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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4-06 16:02:09

한강인도교 폭파

한강 인도교 폭파에서 넘어옴

주의. 사건·사고 관련 내용을 설명합니다.

이 문서는 실제로 일어난 사건·사고의 자세한 내용과 설명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파일:대한민국 국기(1949-1997).svg 6.25 전쟁의 전투 및 작전 목록 파일:북한 국기.s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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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인도교 폭파
발생 일시
1950년 6월 28일
발생 원인
1. 인민군 전차 8대의 서울 진입을 보고받은
채병덕 총참모장의 오판
2. 갑작스러운 철수 명령으로 인한 대혼란
3. 우천, 등화관재로 인한 암야로 공병들의
통제 및 폭파조의 다리 위 상황 식별 난항
4. 폭파취소명령 전달 실패
발생 위치
서울특별시 용산구 한강대교
피해 규모
사망자 77 ~ 800명[1] 추정,
44,000명 규모의 국군 병력 와해,
군사장비 및 군수물자 유실
1. 개요2. 당시 상황
2.1. 폭파 전날의 방송
3. 오해
3.1. 미 군사고문단 장교의 사망자 추정 500~800명은 군인과 민간인 총합 추정수치3.2. 다리 폭파는 전체 폭파가 아닌 부분 폭파3.3. 한강인도교 폭파 사진3.4. 이승만과의 연관성3.5. 한강인도교 폭파와 서울시민들의 피란 문제
4. 논란
4.1. 폭파 당시 인명피해자 수치 및 신원
4.1.1. 미군이 입수한 폭파 후 인도교 영상4.1.2. 박종인 조선일보 기자의 연구 결과4.1.3. 신기철 인권평화연구소장의 연구 결과
4.1.3.1. 맹점
4.1.4. 황현필 역사강사의 주장
4.1.4.1. 맹점
4.1.5. 군인 인명피해자만 언급한 외신기사와 스털링 라이트 대령의 증언4.1.6. 군인과 민간인 인명피해자를 언급하는 증언4.1.7. 그 외 당시 상황을 묘사하는 증언
4.2. 폭파 시기
4.2.1. 조기 폭파가 명백하다4.2.2. 조기 폭파는 결과론이다
4.3. 국군 병력 상실4.4. 서울에 고립된 민간인의 '부역자' 처벌
5. 책임 소재
5.1. 폭파 명령의 배후
6. 폭파 이후7. 대중매체에서8. 참고/관련 자료9.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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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강인도교 폭파는 6.25 전쟁 이후, 서울이 함락 위기에 처해지자, 당시 육군 총참모장 채병덕 소장의 판단으로 1950년 6월 28일 새벽 2시 30분에 대한민국 국군한강인도교(현 한강대교)와 한강철교를 결과적으로 조기에 폭파한 사건이다(폭파 시기 문단 참고).

육군 총참모장 채병덕 소장은 6월 25일 국군이 창동선으로 후퇴했을 때, 공병감 최창식 대령을 불러, 한강교 폭파 준비를 지시했다. 전쟁 전 한강대교에서 폭파실습을 한 적이 있던 황원회 중위와 육군공병사관후보생들이 작업조를 맡아 구체적인 폭파계획을 수립한다.

채병덕 총참모장은 북한군전차가 시내로 진입했다는 보고를 받고 공병감 최창식 대령에게 한강교 폭파명령한 후 시흥(현재의 서울 금천구, 관악구, 경기도 광명시 일대)으로 향하였다.

6월 27일 오후부터 이미 준비를 마치고 기다리고 있던 작업조는 공병감의 명령이 떨어지자 3개의 철교[2]와 1개의 인도교[3]를 폭파하였다.

총참모장에게 권한을 위임받은 김백일 대령은 병력이 빠져나갈 시간이 필요하다는 주변 사단장의 건의를 듣고 폭파명령을 취소하나, 명령이 전달되기 전 단 몇분차이로 폭파가 진행되었다.

폭파로 인해 최외각 한강철교는 완파되었으나 장약 불발로 경부선 복선철교경인선 단선철교는 폭파되지 않았고 인해 북한군 전차들이 통과할 가능성 때문에 미군의 폭격으로 파괴하였다.

흔히 한강인도교 폭파 사건으로 부르지만 한강인도교(한강대교)와 한강철교만 폭파한 것은 아니며, 광나루에 있는 광진교 역시 같은 날 폭파되었다. 하지만 광진교의 지명도가 너무나 낮아서 이 사건은 알아도 광진교 역시 폭파되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적은 편이다.

이 사건으로 강북 이북에 고립된 수 많은 국군과 피란민들은 직,간접적인 상당한 피해를 보았으며, 대한민국과 국군의 흑역사 중 하나가 된다.

이후 전쟁의 전개는 한강 방어선 전투 참조.

2. 당시 상황

당시 대통령 이승만, 국방부 장관 신성모를 비롯한 대부분의 각료들은 이미 서울을 떠나 피란을 간 뒤였다. 이승만은 27일 저녁에 대전 충청남도지사[4] 관저에서 전국에 미국이 참전했으니 공산군에게 항복하라는 방송을 진행한다. 자세한 내용은 국민 여러분 안심하십시오 참고.

이러한 방송에 낚여 피란을 떠나지 않은 일부 서울 시민들 및 정치인들은 다음날 한강 교량들이 폭파되어 발이 묶이고 서울시가 북한군에 의해 점령되는 것을 지켜봐야 했다.[5]

당시의 전황에 대해서는 남과 북의 기록 모두 불분명한 부분이 있으나 다리가 폭파되던 당시에 북한군 주력은 아직 서울 외곽에 있었던 것으로 파악된다. 그러나 국군 공병은 서울을 북쪽에서 차단하던 임진강과 북한강, 지류의 다리들의 폭파에 대부분 실패했다.[6] 임진교, 영중교, 만세교, 의정부교, 창동교, 소양강교가 모두 인민군에 넘어가 탱크가 서울로 진입하는 것을 저지하지 못한다. [7] 이때 일부 교량 폭파를 지휘하던 사람은 추후 한강다리 폭파를 맡은 최창식 대령이였다. 육군 수뇌부는 연속되는 다리 폭파의 실패와 탱크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조급해져서 급하게 한강 다리 폭파 계획을 수립하고 최창식 대령에게 임무를 맡기면서 실패하지 말라는 압박을 가한다.

비록 제7사단처럼 초전의 충격을 견디지 못하고 무너져 내린 부대[8]들이 많아 서울의 함락이 예견될 정도로 암울한 상황이었지만 반면 개성-문산의 경의선축을 성공적으로 방어하던 제1사단처럼 서울 방어를 위해 투입된 많은 아군부대들이 한강 북쪽에서 고군분투 중이었다. 또한 동부전선의 제6, 8사단과 옹진반도에서 퇴각한 육군본부 직할 독립 제17연대를 제외한 거의 대부분의 부대들이 이곳에 투입되어 있던 상황이었다.[9]

이후 채병덕 총장은 7사단이 창동선을 유지할 수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 장도영 정보국장을 파견했으나 7사단은 붕괴하고 있었고, 김종갑 7사단 참모장은 오늘 밤도 지탱하기 어렵다는 답을 하였다.[10] 직후 오전 11시에 채병덕 총장은 육본 참모와 재경 지휘관 연석회의를 소집하였고, 욱군본부 철수를 게획하였다. 채병덕 총장은 추가적으로 최창식 대령을 불러, 한강다리 폭파준비를 명령하였고, "이번에도 실패하면 총살이다" 라고 협박하였다.

이때라도 철수 준비를 질서정연하게 했으면 모르겠으나, 채병덕 총장은 미군 참전 소식을 듣고 다시 서울 사수를 결정해버린다, 심지어 신성모는 후퇴하라고 지시하였으나 이마저도 무시한다.[11]

28일 새벽 1시 인민군 전차대는 길음교 전방에 눕혀놓은 수십대의 차량 장애물을 돌파한 뒤 길음교로 진입하나, 공병부대는 길음교 폭파에 실패하고[12] 8대의 전차가 미아리 고개를 넘었다.[13] 이 보고를 접한 채병덕 총장은 육본의 재철수를 명령한다. 그러나 새벽시간이라 질서있는 철수는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웠으며, 육군본부는 시흥으로의 무질서한 철수를 시작한다.[14]

안 그래도 새벽시간에, 비도 오고 있었고 한강물이 불어나 있던 상황이라 부교 통행이 불가능하였고, 피난에 소극적인 사람들도 탱크 포격이 시내까지 닥치자 급하게 짐을 싸들고 나와, 인도교로 피란민이 몰려있었다, 설상가상으로 채병덕 총장의 무질서한 철수명령으로, 수 많은 군차량이 몰려들어와 인도교에 엄청난 교통체증을 야기한다. 그 와중에 공병들은 군 차량 등을 우선 통과하도록 통제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건너가는 속도가 느려, 수천명의 피란민들이 건너가지도 못하고 기다리고 있었다.

채병덕 총장은 새벽에 시흥으로 내려가면서 최창식 대령에게 폭파명령을 내린 것으로 추정된다.[15] 새벽 2시 30분 경 한강인도교와 한강철교, 경인철교가 폭파되었다. 인도교는 끊어졌지만 한강철교와 경인철교의 상행선은 건재했다. 채병덕 총장이 시흥으로 내려간 뒤 육본에서 권한대행을 맡았던 김백일 대령은 병력이 빠져나갈 시간이 필요하다는 주변 사단장들의 건의를 듣고 폭파 취소명령을 내려보냈지만, 불과 몇분 전에 다리에 도착하였고 공병의 제지에 막혀 명령이 전달되지 못했다.

폭파 직전에 공병들이 기존의 차량과 인파를 빼내고 추가적인 인파 및 차량이 폭파지점으로 못 들어오게 제지했다는 증언으로 보아 통제 활동은 확실히 존재했지만# 최창식 대령의 재판 기록을 보면 다시 통제를 뚫고들어오고 미쳐 빠져나가지 못 하고 남아있던 차량과 인파를 확인하지 못 하고 폭파가 진행된 것은 확실하며, 이로 인해 트럭을 타고 한 대씩 지나가고 있던 경찰 77명 외 인원 불명의 군인 및 민간인이 사망하였다.[16]

다리가 끊긴 것을 인지한 군인들과 피란민들이 나룻배에 수십명이 탑승하였다가 침몰하는 등 2차 피해가 야기되었다.

수 시간 후인 28일 아침 재차 한강철교 폭파를 시도하여 남단의 교대와 교각을 손상시켰으나 완파에는 이르지 못했고 하루 뒤인 29일 미 공군이 한강철교와 경인철교 상행선을 공습하기 시작하여 30일 아침 북한군 전차와 차량이 몰려있던 경인철교 상행선 절단에 성공했다.

한강다리를 폭파함으로써 한강 이북에 있던 부대들은 사실상 고립된 꼴이 되었고 서울 함락 과정에서 부대 건제가 와해된 상태로 대량의 장비를 망실한 채 소화기 정도만을 가지고 후퇴하게 되었다. 폭파되기 직전 간신히 한강을 건넜던 한 장교는 이 폭파가 북한군이 퇴로를 차단하기 위해 시행한 작전이라고 오인하고 '적군이 벌써 여기까지 손을 썼구나!'라고 탄식했을 지경이었다.

전쟁이 벌어지자마자 맥아더 극동군 사령관으로부터 주한미군 군사고문단(Korean Military Advisory Group, KMAG)을 도와 전황 파악을 하라는 명을 받고 긴급히 27일 한국에 입국한 처치(John H. Church) 준장은 미 증원부대가 올 때까지 서울에서 적극 시가전을 펼칠 것을 권고하였다. 그러나 육군본부는 다리를 성급히[17] 폭파함으로써 서울을 사수할 생각이 추호도 없음을 증명하였다. 외국군이 오히려 동맹국의 영토를 더 지키려 애쓴 어처구니 없는 사태가 일어난 셈. 처치 준장 뿐 아니라 다른 고문단 장교들 또한 어떻게든 서울을 사수하려고 필사적으로 애썼다.

그러나 전황이 급격히 악화되자 미 군사고문단(55명)은 미국인 종군기자 4명 - 뉴욕 타임스 소속 버튼 크레인(Burton Crane), 시카고 데일리 뉴스 소속 카이스 비치(Keyes Beech), 타임 매거진 소속 프랭크 기브니(Frank Gibney), 뉴욕 헤럴드 트리뷴 소속 마거리트 히긴스(Marguerite Higgins)을 포함하여 미 군사고문단장 직무대리 스털링 라이트 대령(W. H. Sterling Wright)의 지휘 아래 6월 28일에 새벽에 한강인도교를 통해 탈출을 시도한다.

이때 미 군사고문단 단원 중 해즐럿(Robert T. Hazlett) 대령과 하우스만(James Harry Hausman) 대위 등은 다리를 건너는데 성공하였고, 버튼 크레인, 카이스 비치, 프랭크 기브니 3명의 남성 종군기자들은 하나의 지프에 탑승하여 먼저 한강인도교 진입까지는 성공했지만 다리를 건너던 중 바로 앞에서 다리가 폭파되어 다시 강북쪽으로 되돌아간 후 배를 이용해 도강에 성공하여 수원으로 탈출하였다. 스털링 라이트 대령 이하 나머지 미 군사고문단원들과 마거리트 히긴스 종군기자는 한강인도교 근처에서 다리가 폭파되는 광경을 목격하고 역시 나룻배 등을 이용하여 도강에서 성공하여 수원으로 탈출하였다.[18]#

2.1. 폭파 전날의 방송

국민 여러분 안심하십시오 참조

3. 오해

3.1. 미 군사고문단 장교의 사망자 추정 500~800명은 군인과 민간인 총합 추정수치

주한미군 군사고문단(Korean Military Advisory Group, KMAG) 소속 장교의 한강인도교 폭파 사망자 500~800명 추정수치는 완전히 민간인 사망자만의 추정수치가 아니며 군인, 경찰, 민간인 등 다리 폭파로 사망했을 모든 사람들을 총합해서 추정한 수치이다.

먼저 로이 E. 애플먼(Roy E. Appleman)이 편찬하고 미 육군 군사연구소가 발행한 6.25 전쟁사 'South to the Naktong, North to the Yalu(낙동강에서 압록강까지)'에 기술된 내용이기 때문에 미 군사고문단 장교가 실제로 이런 증언은 남긴 것은 팩트이다.

원문 p. 33을 보면 '한 고속도로 교량의 두 경간을 남쪽 물 속으로 떨어뜨린 거대한 폭발은 2시 15분쯤에 군인들과 다리에 모여든 민간인에게 아무런 경고도 없이 발생했습니다.' 라는 내용으로 'military personnel and the civilian' 즉 군인과 민간인이라는 표현이 정확하게 기록돼 있다. 또한 'Korea: The Untold Story of the War'를 살펴보면 더욱더 명확하게 설명이 되어있다. 즉 시기는 정확히 안 나오지만 아마 수복 후 다리를 보수할 때, 미 군사고문단 장교가 군인과 민간인 합쳐서 500~800명이 폭사하거나 익사했을 것이라고 추정했던 발언이 미군 자료에 남아 있어서 미국의 6.25 전쟁사 책에 인용되고 있다.
The gigantic explosions, which dropped two spans of the Han highway bridge into the water on the south side, were set off about 0215 with no warning to the military personnel and the civilian population crowding the bridges. Two KMAG officers, Col. Robert T.Hazlett and Captain Hausman, on their way to Suwon to establish communication with Tokyo, had just crossed the bridge when it blew up—Hausman said seven minutes after they crossed, Hazlett said five minutes. Hausman places the time of the explosion at 0215 Several other sources fix it approximately at the same time.
Pedestrian and solid vehicular traffic, bumper to bumper, crowded all three lanes of the highway bridge, In Seoul the broad avenue leading up to the bridge was packed in all eight lanes with vehicles of all kinds, including army trucks and artillery pieces,as well as with marching soldiers and civilian pedestrians.
The best informed American officers in Seoul at the time estimate that between 500 and 800 people were killed or drowned in the blowing of this bridge.
Recontructing the disaster later, KMAG officers estimated that from 500 to 800 soldiers and civilians were killed by the blast or drowned when they fell into the river.

그리고 국방부의 전사편찬위원회의 6.25 전쟁 전사는 'South to the Naktong, North to the Yalu' 내용을 엄청나게 인용한 책이므로 여기에도 500~800명 추정수치가 들어가 있지만 이 책에도 이 추정수치가 민간인 사망자 추정수치라고 표현하지 않았으며 문맥 상 다리 위에 있다가 인명피해를 입었다고 추측되는 모든 사람들의 추정수치의 의미로 인원이라고 표현하였다.
당시 헌병과 공병들의 제지에도 불구하고 용산쪽에서 이곳까지 밀어닥친 차량과 인파가 폭발현장(중지도에서 세번째 교각)으로 밀리는 바 되어 인명피해가 가중된 것으로 보였는데 그 손실은 차량 50대, 인원 500~800명에 이른 것으로 목격자에 의해 추산되기도 하였다.

덧붙여 미 군사고문단이 미국인 종군기자 4명 - 뉴욕 타임스 소속 버튼 크레인(Burton Crane), 시카고 데일리 뉴스 소속 카이스 비치(Keyes Beech), 타임 매거진 소속 프랭크 기브니(Frank Gibney), 뉴욕 헤럴드 트리뷴 소속 마거리트 히긴스(Marguerite Higgins)과 함께 한강인도교로 탈출을 시도했을 때, 미 군사고문단장 직무대리 스털링 라이트 대령(W. H. Sterling Wright)은 한강인도교 근처에서 폭파되는 광경을 목격하고 다시 강북으로 돌아와서 마거리트 히긴스 종군기자에게 인명피해에 관해서는 오직 군인 사망자에 대해서만 언급하였고 민간인 사망자에 대해서는 언급을 하지 않았던 것으로 마거리트 히긴스의 비망록 'War in Korea'에 기록되어 있다.
They blew that bridge with truckloads of their own troops on the main span. They've killed hundreds of their own men.

결론적으로 한강인도교 폭파 사망자 추정수치인 500~800명은 군인과 민간인들을 모두 포함한 추정수치이다.

3.2. 다리 폭파는 전체 폭파가 아닌 부분 폭파

한강인도교 전체를 폭파시켜서 날려버린 것으로 오해할 수 있으나 6월 28일 폭파된 한강인도교 다리 부분은 중간에 위치한 노들섬 당시 중지도로부터 강남 방향으로 2번과 3번 상판이다.

좀 더 정확히 설명하자면 노들섬(중지도)에 인접한 1번 상판부터 강남쪽 강변에 인접한 6번 상판까지 총 6개의 상판 중 2번과 3번 상판이 폭파되어 무너져내렸고 5번 상판은 6월 28일 이후 미 공군이 폭파시켰다.

다큐멘터리 등의 한강인도교 폭파 기록 영상을 보면 노들섬(중지도)과 인접한 1번 상판에서도 상당한 피해가 확인된다.

참고로 사진 상에서 한강인도교의 특정 지점이 강북과 강남 어느 방향에 가까운 구간인지 헷갈릴때는 한강인도교가 중간의 노들섬(중지도)을 기준으로 노들섬-강북 구간은 게르버교(Gerber bridge) 그리고 노들섬-강남 구간은 아치교(Arch bridge)로 이렇게 구조가 다르기 때문에 다리 구조만 확인하면 된다. 즉 한강인도교의 폭파 지점은 아치형 다리였으므로 강남 방향에 가까운 구간인 것을 쉽게 파악할 수 있다.

3.3. 한강인도교 폭파 사진

파일:attachment/k28_12040357.jpg

한강인도교 폭파 관련 기사 등에 삽입되어 흔히 한강인도교 폭파 전 상황을 촬영한 사진으로 알려졌던 위의 사진은 사실 1950년 12월 4일 평양의 피란민들이 대동강 철교를 통해 대동강을 건너는 사진이다.

1950년 12월 4일 평양 철수 당시 종군기자 맥스 데스퍼(Max Desfor)가 촬영한 것이다.[19] 중국 인민지원군의 공세로 인해 유엔군이 평양을 포기하고 남쪽으로 철수하자 평양시민들이 폭격으로 무너진 다리를 건너 남쪽으로 피란을 가는 모습이다.[20]

3.4. 이승만과의 연관성

현대의 통념과 마찬가지로 수십년간 대중문화 속에서는 이 사건에 대해 이승만 정부와 군부의 책임을 강조해왔다.[21] 즉, 수십년간 일관되게 정부의 책임이라는 인식이 사회를 지배하였다.

이는 정부와 군부라는 주체로서 당연히 옳은 논증이나, 이 사건을 이승만 정부로서가 아닌 개인에 대한 비난거리로 왜곡하여 왔다는 것은 사건의 본질을 호도할 수 있다.[22] 심지어 잘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이승만이 일부러 지시했다', '민간인을 고의로 죽였다' 라는 이야기도 비판 없이 나돌았다.

실제로 전개를 자세히 살펴보면, 이승만은 이 사건에 대해 직접적인 지시를 내리지 않았고, 깊이 관여한 인물은 신성모 국방부장관, 채병덕 육군 총참모장이다.[23] 이들을 포함한 국군수뇌부에서 엄청난 오판을 연속적으로 저질렀기에 발생한 일에 가깝다. 이승만은 자신은 군사 전문가가 아니라는 이유로 자기가 군 작전에 직접 개입하는 것을 상당히 꺼렸고 자문을 항상 구했기에, 전쟁 초기에는 직접적인 군사지시를 하지 않았다. 그래서 인도교 폭파 지시를 이승만이 했다는 것은 더더욱 말이 안된다.

이승만은 이미지와 달리 전쟁 초기 활발하게 움직였으며 전쟁에 상당히 많은 관심을 가졌다.[24] 또한 초기 신성모의 낙관적인 보고를 들은 후에는 서울 방어 의지를 보이기도 하였다. 그리고 다음날 6월 26일 국군수뇌부들의 회의를 모집한 것은 국회가 아니라 이승만이다.[25][26]

또한 전쟁 초기 미국 참전여부도 지금에서야 당연하지만, 고문단 참모장 라이트 대령 등의 언행 등으로 미국이 한국을 버릴 것이라는 회의론이 많았다. 채병덕 총장도 미군 참전여부에 따라서 철수 명령을 바꿀 정도로 예측하기 힘들었다.

이승만이 문제가 되는 부분은 서울 시민에 대해 피난권고를 하지 않았고, 비상조치 4개만 발동했다는 점, 국군과 보훈처의 기만방송의 기만방송을 방조했거나 지시했다는 의혹을 받는 점. 27일 새벽에 갑자기 피난한 점이며, 인도교 폭파와는 전혀 다른 논점이다.[27] 이승만이 피난 이후 서울로 다시 올라가려 했다는 사료는 미국측과 한국측의 사료로 교차검증되기에, 적어도 무책임하게 부산까지 도망치려 했다는 비난은 근거가 적다.[28][29]

즉 이승만은 국군통수권자 및 대통령, 인사권자였으며, 피난권고를 내리지 않은 점을 볼 때 책임을 피하기 어렵다. 그러나 당시 급박한 상황 전개 및, 도를 넘은 군 수뇌부의 삽질 및 허위보고 등을 감안하면, 한강교 폭파를 이승만 개인적인 문제로 돌리는 것은 옯지 못하다. 이 사건은 이승만의 잘못된 군 인사, 군부 상위 인사들의 무능 및 놀라운 연속적인 오판으로 인한 대재앙이였다고 보는 것이 맞다.

또한 여기서 생각해 볼 점은 이미 국군은 서울을 포기하고 인민군이 계속 국군을 따라 남쪽으로 추격해 내려오며 전투하는 상황에서 서울 시민들이 국군과 함께 남쪽으로 피난을 가게되면 피난민들이야말로 계속해서 위험한 전선에 노출되는 상황이 된다. 또한 인민군을 피해 피난을 갔다가 나중에 인민군에게 붙잡히면 반동분자로 몰릴 가능성도 있다. 그러니 국군이나 경찰 가족이 아닌 일반 시민이라면 피난을 가지 않고 그냥 서울에 남아 인민군 치하에서 살아가는 것이 더 안전한 상황이다. 수도인 서울이 함락되면 전쟁이 곧 인민군의 승리로 끝나고 2년간 분단됐던 남북한이 다시 통일된다고 인식이 대부분이었으므로 대부분의 서울 시민들은 이승만 정부가 뭐라고 하든 굳이 피난을 갈 이유가 없었다. 인민군 장교들은 과거 독립군 출신이나 지식인 엘리트 층이 많아서 서울에서도 인민군에 대한 일반 대중의 인식은 그리 나쁘지 않았다는 점도 피난 갈 이유가 별로 없었음을 말해준다. 실제로 6.25 전쟁에서 대거 피난민이 발생한 것은 우익 계열 민간인과 좌익 계열 민간인들의 부역활동에 대한 대량 보복학살이 있고난 다음인 1.4후퇴 때부터다. 이것은 어느 나라나 마찬가지로, 제 2차 세계대전의 경우도 외국군이 침공해들어왔다고 해서 시민들이 자국군대와 함께 대거 피난을 가는 사례는 드물었다.

3.5. 한강인도교 폭파와 서울시민들의 피란 문제

"이승만이 다리를 폭파하여 피란을 가지 못했다"라는 기술도 사실관계가 약간은 다른 미묘한 문제이며 이들의 정체성과 관련이 깊다.

6.25 전쟁 당시의 피란민의 정체성은 매우 복잡한 문제로, 김동춘 등의 연구사료[30]에 따르면, 144만 6,000명의 서울시민 중에서 40만 명이 수도가 인민군에게 점령되기 전에 남쪽으로 빠져나갔으며, 그 와중에 8할이 월남동포(지금으로 치면 탈북민) 이였으며, 나머지 2할이 정부고관, 우익정객, 자유주의자 등이였다고 하며,[31] 전쟁 직후의 피란은 분명 정치적, 계급적 성격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32][33]

서울에 잔류한 100만여 명의 사람들은 엘리트층과 중간층들의 잔류 목적이 크게 달랐는데, 잔류한 엘리트층은 인민군의 남하를 적극적으로 환영한 좌익세력 뿐 아니라, 이승만 정권에 비판적이였던 사람, 반이승만파, 중도우익들이 혼합되어 있었다고 기술되어있다.[34] 그러나 확실한 반공우익이였지만 책임의식 떄문에 서울에 잔류한 엘리트층도 있었는데 조헌영이 대표적이며, 이들은 상당후 북한에 납치되거나 행방불명되었다.

말단 공무원 혹은 동네 구장 정도의 직책을 맡았던 사람들, 일제 강점기 동안 이장 등을 지낸 사람은 친일파로 분류될 것이 두려워 피란가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이들도 "여자는 살려준다"는 소문을 믿고 여자들은 그냥 남겨둔 경우가 많았다. 이런 판단을 한 것은 농사철에 집에 돌아올 생각들이 많았기 때문에 적극적인 피란을 감행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인민군이 남하 하더라도 잔류한 사람들은 대체로 인민정권이 들어서도 크게 피해를 입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자영업자, 중소기업가, 지식인 등 중간층에 속했음을 확인할 수 있으며, 미국-이승만 체제나, 소련-김일성 체제 어느 쪽에서도 강한 이해관계가 없이 '인민정권'이 들어서더라도 특별히 잃을 것이 없었기 때문에 이러한 선택을 한 사람들이 많았다.

따라서 이승만 정권이 다리를 폭파해서 서울 시민들 전부가 피란을 가지 못했다 라는 말은 너무 단순화된 상황 이해이다.

하지만 다리 폭발이 문제가 아니였다고 보는 시각도 상당히 잘못된 것인데, 국방부 및 이승만의 기만 방송을 믿어서 적극적으로 피란 활동에 나서지 않았거나 늦게 나선 인원들이 상당히 많았고, 피란을 가던 사람들이 한강교 폭파로 실제로 피해를 당했기 때문이다.

4. 논란

"한강인도교 폭파. 1950년 6월 28일 새벽 2시 30분, 북한군이 미아리 저지선을 제치고 서울로 입성한 지 두 시간 만에 한강철교는 엄청난 섬광과 천지를 뒤엎는 듯한 폭음과 함께, 그렇게 두 동강이 났다. 그러나 이것은 참으로 성급하고도 무계획적인 결정이었다. 비록 적군이 가까이 온다고 해도 한강다리 앞에서 서울역까지 수많은 피란민들이 몰려있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 한강인도교 폭파는 당시 수백만 서울시민을 아무 대책 없이 적 치하에 묶어놓게 되었고, 이로 말미암아 대부분의 시민들이 공산화 됐다. 그것은 참으로 참담한 비극이었다."
내레이션 - 야인시대 82화 中에서. 2분 58초부터 보면 된다.

4.1. 폭파 당시 인명피해자 수치 및 신원

당시 급박한 전황으로 폭파 당시 인명피해자 수치 및 신원과 관련하여 현재와 같은 시신 수습 등을 통한 이론의 여지없이 누구나 신뢰할 수 있는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통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즉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통계가 없기 때문에 논란이 시작되었고 앞으로도 완벽하게 해결될 수 없다.

전해지는 증언 등을 토대로 군인, 경찰, 민간인 총합 대략 500~800명 사이의 사망자 혹은 민간인만 500~800명 사이의 사망자 추정수치가 전해져 내려왔고 이 추청 수치가 무려 수십년간 지속적으로 책, 언론 등에 인용되어 이승만 정권을 비판하는데 사용되었으며, 이게 사실상 그럴듯하게 보이는 유일한 수치였기 때문에 온갖 사료에 그대로 인용되고 단순 추정수치가 확정수치로 변하기까지하는 문제가 발생하였다.

또 다른 문제는 증언의 신뢰성이다, 증언마다 상황 및 규모가 조금씩 다른데, 결론을 말하면 증언에 나오는 수치의 신뢰성은 낮다. 그 원인은 새벽 시간에, 우천에 등화관제도 실시하고 있었어서 암야에 가까웠고 그 혼란속에서 눈대중으로 인명피해자들의 정확한 규모를 파악하는 것은 인간으로서 불가능하며, 수치는 전부 느낌적으로 추산한 것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최창식 대령의 법제기록을 보면 당시 폭파조들도 차량이 다리 위에 있는것이 식별되었는지에 대한 여부조차도 의견이 갈렸다.

또한 수십년 뒤 회상 형식의 증언은 세월의 영향으로 과장되거나 왜곡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이런 이유들로 관련 증언을 읽을 때 주의해야 한다.

최근에는 사망자 수치 및 신원과 관련된 당시 사료들의 발굴로 통설과 반대되는 "민간인 인명피해자는 없었다." 내지 "민간인 인명피해자가 있기는 했지만 인명피해자의 대부분은 군인과 경찰이었다." 등 새로운 연구 결과 발표로 정확한 인명피해자 수치와 그 수치내 신원별 비율은 더욱더 산출하기 어려워진 상황이다.[35]

현재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폭파에 의한 직접적인 사망자 규모는 신원이 확인된 종로경찰서 소속 경찰관 77명 포함, 다리 통제 및 트럭 등으로 이동 중이었던 군인 및 규모 불명의 민간인들이다.

한편 대중적인 인식은 종전 이후, 수십년간 민간인 인명피해자가 있었다고 기억하고 있으며, 사회문학적[36]으로 꾸준히 제기되어 왔다, 따라서 그 규모는 논란이 되지만 인도교 폭파 작전은 적절한 교량 통제가 이뤄지지 않은 상태에서 진행되었고 하기한 군 장교 및 각계각층의 증언들을 수합해볼 때 적지 않은 수의 민간인 인명피해자가 분명히 있었음은 정황상 매우 유력하다.[37]

4.1.1. 미군이 입수한 폭파 후 인도교 영상


북한군이 6월 28일 이후 한강인도교 점령 후 선전용으로 촬영항 영상을 평양 함락 이후 미군이 노획한 영상으로 증언 등이 아닌 객관적으로 당시 상황을 파악할 수 있는 유일한 자료이다.

일단 이 영상에서 사망자들은 철모를 쓰고 죽은 사람들과 군복 바지 등이 보이는 바, 군인들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철모를 쓰지 않은 사람들과 군복이 아닌 다른 옷을 입고 있는 사람들도 있는 바, 민간인이 섞여져 있는지 여부는 파악이 안 된다.

4.1.2. 박종인 조선일보 기자의 연구 결과



박종인 기자는 위의 영상에서 한강인도교 폭파와 관련된 수많은 증언과 정황을 종합적으로 재구성하여 폭파로 무너진 중지도(노들섬)에서 강남 방향의 2번과 3번 상판에서 얼마나 많은 인명피해자가 발생하였는지 분석하였고 폭파로 무너진 두개의 상판 크기에 비추어 여기에 인파가 완전히 꽉 차 있었다고 가정하면 미 군사고문단 장교의 추정 수치인 500~800명에 근접하지만 이는 당시 정황으로 볼 때 차이가 있으며 결론적으로 정확한 인명피해자 수치는 산출하기 어렵지만 사망자의 다수는 군인과 경찰이며 (극)소수가 민간인이라는 연구 결과를 내놓았다.

박종인 기자는 위의 영상에서 신기철 인권평화연구소장의 연구 결과의 맹점을 지적 하였고 황현필 역사강사 주장의 맹점 역시 이미 기사영상으로 지적을 하였는데 현 시점에서 가장 객관적인 연구 결과로 보인다.

4.1.3. 신기철 인권평화연구소장의 연구 결과

2006년부터 2010년까지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에서 활동하며 6.25 전쟁에서 국군과 경찰 등 국가 권력에 의해 저질러진 민간인 학살 사건들을 전문적으로 조사하였던 신기철 인권평화연구소장 역시 2014년 이전 한강인도교 폭파 당시 수많은 민간인들이 사망하였다고 주장하였지만 2014년 발간 6.25 전쟁 민간인 학살 조사서 '국민은 적이 아니다'(pp. 71–74)[38] 그리고 2016년 발표 소논문 '기록과 기억, 그리고 진실'(pp. 6–7)#[39]# 에서 재조사를 통한 정확한 인명피해자 수치는 밝혀내지 못했지만 사망자 중에서 민간인 사망자는 없거나 경미했을 것이라는 연구 결과를 발표하였고 요지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현재 알려진 500~800명 사이의 사망자 기록은 미 군사고문단 장교의 증언 형태로 전해진 자료만 존재할 뿐 어떻게 500~800명의 추정 수치가 산출되었는지에 관한 실체적 근거자료가 존재하지 않으며, 당시 대한민국 정부에서 사고 조사를 통해 산출한 사망자 수치 등과 교차 검증이 이루어진 수치가 아니다. 그리고 미 군사고문단 장교 역시 500-800명의 사망자를 전부 피란민이라고 특정하지 않았으며 군인과 민간인을 모두 합한 추정 수치인데 어느 순간 500~800명의 민간인 사망 확정수치로 확대·재생산 되어 버렸다는 것이다.

즉, 단순히 한강인도교 폭파에서 군인과 민간인을 합쳐 500~800명 사이의 사망자가 발생한 것으로 추정했다는 미 군사고문단 장교 등의 증언이 어느 순간 실제로 조사를 해서 발표된 이론의 여지없는 신뢰할 만한 사망자 확정수치로 그리고 이 사망자들의 신원이 전부 피란민으로 둔갑했다는 것이다.

(2) 고든 L. 로트먼(Gordon L. Rottman)의 2006년 저서 '인천 1950(Inch'on 1950)'에 수록된 사진과 설명을 보면 당시 한강인도교는 피란민으로 위장한 북한군 파괴공작원의 활동을 우려하여 피란민의 한강인도교 사용을 원천적으로 금지시키고 인도교 옆의 부교를 통해 이동시켰다. 한강인도교의 부교 존재는 임인식 국방부 정훈국 사진대 대장의 사진으로도 증명이 되며 관련 증언도 남겼다.#

위와같이 피란민의 한강인도교 통행은 엄격하게 통제되어 있었으며 이러한 통제 활동으로 용산의 육군본부에서 폭파 지휘부가 있던 노량진의 남한강파출소에 직접 방문하여 폭파 중지 명령을 하달하려던 육군본부 작전국장 장창국 대령과 작전과장 정래혁 중령조차 중지도에서 헌병과 공병들의 제지로 폭파가 예정된 중지섬과 강남 사이 다리 구간에 진입하지 못할 지경이었는데 수많은 민간인들이 마음대로 진입하여 건너다가 폭사했다는 사실에 강한 의문을 제기하였다.

신기철 인권평화연구소장의 저서와 소논문에는 제시되어 있지 않지만 1964년 최창식 공병감 재심에서 당시 폭파 작전을 수행했던 이창복 대령(당시 중위)는 폭파 직전 다리 양쪽에 교통 정리 임무를 맡은 병사들을 배치하여 인명피해가 크지 않았다는 증언#을 하였고, 목격자 이창녹 소위는 폭파 10분 전 다리 위의 차량과 인파를 빼내고 더 이상 진입하지 못 하게 강력한 통제 때문에 차량 대열이 멈추고 공백이 잠깐 생겼는데 이때 폭파 지점이 완전히 비워진 줄 오판하고 통제를 뚫고 들어온 차량 등을 보지 못 한채 폭파가 실행되면서 인명피해자가 발생하였다고 증언#한 것으로 보아 통제 활동은 확실히 존재하였다.

(3) 시민단체 중심으로 한강교 부근 민간인 희생자 추모제를 열고 있는데 이는 민간인 사망자에 대한 실체적 근거자료가 없는데도 이승만 정부의 잔인성을 드러내기 위해 믿고 싶은 것만 믿는 군중심리로 보이며 최종적으로 한강인도교 폭파 당시 500~800명 사이 민간인 사망자가 발생했다는 기록은 사실이 아니라고 강조하였다.

최종적으로 신기철 인권평화연구소장의 연구 결과를 정리하면 한강인도교 폭파 당시 민간인 사망자는 거의 없었으며 만약 500~800명 사이 사망자가 발생한 것이 진실이더라도 대부분 군인과 경찰 사망자로서 민간인 사망자는 없거나 경미했을 것으로 결론지었다.
4.1.3.1. 맹점
(1) 부교
한강인도교가 아닌 한강 철교 아래 부교의 존재는 국방부 정훈국 사진대 대장 임인식이 촬영한 사진, 신원불명의 미국인이 촬영한 사진 총 2장으로 확인되는데 정확한 사진촬영 일자는 파악하기 어렵다.# #.인도교 옆 부교 사진은 1.4 후퇴 때 찍은 사진 밖에 없고 당시 인도교 옆 부교의 존재는 간접 증언밖에 없다.[40]

또한 북한군 침공 당시에 한강에 놓인 부교를 군인이나 경찰 같은 정부 쪽 관계자들이 설치해 주었다는 기록은 현재까지 확인되지 않는다.[41][42] 그런 이유로 인해 한강의 부교는 정부가 아니라 피란을 가려던 민간인들 스스로가 뗏목과 판자떼기 등을 연결해서 만들었다고 추정된다.

한강인도교 옆의 부교 존재는 당시 임인식 국방부 정훈국 사진대 대장의 군일기에 따르면 임인식은 한강대교 근처로 피난하기 위해 이동하였으나, 다리가 폭파되어 부교를 잡고 중간 섬 까지 건넜고 거기서 부터 나룻배를 타고 도강하였다고 진술한다.[43] 임인식은 이후 폭발하는 철교를 멀찍이서 촬영했기 떄문에 철교 쪽 부교를 말한다고 볼 수 없다.

여기서 부교가 어떻게 되었는지 추론할 수 있는데, 임인식의 증언에 따르면 강물 속으로 들어가 (즉 잠수하여) 부교를 손으로 잡아 건넜다고 기술되어 있다. [44] # 동시에 당시 인도교에 있던 전재구 중위의 증언에 따르면 어제 밤의 비로 강물은 누렇게 불어나 있었고 배는 보이지 않았다[45] 라고 증언되어 있는데 이를 종합하면 부교는 강물이 불어나서 물 속에 잠겨 있었던 것을 추정된다.[46]

위 정황에 따르면, 통제가 힘들었을 가능성이 크고, 밤중 갑작스러운 정전과 포격소리에 패닉에 빠진 피란민들은 단체로 한강교쪽으로 몰려들었을 가능성이 있으며, 패닉에 빠진 상태이면 통제 불능 사태에 빠졌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이를 뒷받침하는 증언이 임인식 증언 뿐 아니라 아래 단락에 여럿 존재한다.

따라서 여러 정황을 종합해보면, 폭파를 담당하던 군인들이 통제를 하였을 정황은 분명하나 제대로 되지 않았고, 새벽이였던 정황, 강물이 불어나있던 정황, 부교가 없어져있던 정황 등을 고려했을 때 겁에 질린 피란민들이 통제를 벗어나서 인도교에 들어갔을 가능성이 있으며 폭파 당시 민간인 인명피해가 발생하였을 가능성이 높다.

(2) 이창복 중위의 증언
2013년 이창복 중위의 증언은 1964년과 비교했을 때에 약간 달라졌다. 1964년 당시에도 신문 기사를 보면 이창복 중위의 증언이 최상덕 대령에게 유리한 증언이라는 사실이 언급되고 있는데, 2013년에는 당시 인원이 부족해서 공포탄까지 쏘며 막으려 했지만 차량과 인마를 제대로 통제할 수 없었다는 내용이 추가, 좀 더 구체적 증언을 한 것이다.# 그런데 사람이 얼마나 죽었는지 알 수 없고, 그날 새벽 다리 밑에 시체가 둥둥 떠 있거나 하는 광경도 없었어요.”이러한 인명피해자에 대한 모호한 증언도 함께 남겼다.

간단히 말해서 양쪽 다리에 1개 분대 정도의 인원을 배치해서 폭파 직전에 통제를 시작한 것은 사실이나 인원 부족으로 인하여 제대로 된 통제가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된다.

4.1.4. 황현필 역사강사의 주장

황현필 역사강사는 "'건국전쟁'의 왜곡 5 - 한강인도교 폭파 때 민간인 희생이 없었다는 거짓말."이라는 영상에서 미 육군 군사연구소가 발행한 6.25 전쟁사 'South to the Naktong, North to the Yalu(낙동강에서 압록강까지)', 국방부 공문, 증언 등을 통해 한강인도교 폭파 당시 민간인 인명피해자가 많았다는 결론을 내리며 과거 통용되었던 민간인 사망자 500-800명 설을 지지하고 있다. 참고로 처음에는 사망자 1,000명 설을 주장했었다.#
4.1.4.1. 맹점
(1) 국방부 공문 (6분 20초~6분 46초)
국방부의 6.25 전쟁 60주년 기념사업단에서 민간인 사망자를 500~800명으로 기재하여 서울특별시에 보낸 협조공문을 공개하면서 국방부에서 한강인도교 폭파 당시 민간인 사망자를 500~800명으로 공식화한 것처럼 설명하였다. 그러나 공문에 첨부된 관련 근거인 '한국전쟁사 제1권' p. 547를 찾아보면 인명피해자가 민간인으로 특정되어 있지 않다. 즉 국방부 공문이 엄밀하게 오류가 있었던 셈이다.
당시 헌병과 공병들의 제지에도 불구하고 용산쪽에서 이곳까지 밀어닥친 차량과 인파가 폭발현장(중지도에서 세번째 교각)으로 밀리는 바 되어 인명피해가 가중된 것으로 보였는데 그 손실은 차량 50대, 인원 500~800명에 이른 것으로 목격자에 의해 추산되기도 하였다.

(2) 최창식 공병감 법정기록 (6분 56초~9분 4초)
법정기록을 첨부하여 설명하고 있지만 법정기록답게 예를들어 다리 위를 건너던 수많은 민간인들이 있었지만 폭파시켰다 이러한 구체적인 표현이 없고 "시민에게는 통고하지 않았다", "일반시민들에게 다리가 폭파될 것을 주지시키지 않았다" 등 언제 시점의 통고와 주지를 의미하는지 모호한 표현들만 나온다.

또한 최창식 공병감 판결문 전문을 살펴보아도 다리 폭파로 인한 직접적인 민간인 인명피해자에 대한 기록은 나오지 않는다.

(3) 'South to the Naktong, North to the Yalu'의 한강인도교 폭파 기술 부분 번역 (9분 5초~9분 48초)
로이 E. 애플먼(Roy E. Appleman)이 편찬하고 미 육군 군사연구소가 발행한 'South to the Nakdong, North to the Yalu'에서 한강인도교 폭파 기술 부분의 국어 번역문을 가져와 설명했는데 번역 오류 및 왜곡이 엄청 많다. 참고로 이 번역문은 1963년 육군본부 작전참모부와 1984년 육군본부 군사연구실에서 발행한 공식 번역서 '낙동가에서 압록강까지'에서 발췌한 내용이 아니고 민간인 인명피해자를 강조하는 한강인도교 폭파 관련신문 기사 등에 삽입되어 돌아다니는 출처 불명의 번역문으로 황현필 역사강사가 자신의 주장을 전달하기 위해 영상 콘텐츠에서 'South to the Nakdong, North to the Yalu' 원문을 일부러 사용 안 했을 합리적 의심이 든다.
미국 기자 3명은 한강인도교가 폭파될 때 맨 앞에서 다리를 막 벗어나고 있었다. 뒤에는 4,000명 이상의 피란민과 군인들이 다리 위에 있었다. (새벽) 2시30분경 오렌지빛 불이 캄캄한 하늘에 번쩍이고 땅이 뒤흔들렸다. 고막이 찢어지는 듯한 소리와 함께 다리 남쪽 두 개의 긴 아치가 출렁대는 시커먼 물속으로 떨어졌다. 최소한 500명 내지 800명이 공중으로 튀어 오르고, 다리 아래로 쏟아져 내렸다. 폭파 전 다리를 건너는 사람들에겐 아무런 사전경고도 없었다.

첫번째, 미국인 종군기자 3명 - 뉴욕 타임스 소속 버튼 크레인(Burton Crane), 시카고 데일리 뉴스 소속 카이스 비치(Keyes Beech), 타임 매거진 소속 프랭크 기브니(Frank Gibney)이 다리를 막 벗어난 후 폭파된 것처럼 번역되어 있으나 다리를 막 벗어난 후 폭파를 목격한 이들은 미 군사고문단 해즐럿(Robert T. Hazlett) 대령과 하우스만(James Harry Hausman) 대위로 완전히 잘못된 번역이다.

다리를 건너던 미국인 종군기자들의 지프 바로 앞에서 폭파가 일어나 이들 종군기자들 역시 다리를 건너지 못 하고 배를 이용해 도강에 성공하였다.

또한 미국인 종군기자 3명이 500~800명의 군인과 민간인을 모두 망라한 인명피해자를 증언한 것처럼 설명을 하였으나 해당 내용은 미 군사 고문단 장교의 증언이며, 미국인 종군기자 3명은 트럭에 탄 한국군들이 사망하는 것만 증언하였다. 이는 아래 '군인 인명피해자만 언급한 외신 기자들의 기사 및 증언' 문단에 첨부된 실제 원문 기사로 확인된다.

두번째, 미국인 종군기자 뒤로 다리 위에 4,000명이나 있던 것처럼 표현하고 있으나 원문에 의하면 "if one includes the long causeway on the Seoul side of the river." 조건이 붙어 한강 강변 둑길까지 늘어선 사람들을 포함했었을 때로 결국 다리 위와 다리 주변까지 합하여 군인과 민간인 등 총 4,000명이 존재하였던 것이다.

원문에는 미 군사고문단 장교들의 증언과 미국인 종군기자 3명의 증언이 아래와 같이 분리되어 있는데 황현필 역사강사가 사용한 번역문은 이 증언들이 섞여있어 증언의 주체들을 오해하게 만든다.

즉, 이 번역 오류를 알게 되면 후술하는 프랭크 기브니의 증언 오류 및 민간인 4,000명이 다리 위에 있었다는 잘못 알려진 사실은 해결된다.
The best informed American officers in Seoul at the time estimate that between 500 and 800 people were killed or drowned in the blowing of this bridge. Double this number probably were on that part of the bridge over water but which did not fall, and possibly as many as 4,000 people altogether were on the bridge if one includes the long causeway on the Seoul side of the river.
Three American war correspondents—Burton Crane, Frank Gibney, and Keyes Beech—were just short of the blown section of the bridge when it went skyward. The blast shattered their jeep's windshield. Crane and Gibney in the front seat received face and head cuts from the flying glass. Just ahead of them a truckload of ROK soldiers were all killed.

(4) 프랭크 기브니(Frank Gibney)의 증언 번역 (9분 49초~10분 22초)
다리 폭파를 직접 목격한 미국인 종군기자 프랭크 기브니의 증언을 국어 번역문으로 첨부했는데 일부 오류 번역이 포함되어 있다.
우리 앞에 있던 트럭에 타고 있던 군인들은 모두 목숨을 잃었다 죽은 자와 죽어가는 시체가 다리 위에 흩어져 있었고, 민간인과 군인도 있었습니다. 혼란이 완료되었습니다. 부상자들과 죽어가는 이들의 비명소리를 배경으로 수많은 난민들이 필사적으로 다리를 뛰어내려 밤하늘 속으로 흩어지고 있었다.
The ROK soldiers in the truck ahead all looked dead. Scores, hundreds of bodies of the dead and the gravley wounded lay scattered over the brigde. Other screaming refugees raced pell-mell for the north shore.
앞에 가던 트럭의 군인들은 모두 죽은 것 같고, 다리 위는 시체와 부상자로 뒤덮였다. 뒤에서 오던 피난민들은 아우성치며 모두 뒤범벅이 뒤어 한강 북쪽으로 되돌아 달음질쳤다.
All of the soldiers in the truck ahead of us had been killed. Bodies of dead and dying were strewn over the bridge, civilians as well as soldiers. Confusion was complete. With the cries of the wounded and the dying forming the background, scores of refugees were running pell-mell off the bridge and disappearing into the night beyond.
비교해보면 '프랭크 기브니'의 1982년 증언에서는 민간인 사망자에 대한 내용이 없으며 "뒤에서 오던 피란민들은 아우성치며 강북 방면 강기슰(north shore)로 도망쳤다."라고 기술되어 있었다. 그러나 2012년 코리아 타임스 기사에서는 "running pell-mell off the bridge"로 약간 모호하게 기술되어 있지만 이는 황현필 역사강사가 사용한 번역문처럼 피란민들이 다리를 뛰어내려 한강에 빠져 죽으면서 밤하늘 속으로 흩어지면 사라진 것이 아니고, 다리를 벗어나 강북 방면 강기슰(north shore)로 도망치면서 자신들의 시야에서 사라졌다(밤하늘 속으로 흩어지다)는 의미로 해석하는 것이 정확하다.

그 이유는 먼저 황현필 역사강사가 사용한 'South to the Naktong, North to the Yalu'의 번역문에 미국인 종군기자들이 다리를 막 건넌 후 폭파가 일어난 것으로 잘못 번역되어 있었기 때문에 황현필 역사강사는 프랭크 기브니가 강남에 도착해서 강북을 바라보면서 피란민들이 강북쪽으로 되돌아가다가 폭파되어 상판이 비어있는 부분으로 빠져 죽는 것을 증언한 것으로 오해하여 잘못 번역한 것이다.

그러나 프랭크 기브니 등 미국인 종군기자 3명이 탑승했던 지프차는 다리를 절반 정도 지나 강남 방향으로 중지도에 인접한 1번 상판에 위치해 있었으며 바로 앞에 위치한 2번과 3번 상판이 폭파로 무너져내려 그 결과 프랭크 기브니 등 미국인 종군기자 일행 역시 다리를 건너지 못 하고 배를 통해 도강하였던 것으로 자신들과 비슷한 위치나 뒤에 있던 피란민들이 폭파를 목격하고 다리 건너기를 포기하고 도망쳐서 강북 방면 강기슰(north shore)로 사라진 장면을 묘사한 것이다.

부연하자면 프랭크 기브니 등이 탑승했던 지프 위치인 1번 상판보다 훨씬 앞쪽으로 운좋게 폭파를 피했던 4번, 5번, 6번 상판의 피란민들은 계속 남쪽 방향으로 이어진 다리를 건너 강남 방면 강기슭에 도착하면 살 수 있었으며, 프랭크 기브니의 지프와 비슷한 위치 혹은 후방에 있었던 피란민들은 프랭크 기브니 일행처럼 다시 강북 방면 강기슭로 되돌아가면 살 수 있는 상황이었다.

결국 폭파로 인해 상판이 무너지면서 어쩔 수 없이 다리에서 떨어진 2번과 3번 상판의 군인과 피란민들 이외에는 이 사고로 인해 다리에서 한강으로 뛰어내릴 필요가 전혀 없는 상황이었으며 자신의 의지로 다리에서 뛰어 내리는 행동은 자살과 다름없는 일이기 때문에 이치에 맞지 않는다.

또한 영어적으로 살펴보아도 프랭크 기브니가 황현필 역사강사의 번역처럼 난민들이 '다리를 뛰어내려' 의미로 기사를 작성했다면 'jump off the bridge'로 충분히 명확하게 표현할 수 있었지만 난민들이 단순히 다리에서 벗어나기 위해 줄행랑 치다 혹은 도망치다의 의미인 'run off the bridge'로 표현하였다. 또한 다리를 뛰어내려 사라졌으면 문맥상 강 속으로 사라졌다고 표현해야 하는데 영어에서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자리를 떠나게 되어 안 보이는 상황(a situation in which a person is leaving or retreating without being seen)을 묘사하는 관용 표현인 'disappear into the night'를 사용했다.

(5) 국방부 정훈국 이창록 소위 증언 (10분 23초~11분 10초)
1970년 중앙일보 민족의 증언에 실린 증언 원문은 '피투성이가 돼 쓰러진 사람들이'이라는 문구로서 군인, 경찰, 민간인 인명피해자를 모두 망라하여 사람들이라는 표현으로 사용한 것인데 이를 '피투성이가 돼 쓰러진 피란민들이' 이렇게 조작하여 피란민 사망자를 의도적으로 강조하였다.
윤중위와 같이 걸어서 폭파현장까지 가 보았습니다. 북쪽 두 째 아치쯤이 끊겼는데 그야말로 눈뜨고 볼 수 없는 아비규환의 참상이에요. 그 많던 차량은 온데간데없고 파란 인불길이 반짝거리며 타오르는데 일대에는 피바다위에 살점등이 엉겨있어요. 더우기 소름이 끼치는 것은 피투성이가 돼 쓰러진 사람들이 손으로 다리 밑바닥을 박박 굵으며 어머니를 부르고 있어요.

(6) 한강인도교 폭파 현장 표지석 (11분 36초~12분 26초)
2016년에 설치된 한강인도교 폭파 현장 표지석에 기재된 피란민 800여명 사망 문구를 보여주며 이를 증거자료인양 제시했는데 이 시설물을 설치할 당시 무슨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인명피해자 재조사가 진행되었던 것도 아니고 민간인 500~800명 사망설을 인용해 여기에서 최대치인 800명을 기재한 것으로 증거자료로서의 가치는 전혀 없으며 이런 식으로 증거자료를 만들려면 의도적으로 무수히 만들 수 있다.

4.1.5. 군인 인명피해자만 언급한 외신기사와 스털링 라이트 대령의 증언

당시 지프로 다리를 건너던 중 눈 앞에서(기사에서는 in our faces 혹은 only 25 yards away로 표현) 폭파가 발생하여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지고 배를 이용해 한강을 도강했던 뉴욕 타임스 소속 버튼 크레인(Burton Crane), 시카고 데일리 뉴스 소속 카이스 비치(Keyes Beech), 타임 매거진 소속 프랭크 기브니(Frank Gibney) 이렇게 3명의 미국인 종군기자들이 있었다.

이들이 탑승한 지프는 중지도와 인접한 1번 상판 정도에 위치해 있었고 여기서 2번과 3번 상판의 폭파를 직접 목격한 것으로 보이는데 3명의 종군기자 모두 한강인도교 폭파 이후 기사를 작성했고 이 기사들은 당시 미국 여러 신문과 잡지사에 특별기고 형식으로 전재(轉載) 및 재배포되어 거의 동일한 내용의 기사가 미국의 여러 신문사와 잡지사에 게제되었다.

먼저 뉴욕 타임스 소속 종군기자 버튼 크레인이 작성한 뉴욕 타임스 기사(제목: South Koreans Kill Own Troops By Dynamiting a Bridge Too Soon;~ ")와 'The Charlotte Observer' 기사(제목: "Newsmen are caught in Bridge Blast")를 살펴보면 자신들의 지프 주위의 트럭들이 다리와 같이 폭파되면서 탑승해있던 수백명의 한국군들이 사망했다고만 보도하고 있으며 민간인 사망자에 대해서는 어떠한 언급도 하지 않았다.
(중략...), they blew up the bridge, killing several hundred of their own soldiers.
Our correspondents' jeep, only twenty-five yards from the blast, was protected by a large truckful of soldiers, all of whom died.

시카고 데일리 뉴스 소속 종군기자 카이스 비치가 작성한 'St. Louis Post-Dispatch' 기사(제목: "Reporter in Korea Has Feeling He saw Start of 3rd World War") 역시 자신들의 지프 주위의 한국군이 탑승한 트럭들이 다리와 같이 폭파되었다고만 보도하고 있으며 민간인 사망자에 대해서는 어떠한 언급도 하지 않았다.
A truckload of South Korean soldiers just ahead of us was blown to bits.
We stumbled over bodies of dead and dying soldiers as we retreated from the burning bridge toward enemy tanks in Seoul.

버튼 크레인과 카이스 비치의 기사들은 사고 이후 취재를 통해 타인의 목격담이나 전언 등을 바탕으로 작성된 것이 아닌 한강인도교를 건너다 바로 앞에서 다리가 폭파되는 광경을 직접 목격하고 직관적으로 보고 느낀 그대로 곧바로 작성하여 발행된 기사로서 한강인도교 폭파 관련 오염되지 않은 가장 가치가 높은 사료 중 하나이다.

그리고 이 기사에서 주의깊게 살펴보아야 할 점은 종군기자들이 수많은 민간인 사망자가 발생하는 것을 바로 앞에서 직접 목격했다면 과장을 했으면 했지 이런 민간인 피해 사실을 기사에 넣지 않을 이유가 전혀 없는데도 기사에서 민간인 사망자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다는 점이다. 즉, 이 기사만 본다면 다큐멘터리, 영화, 드라마 등에서 재현한 한강인도교 폭파 당시 상황처럼 인도교에 철수하는 군경과 피난 민간인이 빽빽히 뒤섞여 있는 다리 부분이 폭파되어 수많은 군경과 피난 민간인이 한꺼번에 몰살하는 이런 상황은 아니고 군경 수송 트럭이 밀집해 있던 다리 부분이 폭파된 것으로 보여진다.
The ROK soldiers in the truck ahead all looked dead. Scores, hundreds of bodies of the dead and the gravley wounded lay scattered over the brigde. Other screaming refugees raced pell-mell for the north shore.
조셉 C. 굴든(Joseph C. Goulden)의 1982년 저서 'Korea: The Untold Story of the War'에 실려있는 프랭크 기브니의 증언을 살펴보면 프랭크 기브니 역시 직접적인 인명피해자는 군인만 언급하고 있다. 그러나 폭파 지점 아래의 피난 민간인들의 경우 폭파되는 것을 보고 황급히 강북 방향 강기슰(north shore)로 피신했다는 증언에 비추어 피난 민간인들이 어느 정도 다리에 진입하여 통행 중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 'War in Korea' p. 26 (마거리트 히긴스, 1951년) - 미 군사고문단장 직무대리 스털링 라이트 대령의 인명피해자 관련 발언
They blew that bridge with truckloads of their own troops on the main span. They've killed hundreds of their own men.

결론적으로 다리가 폭파되는 광경을 직접 눈 앞에서 목격한 외신기자의 기사와 그리고 주변에서 목격한 미 군사고문단장 직무대리 스털링 라이트 대령의 증언만을 한정해서 분석해보면 트럭과 군인이라는 단어가 빠지지 않고 즉 일관되게 군인들이 탑승한 트럭들이 다리와 함께 폭파되었다고 증언하는 것을 보아 군인과 경찰들을 수송하던 트럭이 밀집된 다리 부분에서 폭파가 일어나서 인명피해자의 대부분은 군인과 경찰이 확실해 보인다.

덧붙여 현재까지 사료를 통해 소속과 신원이 명확하게 밝혀진 인명피해자는 종로경찰서 소속 이상훈 경위 외 경위 2명, 경사 10명, 순경 64명 등 총 77명의 순직 경찰관들이며, 6.25 전쟁 참전 경찰관들의 증언에 의하면 군으로부터 다리 폭파 작전에 대한 정보를 아예 받지 못했다고 하는데 이로 인해 경찰에서 인명피해가 컸던 것으로 보인다.#
종로경찰서는 28일 02시 30분에 트럭 8대에 병력을 분승시켜 한강인도교를 건너던 중에 4대는 무사히 한강인도교를 건너던 중 4대는 무사히 도교(渡橋)하였으나 5번 차량부터는 교량과 함께 폭파되었으니 이로 말미암아 이상훈 경위 외 76명(경위 2, 경사 10, 순경 64)이 순직하였으며~
파일:한강인도교폭파-미국신문기사-The_Charlotte_Observer_Thu__Jun_29__1950.jpg

4.1.6. 군인과 민간인 인명피해자를 언급하는 증언

...다리가 끊긴지도 모르고 피난에 나섰던 수 많은 서울시민들과 남은 부대들이 다리로 밀려 닥치는 무질서와 혼돈의 틈바구니 속에서 수중의 고혼으로 사라진 수가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All of the soldiers in the truck ahead of us had been killed. Bodies of dead and dying were strewn over the bridge, civilians as well as soldiers. Confusion was complete. With the cries of the wounded and the dying forming the background, scores of refugees were running pell-mell off the bridge and disappearing into the night beyond.

4.1.7. 그 외 당시 상황을 묘사하는 증언

- 1970년 증언#
윤중위와 같이 걸어서 폭파현장까지 가 보았습니다. 북쪽 두 째 아치쯤이 끊겼는데 그야말로 눈뜨고 볼 수 없는 아비규환의 참상이에요. 그 많던 차량은 온데간데없고 파란 인불길이 반짝거리며 타오르는데 일대에는 피바다위에 살점등이 엉겨있어요. 더우기 소름이 끼치는 것은 피투성이가 돼 쓰러진 사람들이 손으로 다리 밑바닥을 박박 굵으며 어머니를 부르고 있어요.
- 1981년 증언#
이때 이시영 부통령의 승용차가 다리를 벗어났다. 우연한 일이었다. 처음 마음 먹은대로 진행했다면 부통령도 꼼짝없이 불귀의 객이 될 뻔한 것이다. 그리고 공교롭게도 부통령의 승용차를 마지막으로 인도교의 노량진쪽 어구에 차량행령의 공백이 생겼다. 알고보면 잠깐동안의 공백이었다. 다리 위에는 아직도 수 많은 인파가 후속하고 있었다. 폭파지휘부는 여기서 엄청난 오판을 저질렀다. '인도교에서 모두 빠져나왔을 것이다.'하는 오판이었다.공병감 최창식 대령도 이 현실을 도외시할 수 없었다. 분초를 다투는 속에서도 우선 절차가 필요했다. 헌병을 도촉했다. '다리 위에 있는 차량과 피란민들을 빨리 넘어오게 하고 중지도에 더 넘어오지 못하게 제지하라! 10분 밖에 여유가 없다! 빨리 하라!'... 한데 그 시각에 중지도 파출소 앞까지 천신만고 가까스로 달려온 두 장교가 있었다. 육본작전국장인 장창국 대령과 작전파장인 정래혁 중령이었다. 참모 부장 김백일 대령의 '한강폭파를 별명까지 연기하라'는 긴급명령을 전달하기 위해 급히 달려온 것이다... '가야해 폭파를 중지시켜야 해' '안됩니다! 누구를 막론하고 더 통과시키지 말라는 명령입니다.' 결국 장창국 대령과 정래혁 중령은 가슴을 죄면서 서서히 멀어져가고 있는 차량들의 후미를 바라보고 있었야만 했다. 아무것도 모르고 몰려가는 이들을 강남쪽에서는 빗발과 어둠 때문에 못 보았다고 한다.(법정진술에서) 별안간 무서운 굉음이 터지면서 불기둥이 솟아 올랐다. 그 불기둥과 함께 붕 떠오른 수 많은 차량과 인영이 산산이 흩어지면서 강물속으로 떨어져 나갔다.
나는 27일 저녁부터 헌병 1개 분대를 거느리고 남한강파출소 부근에서 작전차량을 유도하고 있었어요. 말하자면 교통정리인 셈이지요. 28일상오 2시40분쯤으로 생각되는데 벼락치는 소리가 났어요. 다리를 끊는다는 얘기를 전혀 듣지못했기에 처음에는 비도 많이 오고해서 정말 벼락인 줄 알았어요. 그런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까 그게 아니에요.
조금 있으니까 그 많던 차들이 딱 끊어졌어요. 그전에는 인도교를 차들이 6∼7겹으로 메워 내려왔는데…. 가만히 인도교 북쪽을 보니까 라이트를 켠 차들이 그대로 물 속으로 들어가요.한 20분은 그랬을 거예요. 아마 50대이상은 빠졌을 겁니다. 다리가 끊기기 전에 마지막으로 내 앞을 지나간 아는 사람으로는 법무감인 김완용대령이었고, 그전에 공병학교장 엄홍섭중령이 왔다갔다하는 것을 보았지만 다리 폭파이야기는 못 들었습니다.
물 밀 듯 밀려나가는 피란 대열 때문에 한강인도교 어구에서 더 이상 전진할 수 없어서 하차 후 도보로 몇 발자국 걷자마자 쾅하는 소리와 함께 함께 한강교가 폭파되고 말았다.
한강교 폭파를 연기시키려고 차량의 물결을 헤치고 경우 북한강 파출소 앞에 이르렀을 때 폭파를 당했어요. 얼굴에 뜨거운 열기를 느낄 정도의 거리였지요
육군본부의 마지막 철수요원이 나뉘어탄 몇 대의 트럭은 서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무질서하게 남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우리 일행을 태운 트럭이 한강다리 중간 쯤 다다랐을 때였다. 쾅!하는 요란한 굉음이 귀를 찢는 듯 했다. 치마저고리의 부녀자, 아기를 업은 여인, 잠바 차림의 노인들... 대교 양쪽의 인도를 메웠다. 지렁이처럼 느린 걸음으로 걸을 수 밖에 없는 인도교는 사람들로 꽉 메워져 있었다. 한강대교 폭발음과 함께 부녀자들의 비명소리가 하늘을 찔렀다. 아기들의 놀란 울음소리...새벽의 한강다리는 지옥의 수라장이었다.
(중략...) 기동차를 막 움직이려 할 때 별안간 벼락치는 소리가 나기에 인도교 쪽을 보니, 불길이 하늘로 치솟으며 자동차와 사람들이 봉 떳다가 강물로 떨어지고 있었다. 마치 영화의 한 장면 같았다. 폭파의 불빛이 얼마나 강한지 넓은 한강 모래사장도 한 때 훤히 보였다...
조금씩 전진하던 차량과 피란민 대열이 일순간 멈추었다. “왜 안 가느냐”고 앞뒤 여기저기서 아우성들이다. 돌연 철교 쪽에서 천지를 진동하는 폭음과 함께 밤하늘에 섬광이 지나갔다. 철교가 박살났다. 나는 김포 반도에 상륙한 적의 6사단이 우리의 후퇴로를 차단하기 위해 한강교를 폭파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인도교 위는 차량과 인파가 범벅이 된 채 빠져나갈 구멍 하나 없이 꽉 메워져 있었다. 바로 이때 약 150m 전방에서 “쾅” 고막이 찢어지는 듯한 대폭음과 함께 섬광이 번쩍하더니 수백 수천의 비명소리, 그리고 사람과 차량들이 풍비박산이 되어 날아가는 것이 수많은 자동차 前照燈(전조등)에 환히 비쳤다. 동시에 앞에서 “와─”하는 소리. 수천 명이 전신에 피를 뒤집어쓴 채 뒤로 돌진해 나오는 생지옥의 아비규환, 지구상에 다시 없는 참극이 연출되었다. 나는 ‘대한민국의 운명도, 국군의 운명도 여기서 끝장났구나’라고 생각했다.
우리는 무턱대고 마포 쪽으로 뛰었다. 한강변 大路(대로)에 나가보니 국군이 버리고 간 차량, 중화기, 탄약 등이 무수히 방치되어 있었다. 한강 상류 쪽에서 마포 강변까지 수십 만의 피란민들이 雲集(운집)하여 배를 타려고 혈안이었다. 어젯밤의 비로 강물은 누렇게 불어나 있었고 배는 보이지 않았다. 이따금 수영에 능한 사람이 건너가서 작은 보트나 나룻배를 한두 척 가지고 오는 것이 눈에 뜨였다. 고작 5~6명밖에 탈 수 없는 작은 배에 20~30명이 몰려 타고 강변을 떠나는데 20~30m쯤 가다가 뒤집어지는 것이었다. 강가로 헤엄쳐 나오는 사람은 없었다. 물속에서 서로 붙잡고 엉켜서 다같이 사라진 것이리라. 이런 비극이 눈앞에서 되풀이되었다. 도강하던 배들 중 8~9할은 이런 식으로 水葬(수장)되었다. 수천 명이 빠져 죽는 것을 4, 5시간이나 지켜보던 우리는 지프의 타이어를 빼려 하였으나 공구가 없었다.
참혹했어요. 모두 떠나간 육본을 마지막으로 나와 트럭을 탄 채 한강인도교에 도착하니 밀려든 사람들로 길이 꽉 막혀 있었어요. 중지도 끄트머리에 도착하니 인민군 편의대(便衣隊: 사복으로 위장한 부대)로 보이는 사람들이 피란 대열에 끼어들어 ‘이제 다 끝났다’라면서 선동을 하고 다녀요. 대열에서 잠시 기다리는데 철교 저쪽에서 작은 섬광이 일더니 ‘꽝-꽝-꽝’하면서 뭔가 터져요. 다리 폭파였어요. 땅이 출렁이는가 싶더니 폭음과 함께 한강교 아치와 교각이 하늘로 치솟고 차량과 사람들이 튕겨 올라가요. 그러더니 사람들이 입고 있던 옷가지와 살점들이 후두둑하면서 떨어졌어요. 자동차와 싣고 있던 자료 모두 버리고 동빙고 방향으로 움직였어요.
무조건 한강철교 쪽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피난을 가려면 한강인도교를 건너야 하기 때문이다. 그때 한강에는 사람이 걸어서 건널 수 있는 다리가 그것 하나밖에 없었다. 우리처럼 철교를 향해 가는 사람들이 길을 꽉 메우고 있었다. 좀 있으니까 웬일인지 움직임이 정지 되었다. 앞이 막혀서 사람들이 전혀 움직이지 못하게 된 것이다. 강변 길에서 한 시간이나 비를 맞으며 우두커니 서 있었다. (중략) 동이 터 올 무렵에야 그 이유를 알고 피난민들이 일제히 비명을 질렀다. 어둠이 걷히기 시작하자 한강 철교의 중간 부분이 두 군데나 사라져 없고 교각만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중략) 도보로 인도교를 건너고 있던 사람들도 모조리 그렇게 죽었다. 다리가 끊어진 지점에서 강으로 사람들이 곤두박질치고 있는데, 그걸 모르고 계속 밀려오고 있었던 것이다. 강변에서 비를 맞으며 밤을 새운 피난민들이 아우성을 치기 시작했다. 다리가 끊어지면 강을 건너는 일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강변은 난장판이었지만 아침의 한강은 아름다웠다.
- 1964년 최창식 공병감 재심 당시 증언#
폭파 직전 다리 양편에 교통을 차단하기 위한 정리병을 배치했고 다리 밑에서 타오르는 케이블선의 화염이 치솟아 거의 도강을 중지, 많은 인명피해는 없었던 것으로 안다.
- 2013년 증언#
칠흑 같은 밤이었고 비가 내렸어요. 폭파 당시 교량 양측에 1개 분대 정도의 공병대를 배치, 인마(人馬)와 차량의 통행을 저지시키려 했으나 당시 동원된 병력이 부족해 공포까지 쏘았으나 저지하기 어려웠어요... ...한강교 시설 중에 상수도관과 통신선로가 있었는데 다리가 전파되고 상수도관이 터져 물이 콸콸 쏟아졌고, 통신선로에 불이 붙었습니다. 사람이 얼마나 죽었는지 알 수 없고, 그날 새벽 다리 밑에 시체가 둥둥 떠 있거나 하는 광경도 없었어요.
(중략...) 그 다음은 파편과 유탄에 마저서 사망된 분이 4160명입니다. 다음에 무엇에 눌리워 가지고 죽은 분, 한강교량 절단으로 인하여 추산된 수 594명입니다. 추산된 수는 확정된 것으로 낸 것은 시 사회국에서 그 당시에 여러 가지를 참작해 가지고 각 동회를 통해 가지고 나온 수입니다.
전날밤에는 뒤숭숭한 공기 속에 비가 줄기차게 내렸고, 한밤 중 큰 폭음을 내며 한강 다리가 폭파되었다. 아침에 노량진 쪽 강변에 나가니 피란민은 더 이상 도강도 못하고 서울시내에는 공산군 탱크가 들어왔다고 하고 인도교가 폭파될 때 미처 빠지지 못한 숱한 차량과 피란민이 다리와 함께 물 속에 굴렀다는 이야기들이 오갔다.
...육본을 나와 후퇴 차량으로 꽉 찬 한강로를 뚫고 한강대교를 향하여 전진하고 있었다. 한강교 북쪽 입구로 들어가 1~2분 걷고 있을 때 바로 앞에서 일대 폭음이 일어났다. 28일 새벽 2시 반쯤 된 시각에 한강 다리가 폭파되는 소리였다. 실로 위기일발(危機一髮)로 죽음을 모면한 순간이었다. 조금만 앞질러 갔더라면 우리는 모두 날아가고 말았을 터였다. 당시 나는 적이 우리 후방으로 침투하여 한강대교를 폭파한 것으로 직감했다. 일반 상황으로서는 유일한 이 한강교를 이 시기에 도저히 폭파할 수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용산대로를 완전히 매운 피란 인파와 민간 차량 속에 묻혀 나는 채 참모총장을 모시고 시흥으로 향했다. ‘이제 대한민국은 망하는구나. 한강을 건너 남하한다고 해도 어디까지 갈 것이냐. 적의 공격을 피하다 잡혀 죽는 것보다 차라리 서울시민과 같이 싸우다 죽는 것이 군인으로서 명예스러운 일이 아닌가’라는 비참한 생각이 들었다. (중략) 차가 한강교 남단에 도달했을 때 공병들이 폭파 장치를 하고 대기 상태에 있었다. 노량진을 지나 영등포 로터리를 도는 순간 뒤에서 커다란 폭음이 들렸다.
우리 공병대대는 28일 아침 해가 밝아 오는 6시경 용산 삼각지 부근에 도착했는데 한강교를 향해 가던 차량이 앞으로 더 나가지 못한 채 서 있었다”고 기억했다.당시 3사단 공병대대는 겨우 10대의 트럭을 보유하고 있었는데 많은 부대원이 차 뒤를 따라 도보로 동대문에서 종로를 거쳐 시청 앞으로 후퇴를 했어요. 피란 가던 시민도 우왕좌왕하며 몰려 큰 혼잡을 이루고 있었고 도로를 꽉 메운 차량 행렬로 길이 막혀 꼼짝도 못하자 인도에까지 차가 올라가 있을 정도였어요. 저는 왜 그렇게 길이 막히는지 알 길이 없었어요. 그때까지만 해도 인도교가 폭파된 사실을 모르고 있었어요. 이런 사정을 알 리 없는 저는 정보장교를 시켜 한강에 이상이 있는 것 같으니 가서 상황을 알아보라고 했습니다.
1시간이 지나도록 감감무소식이어서 발을 굴렀는데 이윽고 장교가 와서 말하길 ‘한강대교가 끊어져 남하할 수 없다’는 것이었어요. 그것도 우리 측에서 폭파한 것 같다는 대답이었습니다. 나는 그 말을 믿을 수가 없었어요. 민간인의 피란 행렬이 줄을 잇고 있는 데다 후퇴하는 군 병력도 상당수 강북(江北)에 남아 있었기에 우리 쪽에서 다리를 폭파한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어쨌든 아군도 미처 철수하지 못했는데 다리부터 끊어 놓았으니 큰일이었어요.
나는 「드리쿼터」를 타고 김병두 경감은 지프로 한강으로 달렸지요. 내 바로 앞에 김태선 국장의 차가 있었는데 한 육군대위가 강을 못건너게 막아요.「국장차인데 왜 통과시키지 않느냐」고 항의하여 겨우 다리를 건넜습니다. 막 건너온 순간「쾅」소리와 함께 내가 탄「드리쿼터」의 뒷부분이 공중에 떴고, 소방과장 신인우총경이 탄 지프유리창이 박살이 났지오. 또한 이때 종로경찰서원들이 타고 건넌 트럭이 하늘로 붕뜨면서 짐짝처럼 경찰관들이 차 밖으로 내동댕이쳐졌구요. 정말 악몽이었습니다.
김태선 국장이 앞장서고 최운하 부국장이 그 다음에, 그리고 나, 이렇게 셋이 처음에는 별로 사이가 떨어지지 않았는데 인파와 거파에 밀려 서로 흩어졌어요. 내 차가 겨우 용산역쯤 다다랐을 때 번쩍하는 불꽃과 함께 큰 폭음을 들었어요. 다리가 끊어진 거지요. 이때 김태선국장차는 간신히 다리를 넘은 모양인데 뒤따르던 최운하 부국장차는 안보이더군요. 그후 최부국장 소식은 영영 듣지 못했는데 다리 폭파때 희생이 된 것 같습니다.

4.2. 폭파 시기

일단 폭파의 전략적 가치에 대해서는 이견이 없다고 볼 수 있다. 한강대교를 탈취당한다면 서울 북방에서 싸우던 국군 병력의 퇴로가 끊기는 것은 물론이고, 북한군 주력 부대가 한강 이남으로 쏟아져 내려올 양호한 통로가 그대로 개방되는 상황이었다. 한강대교 폭파 자체는 전략적으로 충분한 타당성을 가지는 행위였으며 소련 고문단의 사후 평가에서도 105전차여단의 한강교 조기확보 실패를 개전 직후의 주요 실책으로 지적하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물론 한강철교의 폭파가 불완전했고 북한군이 서울 점령 후 공세 재개까지 3일여의 휴지기를 가짐으로써 이 효과가 반감된 것은 사실이나, 공격자의 변덕 혹은 정치적 결정으로 인한 공세중단[54]을 바라고 방어에 나설 수는 없는 노릇이고 한강 대안측에 방어선을 구축함에 있어서도 적의 기동로가 한강철교 한 곳으로 제한되는 것은 승수효과를 통해 방어자측에서 일시적/국지적 비교우위를 달성하기 용이해지게 하는 효과가 있다.

게다가 철교가 의도대로 완파된 것은 아니지만 전차 통행이 불가능할 정도의 손상이 있어 복개공사가 필요했고 공병작업 도중 미 공군의 지속적인 폭격으로 계속 철교가 타격을 입은 탓에 북한군의 전차 도하는 공격 개시로부터 5일이나 지연되었다. 그리고 한강 방어선은 북한군이 보병을 이용한 도하공격을 실시하던 6월 29일부터 7월 2일까지는 잘 버티다 7월 3일 한강철교가 복구되고 북한군 전차가 다리를 건너 노량진으로 진입하자마자 무너졌다. 즉, 교량의 불완전한 파괴조차도 북한군의 공격 시간표를 며칠이나 지연시켰다는 점에서 교량 파괴의 전술적, 작전적 가치는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리고 폭파 시도가 길음교 폭파 실패 때처럼 폭약 부족으로 실패한다면 폭약을 추가로 더 확보하여 다리에 다시 설치할 추가 시간이 필요했을 수도 있었다. 그리고 다리 진출입을 다리 입구에서 헌병이 통제하며 여러대의 차량들이 다리를 건너가는 중에 다리 폭파가 실행되었다는 것이 누군가에 폭파 명령의 묵살이나 취소 가능성도 염두에 둔 이른 폭파 시점이었는지 모른다.

4.2.1. 조기 폭파가 명백하다

한강인도교 등 한강교 폭파가 지나치게 이른 시기에 이루어진 조기 폭파가 아닌가 하는 점은 당시에도 비판이 제기된 부분이었다.. 즉

폭파 당시에도 서울 강북에서 여전히 고군분투 중인 국군 주력부대가 다리를 통해 철수하지 못한 상황에서의 한강인도교 폭파는 시기상조라는 견해가 육군본부 내부에 엄연히 존재하였고, 이러한 견해가 받아들여져 육군본부 작전국장 장창국 대령과 작전과장 정래혁 중령이 직접 현장으로 파견되어 폭파 중지명령 하달을 시도하기도 했다.

부연하자면 당시 육군 참모부장 김백일 대령의 증언에 따르면, 채병덕 육군 참모총장은 적 탱크가 시내에 들어왔기 때문에, 다리 폭파 지시를 하고 김백일 대령에게 최종 다리 폭파에 대한 권한대행을 부여한 후 육군본부를 빠져나갔다. 육본에 전방사단장인 이응준 소장과 유재흥 준장 및 이형근 준장은[55] 휘하부대가 남아있으니, 이들이 도강 후 인도교를 폭파하여야 한다는 건의를 하였다.

이 건의를 들은 김백일 대령은 이 세 장군의 의견을 받아들어, 작전국장 장창국 대령에게 현장에 가서 폭파를 중지시키라고 명령하으나, 이 명령을 집행하기 위해 출동한 장창국 대령 일행이 현장에서 다리를 통제하던 공병들에게 막혀 시간이 지체되던 중 불과 몇분의 차로 한강다리가 폭파되었다.

실제로 김백일 대령의 폭파 연기 명령이 집행되었다면, 한강교 폭파라는 참극은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 증언은 <This Kind of war> [56] 에서 기록된 것과 교차검증되는 사료이다, 이 사료에 의하면 더더욱 가관인데, 미 군사고문단 참모장 그린우드 중령도 위에 언급된 김백일 대령에게 별도로 한강다리 폭파를 연기하라고 요청하였다는 것이다. 미 군사고문단의 해즐리트 대령과, 하우스먼 대위는 도쿄 주일미군과 연락을 취하려고 수원으로 내려갔으며, 인도교를 건넜을 때 새벽 2시 15분이였다, 다리를 건넌 뒤 폭파되었다고 기술되어 있다.

또한 서울 점령의 주역인 북한군 3사단, 북한군 4사단, 북한군 제105땅크사단의 경우에는 도하장비를 갖추지 않았으며 전쟁 직전까지 북한군이 보유한 도하장비의 경우에는 중도하장비인 N2P는 총 48조를 가지고 있었고 경도하 장비인 NLP는 24조를 보유했는데 이들은 춘천 방면을 공격한 북한군 2사단과 옹진, 개성, 청단, 연백, 고랑포등을 공격한 북한군 6사단에게 지급되었고 북한군 6사단에게는 N2P 부교대대까지 존재하여 개전 초반에 앞서 언급한 지역 외에 강화도와 김포반도에도 도하장비를 이용해서 도하작전을 실시하였다.예시 실제로 서울을 점령한 북한군이 한강을 도하하려고 시도한 방법들은 제대로 된 도하장비도 없어서 모조리 실패했으며 결국 한강철교를 보수해서 T-34-85 전차를 한강 남쪽으로 보내서야 한강 도하에 성공하였다.

그러므로 한국군 주력이 부대 체제를 유지하고 장비를 보유한 채 한강을 제대로 도하해서 한강 방어선에 재배치될 때까지, 그렇지 않다면 적어도 조금이라도 더 시간을 끌어서 한국군중 일부라도 더 한강 남쪽으로 끌어왔으면 이후의 전쟁이 좀 더 수월해졌을 것이다.

실제로 한강인도교 폭파의 예정시간인 6월 28일 오전 7시에 대비해서 현대의 리본부교와 같은 주교를 수십척이나 모아서 집결시키는 중이었으며 미아리를 돌파한 전차는 고작 2대였고 공병대가 주변 건물에 폭탄을 설치해서 북한군의 진격을 저지시키려는 시도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아무리 못해도 폭파 예정시간까지는 버티는 게 가능했는데 실제 벌어진 오전 2시 30분의 한강인도교 조기 폭파로 모든게 허사가 되었다고 지적하고 있다.예시

4.2.2. 조기 폭파는 결과론이다

먼저 6월 28일 새벽 2시 30분 한강교 폭파 이후 벌어진 전황 즉 인민군 주력부대가 서울을 완전 점령하여 한강교로 도착하기까지 최소 5시간 30분에서 최대 9시간 정도의 여유가 있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조기 폭파가 되어 폭파 시점은 국군의 실패한 결정이 되었다.

그러나 당시 북한군의 세부적인 서울 침공 작전 방향에 따라 오히려 늑장 폭파가 될 수도 있었으며 결론적으로 조기 폭파는 결과론에 가깝다는 반론들이 존재하며 이는 신기철 인권평화연구소장의 저서 '적은 아니다'(pp. 65–69), 남정옥 전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책임연구관의 포럼 발표#에 자세히 기술되어 있으며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다.

(1) 6월 28일 새벽 2시 30분은 국군의 사전 계획된 한강교 폭파 시각과 대동소이하였다.
먼저 당시 미 군사고문단은 북한군 전차가 한강교가 위치한 용산 지역에 진입했을 시점을 가장 적당한 한강교 폭파 시점으로 꼽았으며, 최창식 공병감은 북한군이 서울 시내에 진입하고 2시간 40분 후 폭파를 군 수뇌부에 건의하였고, 육군본부는 2시간 후 폭파를 방침으로 정하였다.

당시 증언들을 정리해보면, 북한군의 서울 시내 진입 증언 중 가장 빠른 시점은 27일 밤 11시, 가장 늦은 시점은 28일 새벽 1시 30분으로 이미 북한군 전차가 돈암동을 시작으로 창경원, 중앙청, 동대문 등 서울 곳곳에서 목격된 상황이었으며 원래 소련 군사고문단의 유능한 대령급 고급장교들이 작성해 준 남침 작전계획서에 의하면 원래 작전 계획도 최우선 순위가 한강교 점령이었기 때문에 북한군이 원래 서울 점령 작전 계획대로 최고 시속이 55km에 달하는 T-34 전차를 앞세워 한강교 점령을 목표로 전력으로 돌진했거나 혹은 한강교 점령을 목표로 특작부대를 투입시켰다면 전문 경비부대 없이 폭파 담당 공병대와 질서 통제 담당 헌병대 이런 소수의 국군 병력을 순식간에 제압하고 충분히 한강교를 탈취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실례로 대전 전투 당시 미 제24보병사단의 퇴로였던 세천터널을 북한군들이 급습하여 아군이 세천터널을 통해 철수 후 터널을 폭파시키기 위해 준비 중이던 공병폭파조를 모두 제압하고 퇴로를 차단한 적이 있으며'6.25 전쟁사 제4권 금강-소맥산맥선 지연작전' pp. 159–161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발간, 2001년) 전쟁사에서 이렇게 우회 기동 또는 급습으로 퇴로를 차단 당하여 막대한 손실을 당한 사례는 무수히 많다.

또한 실제로 전차와 공조해야 할 북한군 보병사단 등 주력부대는 28일 오후까지 창동-미아리 방어선에 막혔으나, 소련군 자료에 의하며 제105땅크여단 소속 6대의 전차는 차량화 저격대대와 함께 합동으로 28일 새벽 12시 30분에 서울로 돌입해 들어갔던 것으로 밝혔졌으며'소련군사고문단장 라주바예프의 6.25 전쟁 보고서 제2권' p. 16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발간, 2001년) 이를 토대로 보면 새벽 1시경에는 서울 시내에 확실하게 북한군 전차들이 활개치고 있었기 때문에 28일 새벽 2시 30분 폭파는 원래 국군의 사전 계획된 폭파 시점과 크게 차이나는 시점에 폭파된 것이 아니었다.

(2) 북한군의 서울 점령 과정 중 작전 수행 미숙과 판단 실수에 의해 생긴 여유 시간이다.
6월 28일 새벽 2시 30분 폭파 이후 북한군 전차가 28일 오전 8시경에 용산 삼각지에 진입했으며 주력부대는 이날 11시 30분에 진입했기 때문에 최소 5시간 30분에서 최대 9시간이나 빨리 폭파했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이렇게 5시간 30분에서 9시간 정도의 여유가 있었던 것은 원래 북한군의 작전 계획상 제일 먼저 한강교를 점령했어야 하지만 이미 새벽에 한강교들이 이미 폭파되어 전략적 가치가 상실되었다는 정보를 입수해서 일부러 한강교로 늦게 진입했을 가능성 혹은 북한군이 한강교 보다는 중앙청을 비롯한 한국 정부의 주요 기관과 시설들을 먼저 점거하는 실수를 했기 때문에 늦게 한강교에 진입한 것으로 북한군이 한강교 점령을 목표로 전력으로 돌진했는데도 6월 28일 오전 8시 이후 한강교에 도착한 것으로 보면 안 된다는 것이다.

소련의 군사고문단장 라주바예프 중장 역시 전투 보고서에서 한강교 점령을 늦추고 국군이 한강교 폭파를 할 수 있게 허용한 것을 북한군의 큰 실책으로 지적하였다.
각 사단장들은 서울에서 퇴각하는 적을 적극적으로 추격하거나 한강 도선장들을 점령하지 않은 채, 결단을 내리지 못 하고 모호하게 행동하였다. 또한 제105땅크여단 예하부대들도 서울을 점령한 후 3일 동안 적을 추격하지 않은 채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음으로써 적에게 한강의 남쪽 강변을 강화하고 교량을 파괴할 수 있는 여유를 주었다.

(3) 국군 주력부대 대부분을 완전하게 철수시킬 수 있는 엄호부대와 화력지원이 존재하지 않았다.
국군 주력부대의 완전 철수를 위해 폭파 시점을 늦추고 기다렸다가는 국군 주력부대를 바싹 추격하며 엉겨붙은 북한군까지 같이 한강교로 들이닥치면서 일대 혼란과 함께 한강교를 탈취당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즉, 미아리 방면 등에서 북한군과 접전을 벌이며 철수하던 국군 주력부대가 완전히 철수할려면 목숨을 담보로 주력부대의 철수를 엄호하면서 북한군 추격을 늦추며 시간을 벌어줄 국군 엄호부대와 공군 및 포병 등의 화력 지원이 있었어야 하는데 이런 엄호부대와 화력 지원이 전무한 상황이었고 미아리에서 한강교까지 불과 최단거리 기준 8km도 안 되는 거리였기 때문에 북한군에 밀려 후퇴하는 국군 주력부대와 이를 추격하는 북한군이 거의 동시에 한강교로 들이닥치거나 오히려 T-34 전차를 앞세워 국군 주력부대를 추월해 먼저 한강교로 진입하는 북한군 선발 부대에 의해 한강교를 탈취당하는 최악의 상황이 벌어질 수 있었다.

(4) 국군 부대간 통신두절로 적절한 타이밍에 한강교 폭파는 위험천만한 도박수였다.
현재는 당시 6월 27일부터 6월 28일 서울 방어전에 참전했던 국군 장병들의 증언 등 여러 사료들을 통해 어떤 국군 부대는 미아리 등 서울 어느 지역에서 북한군을 진격을 잘 막아내고 있었으며 그래서 한강교 폭파까지 시간적 여유가 있었고 이렇게 당시 전황이 상세히 알려져 있지만 실제 당시에는 육군본부 등 국군 지휘부와 철수하는 각 부대들과의 통신 두절이 심각하여 상세한 전황 파악이 어려웠다.

즉, 지금처럼 실시간으로 각 부대별 철수 상황 그리고 북한군의 서울 시내 진입 상황 등 정보 공유가 가능했음에도 불구하고 28일 새벽 2시 30분에 폭파했다면 명백한 조기 폭파로 엄청난 실책이 분명하지만, 당시 국군 부대들간 통신두절 상태에 따라 상세한 전황 파악에 한계가 존재하여 일사분란하게 국군 주력부대들이 최대한 한강교를 통해 철수시키고 그 후 추격하는 북한군이 한강교로 진입하는 절묘한 타이밍에 다리를 폭파하는 전쟁영화의 한 장면같은 다리 폭파는 거의 불가능하였다.

통신 두절이 얼마나 심각했는지는 당시 폭파를 담당했던 공병대와도 유선이 가설되지 않아 28일 새벽 2시 30분 한강교 폭파 중지 명령을 하달하기 위해 육군본부 작전국장 장창국 대령과 작전과장 정래혁 중령이 직접 한강교를 방문했어야 했으며 여기서도 헌병과 공병들의 제지로 시간이 지연되어 명령을 하달하지 못 하는 불상사가 일어났으며 경찰에는 28일 한강교 폭파 계획이 아예 전달되지도 못 하였다.https://www.joongang.co.kr/article/1236202

결국 장창국 대령에 의해 28일 새벽 2시 30분 폭파가 중지되어 한번 연기되었다고 가정하더라도 그 후 육군본부 등 국군 지휘부와 서울에서 철수하는 각 부대들간에 통신 두절 상태가 심각하여 실시간으로 각 부대별 철수 상황 및 정보 공유를 할 수 없었고 다시 재차 폭파 명령을 전달하러 한강교를 한번 더 가야 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과단성 있게 결단을 내리지 못 하고 계속해서 국군 주력부대의 철수 상황과 북한군이 한강교를 향해 어디까지 진입했는지 이런 상황 파악만 계속 하다가 결정적인 순간 폭파 명령 하달에 실패하여 오히려 북한군에게 한강교를 탈취당 할 위험성이 분명히 존재하였다.

4.3. 국군 병력 상실

한강인도교 폭파 자체가 당시 서울 방어의 성패 자체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가는 객관적으로 판단하기 어려운 문제이나 방어부대의 전투의지 상실에 결정적이었다고 보는 시각이 많다. 다만 대부분의 방어선에서 최초 접촉이 이미 이루어진 상태였고 폭파 이전부터 부대간 통신 두절 상태가 심각해 일관성 있는 전황인식이 곤란한 지경이었음을 감안하면 폭파 소식이 그렇게 신속히 전파되었을지는 의문의 여지가 있다. 실제 당시 참전 병력들의 수기를 보아도 패주 당시까지도 상황을 모르고 있다가 후퇴 여정에서 철교 폭파 이야기를 듣고 우회로를 찾아갔다는 이야기가 다수 확인된다.

일부는 반론으로서 28일 낮 이후에도 경의선 축선 등 한강 이북에서 일부 부대가 선전하였음을 점을 지적하기도 한다. 그러나 어차피 배후지가 돌파당한 이후에는 내선의 이점을 상실한 포켓에 불과해진다는 점에서 큰 변수라고 보기는 어렵고. 28일 북한군이 이미 김포 평야에 도달했던 것을 고려하면 결국 한강대교 폭파라는 단일 사건 때문에 서울 수비가 실패하거나 조기 함락되었다는 주장은 어폐가 있고, 폭파 결정이 불러온 주된 피해는 상실된 중장비와 병력 피해로 한정하는 것이 합당하다.일각에서 이야기하는 폭파 직후 몇 만 단위의 국군이 증발하였다는 이야기는 당시 지휘체계 내에서 통제 가능한 병력의 규모를 근거로 하는 이야기로, 당연하게도 단순 퇴각 중 명령체계 붕괴로 상실된 전력들은 이후 며칠에 걸쳐 한강 방어선 및 여타 패잔병 수집소에서 대다수 복귀하였다. 참고로 다리 폭파 직전에 한강을 건너 남쪽으로 전개한 부대는 육군본부와 김포반도에 긴급 배치된 일부 부대들 정도에 불과했다.

단, 여기에 대해 병력이 복귀했다는 이야기도 결과론적 주장일 뿐이라는 재반론도 있다. 애초에 명령 체계를 유지한 채 조직적으로 후퇴한 것과 완전히 부대가 와해된 뒤 개별 병사들을 주워담듯이 수습한 것은 엄연히 다르기 때문이다. 도하가 어려운 한강의 특성상 자칫하면 개별 병사들이 아예 탈출조차 하지 못하고 모조리 한강 북단에 그대로 고립된 채 북한군에게 섬멸되거나 포로로 잡힐 위험도 있었다.

실제로 한강인도교 폭파로 인해 한강 이북에서 붕괴된 부대만 사단급으로만 따져도 제1보병사단, 제2보병사단, 제3보병사단, 제5보병사단, 제7보병사단의 5개다. 당시 수도경비사령부였던 수도사단도 심각한 피해를 입었기 때문에 한강인도교 폭파 후에 사단급 체제를 제대로 유지한 부대는 제6보병사단제8보병사단에 불과한 실정이었다. 개전 당시 한국군의 사단급 부대가 8개라는 것을 생각한다면 여기서 한국 육군은 사실상 궤멸한 셈이 된다. 병력만 따져도 4만 4천 명이 무너진 것이다. 이조차도 6사단은 중부, 8사단은 동부전선을 홀로 틀어막고 있었으니 아예 서부전선에 남은 사단급 제대가 없는 막장 상황이 발생했다.

설상가상으로 여기서 붕괴된 병력이 그나마 당시 한국군의 입장에서는 정예병력이었다는 것도 문제였다. 예를 들어서 제7보병사단의 경우에는 개전 직전에 대대급 훈련을 완수한 16개 대대중 6개를 7사단 소속의 1연대와 9연대가 보유하고 있었고 1연대와 9연대는 전쟁 직전 기동훈련 및 연대 CPX, 대전차 훈련까지 어느 정도 마친 상태라서 삼팔선을 지키는 부대중에 가장 훈련도가 높고 정예화된 사단이었다.예시 이런 이유로 인해 전쟁이 터지자 방어해야 할 주요 교통로가 동두천과 포천으로 2개이며 고작 2개 연대의 병력만으로 북한군 2개 사단과 1개 기갑여단을 상대해야 하는 불리함에서도 용전분투하여 일시적으로 동두천을 탈환하기도 하는 성과를 보였다. 하지만 중과부적으로 부대가 붕괴상태에 놓이기 시작하면서 한강인도교 폭파로 퇴로까지 차단되자 결국 9연대장 윤춘근 중령은 겨우 연대 잔존병력 1천여 명만을 데리고 서울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으며 부대 보유 중화기가 기관총 4정에 불과할 정도였고 1연대장 함준호 대령의 경우에는 창동 - 미아리 방어전에서 전사하면서 연대가 거의 전멸당했으며 고작 400여 명 남짓만 각자 철수하면서 7사단 자체가 완전붕괴되었다.

이건 제7보병사단만의 문제가 아닌 것이 제2보병사단은 개전 전에 한반도 남부에서 게릴라 토벌작전을 수행하던 사단 중에서 가장 훈련도가 높고 장비가 잘 갖추어진 사단이었고 수도경비사령부에는 앞서 설명한 대대급 훈련을 받은 대대중 9개를 집중시켰으며 남은 1개는 제8보병사단에 있었던 상황이었고 제3보병사단은 동해안 남부 도로를 방어하면서 북한군이 부산으로 돌진하는 것을 막아야 했으며 제5보병사단도 쓸만한 예비병력이었는데 한강인도교 폭파로 한강 북쪽에서 부대가 붕괴된 것이다.

비록 잔여 병력이 개별적으로 한강을 건넜으나 한강 방어선 전투에서 그나마 남은 잔여병력이 모조리 소멸된 후 2사단, 5사단, 7사단이 완전해체되었으며 3사단도 사실상 연대 1개 남은 해체 수준으로 전락해서 적은 병력으로 동해안 해안도로를 따라 남진하는 북한군 5사단 및 지원부대라는 압도적인 전력을 상대로 경상북도 북부 해안부터 영덕까지 처절한 방어전 및 지연전을 펼쳐야 했다. 설상가상으로 천안 전투에서 장항선 방면을 거쳐서 금강 하구를 도하해서 군산시를 통해 전라도로 진격하는 길이 열렸을 때 그 쪽을 방어할 주력부대가 사실상 없기 때문에 순식간에 전라도가 함락되고 말았다.

병력 손실도 만만치 않은데 무기, 장비, 탄약, 물자, 군량미 등의 손실도 막대하였다. 당장 37도선 이북에 배치한 대부분의 보급창을 망실해버렸는데 한강교 폭파로 방치된 품목은 21종, 29만 408개로 보유수량의 44.7%가 북한군의 손으로 넘어갔다. 그나마 이들 물자는 연료와 군량미 같은 것을 제외하고 북한이 전선 후방을 기습공격할 때 북한쪽 예비대에게 지급할 목적으로 부평구에 집중시켰다가 인천 상륙작전으로 UN군이 급속전진하면서 부평을 기습적으로 탈환하여 대부분의 수량을 다시 회수한게 다행이었다.예시

차량의 경우에도 원래 보유한 차량 2766대 중 1318대가 휘발유 2만 갤런과 함께 고스란히 북한군의 손으로 넘어가서 쓸만한 놈은 북한군이 잘 써먹었고 미군은 이렇게 노획당한 트럭을 공습으로 파괴하느라고 애먹었다.예시 이때 잃어버린 차량이 얼마나 많았는지 고작 사흘간의 차량 손실숫자가 1950년 6월 28일부터 1950년 12월 31일까지 한국군이 잃어버린 차량의 숫자를 능가한다.예시 그래서 미군이 참전한 후에 자기네들 쓸 차량도 태평양 섬 지역에 방치된 것까지 다시 긁어모으는 판국에 한국군 줄 차량까지 있어야 했으니 골머리를 앓았다. 한국군 또한 북진작전시에 각 사단의 차량이 고작 50여 대 정도만 남아서 필수적인 야포와 긴급물자 견인까지 애를 먹었다.

병기창에 보관 중이던 M1 개런드 1276정과 99식 소총38식 소총 8500정 등 총기 1만여 정 역시 한강변 모래사장에 대충 매몰된 채 방기됬다. 이는 후에 북한군이 꺼내서 잘 사용했다. 결과적으로 한강인도교 폭파는 한국군이 보유한 군량미 70%와 장비 90%도 상실하게 만든 것이다. 예시

위에서 공격자의 공세중단만 바랄수는 없다고 지적하는데 적의 공세종말점은 그나마 어느정도 예측이 가능한 부분인 반면 아군의 개별 후퇴 및 수습은 그 이상의 요행에 불과하다. 게다가 한강 방어선 전투 문서를 보면 알겠지만 국군 부대들의 혼란은 둘째치고 당장 미군사고문단(KMAG)조차 한강 이북에 고립되었고 이들이 보유한 도쿄 연합군사령부 직통 무선통신장비도 뗏목에 실려 간신히 도강할 수 있었을 지경이다. 심지어 이들 병력을 수습한 김홍일은 오로지 부관 한 명 데리고 모든 것을 자력으로 마련해나가야 했다. 여기에 김포지구전투사령부와 6사단의 분전으로 북한군의 우회기동 및 후방 포위전략이 차단되었기 때문에 김홍일이 시흥사를 창설하고 병력을 수습할 시간이 확보되었을 따름이다. 이 3가지 요소 중 단 하나라도 실패했다면, 한강인도교 폭파는 적 진격 방지는 고사하고 그대로 국군 주력이 궤멸하고 북한군은 쾌속진격을 돕는 중요한 요인이 되었을 터이다.

원래 북한군의 계획이 주력이 서울을 공격하면 후방에 있는 한국군이 서울을 방어하기 위해 이동할 것이고 그러면 춘천을 돌파해서 경기도 동부를 거쳐서 수원까지 별도의 부대가 쾌속진격하여 한국군을 포위섬멸한 후 신속하게 부산을 점령한 다음에는 잔여지역을 소탕한다는 계획이었음을 감안한다면 춘천-홍천 전투에서 제6보병사단이 승리함으로서 북한군의 계획은 무너졌으나 한강인도교 폭파로 한국 스스로가 북한군의 작전이 절반 정도는 성공할 수준의 타격을 입히게 된 것이다.

그나마 한강인도교 폭파로 고립되었다가 탈출했지만 사단 편제를 유지한 경우가 딱 하나 있다. 6.25 전쟁 초반에 청단 - 개성 - 문산을 방어하던 제1보병사단은 6월 27일까지 방어하였으나 우측의 7사단이 북한군 9전차여단에 의해 괴멸되어 서울이 점령됨에 따라 한강 이남으로 독자적으로 철수해야 했다. 이 과정에서 신성모 국방장관과 채병덕 참모총장의 오판으로 1사단도 전투력의 60% 이상을 상실하였고 그 결과 1사단 사단장인 백선엽이 부대원들에게 "개별적으로 후퇴해서 한강 이남에서 다시 살아 만나자"고 이야기했을 정도였다. 그나마 한강 이남에서 김홍일 장군이 재수습하고 백선엽도 최대한 병력을 다시 끌어모아서 사단 자체가 해산당하는 최악의 상황은 피했다. 다만 1사단도 병력만 어느 정도 수습했을 뿐이지 중화기, 물자, 차량등은 한강 이북에 버리고 와야 했다. 재수습에 관련된 자세한 내용은 (오로라의 공상 블로그) 링크기사에서도 언급되며 나무위키에서도 김홍일, 시흥지구전투사령부 문서에서 언급한다. 아래의 내용은 기사에서 인용했다.
“…김홍일 소장이 자기 책임 아래 부서진 군대를 재편성하고 있었다. 내가 만난 가장 멋있는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인 김 장군은 미소로 그어지는 잔주름과 반백의 머리칼로 인해 어디서나 눈에 띄었다. …김 장군은 그때 패전 시기에 만난 모든 군인들, 바로 그 불길한 수요일 보병학교 연병장으로 끌려온 군인들을 일일이 만나보고 격려했다. …바로 그 우울한 날 김 장군이 보여준 것같이 군사적 패주 속에서 즉각 재편성하는 역량과 지도력을 보여준 장군들이 군 역사에 얼마나 많은지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이승만 박사와 미국 대사관(Embassy at War)> 중, 해롤드 노블, 1982, 정호출판사

결론적으로 볼 때 미국이 신속하게 개입하지 않았다면 부적절한 시기에 한강인도교 폭파를 해서 스스로에게 치명타를 먹인 한국군은 더 이상 버티는 것이 곤란했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한강 방어선 전투가 성공적으로 끝난 것이 대단할 뿐이다.

여기에 더해서 개전 초반의 대혼란에도 불구하고 그럭저럭 지휘관들간의 연락도 잘 되던 편이었고 조직적인 저항이 지속되고 있었던 한국군을 사실상 한강인도교 폭파 1방으로 치명타를 먹여서 낙동강 방어선 전투를 시작할 때까지 제대로 된 저항능력을 많이 상실한 반신불수의 상황까지 몰리도록 만들었기 때문에 더 문제가 되는 것이다.예시

군사학적으로 더 자세한 내용은 남정옥 전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책임연구관의 포럼 발표의 '한강교 폭파에 대한 피해 통계는 잘못됐다.' 문단' # 그리고 블로그 게시물(1번, 2번, 3번, 4번, 5번)을 참고하면 좋다.

4.4. 서울에 고립된 민간인의 '부역자' 처벌

서울 수복 이후 서울에 고립되어서 북한군의 노역에 동원된 시민들을 '부역자' 혐의로 처벌하면서 이 사건과 맞물려 큰 논란을 일으켰다.

서울에 남아 있던 시민들의 상당수는 국방부의 허위 방송을 믿고 피난을 가지 않거나 단념하였다.[57] 늦게나마 피난을 시작한 사람들은 한강대교 폭파 전 이미 공작원의 남하차단이라는 명목으로 국방부는 인도교와 철교를 통제하고 있었고 좁은 부유교만 설치하여 그 속도가 매우 느릴 수 밖에 없었다. [58]

인민군은 서울을 점령 후 90일 동안 수많은 사람들을 학살하여 시민들은 공포에 떨어야 하였다. 확실하게 학살된 사람만 8,800명이고 점령 기간 동안 시민 9만 5000명이 학살, 사망, 실종, 납치되었다.

그러나 서울 수복 후 이승만 정권은 서울에 잔류한 모든 시민들이 '빨갱이'라서 서울에 남아 북한군을 환영하고 친북 활동을 벌였다며 처벌하기 시작했다.

이때 잔류파는 곧 부역자로 간주되었는데 한국 정부는 군대와 검찰과 경찰이 합동으로 조사를 벌여 1950년 10월 4일부터 11월 13일까지 총 55만 5915명을 부역자로 검거하였다. 그들 중 867명이 사형을 당했고 나머지는 감옥에 갇혔다. 그러나 시간이 점차 흐르면서 너무 지나친 조치라는 비판 여론이 높아졌고, 결국 수감자 대부분은 1951년 3월 무렵에 석방되었다.[59]
심지어 미처 피신하지 못하고 서울에 남아 있다가 그것 때문에 잔류파로 몰린 검사 정희택은 이렇게 울분을 토로했다. "1개 사단 규모의 전향자들을 책임지고 있는 정보 검사에게까지도, 그것도 최후의 순간에 전화 문의까지 했는데도 거짓말을 하고 저희들만 도망치지 않았습니까? 이렇게 배신과 기만으로 애국시민들을 내버리고 도망친 자들인데 무슨 염치로 잔류파를 재판한다고 하는 겁니까?"[60]

참고로 당시 북한군에게 협조한 사람 중 한국 경찰이나 군대, 정부에 연줄이 있던 사람은 후일 서울이 탈환되었을 때 당연히 부역자 혐의에서 쏙 빠졌다. 웃기는 건 이렇게 연줄 덕분에 처벌을 면한 사람들의 증언이 당시 부역자 혐의로 처벌받은 사람들의 무고함과 불가항력을 반증하는 꼴이 됐다. 6.25가 가까워지면 방송 언론에서 서울 점령기간을 겪은 유명 인사를 초빙해서 증언을 듣는데 하나같이 "협조를 거부하면 인민재판을 당할" 상황이라서 협조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기 때문.

5. 책임 소재

한강교 폭파는 처음부터 육본지휘부에서 다루었다 [61] [62], 따라서 관련이 있는 직접 관계자는 신성모 국방부장관, 장경근 국방부차관, 채병덕 총참모장, 김백일 참모부장, 최창식 공병감 이렇게 다섯명이며, 제일 책임소재가 큰 명령자인 채병덕 총참모장의 전사로, 최창식 대령이 폭파 책임을 지고 사형이 집행되었으나 ,12년만에 재심을 통하여 사후복권됨으로써 책임소재는 상부로 더 거슬러 올라가게 됐지만, 책임을 질만한 상부자는 없어진지 오래다.

피란민들의 여론과 별개로 인도교 폭파로 4만 4000명이나 되는 국군이 강북 지역에서 와해되었고, 이는 낙동강 전선에서 전투가 벌어지던 당시에도 군 내에서도 원성이 자자했다고 한다. 따라서 군 내적으로도 누군가가 책임을 져야하는 상황이였다.

여기서 이 사건의 문제를 정리하면 2가지로 볼 수 있다.

(1) 폭파 지시의 조급성; 폭파 예정시간 보다 일찍 폭파하여 댜량의 군병력 및 군사장비가 손실됨 (적전비행).
(2) 폭파 당시 인명 사상 문제: 폭파 당시 다량의 차량 및 인원이 다리 위에 있음에도 폭파하여 인명 피해가 발생함.

(1)의 책임은 명확하게 직접적인 명령을 내린 채병덕 총참모장 및 군수뇌부이다. 그러나 (2)에 대해서는 상당한 논쟁여부가 있는데, 최창식 대령은 (1)의 항목과 (2) 일부에 상부의 명령이라는 점으로 무죄 판결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당시 군재판 기록과 일부 증언에 따르면, 채병덕 총장은 노량진 남한강파출소를 지나 최창식 대령에게 자기가 떠나고 2, 3분 후에 점화하라고 명령했다고 한다. 이에 따르면 채병덕 총장이 가장 큰 책임소재를 가지고 있는 것 뿐 아니라 다량의 인원이 다리 위에 있음에도 명을 내린 사실상 범인이다.

그러나 당시 동행자 강영훈 대령은 채병덕 총장이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고 증언하였고, 채병덕 총장의 차가 다리를 건넌지 5, 6분 후에 폭파소리를 들었다고 한다. 당시 재판 기록에 따르면 이 부분에 대해서 강영훈 대령의 증언에 무게를 둔 것으로 추정되며, 최창식 대령이 폭파시간을 결정하는데 상당한 재량권을 가지고 있었다고 판단한 것으로 생각된다. 이는 채병덕 총장이 살아돌아오지 않는 한 영원한 미스터리로 남을 듯 하다.

최창식 대령이 당시 법원에서 유죄 판결을 받은데에는 현장에서 폭파집행을 지휘감독한 엄홍섭 중령[63]의 증언이 큰 영향을 미쳤다.
▲재판장=적의 전차가 보이지 않고, 아군의 차량이 계속 도강하고 있는데 어째서 폭파했는가?
▲엄증인=최공병감이 발을 구르며 폭파를 독촉했다. 점화를 명령한다음, 본인은 울었다.
▲재판장=왜 울었는가?
▲엄증인=이제 이 한강다리는 우리 손으로 다시 복구할 수도 없겠고 한강 북안에 남아있는 잔류부대와 피난하지 못한 시민들을
생각하고 울었다.
▲재판장=그 당시의 형편으로는 자동차를 전부 도강시키고 끊었어도 괜찮지 않았겠는가?
엄증인=그렇다. 자동차가 계속 뒤따라오고, 적전차가 나타나지 않았으니 기다렸다가 끊었어도 무방했을 줄로 안다. 하나
최대령의 명령으로 어쩔 수 없이 폭파했다
▲재판장=교량폭파 당시 아군차량을 보았는가?
▲엄증인=남한강 파출소 근처에 있었기 때문에 못 보았다.

이상의 엄홍섭 중령의 증언은 최창식 대령에게 결정적으로 불리한 증언이였다. 최창식 대령은 군법회의에서 자기가 적정을 파악할 의무는 없다고 끝까지 항변했으나, 절단공사에 급급한 나머지 아군의 안전을 위태롭게 하고 무수한 차량과 장비를 적에 노획내지 파손케하였으므로 적전비행 에 해당된다고 판결되어 사형선고를 받았다.
"전시 범죄사실은 심안컨대 설령 교량절단 명령이 유하였다하더라도 적정을 확인하고 아군부대가 완전히 도교한 연후에
절단공사를 실시함은 기술참모인 공병감의 책무이며, 피고인 최창식은 부하공병을 지휘하여 아군의 도하상황을 확인한 연후 절단하여야함에도 불구하고 절단공사 자체에만 급급하여 계속하여 임교하는 아군부대를 인식하면서 교량절단을 실시함으로 인하여 전시와 여한 결과를 초래했음은 국방경비법 제27조 적전에서 비행, 우는 태만으로 인하여 부대의 안전을 위태롭게하는 행위에 해당하여 동조를 적용하며 주문과 여히 판결함".

이 재판의 공정성은 1962년부터 1965년까지 걸린 재심에서 무죄로 판정되었으며 오늘날 정치재판으로 인식되고 있으나, 이후 이와 관련된 추가적인 논증은 정치적으로 상당히 예민한 문제이기에 연구로 이어지지 못하고 있다.
무죄 판결과 별개로, 당시 최창식 대령에게 엄청난 압력이 가해졌으며 이로 인해 급하게 폭파가 이루어졌다는 증언이 존재한다. 최창식 대령은 개성 전투 때 임진강교를 폭파시키지 못했다는 죄책감이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재판에 원태섭 대령과의 문건에 보면 다음과 같은 증언이 있다.
▲최대령=본인으로서는 아무 것도 죄과가 될것이 없다고 생각한다.
▲재판장=임진강교를 폭파하지 못한 원인은 무엇인가?
▲최대령=적이 갑자기 밀려오는 통에 적세에 눌려 절단치 못했다.
▲재판장=참모총장이 그런 사실에 대해 주의를 환기시킨 일이 있는가?
▲최대령=있다. 그래서 총장은 나에게 이번 한강교는 실패하지 않겠는가 하고 두 번이나 물었다.
(중략)
▲재판장=마지막으로 지시한 것은 언제였는가?
▲최대령=6월28일 상오 2시경이었다.
▲재판장=그래서 즉시 폭파했는가?
▲최대령=아니다. 폭파 명령을 받고 현장에 가보니, 아군의 차량이 계속 도하하고 있었다. 그래서 부득이 약 40분간을 기다렸다가 완전히 도하했다고 판단했을 때 점화지시를 내렸다.
(중략)
▲재판장=폭파 당시 한강북안에 있는 아군의 후퇴상황을 파악하지 않은데 대해 귀관의 책임이 없단 말인가?
▲최대령=아까도 말한바와 같이 비가 쏟아지고 암야인데다가 등화관제가 되어 한강북안의 전반적인 상황을 확인할 수 없었다. 다만 북한강파출소 근처에는 차량들이 없었던 것으로 안다.[64]

위 증언에 따르면 최창식 대령은 임진강교 폭파 임무 실패를 빌미로 채병덕으로 부터 엄청난 심리적 압박을 받았고, 이로 인해 아군 도하 및 민간인 여부를 제대로 확인하지 않은채 폭파를 실행했을 수도 있다.

이 재판이 적전비행 이므로 이때 당시 사망한 민간인 통제 문제에 대해서 전혀 논해지지 않았기 떄문에, 이 사건의 진상이 온전히 드러나기는 힘들어 보인다.

5.1. 폭파 명령의 배후

폭파명령의 주체자도 마찬가지 현재까지 논란이 되고 있는데 기본적으로 채병덕 총참모장의 명령으로 시행되었다는게 정설로 알려져 있었으나 그 설이 계속 그동안 반론이 끊임없이 제기되어 왔다. 위 사건경과 서술처럼 한강교 폭파 문제는 채병덕 총참모장이 아니라 신성모 국방장관의 명령이나 혹은 장경근 국방차관의 명령이라는 설이 더 강하게 힘을 얻고 있다. 신성모와 장경근이 동시에, 혹은 둘 중 하나가 독단으로 저질렀거나 두 사람의 상호 묵인 하에 명령을 내렸다는 의혹으로 작용하는 셈이다.출처 1 ,출처2, 출처3 관련 링크이다. 당시 이 문제 관련해서 최창식 대령의 군사재판 때는 채 총장의 명령을 받아서라고 했다지만 군사재판이나 당시 최 대령은 지프에 타고 있었던 채 총장의 동승자들에 대한 증언을 구하지 못했다. 더욱이 채병덕 총참모장은 당시 의식불명 상태였다. 게다가 노골적으로 신성모 국방장관은 이 재판을 빨리 종결하라는 압박을 해왔던 전례를 감안해보면 더욱 의심을 가지 않을수 없는 대목인 점이다. 이것은 훗날 국민방위군 사건 때 노골적인 개입을 했던 전례를 봐도 알수 있다.

이승만 대통령의 경우 인도교 폭파의 직접적 책임자라고 보기는 어렵다. 물론 이승만은 당시 군 통수권자이며 군 작전의 총 책임자로서 간접적인 책임이 있다고 봐야한다는 논리도 있지만 이러한 논리라면 모든 군사행동의 공과가 대통령의 책임이라는 이야기 밖에 안된다. 다만 인도교 폭파로 인한 부정적 내용은 물론 실제하지 않은 민간인 피해까지 더해서 이승만 대통령의 실책으로 사람들에게 인식되어 있고 실제로 이승만 검색시 부정적 평가항목에도 본 내용이 링크되어 있다.

미 군사고문단의 기록에서는 오히려 육군본부의 김백일 대령이 당시 장경근 국방차관의 명령으로 폭파가 진행되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즉 최소한 당시 김백일 대령이 잘못 알고 있는 게 아니라면 국방차관은 자신의 월권행위를 저지른 셈이다. 당시 차관이 그런 명령권한이 없다는걸 감안한다면 더욱 그러하다. 즉 한강교 폭파 명령 자체는 총참모장인 채병덕이 내려 놓은 상황이었지만 미 군사고문단이나 지휘부의 합의로 폭파명령은 우선 준비상태였다고 볼수 있다고 할수 있으나 명령의 주체자는 국방부였다는 이야기가 계속 정황들이 나오고 있기 때문에 현재까지의 통설이었던 채병덕 총참모장의 명령하에서 이루어진게 아니라는 것이 나오고 있기에 명령을 내린 명령권자는 현재 논란 중인 사항이다. 위의 군사고문단 연루설과 관련해 당시 전황 가운데 제임스 하우스만 대위의 직권으로 발동된 조치라는 증언도 존재한다.
누가 한강교 폭파의 명령을 내렸는가? 이승만 정권은 전쟁 중이던 1950년 9월, 폭파 책임을 물어 최창식 공병감을 적전비행죄(敵前非行罪)로 몰아 사형까지 시켰지만, 최창식 대령의 부인 옥정애의 재심청구 요청으로 1964년 10월 결심공판에서 무죄를 선고받았고, 한강교 폭파의 책임은 채병덕 총참모장에게 그 죄가 돌아갔다.
최창식에서 채병덕으로 죄인이 바뀌었지만, 두 경우 모두 정치적 희생양에 불과했다는 점은 공통된다.
그럼 진짜 명령자는 누구인가? 당시 미 군사고문단장 윌리엄 로버츠(William L. Roberts) 준장은 전역하게 되어 한국을 떠났고, 미 군사고문단장 직무대리 스털링 라이트(W. H. Sterling Wright) 대령은 일본에서 막 귀국한 상태였다. 또한 책임을 맡아야 할 선임 통신장교인 챨스 스튜리스는 자신은 한국에 관해 아는 것이 없다며 하우스만에게 전권을 위임한 상태였다. 사실상 하우스만이 최고 책임자였던 것이다.

5·16 후 재심판결에서는 채병덕을 한강교 폭파의 명령권자로 밝혔는데, 채병덕의 고문관은 하우스만이었다. 또한 하우스만은 자신은 한강교 폭파와는 관련이 없다고 말하였다.
그는 김백일이 폭파명령을 내렸다고 증언했지만, 김백일은 하우스만의 지휘를 받는 입장이었다.
한강교는 하우스만이 다리를 건너자마자 폭파되었는데, 하우스만이 단지 행운아이었기 때문일까?

당시 최창식 공병감의 미군측 고문이었고 나중에 충무무공훈장까지 받았던 크로포드(Richard I. Crawford) 육군소령은 폭파 당시 최창식은 자신과 같이 짚차를 타고 다리를 건너기 직전이었으며, 나중에 최창식의 누명을 벗겨주려 했으나 하우스만이 입 다물고 있으라고 말했다고 증언하였다. 크로포드는 이름을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았지만, 채병덕에게 폭파 지시를 내린 것은 ‘미군 장교’였고, 그는 국군 참모총장의 고문이었다고 증언했다. 만약 한강교 폭발로 서울시민 몇 백 명의 생명을 일시에 빼앗은 사람이 채병덕이라면, 그 사람에게 명령을 내릴 수 있었던 사람은 바로 하우스만이었던 것이다.
김득중, 2001, '여순사건과 제임스 하우스만', 여순사건 제53주기 학술세미나 발표문 : 여순사건의 진상과 국가테러리즘 수록, 여수지역사회연구소#1 #2

국사편찬위원회 김득중의 하우스만에 관한 논문에서 크로포드 소령의 증언은 다음과 같다고 한다.
"Maj. Crawford tried to clear poor Col. Choe, but his superior told him to keep his mouth shut and not to meddle in Korean affairs. His superior was none other than Captain James Hausman, an officer junior in rank but with connections with the right people. Maj. Crawford stated that it was "an American officer" who told the ROKA chief of staff, Gen. Chae Byong Duk to blow up the bridge. Maj. Crawford never mentioned the officer by name but he said that it was a captain who was advisor to the ROK Army Chief of Staff - i.e., Captain James Hausman - the Father of the South Korean army."
김득중의 논문에서는 출처 링크를 제시하였으나, 현재 해당 링크 게시물은 사라져 있는데, 한국과 북한에 대한 뉴스가 있는 사이트다. 웨이백 머신 아카이브로# 확인 가능하다.

폭파 시점에 하우스만은 차량으로 이미 수원에서 이동 중이라 축지법이나 순간이동을 하지 않는 이상 폭파를 지시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는 반론이 있는데 정작 제임스 하우스만의 회고록 <한국 대통령을 움직인 미군 대위> 203~204쪽에서는 하우스만이 27일 지프차로 한강인도교를 건널 당시 교량폭파가 준비 중이었고 하우스만이 차를 세운 뒤 한국군에게 절대 폭파를 하지 말라고 지시했는데 수원에 가려고 28일 새벽 한강 다리를 지날 때 폭파를 해서 자신도 죽을 뻔했다고 증언하고 있다. 만약 진짜로 폭파 당시에 하우스만이 차량으로 수원 지역에서 이동하고 있었다는 미군 자료가 있다면 그 미군 자료와 하우스만의 증언이 모순되는 상황이므로 어딘가에 조작이 가해졌다는 것이고 그것은 무언가 숨기려고 하는게 있다는 이야기이며 오히려 하우스만을 더욱 의심스럽게 만들 뿐이다.
한강 다리를 되돌아오면서 다리 양옆으로 자갈 무더기만큼 크게 쌓아놓은 화약 더미를 보고 세드베리 소령으로 하여금 차를 세우게 한 뒤 한국군 장교에게 이것을 치우라고 명령했다.
이제 미군이 들어오는데 다리를 폭파시킬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내 말을 경비장교가 알아들었는지를 확인하기 위해 화약 뭉치 하나를 다릿발에서 떼어 밖으로 끌어내 보였다. 물론 이 명령은 지켜지지 않았고, 한강 다리는 그날 밤 끊겨 현장에 있던 5백~8백 명의 인명 희생은 물론, 아직도 철수를 기다리고 있던 1사단 병력, 2 · 3사단 병력, 그리고 서울의 피복 창고 보급품, 병기 등 모든 군수품을 고스란히 적에게 바치는 결과를 야기했다.
그날 밤(28일 새벽) 동경 맥아더 사령부의 처치 장군이 일단의 사령부 장교를 이끌고 수원비행장으로 오게 돼 있어 나는 보병학교 고문 보브 헤이즈레트 중령, 李수영 중위, 운전병 신영선 하사와 함께 급히 한강 대교를 건너게 됐다.
다리를 막 건넜을 무렵, 거대한 폭음과 함께 다리가 무너져 내렸다. 그 폭음과 이 얼마나 강했던지 지프 전체가 불바람에 휩쓸려 날아가는 것 같았다.
다리를 건너기 전 우리 옆집에 살던 킹 중령을 만난 일이 있는데, 그는 나보다 속도가 늦어 다리 폭발 지점 직전에 있다가 참변을 목격하고는 내가 틀림없이 폭음에 휩쓸려 갔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킹 중령은 곧 일본에 건너갔는데 거기서 내 애기를 아내 버트에게 해 한동안 내가 죽은 줄 알고 온 식구가 슬픔에 싸였었다.
다리 폭파에 관해서는 공병감 최창식 대령이 이 문제에 관해 재판을 받고 사형이 집행됐으며, 그 뒤 박정희 정부 때 재심을 청구해 사후 무죄가 결정되기도 했지만 나는 관련이 없었다.
뒤에 안 애기지만 본부에 남아 있던 참모차장 김백일이 다리 폭발을 중지시키려고 작전국장 장창국 대령과 정래혁 중령을 급히 현장으로 보냈는데 이들이 탄 지프가 피란민에 밀려 겨우 다리 난간에 들어섰을 때 폭음이 일어났다는 것이다. 하마터면 이들도 날아갈 뻔했던 것이다.
제임스 하우스만, 한국 대통령을 움직인 미군 대위, 203~204p

미 군사고문단은 폭파를 저지하려고 하고 있었다면서 영관급들이 폭파를 저지하려고 하는데 대위가 독단적으로 폭파를 지시할 수 없지 않냐는 이야기도 있는데 하우스만은 한국에 대한 전문성을 인정받아 로버츠 주한미군사고문단장의 신임을 얻었고 미군 모두가 한국에서 자신의 조언을 구했는데 자신이 대령들에게 조언을 통해 사실상 명령하여 지휘하기도 했다고 회고록에서 밝히고 있다. 게다가 당시 하우스만의 상급자들이 자리를 비우거나 하우스만에게 전권을 위임한 상황이었다. 스털링 라이트 대령(William Henry Sterling Wright)은 전쟁이 발발하자 27일 일본에서 막 귀국한 참이었다. 그리고 하우스만은 명목상의 대외적인 신분대로 일개 고문관 대위 따위가 아니라 G-2 정보 장교이다.

흥미로운 것은 하우스만의 증언 내에서도 앞뒤가 안 맞는 모순적인 사실이 보인다는 점이다. 전쟁 전날 밤 낙성대 파티에서 한국군 장교들이 술파티를 벌이는 것을 지켜보았는데 채병덕이 피곤해보였다는 말을 하면서 동시에 자신은 파티에 나가지 않고 일찍 잠잤다고 증언하고 있다. 전쟁 전날의 낙성대 파티에 관해서도 뭔가 거짓말로 숨기는 게 있다고 볼 여지가 있다. 또 한강 다리 폭파에 대해서 증언할 때는 킹 중령이 일본에 건너가 하우스만의 아내 버트에게 이야기를 해줬다고 했는데, 한국 전쟁 발발에 대한 증언에서는 하우스만의 아내 버트가 전쟁이 발발했을 때 김포로 와 있었다고 증언하고 있다. 참고로 김포는 한강 이남 지역이며 정말로 전쟁이 일어났을 때에 아내가 김포에 있었다면 하우스만은 한강 이남으로의 인민군 도하를 막아야만 할 절박한 이유를 가질 수 밖에 없었다. 즉, 북한군이 서울로 진입하자 김포에 있는 자신의 아내가 걱정되어서 공황에 빠져 충동적으로 한강 다리 폭파 명령을 내렸을 가능성이 있다.
24일 밤 육군 장교 클럽 낙성 파티가 있어 상당수 장교들이 밤늦게까지 술을 마셨다. 채총장도 다소 피곤한 모습이었다.
나는 다행히 이 파티에 나가지 않아 24일 밤을 일찍 잠자리에 들었었다.
아내 버트는 오랫동안 결절형성증을 앓아 왔다. 폐렴을 앓은 후 폐의 기능이 약해져 가래가 점막을 타고 올라오지 못하는 병이다. 병원에서 사람을 거꾸로 눕힌 후 일정한 치료를 해 가래를 뱉아 내게 한다. 이 폐결절형성증이 도져 아내는 6월 11일 동경종합병원에 입원했다가 22일 퇴원해 한국에 돌아오던중 비행기가 고장나 24일 하오에야 김포에 내릴 수 있었다.
나는 아직 약기운이 가시지 않은 아내를 집에 데리고 와 일찍 잠자리에 들게 하고 나도 비교적 일찍 잠을 잤던 것이다.
육군본부 건물의 별채인 시멘트 건물 아래층에 작전상황실이 있었다.
참모들이 모여들고 옹진, 의정부, 문산, 춘천, 강릉 등에서 동시에 "敵軍이 탱크를 앞세우고 넘어온다"는 보고를 받고 있을 즈음 누구도 이것이 단순한 국경 충돌 아닌 전쟁이라는 것을 판단하지 않은 사람은 없었다.
전쟁 소식이 퍼져 나가자 경무대, 국회 등에서 힐책 전화가 오기 시작했다. 우선 채총장은 상황을 알아보기 위해 의정부로 나갔다. 그는 얼마 후 전쟁을 확인하고 돌아왔다.
全전선에서는 "탱크가 넘어온다" "대부대가 공격해 온다"는 급박한 보고만 계속 들어왔다. 일종의 공황(panic) 상태였다.
적의 병력, 무기, 전술 등을 분석하고 여기에 대처할 아군의 병력, 무기, 전술 등을 계산할 아무런 여유가 없었다.
제임스 하우스만, 한국 대통령을 움직인 미군 대위, 198p
美고문단(KMAG)의 경우도 참으로 곤혹스런 상황이었다.
KMAG는 49년 6월 한국에 가장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美제5연대가 하와이를 향해 떠나 버리자 사실상 문관 지위로 떨어져 있었다. 소속도 대사관 소속이었으며 전쟁에 대비한다는 생각이나 계획은 아무것도 없었다. 고문단은 위기시에는 철수하라는 명령을 받고 있었다.
때문에 25일 대사관이 주한 미국인의 철수 계획을 세울 때 KMAG 요원들과 그 가족들의 이름도 철수자 명단에 들어가 있었다.
마침 KMAG 단장 윌리엄 로버츠 준장은 별 2개를 다는 데 실패한 후 퇴역차 한국을 떠나가고 없었고 부단장격인 참모장 스텔링 라이트 대령은 가족 전송차 일본에 가 있었다.
로버츠 장군은 22일 동경병원으로 나의 아내 버트를 방문해 한아름의 꽃을 선사한 후 바로 그날 미국행 배를 탔으며, 6 ⋅ 25 그날 아침에는 태평양상의 어느 곳에 있었던 것이다.
KMAG의 선임 장교는 통신장교인 찰스 스튜리스 중령이었다.
단장과 부단장이 없으니 선임 장교가 고문단을 이끌고 가야 하는데, 통신장교인 스튜리스 중령은 한국에 관해 아는 것이 없다면서 나에게 전권을 위임하겠다 했다.
형식상으로 내가 KMAG 최고 책임자가 되든 안 되든 그것은 사실 특별한 의미가 없는 것이었다.
KMAG는 한국군 자문을 위해 있는 것이었고 한국군총사령부의 자문은 지금까지 내가 맡고 있었으니까 이런 변화는 별 의미가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이 중대한 시점에 미국이 한국에 대해 무엇을 할 것인가에 관한 것이 의문이었다.
나는 25일 고문단 가족들의 철수 계획이 순조롭게 진행돼 가는 것을 보면서 동경의 맥아더 사령부에 지금 서울에서 벌어지고 있는 상황을 열심히 보고했다. 25일 바로 그날 아내가 타고 왔던 C54기는 김포공항에서 북한의 야크기 공격을 받아 날개가 달아났고, 서빙고의 육군본부 KMAG 본부도 가끔 야크기의 공중 공격을 받고 있었다.
제임스 하우스만, 한국 대통령을 움직인 미군 대위, 199~200p
27일 일본에 갔던 라이트 KMAG 참모장이 돌아왔다. 나는 사태 진전 상황을 무초 대사에게 계속 보고하고 있었다. 무초 대사는 가끔 사령부를 찾아왔다. 라이트 대령이 돌아왔을 때 무초 대사도 KMAG 본부로 왔다.
KMAG는 한국군본부 건물에 같이 있었다.
대낮쯤이었다. 무초 대사가 와 있던 바로 그 때에 야크기 총사격이 잇달아 퍼부어졌다. KMAG 사령관의 비서실에 커다란 쇠금고가 하나 있었다. 나는 사격이 가해지는 반대 방향으로 무초 대사를 떼밀어 금고 뒤에 숨게 하곤 하다가 야크기가 사라지자 콘크리트로 된 이웃 작전과 건물로 모시고 가기도 했다.
...
나는 27일 비원을 돌다가 물밀듯이 닥치는 북한군의 탱크를 봤다.
26일에는 사령부 병사들이 적의 야크기가 계속 공습해오자 M1총, BAR 자동소총으로 마구 갈겨 야크기 한 대가 맞아 연기를 뿜으면서 산꼭대기 쪽으로 추락했다. 사람들이 박수를 치면서 만세를 불렀다.
27일이 되자 사태가 급박해졌다. 서울의 이곳저곳에 탱크가 들어왔다는 소식이 들렸으며 전선의 어느 곳에서도 한국군이 승리하고 있다는 보고는 없었다.
제임스 하우스만, 한국 대통령을 움직인 미군 대위, 201~202p

6. 폭파 이후

이 사건으로 민심이 흉흉해지자 군당국은 국군의 낙동강 방어선에서의 반격 당시 지뢰 매설지를 표시하지 않아 체포된 공병감 최창식 대령(당시 30세)을 책임자로 지목해 적전비행죄로 군법회의에 회부하여 사형에 처했다. 그러나 재판에서 그는 채병덕 총참모장의 명령을 따랐을 뿐이라고 일관되게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였으며 총살형을 당하는 순간까지 희생자들에 대한 아무런 유감이나 사죄도 하지 않았다. 당시 정황상 공병감의 독단으로 한강교를 폭파했다는 것은 전혀 말이 되지 않았고 최창식 대령도 개인적으로 본인의 아내와 돌을 갓 지난 아들을 한강 이북에 남겨 놓은 상황이었으니 한강교를 폭파할 이유 [65] 없었으므로 결국 희생양이 된 것이다. 그로부터 14년 뒤인 1964년에 유족들이 청구한 재심에서 무죄 판결을 받아 최창식 대령은 비로소 명예를 회복하게 되었고 2013년에는 국립서울현충원에 위패가 봉안되었다.

그러나 이미 억울하게 사형이 집행된 사람의 생명을 되돌릴 수는 없는 일. 이는 대한민국 사법부의 과오 중 하나로 회자되는 사법살인의 흑역사다. 또한 1964년의 시대적 배경을 잘 살펴볼 필요가 있다. 바로 이승만이 대통령을 물러난 이후였다. 따라서 최창식 대령의 사면 복권은 이승만이 대통령으로 있는 한 절대 불가능한 일이며 이승만 정권이 붕괴되고 최창식의 동문인 박정희 정권이 들어선 후 무죄 판결이 내려졌다.

한편 이승만 대통령은 이 때의 학습효과 때문에 1950년 말에 들어 중국 인민지원군의 반격으로 전황이 불리해지자 12월 8일에 '부녀자의 소개는 자유로움'을 공표하였고 12월 24일에는 서울시민에 대해 피난 명령을 내린다.진작 이렇게 했어야지 인민지원군의 본격적 공세가 11월 25일에 시작되었으며 혜산진까지 진출해 있던 연합군의 후퇴 명령이 12월 1일에 내려졌음을 생각할 때 대단히 신속한 결정이었다. 이를 1.4 후퇴라고 부른다.

당시 집은 대문을 나무로 만들었는데 이 문짝을 뜯어서 보트로 사용해서 피난갈 사람들은 피난갔다. 다만 한강은 하상계수가 전세계적으로 최상위권에 위치한 강이고 하필이면 유량이 급격하게 불어나는 장마철인 6월 말이라 제대로 된 배가 아니라 급조 선박을 이용한 사람 상당수는... 참고로 1.4 후퇴 때에는 한강이 사람이 건널 수 있을 정도로 꽁꽁 얼어서 이런 비극을 피할 수가 있었다.

2011년에 구중회 외 납북 제헌의원 12명의 유족 총 22명이 "이승만 측이 전쟁 정황을 거짓 발표하고 한강 다리를 폭파한 후, 제헌의원들에 대한 피난 조치를 하지 않았다"며 국가를 상대로 서울중앙지방법원에 소송을 냈으나 2013년 5월에 법원 측은 "6.25 당시 한강인도교 폭파 행위가 현재의 시점에서 다양한 역사적 평가가 가능하더라도 이 행위가 고의나 과실에 의한 위법행위라 볼 수 없다"면서도 제헌의원들의 납북 건을 입증할 인과관계를 찾을 수 없다고 하여 이들에게 패소 판결을 내렸다.(2011가합113603)

최근 연구 조사 결과와 신규 사료에 의해 인명피해자 대부분이 군인과 경찰인 것으로 추정되는데 그렇다고 "북한을 피해 피난하던 민간인이 있던 인도교를 정부가 버리고 폭파 → 한국을 지키기 위해 싸우는 역할인 국군이 폭파"로 피해자들의 신원과 규모가 바뀌는 것이지, 어느쪽이든 정부의 당시 대응에 사상자가 발생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7. 대중매체에서

대령: 그... 그렇습니다!
중장: 한강 철교를 폭파시켜!
이 대령:예엣?
중장: 그 수밖에 없잖아! 주민들이 피난 못 가게 하기 위해서는.
대령: 하...하지만!
중장: 이건 명령이다! 즉시 시행해!
대령: 아...알겠습니다!||
후에 이 명령을 받고 한강다리를 폭파한 이 대령은 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언도 받았다!

8. 참고/관련 자료

9. 관련 문서



[1] 경찰 77명의 사망은 공식 확인되었으며, 경찰, 군인, 민간인 등 800명은 공식 확인되진 않았으나 미 군사고문단 장교의 증언으로 추정한 최대 사망자 수.[2] 당시 한강철교는 3개였다. 네 번째 철교는 1994년에 신설되었다.[3] 인도교도 당시 1개였다. 두 번째 다리는 1981년에 신설되었다.[4] 2013년홍성군으로 이전하였다.[5] 인민군정이 시작하기 전 며칠 동안은 피난을 갈 수 있었다.[6] 폭파에 성공한 유일한 다리는 京春(경춘)가도의 중랑교였다.[7] 당시 탱크를 저지할 만한 수단은 다리 폭파 밖에 없었다, 무기도 부족하고 대전차전술도 부족했다, 그래서 당시 육본 및 공병 측에서 다시 폭파에 실패할까 조급해서 폭파를 서둘렀다는 주장도 있다.[8] 모랄빵이 나서 독전대가 총구를 들이대도 도망치고 있었다고 한다[9] 다만 북한 측 자료에서도 28일 새벽을 기점으로 총공세가 펼쳐져 6시 경에는 전차 부대 주력의 서울 진입과 주요 시설 접수가 이루어졌음을 기록하고 있었고 소련 군사고문단장 블라디미르 라주바예프의 기록에서도 자정을 전후로 일부 전차들이 단차단위로 서울 시내에 진입하였음을 명시하고, 아측 기록에서도 창동 방면에서 북한군 전차 2대가 목격되었던 점은 교차 확인이 가능한 부분이다. 한편 새벽 2시 미아리의 방어선을 뚫고 서울로 진입한 북한군 전차의 목격보고를 접한 국군 지휘부가 서울 방어선이 돌파되었다고 판단해 패닉에 빠져 교량 폭파 명령을 내린 것이 아니냐는 추측도 있다. 이외에 한강대교 폭파 이전까지 임진강 철교 등 국군의 주요 교량 폭파 시도가 여러 이유로 모두 실패하여 공세 둔화에 실패하였던 이력과 한강 도하를 허용한다는 것의 상징성 때문에 지나치게 조급증적인 반응을 보였다는 해석도 있다.[10] 당시 김종필 중위의 증언에 따르면 채병덕 총장은 이 보고를 듣고 손을 벌벌 떨고 있었다고 한다.[11] 신성모는 이때 전권을 채병덕 총장에게 위임한 상태였다.[12] 인민군이 도화선 부분을 포격하여 절단했다고 한다[13] 이때 8대의 전차는 추후 보병의 엄호를 받지 않는 전차대 단독의 돌진이였다.[14] 이때 김종필, 박정희 같은 인물들도 인도교를 통해 시흥으로 철수하려 했다. 김종필은 수십년 뒤 회고록에서 이 떄의 기록을 작성하여 박정희도 이를 목격했을 가능성이 크다.[15] 증언이 엇갈림.[16] 다리 위에 차량이 있는 것 같아서 40분 기다린 뒤 폭파헸다고 증언하였으나, 워낙 다른 증언이 많아서 불명확.[17] 국군 측은 당초 북한군의 서울 진입 2시간 이전 폭파를 예정하고 있었다. 다만 접적상황에서 방어선을 유지하며 그것도 피란민의 행렬 가운데 철수작전을 진행하기에 2시간은 역부족일 것이 명백하다는 점에서 이 역시 현실적인 계획은 아니었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18] 마거리트 히긴스는 자신의 비망록 'War in Korea'에서 3명의 남성 종군기자들이 먼저 수원으로 도착해서 특종 기사를 송고할 것을 생각하니 침울해졌었다고 당시 심정을 기술했다.[19] 이 사진으로 데스퍼는 1951년 퓰리처상 특종사진 부문을 수상했다.[20] 당시 북한 시민들이 적극적으로 남하한 이유는 인민군이 유엔군 탈환지 주민들에게 부역책임을 물어 학살을 자행했기 때문이다, 함흥 철수 당시 민간인이 많았던 이유도 이와 비슷하다.[21] 군부정권에서조차 반공이라는 키워드만 맞으면 이 사건에 대해 비판하는 문학작품의 출간을 허가했다.[22] 이승만이 먼저 탈출하고 민간인들이 지나가는데 다리 폭파를 지시했다는 비난과 기술이 수십년간 소문으로 돌았다.[23] 이들을 앉힌 사람은 인사권을 쥔 이승만이므로 부적절한 인사를 했다는 것은 비난받을 만 하다. 별개로 채병덕은 행정 부분에서는 매우 뛰어났다 전시에 개판을 쳐서 그러지.[24] 대표적인 몇가지 사례: (1)1950년 오전, 전쟁이 터지자 마자 탄약이 10일치 밖에 없다는 사실을 무초대사에 전달하여 미극동사령부에 요청. Policy and Direction: The First Year, p.65, (2) 미공군의 조기 참전 요청.[25] 당시 군은 파벌 문제가 심각해서 회의도 제대로 열지 않았다.[26] 이 와중에 신성모와 채병덕은 국군이 유리하다고 거짓말을 친다, 6월 25일 밤에 이승만이 신성모의 불리한 의정부 전황을 듣고 대전 천도를 결정한 것을 볼 때, 왜 여기서 거짓말을 했는지는 이유가 불분명하다. 국방부, 『한국전쟁사』제1권(개정판), 587p[27] 27일 새벽 피난을 왜 했는지는 프렌체스카 일지와, 무초의 FRUS 1950, 176쪽 보고에 의하면, 신성모가 특별열차로 새벽 3시 이승만 탈출, 새벽 7시에 특별열차로 내각을 남쪽으로 내려보낸 것을 보고함을 볼 때 피난 자체는 신성모가 주도한 것으로 보인다, 프렌체스카 일지에는 허위보고를 올렸다고 기술되어 있다.[28] 미국 중앙정보국 정보보고서 Daily Report 1 ; 한국전쟁 자료총서 16, 5~6쪽[29] 그렇다고 건국전쟁 등에 묘사된 것처럼 이상적인 대처를 했다는 식으로 미화하는 것도 넌센스이며 교차검증되는 사료를 볼 때 최소한 항전의지는 내비쳤다는 것이다.[30] 김동춘이 집계한 통계는 아니나 사료를 찾기 힘들어서 인용[31] 이들은 공산치세를 겪었거나, 북한군에게 잡히면 무조건 죽는다는 사람이 많았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피란 활동을 한다. 실제로 90일간의 인민군의 서울 점령 기간 동안 수 많은 사람들이 불순분자라는 명목하에 학살되었다.[32] https://www.dbpia.co.kr/journal/articleDetail?nodeId=NODE00008642[33] 국방부의 기만방송과 피란령을 내리지 않았음에도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피란을 간 사람들이 많었던 이유는 개성 전투 직후 국방부에서 서울시내에 호회로 뿌려 서울 시내 근처로 북한군이 온다는 소문이 파다했기 때문이다.[34] 국회프락치사건 관련자들 등[35] 한마디로 애매하다.[36] 최초로 이 사건을 제기한 작품은 4.19 혁명 이후 발행된 <흑막> 인데, 이 책자에서는 이 사건에 관련하여 민간인 피해자와 이승만 정부와 군 당국을 직접적으로 비판하고 있다.[37] 한강교 폭파에 의한 직접적인 사망이 아니더라도, 당시 패닉에 빠져 나룻배에 의지하여 강을 건나다 사망한 민간인들 및 피란을 가지 못해 인민군 치하해서 사망한 사람들 등 간접적인 인명피해자들도 다수 존재한다.[38] 그 동안 나무위키 한강인도교 폭파 문서에서 신기철 인권평화연구소장의 2014년 저서 '국민은 적이 아니다'에 500~800명의 민간인 사망설이 기술되어 있고 그 후 2016년 발표 소논문 '기록과 기억, 그리고 진실'에서 민간인 사망설이 정정된 것으로 잘못 설명을 했는데 '국민은 적이 아니다'에 민간인 사망설은 잘못 알려진 사실로 민간인 사망자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2016년 소논문보다 더 자세히 설명되어 있었다.[39] 해당 논문은 앞의 링크에서 20161021_규장각발표문(신기철) 파일을 다운로드하면 볼 수 있음[40] 한 예로 미국 메릴랜드 주 국립문서기록보관청(NARA)이 가지고 있는 한국전쟁 관련 사진들을 책으로 펴낸 <한국전쟁 2 NARA에서 찾은 6.25전쟁의 기억>의 275쪽과 277쪽에는 한강인도교 옆에 설치된 부교를 타고 한강을 건너는 시민들의 사진이 실려 있는데, 문제는 이 사진들이 촬영된 시기가 1951년 5월 29일로 중공군의 춘계 대공세(1951년 4월 22일~1951년 6월 10일)를 피해 피난을 가려는 서울 시민들이었다. 한강인도교 폭파 전에는 이런 형태의 부교는 없었다. 교각을 따라서 뗏목과 널판지를 연결해서 다리를 건너는 부교가 있었다는 기록이 있지만 이 기록의 출처는 외국인 작가가 쓴 '인천 1950(Inch'on 1950)'이라는 책. 근데 이 책 속에 들어 있는 사진은 한강인도교가 아닌 한강 철교이다. 때문에 작가가 언급하는 한강교는 한강인도교가 아닌 한강 철교였을 가능성이 높다.[41] 이승만의 지시로 한강인도교 옆에 부교가 설치되어 수많은 피란민들이 안전하게 건너갔다는 주장이 있으나, 문제는 그런 증거가 없다. 이승만 본인도 그런 식의 말은 한 적이 없다.[42] 77명 사망을 주장하는 류석춘 교수도, 부교는 당시 민간인이 만들어서 사용했다고 부연설명한다.[43] 이 증언은 실제로 다리를 건넌 후 철교 폭파 장면을 촬영했기 때문에 신빙성이 높다.[44] "한강다리 폭파는 예고 없이 벌어졌다. 임인식은 피란민들과 급히 강물 속으로 들어가 부교를 잡았다."[45] 당시 폭파 지휘관 최창식 대령은 법원에서 비가 너무 내리고 어두워, 강 반대쪽이 아에 보이지 않았다고 증언하여 교차검증된다.[46] 미 공군이 한강 철교를 파괴할 때 촬영한 항공 사진에도 인도교쪽에 부교는 보이지 않는다#.[47] 출처: '한국전쟁사 제1권' p. 555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 1977년)[48] 6.25때 박정희, 김종필과 함께 정보국에서 근무한 국군 장교이며 훗날 제4공화국에서 제9대 국회의원을 지냈다.[49] 박정희의 심복이자 조카사위이며, 박정희가 세운 3공화국의 2인자였다. 6.25 때 박정희와 같이 정보 분야의 육군 장교로 근무했다.[50] 출처: 어느 인문학자의 6.25/ 강인숙 지음/ 에피파니/ 2017년 6월 19일/ 43~55쪽[51] 서울 수복 이후 즉 시간차가 존재하고, 무엇에 눌리워 사망한 사람과 한강교량 절단으로 사망한 사람을 합쳤으며, 당시 한강인도교 근처에서 과학적인 시신 수습에 의한 신원 확인이 아닌 정황 조사 등으로 이루어진 통계이기 때문에 신빙성이 떨어지며 더 명확한 통계자료가 필요하다.[52] 출처: 《回顧 90년》[53] 출처: 《나라를 사랑한 벽창우》[54] 북한군이 서울 점령 후 공세를 중단했던 3일의 의미에 대해서는 여러 해석이 존재하며 대표적인 원인으로는 국군 6사단의 춘천-홍천 전투로 본다. 자세한 내용은 6.25 전쟁 문서 참조.[55] 의정부 전투 당시 채병덕과의 의견대립으로 구두해임된 상태.[56] https://www.amazon.com/This-Kind-War-Fiftieth-Anniversary/dp/1574883348[57] 당시 서울시 인구는 약 145만 명이었고 피난간 사람들은 대략 40만 명이였고 80%는 광복 직후 남쪽으로 피난온 사람들이였다. 대다수 서울시민들은 피난가지 못한 채, 혹은 안간 채 '잔류파'가 되었다.[58] 폭파 당시는 사실상 다음 날 서울 완전 함락이므로 마지막 기회였던 셈이고 전쟁 소리가 다가와 늦게나마 피난을 시작했던 사람들이 많았다.[59] 출처: 한국 현대사 산책 1권/ 강준만 지음/ 인물과사상사/ 2004년 발간/ 117쪽[60] 출처: 한국 현대사 산책 1권/ 강준만 지음/ 인물과사상사/ 2004년 발간/ 117~118쪽[61] 이승만은 전쟁 방어작전에 관련된 모든 권한을 국방부장관에게 위임할테니 자신은 미군지원을 끌어온다고 했다, 추후 대전에서 맥아더와 통화를 진행한 것을 볼 때 거짓말 쳤던 건 아니다, 서울에서는 회선 문제로 맥아더와 통화가 불발되었다.[62] 참모학교장 김홍일씨는 국방부에서 다루다가 육본으로 옮아갔다는 다른 증언을 하였다.[63] 일부 문헌에는 엄증인이라 되어 있지만 법원기록이라 약식으로 기록된 듯함[64] 엄홍식 대령은 아군 차량이 보였고 적군이 나타나지 않음이 보였다고 진술하여 모순된다, 즉 누구 말을 믿느냐에 따라서 해석이 달라지긴 하나, 아래에 기술된 다른 증언을 종합해보면 충분히 인식 가능했을 것으로 판단된다.[65] 임진강 다리 등 다리 폭파임무를 연속적으로 실패해서 압박을 많이 받았다는 설도 있다[66] 다행히 나루터에서 배를 준비해온 이화룡(안승훈 분)을 만나서 강을 건널 수 있었다.[67] 이 대사를 어림도 없다 암과 합성하여 "서울에 있는 시민들은 어림도 없다!! 암!!"이라는 무책임한 대사로 마개조하기도 한다.[68] 초반부 시체 장면 등으로 인해 연령인증 제한이 걸려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