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0047a0><colcolor=#fff> 출생 | 1884년 5월 2일 |
충청남도 부여군 충화면 가화리 | |
사망 | 1959년 2월 5일 (향년 74세) |
충청남도 부여군 | |
본적 | 충청남도 부여군 충화면 가화리 565 |
묘소 |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 |
서훈 | 건국훈장 애족장(1990년 추서) |
[clearfix]
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2. 생애
1884년 5월 2일 충청남도 부여군 충화면 가화리에서 태어났다.1919년 4월 29일 송기면이 주도하여 일으킨 마산면 신장리 장터의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여 오후 1시경 송기면의 지휘아래 신장리 장터에서 2천여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독립만세를 부르며 장터를 누비고 다니며 시위하고 있을 때 일본 경찰에 의해 주동자 송기면, 유성렬 등 6명이 경찰서로 강제 연행되었다.
이에 그는 고시상, 김인두, 박재엽 등과 함께 시위군중을 지휘하여 경찰출장소[1]로 몰려가서, 창문 유리를 깨고 기물을 파괴하면서 연행당한 동지를 구출하려다가 체포되고 말았다.
이후 1919년 10월 9일 고등법원에서 징역 3년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으며, 출옥 후 부여군에서 여생을 보내다 1959년 2월 5일에 작고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77년 양재흥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고,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2013년에 그의 유해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했다.
[1] 순사주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