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楊大淵, ?~1265감숙성 천수시 출신으로 송말원초 시기의 장수이다. 원래 남송의 장수였는데, 몽골에 투항한 후 몽골이 사천을 평정하는 것을 도와 동천도원수에 이르렀다. 1271년 낭중군공에 추봉되었고 시호는 숙익(粛翼)이다.
2. 생애
2.1. 남송 시절
양대연은 초기에는 남송의 장수로, 여개의 수하였다. 그는 남송 봉주의 지주, 이주의 동로 마보군 부총감독을 역임했다. 순우 5년(1245년), '사천팔주(四川八柱)'의 하나인 운산성(運山城)을 축조한다.보우 2년(1254년), 낭주의 도통이 되었다. 보우 5년(1257년)에는 사천제치사 포택지와 함께 검문관을 수복했다. 보우 6년(1258년), 포택은 청두를 탈환할 계획을 세웠고, 양대연과 단원감, 유정[1]은 수녕 영천산을 지키며 몽골의 원군을 저지했으나, 몽골군에 격퇴당한다.
2.2. 성을 바치고 몽골에 투항하다
1258년 몽케 칸이 이끄는 몽골군은 낭주로 가서 대획성을 얻었고, 남송의 항장인 왕중을 보내 양대연으로 하여금 항복하게 하지만 양대연은 그를 죽였다. 이에 몽케 칸이 크게 노하여 제군들에게 전력으로 공격할 것을 독촉하자, 양대연은 두려워하여 성을 바치고 항복했다. 몽케 칸은 양대연을 주살하라는 명령을 내렸으나 다행히 왕천가의 권유로 목숨을 부지했다. 양대연은 몽골군을 따라 봉주, 광안 등지를 항복시키고 합주의 조어성으로 진격했다.2.3. 몽골을 도와 사천을 공격하다
1259년에는 시랑과 도행성에 배향되어 변관의 중책을 맡는다. 1260년에는 군대를 이끌고 예의성(사천성 검현)[2]으로 진격하여 포로총관 황문재, 노검, 고탄지를 귀환시킨다.1261년 가을, 군대를 이끌고 동천을 침공하여 송나라 장수 선공과 싸운 뒤 백계원을 포로로 잡아들인다.
1262년 봄에는 쿠빌라이의 명을 받아 개주와 달주를 떠나 송나라 군과 평전에서 싸운다. 파거군에서 다시 싸움을 벌여 송나라 지군 범섭, 통제 위흥, 노분 황적, 절간 진자윤 등을 사로잡는다. 양대연은 다음과 같은 전략을 내세웠다.
오나라를 취하면 반드시 촉을 먼저 얻고, 촉을 취하면 반드시 기를 먼저 얻어야 합니다.
그래서 조카 양문안을 보내 송나라 파거군을 공격한다.
만안재에 이르러 수장 노식이 항복했다. 양대연은 양문안에게 명하여 기주, 달주의 요충지인 번룡산에 성을 쌓게 했다. 성의 수리가 끝나기도 전에 정자가 군대를 이끌고 싸우러 왔고, 양문안은 전력을 다해 방어에 대비했다. 양대연은 송나라 병사, 즉 조카 양문중의 장병을 보내 지원했는데 송나라 병사가 패주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양대연은 입조하여 동천도원수를 알현한 뒤 정남도원수와 함께 서사한다. 또한 거강 강변에 호소성을 쌓고 송군이 주둔하고 있는 대량성을 압박했다.
1263년 남송 재상 가사도는 양림을 보내 양대연을 남쪽으로 귀순하도록 유인했으나 양림이 양문안(楊文安)에게 붙잡혀 죽고 만다.
1264년 양대연은 한성(지금의 사천 파중)을 습격하여 송나라의 기창(祁昌)을 사로잡고, 군수 향량(向良) 등을 사로잡은 데 이어 수천 대의 군수를 포로로 잡았고, 다음날 남송 도통 장사광의 지원군을 대파하고 장성의 총관과 기창의 동생을 생포했다.
1265년 세상을 떠났고 1271년 낭중군공에 추봉된 뒤 숙익(粛翼)이라는 시호를 받는다.
3. 기타
4. 주요 영향
- 양대연이 투항한 것은 몽골 제국과 남송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양대연이 항복함으로써 가릉강[4]과 거강의 방어선이 붕괴되었는데, 양대연이 투항한 뒤 양대연은 몽골의 막하에서 사천성 지역의 운산성을 공격하기 시작했고, 장대열과 포원규를 항복시킨 뒤 청거성을 공격하고, 편장 유연을 유도하여 주장 단원감을 항복시킨다. 그의 운영 하에, 가릉강 중류의 대획, 운산, 청거와 거강의 대량성은 몽골이 남송을 침공하는 사수부가 된다. 그는 이성제성(以城制城)의 방책을 제시하여 거강변에 호소성을 쌓고, 화금산 서록에 장광채, 동안성을 축조하여, 남송 거강의 중상류와 하류와의 관계를 완전히 끊었고, 동시에 군대를 파견하여 개주와 달주를 공격하여 '기취촉(夔取蜀)'이라는 전략적 목표를 달성하려고 했다.
- 1258년 몽골 제국에 투항한 후 1278년 원나라가 기주로(夔州路)를 평정할 때까지 30년 동안 양대연, 양문안 숙질들의 동천지역 공략은 사천지역 전체에 큰 영향을 미쳤고, 양대연은 동천지역에서 남송의 산채성곽을 대거 공략했을 뿐만 아니라 장대열, 이길, 채방광, 왕복, 마재, 치영흥, 왕현(王顯), 한복(韓福), 양표(楊彪) 등 남송의 장수들을 대거 투항하도록 하여 양씨 중심의 집단을 형성하는 데 영향을 끼쳤다.
5. 가족관계
- 양대전(楊大全): 양대연의 형으로 조우문의 수하에서 몽골군을 막지만, 1242년 수주(叙州)에서 몽골군의 침공에 전사한다.
- 양문안(楊文安): 양대연의 조카이다.
6. 논란
그가 항복한 것에는 논란이 있다. 성에서 수만 명의 목숨을 위해 몽골군의 왕덕신에게 먼저 연락하여 항복했다는 설과, 항복하겠다고 한 왕중을 죽였다가 그 아들 왕인(王仁)의 회유에 항복했다는 설, 마지막으로 몽골의 핍박에 어쩔 수 없이 항복했다는 설이 있다.[1] 여기서 유정은 1261년 여문덕의 무시와 박해를 받았고 자신과 사이가 나빴던 유흥이 사천제치사로 부임한다는 소식을 듣고 두려워서 몽골에 노주를 바치며 투항한다.[2] 이 성은 조어성과 함께 몽골군을 막아냈던 성 중 하나이다.[3] 양대연과 비슷하게도 여문환의 경우 그의 종형 여문덕을 제외한 그의 일족들이 모두 투항하였다. 여문덕은 제4차 양양 전투가 벌어지던 와중 병사하였고 여문환이 1273년 제4차 양양 전투에서 투항한 뒤, 원나라의 군대가 장강으로 동진할 때 여씨 일족들과 그 문하생들이 투항한다. 대표적인 예시로 여문덕의 사위 범문호와 여문덕의 아들 여사기, 여문환의 문하생 정붕비, 진혁 등이 있다. 하지만 양대연과는 다르게 여문덕의 친동생 여문신은 1275년 원나라의 군대와 조우하여 죽고 말았다.[4] 장강의 지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