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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 여러분 안심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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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일부 오해3. 상세4. 실제 방송 내용
4.1. 미군 측 연설 전문 기록4.2. CIA 감청 후 축약문4.3. 학계의 평가
5. 역사 왜곡이라는 주장과 반론6. 실제 방송 당시 배경
6.1. 전쟁 발발 후 이승만의 행적6.2. 미국 대사의 서울 사수 논쟁6.3. 특별 방송 당시 방송국 현장 상황
7. 이후
7.1. 피난민들의 구성 및 인민군의 학살7.2. 6월 28일 미군의 전쟁 중간 평가 7.3. 실제 라디오 연설 음성 발굴
8. 대중 매체에서9. 배리에이션

[clearfix]

1. 개요

2016년부터 인터넷에서 유행한 . 이승만을 비하하기 위해 사용되는 용어이다.

6.25 전쟁 개전 이후 서울 함락이 될 때, 국방부에서 무분별하게 남발한 선전 방송과 연계되어 이승만이 사기 진작 연설을 진행했으나, 이승만과 내각은 6월 27일 새벽에 대전으로 이미 피난했다는 사실을 기반으로 만들어진 단어이다. 관련 인터넷 유행어로는 이 있다.

이승만 대통령의 이름과 합성하여 런승만이라는 멸칭도 나왔으며 이 드립은 심영물에서도 자주 쓰인다. 응용으로 큰 문제가 생겼는데도 별일 아니라며 정신승리하거나 기만하는 모습을 풍자할 때 쓰이기도 한다. 지금에 와서는 당사자가 정신승리를 하지 않아도 그냥 당사자의 언행이나 성적 등이 망했다 싶으면 갖다 붙이며 망한 당사자가 자학용으로 쓰기도 한다.

2. 일부 오해

“서울 시민 여러분, 안심하고 서울을 지키십시오. 적은 패주(敗走)하고 있습니다. 정부는 여러분과 함께 서울에 머물 것입니다.”, “국군은 총반격으로 적은 퇴각 중입니다. 이 기회에 우리 국군은 적을 압록강까지 추격하여 민족의 숙원인 통일을 달성하고야 말 것입니다."[2]
일반적으로 알려진 방송 내용. 하지만 이 연설문은 실제 했던 연설이 아니다. 다만 실제로 했을 법한 내용[3] 때문에 런승만 및 국민 여러분 안심하십시오 드립과 함께 밈화되어 자주 사용된다.
사실 일단 이승만은 육성 방송으로 저런 발언을 한 적은 없다. 대전으로 피난 간 이후인 밤 10시에 한 방송이 이승만의 육성 방송이었으며 그 내용은 국군이 밀렸지만 조만간 미군이 도착해서 도와줄 테니 공산당은 지금이라도 항복하라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이튿날 아침까지 이승만이 아닌 국방부를 비롯한 정부 인사들이 흔히 서울 사수 방송이라고 알고 있는 방송을 해댔기 때문에 사람들이 착각한 것이다.

문제는 이후 27일이 될 때까지, 정부 차원에서 국민을 상대로 의정부가 안전하다, 북한군이 물러나고 있다는 등 사실과 다른 선전 방송을 했으며, 의정부가 뚫려 인민군이 서울 시내로 밀어닥치기 직전에도 선전 방송을 철회하지 않았고, 이승만 또한 이후 연설에서 불리한 전황을 보고하고 피난 관련 언급을 하긴 했으나[4], 누가 봐도 적극적으로 종용한 것은 아니고, 국군이 비록 털리고 있지만 미군이 오고 있으니 공산주의자들이 항복하라는 말이 담겨 있는 등 맥락 자체가 선전 방송과 비슷하게 들렸던 게 문제였다.

3. 상세

25일 전쟁 발발 이후, 국방부와 공보처는 개성 전투 및 서울 근처에서 전투가 벌어진다는 사실 자체는 호외로 공지하였으며, 시민들은 전쟁 발발 자체는 인지하였다.

당시 국방부는 개성 함락 이후 임진강교를 폭파하면서 시간을 벌 수 있을 것이라는 판단을 하였으나, 1개 교량을 제외하고 폭파에 실패하여 북한군 전차의 서울 진입을 저지하지 못했고 7사단이 빠르게 붕괴하면서 당시 국방부 예상보다 빠르게 서울이 함락될 위기에 처했다.[5] 임진강교들의 폭파 실패 이후, 국방부는 한강 다리 폭파를 서둘러 준비하게 되었고, 대한민국 정부와 국회는 26일 밤 긴급 국무 회의와 긴급 국회를 열어 27일 새벽 수원으로의 천도를 결정하게 된다.

27일 새벽에 이승만과 내각이 대전으로 이동하였으며, 이 와중에 국방부, 공보처가 특별 발표 등으로 기만 보도를 한다.

1) 군보도과: 27일 오전 10시 국군이 반격에 성공했다는 취지의 승전 보도.
2) 공보처[6]: 27일 시간 불명: "정부의 수원 이전을 취소하고, 국회는 국민과 더불어 서울을 사수하기로 결정하였다 (...) 정부와 군경을 신뢰하고 추호도 동요치 말라".

이러한 방송이 이어지던 와중, 이승만은 27일 저녁 7시 반 당시 KBS 대전방송국 유병은에게 방송을 서울로 올려 보내서 전국에 중계하라는 지침을 내려, 27일 밤 이승만의 특별 담화가 서울에서 시작되었으며, 실제 연설 내용과 별개로 기만 보도와 이어지게 방송이 시작되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이승만이 서울이 안전하다는 취지로 연설을 했다고 착각하였다.
당시 이승만 대통령의 연설 전후로 어떤 내용이 함께 방송되었나면, 대한민국 국회가 서울을 사수하겠다고 결의한 내용에 대한 소식, 그다음 국방부 정훈국에서 의정부를 탈환했다라고 하는 소식, 일종의 선무공작 및 사기 진작 차원에서 했던 것으로 보여지는데, 그러한 뉴스가 이승만 대통령 연설의 전후에 같이 나갔기 때문에 그것을 들었던 사람이 '이승만 대통령이 그렇게 이야기했구나', 이렇게 혼선을 빚을 수 있는 여지가 상당히 있었다…
연세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김명섭 교수 #
이 와중에 국방부 보도과에서는 우리 국군이 의정부(議政府)를 탈환하고 반격에 나섰다는 발표를 하였다. 방송은 군의 발표를 임시뉴스로 냈고, 도하 신문들은 호외를 도하 신문들은 호외를 뿌렸다. 국방부 출입기자실은 순간 활기를 되찾았고 필자를 포함한 3~4명의 종군기자들은 군용 지프 차량을 빌려 현지를 향해 달려갔다.

… 그러나 차량이 미아리 고개에 이르었을 때 (…) 장교가 다가와 "지금 적이 코앞에 와있는데 무슨 의정부냐"는 것이다. 미아리 고개위에 올라가서 바라보니 창동 부근에서 자욱한 포연 속에 피아의 교전이 한창인 것이 시야에 들어왔다.
「6·25! 우리는 이렇게 나라를 위해 싸웠다」, 한국언론인회, 2013. 한영섭(韓永燮) 당시 종군기자 증언 318-319.p
순서대로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1950년 6월 27일
새벽 3시 30분 이승만: 신성모가 준비한 특별 열차 편으로 대전으로 피난.
오전 6시 국방부: 38선 전역에 걸쳐 불법 남침 하여 온 북한 공비의 소탕전이 전개되고 있으며, 미 공군이 참전하였다
오전 7시 내각: 신성모가 준비한 특별 열차 편으로 대전으로 피난. [7]
오후 1시 국방부: 의정부 탈환. 정부 수원 피난 취소. 서울 사수. 국민들은 안심해 달라.
오후 ??시 공보처: 아군의 정세는 호전되어 의정부를 확보하고 국회는 서울을 사수하기로 결정했다..
오후 4시 국방부: 맥아더 사령부가 서울에 전투 사령부 설치. 국군 전선 유지
오후 9시 이승만: 우리 군이 용감이 싸웠으나 북한군 저지 실패, 서울 가까이 북한군이 접근했다, 미군이 참전하기로 했고 장교와 군수 물자가 오고 있다. 우리 군대는 싸우기 위한 용기와 투지를 증명해 보였다. 공산주의자들은 지금이라도 대한민국에 충성을 맹세한다면 용서해 주겠다.

4. 실제 방송 내용

6월 27일 밤 10시경 이승만은 대전에서 전국으로 방송을 실시하였다. 오랫동안 녹음본은 전쟁으로 소실된 것으로 알려져 있었고,[8] 미국의 CIA 예하 FBIS(Foreign Broadcast Information Service, 해외 방송 감청 부서)의 일일 보고서에 영어 번역문이 남아있다. 하지만 요약문과 전문이 별도로 존재하여 인용하는 사람마다 해석이 상이하게 달라졌다.

4.1. 미군 측 연설 전문 기록

미군 측에서 기록한 이승만 연설 번역본이다.[9] 이승만은 미군 참전 소식에 경도되어 대본 없이 연설하였기에 내용이 장황하다. 또한 공산주의자 전향 부분은 미군이 제대로 번역하지 못해 괄호 처리되어 있다. 이 연설에는 나름대로 자세한 전황 보고 및 피난 관련 내용이 적혀져 있다.

이 연설에서 이승만은 피난을 언급한 것으로 보이는데, 하필 그 부분이 () 처리된 것으로 보아 당시 편집자가 번역을 하지 못하여 축약된 것으로 보이며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어서 피난을 종용했는지, 단순히 이해만 한다고 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파일:이승만_연설_전문.png

* () 부분은 작성자가 첨삭한 것이 아닌, 실제 감청문에 적혀 있는 것임.
○ 이승만, 미국의 무기 원조 공개(대통령 이승만의 연설)
* “내가 지난 대여섯 번 연속으로 언급한 사실은, 미국에서 군사 원조가 올 것이라는 사실이었으며, 나는 진심으로 믿었기에 그리 말했었다. 그러나 민주주의 국가에서 군사 원조가 오는 것은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10], 내가 한 말이 성과가 없는 것처럼 보였으므로, 나는 오랜 시간 동안 동안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 지금에 와서는 우리 적들이 사방에서 중무장한 비행기와 탱크와 군함을 몰고 와서 밀고 들어오고 있습니다. 우리 군경은 역경을 무릅쓰며 사방으로 (성공적으로) 싸우고 있습니다. (어제) 의정부 일대에서는 적군이 중무장한 수십 대의 탱크를 동원하여
진격하였습니다. 초기에는 우리 군인들이 전혀 준비되어 있지 않아 혼란스러웠으나, 이후로는 침략 도로에 지뢰를 매설하여 탱크를 격파하려는 시도를 하였습니다. 그러나 적군은 탱크를 세우고 지뢰를 제거하며 계속 전진했습니다. 우리 군인들은 지뢰 제거 작업 중인 적군을 소총으로 저격하려 했지만, 장거리에서 무장한 적군에게는 우리 군인들이 사용할 수 있는 적절한 무기가 없어 대적하기가 어려웠습니다. 무기가 없어 적과의 대적은 어려웠지만, 우리 군인들은 맨손으로 용감히 싸웠습니다. 결국 적군의 선봉대는 서울 외곽으로 수십 리 지점까지 진출했습니다. (한국의 리는 약 400미터 거리.)
* 이 상황을 목격한 나는 워싱턴과 동경에 밤과 이른 새벽 시간에 전화와 전보로 연락을 취해 맥아더 장군과 대화를 나눴습니다. 또한 (워싱턴 주재 우리 대사를 통해[11]) 트루먼 대통령과도 통화를 진행했습니다. 나의 주장은 적이 우리 대문을 침입하고 있으며, 우리는 가만히 앉아서 이를 허용할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무기를 받게 된다면, 우리는 미국, 일본, 한국에 위치한 친구들과 협력하여 국민 전체가 국경을 지키는 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나는 트루먼 대통령에게 미국 의회의 승인을 통과하고, 또한 1,000만 달러의 원조를 얻는 것이 우리가 이와 같은 긴급 상황에 직면할 때 중요하다며 호소했습니다. 유감스럽게도 이 금액이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는 점을 언급했습니다.
* 무초 대사의 노력 덕분에(더 긴급한 상황을 위해 워싱턴과 도쿄에 호소하여), 오늘 오후에는 맥아더 장군이 내게 보낸 전보에서 중요한 내용을 언급했습니다. 이에 따라, 동포들에게 이 소식을 급히 전하고자, 지금까지 침묵해 왔던 내용을 모두 공개하고 기쁜 소식을 방송하려고 합니다.
* 맥아더 장군의 전보는 다음과 같습니다. '깊은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중대한 작전이 준비되고 있고, 충분한 원조가 가는 중입니다'. 맥아더 장군의 서명도 확인되었습니다. 또 다른 긴급 정보에 따르면, 한국 원조가 해군과 공군에서 양방향으로 진행 중이며, 이 원조는 오직 38선 이남의 방어를 목적으로 합니다. 오늘 오후에는 전폭기를 투입하여 침략자들을 격파하고, 전투기로는 탱크를 공격할 계획입니다. 또한, 처치 장군이 즉시 동경에서 서울로 오면서 국방 사무에 고문으로 참여하게 되며, 고급 참모들과 군사 원조 물자가 현재도 오고 있으며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도착할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 (현재 상황에서 국민이 피난을 떠나는 것은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보다 더 강력한 나라들도 이미 공산당의 세력에 넘어가거나 넘어가려는 중입니다. (우리는 공산당의 공격을 막을 수 있습니다.) 우리의 위험에 대처하기 위해선 군대가 강력하게 싸워야 합니다. (원조가 도착할 때까지).
* 여기서 서쪽 옹진반도부터 동해까지 38선 모든 지역과 동해안을 따라 내려가는 전선에서 힘차게 싸우고 있는 우리 군과 경찰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합니다. 특히 의정부 지역에서 무기 없이 용감히 싸우는 군인들에게는 더욱 감사합니다.
* 세계에 우리의 용기, 힘, 결단력을 보여주어야만, 남북한의 통일을 위해 그들로부터 지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동시에, 모든 시민이 전쟁 과제를 수행함에 있어 용기와 애국심을 발휘하며 차분히 자신의 임무를 수행할 것을 믿습니다.
* (전쟁에 필요한 노력과 공산주의자들을 전향시키려는 시도에 관한 연설의 나머지 부분은 해독이 되지 않았습니다 — 편집자[12][13]).
출처: RG263 Daily Reports F.B.I.S 1941-1959 No. 126

4.2. CIA 감청 후 축약문

CIA에서 감청하고 보고 형식으로 축약한 문서이다. 미군 측 전문과 비교하면 상당히 많은 내용이 제외되어 있으며, 전문 자체가 길었기에, 감청 보고의 특징 상 중요하다고 보인 내용만 압축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 축약문이 수 없이 인용되면서 실제 연설 내용이 이것이 전부라는 오해가 광범위하게 퍼졌다.
파일:500627.png
1950년 06월 27일 이승만의 실제 방송문(축약)
* 지난 몇 달간 나는 미군의 군사 원조가 곧 올 것임을 단언한 바 있습니다. 하지만 민주주의 국가가 그러한 원조를 실현하는 데에는 상당한 시간이 듭니다. 그리고 마침내, 적군은 전차, 전투기와 전함으로 서울에 다가오고 있는데, 우리 국군은 맞서 싸울 수단이 없다시피 합니다. 이 암울한 상황에 직면하여 나는 도쿄와 워싱턴에 전화하여 상황을 설명했습니다. 마침내 나는 오후에 맥아더 장군에게서 전보를 받게 되었습니다.
* 맥아더 장군은 우리에게 수많은 유능한 장교들과 군수 물자를 보내는 중입니다. 이는 빠른 시일 내에 도착할 것입니다. 나는 이 좋은 소식을 국민에게 전하고자 오늘 밤 이렇게 방송을 드리는 것입니다.
* 우리는 공산주의와 싸우기 위한 우리의 용기와 투지를 증명해 보였습니다. 모든 우방이 우리를 지지하고 있습니다. 나는 전선에서 싸우고 있는 모든 용감한 군경들에게 감사를 표합니다. 나는 공산주의자들이 과거의 실수를 바로잡고 대한민국에 대한 충성을 맹세한다면 용서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그들에게 일깨워주고자 다시 한번 말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머지않아 처벌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 국민 모두가 그들을 민국(民國)[14]의 충성스러운 시민이 되도록 가르치고 이끌어야 할 것입니다.
* ------- Daily Report, No.125, Korea, June 28 1950, ccc 5(RG 263, Records of the Central Intelligence Agency, Foreign Broadcast Information Service DailyReports, 1941-1959, Box 330)

4.3. 학계의 평가

학계에서는 관점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서 평가가 다르다.
이처럼 27일의 라디오 방송은 위급한 전황을 정확히 보도하기보다는 기만적인 허위 정보로 청취자와 국민을 속였다. 더구나 이런 방송이 대통령 연설과 함께 방송되었기 때문에 청취자들은 한층 정부 발표를 신뢰하고 전세를 낙관하였다. 특별 방송에서도 의정부 전투의 승패가 명확히 언급되지 않았으므로, 청취자들이 혼동하였을 수도 있었다. 불과 몇 시간 전까지만 하여도 승리와 서울 사수를 외치던 대통령과 정부관리가 자신들을 내팽개치고 살길을 찾아서 일찌감치 도망하였다는 사실은 국민에게 큰 충격과 배신감과 분노를 안겨주었다. 그러므로 후일 이승만 대통령이 의정부 탈환까지 말하면서 국민을 속이고 버렸다는 비난으로까지 비화되었다. 특별 방송 내용만 국한한다면, 이승만 대통령은 억울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전쟁이 일어난 지 며칠 만에 처음으로 대통령이 공포에 사로잡힌 국민에게 안심하고 싸우라는 메시지를 전달하면서 서울을 지키고 있는 것처럼 가장하고 방송하였다는 것은 씻을 수 없는 과오이다. 더구나 의정부 전선이 무너지고 서울 함락이 임박하였음을 충분히 알았던 상태에서 그런 방송을 하였 다는 것은 국민의 안위는 안중에도 두지 않는 무책임의 극치이다. 방송에서는 의정부 패전과 서울 사수를 명확히 말하지 않았다고 하여도, 실질적으로 그렇게 공언한 것과 다른 바가 없었다. 함께 싸우자는 연설을 들은 국민은 대통령이 수도와 자신들을 포기하고 탈출하였다는 것을 상상하기 어려웠다. 결국 기만적인 심리전 방송은 수많은 사람을 곤경에 빠뜨리고, 대통령과 정부에 대한 불신과 분노를 불러일으키는 역효과를 가져왔다. 지속된 군과 정부의 방송 심리전으로 KBS는 유엔군 사령부의 통제 아래에 들어갔고, 그 결과 방송 주권을 침해당하게 되었다.16) 이는 허위·왜곡·기만·부정·타매·위협·증오를 속성으로 하는 심리전이 초래하는 파멸적인 결과를 생생하게 보여 주는 사례이다. 또한 미디어가 언론으로서 책임을 다하지 못하고 정부에 종속되어 심리전에 동원될 때 피할 수 없는 위험을 뼈저리게 가르쳐 주는 교훈이다.
장영민, 한국 전쟁 발발 직후 이승만 대통령의 라디오 특별 방송 관련 자료, 한국근현대사연구 67, 2013.12, 985-986쪽KCI 등재[15]
이러한 비판들에 일리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수도 함락 직전의 긴급상황에서 국가통수권자인 대통령의 안전과 거취에 대한 기밀보전, 그리고 국민 여론의 안정이 긴요했던 점도 고려되어야 한다. 개전 직전 평양에서는 ‘이승만 체포’ 방송을 내보냈었다(경향신문 62/06/25, 2). 전쟁 초 소련 군사고문단은 라디오와 국군의 무선을 소상히 감청하고 있었고,2 김일성은 서울을 점령하는 즉시 중앙청, 방송국, 형무소 등을 장악할 것을 명령했었다(김광수 2008, 165).6월 27일자 방송연설에서 “아군이 의정부를 탈환했으니 서울 시민은 안심하라”와 같은 허위 전황보고가 있었다는 회고는 사실과 다르다.3 당시 CIA가 감청한 대통령의 방송연설문에 따르면 “의정부 탈환” 내용은 없었다. 다만 미국에 도움을 요청한 사실과 미 해ᆞ공군이 도착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언급이 있었다(온창일 2006, 217; 남정옥 2015a, 38-39). 연설문에는 국민이 피란하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고 하면서도 국제사회의 지원과 남북통일을 위해서는 한국인의 용기를 보여 주어야 하므로, 침착하게 직무를 수행해달라는 당부, 그리고 적진을 향해서 잘못을 바로잡지 않는다면 처벌을 받게 될 것이라는 경고가 담겨 있었다.4당시 이 방송연설을 청취한 방송 관계자들과 사회명사들은 현지 상황과는 다른 거리감을 느꼈다(中央日報社 1985, 38). 일부 정치인들은 대통령의 연설에 비판적으로 반응했으며(尹吉重 외 1984, 52), 지식인들 중에서는 녹음된 연설만 되풀이 되는 상황에 실망감을 갖기도 했다(鮮于宗源 1965, 10). “어려운 시절 막다른 판국에 있어서 국가의 공식 발표를 믿지” 못하면서, 조선인민군에 대해 “그들이 상냥하게 웃고 이야기하는 걸 보면 아무래도 적개심이 우러나지 않는다 ... 국군과 이들과 무엇이 다르단 말이냐”고 자문하는 지식인도 있었다(김성칠 1993, 69).5하지만 이러한 인식들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불안해하면서도 대통령의 말을 신뢰했으며(이하우ᆞ최명 공편 2010, 116), 조금만 참으면 될 것 같다는 희망을 갖는 국민들도 있었다(도재은 2000, 27). 상황 파악이 되지 않는 상황에서 대통령의 말을 믿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 이들도 있었고, 어수선한 생각을 지울 수가 없어 피란을 선택한 이들도 있었다(조선뉴스프레스 2010, 35; 267). 이 대통령 자신도 서울 피란에 대해서는 책임을 통감했다(尹錫五 외 1973, 180). 그는 자신의 피란을 비롯해 전쟁 초기 정부가 취한 여러 조치들에 대해 국민들에게 진상(眞相)을 알려야 한다고 판단했고, 대국민 연설 준비를 서둘렀다. 1950년 7월 4일자 방송연설에서 이 대통령은 본인의 피란과 서울 실함, 한강교 폭파에 관해 해명한 뒤, 정부가 임시소재지에서 정무를 다하고 있으니 전시 상황을 함께 인내해 나가자고 국민에게 호소했다.
전쟁과 연설 : 6 · 25전쟁 시기 이승만 대통령의 연설에 관한 연구 DOI : 10.18854/kpsr.2022.56.1.002
전사학자 임용한은 "해당 방송에 기만의 의도가 있었다고 해석하는 것은 명백히 틀렸으며 기습 개전의 혼란에 의해 통제가 제대로 되지 않아 일어난 수많은 혼선들 중 하나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승만 정부는 수뇌부로부터의 구체적인 통신내용을 전달할 수 있는 핫라인이 차단될 것을 대비해 미리 상황에 따른 방송을 녹음해 매뉴얼대로 방송하도록 했으며, 이 상황전파와 방송 수행에서 혼선이 생겨서 시간대상 앞뒤가 맞지 않는 방송이 나갔는데[16] 이 중 앞부분 방송을 듣지 못했던 사람들이 다수였다. 이와같이 전쟁의 혼란이 가져온 여러가지 해프닝 중 하나가 극대화되어 대통령이 국민들을 상대로 기만방송을 했다는 인식이 퍼진 것으로 보았다. #

5. 역사 왜곡이라는 주장과 반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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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각에서 이승만 본인이 저런 발언을 하지는 않았기에 본 문서의 밈이 역사 왜곡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역사 왜곡이라는 표현을 사용할 정도의 오류는 아니다.

(1) 국방부 방송은 명백히 정부의 방송이다.
전시의 국방부의 방송은 명백히 정부의 방송이며 그 방송 내용은 인터넷에 떠도는 내용과 일치한다. 그러니 이승만 정부가 실제 밈의 내용과 일치하는 방송을 한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본 문서가 다루는 드립은 이승만 정부의 행동을 이승만 본인이 한 것으로 각색해서 밈으로 표현한 것이다.
(2) 정부의 기만 방송을 정부 수반이 한 것으로 표현하는 건 왜곡이 아니다.

(3) 이승만의 방송 또한 기만 방송으로 볼 수 있다.
(27일 오후 4시 국방부) 맥아더 사령부가 서울에 전투 사령부 설치. 국군 전선 유지 >>(오후 9시 이승만) 국군이 적을 막을 수 없고 적이 서울 근처에 왔지만 미군 참전, 장교와 군수 물자가 오고 있음. 국군이 열심히 싸운다.
보다시피 이승만 방송에서는 오후 4시 방송을 부정하는 내용이 없다. 오히려 이전에 방송된 국방부 방송과 연결해서 들으면 강조하는 모양새가 되어 버렸다.

'나는 공산주의자들이 과거의 실수를 바로잡고 대한국에 대한 충성을 맹세한다면 용서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키기 위해 다시 한번 말한다. 그렇지 않으면 머지않아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다.'는 정보를 전달할 뿐 '적이 서울로 오니 대피해야 한다'고 해석되지 않는다.

국군이 실시간으로 패퇴하고 있는 상황인데도 그와는 거리가 먼 긍정적인 내용의 방송만을 함으로써 전황을 국민들에게 제대로 알리지 않은 것과, 미 육군이 도착하려면 시간이 더 걸리는 상황인데도 참전 소식만을 강조함으로써 국민들에게 너무 이른 기대를 가지게 한 것도 따지고 보면 기만이라 볼 수는 있다.

결정적으로 국방부나 이승만이나 애당초 사기 진작을 위한 방송이였기 때문에, 목적 자체가 국민들에게 잘못된 기대를 가지게 하는게 목적인 셈이다.[17]

따라서 '이승만 본인이 저런 연설을 했다'고 주장하는 것은 역사 왜곡이지만 '이승만과 이승만 정부가 행한 기만적인 방송을 표현'했다는 점에서 해당 밈은 역사 왜곡이 아니다.

6. 실제 방송 당시 배경

6.1. 전쟁 발발 후 이승만의 행적

6.25 전쟁이 발발한 직후 대한민국 국군은 전력의 열세 및 휴가로 인한 공백, 무능한 군 지휘부 때문에 초기 대응에 실패하고 불과 전쟁 발발 3일 후인 6월 28일 수도 서울북한군에게 내어주게 되며 정부와 군부는 무질서한 철수로 추태를 보이고 말았다.

이 당시 이승만의 행적은 이 있지도 않은 발언과 더불어 과거 무책임한 도망자라는 이미지가 강했으나, 실제로는 복잡한 행적을 보였다.

전쟁 초기 이승만은 이미지와 달리 전쟁에 진심으로 임했다. 처음에 이승만은 서울 방어가 가능하다고 판단하였고 미국 대사에게 무기와 탄약을 요청한다.[18][19]. 무초 대사의 회고록에 따르면 이승만은 정보 채널을 가동하고 있었으며, 전쟁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6월 25-6일에는 이승만은 새벽까지 잠을 자지 않고 상황을 대기하고 있었으며, 한국군에게 필요한 탄약과 전투기 요청 등 대중적인 이미지와 다른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잘못된 대처는 국회와 이승만이 별도로 따로 행동을 하게 되면서 시작되었다, 이는 측근 국방부장관 신성모의 이중 보고 및 인의 장막성 행보 때문이다. 신성모는 처음부터 계속 이승만에게 낙관적인 보고만을 진행했으며(6월 25일 오전 10시경), 이승만이 서울 방어가 가능하다고 판단한 원인을 제공했다. 그러나 추후 일이 늦고 나서야 이승만에게는 전황이 불리하다는 보고를 제대로 진행했다. 하지만 국회에는 일변도로 낙관적인 기만 보고를 계속하였으며, 이승만과 국회는 별도 행동을 보이게 된다. 이승만이 신성모의 이중 보고를 알았던 건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대통령으로서 이런 상황이 발생했다는 사실 자체가 적절하지 않다. 내각을 제외하면 국회 정치인들은 안중에 둘 겨를은 없었던 듯하다.

신성모의 이런 행동의 이유는 알 수 없지만 6월 26일 채병덕과 함께 국회에 출석한 뒤 "국군이 걱정 없이 물리친다. 해주를 접수하고 3~5일이면 평양을 점령할 수 있다."라며 거짓 보고를 하였으며, 한술 더 떠 총참모장 채병덕은 "국군이 의정부를 탈환했다."라고 허위 보고를 저질렀다.[20].[21] 6월 27일 전선은 서울 창동 근처까지 내려왔고 의정부 전투가 패배로 끝나 서울 함락 직전에 몰린다. 이 때문에 국회는 제대로 된 상황 판단을 할 수 없었고 늦게나마 수원으로의 정부 이전을 결정한다.

27일 밤 9시 이승만은 대책 회의가 끝난 다음에, 미국 무초 대사에게 서울을 포기하자는 결정을 내렸다고 통보하였다.

무초 대사는 이승만에게 한국군이 용맹하게 싸우고 있으며, 전선을 지키고 있으며, 후퇴는 찬성하지만 대통령이라면 마자믹 순간까지 서울을 사수하면서 아군을 독려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무초 대사는 당시 미군과 동일하게 북한군의 전력을 과소평가하고 있어서 보다 낙관적이었다.[22]
○무쵸 주한 미국대사, 이승만 대통령이 대전으로 정부이전을 결정했다고 미 국무부에 보고
* 연월일 1950년 6월 26일
대통령은 상당히 긴장되어 있었다. 그의 얼굴에는 경련이 일고 있었으며, 그의 말은 반복적이고 연결이 잘 안됐다. 그는 의정부
전황에 대해 언급하였는데, 그 곳에서 서울을 향해 수많은 탱크가 진격 중이라는 사실과 한국군은 이를 막기에는 중과부적이라고 덧붙였다. 그는 국무총리 서리와 한국어와 영어로 이야기하였으며, 때때로 이범석과는 한국말로 대화하였다.
그는 내각이 오늘 밤 대전으로의 이전을 결정하였다고 말하였다. 그는 이 결정이 개인적인 안위를 위해서가 아니라 정부가
지속되어야 하기 때문이고, 만약 자신이 공산주의자에게 목숨을 잃는다면 나라에는 치명적인 타격이 되기 때문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는 국무총리 서리(신성모가 겸직 중이였음)에게 군사 지식을 가진‘유능한 인물들을 소집하여 현재의 상황을 토의하고 적절한 조치를 결정하도록 지시하였다.
* 나는 대통령에게 서울에 정부가 남아 있어야 하며, 그 이유는 무기와 군대가 아직 건재하고 바주카포와 대전차포, 지뢰 등으로 북한군 탱크를 저지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말하였다. 국무총리는 내가 계속해서 지뢰 공격을 강조하자 57mm 대전차포가 북한군 탱크를 뚫는데 실패했다고 말하였다(국무총리의 주장은 신빙성이 없다. 한국의 도로와 교량은 무거운 탱크를 지탱하는데 적절치 못하다). 나는 만일 정부가 서울을 떠난다면 수많은 전투에서 패배할 것이며, 만약 한국의 상황이 더 어려워진다면 다시 원상회복하기가 불가능하리라고 말하였다. 이러한 논쟁은 대통령에게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하였다. 그는 정부 이전이 개인적인 안위를 고려한 처사가 아니며, 정부가 포로가 되는 위험에 빠지지 않기 위함이라는 언급을 반복하였다.
미 국무부 한국 국내상황 관련문서 Ⅰ ; 한국전쟁 자료총서 39, 361~362쪽

27일 새벽 이승만은 새벽 3시 30분에 갑작스럽게 대전으로 피난을 시작하였다. 이 부분이 가장 큰 논란이 되는 부분인데, 여기서 현대인들은 무책임하게 서울 시민을 버려두고 피난을 갔다며 비난한다. 하필 무초 대사가 서울을 지키고자 한 언급과 후술되는 한강 인도교 폭파 사건 때문에 이승만의 평가가 바닥을 기게 되는 원인이 된다.

여기에 관해서는 2가지 사료가 존재한다. 프란체스카 여사나 경무대 비서 등의 회고록에 의하면 이승만은 도망갈 마음이 없었는데 신성모가 전날 밤까지 반격에 성공했다고 허풍을 쳤다고 한다.[23] 북한군이 1시간도 안 되는 거리에 있던 걸 우려한 신성모 국방장관 겸 국무총리 대리는 적이 청량리에 왔다는 허위 보고를 올려서 이승만을 떠나게 했다고 기술되어 있으며 새벽 2시부터 3시 30분까지 1시간 가까이 설득이 이어졌다고 기술되어 있다. 그러나 무초 대사의 《내가 본 이승만과 한국 전쟁》이라는 회고록에서는 이승만이 특별 열차를 준비하고 있었다고 기술되어 있어 두 기록 간의 충돌이 있다.

이후 타이밍 좋게 채병덕이 육본 철수 과정에서 삽질을 하게 되면서, 한강 인도교 폭발 참사가 발생했고 국군이 와해되면서 대한민국이 멸망할 뻔했다. 누가 보아도 졸속 폭파였기 때문에, 이승만이 도망치면서 한강 다리를 폭파시켰다는 잘못된 의혹이 있었다. 자세한 것은 한강 인도교 폭파 참조.

또한 이승만이 부산 쪽으로 바로 도망치려 했다는 주장이 여러 있었으며, 근거는 무초 대사의 기록에서 [24] 신성모가 이승만이 부산 쪽에 있는 도시인 진해로 향했다는 보고인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프렌체스카 일지나 경무대 비서 회고록이 맞다면, 신성모가 피난을 강제한 것이였기에 실제로 이승만이 실제로 부산 쪽에 가려고 했는지는 확실하게 알 수 없다. 또한 이승만이 미군/한국 측 기록에서 다시 서울로 올라가려 했다는 것은 교차 검증 되는 사실이기에 신빙성이 없는 주장이다.

확실한 사실은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갑작스러운 피난이었다는 것이며, 신성모가 깊이 관여했다는 것이다. 이승만이 정말 전쟁이 나는 순간 맘먹고 튈 작정으로 계획적으로 실행했다고 볼 수 없는 것이, 대전에서의 행적이 너무 무계획적이였고 혼란스러웠다.

또한 신성모는 새벽 7시에 대통령에 이어 내각을 대통령과 동일한 특별 열차 편으로 남쪽으로 피신시키고 무초 대사에게 별도로 통보한다.

내각이 전부 이동되었다는 걸 안 무초 대사는 한국 정부가 남쪽으로 이동했다고 판단하고 6월 27일에 남쪽으로 이동한다.

이승만은 특별 열차를[25] 타고 9시 대구에 도착, 서울이 함락되지 않았다는 소식[26]에 북향을 결정하여 12시 대전역에 도착했다.[27] 이때 이기붕 서울시장은 북행은 너무 위험하다고 말렸고 마중 나온 충남도지사는 북행을 찬성하는 가운데 미 공군이 참전한 소식을 듣고 결국 본래 계획대로 대전에 정부를 재건하기로 결정, 충남도지사 사저로 향했다.

거기에 마침 27일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서 한국전 참전 결의안이 통과되었고 여기에 힘을 얻은 이승만은 국민을 안심시켜 혼란을 막겠다는 생각 + 자신의 대전행을 적군이 눈치채지 못하게 하려는 연막 효과 등을 위해 대전에서 중앙 방송국을 통해 특별 방송을 실시했다. 이른바 6·27 특별 방송이다. 일주일 후 7월 4일 이승만 특별 방송에서 자신이 서울을 내려온 이유에 대해 다음과 같이 발표했다.
○ 전쟁 경과에 대해 대 국민 특별방송
* 내 한 몸이 국군의 앞에 서서 죽음으로서 싸워야 옳을 것인데 피하여 나온 것은 구차히 목숨을 위해서 한 것이 결코 아니오
첫째는 성중에 있으면 군경(軍警)전투상에 도리어 곤란을 당하겠다는 것이 한 가지 이유요. 또는 내가 나와 앉아서 세계에
호소해서 공론이 일어나야 할 것을 각오한 것이 두번째의 이유인 것입니다.
(이승만 대통령, 1950. 7. 4.) - 한국사DB

6.2. 미국 대사의 서울 사수 논쟁

이름 출신 경력 직책 주장
채병덕 파일:일본 제국 육군기.svg일본 육군 총참모장 결전[28]
신성모 상선사관 국방부장관 결전[29]
김홍일 파일:대만 육군기.svg국민혁명군 육군사관학교장 지연전[30]
유동열 파일:한국광복군 휘장.png한국광복군 결전
지청천 파일:한국광복군 휘장.png한국광복군 국회의원 지연전
이범석 파일:한국광복군 휘장.png한국광복군 국무총리 지연전
김석원 파일:일본 제국 육군기.svg일본 육군 1보병사단장 지연전
이종찬 파일:일본 제국 육군기.svg일본 육군 수도경비사령관 결전
저는 이 대통령에게 무기와 병력이 있다는 점과 전차를 저지하기 위해 바주카포와 대전차포, 그리고 대전차 지뢰를 사용해 싸워야 한다고 지적하면서 정부가 서울을 지키도록 설득하려 노력했습니다. 신성모는 57 mm 대전차포가 북한군 전차의 장갑을 관통하지 못했다고 말했고 저는 대전차 지뢰의 사용을 강조했습니다. (신성모의 주장은 다소 의심스럽습니다. 한국의 도로와 교량은 중전차(extremely heavy tanks)가 다닐 수준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만약 한국의 상황이 계속 악화된다면 이것을 다시 호전시키는 것은 불가능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논쟁은 대통령에게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하였다, 그는 거듭해서 정부 이전이 개인적인 안위를 고려한 처사가 아니며, 정부가 포로가 되는 위험에 빠져서는 안 된다는 언급을 반복하였다.

당시 존 J. 무초 미국 대사가 보낸 전문에 따르면 이미 25일 밤 이승만은 정부가 공산당에게 잡히면 대한민국 체제에 심각한 타격이 되어 안 되기 때문에 정부를 대전으로 옮기려 한다고 말했으며 정작 외국인인 대사는 수도에 남아 국군의 사수를 돕겠다는 전문을 보냈다. 이를 근거로 하여, 외국인조차 서울을 사수하고자 했는데 이승만은 대통령임에도 불구하고 서울을 버렸다는 주장이 있다.
그러나 6월 25일 10시 의정부 7시단 사단장 유재흥이 이미 북한군의 탱크를 격파할 수 없다는 보고를 올렸으며, 이를 전해들은 신성모가 이승만에게 자세한 전황을 보고한 이후이기 때문에 무초 대사의 주장이 잘못되었다고 보는게 맞다.

이는 후에 대전차포로 무장한 미 24단의 오산 전투 및 연패(連敗)로 증명되었고 당시 미국 대전차포는 북한군 탱크를 뚫지 못했다. 자세한 내용은 6.25 전쟁/전개 부분의 포병/ 기갑 부분 참조.

6.3. 특별 방송 당시 방송국 현장 상황

지금부터 이야기하는 방송 당시 상황은 당시 대전방송국에서 6·27 특별 방송을 내보낸 담당 책임자 유병은의 회고를 옮긴 것이다.[31] 출처는 50여 년간 방송계에 몸담았던 이장춘(전 KBS 관재국장, 한국방송인동우회 이사)이 직접 관리하는 블로그다. 더 자세하게 보고 싶다면 링크 참조.[32] 다만 해당 블로그 글에서는 27일 9시 이승만 대통령이 의정부를 탈환했으며 서울 시민들은 안심하라는 방송을 했다고 증언하지만 다른 자료에서는 27일 9시 담화에서 이승만 대통령이 의정부 방어가 실패했음을 인정했다고 언급한다.

1950년 6월 27일 이승만이 막 대전에 도착할 무렵, 당시 갓 부임한 이범구 대전 방송국장은 서울 집에 가고 없어서 당시 대전 방송국 방송과장 유병은이 사실상 방송국장 직무대리를 하고 있었다.

이날 오후 7시 반경 갑자기 초대형 고급 승용차가 대전 방송국 정문으로 들어와서 유병은 방송국장 대리가 나가보니 이승만의 지시를 받고 온 헌병 사령관 장흥 대령이 유병은을 급히 차에 태우고 어디론가 갔다. 유병은은 무슨 일로 어디로 가느냐 물었지만 아무 대답이 없었고 장흥을 따라 어디선가 내리니 그곳은 충청남도 도지사 사택이었고 당시 충남지사였던 이영진이 현관에서 마중 나와 있었다.

이후 응접실로 안내되어 들어가니 이승만이 프란체스카와 선 채로 귓속말을 하고 있었고 잠시 뒤 이승만은 장흥에게 출입문을 잠그도록 지시했으며 장흥은 문을 잠근 뒤 권총을 손에 쥐고 유병은을 협박하듯이 노려보고 있었다.

이승만은 유병은이 방송국 책임자인 지 확인한 뒤 다음과 같은 지시를 내렸다.
1. 이 방에서 절대로 나가서는 안 된다.
2. 방송국에 전화를 걸어 중계방송기를 이 방으로 가져오라.
3. 오늘 저녁 9시[33]에 내가 이 방에서 하는 방송을 서울로 올려 보내어 전국에 중계해 온 국민이 듣게 하라.[34]
4. 내가 방송하는 것을 서울에서 녹음했다가 밤에 여러 번 재방송하라.
5. 누가 묻든지 대전에서 방송한다는 말을 해선 안 된다.
6. 이 대통령이 방송한다고 미리 누설해서도 안 된다.
이 지시를 듣고 유병은은 그 자리에서 대전방송국에 전화를 걸어 중계방송에 필요한 방송 기기를 보내도록 지시했으며 대전우체국에 전화를 걸어 신분을 밝힌 뒤 충남도지사 관사와 대전방송국과 서울 중앙방송국에 각각 방송 선로를 즉시 개설해 줄 것을 요청하고 다시 시외 전화를 서울 중앙방송국 조정실에 걸어 당시 담당자 왕종현에게 오늘 저녁 9시 대전에서 방송을 올려 보낼 테니 아무 소리 말고 무조건 전국에 중계방송하라고 말했다. 당연히 무조건 방송하라는 말을 들은 서울 방송국 측에선 이유를 여러 번 물었고 이에 한동안 실랑이가 벌어졌다.

방송 예정 시간을 얼마 안 남기고 유병은은 중계방송 기기를 조심스럽게 설치하고 마이크를 대통령 전용 탁상에 설치한 뒤 마이크 시험을 끝내고 8시 40분에는 서울 중앙방송국 조정실까지 중계 선로를 개통시켰지만 선로 상태가 그리 좋지 못해 필사적으로 상태를 개선시키는 등 중계방송을 위한 준비를 철저하게 했다. 9시 정각 이승만은 특별 담화를 방송했다. 서울중앙방송국이 북한군에 점령당할 때까지 이승만 특별 담화가 방송되었다고 알려졌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대부분의 직원들이 녹음 방송 틀고 도주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래도 방송인으로서 사명을 가진 일부 직원들이 남아서 예정되어 있던 임시 방송을 진행하여 이승만의 담화 방송은 자연스럽게 끝났다. 공산군 점령 직전 마지막 방송은 기사 이성실이 오전 7시 45분까지 송출한 군가 행진곡 모음이다.[35] 이성실은 정부가 부산으로 피난 가 있을 때 송신기 조정 작업 중 불의의 감전 사고로 현장에서 순직하였다.

7. 이후

이후 인천 상륙 작전이 성공하여 미군과 국군이 서울을 탈환하자 이승만은 정부 인사들과 함께 도망갔다가 서울로 다시 돌아왔는데 국민들의 민심과 분위기가 매우 좋지 않은 것을 보고 국회의원들이 이승만더러 서울 시민들한테 사과를 해야 한다고 권유하자 이승만은 버럭 화를 내면서 "내가 당나라 덕종마냥 덕이 없어서 이런 고초를 겪게 했다고 말하란 말이냐? 나는 사과 못 한다. 사과하고 싶으면 당신들이나 해라." 라고 무책임한 태도를 보이며 사과를 거부했으며 여기서 그치지 않고 부역자 색출을 한다면서 서울 시민들 중 무려 55만 명을 체포하고 그들 중 800명을 붙잡아 사형시켰지만 너무 지나친 처사라는 비판 여론이 일자 사형시키지 않은 시민들을 모두 풀어주었고 결국 이기붕이 이승만을 대신해서 "서울 시민들한테 죄송하다"고 사과문을 발표해야 했다.

이런 이승만의 처사를 두고 검사 정희택은 "1개 사단 규모의 전향자들을 책임지고 있는 정보 검사에게까지도, 그것도 최후의 순간에 전화 문의까지 했는데도 거짓말을 하고 저희들만 도망치지 않았습니까? 이렇게 배신과 기만으로 애국 시민들을 내버리고 도망친 자들인데 무슨 염치로 잔류파를 재판한다고 하는 겁니까?"라고 울분을 토로하기도 했다.

오늘날 일각에서는 이 기만 방송에 대해 대피 권고 방송을 했을 경우 혼란과 약탈 같은 행위가 발생할 가능성이 있었으므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는 의견이 있지만 정작 1년 후 중공군이 쳐들어오자 이승만이 피난을 가라고 명령을 내린 일을 보면[36] 설득력이 없다는 주장도 있다. 다만 이 경우에는 반론의 여지가 있는게, 중공군이 쳐들어올 시점에는 이미 국군이 밀릴 수 있다는 것이 다 알려졌고 전시 상황도 공고해졌으니 순응이 빨라서 비교적 혼란이 없이 진행된 것이고 이 상태에서는 전쟁이라고 한 지 며칠 되지도 않았는데 별안간 국군이 밀리고 있어 도망가야 한다고 해야 하는 것이므로 패닉이 발생할 여지는 시각에 따라 다르지만 어느 부분에선 충분했다고 판단할 수 있다. 그러나 진정으로 비판해야 할 부분은 전술한 대로, 정치적 판단에 의한 것이었다면 응당 득과 실을 모두 결과로서 받아들이고 대처해야 할 입장이었던 이승만이 사과를 안 하고 오히려 부역자들을 죽이겠다면서 적반하장식 행동을 시도했다는 것이다.

7.1. 피난민들의 구성 및 인민군의 학살

파일:서울-피난기록.jpg
기록을 살펴보면 공산군이 온다는 소문은 파다하게 퍼져 있었다.[37]

40만 명 정도가 피난갈에 올랐으며 80% 이상이 광복 직후 월남한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었고 끔찍한 공산 치세를 겪어 (소련군정 참조) 남쪽으로 피난 온 사람들 대부분이였다.

그러나 기만 방송으로 인해 공산 치세를 겪어보지 않았거나 안심된 시민들은 피난을 단념했으며 100만 서울 시민이 잔류한 것으로 파악된다.

이들은 공산군이 생존까지 위협하진 않을 것이란 기대가 있었는데 정작 서울을 점령하고 인민군의 대대적인 학살이 시작되었다.

검사, 경찰관, 형무관, 군 장교, 낙오 군인, 우익 청년단장, 대원, 동회장, 동회 직원들이 '인민에 대한 적'이라는 죄목으로 학살되었고 8,800명으로 집계된다.

이 학살에는 광복기 3대 거두 중 한명인 김규식 박사를 비롯하여 정치인 17명, 서울대학교 총장, 고려대학교 총장, 중 고등학교 교장 이상 교육자 11명, 춘원 이광수, 김진섭 등 문필가 및 의사 11명이 포함되어 있다.

이뿐만 아니라 점령 초기 시내 이곳 저곳에서는 '인민재판'이 전개되었고 이 재판에 회부된 피고인은 예외 없이 강요된 구호와 박수에 의해 군중이 보는 앞에서 총살되었다.

서울에서 확인된 민간인 사망자만 3만 명에 달하며 인민위원회에서 심부름꾼으로 끌려가서 월북한 사람, 인민군으로 강제 연행되어 간 자들도 있었다.

서울 시내에서만 9만5천 명 이상이 사망, 학살, 납치, 행방불명된 것으로 조사된다.

7.2. 6월 28일 미군의 전쟁 중간 평가

서울 함락 등 전황에 대한 미 극동군사령부의 보고, 연월일 1950년 6월 28일
출전 미국 중앙정보국 정보보고서 Daily Report 1 ; 한국전쟁 자료총서 16, 5~6쪽
제목 : 한국 상황
I. 전황
워싱턴 시각으로 6월 28일 오전 7시(서울시각 6월 28일 오후 9시)에 맥아더 사령부로부터 접수한 정보에 따르면, 김포공항과 서울이 북한군에 의해 함락되었다. 남한군이 항복을 했다는 징후는 없다.
II. 생존 가능성
남한의 저항이 계속되리라는 전망이 커지고 있다. 미국의 한국 정부에 대한 조기 원조와 개입은 남한 국민의 사기에 중요하고 시의적절한 효과를 가져 왔다. 비록 북한군의 진격이 완전히 중단되지 않고 서울이나 기타 중요 지역 함락이 남한 국민의 사기에 타격을 가하더라도, 미 공군 작전은 남한 정부와 군대, 그리고 국민들에게 거대한 심리적인 부양 효과를 가져올 것이다. 최근의 공식 보고에 따르면, 남한인들 사이에 정신적인 공황의 조짐은 없다.

미국의 계획을 안 이승만 대통령은 서울로 돌아가기를 원했으나 단념했다고 한다. 한국인의 사기, 특히 한국군의 사기는 적의 절대적인 대포와 전투기에 의해 압도되고 있다. 남한군이 만약 재편성될 수만 있다면 강력한 전투의지를 보일 것이다. 조직적인 저항시도가 계속되고 있다.

미군도 한국인들의 사기를 굉장히 신경 썼으며 모랄빵을 경계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따라서 당시 국군의 기만 방송은 국민들 상대로 분노를 일으켰으나, 군사학적인 관점에서 볼 때 참작의 여지는 있다. 설령 진짜로 이승만 대통령이 살고 싶다는 이기심 때문에 피난을 갔다고 할지라도 결국엔 국가 원수가 생존한 상태이므로, 한국의 항전 의지와 조직력은 잔류하게 되었고, 미국이 한국에 적극적으로 지원한 계기가 되었다.

7.3. 실제 라디오 연설 음성 발굴


원래 본 음성은 방송 이후 한 번도 발굴된 적이 없었고 공개되지도 않았으며, 전쟁의 혼란 속에서 자연스레 사라졌을 것으로 여겨졌다. 그러던 중 KBS에서 다큐 인사이트를 통해 한국사의 과거 영상, 음성 등을 발굴하고 복원하는 방송을 하면서 그동안 알려지지 않은 많은 영상과 음성들이 발굴, 복원되었다. 그런데 그 중 당시 이승만의 실제 라디오 원본 음성을 미국 국립 기록 관리청에서 발굴하고 일부분의 음성을 복원하는 데 성공하였다.#

물론 원래 연설 내용은 문서를 통해서 존재했지만 그래도 그동안 미궁에 빠져 있던 실제 음성을 발굴, 복원하였다는 데 의의가 있겠다.

유의할 것은 라디오 음성의 기록이 시간이 오래 지나서 훼손되었기 땜문에 현재 듣기로는 복원하여도 선명하지는 않고 완전히 복원되지는 않았기 때문에 듣기에 불편함이 있어서 현재로선 듣기에 집중하며 연설을 기록한 문서와 대조하면서 들어야 알아듣기 수월할 것이다. 연설 음성의 전체를 듣고 싶지 않고 일부분만 듣고 싶을 경우에는 이 문단의 첫 번째로 첨부한 다큐 영상에서 일부분을 듣기 좋게 자막을 보여주기 때문에 바로 위의 영상을 보면 될 것이다.


위 영상은 당시 1950년 6월 27일 이승만 대통령 라디오 실제 원본 음성이다.


위 영상은 이 영상의 위에 있는 원본 음성을 일부분 복원한 영상이다.

위 문단에도 일부분 나와 있지만 당시 연설의 전문을 영문으로 적은 문서도 여기에 첨부하겠다.#

8. 대중 매체에서

6.25 전쟁 초기 과정을 다룬 드라마에서는 한 번씩은 꼭 다룬다. 이환경 작가가 쓴 야인시대영웅시대에선 실제 사실과는 다르게 개전 하루 뒤인 6월 26일에 시민들의 동요를 막기 위해 이승만이 서울에서 방송을 하고 이후 도주한 것으로 묘사되었다. 특히 야인시대에서 최동열이 다들 전쟁 통에 피난하느라 바쁜 와중에 막상 피난은 않고 호기심 때문인지 방송국에 찾아가는데 아니나 다를까 녹음 테이프만 재생되고 있다는 사실에 분노한 그는 테이프를 뜯어내 방송을 중단시킨다. 참고로 이 장면은 기계를 강제 고장 내는 흔치 않은 장면이기 때문에 야인시대 합성물에서 내레이션을 무력화시키는 용도로 사용되는 경우가 많아졌으며 덧붙여서 이승만의 도주와 함께 쓰이기도 한다.

서울 1945에서는 실제 사실과 맞게 6월 27일 밤에 대전에서 방송한 것으로 그렸지만 이승만이 충남지사 관사가 아닌 대전 방송국에서 방송했으며 준비된 원고를 읽는다는 소소한 고증 오류가 있다. 실제로는 원고 없이 방송했다.

건국전쟁에서는 소위 '런승만'이라 알려진 이 밈을 세간의 잘못 알려진 오해라고 하면서, 당시 라디오 방송 원본 어디에도 "서울 시민 여러분, 안심하고 서울을 지키십시오."라는 말은 없었다는 정도로만 반박하고 넘어갔는데, 본 항목에 적혀있는 내용을 읽어보면 알겠지만 밈 그 자체에 대한 반론이 되지는 않는다.[38]

9. 배리에이션



[1] 사실 이 사진은 1950년 10월 30일 유엔군이 수복한 평양을 방문한 이승만이 평양 시민 앞에서 연설을 하는 장면이다. 그 유명한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라는 어록이 이 연설에서 나왔다.# 이 문서의 제목과 같은 발언은 해당 연설에서 없었다. 사실 6.25 전쟁 발발 직후 이승만은 임시 수도를 3번이나 바꾸면서 부산까지 파천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한가하게 일반인들 앞에 나서서 연설이나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어쨌든 '이승만이 연설하는 모습'이 담긴 사진이기 때문에 그 자체로 바로 연상되어 곧잘 쓰이고 있다. 이 짤만 붙으면 어떤 주장이라도, 심지어 그 주장을 뒷받침하는 증인이나 증거 등이 있어도 신빙성이 증발하는 마법의 짤방이다.[2] 이 연설은 영화 부산행의 안전행정부 장관의 연설의 모티브가 되었다.[3] 북진 통일을 원했으며 국민들에게도 그것을 약속으로 내걸었던 이승만의 역사적 행보와 매우 어울린다는 점에서 역사를 어느 정도만 알고 자세히 실증 자료를 찾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진짜 연설이라고 보일 정도다.[4] 미군 감청가가 번역을 제대로 하지 못해 무슨 말을 했는지 명확하지 않음[5] 임진강 철교(인도교 역할도 함) 폭발 당시 도화선이 절단되었음.[6] 공보라는 것은 정부 기관이 대내외적으로 전개하는 홍보 활동의 의미로서 설명할 수 있으며, 공보처는 정부의 시책과 방안을 국민에게 널리 천명하고 일반 국민들로 하여금 중요 법령 등을 해설해 주는 역할을 맡았다.[7] 말 그대로 내각만 이동하였고 나머지 정치인들은 개별 탈출.[8] 소실된 줄 알았으나 KBS가 미국 국립 기록 보관청에서 발굴했다. 자세한 건 후술.[9] 이미지에는 또 F.B.I.S라고 워터마크가 박혀 있는데 정확한 조사가 필요함.[10]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국민 여론, 의회 승인 등이 있기에 절차가 늦을 수밖에 없다는 의미임.[11] 무초 대사[12] 당시 미군 편집자를 의미함[13] CIA 축약문에서는 항복하라는 내용으로 적혀있음[14]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에는 남한을 뜻하는 명칭으로 '민국'을 자주 사용했음을 감안한 번역이다. 초창기 대한민국에서 국호에 들어가는 republic의 번역어로 '공화국' 사용을 기피했던 것은 대한'민국'으로서의 정통성 문제도 있지만 북측이 자칭한 국호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의식해 기피했기 때문이다.[15] 참고로 장영민 교수는 역사학 전공자로(동학농민운동 연구로 박사학위 취득) 그가 재직 중인 상지대학교에 사학과가 없는 관계로 방송 영상학과 소속으로 되어 있다.[16] 가령 27일 오후 4시와 9시의 방송에 대해 정부가 이미 도망친 뒤 철저히 숨기고 저 방송을 한 것으로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지만, 사실 27일 오전 6시에 천도방송을 반복해 전파했다. 하지만 이 방송은 구체적인 내용이라 원래 계획에 존재하지 않는 방송이었고 이 때문에 후속 상황전파에 의한 매뉴얼 방송에 밀려 더 이상 방송되지 않았다.[17] 물론 저런 심리전은 역사적으로 많이 있어 왔지만, 당시 상황이 너무 불리함에도 도를 넘어서 행한 것이 문제였다.[18] 미 국무부 한국 국내상황 관련문서 Ⅰ :한국전쟁 자료총서 39, 272~273쪽[19] 심지어 당분간 버티기 충분한 탄약이 있다고 언급한다, 그러나 이는 국군의 인도교 폭파로 인해 대부분 날려먹는다.[20] 신성모는 6월 27일 새벽 4시에 열린 국무 회의에서 전황에 대해 아는 바 없다고 해 놓고 서울을 몰래 빠져나갔다. 사실 하는 짓만 보면 "서울은 안전합니다", "빤스런" 등의 이미지는 오히려 신성모에게 훨씬 더 잘 어울린다. 물론 국회와 신성모의 기만에 속아 상황을 제대로 판단하지 못한 이승만도 대통령으로서 책임은 피하기 어렵다.[21] 채병덕은 취임 초기부터 여러 번 북한의 남침 보고를 보고 받았으으나 이를 뭉개버렸고, 6월 24일 전군의 30%를 외출시킨 장본인이다. 북한의 남침 보고를 올린 인물은 다름 일반 정보국 문관이였던 박정희.[22] 탱크가 제대로 기동하지 못할 것이며, 대전차 지뢰로 충분히 지연전을 할 수 있을 것이라 판단했으며, 신성모의 대전차포가 효과가 없다는 보고를 믿지 않았다.[23] 그러나 이승만은 신성모에게 전황이 불리한 사실을 보고받았기 때문에 기록이 오묘해진다.[24] FRUS 1950, 176쪽[25] 말이 좋아서 특별 열차지, 열차의 상태는 엉망진창으로, 차창이 깨지고 좌석의 스프링이 튀어나와 있었다고 한다. 당시의 긴박했던 상황을 잘 보여주고 있다.[26] 사실상 이미 함락 상태였다.[27] 이유는 그래도 대통령으로서의 양심이 있어서 돌아가고 싶어 했다는 주장, 싸우기 위해서라는 주장 등이 갈리지만 미군 측 기록에 의하면 미군 참전 계획을 듣고 나서 서울로 돌아가려고 했던 것으로 보인다. 다른 한편으론 국가 원수가 자신이 전선 근처에 있음으로서 국군들에게 그나마 위안을 주기 위함일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28] 허위 보고를 지속적으로 올렸으며, 이로 인해 적군과 내통했냐는 조사까지 받는다.[29] 허위 보고를 지속적으로 올렸으며, 마지막에 결전은커녕 도망친다.[30] 한강 방어선 전투[31] 청원방송박물관을 설립했으며 2009년 8월 24일에 사망했다.[32] 이 블로그에는 이 밖에도 수많은 방송 역사의 자료들이 남아있다.[33] 북한군이 서울에 들어오기 불과 5시간 반 전이다![34] 즉, 서울 시민들이 방송을 들은 것이 아니다.[35] 참고로 당일 오전 2시에 한강대교폭파되었고 오전 6시경에는 인민군이 서울의 주요 시설들을 접수하기 시작했다. 인민군이 방송국을 점령한 후에는 당연히 북한의 선전 방송이 송출되었다.[36] 이 기만 방송으로 인해 이승만이 하도 욕을 먹어서 어쩔 수 없이 피난 가라고 했다.[37] 국방부에서 기만 방송을 계속하고 있었어도, 개성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은 국방부에서 호회로 알렸다. 기만 방송 자체도 인민군이 서울 근처에 있다는 내용은 담겨 있다.[38] 위에 나온 대로 "서울 시민 여러분, 안심하고 서울을 지키십시오."라는 말은 역사적으로 명백한 왜곡된 사실이고, 설렁 한강 인도교 폭파 사건에 연루되지 않았다 한들, 이 사건의 결과로 연결된 국민방위군 사건, 보도연맹 학살 사건 같은 역사적 사실의 잘잘못 여부까지 무시해 버린 게 문제다.[수정] 파일:15778b6a788b7ce1.png[40] 출처가 밝혀지기 전에는 정읍 발언에서 찍힌 사진으로 추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