하였습니다. 신이 ‘이 일은 전적으로 종실의 일인데 어찌 이렇게 허술히 하는가.’ 하고서 개똥에게 ‘광중의 깊이가 얼마나 되더냐?’고 물었더니 3장(丈)쯤 된다고 하였습니다.

신이 허리에 끈을 묶어서 위에서 당기게 하고 내려가 보았더니 캄캄하여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옆에서 개똥이가 ‘옥체가 여기 있다.’ 하므로 신이 만지지 못하도록 하고서 부시를 쳐서 불을 붙여 보니 시체가 광중 깊은 곳에 가로놓여 있는데 머리털과 수염이 전혀 없었습니다. 이어 덕양령에게 입은 옷을 벗게 하여 시체의 허리 윗부분을 싸고 신이 입고 있던 옷을 벗어 허리 아랫부분을 쌌습니다. 개똥이도 백폭(白幅) 하나를 가지고 왔는데, 신이 어디서 구했느냐고 물었더니, 곡장(曲墻) 밖에서 주웠다고 하였습니다. 그 백폭을 찢어서 시체를 묶었습니다."
선조실록 선조 26년 8월 24일자 기사: 이준경이 정릉의 일에 관해 공초하다.

한편 김천일은 조정에서 의병을 관군에 편입시키는 조치에 대해 이는 의병을 해산시키는 조치라며 불만을 제기했다.
상이 이르기를,
"경기의 의병들이 여기저기 모여 있으니 그들로 하여금 군량을 운반하게 할 수 있겠는데, 김천일(金千鎰)의 장계(狀啓)를 보니, 조정에서 의병들을 해산하여 되돌려보내는 조치를 매우 부당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조정에서 영을 내려 해산하고 돌아가게 했는가?"
하니, (도승지) 심희수가 아뢰기를,
"김천일의 장계가 무엇을 근거로 한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하였다.
선조실록 선조 26년 2월 4일자 기사

선조는 이런 김천일에게 반감을 품고 김천일이 장수의 재능이 없다고 혹평했다.
상이 이르기를,
"전일 연안성(延安城)이 포위되었을 때 강화(江華)에 위급을 고하니 김천일(金千鎰)은 구원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제 군대에게 논상하려고 하였으니 이 무슨 도리인가?"
(중략)
신경희가 아뢰기를,
"김천일이 군사 3백 명을 거느리고 온 것을 사람들이 모두 귀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하고, 심희수가 아뢰기를,
"김천일이 다만 외로운 섬에 들어가서 일을 이루지는 못했으나 당초 국가가 위태로운 중에 군사를 이끌고 멀리 왔으니 뜻만은 가상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이 사람의 뜻은 칭찬할 만하나 장수의 재능이 없다."
선조실록 선조 26년 2월 24일자 기사

그러던 1593년 4월 일본군이 한양에서 철수하자, 조정은 김천일 등에게 적을 추격하여 남쪽으로 내려가 도원수 권율의 지휘를 받으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명군이 일본군을 추격해 전투를 벌이는 걸 허락하지 않아, 결국 조선군은 철수하는 일본군을 건드리지 못했다.

2.3. 제2차 진주성 전투

<창의사 김공 정렬사 비>에 따르면, 김천일은 명나라와 일본 사이에 화의가 논의되자 분개해 이여송에게 강화의 부당함을 진술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자 울분을 이기지 못하고 병석에 누웠다고 한다. 그러다가 적을 추격하라는 임금의 교지가 내려오자 병상에서 일어나 "내가 이제 죽을 곳을 얻었다."고 기뻐하며 3백 명의 의병을 이끌고 남하했다고 한다. 당시 진주성에는 일본군 대병력의 공격이 예견되었기에 진주성을 버리고 물러나야 한다는 주장이 강했는데, '정렬사 비'에 따르면 김천일은 "호남은 나라의 근본이고 진주는 실로 호남의 울타리이다."라며 진주를 지킴으로서 호남을 보호할 것을 주장하고 대답을 기다리지 않은 채 곧장 진주성으로 들어갔다고 한다. 그는 진주성에 들어간 직후 조정에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신이 이달(6월) 14일에 진주성(晉州城)에 도착하였는데, 목사(牧使) 서예원(徐禮元)이 중국군 지대(支待)하는 일로 나갔다가 저물어서야 돌아왔습니다. 그와 함께 변란에 대처하는 여러 가지 일을 상의하여 결정하였습니다. 15일에 전라 병사 선거이(宣居怡), 조방장(助防將) 이계정(李繼鄭), 충청 병사 황진(黃進), 조방장 정명세(鄭名世), 경기 조방장 홍계남(洪季男), 경상 우병사 최경회(崔慶會), 복수 의장(復讐義將) 고종후(高從厚)들이 잇따라 달려왔는데, 다음날 전라 순찰사(全羅巡察使) 권율(權慄)이 전라 병사와 각항(各項)의 장령(將領) 등에게 전령(傳令)하여 모두 나아오게 하므로 제장(諸將)이 일시에 달려가니 성중이 흉흉하여 이 때문에 일이 누설되었습니다. 신이 최경회·황진 등과 더불어 겨우 수합(收合)하였으나 3천 명에 불과하였습니다. 성안은 넓은데 이처럼 주린 군사로서는 방어하기가 쉽지 않으니 지극히 우려됩니다. 대개 진주는 바로 전라도의 보장(保障)인데 순찰사 이하가 방어를 철수하여 산음(山陰)으로 옮겨 갔으니 더욱 우려됩니다.
선조실록 선조 26년 7월 10일자 기사

6월 19일 전라 병사 선거이가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사태를 보고는 "적은 많고 우리는 적으니 물러가서 내면을 지키는 것이 낫다."고 말했다. 김천일은 강력히 반대했지만, 선거이는 성을 나가 운봉에 진을 쳤다. 그러나 그는 산골짜기에 물러가 진주성이 함락될 때까지 구원하지 않았다. 선거이는 이때문에 탄핵받았지만 그를 대신할 장수가 없다는 이유로 용서받았다. 또한 의병장 홍계남 역시 의병을 이끌고 진주성 근처까지 이르렀지만, 적의 수가 너무 많아 당해낼 수 없다고 판단하고 더이상 접근하지 않았다.

이후 10만에 가까운 일본군이 6월 22일 진주성을 포위하고 맹공을 퍼붓자, 김천일은 구원을 요청하는 통보를 하루에 3~4차례씩 보냈다. 이에 조정에서는 명군에게 진주성을 구원해줄 것을 청했지만, 명군은 일본군에게 말로만 경고할 뿐 진주성을 끝내 구원하지 않았다. 이후 김천일은 충청 병사 황진, 경상 우병사 최경희, 의병 복수장 고종후, 부장 장윤, 의병장 이계련, 의병장 변사정, 의병장 민여운, 본주 판관 성수경, 김해 부사 이종인, 거제 현령 김준민, 사천 현감, 장윤, 태안 군수 윤구수, 결성 현감 김응건, 당진 현감 송제, 남포 현감 이예수, 황간 현감 박몽열, 보령 현감 이의정, 본주 목사 서예원 등과 함께 일본군과 대적했다.

선조실록 선조 26년 7월 16일자 기사에 수록된 2차 진주성 전투의 경과에 따르면, 김천일은 6월 26일 진주목사 서예원이 적의 기세에 짓눌려 겁을 먹고 당황하자 의병 부장 장윤을 가목사(假牧使)로 삼았다고 한다. 이후 일본군이 성안에 글을 보내 "대국의 군사도 이미 투항하였는데 너희 나라가 감히 항거하겠는가."하자, 성안에서는 "우리 나라는 죽음이 있을 뿐이다. 더구나 명나라 군사 30만이 지금 진격 중이니, 너희들은 섬멸되고 말 것이다."라고 답했다. 그러자 일본군 병사들이 아랫도리를 벗어붙이고 야유를 하며 "중국 군사는 벌써 물러갔다."고 했다. 이에 김천일은 매양 높은 데 올라가 바라보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모방(某方)에 병기(兵氣)가 있으니, 명나라 군사가 곧 와서 구원할 것이다.

병사들은 그 말을 듣고 기뻐했지만 조금 있다가 조용해지곤 했다고 한다. 또 김천일은 최경회 등에게 "언제나 이 적을 물리치고 하란진명(賀蘭進明)의 살점을 뜯을 것인가."라고 말했다고 한다.[6] 이후 진주성은 적의 맹공에도 굳건히 버텼으나 28일 황진이 성 밑을 굽어보며 적의 시체를 세다가 성 밑에 잠복하고 있던 적이 탄환을 쏴 황진을 사살하자[7], 황진을 굳게 따르던 병사들이 두려워했다. 김천일은 29일에 황진을 대신해 서예원을 순성장(巡城將)으로 삼았으나, 서예원은 겁을 먹고 전립(戰笠)도 벗은 채 말을 타고서 눈물을 흘리며 순행했다. 이에 분노한 병사 최경희가 서예원이 군정을 동요케 한다고 여겨 참하려 했다가 그만두고 장윤으로 하여금 대신 순성장을 삼았다. 그러나 장윤도 탄환에 맞아 죽었고, 끝내 적이 동문을 부수고 성에 난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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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실록에 따르면, 좌우가 김천일을 부축해 일으켜서 피하기를 권했지만 김천일은 꼼짝도 하지 않고 앉아서 좌우를 돌아보며 "나는 이곳에서 죽을 것이다."하고 장남 김상건(金象乾, 1557 ~ 1593)과 더불어 서로 끌어안고서 강으로 몸을 던져 죽었다고 한다. 또 선조수정실록에 따르면 김천일이 최경회, 고종후 등과 청당(聽堂)에 나란히 앉아서 "여기를 우리들이 죽을 장소로 합시다."하고는 술을 가져오게 했으나 술을 지니고 있던 자들이 이미 달아나고 없자 불을 질러 스스로 타 죽으려 했다고 한다. 그러나 적이 바로 촉석루에 올라오자, 김천일은 장남 김상건 및 최경회, 고종후, 양산숙(梁山璹) 등과 함께 북쪽을 향하여 두 번 절하고 강에 몸을 던져 목숨을 끊었다. 사관은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했다.
우리 나라는 전대(前代)부터 큰 적을 겪지 못했으므로 국내의 큰 성이라야 높이가 3장(丈)에 불과했으며, 위로는 누로(樓櫓)가 없고 아래로 갱참(坑塹)이 있다 해도 대부분 얕고 좁아 뛰어 넘어올 수 있었다. 진주성은 본래 누석(壘石)으로 얕게 축조한 것인데, 성안에 비치된 식량이 충분했다 해도 전사(戰士)는 수천 명에 불과하였다. 적이 10배의 병력으로 번갈아 휴식시켜가면서 계속 들이닥쳤으니 이는 김시민(金時敏)이 당하던 적과는 중과(衆寡)가 현격하게 다른 것이었다. 그런데 김시민도 지킨 지 7개월 만에 성안이 이미 곤핍해졌고 보면 곧 그 형세를 알 만한 일이다. 그럼에도 김천일 등이 충의(忠義)만을 가지고도 사중(士衆)을 격려하였던 것인데 황진·이종인·장윤·김준민 등이 모두 군사 중에 으뜸가는 용무(勇武)를 가졌던 관계로 왜적을 꺾어 상당수를 살상하면서 9일이 지나서야 힘이 다하였으니, 전수(戰守)를 잘못한 것이 아님은 분명하다.

서예원은 처음부터 성을 버리려고 하였으나 원수(元帥)에게 눌려 감히 움직이지 못하였고, 밖의 장수들도 모두 군문(軍門)의 명을 받고 반드시 패할 땅에 들어가 있는 상황이었다. 따라서 이때 나가서 피해야 한다는 의논이 갑자기 일어났던 것인데, 김천일이 항언(抗言)하여 그 의논을 중지시켰으니, 세상에서 이 점을 들어 김천일을 허물하는 것은 그럴 듯한 일이라 하겠다. 그러나 자고로 충의(忠義)의 선비로서 성을 지키다가 죽게 되어 심지어는 백골이 천리에 드러나기까지 하되 마침내 그런 경우를 면하지 못한 이들은 모두 김천일의 유라고 하겠는데, 그들을 비난하며 죄를 준 경우가 있었다는 말은 듣지 못했으니, 이는 무엇 때문이겠는가. 그런데 김천일 등이 불과 수천의 군사를 거느리고서도 죽인 적의 수효가 수천 인에 그치지 않았었고 보면 또한 그의 죽음이 헛되었다고 할 수는 없다. 그때에 김천일 등이 아니었더라면 겁많고 미련한 서예원으로서는 필시 하루이틀도 막아내지 못하였을 것이니, 따라서 성안의 사민 남녀 6, 7만 명이 모두 죽게 되고 허다한 식량과 기계가 죄다 적에게 넘겨졌을 것인데, 무슨 이익이 있었겠는가.

서예원의 형 서인원(徐仁元)은 의논을 좋아하는 것으로 명사가 되었으나 궤휼(詭譎)하고 기기(忮忌)하였다. 일찍이 김천일을 교묘하게 비방하면서 예원을 신원하려고 하였던 까닭에 사대부들 사이에 간혹 이론(異論)이 있게 되었고, 심지어는 상의 앞에서 무훼(誣毁)하여 ‘천일의 뜻은 숭상할 만하나, 재주가 졸렬하여 일을 그르쳤다.’고까지 하였다. 그러나 천일이 국사를 그르친 것이 뭐가 있는지 모르겠다. 과연 사람들의 말과 같다면, 진주의 유민(遺民)들은 천일 등과 더불어 같은 도의 사람으로 본디 서로 친신(親信)한 경우가 아닌데도 그를 숭앙하여 제사까지 지내면서 오래갈수록 더욱 독실하게 하는 데 반해, 예원에 대해서는 타매(唾罵)하면서 심지어는 ‘예원은 온 집안이 적에게 투항했다.’고 하여 한마디도 애석해 하는 말이 없었으니, 공리(公理)가 인심에 있어 속일 수 없는 것이 이와 같다.

애통하게 여길 만한 것은, 행장(行長)이 청정(淸正)과 혐의가 있는 것처럼 거짓 드러내 보이면서 우리 나라가 필시 진주성을 버리지 않을 것을 알고는 거짓으로 버리고 피하기를 청한 사실이다. 이 때문에 조정에서는 더욱 진주성을 보전하려고 충신(忠臣)과 용장(勇將)을 증파(增派)하여 한성에서 함께 죽게 하였으니, 이는 본시 수길(秀吉)의 계략이었다. 왜인 중에서 말하기를 ‘조선 사람은 소문만 듣고도 먼저 달아나 한 번도 정식으로 대적하려 하지 않는다. 그래서 건장한 군사들이 모두 죽지 않고 흩어졌다가 다시 합하여 곳곳에서 왜중(倭衆)을 초살(勦殺)하는데 이것이야말로 당하기 어려운 것이다. 행장이 반드시 진주성을 버리라고 한 것은 일부러 그들을 완전히 집결하게 하여 섬멸시키려 한 것이다.’ 하였다. 왜인이 강항(姜沆)에게 말하기를 ‘조선의 장사들이 진주성에서 다 죽었으니, 이후로는 우리를 괴롭힐 자가 없을 것이다.’ 하였다. 그 뒤에 이간질을 하여 이순신(李舜臣)을 떠나게 만들고 원균(元均)을 패하게 만든 것도 모두 깊은 기모(機謀)에서 나온 것이다.

대저 진주성은 이미 누차 승전하여 홀로 온전하게 지켜 냈고 곡식 10만 석을 비축하여 일면의 보장지(保障地)가 되었으니, 반드시 지키고 떠나지 않을 것을 행장은 본래 익히 알고 있었던 것이다. 옛날 용병(用兵)을 잘하는 자는 장차 취하려 할 때 먼저 주는 경우도 있었다. 그런데 이 성을 지키지 못할 가능성에 대해 어찌 김명원(金命元) 등이 능히 판단할 수 있었겠는가. 더구나 조정에서 문법(文法) 을 가지고 장수들을 휘어잡아 항시 동서로 진퇴하는 일에 대한 통제가 중앙에서 나옴에 있어서랴. 김명원 등이 만일 행장의 말에 따라 진주성을 버리게 했더라면 필시 군법에 의해 죄를 얻을 것인데, 김명원이 어찌 감히 스스로 독단할 수 있었겠는가. 이것이 곽재우(郭再祐)의 의논이 받아들여질 수 없었던 이유이다. 진주의 패망된 상황은 여러 장상(將相)들이 조사하여 갖추 주문하였고, 또 기록한 자가 많으므로 사실을 참험(參驗)하여 대략 여기에 적는 바이다.
선조수정실록 선조 26년 6월 1일자 기사

그러나 실록에는 이와 상반되는 내용들도 실려 있다. 가령 황해도 방어사 이시언은 진주성에서 가까스로 살아나온 정로위(定虜衛) 인발(印潑)이 진주성이 함락된 경과를 설명했다는 내용을 보고했는데, 거기엔 진주 목사 서예원이 김천일에 의해 경질되었다는 이야기는 없었다. 사실 일개 의병장이 진주성을 수비할 총체적인 책임을 맡은 목사를 하루아침에 경질하고 진주성 전체를 통솔한다는 건 이치에 맞지 않으며, 실록에는 진주성에 입성했을 당시 조정이 그에게 그러한 권한을 부여했음을 알려주는 기록이 존재하지 않는다. 선조수정실록 선조 26년 6월 1일자 기사에는 김천일과 최경희가 도절제(都節制)가 되었고 김천일은 의병을 통솔하고 최경희는 관군을 통솔했다는 기록이 있지만, 선조 실록을 비롯해 당대 사료에서 이런 사실이 있었음을 교차검증해줄 자료는 존재하지 않는다.

또한 진주성 함락 후 사망자를 조사한 경상우도 관찰사 김늑(金玏)의 보고에 따르면, 진주성 전투에서 전사한 진주 목사의 군사가 2,400명, 진주 병사의 군사가 420명, 충청 병사의 군사가 97명, 창의사 김천일의 군사가 60명, 복수 의병장 전사의의 군사가 50명, 적개 부장(敵愾副將) 이잠의 군사가 50명, 표의병(彪義兵) 이계년의 군사가 30명, 웅의 대장(熊義代將) 정원한의 군사가 11명, 영광 의병(靈光義兵) 심우신의 군사가 12명, 분의장(奮義將) 강희열의 군사가 50명, 방의 대장(方義大將) 강희보의 군사가 30명, 현웅군 대장(玄雄軍代將) 정충훈의 군사가 20명, 채의 대장(蔡義代將) 정운호의 군사가 10명이었으며, 진주 목사의 군사는 그 외에도 성에 많이 들어와 있었다고 한다. 다시 말해 진주 목사 서예원은 김시민이 전사한 후 부임하여 3천명 가량의 병력을 이끌었던 것이다. 이 정도 군대를 갖춘 목사가 일개 의병장에게 경질되고 진주성의 군대 전체가 김천일에게 지휘를 받았다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

그리고 임진왜란 당시 영의장이자 도체찰사인 류성룡은 진주성 함락의 책임이 김천일에게 있다고 주장했다.
유성룡이 아뢰기를,
"진주성(晉州城)이 함락될 때 외지의 군사가 많이 들어가 호령이 통일되지 않았기 때문에 패망하게 된 것입니다. 인력으로 해야 할 일을 다하였더라면 진주는 대읍(大邑)이니 필시 함락되지는 아니하였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장사가 많이 죽었는데 이것만이 애석한 것이 아니라 이 뒤로부터는 모두가 성(城)을 지키는 것을 경계하게 되었으니 이것이 더욱 불행한 일이다. 나의 생각으로는 진주성이 함락된 것은 형세상 필연적인 일이었다. 병력의 강약이 전후가 현격하게 달랐으니, 전에는 왜적이 일개 부대의 병사로 와서 포위하였기 때문에 보전할 수 있었지만 후에는 대부대의 적이 쳐들어와서 기어이 함락시킬 작정을 하고는 성밖의 해자(垓子)를 터서 마르게 한 뒤에 구덩이를 채워 성에 닿도록 쌓고서 타고 올라왔다고 하였다."
하였다. 유성룡이 이르기를,
김천일의 군사는 모두 시정(市井)의 무리들이었으니 그런 군병으로 어떻게 수비할 수 있었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김천일이 강화(江華)에 있을 때 병사를 훈련시키지 아니하였는가?"
하였다. 유성룡이 아뢰기를,
"어느 겨를에 병사를 훈련시켰겠습니까. 그리고 그의 성질이 또한 실로 오활하고 옹졸하였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김천일의 마음은 고귀하지마는 성품은 과연 오활한 사람이었다."
선조수정실록 선조 27년 3월 20일자 기사
김천일이 거느린 군사는 모두 서울의 시정에서 모집한 무리들이고, 김천일도 또한 전쟁에 관한 일은 알지도 못했으면서 자기 고집이 지나치게 심했으며, 더구나 서예원을 평소부터 미워하여 주인과 손이 서로 시기하고 호령이 어긋나게 되어 이 때문에 패전한 것이다. (중략) 김천일의 군사가 북쪽 문을 지키다가 성이 이미 함락되었다고 지레 짐작하고 가장 먼저 무너져 버렸다. 이때 촉석루에 가 있던 김천일과 최경회는 서로 손을 잡고 통곡하던 끝에 남강에 투신하여 죽고 말았다.
징비록

또한 선조실록에는 진주성 전투 때 김천일이 지키던 북문이 무너지는 바람에 성이 함락되었다는 내용도 기재되어 있다.
덕열이 아뢰기를,
"진주성의 패배에, 황진(黃進)이 죽자 호령이 산만하여 끝내 지킬 수 없었고, 김천일(金千鎰)의 군사는 모두가 시정(市井)의 무뢰배였으므로 북문을 지켰으나 먼저 궤멸되었고, 이종인(李宗仁)이 힘껏 싸웠으나 지탱하지 못하였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진주의 장사(將士)가 생존해 있다면 국사가 어찌 이런 지경에 이르렀겠는가."
하자, 덕열이 아뢰기를,
"죽은 자가 6만이었다고 합니다."
선조실록 선조 27년 7월 17일자 기사

이에 대해 안방준은 '진주서사'에서 김천일을 옹호했다.
류성룡은 진주성 함락은 김천일의 실책 때문이라고 하였다. 김천일이 죽음에 이르러 통곡한 것을, 죽음을 두려워하여서인 것처럼 기술하였다. 도대체 류성룡의 뜻이 무엇인지 알 수가 없다. 김천일이 진주성 인민을 죽였다고 비난하는데 슬프다! 그가 진주성 방어전을 벌이지 않았다면, 적의 기세가 꺾이지 않아 호남 오십여 성은 모두 짓밟혀지게 되어, 그 참화(慘火)는 진주성 것보다 훨씬 심하게 되었을 것이다. 호남 한 개 도의 사람 수가 진주 한 개 성의 그것과 어찌 같다고 할 수가 있겠는가!

3. 평가

사신은 논한다. 신하를 알아보는 데는 임금만한 자가 없다고 했는데 상이 김천일을 논한 것은 김천일의 사람됨을 명확하게 알았다고 할 수 있겠다. 김천일은 도량이 편협하고 재략이 천단(淺短)하니 어떻게 난을 평정하고 시대를 구제할 재목이었겠는가. 그러나 그 마음만은 진실로 귀하게 여길 만하다. 처음 난이 일어났을 때 한산(閑散)한 신분으로 전라도 나주촌(羅州村)에 있었는데 적병이 경성(京城)에 들어가고 거가(車駕)가 서쪽으로 파천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눈물을 흘리며 강개하여 향정(鄕井)에서 모집한 의사(義士) 겨우 3백여 명을 이끌고 경성으로 곧바로 향하였다.

그때 전라 순찰사 이광(李洸)이 용인(龍仁) 지방에서 패하여 수만 명의 군사가 일시에 쫓겨 도망을 하였는데, 김천일의 외로운 군사들은 저들의 패배를 보고도 조금도 동요되지 아니하고 마치 낙토(樂土)로 달려가듯 하였으니 그가 사졸의 마음을 얻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다가 강화(江華)를 보존하여 지킬 때에는 3∼4천의 군사를 모집하여 전진(全陣)의 적을 공격하였으나 모두 불리하자 경강(京江) 근처에 복병을 설치하여 전후에 참괵(斬馘)한 것이 거의 4백여 급(級)이나 되었고, 또 서울에서 적에게 붙었던 백성들을 유인해 내어 자기에게 소속되게 하였다. 이 때문에 강화가 보존되어 위로는 행조(行朝)와 통하고 아래로는 양호(兩湖)와 연결될 수 있었으니 그 공로 역시 작지 않았다.

그러나 기운이 매우 잔약하고 몸마저 병이 많은 데다 오래도록 군중에 있으면서 근심과 피로로 병이 생겨 낮이면 미음을 마시고 밤이면 앉아서 졸았지만 한덩어리 성심(誠心)만은 일찍이 조금도 게으른 적이 없었고, 사람을 만나 행조(行朝)의 어려운 형편에 말이 미치면 반드시 흐느끼며 눈물을 흘렸다. 소년 시절부터 정철(鄭澈)과 벗이 되었고 정철의 아들은 또한 그의 여서(女壻)가 되었으므로 교분이 특별히 두터웠으나 사실은 일마다 모순이 있었다. 정철이 체찰사가 되어 행조에서 강화부를 들렀을 때에 김천일이 적을 토벌할 계책을 자문받으려고 방문했는데 정철은 때마침 찾아온 손님과 술을 마시고 있었다. 그러자 김천일이 목을 놓아 통곡하면서 ‘지금이 어느 때인데 감히 이렇게 하는가!’ 하니 정철이 불쾌히 여기며 그만두었는데, 항상 남들과 말할 때 반드시 김천일을 조롱하여 ‘조선의 몽기(蒙倛) 로 내가 알고 있는 이가 일곱 명인데 김천일이 바로 첫번째이다.’고 하였다.

왜적을 영남(嶺南)에서 추격할 때에 미쳐, 심유경(沈惟敬)이 우리 나라 장사(將士)에게 서신을 보내어 ‘왜적이 진일 전주에서 불리했던 것에 분개하여 반드시 함락시키려고 하니 여러 장수는 우선 성을 비우고 피하는 것이 좋다.’고 하였다. 이에 권율(權慄) 및 고언백(高彦伯) 등은 모두 멀리 피하였으나 김천일은 경상 병사 최경회(崔慶會), 충청 병사 황진(黃進), 복수장(復讐將) 고종후(高從厚) 등 여러 장수와 함께 뜻을 더욱 굳게 가다듬고 향불을 피워 군중과 죽음으로 지킬 것을 맹서하고는 8일 밤 9일 낮을 쉬지 않고 전쟁을 독려하였다. 그러나 불행히도 하늘에서 비가 연일 퍼부어 성대(城臺)가 무너져 내리고, 효건(驍健)한 장수로서 온 군사가 의지하고 중하게 여기던 황진이 또 탄환을 맞아 죽었으며, 적병이 더욱 급하게 성을 타고 올라오니 혈전을 벌인 지 9일째 되는 날 성이 마침내 함락되었다.

김천일이 군중에게 말하기를 ‘너희들이 죽게 되기는 마찬가지이니 반드시 한 놈의 적이라도 죽이고 죽어라. 이러한 때를 당하여 싸우다 죽는 것은 영광스럽고 구차하게 살려고 하는 것은 욕이 된다. 우리들이 지금에야 죽는 것도 너무 늦은 것이다. 다만 나는 의리상 흉적의 손에 죽을 수 없다.’ 하고 마침내 그의 아들 상건(象乾)과 함께 촉석루(矗石樓) 아래 남강(南江)에 몸을 던져 죽었다. 당시에 그를 애도하는 사람이 ‘살아서는 의로운 장수가 되었고 죽어서는 충신이 되었으니 무슨 유감이 있으랴.’ 하였는데 행조(行朝)에서는 창의사(倡義使)라는 호칭을 하사하였다. 김천일은 평생동안 충의의 마음을 지켜 시종일관 변하지 않았으니 어려운 일이라고 할 만하다.
선조실록 선조 27년 3월 20일자 기사
예조가 아뢰기를,
"김천일은 일개 서생(書生)으로 비분 강개하여 한 고장에서 의병을 일으켰습니다. 인심이 모두 무너져 흩어질 때에 거의(擧義)의 소식이 들리자 민정(民情)이 매일 데가 있게 되었고, 향곡(鄕曲)의 난적(亂賊)들이 스스로 금즙되어 감히 방자한 짓을 하지 못하였습니다. 이러한 공의 파급 효과는 이미 비상한 것이었습니다. 그가 강도(江都)로 들어가 웅거하고 있으면서 서북쪽에 명령을 통하게 하였고, 힘껏 진양(晉陽)을 지켜 동남쪽의 보장(保障)을 만들려고 하다가 공을 이루지는 못하였지만 의(義)에는 부끄러움이 없습니다.
그러니 실로 의병을 일으켜 적을 토벌한 여러 장수 가운데 뛰어난 자로 고경명이 수립한 공보다도 더욱 빛나게 드러나는 자입니다. 사당(祠堂)을 세우자는 것이 선비들에게서 나온 일이기는 하지만 편액(扁額)을 하사하는 은전은 유명(幽明)이 함께 빛나는 일입니다. 호남의 선비들이 천일을 위하여 강개한 마음을 일으킨 것도 타고난 덕을 좋아하는 양심(良心)에서 우러난 것으로 권면할 수는 있어도 막을 수는 없습니다. 우선 문려(門閭)에 정표(旌表)하여 권면하는 풍교(風敎)가 되게 함이 합당할 것 같습니다."
(중략)
오성부원군(鰲城府院君) 이항복은 의논드리기를,
"김천일이 창의하여 사지(死地)로 나아간 것은 태양처럼 찬란하여 다시 의논할 것도 없는바, 인격과 명망이 으뜸이 되기에 충분합니다. 다만 정표하는 일은 마땅히 성상의 결단에서 나와야 합니다."
하였다.
(중략)
사신은 논한다. 대가(大駕)가 서쪽으로 파천(播遷)할 적에 팔로(八路)가 무너지고 인심이 흩어져 곤수(閫帥)와 읍재(邑宰)들은 거개가 자신과 처자식을 보전하기 위해 민간에 숨어 구명도생하기에 바빴는데도 천일은 일개 서생으로서 자신을 잊고 창의하여 향병(鄕兵)을 규합하였다. 그리하여 처음에는 강도(江都)에서 명령을 통하게 하였고 나중에는 진주성(晉州城)을 보장(保障)으로 만들기에 이르렀는데 군졸이 다하고 화살이 떨어져 전사하였으나 후회하지 않았으니, 구구한 충의(忠義)야말로 숭상할 만하다. 저 적 때문에 임금을 버리고 몸을 보존하기 위해 나라를 등진 무리들이 어찌 부끄럽지 않겠는가. 아!
선조실록 선조 27년 3월 20일자 기사

김천일은 임진왜란일본의 침략에 맞서 사력을 다하다 전사한 대표적인 의병장 중 하나로서 오늘날까지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외적이 쳐들어와 수도가 함락되었을 당시 고향에서 은거하던 그는 갑옷을 입기 버거울 정도로 허약했음에도 불구하고 국난에 비분강개하여 의병을 일으켜 강화도로 진군해 섬을 수비하고 북도와 남도의 연락망을 잇는 역할을 수행했다. 일본군에게 파헤쳐진 왕묘를 수습하고 민심을 안정시키는데 힘을 기울였으며 사지나 다름없는 진주성에 들어가서 압도적인 적을 상대로 끝까지 싸우다가 전사했기 때문에 그가 충신임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러나 김천일은 공적에 비해 과대평가된 의병장인데 세간에 알려진 그의 전공은 대부분 인조 대에 세워진 <창의사 김공 정렬사 비>에 기재된 것으로 김천일의 충의를 칭송하는 목적으로 지어져 객관성이 떨어지고 비문에 적힌 기록과 당대 기록간에 교차검증되지 않는 내용이 많다. 김천일의 대표적인 승전으로 언급되는 '금령 전투(金嶺戰鬪)'는 비문에는 언급되었지만 <조선왕조실록>과 임진왜란 시기의 다른 사료들에는 언급되지 않는다. 정렬사 비에는 김천일이 강화도에서 일본군을 상대로 유격전을 벌여 공을 세웠다고 기록되어 있지만 <조선왕조실록>에는 김천일이 1번 대패하여 섬으로 도주한 후에는 일본군이 철수할 때까지 섬에서 나오지 않았으며 한때는 중병에 걸렸다는 핑계를 대고 모든 병력을 수사 이빈에게 넘기고 물러가려 했다는 내용만 있을 뿐이고 김천일의 군대는 제대로 된 군대가 아닌 시정잡배나 다름없다는 부정적인 평을 받고 있다. 임진왜란 시기 조선의 국정을 총괄한 류성룡은 제2차 진주성 전투의 패전은 휘하 군대가 전투 막바지에 먼저 붕괴되었고 진주목사 서예원과 번번이 갈등을 빚은 김천일에게 있다고 질타했다. 사실 놀랄 일도 아닌게 김천일은 외직을 두루 맡다가 고향에 은거하던 중 갑작스럽게 전쟁에 뛰어든 유학자였고 그가 농민들을 모은 군대를 강병으로 길려내어 일본군을 상대로 잘 싸우는걸 기대하기 어려우며 그는 몸이 허약해 전쟁을 지휘하는 것조차 버거운 상태였으니 전공을 세우는게 더욱 벅찰 수밖에 없다. 그렇지만 수도 함락에 비분강개하여 허약한 체질을 무릅쓰고 300명의 장정들을 모아 강화도까지 가서 조선을 위해 헌신하다가 마지막에 죽을게 뻔한 곳에 들어가서 아들과 함께 장렬하게 전사한 그의 행적은 기재된 사실만으로도 높게 평가받아 마땅하다.

[1] 소윤공-감찰공 21세 일(鎰) 항렬.#[2] #[3] 양력 7월 27일.[4] 1534년(중종 29) 식년 진사시에 3등 29위로 입격했다.[5] 부위(副尉) 이감(李瑊)의 딸이다.[6] 안록산의 난 때 안록산의 부하 윤자기가 회양을 포위하자, 회양의 수비대장 장순이 하란진명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그러나 하란진명은 끝내 구원하지 않았고 회양은 결국 함락되어 장순 등 수비군 전체가 죽었다. 김천일은 진주성을 구원하지 않는 장수들을 하란진명으로 비유한 것이다.[7] 다른 기록에는 황진이 탄환을 맞았으나 죽지 않았고 진주성이 함락될 때 피살되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