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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20 17:23:55

고경명

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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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敬命
1533년(중종 28) 11월 30일 ~ 1592년(선조 25) 7월 10일 (향년 58세)[1]

1. 개요2. 생애3. 기타4. 대중매체

나 고경명은 진실된 마음의 노인이며 백발 부유(腐儒)로서, 한밤중에 닭소리를 듣고 많은 고난을 견딜 수 없어 중류의 노를 쳐서 외로운 충성을 스스로 다짐하였다. 이는 한갓 견마가 주인을 그리워하는 정성을 품었을 뿐이요, 모기가 태산을 짊어지는 미약한 힘을 헤아리지 않는 것이다. 이에 의병을 규합하여 곧장 서울로 향할 것이니 옷소매를 걷어붙이고 단상에 올라 눈물을 뿌리며 군중에게 맹세하는 도다. 곰을 잡고 범을 넘어뜨릴 장사들이 천둥 울리듯 바람이 휘몰아치는 듯하고 수레를 뛰어넘고 관문을 뛰어넘을 무리들이 구름처럼 모이고 비처럼 모이니 이는 절대로 강박해서 응하거나 억지로 나온 것이 아니라 오직 신하로서의 충성된 마음이 함께 지성에서 나온 것이다. 위급존망의 날에 처하여 감히 하찮은 몸을 아끼겠는가. 처음부터 의병이라 칭한 이상 직분에도 매이지 않았으며, 병졸은 곧은 것으로서 장렬함을 삼았으니 강약을 따질 것도 없다. 대소인원의 모의를 하지 않고도 뜻이 같았으며 원근의 사민들은 소문을 듣고 일제히 분발하였다.
아! 우리 열읍 수령, 각 처 사민(士民)들아! 충심이 어찌 임금을 잊을 것이며 의리상 마땅히 나라를 위해 죽는 것이니, 혹은 무기를 빌려 주고 혹은 군량을 도우며, 혹은 말을 달려 전장에서 앞장서고, 혹은 분연히 쟁기를 던지고 밭두둑에서 일어나리라. 제 힘이 미치는 데까지 오직 의로 돌아가서 능히 임금을 위해 난을 막는 자가 있다면 그와 더불어 행동하기를 원한다.
- 임진왜란 당시 고경명의 격문. 『제봉선생집』권7, 정기록, 마상격문

1. 개요

조선임진왜란 시기의 의병장. 본관은 제주(濟州)[2], 자는 이순(而順), 호는 제봉(霽峰)·태헌(苔軒)·태사(苔槎)이며, 시호는 충렬(忠烈).

고연호 전 국민의당 대변인과 고명승 전 보안사령관 등이 그의 후손이다.

역사 책에서는 임진왜란을 설명할 때 의병곽재우 다음으로 무조건 언급되는 사람 중 한 명이다.

2. 생애

1533년 전라도 광주목 유등곡면 압보촌(현 광주광역시 남구 압촌동)[3]에서 대사간을 지낸 아버지 고맹영(高孟英, 1504 ~ 1565. 11. 4)과 어머니 남평 서씨(南平 徐氏, ? ~ ?. 10. 16) 서걸(徐傑)의 딸 사이의 5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재주가 많아 칭송을 들었으며 1552년(명종 7) 20세에 식년시 생원시 및 진사시에 각각 2등 18위, 1등 4위로 입격하였고 26세 되던 1558년에는 식년시 문과에 갑과 1위로 장원급제하여, 성균관 전적(典籍)에 임명되고 이어서 공조좌랑이 되었다. 그 뒤 형조좌랑, 사간원정언 등을 거쳐 호당에서 사가독서(賜暇讀書)하기도 했다. 교리, 전적을 거쳐 울산군수로 임명됐으나 부임하지 않고 고향으로 내려와 은거했다. 이 때 무등산을 올라 산중의 수려한 경관을 읊어 ‘유서석록(遊瑞石錄)’이라는 기행문을 남겼다. 당대의 수많은 문인들과 교류하며 임억령, 김성원, 정철과 더불어 ‘식영정(息影亭) 4선(仙)’이라는 칭송을 들었을 정도로 명망있는 시인이자 문장가였으며 이후 49세에 영암군수로 다시 관직에 나가 변무사 서장관을 거쳐 직강, 지평, 서산군수, 동래부사를 지내다가 정3품 통정대부 겸 동래부사를 지내던 중 같은 서인인 정철이 일으킨 건저의 문제와 엮이면서 파직되어 낙향한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일본군의 진격 속도가 빨라 5월에 왕도 한양마저 함락당하고 선조는 북쪽으로 피란하는 등 최대의 위기 상황이었다. 6월 1일 담양에서 출병한 고경명은 각 도의 수령과 민중에게 격문을 돌려 30일만에 6천~7천여 명의 의병을 모아 진용을 편성했는데 이는 의병들 중 단일 부대로는 가장 대규모의 부대이다. 당시는 용인 전투의 패전으로 관군들이 신망을 잃은 상황이었고 이 때문에 중앙 유력자였던 고경명이 오히려 신망을 얻으면서 의병들은 속속 고경명에게 모여들었기 때문에 고경명의 병력이 이치 전투에서 일본군과 싸운 관군보다 큰 규모가 될 수 있었다. 고경명은 원래 김천일과 함께 뜻을 모아서 한양 진격을 노리고 있었다.[4] 하지만 고경명의 부대가 은진까지 진군했을 때 적이 금산을 넘어 전주까지 침략할 것이라는 소문이 들려왔다. 이에 “전주는 호남의 근본인데 먼저 흔들리면 적을 제압하기 어려우니 먼저 본도부터 구해야 옳다”고 판단한 고경명은 계획을 바꿔 호서 의병장 조헌(趙憲)에게 서신을 보내 금산의 일본군을 공격할 것을 제의하고 자신은 태인과 전주를 거쳐 9일 금산으로 진격했다. 이 곳에서 방어사 곽영이 이끄는 관군과 연합 부대를 편성한 뒤 제1차 금산 전투를 도모했다.

1592년 7월 9일 고경명은 60세의 나이로 중앙에서 의병 수백 명을 거느리고 성을 공격했는데 방어사 곽영은 우익을 담당했다. 이 시기 일본군은 1차 웅치 전투를 치르고 급히 퇴각한 직후 혹은 1차 웅치 전투에 참여한 병력들이 빠져나가고 남은 잔존 병력들만 남아있는 상황이었다. 이 때문에 코바야카와 타카카게가 이끄는 일본군은 짧은 치고 빠지기를 반복했고 고경명은 선봉대를 앞세워 공격했다가 실패하고 저녁에는 오히려 결사대 30명을 파견해서 비격진천뢰 등을 사용한 공격을 하는 등의 방법으로 대치가 이뤄지면서 하루가 흘렀다. 이 때 곽영은 웅치 전투를 통해서 일본군이 전주로 나가려는 의도가 막혔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후퇴할 것을 주장했지만 고경명은 꾸준한 공격만을 주장하였고 더 많은 병력을 이끌었던 고경명의 주장이 받아들여지면서 포위가 계속되었다. 10일 새벽 고경명은 관군과 연합해 재차 공격을 시작했으나 군세가 약한 관군이 일본군의 수차례 집중 공격으로 무너져 패주하자 의병들의 사기도 점차 떨어져 전열이 붕괴되기에 이르렀다. 이에 막료들이 후퇴한 뒤 전열을 가다듬어 재공격하자고 했으나 고경명은 “패전 장수로서 죽음이 있을 뿐이다”며 밀려오는 적과 맞서 분전하다가 아들 고인후유팽로, 안영 등과 함께 최후를 맞았다. 선조가 의주목으로 피난갔을 때 고경명의 거병 소식을 듣고 공조참의를 제수하고 교서를 내려 그를 위로하려 했으나 교서가 도착했을 때는 이미 그가 전사한 후여서 사후 좌찬성에 추증되었고 여러 서원들에 배향되었다.

이 전투는 임진왜란 초기 관군이 연패를 거듭하던 상황에서 의병이 주축이 돼 일본군 주력을 상대로 싸운 최초의 전투였다. 비록 패했지만 코바야카와 타카카게의 군대에 역공을 가함으로써 나름대로 의지를 보여줬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고 고경명이 순절한 이후 큰아들 고종후를 비롯해 휘하의 최경회, 임계영, 변사정 등이 계속 의병을 일으켰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있다. 특히 중요한 점은 코바야카와의 부대가 고경명의 의병부대와의 금산 전투에서 시간을 끈 덕분에 다음 전투이자 초기 임진왜란에서 가장 중요했던 전투인 이치 전투의 시작이 늦어졌다는 점이다. 이는 결국 권율황진이 정비할 시간을 조금이라도 더 벌어주며[5] 불리하던 이치 전투에서 이치 고개를 지키는 전설적인 무공을 세우는데 도움이 되었다.

문제는 6천명 이상의 의병들로 구성된 고경명의 부대가 금산에서 이틀만에 완전히 붕괴되면서 이후에 일어난 의병들은 의병을 모으는데 엄청난 고생을 하게 되었다. 이게 얼마나 큰 손실이냐면 고경명 이후로 호남 지역 의병장들은 1천명을 모으기도 버거웠다. 고경명과 비슷한 시기에 일어났던 조헌과 영규의 병력이 1천이 넘기는 하지만 조헌이 관군을 이끌던 충청도 관찰사 윤선각과 노골적으로 대립[6]하며 전투를 밀어붙여 각각의 병력은 1천에 못 미치는 상황에서 2차 금산 전투를 치러야 했고, 고경명의 패전 이후 호남 의병인 보성의 전라좌의병 임계영은 700명, 광주의 전라우의병 최경회는 800명[7]만을 모을 수 있었을 뿐이다. 이들은 장흥도호부남원도호부 같은 큰 지역에서도 거의 병력을 모으지 못했고 1천을 간신히 넘긴 이후에도 군량 부족에 시달렸다고 전해진다. 즉 고경명의 6천 의병은 호남이 모을 수 있었던 최대 규모 의병이었으나 이걸 한번에 고스란히 날려먹은 것이 아쉽다.

3. 기타

4. 대중매체



[1] 세는나이 60세.[2] 장흥백파 10세 경(敬) 항렬.[3] 현재도 인근의 석정동·원산동·이장동과 함께 제주 고씨 장흥백파 집성촌이다. 고연호 전 국민의당 대변인도 이 마을 출신이다.[4] 실제로 김천일의 병력은 웅치 전투 이전에 전라병사 최원의 병력과 함께 북상했다.[5] 물론 그랬어도 불리하지 않았던 건 아니다. 여전히 불리했다. 권율이 임진왜란 육군 최고의 장수로 꼽히는건 행주대첩보다 훨씬 이전인 이때 우세하던 왜군이 후퇴할때까지 버틴 전공이 너무 대단하기 때문이다. 난중잡록에서도 이때 권율의 전공을 크게 칭찬한다.[6] 사실 조헌도 고경명과 똑같은 삽질을 했다. 근왕을 주장하며 충청도 방위에 주력하는 윤선각을 비판하며 합류 지시를 거부하고 영규까지 데리고 죽을줄 뻔히 알면서 의기를 보여준다고 금산으로 갔다.[7] 이들 중 일부는 고경명의 부하였던 문홍헌(文弘獻)이 1차 금산 전투의 패잔병을 수습한 이들이었다.[8] 조형기는 왼손잡이이다.[9] 고경명은 60세[12]로 임진왜란에 참전했다. 그리고 고경명에게 통수를 맞은 일본군이 당황하자 권율이 "고경명이 드디어 시간을 맞추었군!"이라는 대사를 치는데, 고경명이 동네 진사도 아니고 당상관까지 지냈던 사람이라 전 현직 가리지 않고 품계는 예우해주는 조선에서 계급도 낮고 나이도 어린 권율이 다짜고짜 '고경명이'라고 칭하는 것은 어색하다.[13] 급박한 상황이니 아주 말이 안 되는 건 아니다만 고경명 역 단역배우의 비주얼도 그렇고 그냥 제작진의 삽질인 듯.[10] 그래서 그런지 여기서 권율이 고경명한테 '부사'라 호칭을 붙여 불렀는데 정작 이 말을 들은 고경명은 농담조로 자신은 파직된 몸이라 말했다.[11] 이 장면에서 첫째 아들 종후만 살아남으나 아버지와 동생이 죽을 걸 보면서 오열하였고, 권율 역시 예를 갖춰 슬퍼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