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명 | 고시상(高時相) |
생몰 | 1881년 7월 8일 ~ 1963년 2월 27일 |
출생지 | 충청남도 서천군 시초면 태성리 |
사망지 | 충청남도 서천군 |
매장지 |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 |
추서 | 건국훈장 애족장 |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2. 생애
고시상은 1881년 7월 8일 충청남도 서천군 시초면 태성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1919년 4월 29일 송기면이 주도하여 일으킨 마산면 신장리 장터의 독립만세시위에 참가해 2천 명의 군중과 함께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시위를 벌였다. 그때 경찰이 출동해 주동자 송기면과 유성렬을 잡아 경찰출장소로 연행했다. 에 그는 양재흥·박재엽·김인두 등과 합세해 수백명의 시위군중을 지휘하여 경찰출장소로 몰려가서 창문 유리와 기물을 파괴하며 강제로 연행 당한 송기면 외 6명의 동지를 탈출시키고 계속 시위를 하였다. 이에 일본 경찰이 발포하여 양재흥 등이 흉탄에 맞아 부상하자, 그는 "나도 쏴죽여라"며 순사보 이한규(李翰圭)에게 대들다가 체포되었다. 이로 인해 재판에 회부된 그는 10월 9일 고등법원에서 징역 3년 6개월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서천군에서 조용히 지내다 1963년 2월 27일에 사망했다.대한민국 정부는 1980년 고시상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고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2017년에 그의 유해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