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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lbgcolor=#875F9A><colcolor=#522142,#522142> 민 제3대 황제 왕연균 | 王延均 | ||
| 묘호 | 태종(太宗)[A] / 혜종(惠宗)[B] | |
| 시호 | 혜황제(惠皇帝)[A]/제숙명효황제(齊肅明孝皇帝)[B] | |
| 성 | 왕(王) | |
| 휘 | 연균(延均) → 린(鏻) | |
| 연호 | 용계(龍啟, 933년~934년) 영화(永和, 935년) | |
| 생몰 기간 | ??? ~ 935년 | |
| 재위 기간 | 927년 ~ 935년 | |
1. 개요
오대십국시대 민나라의 제3대 군주이자 황제를 칭한 첫번째 군주.2. 상세
2.1. 재위에 이르기까지
왕연균은 출생연도는 불명이나, 민나라의 초대 군주였던 왕심지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925년에 왕심지가 죽고, 왕심지의 장남이자 왕연균의 형인 왕연한이 민나라의 2대 군주로 즉위하였으나, 악정으로 인해 민나라 내부에서는 분쟁이 계속 이어졌다. 왕연균은 927년[5]에 왕심지의 양자였던 왕연품과 함께 왕연한을 살해하고 민왕에 올랐다.2.2. 도교와 미신에 빠지고 설문걸을 총애하여 나라를 망치다
왕연균은 도교에 심취하여 보황궁(寶皇宮)을 세우고, 도사 진수원(陳守元)을 초빙하여 보황궁에 살도록 하였다. 왕연균은 초나라의 군주였던 마은과 오월의 군주였던 전류가 사망한 이후, 후당 조정에 자신을 상서령으로 제수하길 청하였으나, 후당에서 아무런 소식이 없자 후당에 바쳤던 공물을 끊어버렸다. 왕연균은 933년에 황제를 자칭하였고 이름을 린(鏻)으로 고쳤다.왕린은 상술한 보황궁을 세우는 등 도교와 미신, 신선술에 극도로 빠져들어 국고를 탕진했다. 거기에 국계사(國計使, 재정 담당관) 설문걸을 총애하여 설문걸은 백성들을 쥐어짜는 것은 물론, 비밀 정보원들을 고용해 국내 부유한 자들의 뒤를 캐게 했다. 그리고 사소한 꼬투리를 잡거나 무고한 죄를 뒤집어씌워 투옥한 뒤, 그들의 가산을 통째로 적몰하여 황제의 금고를 채웠다. 거기에다 설문걸은 황제 왕린에게 종실의 세력을 약화시켜야 한다고 부추겼고, 이 과정에서 수많은 왕족과 공신들이 모반 혐의로 억울하게 죽는 일까지 벌어졌다.
게다가 설문걸은 무당 성도를 총애하여 평소 자신과 사이가 좋지 않던 군부의 핵심 권력자, 내추밀사(內樞密使) 오영(吳英)을 제거하기 위해 왕린이 미신에 빠진걸 이용했다. 오영이 병이 들자, 설문걸은 그를 찾아가
"폐하께서 장군을 대신할 사람을 찾으시기에 내가 장군은 그저 두통일 뿐 곧 나을 것이라며 만류해 두었소. 그러니 황제의 사자가 오거든 무조건 머리가 아프다고 하시오."
라는 가짜 위로를 건넸고, 오영은 이를 고마워했다.하지만 설문걸은 미리 포섭해 둔 무당(성도)을 시켜 황제에게
"지금 궁중에 귀신이 들끓고 나라가 어지러운 이유는 오영이 반란을 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하늘의 신이 오영의 대가리에 구리 못을 박아 벌하고 있으니 그가 머리가 아프다고 엄살을 부리는 것입니다."
라는 거짓 신탁을 올렸다.사자를 보내 확인해 보니 실제로 오영이 머리를 싸매고 아파하고 있었는데, 격노한 왕연균은 앞뒤 재지 않고 즉각 오영을 체포해 처형해 버렸다. 이 일로 민나라 군부와 조정은 설문걸에 대한 공포와 분노로 가득 차게 되었다.
결국 934년, 수탈을 피해 민나라를 탈출한 호족 오광(吳光)이 이웃 오나라에 침공을 요청했고, 오나라는 민나라를 침공했다. 수도까지 위험해진 상황에서 왕연균은 군대를 출동시키려 했으나, 최전선으로 가야 할 민나라 병사들이 "만악의 근원인 설문걸을 우리에게 넘겨주지 않으면 한 걸음도 움직이지 않고 싸우지도 않겠다"며 집단 항명(보이콧)을 했다. 결국 왕린은 설문걸을 체포하여 군대에 보냈고, 그 자리에서 군사들이 설문걸을 살아있는 채로 갈갈이 찢어 죽인 뒤, 그의 살점을 서로 나누어 날것으로 씹어 먹었다(!). 얼마나 원한이 깊었는지 순식간에 뼈와 살이 다 없어져 남아나질 않았다고. 무당 성도 역시 주살되었다.
2.3. 막장 황후 진금봉
또 하나의 문제는 막장 황후 진금봉(陳金鳳)이었다. 그녀는 출생부터가 막장이었는데, 복건관찰사 진암(陳巖)의 소첩(첩)이었던 육씨(陸氏)가 남편에게 냉대받자, 남편의 미소년 남첩인 후륜(侯倫)과 불륜을 저질렀고, 그 후에 반휘(范暉)에게 몸을 의탁하고 있을 때 진금봉을 낳은 것이었다. 즉 '어머니 남편의 남총'과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사생녀인 것이다(...).반휘가 몰락하면서 민간을 떠돌다 먼 친척인 진광승에게 입양되어 '진(陳)'씨 성을 쓰게 되었고, 17세가 되던 해(909년), 빼어난 가무와 음률 재능 덕에 민나라의 창건자인 태조 왕심지의 눈에 들어 후궁(재인)으로 입궁하게 되었다.
이후 왕린이 진금봉을 황궁으로 불러들여 자신의 첩으로 삼았고, 이후에 후처인 금황후를 강제로 폐위하고, 935년 2월 시아버지의 정인이었던 진금봉을 당당히 황후의 자리에 올리는 패륜을 저질렀다. 그 이후 왕린은 거대한 침상과 화려한 방을 꾸민 뒤, 새로 입궁한 어린 궁녀들을 병풍 뒤에 세워두고 자신과 황후 진금봉이 잠자리를 갖는 모습을 실시간으로 구경하게 하는 '수정비희'를 즐겼다. 더 나아가 진금봉은 궁녀들을 모두 옷을 벗겨 알몸으로 자신의 침소 주변에 대기하게 한 뒤 나체로 어울려 놀았으며, 그 음탕한 웃음소리가 궁궐 담장 밖까지 울려 퍼져 민간에까지 소문이 자자했다고 한다. 조정의 정사 또한 황후 진금봉과 외척 세력의 손에 넘어가 국정이 파탄나기까지 했다.
그런데 왕린은 양성애자 인지라 남총 귀수명(歸守明)과 잠자리를 가지기도 했다. 그러다가 왕린이 중풍에 걸리자 진금봉은 황제의 남총인 귀수명과 대담하게 눈이 맞아 황궁 안에서 남총 귀수명과 불륜을 저지르는 막장행위를 벌였다. 이후 귀수명 한 사람만으로 성적 욕구가 채워지지 않자, 귀수명의 주선(소개)을 받아 황실의 장인 격인 백공원사(百工院使) 이가은과도 양다리를 걸치며 난잡한 성관계를 이어갔다.
2.4. 비참한 최후
왕린의 차남인 복왕(福王) 왕계붕은 평소 적모인 진황후와 그녀의 파벌들이 휘두르는 전횡에 깊은 원한을 품고 있었고, 황성사(궁궐 수비대장)였던 이방 역시 진황후 세력에게 참소를 당해 생명의 위협을 느끼자, 왕계붕과 손을 잡고 먼저 손을 쓰기로 모의했다.그리고 이방과 왕계붕은 진황후의 핵심 사통 상대인 이가은을 먼저 살해했다. 그러자 진금봉은 통곡하며 병석에 누워있던 왕린에게 이 사실을 고발했다. 분노한 왕린은 조정에서 이방을 불러 크게 질책했고, 위기를 직감한 이방은 그 길로 왕계붕에게 달려가 무장한 군사들을 이끌고 곧바로 황궁안 구룡장(九龍帳)으로 돌진했는데, 이때가 935년 10월이었다.
변란이 일어난 그 시각, 왕린은 궁궐 안 장춘공(長春宮)의 구룡장 안에 누워있었고, 황후 진금봉과 그녀의 정부 귀랑이 곁을 지키고 있었다. 갑작스럽게 궁궐을 장악한 군사들이 난입하자 황후 진금봉과 그녀의 친족들은 즉시 피살되었고, 구룡장 밑으로 기어들어 가 숨었던 왕린은 반란군에게 창과 칼로 마구 찔렸다. 온몸에 난도질당한 왕린은 치명상을 입었으나 곧바로 숨이 끊어지지 않아 바닥에서 피를 흘리며 극심한 고통 속에 신음했고, 이를 본 사람이 왕린의 숨을 끊으면서 비참하게 죽게 되었다.
그 이후 왕계붕이 제위에 올랐다. 왕린의 시호는 혜황제(惠皇帝)와 제숙명효황제(齊肅明孝皇帝)가 전해지고 있고, 묘호는 태종 혹은 혜종으로 전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