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范文虎, ? ~ 1302남송, 원나라의 인물이자 가사도의 사위로 알려져 있다.[1] 상패장군이라고 불렸다고 한다.[2]
2. 생애
선비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모종의 일로 유배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어느 날 여문덕을 만난 것을 계기로, 그의 사위가 된다.[3] 여문덕의 후원 하에서 승진을 거듭하게 되었다.1259년 봄, 몽골의 몽케 칸은 그의 동생 쿠빌라이와 남침해 송나라를 단번에 멸망시키고, 몽케는 사천 지역을 침공한 뒤 쿠빌라이가 호북을 공격할 준비를 하였다. 몽케가 이끄는 군대는 파죽지세로 성도를 비롯한 사천의 대부분을 점령하나 몽케칸 본인이 그해 7월 합주 조어성에서 패해 숨졌고[4], 쿠빌라이도 악주를 공략하던 중 칸 자리를 놓고 이듬해 철수했다. 이 전쟁에서 공이 없었던[5] 가사도는 재상이 되었다. 가사도의 측근 여문덕의 사위인 범문호는[6] 배후가 강하고, 그의 앞에서 영접을 받고도 포상을 통보받아 크게 발탁되어 황주 무정(武定) 제군을 통솔하는 송군의 고위 장수가 되었다.
1260년 3월에는 조서를 통해 환위관으로 삼아 좌무대부로 옮겼으며, 손호신, 장세걸과 함께 금과 비단을 하사받았다. 6월에는 좌령군위대장군에 임명되면서 주관 시위보군사 겸 마군사에 임명되었다. 8월에는 백록기의 공으로 행요군방어사로 옮겼고 1269년 12월에는 전전부도독지휘사에 임명되었다.
1270년 9월에 병선 2천 척을 양양에 지원하러 갔다가 아쥬, 카다이, 유정이 관자탄을 거슬러 올라가면서 천여 명을 죽이고 30척을 얻자 물러갔다. 10월에는 전사를 총괄해 양, 회 지역에 군사를 파견해 합류시켰고 방어에 대비해 150만 전을 하사받았다. 1271년 4월에는 아쥬 휘하의 만호 아라한에게 여울목에서 격파되었고 6월에는 소유의, 하송[7] 등과 함께 배 10만 척을 이끌고 양양을 지원했지만 아쥬에게 격파되어 배 100여 척을 빼앗기고 패주했다. 이 과정에서 경호제치사 이정지와의 불화가 심했다. 전전부지휘사로 있었던 그는 이정지가 자기보다 명성이 높아질 것을 두려워하여 가사도에게 자신이 승리할 것이라고 장담하였고, 가사도는 이정지의 명령을 무시해도 좋다고 하였다. 이정지가 양양성으로 출병을 요청하였는데도 불구하고 범문호는 매일 지시를 받지 않았다는 이유로 함부로 움직일 수 없다는 핑계를 대며 술과 여자를 가까이하면서 놀기만 하였다. 그리고 어쩌다 몽골군의 순찰을 막는 경우가 부지기수였다.
1273년 6월에는 급사중 진의중이 양양을 구원하지 못했다고 해서 벌을 줄 것을 말하자 가사도는 범문호의 계급을 한 등급 낮추었는데, 지안경부가 되었다. 1275년 정월에는 사람을 보내 강주에 많은 사람을 술안주로 대접했고 죄를 용서받았으며, 2월에 원나라 군사가 안경으로 오자 싸우지도 않고 항복해 원나라로부터 양절대도독에 임명되었다. 6월에 안풍, 수주, 초신, 오하로 갔다.
1276년 정월에는 바얀의 지시로 알라한, 동문병과 함께 전당으로 들어가는 입구를 지키고 5천 명을 이끌고 진의중을 추격했지만 절강을 건너지 못하고 돌아왔으며, 망구다이와 함께 범문호를 양절선위사를 그만두게 하고 행양절대도독부사를 하게 했다. 1278년 2월에는 중서좌승에 임명되어 정사에 참여했고 1279년 8월에 일본에 사절을 파견해 일본의 복종 여부를 확인하고 출병할 것을 이야기했으며, 주복 등을 일본에 파견하고 해적 하문달을 항복시켜 은 3천을 바치자 쿠빌라이 칸이 범문호의 부하 21명에게 은과 물품을 하사했다.
나중에 남송이 망하자 쿠빌라이는 범문호를 위시한 남송 항장들에게 이렇게 물었다.
쿠빌라이: 그대들은 왜 이렇게 손쉽게 투항했는가?
범문호: 남송의 가사도가 나라를 다스리면서 문신을 중시하고 무인들은 하대하였사옵니다. 신 등이 불화가 쌓이고 마음이 멀어져서 투항했습니다.
쿠빌라이: 그렇게 말하자면, 가사도가 그대들을 경시하는 것도 당연하겠지!
범문호: 남송의 가사도가 나라를 다스리면서 문신을 중시하고 무인들은 하대하였사옵니다. 신 등이 불화가 쌓이고 마음이 멀어져서 투항했습니다.
쿠빌라이: 그렇게 말하자면, 가사도가 그대들을 경시하는 것도 당연하겠지!
9월에 수령 삽십 명을 천거했다.
1279년 6월에는 원 세조가 야율희량(耶律希亮)[8]에게 일본 원정의 가부를 물었는데, 범문호는 진혁, 여문환, 하귀 등 다른 항장들과 함께 원 세조에게 "가벌(可伐)"이라고 하였다.[9]
또한 범문호(范文虎)와 하귀가 주복(周福)과 난충(欒忠)을 일본에 사신으로 파견하였으나 그들 모두 하카다(博多)에서 참수되었다.[10]
1281년 6월에는 일본행성우승상으로 아라한, 이정과 함께 강남군으로 일본원정에 출병했다가 태풍으로 큰 피해를 입었으며, 범문호는 철수를 주장해 원나라의 군사는 일본에서 철수했다. 이 과정에서 범문호를 비롯한 원나라의 지휘관들이 병사들은 전부 버리고 철수했는데, 패잔병들이 진실을 밝히자 해임되었으나 나중에 다시 복귀한다. 1289년에는 장주의 도적 진궤찰이 항복하자 죽이지 말 것을 이야기해 그 말을 따랐다.
서기 1301년 상서우승(尙書右僧)으로 재직 중 사망했다.[11]
3. 기타
- 그는 처 진씨와 합장되었는데, 그 묘는 현재 안후이(安徽)성 안칭(安慶)시 기판산(基盤山)에 있으며 1956년 고고학 발굴로 확인됐다.[12]
- 원나라 때 토크토에 의해 편찬되었던 《송사》와, 명나라 때 편찬되었던 《원사》에는 별도의 열전이 없고 《신원사》에 있는 그의 열전, 다른 역사서 및 그와 동시대에 활동했던 다른 인물들의 열전과 교차검증해야 그의 상세한 행적을 확인할 수 있다. 이는 하귀[13], 고달, 정붕비[14] 등 다른 남송 출신의 항장들도 마찬가지이다.
- 《신원사》가 편찬될 때 하귀, 유정, 양대연, 여문환, 주환[15], 진혁 등 남송 항장들과 같은 반열에 놓였다.
[1] 민국 시기 편찬된 《신원사》에서는 여문덕의 사위로 나온다.[2] 많은 전투에서 패했는데도 승진했다는 것은 참 아이러니.[3] 잘생기고 문묵에 능통하다는 것 때문에 중용되었다고 한다.[4] 몽케의 부상 여부에는 논란이 있다.[5] 공이 없다고 하기에는 논란이 많은 부분이다. 가사도는 맹공이 죽기 1년 전 맹공의 후임 경호제치사로 추천받았을 뿐 아니라 악주 전투 당시 쿠빌라이에게 재능을 칭찬받았고, 후일 원에서도 극찬받았다고 한다.[6] 인터넷에는 가사도의 사위로 알려져 있으나, 바이두에서는 여문덕의 사위로 나왔다.[7] 남송 무장 하귀의 차남이다.[8] 원나라 개국공신인 야율초재의 손자이다. 앞서 쿠빌라이 칸이 임안 함락 이후 남송 항장들과 김방경을 한자리에 모아놓고 일본 원정 가부를 자유롭게 밝힐 것을 주문했다. 범문호가 일본 원정을 적극적으로 찬성했지만, 야율희량은 이에 반대한다.[9] 원사 야율희량 열전에 나오는 내용이다.[10] 《관동평정전(關東評定傳)》에 나온 내용이다.[11] 이에 앞서 쿠빌라이는 1294년 80세의 나이로 죽었는데, 홍안전 이후 20년 만이었다.[12] 이는 논란이 있다.[13] 하귀는 송사와 원사에 별도의 열전이 없지만 《신원사》에 그 열전이 있다.[14] 정붕비 본인은 송사와 원사, 신원사에 열전이 없으나 그의 처는 신원사에 그 열전이 있다.[15] 삼국시대 손오의 용장 주환과 동명이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