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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샤르 알아사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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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리아의 제4대 대통령이자 해당 인물의 아버지에 대한 내용은 하페즈 알아사드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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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리아 제19대 대통령
바샤르 알아사드[1]
بشار الأسد | Bashar al-Assad
파일:158285.jpg
<colbgcolor=#4F110E><colcolor=#E5E4E7> 본명 바샤르 하페즈 알아사드
بشار حافظ الأسد
Bashar Hafez al-Assad
출생 1965년 9월 11일 ([age(1965-09-11)]세)
시리아 다마스쿠스주 다마스쿠스
재임기간 제19대 대통령
2000년 7월 17일 ~ 2024년 12월 8일
서명
파일:바샤르 알아사드 서명.svg
링크 파일:유튜브 아이콘.svg | 파일:페이스북 아이콘.svg | 파일:X Corp 아이콘(블랙).svg[A] | 파일:인스타그램 아이콘.s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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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4F110E><colcolor=#fff> 부모 <colcolor=#373a3c,#ddd>아버지 하페즈 알아사드
어머니 아니사 마클루프
형제자매 누나 부슈라 알아사드 (1960~)
형 바셀 알아사드 (1962~1994)
남동생 마지드 알아사드 (1966~2009), 마헤르 알아사드 (1967~)
배우자 아스마 알아사드
자녀 아들 하페즈 알아사드 2세, 카림 알아사드
딸 제인 알아사드
학력 알후리야 고등학교[3] (졸업) (~1982)
다마스쿠스 대학교 (의학 / M.D.) (1982~1988)
병역 시리아군 원수
종교 이슬람 시아파(알라위파)
신체 190cm
정당

[[바트당|
바트당
]] (시리아)
}}}}}}}}}

1. 개요2. 상세3. 생애
3.1. 집권 이전3.2. 대통령 집권과 정책 전반3.3. 실각과 러시아로 망명
4. 외교5. 시리아 민주화 운동, 시리아 내전6. 평가7. 가족 관계
7.1. 아내
8. 기타
8.1. 사치8.2. 아사드는 ISIL 준동의 원흉인가?8.3. 알아사드가 건재했던 이유?
9. 관련 문서10.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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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시리아의 정치인, 제19대 시리아 대통령이자 세습 독재자.

2. 상세

제18대 시리아 대통령하페즈 알아사드의 둘째 아들로, 2000년 하페즈 대통령이 사망한 뒤 대통령직을 세습하여 제19대 대통령으로 취임하여 바트주의 시리아를 이끌었다. 부자 간 세습으로 정권을 잡은 독재자인 셈.

결과적으로 10년이 넘는 시리아 민주화 운동, 시리아 내전을 거치면서 독가스까지 동원한 반인륜적 학살공습으로 인해 60만 명에 달하는 시리아인들이 사망하고 인구의 30%에 육박하는 660만 명난민이 되었다는 점에서 반인륜적인 학살자이자 냉전 이후 최악의 독재자 중 한 명으로 평가된다.[4]

2024년 12월에 튀르키예미국의 지원을 받은 세력이 대거 포진한 반군 연합의 진격에 거점들이 속수무책으로 함락당하자, 러시아로 망명하였다. 당초에 행방이 알려지지 않았고, 바샤르가 탄 전용기의 신호가 도중에 사라지는 일이 발생해서 아랍에미리트 망명설, 격추 사망설이 나돌아다니기도 했으나, 러시아측의 입장표명에 따라 러시아로 망명간것이 확인되었다. 어쨌든 대통령으로서의 실효적인 국내 권력을 상실하면서 바트주의 시리아 정권은 61년만에 완전히 붕괴되었고, 시리아는 알아사드 부자의 53년 집권에 종지부를 찍게 되었다.

3. 생애

3.1. 집권 이전

1965년 9월 11일 다마스쿠스에서 당시 공군사령관이었던 하페즈 알아사드의 6남매 중 넷째로 태어났다. 1982년 다마스쿠스 대학교 의학부에 입학하여 1988년 졸업했다. 1992년 영국 런던에 있는 웨스턴 안과 병원(Western Eye Hospital)으로 유학하여 안과 전문의 과정을 수료했다. 훗날 그의 영부인이 될 영국의 런던에서 태어난 수니파 무슬림 아스마 알 아사드와는 안과 수련의 시절에 알게 되었다. 2000년 시리아 대통령에 취임 이후 12월에 그녀와 결혼하여 슬하에 2남 1녀를 두었다.

즉, 처음엔 의사로 조용히 살 생각이었던지라 정치가가 될 생각이 없었으며 아버지 하페즈 또한 자신의 장남이자 바샤르의 형인 바셀을 후계자로 생각하고 이미 일종의 후계자 수업도 받고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1994년, 그의 인생을 바꾸어 놓는 일대 사건이 일어나는데, 바로 형 바셀 알아사드 중령이 교통사고로 사망한 것이었다.

이에 바샤르는 비보를 접한 후 귀국하여 시리아 육군에 입대해 다마스쿠스 북부에 있는 홈스의 군사학교에 들어갔고, 다마스쿠스의 티슈린 군병원에서 육군 군의관으로 복무했으며 1999년 1월 육군 군의대령으로 승진하였다. 바샤르는 바셀의 사고사로 인해 하페즈의 새로운 후계자가 되어 후계자 수업을 처음부터 받으며 동생인 마헤르 알아사드의 권력 기반이었던 시리아 공화국 수비대의 실질적인 지휘권을 장악하였다. 누나 부쉬라는 여성이었고[5], 바샤르의 두 남동생들은 정신병이 있거나(마지드) 선천적으로 포악하고 과격하여(마헤르)[6] 대권을 잇기에는 부적합했다.

그러나 바샤르 알 아사드가 대통령이 되기 위해서는 한 가지 문제가 있었는데, 만 40세 미만은 대통령에 출마하지 못하도록 한 헌법이었다. 이에 시리아 의회는 바샤르를 위해 나이 제한 조항을 당시 바샤르 나이인 34세에 맞게 헌법 개정안을 통과시켰다. 그리고 2000년 아버지 하페즈가 심장 마비로 사망하자 바샤르는 바트당과 시리아군의 지도자에 임명되었고, 누구의 반대도 받지 않았다고 추정되는 압도적인 지지율(유효표 중 97.2%)로 부친의 뒤를 이어 대통령에 선출되었다. 2007년 5월 27일, 또다시 타 후보자가 없이 치러진 대선에서 97.6%의 득표율로 7년 임기의 대통령에 재선되었다.

3.2. 대통령 집권과 정책 전반

만약 사회의 운영이 하나의 종교, 하나의 정당, 혹은 하나의 그룹에 편중된다면, 그 사회에는 발전이 있을 수 없습니다. 모든 시민, 시민 한사람 한사람에게 사회의 발전과 근대화에 나서주실 것을 요청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세가지 사항이 중요합니다. 우선, 모든 과제에 대해 새로운 생각을 갖는 것입니다. 그다음으로, 현실에 걸맞지 않는 낡은 생각을 버리고, 새로운 생각을 도입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기존의 생각을 개선하는 것입니다. (중략)

이를 위해 다음의 여러가지 측면이 필요로 해집니다. 창조적인 사고, 건설적인 비판, 설명 책임 등이 바로 그것입니다. (중략)

정치제도의 개혁을 위해서는 민주적인 사고방식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투명성이 요구됩니다. 국가가 개인을, 개인이 국가를 존중하기 위해서 우리는 법의 지배를 지켜야만 합니다. 법의 지배가 우리의 자유를 지켜줍니다. 낭비와 부패에 대해서도 싸워야 합니다. 행정개혁은 더이상 기다릴 수 없는 과제입니다. 무책임하고 부패하며 악한 짓을 행하는 것은 법의 단죄를 피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현 상황에 안주하는 것을 더이상 용납할 수 없습니다.

바샤르 알 아사드는 2000년 7월 취임연설에서 국민의 광범위한 정치적 참여와 민주주의적인 개혁을 요구하는 연설을 했고 국민들은 처음에는 이를 당혹스러워했다. 하페즈 알 아사드 시대에는 그런 것을 언급하는 것만으로도 체포되고 고문당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곧 새로운 사회분위기를 자각하고 다마스쿠스의 지식인 99명이 치안유지법의 철폐와 민주화 개혁을 요구하는 시국선언을 발표하기도 했다. 이런 이유로 아사드가 대통령이 됐을 때 시리아인들은 그를 ‘희망’이라고 불렀다. 아버지의 억압적인 통치와는 다른 모습을 보여줄 것이라는 기대 때문이였다. 아사드는 영어와 프랑스어에 능통하며, 컴퓨터와 정보통신에도 관심이 많았으며, 취임 후에는 정치범을 석방하고 국영기업의 민영화와 경제 개혁을 추진했던 것 때문이었다. 바샤르는 시리아컴퓨터협회 회장직을 맡아 시리아에 인터넷과 휴대폰을 도입하고 각급 학교에 컴퓨터를 보급하는 등 이른바 ‘현대화의 기수’로 행세하는 한편, 아버지의 오랜 측근이었던 마흐무드 알 주비 총리를 숙청하는 등 대대적인 반부패 캠페인도 전개했다.

하지만 정치개혁은 제대로 진행되지 않았다. 이미 바샤르의 온건노선에 대항하는 바트당 보수파들이 있기도 했지만 2001년 9.11 테러로 인하여 미국의 시리아에 대한 태도가 극도로 악화되었으며 아사드 정권을 전복시키겠다는 강경한 발언들이 쏟아져 나왔다. 이 일들로 인해 민주주의로의 시민 토론이 활발했던 "다마스쿠스의 봄"은 시민단체의 운동 방향이 반정부로 흘러가면서 건수를 잡은 당국에 의해 체포 및 수감되면서 무너지고 말았다. 또 이웃나라인 이라크가 침공당해 파멸하고 저항 세력이 준동하며 난민들이 계속해서 시리아로 밀려들어왔으며 미국의 요청으로 국경 통제에도 진력을 기울이지 않을 수 없어 내부적인 치안첩보의 완화를 급격하게 추진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알라위파만이 고위직에 오른다는 아사드 정권의 전통을 깨기도 했다. 자신이 오랫동안 회장을 맡았던 컴퓨터과학협회의 구성원들을 다수 활용함은 물론 하페즈 시대에는 다마스쿠스 대학 출신 학자만을 내각에 임명했는데 지역감정을 깨고 알레포 대학 출신 학자들을 임명하기도 했다. 구 바트당 위주의 인사에 대비되어 기술관료의 입지가 높아졌고 자유경제 전문가이고 비당원인 압둘라 다르다리가 경제부총리로 임명되었으며 계획경제 전문가인 아메르 루트피와 협력하여 시리아 경제체질 개혁을 이끌어 나가기도 했다. 수니파인 무함마드 오타리가 총리를 맡기도 했고, 특히 군부의 요직인 국방장관에 2011년 취임한 다우드 라지하는 기독교도, 정권의 기둥 치안정보기구(GSD)의 수장을 2005년부터 2010년까지 맡았고 2012년 7월에 재취임한 알리 마물루크는 수니파이다. 시리아 내전에서 종횡무진 활약하는 공화국수비대 104공수여단장인 잇샴 자헤라딘 준장은 드루즈파다.

아사드 가문 친인척이라고 해도 부정부패가 있으면 엄중히 처벌되었다. 레바논에서 활약하며 왕처럼 행동했던 가지 카나안은 바샤르의 냉대를 받고 권총 자살했으며 세관국장으로 광범위한 탈세를 해온 모친 계열의 일족 하산 마클루프는 2009년에 해임 및 체포되었다. 이러한 일족 처벌을 반대하고 하산 마클루프의 구명에 나선 숙부 자밀 아사드는 바샤르의 무시를 당하고 진노하여 둘의 관계는 오랫동안 소원해졌을 정도이다. 이러한 인사 조치들과 함께 알라위파에 대한 수니파 국민들의 증오는 상당히 누그러들었고 내전이 발발한 이후에도 수니파 60%가 아사드를 지지한 원동력 중 하나가 되고 있다.

하지만 이런 일련의 조치들은 그저 보여주기용인 요식행위였고 부정부패와 알라위파의 고위적 독점은 그대로였다.

경제 부문에 있어서의 개혁의 골자는 사회주의 경제체제의 탈피와 자유경제 활성화였다. 이에 대한 바트당 보수파의 반대를 무릅쓰고 2000년 사립학교의 설립을 자유화했고, 사회주의 경제체제를 유지하며 소매점 이상의 개인 상공업을 금지하는 법안을 완화하였으며 2005년 6월에는 바트당 보수파를 물리치고 당대회를 열어 자유경제정책을 골자로 하는 10차 5개년 계획을 통과시켰다. 이러한 개혁정책에 의해 관광업을 비롯한 민간 업종의 성장이 조금씩 이루졌고, 아사드 정권 전반기의 시리아는 경제적으로 호황기를 누려서 1999년에 1인당 GDP가 998달러였던것이, 2011년에는 2971달러로 3배 가까이 상승하였다.

한편 바샤르는 2007년 대선에 단독 출마해 97.6%의 득표로 재선됐는데, 투표장마다 정권의 친위대인 공화국 수비대원들이 깔려 있었고, 투표소 안에는 ‘찬성란에 동그라미를 치면 된다’는 안내문이 붙어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러한 경제성장속에서도 청년실업과 늘어가는 빈부격차는 심각한 사회문제였으며, 특히 2007년부터 심각한 가뭄과 이상기후로 인하여 시리아 인구 20%가 종사하는 농업이 큰 타격을 받았고, 상대적으로 상공업 위주의 경제정책을 펴던 시리아 정부는 농업을 소홀히 대하는 경향이 있어 대책도 미봉책 수준이었다. 이에 따라 파탄난 농촌경제를 뒤로 하고 도시로 상경하는 이촌향도 현상이 심화되어 결과적으로 실업률 증가로 이어졌다. 2011년 기후 정상화로 농업 생산량은 회복되기 시작했으나 이때는 시리아 전체가 난리가 났고 이후 내전으로 인해 시리아의 경제개혁은 완전히 주저앉아버린 상황이다.

2023년 9월 21일 항저우 아시안게임 개막식에 맞춰 초청 받아 항저우에 도착했다. 이후 중국 시진핑 주석과 만나 정상회담을 가졌다.##

3.3. 실각과 러시아로 망명

2024년 11월 말부터 시작된 반군의 공세에 의해 주요 도시들이 함락되면서 미래가 불투명해졌다.

2024년 12월 8일 수도 다마스쿠스가 함락되고 시리아 정부가 붕괴되면서 그의 전용기가 격추되었다는 설도 도는 등, 현재 행방이 묘연한 상태이다. 러시아로 도피했다는 추측이 있으나 확실한 정황은 아직 알 수 없다.# 다마스쿠스를 점령한 시리아 반군에 의하면 아사드는 이미 다마스쿠스에서 도피했다는 주장이 나왔다.#

바샤르 알아사드가 내전에서 패전하고 실각하면서, 54년에 걸쳐 시리아를 통치한 알아사드 부자의 세습정권은 무너지게 되었다. #

다마스쿠스에 남은 시리아 총리가 자신은 아사드의 현재 행방을 모르며 어제(7일) 한 연락이 마지막 연락이었다고 주장했다. 한편 바트당 집권기 동안 동맹 관계를 유지한 러시아 외무부는 아사드 대통령이 평화롭게 정권을 이양할 것을 명령하고 시리아를 떠났다고 공식 발표했다.#

아사드가 7일 밤 비행기로 서부 지중해 지역의 러시아 공군기지로 이미 도피했다는 주장도 나왔으며 이후 8일 오후, 가족과 함께 모스크바에서 목격되었다는 보도가 전해지고# 11일 러시아 외무차관도 아사드를 구출하여 데려왔다는걸 인증하면서 러시아로 망명한 것이 확정되었다. 실각 후 해외로 망명한 다른 독재자의 사례와 마찬가지로 새 정부의 사면을 받거나 러시아의 세력을 등에 업고 정국을 뒤엎지 않는 한 시리아로 돌아가지 못한 채로 남은 생을 러시아에서 이어가야 할 것으로 예상된다.[7]

시리아 정보부 관리가 튀르키예 언론과의 인터뷰에 밝힌 내용에 의하면, 바샤르 알아사드는 몰락하기 직전 1350억 달러(한화 약 193조)의 비용을 밀수해 러시아로 도피했다고 한다. # 시리아의 GDP가 가장 높았던 2010년의 GDP는 675.4억 달러였고, 2024년 GDP는 190억 달러 미만이니, 거의 나라의 2~7년치 총소득만한 돈을 챙겨간 셈이다.[8] 사실상 몰락 후에도 '내가 가진 것을 남에게 뺏기느니 차라리 내 손으로 다 부숴버리는 게 낫다'는 마인드로 시리아 경제의 뿌리까지 뽑아버린 셈인데[9], 그 모부투 세세 세코가 횡령한 돈도 당시 자이르 GDP를 넘기지 않았다는 것을 감안하면 더더욱 가관인 셈이다. 이 와중에 정부군은 도심 건물 곳곳에 불을 지르고 떠나는 추한 모습이나 보여줬다.

아사드가 동생 마헤르가 지휘하는 제4기갑사단을 통해 중동 전역에 캡타곤을 밀수, 2020~2022년까지 연평균 약 24억 달러의 수익을 올렸다는 의혹은 기존에도 가끔씩 보도되곤 했지만,(#) 아사드의 몰락 후 드러난 바에 따르면 아사드는 비밀리에 마약 제조 공장도 운영하고 있었다. 여기서 제조한 마약들을 밀매한 것. 여기서 숨겨진 '캡타곤'이라는 이름의 마약은 IS가 전투용으로 쓰던 마약인데, 자신들이 제조한 마약을 자신들이랑 싸웠던 IS에 밀매했을 가능성도 완전히 배제할 수 없는 상황. #1 #2

12월 16일 실각 이후 처음으로 성명을 냈다. 시리아 반군을 테러리스트로 지칭하며, 테러를 해방혁명으로 꾸미고 있다고 주장했다. 또한 자신은 결코 대통령직에서 사임하겠다는 의사 표명을 한 적 없으며, 다마스쿠스가 함락된 12월 8일까지 집무를 보고 있다가 자발적인 망명이 아닌 러시아의 요청으로 러시아군 기지를 통해 대피한 것이라고 변명했다. #[10]

4. 외교

서방국가에는 전향적인 자세를 취했다. 영국 이중국적자인 부인을 대동하고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과 만나기도 했고 자크 시라크, 니콜라 사르코지 당시 프랑스 대통령들과 정상회담을 하기도 했다.

마찬가지로 미국에게도 전향적인 외교 정책을 취했으나 당시에 여러 이유로 이렇다 할 성과는 없었다. 90년대 미국은 사담 후세인 대통령 통치하의 이라크에 대한 경제 재제가 시리아의 대 이라크 무역으로 인해 실효성이 낮아진다면서 바샤르 알 아사드 취임 이후에도 항의했으나 시리아 입장에서는 경제적 이익이 걸린 무역을 줄일 수 없었다. 9.11 테러 이후 시리아 정보기관은 알 카에다와 지하디스트 관련 정보를 미국에 적극적으로 제공하면서 협력하였고 이라크 국경 관리에도 만전을 기울였지만 CIA의 호평에도 불구하고 미국 정계는 시리아에 대한 불만스러운 발언을 쏟아냈다. 2003년 101공수사단장 데이비드 페트라우스와의 협력 이후로 지속적인 국경 관리에 대해 미국 군부는 호평을 하였으나 조지 W. 부시 대통령은 불만투성이었고 2007년 이라크 안보를 위한 주변국 회의에서 시리아도 출석하여 알 카에다가 100여회의 자폭공격을 국경초소에 시도했음을 토로하고 외교 대표단에게 자국의 국경을 시찰하도록 허용하였고 시찰단이 국경의 관리에 대해 호평했음에도 불구하고 미국 정계는 계속해서 불만을 쏟아냈다.

이것은 시리아가 근본적으로 친 이란, 친 러시아, 친 하마스/헤즈볼라, 반 이스라엘이라는 외교 기조를 버리지 않은 데에도 이유가 있었다. 특히 미국은 시리아가 헤즈볼라에 계속해서 자금과 무기를 지원하는 것에 대해 강한 불만을 가졌으며 시리아를 테러지원국으로 지정하기도 했다. 시리아도 외교와 첩보에서 미국에 적극적으로 협력하는데도 시리아의 외교적 처지를 이해해주지 못하고 무조건적으로 미국의 방침에 따라줄 것만 바라는 미국 정계에 실망하고는 협력을 중단했다. 미국은 한편 시리아가 핵개발을 한다며 비난의 자세를 높였고 결국 이스라엘이 2007년 9월 시리아의 핵시설이라고 주장하는 알 키바르의 건물을 폭격해버림으로써 양자의 관계는 도로 소원해졌다.

튀르키예와는 본래 소원한 사이였다. 하타이주를 둘러싼 영토분쟁과 특히 시리아의 농업의 명줄을 쥐고 있는 티그리스 강유프라테스 강의 수자원을 튀르키예가 통제하고 있는 문제, 쿠르드족 문제로 인해 1990년대 양국은 군사적 긴장상태를 유지하기도 했다. 하지만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총리의 취임 이후 그의 친 아랍, 반 이스라엘 정책으로 인하여 급격한 정치 경제적 접근을 이룩했다. 2004년 1월 바샤르 알 아사드는 튀르키예에 공식 방문하여 정부 각료들과 회담하고 긴장관계를 크게 완화시켰다. 군사 합동훈련과 국경지대 지뢰제거에 대한 협력, FTA체결 등이 이루어졌고 바샤르 알 아사드는 아랍국가들의 왕따를 대신할 새로운 경제 정치적 공동체를 구상하였으며 지중해, 흑해, 카스피해, 페르시아만을 아우르는 사해공동체를 구상하였다. 이는 시리아, 이란, 튀르키예의 전략적 동반자 관계를 통해 경제 정치적인 발전과 안전망을 구축하려는 시도였다. 2009년 10월에는 고위급 전략회의를 통해 비자 면제 협정이 체결되었고 또 2010년 5월 튀르키예 소속 가자지구 지원 선박을 이스라엘이 격침시키자 튀르키예는 이스라엘과의 군사협력을 중지함으로써 시리아와의 관계는 매우 밀접해졌다. 그러나 현재는 시리아 내전에서 튀르키예가 반군을 지지하고 쿠르드를 저지하기 위해 군대를 파견함에 따라 관계가 얼어붙었다.

레바논에 대한 외교는 분명한 실책으로 평가된다. 시리아의 영향력은 원래 압도적이었다. 시리아와 레바논은 원래 같은 국가라고 해도 될 정도로 친인척 관계가 밀접하기도 했지만 레바논 내전 때부터 시리아가 군대를 파견하였고 시리아의 정재계 인사들이 현지와 밀접한 관계를 맺으며 거의 속국 수준의 영향력을 발휘할 정도였다. 젊어서 사우디아라비아로 이주하여 왕의 총애를 받아 큰 부를 획득하고 1992년부터 1998년까지 레바논 총리를 맡은 라피크 하리리는 본래 시리아 정부 인사와 깊은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하페즈 알 아사드의 동지인 압둘 카담 부통령, 시리아군의 히크마트 쉬하비 참모총장, 시리아 주둔군 첩보기관 책임자인 가지 카나안 등이 협력자였다. 그러나 바샤르 알 아사드 취임 이후 이들이 레바논에서 자행해 온 월권행위가 점차 드러나자 취임 전인 98년 카담 부통령을 해임하였고, 가지 카나안도 레바논에서의 왕과 같은 행동에 대해 혐오감을 가진 바샤르 알 아사드에 의해 직접 대면하는 위치에서 집사가 대응하는 수준으로 격이 떨어지자 수치심을 느끼고 권총 자살하였다. 이로 인하여 라피크 하리리는 시리아와 밀접하게 연결된 인맥을 대부분 잃어버렸고 바샤르 알 아사드에 대한 반감을 가지게 된다.

한편 2004년 에밀 라후드 대통령의 임기가 끝나오자 시리아는 레바논 정계에 대한 영향력이 추락하고 또 당시 테러와의 전쟁 등의 복잡한 국제정세에 의해 레바논 정계가 반 시리아로 돌아설 것을 우려한 나머지 군사력을 드러내어 대통령 임기를 강제 연장시킨다. 이에 레바논 민심이 크게 반발하고 시위가 벌어지는 가운데 라피크 하리리는 총리 자리를 항의성으로 사임한다. 2005년 2월 14일 새벽 라피크 하리리는 자동차 폭탄 암살로 사망하고 레바논에서는 시리아의 내정 간섭에 반대하는 '시더(삼나무/백향목) 혁명'(Cedar Revolution, ثورة الأرز) 이 일어나 반 시리아 세력이 확대되고 정권도 친 시리아 성향에서 반 시리아 성향으로 바뀌게 되었다. 국제 사회의 반발에 의해 결국 29년간 레바논에 주둔해온 시리아군은 전면적으로 철수했다. 이때 막대한 자본금도 다시 시리아로 회수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서방 사회에서는 영향력 상실을 우려한 바샤르가 반 시리아의 거두이자 정계의 거물인 하리리 총리를 암살하여 정세를 역전해보고자 했다가 독박을 뒤집어쓴 실패한 도박 정도로 평가하기도 한다. 하지만 대내적으로는 젊은이답게 권력 남용을 혐오하던 바샤르가 정의감에 불타 근시안적으로 주요 인사들을 섣불리 하야시켰다가 통제 불능의 사태가 벌어졌을 때, 정보국이 독단적으로 사태를 해결하려고 암살사건을 일으킨 것에 대해 분노하여, 군대뿐만 아니라 자본까지 싹다 회수하여 향후 레바논 내정간섭의 여지 자체를 아예 없애버린 것이라는 시각도 있다.

5. 시리아 민주화 운동, 시리아 내전

바샤르 알 아사드는 시리아 민주화 운동 이전에도 무자비한 철권 통치를 했다. 초창기에는 독재가 완화된 것으로 안 시민들이 정치범 사면 검열 폐지 등을 주장하고 나서자 바샤르는 집권 이듬해부터 비판적 언론인과 인권운동가들을 체포하는 등 강압정치로 회귀하기 시작했다. 실제로 바샤르 알 아사드 통치시기에는 시리아 곳곳에서는 비밀경찰이 상주하면서 시민들의 행동을 감시하고, 정치적 반대파라면 자신의 친척이라도 상관없이 숙청하며 정치범들을 고문하고 감금하는 등 인권탄압이 계속되었다. 다만 아이러니한 사실은 바샤르 알 아사드 정권을 수호하기 위해 깔아놓은 비밀 경찰과 사복 경찰들이 쫙 깔려 있어서 오히려 중동 국가 중에 치안이 좋기로 소문이 나있을 정도였다.[11] 실제로 시리아로 관광을 갔던 한국인 관광객의 증언에 의하면 한국어로 아사드라는 단어 자체를 거론했다가 시리아 경찰이 이를 알아듣고 사복 경찰이 따라왔다는 이야기가 있었을 정도다.

그래서 시리아는 2009년 인권 단체 휴먼라이츠워치로부터 인권 부문에서 세계 최악의 국가 중 하나라는 평가를 받을 정도였다. '휴먼 라이트 워치'는 시리아의 인권 상황이 아버지 때보다 더 나빠졌다고 평가했고, 알 자지라 방송은 "시리아 당국이 인권 운동가 등을 계속 체포하고, 웹사이트를 검열하며, 반체제 성향의 블로거들을 구금하고 있다"고 보도하기도 했다. 2008년에도 차단했으며 2011년 2월까지 일시적으로 인터넷을 차단하기도 했다. 출처1 출처2 출처3 출처4 출처5 이러한 아사드 정권의 폭압적인 독재와 시리아 내의 경제난과 여러가지 원인이 겹쳐 아사드에 대한 시리아인들의 불만이 점점 높아지고 있었다. 그런데 이러한 불만들이 한 순간에 폭발하는 사건이 터진다.

2011년 1월 26일 첫 시위가 발생했지만 그냥 흐지부지 끝났다. 이에 2011년 1월 31일 시리아 정부는 SNS에 대한 자국 내 접속 차단을 해제하고 지방 선거 실시와 비정부기구의 권한 확대, 언론 자유를 더 보장하는 미디어법 제정 등의 유화책을 펼쳤다.

그러나 아랍의 민주화 열기는 결국 시리아에도 영향을 끼쳤고 2011년 3월 20일 시리아의 수도 다마스쿠스에서는 1만명의 반정부 시위가 모여 바샤르 알 아사드 대통령의 퇴진을 요구했다. 또한 남부 도시 다라에서도 수천명이 시위를 벌여 무력충돌이 발생했는데 놀랍게도 바샤르 알 아사드 정권은 시위가 일어난 첫날부터 실탄을 발포하고 무자비한 강경진압을 단행했고 이 시위에서 최소 1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 그러나 시위대는 정치적 자유와 반정부 구호를 외치면서 1973년 선포된 국가 비상사태법의 해제를 촉구했다. 그러자 시리아 보안군은 다시 시위대에 실탄을 발포했고 이 시위에서 최소 4명의 사망자가 발생하자 2011년 3월 19일과 20일 열린 희생자들의 장례식에서 또 다시 대규모 시위로 확산됐다. 시위대들은 “우리 순교자의 피는 절대 잊혀지지 않을 것” “우리가 원하는 것은 부패를 끝내는 것”이라고 외쳤다. 기사

2011년 3월 25일에는 국제 엠네스타가 지난 1주일 간 시리아 남부도시 다라를 중심으로 벌어진 반정부 시위로 지금까지 55명이 사망했다고 밝혔으며 "당국이 시위대 탄압에 대한 철저한 진상조사를 약속한지 하루 만에 사나메인에서 보안군이 시위대를 향해 발포했다" "수도 다마스쿠스에서는 시위대 일부가 강제 연행됐다"고 전했다. 다라 지역 한 거주민은 5만여 명의 시위대 2011년 3월 24일 부타니아 샤반 대통령 보좌관이 밝힌 개혁 약속을 비난하는 시위를 벌였으며, 또 다마스쿠스 인근 두마 지역에서는 수천 명이 시위를 벌이다 보안군에 체포되었지만 수많은 사람들이 시위를 벌이며 아사드 정권의 퇴진을 촉구했다. 기사

이후에도 무자비한 시리아 군의 강경진압으로 인해 수많은 희생자가 발생했고 시위대에 계속해서 실탄을 발포하여 시위대를 사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결국 2011년 3월 29일 시리아 내각이 총사퇴했고 새 내각이 결성될 때까지는 기존 인원들이 그대로 업무를 볼 예정이며 바샤르 알 아사드 대통령은 대통령직을 그대로 유지할 것이라고 밝혔다.

그러던 중 2011년 3월 31일 바샤르 알 아사드 시리아 대통령이 전국으로 확산되고 있는 반정부 시위와 관련해 음모론을 제기했으며, 게다가 예상과 달리 국가 비상사태법 폐지도 거부해 시리아 정국 혼란은 가속화되었다.

심지어 시위대가 요구했던 국가비상사태 해제 결정은 연설에서 말하지도 않았다, 심지어 2011년 3월 중반에 50년 가까이 지속된 국가 비상사태법 폐지를 약속했던 상황이였으며 이 선언 이후에도 시위가 누그러지지 않자 2011년 3월 29일 내각을 해산하고 새 정부를 구성하겠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바샤르 알 아사드가 내각 사퇴 결정을 한 지 고작 하루 만에 입장을 바꿔 사실상 개혁안 제시를 거부한 것이다, 즉 자신은 물러날 생각이 없다는 것을 대놓고 드러낸 것이였다. 이에 시위대는 정부가 어떤 약속을 하든 관계없이 대규모 시위를 벌이겠다고 밝히며 시리아 민주화 운동 사태는 더 악화되었다. 기사 기사2

그리고 더욱 더 시리아 정부군의 시위대에 대한 공격은 더욱 더 잔혹해졌다. 2011년 4월 8일에는 시리아군이 남부 도시 다라에서 수천명의 시위대에 실탄을 발포해 최소한 13명이 숨지고 수십명이 부상당했고, 기사 2011년 4월 8일 반정부 시위 도중 보안군의 발포로 37명이 사망한 사람들을 기리는 2011년 3월 9일 장례 행렬에도 실탄이 발사돼 여러 명이 부상당했다.기사

꽁꽁 묶인 시위대를 무차별적으로 구타하는 장면을 담은 동영상이 공개돼 아사드 정권에 대한 분노가 더욱 확산되었다. 영상에 의하면 두 손이 묶인 시위대를 향해 무차별 폭력이 가해졌고, 발로 얼굴을 차는 것도 모자라 막대기로 피해자를 사정없이 내려쳤으며, 한 보안군은 자신이 한 짓이 자랑스럽기라도 한 듯이 아예 시위대 등 위에서 마구 뛰어서 피해자를 밟기까지 했다. 이러한 정부의 강경진압이 계속되면서 시위대의 분노는 극에 달했으며, 이에 시위대는 바샤르 알 아사드, 하페즈 알 아사드의 동상을 부수며 분풀이를 하며 아사드의 퇴진을 촉구했다. 기사 기사2

2011년 4월 14일에는 시리아 정부가 "시위 진압 땐 한번에 20명 넘게 살해 말라"라는 비밀문건이 공개되기도 했다. 문건에서는 바샤르 알 아사드를 "우리의 최고 존엄"으로 지칭하면서 "이에 도전하는 어떤 행위에도 관용을 베풀어서는 안 된다"고 적혀있었으며, 문건은 대책회의의 목적을 "이집트튀니지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서"라고 규정하며 시위대를 탄압해야 한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는데 2011년 3월 23일 작성된 것으로 보이며 즉 아사드 정권이 시위 초기에 이미 타협할 생각이 없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기사

심지어 2011년 4월 29일 시리아 보안군에 체포됐던 13세 소년 함자 알 카티브가 고문 치사로 숨진 사건이 벌어져 시위가 격화되었다. 카티브는 반정부 시위에 동참했다가 보안군에 체포됐으며 시신은 그야말로 참혹 그 자체였다. 얼굴은 폭행으로 두꺼비처럼 부어올랐고, 온 몸에서 채찍질 자국이 발견됐으며 손과 발에는 전기고문의 흔적이 남아 있는데다가 배에서는 권총에서 발사된 것으로 추정되는 1발의 탄환까지 발견됐다. 그것도 모자라 성기 부분이 예리한 흉기로 완전히 잘려나가 있었다. 그러나 소년의 유족들은 시신을 돌려받기 위해 '시신의 상태에 대해 침묵을 지킨다'는 함구의 각서를 썼다고 한다. 이에 더욱 분노한 시민들이 항의하자 더욱 더 강경 진압에 나섰으며 시리아인들이 조직적인 고문 및 학살을 당한다는 보도도 나왔다. 이후 상황은 거의 똑같았다, 시리아 정부군이 탱크를 동원, 민간인 거주지역을 포격하거나 무자비한 강경 대응으로 맞섰다.

이러한 아사드의 무자비한 만행에 수많은 언론과 단체들이 아사드는 학살을 멈추고 당장 시위대와 타협하라는 성명들이 쏟아졌다. 그러나 아사드는 이를 거부하고 더욱 더 강경하고 무자비하게 시위대를 탄압했다. 심지어 민간인 여성들을 성폭행하라고 정부군이 강요했다는 정황까지 나왔다. 기사

바샤르 알 아사드는 2011년 5월 31일 무슬림 형제단을 포함해 정치운동단체의 모든 회원들을 사면한다고 밝혔으며 1982년 아사드 대통령의 아버지 하페즈 알 아사드에 대항한 무장봉기를 주도했던 무슬림형제단의 가입은 사형선고를 받을 수 있었지만, 이번 사면조치로 31일 이전에 저질러진 일반 범죄자들에 대한 형량도 절반으로 줄어들었다. 기사 그리고 시리아의 집권 바스당이 시위 사태 해결을 위해 전국민 대화위원회를 48시간 안에 구성하겠다고 현지 언론이 보도했다. 친정부 성향의 일간지 알 와탄은 바스당의 2인자인 모하메드 사이드 브크헤탄이 모든 정파와 정치 경제사회 등 각 분야의 인사들이 참여하는 대화위원회를 구성할 것이라고 말했으며 또 대화의 방식 등 구체적인 내용이 48시간 안에 발표될 것이라고 말했다. 기사 문제는 이러한 여러 조치들 이후에도 여전히 시리아인들에 대한 무자비한 학살이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이후에는 아예 헬기와 탱크를 동원한 강경진압에 나섰다.

또한 바샤르 알 아사드 대통령은 2011년 6월 20일 개헌을 논의하기 위한 국민 대화를 제안했지만 반정부 시위대에 비난의 화살을 돌리면서 실질적인 개혁 의지가 없다는 사실을 드러냈다. 바샤르 알 아사드 대통령은 이날 시리아 다마스쿠스대학에서 대국민 TV 연설을 통해 "시리아의 미래는 모든 정파가 참여하는 국민 대화에 달려 있다"며 "국민 대화는 헌법 개정이나 새로운 헌법의 제정을 이끌어 낼 수도 있다"고 밝혔다. 그러나 "이번 반정부 시위는 파괴활동가들의 선동에서 비롯됐다"며 반정부 시위대에 대한 비난했으며, 그는 "파괴활동가들이 정권에 도전하면서 부당한 요구를 하고 있다"며 "파괴와 혼란 속에서는 어떤 개혁도 있을 수 없으며 파괴활동가들을 고립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기사

아사드는 현재의 시위 사태는 소수 '난동꾼들'(saboteurs)의 짓이라며, 파괴 활동으로는 개혁을 이룰 수 없을뿐 아니라 경제 활동에도 치명적인 영향을 주고 있다고 비난했다.심지어 아사드는 "우리는 자비를 베풀 수 없다. (시위로 인한) 피해는 모두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다"면서 시위대를 "병균"(germs)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이에 시리아 시민들은 아사드에 대해 "거짓말쟁이!"라는 함성으로 대응했다. 시민들은 거리로 몰려나와 그의 퇴진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였다. 특히 수도 다마스쿠스에서는 수많은 시위대가 거리로 몰려나왔으며, 알레포와 데라, 하마 등 지방 도시에서도 시위가 일어났다.

시위대는 "시리아 민중은 정권 퇴진을 원한다" 등의 구호를 외쳤으며, "우리는 오직 한 가지를 원한다. 정권을 몰아내는 것이다"라고 쓰여진 플래카드를 두르고 행진하는 모습도 눈에 띄었다. 특히 다마스쿠스는 전통적으로 아사드 부자에 대한 지지가 높은 지역이었다는 점을 감안할 때 이는 시리아 민중의 마음이 정권에서 얼마나 돌아섰는지 보여준다는 관측이라고 한다. 기사

심지어 시리아군이 아사드 반정부 시위가 벌어진 마을에 의료진이 접근하는 것을 차단해서 부상자가 치료를 받지 못하고 있으며, 저러한 아사드에 대한 평화적 시위 이후에도 이러한 학살을 계속되었다. 이에 바샤르 알 아사드는 절대로 평화적인 방법으로 몰아낼 수 없다는 여론이 강하게 제기되었고 결국 이러한 아사드의 무자비한 탄압은 점차 내전으로 번져 현재 악명높은 시리아 내전이 발발하게 되었다.

물론 시리아 민주화 운동 당시에 써먹었던 고문과 학살을 계속 자행하고 있으며 미국의 경고를 무시하면서 무자비한 학살과 고문 탄압 정책, 그리고 러시아, 이란, 헤즈볼라의 뒷배로 아사드는 2024년까지 어찌어찌 정권을 유지하고 있었다. 더 자세한 내용은 시리아 민주화 운동, 시리아 내전 문서 참고.

6. 평가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바샤르 알아사드/평가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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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가족 관계


시리아 내전에서 패전한 이후 누나 부슈라와 조카들은 아랍에미리트로, 남동생 마헤르는 휘하 부대를 끌고 이라크로 망명했고[12] 바샤르 본인은 아내 아스마와 자녀들을 데리고 러시아로 망명했다.

아버지 하페즈와 어머니 아니사, 형 바셀, 남동생 마지드의 시신들이 관으로 안장되어 있던 카르다하의 영묘는 반군들이 점령한 후 시설 내부를 전부 불을 질러 파괴하고 이들의 시신들도 관 째로 짓밟은 후 불태워 없애버렸다.[13] 남은 잔해에는 소변을 보는 장면들이 촬영되었다.

7.1. 아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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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아스마 알아사드(Asma al-Assad)
출생 1975년 8월 11일 ([age(1975-08-11)]세)
학력 킹스 칼리지 런던 (1996년)
신체 170cm, 55kg



영국에서 태어난 시리아의 퍼스트 레이디.

참고로 부모님인 파와즈, 사하르 부부는 시리아의 수니파 명문 가문 출신으로 중동계 영국인이다.

2000년 시리아에서 갓 시리아 대통령이 된 바샤르 알 아사드와 결혼했으며, 결혼하기 전에는 JP모건 체이스에서 투자전문가로 일하기도 했다. 자녀로는 2남 1녀로 아들인 하페즈 2세와 카림, 딸 자인이 있다.

화려한 패션으로 패션잡지 보그(VOGUE)에 실리기도 했으며, 샤넬 선글라스를 쓰고 팔콘900 제트기를 타고 여행을 다닐 정도로 사치스럽다고 한다.

보도된 바에 따르면 수천달러짜리 디자이너 브랜드 제품을 사들이며, 프랑스 파리에서 테이블과 샹들리에, 아마존닷컴을 통해 퐁뒤 세트를 주문하는데 10,000파운드(약 18,000,000원)를 썼다는 내용이 공개되기도 했다. 한편 부인이 쇼핑을 즐기는 동안 바샤르 알 아사드는 iPad로 인터넷에 접속하고 iTunes에서 음악을 내려 받으며 여가를 즐기고 있었다고 영국더 가디언지에서 보도했다. 기사

아사드가 가장 밀리던 시기[14]조차도 정신 못차리고 사치에 열중했다고 한다. 오죽 사치가 심하면, 시리아 국민들 사이에서 아사드 부인이 전사자들 시체의 장기들을 밀매해서 해외에서 명품 가방들과 옷들을 산다는 카더라까지 돌아다닐 정도다. 물론 장기는 죽는 순간부터 신선도가 하락해 품질이 떨어지므로 밀매는 불가능하다.[15]

최근 2018년 시리아 대통령실 발 소식으로 근황이 알려졌는데 유방암에 걸려 입원치료를 받고 있다고 한다.

2021년 3월 8일에 아사드 대통령과 함께 코로나19 확진 판정을 받았다.#

영국 경찰이 아스마 알아사드가 테러를 조장했다는 혐의에 대해 예비 수사에 착수했다.#

시리아 내전에서 남편이 패전 후 남편, 자녀들과 함께 러시아로 도망친 듯 하며 급하게 도망친 나머지 신분증을 놓고갔고 해당 신분증은 대통령궁을 함락한 시리아 국민들에게 발견됐다.

8. 기타

8.1. 사치

8.2. 아사드는 ISIL 준동의 원흉인가?

결론부터 말하면 아사드는 IS 준동의 원흉은 아니다. IS 조직 특성상 IS는 거하게 준동했을 조직이었기에, 아사드가 IS 준동의 원인이라고는 할수 없다. IS는 그 전신이 되는 유일신과 성전1999년에 이미 조직되었고, 이라크에서 미군과 교전하며 이슬람 국가 성립을 그 이전부터 계속해서 시도했기 때문이다. 다만 혼란스러운 이라크 시리아 내전의 영향상 지하조직이던 IS가 대규모 테러리스트로 커진 건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다.

결론적으로 IS의 발흥은 단순히 바샤르 알 아사드가 권좌를 지키느냐 아니냐의 문제가 아닌, 시리아의 배경에 의해 발생하는 문제이다.

8.3. 알아사드가 건재했던 이유?

이 문단을 보기 전에 말해두자면, 2024년 시리아 반군 공세 이전에 쓰여진 내용인데다가, 2010년대, 시리아 반군 공세 전까지는 한국에 시리아 내전에 대한 관심이 거의 없어 그나마 관심을 가지는 사람들도 러시아와 반서방 언론의 선전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여 굉장히 편향적인 관점으로 시리아 내전을 보고 있었다. 그런데다가 세드나야 교도소 등 아사드 정권의 만행이 본격적으로 드러나지 않은 시점에 쓰여져서 아사드 정권에 굉장히 옹호적인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 점을 감안하고 이런 의견도 있다는 측면에서 보기를 추천한다.

알아사드는 시민을 살해하고 아동을 학살하며 국민들에게 독가스를 살포하는 사악한 독재자로 알려져 있었고 실제로도 그러했으나 그 이면에는 복잡한 사정이 있었다.

첫째로 민주화 운동 초반만 해도 아사드의 종파인 알라위파에서조차 반 아사드 기치를 내거는 사람들이 있었으며 자유 시리아군이 결성되었다. 물론 여기에는 '아사드가 아내를 따라 수니파로 개종하고 알라위를 배신했다'라는 헛소문도 한 몫 했으나, 장기집권과 경제위기에 대한 염증이 가장 큰 역할을 했다. 하지만 자유민주주의 군대로 알려졌던 자유 시리아군 내부에 조직폭력배, 수니파 극단주의 정치세력인 알 누스라, 하라캇 아흐라르 알 샴 알 이슬라미야를 비롯 무슬림 형제단 계열의 군대가 상당량 포진하고 있었고, 이들이 라타키아 침공작전에서 200명의 알라위파를 학살하면서 종파적 차별주의를 전면에 드러내기 시작하면서 알라위파들은 아사드 지지로 회귀했다. 이 문제는 아사드 정권과 깊은 관계를 맺은 기득권층 뿐만 아니라 세속주의, 서구화와 자유로운 생활을 추구하는 도시 지역 수니파와 기독교도들에게도 똑같이 다가왔다. 실제로 현재 아사드 지지자들 가운데는 과거 반정부 운동을 했던 사람들도 존재하며, 일부 자유시리아군은 반군끼리의 내분이나 이슬람 원리주의의 확산 탓에 정부군으로 전향한 경우도 있다. 쿠르드족 민병대의 경우 반군 사이에서 원리주의가 확산되자 정부군과 사실상의 동맹을 체결하고 정부군과 함께 싸우고 있다.

둘째로 시리아 사태가 내전으로 발전한 것은 미국, 터키, 카타르, 사우디, 프랑스, 요르단 등이 협력하여 추진한 아사드 하야 프로그램이 주 원인이었다는 사실이 인지되면서부터이다. 기존에는 독재자 아사드가 국민을 학살하자 분노한 국민들과 병사들이 무기를 들고 정부군에 맞서 싸웠다는 것이 원인으로 알려져 있었다. 하지만 터키나 카타르, 사우디가 아랍연맹 명의로 다양한 압박과 회유를 가한 사실이 드러나고 조사단을 파견했다가 평온하다는 결과가 나오자 철수시키고 연맹에서 퇴출시키고, 터키는 자유시리아군 창설을 리야드 알아사드 대령을 통해 주도하고[23] 훈련 캠프와 무기를 제공했다. 제일 큰 문제는 카타르는 무슬림형제단 계통을, 사우디는 살라프파 계열의 자이쉬 알 이슬람을 집중 지원하여 시리아 반군이 원리주의자 일색이 되는 원인을 제공했다. 이에 따라 아사드는 권좌를 위해 국민을 죽인 학살자라는 기존의 인식에서, 해외 세력의 내정 간섭에 맞서 시리아를 지켜낸 수호자라는 이미지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또 반군을 미국이 지원하기 시작하면서 반미정서가 극도로 강한 시리아 국민들 사이에서는 역시 미국이 이 사태를 일으킨 배후라는 인식이 퍼져나간 것도 아사드 지지가 늘어난 원인이다.

셋째로 러시아나 이란이 영향력을 잃지 않기 위해 무자비한 독재자를 생각 없이 지원한다는 설이 있으나 이란과 러시아는 2013년까지 사태를 관망하며 지켜보고 있었다. 심지어 2013년 8월 도우마시 사린가스 살포사건 때에는 러시아가 아사드 대통령에게 "나에게 거짓말을 한다면 관계를 끊을 것"이라고 엄포를 놓기까지 했다. 그러나 2013년 들어 사우디와 카타르, 그리고 미국의 개입이 전면 부상하며 국제 대리전이 확실시되자 이란은 아프간/파키스탄 난민으로 이뤄진 의용병 부대(리와 파테미욘/자이바니욘)과 혁명수비대 고문관을 파견하고, 러시아도 무기를 지원하기 시작했던 것. 러시아는 2015년 참전 이전까지는 심드렁한 입장이었고 참전 후 전세를 반전시키고 휴전협정을 성사시킨 후 철수하려고 했으나 반군의 실체를 직접 경험하고 국제 지하디즘 세력이 강해진 것을 파악하고는 참전을 연장하여 2017년의 상황에 이르렀다.

넷째로는 결국 어쨌든간에 아사드를 대체할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다양한 이권을 가지고 지역 경제권에 개입하여 반 군벌화된 정부군 부대들이나 친정부 민병대들을 통제할 수 있는 것은 구심점인 바샤르 알아사드의 존재가 있기 때문이며 아사드가 사망하면 다른 관료나 당 고위간부로는 그들을 통제할 카리스마가 없고 마헤르 알아사드는 성격이 난폭하여 과격 진압을 남발할 우려가 있다. 심지어 정부군은 반군이 항복하면 무기를 가지고 반군 지역인 이들리브나 알레포주로 버스를 태워 보내주거나, 무기를 반납하고 사면을 받아 시리아 정부군 병력으로 편입시키거나 시민으로 돌아가게 해주는 온건책을 쓰고 있기에 반군이 2016년부터 항복하는 사례가 늘어났는데 마헤르 같은 과격분자가 권력을 잡으면 이런 온건책은 폐기되고 반군도 죽기살기로 싸울 가능성이 높다. 바샤르 알아사드가 사라지면 시리아는 수백개의 개별 군벌로 쪼개져버릴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이런 문제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아사드를 탐탁지 않게 여기더라도 그에 대한 대안이 없다거나, 그가 피해자라는 시각을 가지고 아사드를 지지하기 때문에 아사드는 현재까지도 건재한 것이다. 그가 직접 승용차를 몰고 시찰을 다니는 것도 이런 자신감에서 나오는 것이다.

한편 철저하게 서구 정서에 맞춘 모습으로 자신을 드러낸다. 항상 인터뷰에서는 영국식 영어로 대화, 양복을 갖춰입고 신사적이고 부드러운 말투를 고수하며, 서구 언론과 자주 인터뷰를 하고 심지어 이들을 자주 논파해버리기도 한다.논파 모음영상1 영상2 이로 인해 아사드가 오히려 이슬람 극단주의를 저지하고 서구적 가치, 기독교 수호를 한다는 점이 대안 우파에게 좋게 받아들여져 그들의 상징인 페페 더 프로그로 어레인지된 그림도 돌아다닌다. 또한 대안 우파에겐 아사드를 지지함으로써 그들 공통의 적인 버락 오바마, 힐러리 클린턴을 비난할 수 있다. 정치적 올바름을 외치면서 국제적으로는 이슬람 극단주의를 발흥하게 만들었다는 모순을 지적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내전이 장기화되고 아사드 이외의 대안을 찾지 못하면서 서방 국가들은 아사드의 즉각 퇴진을 요구하는 입장에서 물러설 조짐을 보이고 있다. 미국도널드 트럼프 행정부가 자유 시리아군 지원 프로그램을 중단했으며, 프랑스는 주시리아 대사관 재개관을 추진했다는 보도도 있다. 사실 유럽 국가들은 유럽 난민 사태와 끊이지 않는 ISIL 테러 공격으로 ISIL 격퇴와 내전 종결, 평화 정착이라는 급한 불부터 꺼야 할 상황이다. 또한 지리멸렬하고 민주주의보다는 이슬람 극단주의 국가 건설을 선호하는 시리아내 반 아사드 반군 세력들의 현 실정에 그나마 제대로 된 정부의 틀이라도 갖춘 아사드 정권이 그나마 낫다고 주장하는 여론까지 생겨나면서 시리아 정세는 점점 아사드에게 유리해졌다. 그리고 2018년에 들어서서 반군 대부분이 이슬람 극단주의화되고 시리아 정부가 반군 세력을 연이어 패배시키고 내전 완전 승리를 눈앞에 두면서 아사드는 안정적으로 정권을 연장하였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여 서방과 러시아의 관계가 완전히 파탄난 이후에도, 시리아에서 아사드가 계속 집권하는 것은 양측 모두 이해가 일치할 지경이었다.

2023년 5월 바샤르 알아사드 대통령은 아랍연맹 복귀로 국제무대에 복귀했다. 이 덕에 시리아 내전 역시 아사드 대통령과 정부군의 유리함이 굳건해지고 있다고 생각했으나#, 하지만, 러시아군이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인해 지원을 줄인데다가, 이란도 이스라엘과의 전쟁으로 인해 아사드 정부를 지원해줄 처지가 되지 않은데다가, 관계가 급속히 약화되었고, 그 결과, 모든 지원을 잃다시피 한 아사드는 2024년 12월에 반군에게 속수무책으로 밀리게 되자, 권좌를 포기하고 망명을 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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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000년에 국립국어원이 심의한 표기로, 관사 ال(al)은 뒷 말과 붙여 쓰는 것으로 심의되었다. 유럽 고유명사 표기에 있어서 일반적으로 관사나 전치사 등은 뒷 말과 붙여 쓰도록 규정하고 있는데, 이 규정을 아랍어에도 준용한 것으로 추정된다.[A] 미국과 서방의 제재 탓인지 현재 계정이 폐쇄되었다.[3] al-Hurriya School.[4] 냉전 이후 독재자 중에서도 확실히 바샤르를 능가하는 악질은 김정일&김정은 부자, 사담 후세인, 오마르 알 바시르가 전부다. 로버트 무가베는 그나마 짐바브웨를 백인들로부터 독립시킨 건국자라는 공이라도 있지만 세습 독재자인 알아사드는 그런 것도 없다.[5] 다만 아버지가 말년에 건강이 급속도로 악화되었을 때에는 사실상 아버지를 대신해 대통령 역할을 수행했다고 한다.[6] 마헤르는 자기 매형 아세프 샤우카트와 말다툼을 하다 격분한 나머지 매형에게 권총 총탄을 쏘아 총상을 입히는 등 정신적으로 문제가 굉장히 많았다.[7] 아이티의 세습 독재자장클로드 뒤발리에처럼 말년에 귀국할 가능성도 있다. 뒤발리에는 공식 사면 없이 아이티에 멋대로 귀국하여 재판을 받다가 숨졌다. 물론 하페즈의 시신이 반군에 의해 관째로 불태워졌다는 것을 감안하면 바샤르가 시리아로 귀국했다간 니콜라에 차우셰스쿠, 무아마르 카다피처럼 참혹한 최후를 맞이할 가능성이 크다.[8] 거기다 이란이 아사드 정권에 거의 500억 달러(한화 약 70조)에 달하는 차관을 제공한 것이 밝혀져, 사실상 바샤르가 이란의 돈을 먹고 튄 것이나 다름없는 상황이 되었다.[9] 유사 사례로 나치 독일의 패색이 짙어지자 네로 명령을 내려 독일의 모든 인프라를 파괴하도록 지시한 아돌프 히틀러와 "나의 리비아에 반란을 일으킨 자들을 후회하게 만들기 위해 리비아를 소말리아처럼 만들어버려야 한다"고 측근들에게 주장했다는(#) 무아마르 카다피가 있다.[10] 아사드가 그 당시 다마스쿠스에 있었다면 시내에 있던 구 정부군이나 최소한 친위대 세력만은 결사항전을 했을 것이나 실제로 다마스쿠스는 제대로 된 전투 없이 점령당했기에 아사드의 주장은 거짓일 가능성이 크다.[11] 비슷한 이유로 싱가포르,베트남,홍콩,마카오,브루나이도 안전하다. 정치적으로 문제 될 발언만 안하면 된다.[12]하마 지역에 있다는 소문도 도는 등 확실하진 않다.[13] 한국, 중국, 일본에서는 화장이 보편적인 장례 방법이지만 시리아를 비롯한 아랍권에서는 '육신을 불사를 수 있는 것은 알라만이 가능하다'고 믿기에 화장이 크나큰 죄이기 때문.(무아트 알 카사스베 화형 당시 아랍권의 반응만 봐도 확인 가능하다) 그리고 신발투척 문서에 나오듯 이슬람권에서 발은 크나큰 터부다. 즉, 이들의 시신은 고대 중국궁형과 비슷한 포지션이라 봐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시리아 주민들이 할 수 있는 최악의 모독을 당한 셈이다.[14] 이 시기에는 블라디미르 푸틴 정권이 서방에게 아사드 축출을 직접 제안했을 정도였고, 곧 있으면 아사드가 러시아 해군 군함으로 도피해서 러시아 군함에 망명 정부를 세운다는 전망까지 있었던 시기였다.[15] 애초에 장기기증을 할때 식물인간이나 코마에 빠져 가망이 없는 이들을 우선 하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사망해도 별로 안 지난 시각에서 바로 꺼내는 경우가 많다.[16] Baba ghanoush, 구운 가지를 으깨어 올리브 오일 및 향신료와 섞어 만든 중동 요리.[17] 아버지 하페즈 알아사드 역시 175cm으로 당시 시대를 고려한다면 상당한 장신이였고, 하페즈의 아들중 바샤르가 유독 키가 큰 편에 속했다.[18] 기원전 1세기부터 기원후 7세기 초까지 무려 700년 가까이 로마의 지배 하에 있었고 그 전에도 300년간 그리스의 지배를 받았다. 1,000년간 남유럽 세력 하에 있었던 것이다.[19] 김정은의 비자금이 5조 원으로 추산된다는 것을 감안하면 알아사드가 얼마나 부패한 독재자였는지 알 수 있다.[20] 중동의 베스트셀러 랜드 크루저는 기본이오 벤틀리, 롤스로이스페라리 등 초호화 차량이 40대나 됐다고 한다. 특히 페라리 중 한대는 페라리의 50주년 기념 349대 한정판인 페라리 F50이다.[21] 4.19 혁명 당시 (최빈국이었던) 한국에서 민중들이 이기붕 부통령의 집의 냉장고에 있는 수박을 보고 분노했다는 에피소드와 비슷하다.[22] 1990년 시리아 GDP는 123억 달러였다. GDP의 8%를 건물 건설에 쓴 셈. 참고로 인민궁전 건설비가 17억 5천만 달러로 당시 루마니아 GDP의 4.1%였다.[23] 정작 그는 자유시리아군 사령관 자리를 고사하고 지휘권을 내버리고 도망다니고 있다. 자유 시리아군 항목 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