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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2e8b57> 북송의 재상 포청천(包靑天) 包拯 | 포증 | |
시호 | 효숙(孝肅) |
성씨 | 포(包) |
이름 | 증(拯) |
자 | 희인(希仁) |
신장 | 165㎝ (추정)[1] |
출생 | 999년 4월 11일 |
북송 여주 안휘성 합비 | |
사망 | 1062년 5월 24일 (향년 63세) |
북송 동경 개봉 | |
주군 | 송인종 |
국적 | 북송(北宋) |
별명 | 포청천, 포룡도(龍圖), 포흑탄(黑炭) |
작위 | 동해군개국후 |
[clearfix]
1. 개요
안후이성 허페이시 출신으로 북송 인종 시대 개봉부윤으로 재임한 명재상. 당시 남긴 고사들이 훗날 드라마 《판관 포청천》의 배경이 된다.이름은 포증(包拯), 자는 희인(希仁), 시호는 효숙(孝肅)[2]이다. 흔히 알려진 이명인 포청천(靑天)은 공명정대한 판결과 인품을 칭송하는 의미로 사람들이 붙인 일종의 별명이다. 그 외 얼굴이 검다 하여[3] 포흑(包黑)[4]이란 별명도 있었다 하는데, 경극에서 검은색은 공정과 강직함을 상징한다. 다만 그가 실제 가무잡잡한 피부색이었는지, 혹은 그가 청렴했기 때문에 경극에서 검은 얼굴로 등장시켰기에 그런 별명이 붙었는지는 알 수 없다.[5]
2. 청백리
포증의 성품은 깐깐하고 올곧아, 나쁜 관리들을 혹독하게 대하는 데에 정중을 다했다. 비록 악을 심하게 싫어했으나, 일찍이 충(忠)과 서(恕)로 자신의 생각을 미루어 보지 않은 적이 없었다. 다른 사람에게 구차하게 영합하려 하지 않고, 거짓된 말과 얼굴빛으로 남을 기쁘게 하려고 하지 않고, 평상시에도 사사로운 (이익을 좇아) 글을 쓰지 않았으니, 지인과 가문 모두 그와 교류를 끊었다. 부귀(貴), 의복, 도구들(器用), 음식이 벼슬이 없던 때와 같은 듯 하였다.
송사 #
가난에 고통받는 백성들을 가엾이 여겼으며, 언제나 공명정대한 판결을 내리고 사리사욕을 추구하지 않아서 크게 존경받았다고 한다. 유난히 부패한 관리들이 많았던 송나라 때의 사람이라서 더욱 부각되는 듯 하다. 관료 생활을 하는 동안 사적인 인연에 얽매이지 않고, 사심없이 공평하고 사사로움이 없는 정치를 펼쳐 백성들에게 인망이 높았다. 이에 기득권층에게 암살 위협 같이 신변을 위협 받기도 하였으나, 중국 각지에서 무림의 고수들이 자원해서 모여들어 포청천의 신변을 보호해주기도 했다.[6]송사 #
지방관으로 있을 때는 부당한 세금을 없애고, 황족·외척·귀족에 의한 횡포로 고통받는 민중의 억울한 사건을 명쾌하게 해결해 주었고, 강도와 마적 떼를 소탕하였다. 판관이 되자 부패한 정치가들을 엄정하게 처벌하였으며, 사치를 하지 않고 소박하고 검소한 생활을 하여 청백리로 칭송되었다. 그가 죽자 사람들은 그를 그리워하였고, 이후 민담과 전승의 대상이 되었다.
판관이라고 해서 그의 직업을 법관으로 간주하면 오산이다.[7] 당시 송나라는 전근대 동아시아가 다 그랬듯이 삼권분립 체제의 도입 이전이라 황제가 임명한 행정관료들이 수사와 재판, 처벌을 모두 담당했다. 포청천 역시 여러 곳에서 지방관을 역임하는 동안 고을 주민들의 재판도 함께 맡아 처리한 것이지, 오늘날의 판사처럼 재판 업무만 하는 사람으로 생각해서는 안된다. 고려나 조선 시대의 수령, 즉 사또들이 행정을 담당하는 지방관인 동시에 직접 죄인들을 수사하고 처벌을 내리는 일도 맡은 것을 생각하면 이해하기 쉽다.
특히 오늘날의 서울특별시장에 해당되는 송의 개봉부윤을 지낸 것이 가장 유명하다. 그의 활약상을 보면 판사 + 검사 + 경찰의 콤비네이션.
실은 장요좌의 경우는 그가 월권을 하거나 큰 비리를 저지른 것은 아니었으나 귀인 장씨의 권세를 믿고 여러 관직을 겸하려 하였기에 포증이 탄핵한 것이고 실제로 포증 혼자가 아닌 모든 대간들이 인종에게 대항하여 이를 막았지만 주도적으로 나선 것이 당대 지간원이던 포증이었다.
이후 1057년 3월 동경 개봉부 부윤으로 임명, 1060년 3월 이임되었다. 그가 부임시 받았다고 하는 용작두/호작두/개작두는 현재 카이펑에 현존한다. 작두는 사형(死刑) 중에서도 요참형(腰斬刑) 집행 시에만 쓰던 것으로, 용작두는 황족과 왕족/호작두는 관리와 귀족/개작두는 일반 평민과 천인, 드물게 반역자에게 적용하던 사형기구였다.
포청천은 개봉 부윤으로 재직 중, 고관대작을 가리지 않고 공정한 판결을 내렸으며, 개봉 주변의 마적과 만리장성을 넘어오는 유목민족 도적을 소탕하였다. 또한 권력과 지위를 이용한 부패와 비리를 추상같이 척결하여 이름이 높았다. 이러한 포청천이라 불리는 포증이 송나라 수도를 책임지는 개봉부윤으로 임명된 이유는 송인종의 결단이 있었다.
송인종 치세에 사용된 연호는 다음과 같다.
<colbgcolor=#2e8b57> 천성(天聖) | 1023 ~ 1032. 11. |
명도(明道) | 1032. 11. ~ 1033 |
경우(景祐) | 1034 ~ 1038. 11. |
보원(寶元) | 1038. 11. ~ 1040. 2. |
강정(康定) | 1040. 2. ~ 1041. 11. |
경력(慶曆) | 1041. 11. ~ 1048 |
황우(皇祐) | 1049 ~ 1054. 3. |
지화(至和) | 1054. 3. ~ 1056. 9. |
가우(嘉祐) | 1056. 9. ~ 1063 |
태자로 삼은 조서 역시 워낙 병약했고, 양자라고 해도 원래 혈연으로 따지면 친조카도 아닌 5촌 조카로서 물려받는 만큼 정통성에서도 문제가 있었기 때문에, 인종은 본인 재위 중에 문란한 정치세태를 어느 정도 정리해 놓고 가기 위해 인재를 영입하려 하였다. 정치변혁을 해야 하는 상황에서 포증은 벼슬아치 생활을 제법 했음에도 불구하고 때가 묻지 않았고, 상대가 권력자라고 해도 들이받을 수 있는 배짱이 있으며[11], 당사자는 불가피하게 위험을 무릅써야 하지만 이미 직급 대비 나이가 많아[12] 커리어패스에 있어서 잃을 게 확연히 적다는 여러 조건에 딱 들어맞았다.
당시 포증의 관직은 3사호부부사(三司戶部副使)였는데 5품에서 3품으로 초고속 승진을 한 것이다.[13] 이때 처음 맡긴 직책이 개봉부윤(정확히는 권지개봉부사)[14] 및 용도각직학사(龍圖閣直學士)였다.[15]
이후 약 2년간 포증은 개봉부윤으로서 백성을 착취하는 황족, 관리들을 수사한 후 참수하면서 청천으로서 입지를 굳혔다. 송나라의 재판은 세 번에 걸쳐 이루어지기 때문에 여러 차례 수사한 끝에 혐의가 확실한 이들을 참수했을 것이다.
이때 포증의 나이는 인종보다 11살이나 연상으로, 가우 원년(1056) 개봉부윤을 지낼 당시의 나이가 58살이었다. 송나라 사료를 봐도 인종이 막판에 기대보는 심정에 파격적인 인사를 했던 것인데 너무 잘 해주니 마음에 들어 1년 반 후에는 개봉부윤에서 승진하였다. 이후 단주부사→ 동부승지→ 추밀직학사→ 추밀부사·간의대부까지 지낸 뒤 사망했다. 사망 직후에 동해군개국후(정3품)→ 49재에 예부상서→ 1년 뒤 포증의 기일에 맞춰 이부상서에 추증되었다. 추밀부사·간의대부는 정2품직이고 사망 후에는 제후로 격상되는데, 인종 치세의 사료를 봐도 공이 있는 신하가 죽었다고 저렇게 벼슬을 붙여준 경우는 포증이 유일무이하다.
이러한 그의 업적으로 포증은 오늘날 중국 사회에서 정의의 문화적 상징으로 존경받는다. 사람들은 그를 존경하여 묘를 만들고 거의 900년 간 제사를 올렸으나, 1960년대엔 홍위병들에게 박살나는 수난을 겪기도 했다.
3. 법조인으로서
포증이 다른 지방관들과 달랐던 것은 억울한 일을 당한 백성들에게 관청 앞으로 직접 나와 북을 치도록 한 점. 얼핏 조선의 신문고 제도와 비슷하다.[16] 포증의 수사와 양형은 하도 엄격해 권문세족조차 그가 두려워 감히 법을 어기지 못했다고 한다. 당시 서민들 사이에선 천하에 청탁이 통하지 않는 건 염마왕과 포 대인 뿐이라는 노래가 유행했다고 하니 그의 명성을 짐작할 수 있다.평생을 강직한 공직자로 살아왔던 인물인 만큼 죽을 때 그의 유언은 이랬다.
내 자손들이 벼슬을 하여 부정부패를 저지르면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하게 하라. 그리고 그들이 죽은 이후에도 우리 포씨 집안의 선산에 묘를 쓰지 못하도록 하라!
중국 설화에 따르면 죽어서 저승에 갔을 때 생전에 쌓은 공덕으로 극락에서 좀 쉬나 했더니, 포증을 눈여겨봤던 염라대왕이 자기 자리를 떠넘기고 은퇴해버리는 바람에 강제로 염라대왕이 되어 저승세계의 송사를 처리하고 있다고 전해진다. 중국에서는 공정하지 못한 현실에 살다가 사후에서만은 공정한 판결을 받고 싶어하는 마음에 명판관을 염라대왕으로 추앙하는 신앙이 있으며, 그의 업적을 추앙하는 사당도 존재한다고 한다.다른 이야기로는 자기가 죽고 향을 피울 때 목향을 사용하면 후에 자신이 돌아올 것이라고 했지만, 후손 및 일가친척들이 전부 이런 위대하신 분의 장례를 그런 싸구려 향으로 할 수는 없다면서 유언을 어기고 고급 향을 사용한 결과 환생길이 막혀서(…) 저승에서 염라대왕으로 말뚝 박았다는 설화도 있다. 중국민간설화는 불교와 도교가 뒤섞였다. 불교에선 명부에 진광왕, 송제왕, 평등왕, 도시왕, 태산왕, 평등왕, 염마왕, 변성왕 등 이른바 시왕(十王)이 있다고 간주한다. 그중에 염마왕이 염라대왕으로, 염마왕 개인을 가리킬 때도 있고 시왕 전체를 대표하는 이름으로 쓰일 때도 있다. 또한 도교의 세계관은 중국 관료제도를 모방했는데, 염라대왕은 특정인물이 아닌 관직명으로 본다. 따라서 염라대왕 임무를 맡은 이는 세월에 따라서 바뀐다. 이런 맥락에서 나온 이야기다.
4. 후대의 창작
4.1. 소설
포증을 주인공으로 한 여러 소설군은《삼협오의》,《칠협오의》 등이 있다. 경극이나 잡극에도 등장하곤 했고, 또한 이런 소설을 원작으로 한 현대극이나 영화·드라마도 많이 있다.《수호전》의 서장에도 등장하는데, 당시 송의 태자[17]가 태어난 후 울음을 절대 그치려고 하지 않았다 한다. 그 울음을 며칠 이상이나 그치지 않자 장천사[18]가 나타나 태자의 귀에 대고 "문곡성(文曲星)[19]과 무곡성(武曲星)이 있는데 무슨 걱정을 하는가"라고 하자 울음을 그쳤다고 전해진다. 이 중 문곡성이 바로 이 포청천을 의미한다. 다른 한 명인 무곡성은 서하국을 정벌한 적청을 말한다.
4.2. 드라마
중화권에서 포증이 주연급으로 등장하는 드라마는 20세기부터 21세기까지 매우 많다. 조연으로 등장할 때도 있지만, 본인 네임밸류가 높은지라 조연보단 주연급으로 나오는 경우가 더 많다. 그중에서도 한국에서 가장 유명한 드라마는 역시 90년대 인기를 끈 판관 포청천이다.4.3. 영화
2003년작 홍콩 무협 코미디 영화인 《천방지축(老鼠愛上貓)》에서 주인공인 유덕화의 상관이자 조력자로서 등장하는데, 홍콩의 배우인 황추생이 포청천으로 분했다. 영화의 장르가 코미디인만큼 다른 배역들처럼 개그캐로 나오지만[20], 여기서도 황제의 암살을 기도한 범인이 그 형인 양양왕이라는 사실을 정확하게 추리하는 명판관으로서의 모습을 여전히 보여주었다.4.4. 만화
프랑스에서 포청천을 주인공으로 한 만화를 만들었다.[21] 그림 스타일이 독특하게 여겨지는 듯. 삼협오의를 일본에서 순정만화로 만든 《북송풍운전》이라는 작품에 등장한다. 국내에도 출판되었다. 《신 연예인 지옥》에서 정지혁 병장이 구정치를 단죄할 때 포청천 분장을 했다.4.5. 게임
대만의 RAYS에서 제작한 《포청천 칠협오의》가 있다. 국내에도 한국어화로 정발된 바 있다.패미컴으로도 발매된 게임이 있긴 하나… 이쪽은 중화권의 가성(卡聖)이란 곳에서 1996년에 발매한 해적판이다. 횡스크롤 액션 게임으로, 플레이어는 전조. BGM은 비인가 게임 치곤 제법 괜찮은 편이나 게임 밸런스가 다소 괴악하다. 왜인고 하면 일단 조작이 영 좋지 않은데 특히 점프 조작이 극악이다 보니 적에게 맞아 죽는 경우보다 발판에서 떨어져서 죽는 경우가 더 많을 정도. 문제는 떨어져 죽기 쉬운 구간이 게임의 초반부, 그것도 1-2 스테이지에 나오는 데다 여기에 발판이 뚝 떨어지는 건 덤. 더러운 조작감과 발 밸런스의 조화로 이래저래 해적판 똥게임의 전형을 보여준다.
4.6. 무대 예술
원나라 시대에 작가 이잠부(李潛夫)의 창작으로 상연된 잡극 〈포대제지감회란기(包待制智勘灰闌記)〉에서 포 대제 배역이 사실상 포청천이다. 제목 뜻이 '포 대제가 슬기롭게 석회 동그라미로 판결을 내린 이야기'이다. 2023년 회차에서 배우 박상원 및 호산이 포 대제를 연기했다. 참고로 1막에 등장하지 않아, 인터미션 후 2막에서야 만나볼 수 있다. 솔로몬 왕의 판결 사례 중, 아이를 둘로 가를 것을 제시한 사례를 읽어볼 것을 권한다.[1] 출처 전문가들의 연구 결과 나온 키이다.[2] 고전소설 《삼협오의》에서 포증의 자는 문정(文正)이라 되어있으나 위에서 말했듯이 포증의 자는 희인이며, 문정은 잘못 전해진 것이다. 포증 사후 문중에서 정리해 펴낸 유고의 제목인 〈포효숙공주상의(包孝肅公奏商議)〉에서도 알 수 있듯이, 포증에게 주어진 시호는 처음부터 효숙이었다.[3] 포청천의 또다른 상징인 이마의 달은 후세 사람의 창작이다.[4] 별명이 아니라 아명(兒名) 이었다는 설도 있다.[5] 비슷한 예로, 흔히 잘 익은 대춧빛 피부 운운하는 식으로 묘사되는 관우도 실제로 얼굴색이 붉었다기보단 경극 등에서의 이미지가 정착되었다는 것이 통설이다. 붉은색은 충성심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안록산은 비만으로 배가 튀어나와 있었는데 당현종이 "속에 뭐가 있느냐?"고 묻자 "단심(丹心, 붉은 마음, 즉 충성심)만이 있을 뿐입니다."라고 해서 현종의 환심을 샀다. 그가 이후에 역사에 남을 대반란을 일으키는 것을 생각하면 아이러니. 정몽주가 이방원의 하여가에 한 답가 단심가도 이와 같다. 수호전에서 송강이 검은 얼굴로 묘사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6] 그래서 금초군 드라마의 오프닝이 만들어질 수 있었다.[7] 그리고 당시의 판관은 별도의 직책이었다.[8] 아닌 게 아니라 저지 드레드 소설이 국내에 출간됐을 때 미래의 포청천이란 문구를 넣기도 했다.[9] 인종의 첫 번째 황후는 곽씨였으나, 투기가 심하고 인종의 얼굴에 상처를 내었다는 이유로 폐위하여 사사하였다. 계후로 개국공신 조빈의 증손녀인 조씨를 황후로 세웠지만 슬하의 아들 9명이 모두 요절했다.[10] 자식이 없어 양자로 들인 후 인종에게 아들이 태어나자 다시 돌려보냈다. 그러나 그 후에 그 아들이 다시 요절하는 바람에 다시 양자를 후계자로 삼았으나 궁으로 불러들이지는 않았다. 이후 조서는 송영종으로 즉위했다.[11] 장요좌의 탄핵을 주도한 사람이 포증이었기에 권세에 굴하지 않는 성품이 참작되었을 수 있다.[12] 999년생이 1027년에 진사에 합격했는데, 그 후 30년 간 즉 거의 환갑이 다 된 1057년까지 아직 5품이었는데 이 정도면 당시 기준으로도 승진이 굉장히 늦은 것이다. 원칙주의자로서 관료사회에서 소위 괘씸죄로 찍혀서 인사상 불이익을 여러 차례 받았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13] 송의 3사는 이재(理財)를 맡아보던 세 관아, 곧 염철(鹽鐵)·호부(戶部)·탁지(度支)를 말하는데(고려의 3사 역시 이걸 말한다) 국가세금을 다루는 직책이라 중요하지만 그 때문에 중앙에서는 멀리 떨어진 지방에서 정무를 봐야 했다. 송인종은 지방에서 맴도는 포증을 중앙 정계로 불러들인 것이다.[14] 한국인이라면 권지고려국사, 권지조선국사라는 용법을 봤기 때문에 묘하게 익숙할 것이다. 수도의 장관은 윤(尹)이고 송나라도 개봉부는 부윤을 두었다. 다만 송나라는 이 자리에 친왕을 앉혔기 때문에, 황족이 아닌 신하를 임명할 경우에는 권지개봉부사로 임명했다.[15] 송대에는 대학사를 비롯해서 3각(閣)에 학사·직학사·대제를 두었는데, 그 자리는 매우 명예로운 자리였으며 원로대신·학식이 뛰어난 신하를 예우하기 위한 자리였다. 포증 역시 용도각직학사라는 자리를 명예롭게 여겨 이를 제일 먼저 칭했다.[16] 북 옆에 관원을 배치하여 그 호소를 듣고 소장을 작성하게 했다고 하는 걸 보면, 글을 모르는 계층을 위한 배려도 포함하고 있었던 모양이다.[17] 후일 송 인종[18] 도교의 한 원류인 오두미도의 교조(敎祖). 오두미도란, 후세에 장천사(張天師)라 불리게 되는 장릉(張陵)이 서천 지방에서 영험한 학명산(鶴鳴山)에서 도를 닦고 경전을 정리하여 청성산으로 들어가 만든 도파다. 장릉 이후 장천사는 오두미도의 교조들에게 주어지는 별호와 같은 것이다. 수호전이 송나라 배경이므로, 수호전 서장에 어린 인종의 눈앞에서 등장하는 장천사는 당연히 장릉이 아니라 장릉의 후손인 후대의 장천사이다.[19] 고려의 명신이자 명장인 강감찬도 이 별의 화신처럼 여겨진 것으로 유명하다. 포증의 나라인 송나라 사신이 고려에 와서 강감찬에게 "문곡성이 안 보인 지 오래였는데 여기서 뵙습니다."라고 인사 했을 정도였으니…그런데 강감찬(948~1031)과 포증(999~1062)의 생존 기간은 약 32년 정도 겹쳐서 문곡성의 화신이 둘이 존재한 셈이 되어버린다. 그 때문에 문곡성이 이중성이었냐는 농담도 있다.[20] 영화 초반에 한 나이 든 여성이 자기 남편을 치료하는데 쓸 약재인 썩은 코뿔소 가죽을 잘라달라고 청하는데, 문제는 이 가죽을 자를 수 있는 칼이 하필 황제가 하사한 보검밖에 없었다. 황제의 보검을 함부로 다뤘다간 무슨 처벌을 받을지 모르는 판국이었으나, 여자가 한번만 도와달라고 사정을 하며 통곡을 했다. 결국 유덕화가 포청천의 명령을 받고 절륜한 무공으로 코뿔소 가죽을 잘랐는데, 그 즉시 가죽 썩은 냄새가 마구 풍겨오는 통에 유덕화와 포청천이 함께 기겁을 하는 개그씬이 연출되었다(…).[21] 프랑스에서는 만화를 '제9의 예술'이라고 일컬을 만큼 문화적으로 대접이 좋다. 한국은 웹툰 시대 이후부턴 그나마 인식이 많이 바뀌었지만, 20세기만 해도 어린이날에 만화책을 모아 불태우는 등 탄압이 심했다. 포청천 만화도 일종의 문화적 접근으로 볼 여지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