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夏松, ?~1274남송의 관원으로, 남송 말기 장군 하귀(夏貴)의 차남이었으며 관직은 화주관찰사(和州觀察使)까지 이르렀다.
2. 생애
생년 미상이다. 1260년 부친 하귀(夏貴)와 함께 백록기(白鹿磯)에 주둔한 몽골군을 전멸시키는 데 일조했다. 이때 그는 가장 먼저 다리에 올라 그 위의 몽골군을 물 속에 던져버렸다고 한다. 부친의 전공[1]으로 인해 숙직 업무가 면제되었다.[2][3]1270년 제4차 양양 전투에 참전하여 소유의(蘇劉義, 1232~1279), 범문호(范文虎)와 함께 10만의 주사를 이끌고 양양성을 구하러 갔다. 이듬해 6월 소유의, 범문호와 함께 참전하지만 아술(阿朮)에게 패해 전함 100여 척을 빼앗겼다.
1274년 8월 협석(硤石)[4]에 성을 쌓았고 그 곳에 축성기를 기록했다.
"협석(硤石)은 양쪽 강변이 서로 마주 보고 있는데, 예부터 두 개의 성을 세워 장회(長淮, 긴 회하)의 중요한 나루터로 삼았다. 지난번(이전의 전투)에 이미 성을 쌓았으나, 동쪽 강변에만 성을 쌓았을 뿐 서쪽 강변은 여전히 덤불과 가시나무가 우거져 있었다.
올해, (나) 송(松)은 총통(總統)의 격문을 받아 수군을 이끌고 정양(正陽)에 있는 오랑캐(몽골군)의 소굴을 공격하였고, 가을에 휴가를 얻어 군사지휘권(阃令)을 받들어 (협석의) 성을 창건하고 쌓게 되었다. 도통(都統) 손위(孫位), 도통 팽종립(彭宗立), 도통 손응무(孫應武)와 함께 보병 장수들과 군사들을 거느리고 힘을 합쳐 공사를 진행하니, 한 달이 채 되지 않아 성이 완성되어 예전의 판도(지형)를 회복하게 되었다.
함순 갑술년(1274) 중추(8월) 초하루, 수양(壽陽) 하송(夏松)이 돌에 새기다."
올해, (나) 송(松)은 총통(總統)의 격문을 받아 수군을 이끌고 정양(正陽)에 있는 오랑캐(몽골군)의 소굴을 공격하였고, 가을에 휴가를 얻어 군사지휘권(阃令)을 받들어 (협석의) 성을 창건하고 쌓게 되었다. 도통(都統) 손위(孫位), 도통 팽종립(彭宗立), 도통 손응무(孫應武)와 함께 보병 장수들과 군사들을 거느리고 힘을 합쳐 공사를 진행하니, 한 달이 채 되지 않아 성이 완성되어 예전의 판도(지형)를 회복하게 되었다.
함순 갑술년(1274) 중추(8월) 초하루, 수양(壽陽) 하송(夏松)이 돌에 새기다."
동년 원나라의 군대와 양라보[5]에서 맞서지만, 이항(李恆)이 이끄는 군대에 의해 패사했다. 하송은 8천 명의 군대를 이끌고 양라보로 향했다. 하송이 양라보에 도착한 뒤, 이항의 군대와 교전하여 이항의 이마를 맞히는 등 이항에게 부상을 입혔으나 이항이 끝까지 싸운 끝에 그의 부대를 전멸시키고, 이항은 직접 그를 쏘았으며 하송은 부하들에게 구출되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세상을 떠난다. 그때 그의 몸에는 화살이 수차례 꽂혀 있었다.
사후 보강군절도사(保康軍節度便)의 관직이 추증되고 장숙(壯肅)의 시호를 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