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謝枋得, 1226년 ~ 1289년남송의 관원이자 애국시인으로 신주(信州) 익양(弋陽)[1]출신이며, 자는 군직(君直), 호는 첩산(疊山)이다. 저서로는 《문장궤범》 등이 있다. 별칭은 문절(文節)선생이다.
2. 생애
2.1. 초기 일생
1226년 출생이다. 사방득은 어머니 계씨에게서 길러졌으며, 어릴 때부터 총명하여 책을 읽을 때마다 다섯 줄을 함께 보고 한 번 보면 평생 잊지 않았다고 한다.그는 사람들에게 옛날과 지금의 나라를 다스리는 일에 대해 이야기하면, 반드시 자기 자신을 위해 노력하며 충성과 의리를 다하게 될 것이라고 직언하기를 좋아하였다.
그는 직설적인 말을 잘 해서, 다른 사람들과 고금의 국가 대사를 논할 때마다 반드시 수염을 기르고 몇 가지 책상을 받치고 도약하여 자족하는 모습이 매우 감격스러워 보였다. 충의를 자신의 임무로 삼았다.
2.2. 간사한 신하를 꾸짖다
그가 살았던 남송은 민족 위기가 심각했던 시대로, 특히 남송 말기에는 이종(理宗)을 중심으로 한 남송 봉건 통치 집단이 황음부패하였고, 환관 동송신과 권신 가사도(賈似道)가 나라와 백성에게 해를 끼쳤기 때문에 남송의 정치는 매우 어두웠다.1256년 문천상과 함께 중진사에 올랐다. 이후 승상 동괴(董槐)와 환관 동송신(董宋臣)을 엄격히 공격하여, 본래 중진사 갑과로 승진하고 수험생 명단을 발표하여 을과에 합격하기를 희망했다.
가사도가 재상으로 있으면서 장수들을 처벌하는 타산법[2]을 시행하였을 때 이를 비판하였고, 또 가사도의 정책을 비판하다가 관직에서 쫓겨났고 흥국으로 유배되어 1267년까지 유배 생활을 하였다.
2.3. 원나라 군대의 침공 시기
이후 강동제형 및 강서초유사로서 신주(信州)지주로 있었고 여사기(呂師夔)[3]가 공격했을 때 사방득이 다음과 같이 말했다."사제형께서 오셨다!"
그러나 여사기는 화살비를 날리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하였다. 이에 안인(安仁)으로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사방득은 회사(淮士) 출신인 장효충(張孝忠)을 불러 단호평(團湖坪)에서 응전하게 했다. 화살이 모두 떨어지자 장효충은 쌍칼을 휘두르며 적군 백여 명을 베어 넘기는 용맹을 떨쳤으나, 중과부적이었다.
사방득은 다시 몸을 일으켜 항전을 조직했으나 남송의 최고 통치 집단은 전쟁을 두려워했고, 좌승상 유몽염(留夢炎)[4]은 직책을 버리고 도망쳤으며 병부상서 여사맹(呂師孟)은 원나라에 투항했다. 그들뿐만 아니라 다른 많은 봉강대신과 일선 장수들도 잇달아 적에게 투항하면서 광활한 국토가 상실되었다.
2.4. 투항을 거부하고 은둔하다
1276년 정월, 원나라의 군대가 송나라의 강동 지역을 공격하자 이에 사방득은 직접 병사를 이끌고 원군과 혈전을 벌였으나, 끝내 패배했다. 그해 2월, 원군이 남송의 수도 임안(臨安)을 점령하고 송 공제와 태후 전씨, 태황태후 사씨를 원나라 상도(上都)로 압송했다. 태황태후 사씨가 남송의 신민들에게 항복을 명하는 조서를 보냈으나, 사방득은 이를 거부했다.5월, 남송의 경염제가 즉위하자 사방득은 강동제치사(江東制置使)에 임명되어 다시 의병을 모집하고 항원 투쟁을 이어갔다. 하지만 결국 중과부적으로 패배했고, 원군의 추격을 피해 성과 이름을 숨긴 채 복건(福建) 지역으로 망명하여 건녕 당석산에 은거했다. 송나라가 멸망한 후 건양(建陽)에 머물며 점을 치고 글을 가르치며 생계를 이어갔다. 복건으로 도피한 뒤 오랫동안 건양 일대의 험한 산길을 떠돌며 극심한 빈곤 속에 살았다. 그는 매일 거친 삼베옷과 짚신 차림으로 동쪽을 향해 통곡하며 망한 나라를 애도했다.
이 와중 사방득의 아내 이씨는 차녀 및 두 여종과 함께 자결했다. 또한 사방득의 두 형제와 세 조카 역시 원군의 박해로 목숨을 잃었다.
2.5. 단식으로 순국하다
원나라가 중국을 통일한 후, 한족 사대부들을 포섭하기 시작했다. 사방득은 문장가로서의 명성과 위망이 높았기에 원나라는 전후로 다섯 차례나 사람을 보내 항복을 권유하며 회유했다. 그러나 사방득은 이를 엄하게 거절하며 《거빙서(却聘書)》를 썼다."사람은 누구나 한 번 죽으나, 그 죽음은 태산보다 무거울 수도 있고 깃털보다 가벼울 수도 있다. 만약 나에게 원나라에 투항하기를 강요한다면, 나는 기꺼이 죽음을 택할 것이며 결코 지조를 잃지 않겠다."
1288년 겨울, 세조(世祖) 쿠빌라이(忽必烈)의 명을 받은 복건행성 참정 위천우(魏天祐)가 사방득을 강제로 대도(大都)로 압송했다. 당시 그는 형색이 매우 수척했으나 정신만은 여전히 꼿꼿했으며, 친우들에게 시를 지어주며 초연하게 작별을 고했다.
대도에 도착하자마자 그는 태황태후 사도청의 묘소와 송 공종이 있는 방향을 물어 그곳을 향해 통곡하며 절을 올렸다. 이후 민충사(憫忠寺)[5]에 구금되었는데, 벽에 걸린 조아비(曹娥碑)[6]를 보고 울며 말했다.
"어린 여자아이조차 이와 같거늘, 내가 어찌 너만 못하겠느냐!"
그는 그 길로 다시 단식 투쟁에 돌입했다. 유몽염이 의사를 보내 밥물이 섞인 약탕을 마시게 하려 했으나, 사방득은 크게 꾸짖으며 약사발을 땅에 내던졌다.1289년 4월 5일(양력 4월 25일), 사방득은 대도 민충사에서 단식 5일 만에 순국했다.
그가 남긴 유서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적혀 있었다.
"대원이 세상을 다스려 만물이 일신되었으나, 송나라의 외로운 신하에게 남은 것은 오직 한 번의 죽음뿐이다. 내가 그동안 죽지 않았던 것은 93세 되신 노모가 계셨기 때문이나, 지난 2월 어머니께서 천수를 누리고 돌아가셨으니 이제 나 또한 인간 세상의 일에 뜻이 없노라."
그의 아들 사정지(謝定之)가 유해를 수습하여 고향인 신주 익양 옥정 공원에 안치했다. 제자들은 사사로이 그의 시호를 문절(文節)이라 올렸다.
3. 저서
《문장궤범(文章軌範)》과 《첩산집(疊山集)》 5권이 있었는데, 《첩산집》은 일실되고 후세 사람의 편집본이 전한다.그의 작품들은 백성들의 고통을 반영하고, 남송의 어두웠던 정치와 나라를 팔아 영광을 구한 대신들을 통렬히 비판한 것이 대부분이다. 또한 고국을 되찾고 고향으로 돌아가려는 강렬한 염원이 담겨 있다.
4. 평가
"사람은 호탕하고, 책을 볼 때마다 다섯 줄씩 내려가며, 한 번 보면 평생 잊지 않는다."
《송사》 사방득 열전
《송사》 사방득 열전
사방득이 나라 잃은 뒤 비록 분발했으나, 굶어 죽고 말았으니 그 어쩌리.(疊山縱發憤, 餒斃竟何得.)
김시습(金時習), <잔등여일촌(殘燈餘一寸)>
김시습(金時習), <잔등여일촌(殘燈餘一寸)>
5. 가족
조부는 지주, 병마사를 지냈다.형은 태수를 지냈다. 원나라와 전투 후 참수되었다.
막내동생은 주부를 지냈다. 동생들은 모두 순국했다.
아내는 원나라에 포로로 잡힌 후 차녀와 함께 자결했다.
아들 사희지도 포로가 되었으나 모친이 자결한 후 풀려났다. 원나라 때 관원으로 추천되었으나 사양했다.
아들 사정지도 원나라 때 관원으로 추천되었으나 사양했다.
장녀는 강에 투신하여 자결했다.
차녀는 모친과 함께 자결했다.
사희지의 아들 사문신은 이부좌시랑을 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