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청백리(淸白吏)는 직역하면 맑고 흰(淸白) 것 같은 벼슬아치를 의미한다. 쉽게 말해서 "청렴결백한 관리"의 줄임말이라 봐도 된다. 즉, 절대로 부정부패와 권력형 범죄를 저지르지 않는 관료-정치인을 뜻하는 단어다. 조선시대의 이상적인 관료상이다. 반대말로는 탐관오리가 있다.2. 칭호와 특권
조선시대 의정부에서는 청렴하고 강직한 신하에게 청백리라는 칭호를 내렸다. 관리로서 청백리의 호칭을 받는 것은 대단히 큰 영예로 간주되었다. 오죽하면 1대가 청백리 되는 게 3대가 영의정 되는 것보다 어렵다는 말이 전해져 올 정도였다.의정부 당상관 및 사헌부, 사간원의 수장 등 2품 이상의 관리들이 해당 인물을 천거한 뒤 임금의 결재를 통해 의정부에서 결정하였다. 진주 정씨 정척(鄭陟), 정성근(鄭誠謹), 정매신(鄭梅臣)은 3대가 내리 청백리로 녹선되는 영광을 누렸다. 숙종실록에는 정척의 자손이 7대에 걸쳐 청백리에 기록된 자가 3명이라고 하는데 정성근, 정매신 외의 또 한 명은 불명이다.#
청백리 칭호를 받으면 후손들에게도 그 은덕으로 벼슬길에 오를 수 있는 음서의 특전이 주어졌다. 다만 아이러니하게도 이는 오히려 '이 특전을 쓰지 않기 위해서라도 노력해야 한다.'라는 동기부여이자 경고의 의미가 더 강했다. 당시 조선의 풍토에선 음서로 관직에 오른 것 자체가 '실력이 없는데 조상빨을 받았다.' 라는 소리라서 그 자체로도 수치스러운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청백리를 낸 명문가에서 음서로만 관직에 오른 자가 나올 경우, 좀 극단적으로 말하면 잘난 조상 아래에서 개X끼가 나왔다라는 비난을 받아도 이상할 게 없는 수준이었다. 거기에 음서는 높은 관직에 오르는게 금지되어서 당장 관직에 오르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음서로 관직에 올랐더라도 주경야독하면서 과거 시험을 봐 당당하게 관직에 새로이 오르는 경우도 많았다.
3. 청백리 칭호를 받은 사람
문헌마다 명단이 다르다. 문헌별로 수록된 청백리 인원수는 대동장고(大東掌攷) 121명,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1] 122명[2], 청선고(淸選考) 186명, 전고대방(典故大方) 217명[A], 한국성씨대관(韓國姓氏大觀) 179명이다.청백리 배출 가문 순위(*전고대방 기준[4])
전고대방의 청백리 명단(44씨족, 217명[A])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청백리(淸白吏) 및 염근리(廉謹吏) 등은 색깔로 표시함. 국조방목에 기록된 청백리는 밑줄로 표시함.[7]
청백리(淸白吏) | 불명확[8] | 염근리(廉謹吏) |
태조(5) | 안성[9]: 광주/참찬 | 우현보: 단양/찬성사 | 류구[10]: 진주/제학 |
길재[11]: 선산/고려주서 | 서견: 연일/고려장령 |
태종(8) | 경의[12]: 청주/절도사 | 김약항: 광산/대사성 | 최유경[13]: 전주/참찬 |
박서생: 비안/대사헌 | 이지직[14]: 광주/참의 | 이백지: 용인/관찰사 | |
이원[15]: 고성/좌의정 | 최사의[16]: 전주/판돈녕 |
세종(15) | 정척[17]: 진주/판윤 | 최만리[18]: 해주/부제학 | 황희[19]: 장수/영의정 |
류관: 문화/영의정 | 맹사성[20]: 신창/좌의정 | 류겸[21]: 진주/좌참찬 | |
이석근: 전주/익평군 | 민불탐: 여흥/주부 | 홍계방: 남양/참의 | |
박팽년: 순천/승지 | 이정보: 경주/관찰사 | 이지: 광주/판관 | |
황효원[22]: 상주/좌찬성 | 류염[23]: 진주/이판 | 김장[24]: 경주/장령 |
세조(7) | 노숙동: 풍천/대사헌 | 정문형[25]: 봉화/우의정 | 박강: 반남/판중추 |
이언: 흥양/부윤 | 기건[26]: 행주/판서 | 곽안방: 현풍/군수 | |
김종순[27]: 경주/판윤 |
성종(20) | 정성근[28]: 진주/직제학 | 임정[29]: 이안/예판 | 성현[30]: 창녕/참찬 |
허종[31]: 양천/우의정 | 허침[32]: 양천/우의정 | 박열[33]: 밀양/찬성 | |
윤석보: 칠원/직제학 | 구치관: 능성/영의정 | 이훈[34]: 한산/참찬 | |
이현보[35]: 영천/판중추 | 김겸광[36]: 광산/판서 | 안팽명[37]: 광주/사성 | |
양관: 남원/동지돈 | 박처륜: 고령/부제학 | 조지서: 임천/보덕 | |
민휘: 여흥/대사헌 | 이신효: 전의/관찰사 | 이순[38]: 우봉/참판 | |
이약동: 벽진/지중추 | 류훈[39]: 전주/판서 |
중종(35) | 정매신[40]: 진주/판관 | 조사수[41]: 양주/이판 | 최명창: 개성/형참 |
권빈: 안동/전직 | 김무: 안동/공판 | 조치우: 창녕/사웅전 | |
오세한: 나주/병사 | 송흠: 신평/판중추 | 김전: 연안/영의정 | |
강숙돌: 금천/사간 | 이선장: 한산/군수 | 류헌[42]: 전주/대사간 | |
이화: 전의/병판 | 김종직: 선산/형판 | 정갑손: 동래/찬성 | |
정창손: 동래/영의정 | 류빈: 진주/이판 | 이숭원: 연안/이판 | |
류희철: 문화/집의 | 김흔: 연안/공참 | 손중돈: 경주/참찬 | |
표빈: 신창/시정 | 조원기: 한양/판중추 | 양지손: 남원/예의 | |
김연수: 안동/첨정 | 박상: 충주/이판 | 윤사익: 무송/판중추 | |
이철균: 성주/대사성 | 이언적: 여주/찬성 | 김정: 경주/판서 | |
유찬: 기계/수사 | 한형윤: 청주/형판 | 신공제: 고령/이판 | |
김양진: 풍산/공판 | 어영준: 함종/사인 |
명종(45)[43] | 정연[44]: 광주/군수 | 윤부: 파평/병참 | 이세장: 전주/관찰사 |
정종영: 초계/찬성 | 안현: 순흥/좌의정 | 박수량[45]: 태인/참찬 | |
김순[46]: 경주/정랑 | 임호신: 풍천/지돈녕 | 임보신: 풍천/형의 | |
홍섬[47]: 남양土/영의정 | 이명: 예안/좌의정 | 이영: 영천/수사 | |
이몽필: 전주/이참 | 홍담[48]: 남양土/판서 | 성세장: 창녕/호판 | |
윤춘년: 파평/판서 | 윤현: 파평/찬성 | 류혼: 문화/부정 | |
우세겸: 단양/부정 | 박영준: 고령/이판 | 박민헌: 함양/참판 | |
이증영: 전의/공정 | 김몽좌: 김해/직장 | 이준경[49]: 광주/영의정 | |
주세붕: 상주/찬성 | 김개[50]: 광산/판서 | 이황: 진성/찬성 | |
송찬: 진천/판중추 | 허세린: 양천/좌윤 | 안잠: 순흥/별좌 | |
전팽령[51][52]: 옥천/목사 | 강윤권: 진주/사재정 | 오상: 해주/이판 | |
신잠: 고령/목사 | 김우: ?/부사 | 이중경: 광주/이참 | |
안종전: 죽산/군수 | 김광: 영안/부사 | 유언겸: 창원/정랑 | |
변훈남: 초계/현령 | 김약묵: 강진/집의 | 노진: 풍천/판서 | |
신사형: 영월/목사 | 김취문: 선산/대사간 | 송익경: 봉화/우의정 |
선조(27)[55] | 심수경: 풍산/좌의정 | 허잠: 양천/이판 | 이기[56]: 한산/이판 |
이우직: 여주/예판 | 이원익: 전주/영의정 | 류성룡: 풍산/영의정 | |
이항복: 경주/영의정 | 이직언[57]: 전주/찬성 | 백인걸: 수원/참찬 | |
이시언[58]: 전주/찬성 | 최흥원[59]: 삭녕/좌의정 | 장필무: 구례/병사 | |
안자유: 순흥/이판 | 이제신[60]: 전의/병사 | 정곤수: 청주/찬성 | |
김수: 안동/판중추 | 이광정: 연안/참찬 | 이후백: 연안/이판 | |
심희수: 청송/좌의정 | 성영: 창녕/이판 | 허욱[61]: 양천/좌의정 | |
이유중: 덕수/대사헌 | 최여림[62]: 해주/승지 | 김장생: 광산/참판 | |
이기설[63]: 연안/장령 | 오억령: 동복/판서 | 김행: 강릉/직제학 |
인조(13)[64] | 김상헌: 新안동/영의정 | 김시양: 안동/판관 | 민여임: 여흥/참판 |
이안눌: 덕수/이판 | 김덕함: 상주/대사헌 | 이명준[65]: 전의/참판 | |
성하종: 창녕/병사 | 최진립: 경주/공참 | 이시백[66]: 연안/영의정 | |
홍명하[67]: 남양唐/영의정 | 신경진: 영월/대사헌 | 구곤원: 능성/정랑 | |
김신국: 청풍/영중추 |
숙종(22)[68] | 이상진: 전의/좌의정 | 조경: 한양/판중추 | 강백년: 진주/참찬 |
조석윤: 배천/이참 | 류경창: 전주/이참 | 박신규: 밀양/참찬 | |
최관: 전주/지중추 | 이지온: 공주/좌윤 | 성이성: 창녕/부사 | |
이후정[69]: 연안/참지 | 조속[70]: 풍양/진선 | 홍무: 남양?[71]/정랑 | |
홍우량: 남양土/수사 | 강열: 진주/부사 | 이태영: 전주[72]/부사 | |
이세화: 부평/판서 | 강세구: 진주/대사간 | 윤추: 파평/장령 | |
강유후[73]: 진주/부사 | 최경창[74]: 해주/부사 | 윤지인[75]: 파평/병판 | |
이제[76]: 전주/우윤 |
경종(6)[77] | 류상운[78]: 문화/영의정 | 송정규: 여산/관찰사 | 강석범[79]: 진주/도정 |
이명준: ?[80]/부사 | 김두남: 안동/헌납 | 이하원[C]: 광주/판서 |
영조(9)[82] | 허정[B]: 양천/수사 | 이병태[B]: 한산/부제학 | 윤용[85]: 파평/형판 |
한덕필[B]: 청주/참판 | 정형복[B]: 동래/형판 | 최유현: 삭녕/세마 | |
윤득재: 해평/병판 | 이태중[C]: 한산/호판 | 이겸진[C]: 덕수/? |
정조(2)[91] | 이의필: 전주/참찬 | 이단석[92]: 전주/참판 |
순조(4) | 남이형[93]: 의령/부사 | 서기순[94]: 대구/판서 | 한익상: 청주/관찰사 |
심의신: 청송/관찰사 |
실록[95] | 박유인[96]: 울산/첨사 | 여윤철[97]: 함양/동지중 | 김수연[98]: ?/부사 |
김수문[99]: 영덕/헌납 | 송익수[100]: ?/? | 이의만[101]: 광주/판윤 |
4. 국내외의 '청백리'
조선시대의 청백리처럼 청렴결백한 인물로 평가되는 국내외 인물들을 소개한다. 전술한 조선시대의 청백리, 염근리는 제외한다.4.1. 국내
4.1.1. 삼국시대
4.1.2. 고려시대
- 강감찬 - 고려 현종 때 문하시중
- 이조년 - 고려 충혜왕 때 정당문학. 이인임의 조부.
- 정운경 - 고려 공민왕 때 형부상서. 정도전의 아버지.
- 경복흥 - 고려 우왕 때 문하시중
- 최영 - 고려 우왕 때 문하시중
4.1.3. 조선시대
- 허조 - 조선 세종 때 좌의정
- 남곤 - 조선 중종 때 영의정
- 상진 - 조선 명종 때 영의정
- 박순 - 조선 선조 때 영의정
- 허엽 - 조선 선조 때 동지중추부사
- 이홍주 - 조선 인조 때 영의정
- 정충신 - 조선 인조 때 부원수, 포도대장 등을 지낸 무신
- 이형상 - 조선 숙종 때 경주부윤[102], 동래부사[103], 제주목사[104] 등을 지낸 문신
- 정원용 - 조선 헌종 때 영의정
4.2. 해외
- 라몬 막사이사이 - 필리핀 제7대 대통령
- 로베스피에르 - 프랑스 제1공화국 제5대 지도자
- 임칙서 - 청나라 도광제 때 흠차대신
- 잠롱 스리무앙 - 태국 초대 방콕 민선 시장. 방콕 시내까지 깨끗하게 청소한 업적으로 미스터 클린이라는 별호가 있다.
- 포증 - 북송 인종 때 추밀부사·간의대부. 이부상서 추증. 개봉부윤 '판관 포청천'으로 유명하다.
- 플라비우스 스틸리코 - 서로마 제국의 집정관
- 피오렐로 라과디아 - 미국의 하원의원 및 제99대 뉴욕주 뉴욕시장
- 해서 - 명나라 만력제 때 남경 우도어사. 가정제 때 호부 운남주사로 유명하다.
5. 여담
대한민국에서는 이 호칭을 딴 '청백리상'을 제정하여 공무원 및 공무원 신분에 준하는 인물에게 시상하고 있다.청렴한 것은 좋은 것이지만 조선시대에 이를 너무 지나치게 강조하여 폐단이 생겼다는 지적도 있다. 국가적으로 청렴함을 추구한 나머지 관리들에게 지배계층으로서 지향하는 풍족한 생활을 누리기는 어려울 정도의 궁핍한 보수를 주었고, 결국 뇌물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는 주장이다. 또한 이 사상이 중농주의를 주축으로 하던 조선을 넘어 자본주의 시대인 대한민국 시대에까지도 남아있어 공직자들에게 지나친 도덕을 요구하는 사회적 결벽증을 초래했다는 시선도 있다.
[1] 동국문헌비고(東國文獻備考)의 증보판이다.[2] 증보문헌비고 제계고(帝系考)에 실린 인물들 중 청백리로 표시된 인물의 수이다. 시중에서 142명으로 인용되고 있으나 122명이다.[A] 전고대방에는 218명으로 나오나 선조조의 이직언과 이시언이 동일인이므로 217명이 맞다.[4] 전고대방에 누락되었으나 실록에 기록된 인물은 포함함.[5] 선조조의 이직언과 이시언이 동일인이므로 9명이 아니라 8명으로 계산하였다.[A] [7] 국조문과방목, 국조방목의 여러 판본 중 1곳 이상에서 청백리로 기록되어 있으면 밑줄로 표시함.[8] 조선왕조실록에서 청백리(淸白吏) 녹선 여부는 불명확하나 청백(淸白)하다는 평이 있는 인물.[9] 안팽명이 그의 손자이다.[10] 전고대방에 柳珣(류순)으로 되어 있으나 柳玽(류구)의 오기임이 분명함. 본관과 시호가 일치함. 류겸(柳謙)의 아버지. 실록에 검소하고 외식을 힘쓰지 않았다고 평하나 청백리 녹선 여부는 불명확함. 태조실록 참조.[11] 실록에서 세자(태종)는 길재는 강직한 사람이라고 말했고, 사신(史臣)은 충렬한 선비라고 평했다.정종실록 / 실록에서 권근이 길재의 시에 서문을 짓기를 "고려 5백 년에 교화를 배양하여 선비의 기풍을 격려한 효과가 선생의 한 몸에서 수확되었고, 조선 억만년에 강상(綱常)을 부식하여 신하된 절개를 밝히는 근본이 선생의 한 몸에서 터를 닦았으니, 명교(名敎)에 유공(有功)함이 이보다 클 수 없다."고 했다고 기록했다.세종실록 / 실록에서 세종은 길재의 자손 중 재주와 행실이 있는 자를 등용하려고 했다.세종실록 / 실록에서 고려 충신 길재의 시호를 충절(忠節)로 내렸다고 기록했다.영조실록 / 길재의 청백리 녹선 여부는 불명확하나, 길재의 청렴결백함과 절의는 온 나라에 그 명성이 자자했고, 조정에서도 그를 고려 충신으로 칭하며 시대의 사표(師表)로 삼았으며, 그 자손들에게도 특전을 베푼 것을 보면, 길재는 사실상 청백리 이상의 대우를 받았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조선 초기에는 청백리 제도가 아직 정착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12] 실록에 천성이 검소하고 곧다는 평은 있으나 청백리 녹선 여부는 불명확. 태조실록 참조.[13] 최사의가 그의 아들이다. 실록에 청렴 정직하다는 평은 있으나 청백리 녹선 여부는 불명확. 태종실록 참조.[14] 그의 손자 형조판서 이극감의 증손이 이준경이다.[15] 실록은 하륜(河崙), 박은(朴訔), 이원(李原) 모두 재물을 탐한다는 이름을 얻었다고 하며 이원은 이(利)만 탐하고 의(義)를 모르는 신하라고 평하였다. 세종실록 참조.[16] 최유경이 그의 아버지이다.[17] 언제 청백리에 녹선됐는지 불명. 숙종실록에서 그를 청백리로 언급하고 있으며, 7대에 걸쳐 그의 자손 중 청백리에 기록된 자가 3명이라고 함. 정척의 아들 정성근과 손자 정매신도 청백리로 3대가 청백리였다. 숙종실록 참조.[18] 최여림이 그의 현손이다.[19] 실록에는 청렴결백한 지조가 모자라서 정권을 오랫동안 잡고 있었으므로, 자못 청렴하지 못하다는 비난이 있었다고 평함. 문종실록 참조.[20] 실록에서 청백(淸白)하게 절조를 지켰다고 평하나 청백리 녹선 여부는 불명확함. 세종실록 참조.[21] 류구(柳玽)의 아들.[22] 실록에는 종으로 하여금 직접 집을 사서 고쳐 가지고 팔게 함으로써 이득을 취하기를 좋아한다고 기록함. 성종실록 참조.[23] 실록에 사헌부가 류염의 사냥, 화매(和賣), 수탈 등을 거론하며 탐욕스럽고 더러운 자라며 죄를 청한 기록이 있음. 태종실록 참조.[24] 전고대방에는 본관을 기재하지 않았고, 한국성씨대관(1971)에서는 광산 김씨로 표시함. 광산 김씨 시은공파(市隱公派) 족보 상권에 청백리 김장에 대한 기록은 있으나 계대 불명임. 경주 김씨 족보에 김장이 태사공후 전서공후 감사공파의 파조로 기록되어 있고 감사공파 문중에서 관리하는 김장의 묘소가 실재하는 것으로 보아 경주 김씨로 판단됨.#[25] 실록에서는 성질이 탐욕스럽다고 평함. 연산군일기 참조.[26] 실록에서 성품이 맑고 검소하다고 하였고, 시호를 정무(貞武)라 하니, 청렴하고 결백하여 절개를 지키는 것이 정(貞)이요, 백성에게 모범되게 하여 복종시키는 것이 무(武)이다라고 하였다. 세조실록 참조.[27] 실록에는 김종순이 경기관찰사를 지내던 1463년(세조 9) 경기 고을을 순행하던 세조가 행탁(行橐)을 점검해 본 후 '청렴하고 간소함이 너무 지나쳐서 관찰사가 거의 굶어 죽게 되었다.'고 희롱했다고 한다. 청백리 녹선 여부는 불명확하다. 성종실록 참조.[28] 중종실록에 의하면 중종조에 청백리에 천거됨. 아버지 정척에 이어 청백리에 녹선되었고 아들 정매신도 청백리에 녹선되었다. / 전고대방에서는 본관을 진양 정씨로 표기했지만 아버지 정척과 아들 정매신처럼 진주 정씨로 통일한다.[29] 실록에서 사람됨이 순하고 조심하며 충직하고 후하였고, 가는 곳마다 명성과 업적이 있어서 아전과 백성들이 기뻐하며 따랐다고 했다. 태종실록 참조.[30] 실록에서 성격이 허심 탄회하여 수식(修飾)하지 않고, 생업을 일삼지 않고 오직 서적을 가지고 놀았으며, 문장이 건실 익숙하여 오랫동안 문형(文衡)을 맡았는데, 다만 관리의 재간이 없고 사정에 소활하여 어디서나 큰 공적이 없었다고 했다. 청백리 녹선 여부는 불명확하다. 연산군일기 참조.[31] 허침의 형이고 허욱의 고조부이다. 실록에서는 "허종(許琮)은 성품이 관후(寬厚) 간중(簡重)하고 자태와 의표가 빼어나고 위연(偉然)하였으며, 수염 또한 아름다와서 바라보는 자 누구나 그가 대인 군자(大人君子)임을 알았다. 아무리 창졸간이라 해도 조급한 말이나 장황한 안색을 짓지 않았으며, 일에 임하여는 임금의 희로(喜怒)에 의해 끌려가지 않고 확고한 소신대로 하였다. 서적(書籍)을 널리 보았고 잡예(雜藝)에도 통하였으며, 더욱 성리학(性理學)에 조예가 깊었다. 평생 산업(産業)을 다스리지 않아 거처하는 곳이 좁고 누추한데도 태연하게 지냈다. 문무(文武)의 재능을 겸비하여 장상(將相)으로서 물망이 중하여 그 한 몸이 국가의 경중에 연계되었는데, 북정(北征)의 거조를 당시의 논의가 애석해 하였다."라고 하였다. 성종실록 / 실록에 기록된 허종의 아내 한씨의 상언에서도 허종의 청렴함을 알 수 있다. 중종실록 / 다만 청백리 녹선 여부는 불명확하다.[32] 허종의 동생이다. 실록에서 "문정(文貞)이라 시호(諡號)하니, 널리 듣고 많이 봄이 문(文)이요 청백(淸白)하고 수절(守節)함이 정(貞)이다...집에 있을 때에는 산업(産業)을 영위하지 않고 오직 종일 글을 읽을 뿐이며...그 덕업(德業)과 문장(文章)이 형 허종(許琮)과 명성을 나란히 하였다...죽을 때는 집에 남은 재물이 없어 겨우 상구(喪具)를 장만하니, 사람들이 그 청덕(淸德)에 더욱 탄복하였다."라고 하였다. 연산군일기 참조. 청백리 녹선 여부는 불명확하다.[33] 실록에서 "성격이 비열 유약하여 남의 뜻을 거스를까 봐 가지가지로 비위만 맞추는 짓을 했고, 비록 벼슬이 재상에 이르렀지만 건백(建白)한 바가 없었다...두 차례나 정권을 잡아 뇌물을 많이 모았는데 사람들이 알지 못하고서 간솔하다고 칭하였으니, 교사(巧詐)하지 않고서 이렇게 하였겠는가?"라고 하였다. 중종실록 참조.[34] 실록에서 "성질이 총명하고 지혜롭고 행동이 단정하고 방정하였다. 생장하여 부귀하였으나 화려한 옷을 입는 습성이 없었고, 글 읽기를 좋아하여 서사(書史)를 상당히 섭렵하였고, 문사(文士)와 더불어 교유하기를 좋아하고 산업(産業)을 경영하지 아니하고 사치를 좋아하지 아니하였다."라고 하였다. 성종실록 참조.[35] 실록에서 "가는 데마다 명성과 공적이 있었고...성품이 효성스럽고 우애가 있었으며 담박하고 욕심이 없어 시골에 있을 때에는 일찍이 사사로운 일로 관에 청탁하는 일이 없었으며 오직 유유자적하며 살았다. 근래에 만년의 지조가 완전하였던 사람으로 이현보를 으뜸으로 친다."라고 하였다. 명종실록 참조.[36] 실록에서 "김겸광은 재물을 탐하는 데에 부끄러움이 없었으며 집 재산이 대단히 많았다...나주 목사가 되어 임기가 차서 돌아오려고 할 적에 관중(官中)의 재물을 모두 취하여 짐을 다 꾸려가지고 장차 실으려고 하는데 고을 사람이 미워하여 불을 질러 모두 불태우니, 어떤 사람이 기롱하기를, ‘6년 동안 탐한 물건 하루아침에 재가 되었다.'라고 하였으니, 이때 사람들이 명담(名談)이라고 하였다."라고 하였다. 성종실록 참조.[37] 안성이 그의 조부이다. 중종실록에 의하면 중종조에 청백리에 천거됨.[38] 영조실록에서 청백리로 언급함. 청백리에 녹선된 때는 불명임. 영조실록 참조.[39] 류헌이 그의 손자이다.[40] 조부 정척, 아버지 정성근에 이어 3대째 청백리에 녹선되었다.[41] 명종실록에 의하면 명종조의 청백리 3인에 선발되었고 이후 염근리 33인에도 선발되었음. 명종실록 참조.[42] 류훈이 그의 조부이다.[43] 명종조에는 청백리 3인을 녹선하고 이후 이들을 포함한 염근리 33인도 녹선함.명종실록#1명종실록#2 다만 염근리로 선발된 이준경은 추후 선조조에 청백리로도 녹선됨.[44] 중종실록에 의하면 중종조에 청백리에 녹선되었다. 전고대방에는 본관 기록이 없고 한국성씨대관에는 동래 정씨(東萊 鄭氏)라고 하였으나 광산 정씨(光山 鄭氏)의 오기이다. 광산 정씨 족보에서 청백리로 기록된 것이 확인된다. 광산 정씨는 광주 정씨(光州 鄭氏)의 옛 이름이다.[45] 실록에 의하면 명종조의 청백리 3인에 선발되었고 이후 염근리 33인에도 선발되었음. 명종실록 참조.[46] 실록에 의하면 명종조의 청백리 3인에 선발되었고 이후 염근리 33인에도 선발되었음. 명종실록 참조.[47] 홍담과 4촌간이다. 즉 홍섬의 아버지 영의정 홍언필이 홍담의 아버지 홍언광의 형이다.[48] 홍섬과 4촌간이다. 즉 홍담의 아버지 홍언광이 홍섬의 아버지 영의정 홍언필의 동생이다.[49] 그의 증조부 형조판서 이극감의 조부가 이지직이다. 실록에서 이원익의 일기에 이준경이 명종 7년에 염근리로 이미 뽑혔고 추후 선조조에는 청백리로 뽑혔다고 기록된 사실을 언급함. 숙종실록 참조.[50] 실록에 청간한 사람으로 초계된 사람 중에 김개와 같이 거짓을 꾸며 명예를 구하는 무리도 들어 있어 비난이 많았다고 함. 명종실록 참조.[51] 전고대방에는 김팽령(金彭齡)으로 되어 있으나 명종실록 염근 33인 중 한 명인 전팽령(全彭齡)의 오기로 보인다. 전팽령은 명종조 염근리 33인에 선발되었고 염근리를 뽑기 1년 전에 청렴, 근실(廉謹)하여 자급을 높여준 일이 이미 있었다. 또한 염근리 33인 선발 1년 후에 관찰사가 '염근한' 수령임을 이유로 천거한 것과 이암(頤菴) 송인(宋寅)이 쓴 묘지(墓誌)에 '벼슬길에 나선 지 37년 동안에 네 번이나 주군(州郡)을 맡아서 다스렸는데도 집안에 한 섬 정도의 쌓아 둔 양식 저축이 없었으나 공은 오히려 느긋하고 편안하게 지내었다.'라는 언급이 있고 또한 예조에서 서원에 대한 문서를 정리하여 편찬한 서원등록에 '관직에 있을 때에는 청렴하고 결백하였습니다.'라는 기록도 있으므로 염근리로 선정된 것은 김팽령이 아닌 전팽령이 확실하다.[52] 그런데 실록에서 1552년 청백리를 위해 열린 궁중 연회에 대한 기사에는 전팽령이 아닌 김팽령으로 기록되어 혼란을 야기한다. 하지만 앞서 1551년에 명종조 염근리 33인을 선정한 실록 기사에서는 전팽령으로 기록되었고 실록과 분명히 같은 연회에 대해 다루고 있는 민간 문헌에 모두 전팽령으로 기록되었다. 무엇보다도 김팽령이라는 사람이 실존하고 과거합격 기록도 있지만 명종 때보다는 시대가 앞서고 종친회의 조사에 따르면 김팽령은 1512년에 사망했으니 1552년 연회에 초대될 수가 없다. 따라서 1552년 청백리를 위한 궁궐 연회에 초대된 사람은 전팽령이 맞으며 실록에 기록될 때 기록자가 실수한 것으로 보인다.[53] 명종조 염근리 33인에 포함된다.명종실록[54] 명종조 염근리 33인에 포함된다.명종실록[55] 선조조에 염근리 13인을 선발한 후 그 중에서 청백리 4인을 선발함. 이시언(李時彦)과 이직언(李直彦)은 동일인임.선조실록인조실록 이후 추가로 염근리 7인을 선발함.선조실록[56] 선조조에 추가로 선발한 염근리 7인에 속했는데 정조실록에서는 청백리로 언급함. 최흥원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후대로 갈수록 청백리, 염근리를 명확히 구별하지 않는 듯함. 정조실록 참조.[57] 이시언과 동일인. 전고대방 기준으로 작성된 표이고 인물 순번이 정해져 있으므로 중복이지만 삭제하지는 않았음.[58] 이직언과 동일인. 전고대방 기준으로 작성된 표이고 인물 순번이 정해져 있으므로 중복이지만 삭제하지는 않았음.[59] 선조조에 추가로 선발한 염근리 7인에 속했는데 영조실록에서는 청백리로 언급함. 이기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후대로 갈수록 청백리, 염근리를 명확히 구별하지 않는 듯함. 영조실록 참조.[60] 이명준의 아버지이다.[61] 허종의 현손이다.[62] 최만리가 그의 고조부이다.[63] 이후정이 그의 손자이다.[64] 인조조에 청백리 5인을 녹선한 기록이 있음. 추가 녹선 여부는 불명. 인조실록 참조.[65] 이제신의 아들이다.[66] 숙종조에 청백리에 녹선되었다.[67] 숙종조에 청백리에 녹선되었다.[68] 숙종조에 청백리 17인, 염근리 3인을 뽑음.숙종실록 이때는 죽은 자는 청백리, 산 자는 염근리로 선발함.숙종실록 그러나 이러한 기준이 통용되는 것은 아님. 예컨대 선조조에는 죽은 자와 산 자의 구분없이 청백리와 염근리를 차별하여 선발함. / 정조실록에서 숙종조의 청백리(염근리 3인 포함)가 20인이었음을 확인해 줌.정조실록[69] 이기설이 그의 조부이다.[70] 현종실록에 이미 청백리로 언급되는 것으로 보아 선조조~현종조에 청백리에 녹선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후 숙종조에 청백리에 재차 녹선되었다.[71] 당홍계인지 토홍계인지 불명이다.[72] 한국성씨대관에는 진주이씨(晋州李氏)로 나오나 오기임. 증보문헌비고에 전주이씨(全州李氏) 덕천군(德泉君) 후생(厚生)의 7세손이라고 비교적 자세히 서술함.[73] 염근리 강석범의 아버지. 실록의 문맥상 경종조~영조조에 청백리에 녹선된 것으로 보임. 영조실록 참조.[74] 실록에서 몸가짐을 삼가지 않고 관비를 데리고 산다고 사헌부의 탄핵을 받고 파직되었다고 함.선조실록 실록에서 류성룡도 최경창은 사람됨이 검속(檢束)하는 바가 없어 국상을 당했을 때에 양계(兩界)의 창기를 데려다 첩으로 삼았으므로 당시 대간이 이를 논박했음을 언급했다고 함.선조실록[75] 윤용의 아버지이다. 실록의 문맥상 경종조~영조조에 청백리에 녹선된 것으로 보임. 영조실록 참조.[76] 숙종조 청백리 17인, 염근리 3인에 속하지 않음.숙종실록 정조조에 청백리로 추천되었으나 결국 녹선되지 못하였다.정조실록#1정조실록#2[77] 경종조에 염근리 4인을 녹선함. 경종실록 참조.[78] 실록에서 "청간(淸簡)한 한 절조(節操)는 비록 자기와 의견을 달리하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또한 모두 탄복하였다...유상운은 조정에서는 강명(剛明)하고 과감한 조행(操行)이 있었고, 집에서는 청백(淸白)한 지절(志節)이 있었다...나가서는 큰 도(道)를 안찰(按察)하고 들어와서는 중요한 자리에 있었지만, 집안 사람들의 생활을 돌보지 않았고 자신이 죽은 뒤에는 상자 속에 남은 옷가지가 없었으니, 이 또한 남보다 뛰어나 미치기 어려운 것이다."라고 하였다. 숙종실록 참조.[79] 청백리 강유후의 아들. 경종조~영조조에 염근리에 녹선된 것으로 보임. 영조실록 참조.[80] 본관 불명. 전고대방에는 李明俊 武府使(이명준 무과 부사)라고만 기록되어 있다. 국조방목을 살펴보면 병조참판 전의 이씨 이명준(李命俊, 1572~1630)과 동래부사 한산 이씨 이명준(李明浚, 1658~1715)이 있고 둘 다 청백리로 기록되어 있다. 다만 모두 문과 출신이라 동일인이 아닌 것으로 보인다.[C] 정조조에 청백리로 추천되었으나 결국 녹선되지 못하였다.정조실록#1정조실록#2[82] 전고대방에서 영조조의 청백리로 실은 이병태, 윤용, 정형복, 한덕필, 허정은 모두 정조조에서 선발한 청백리 5인이다. 정조실록 참조.[B] 정조조의 청백리 5인에 속한다. 1796년(정조 20) 4월 18일 청백리에 추천된 54인에 속했으나 모두 부결되었고, 최종적으로 동년 5월 9일 청백리로 녹선되었다.정조실록#1정조실록#2[B] [85] 윤지인의 아들이다. 정조조의 청백리 5인에 속한다. 1796년(정조 20) 4월 18일 청백리에 추천된 54인에 속했으나 모두 부결되었고, 최종적으로 동년 5월 9일 청백리로 녹선되었다.정조실록#1정조실록#2[B] [B] [C] [C] [90] 조선왕조실록에는 염백리로 기록되어 있으나 승정원일기에는 청백리로 언급되고 있다.영조실록승정원일기[91] 정조조에서는 이병태, 윤용, 정형복, 한덕필, 허정 등 청백리 5인을 녹선하였는데, 전고대방에서는 이들 모두 영조조에 실었다. 정조실록 참조.[92] 숙종조부터 이미 청백(淸白)으로 이름이 났음.숙종실록 청백리 홍명하, 홍무와 함께 언급되는 것을 보면 청백리에 준하는 것으로 보임. 영조실록에서 이복연(李復淵)이 염리(廉吏)의 아들이라고 했는데 이복연의 아버지가 이단석(李端錫)임.영조실록 한편 영조조에서 염리로 언급된 것을 보면 영조조 또는 그 이전에 염리로 녹선된 것으로 보이고, 정조조의 청백리 5인에도 포함되지 않았으므로, 전고대방에서 정조조의 청백리로 실은 것은 오류임.정조실록[93] 실록에서 철종이 남이형의 청렴하고 결백한 공적을 익히 들었다고 하나 청백리 녹선 여부는 확실치 않음. 철종실록 참조.[94] 실록에 가는 곳마다 청렴하다는 이름이 있었다고 하나 청백리 녹선 여부는 불명확함. 철종실록 참조.[95] 조선왕조실록에 청백리 또는 염근리로 기록되어 있으나 전고대방의 청백리 명단에 누락된 인물들임.[96] 성종조 무과에 급제한 박유인과 동일인물로 보여 본관을 울산으로 추정함.문무과방목 실록에 청백리로 언급됨.중종실록[97] 실록에 청백리로 언급됨.중종실록[98] 실록에 청백리로 언급됨.중종실록[99] 명종조 염근리 33인에 포함된다.명종실록[100] 명종조 염근리 33인에 포함된다.명종실록[101] 조선왕조실록에는 염백리로 기록되어 있으나 승정원일기에는 청백리로 언급되고 있다.영조실록승정원일기[102] 종2품 지방관.[103] 동래도호부사. 75개의 도호부 중 동래도호부사만 정3품 당상관이었다.[104] 종3품 지방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