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learfix]
1. 개요
아랍어: سجن صيدنايا영어: Sednaya Prison
영어 위키백과 항목
시리아 아랍 공화국의 정치범수용소.
영미권과 튀르키예, 카타르 언론들에 의해 "인간 도살장(المسلخ البشري)"이라는 별칭으로 불려온 악명높은 교도소이기도 하다.
2. 상세
1981년 건설이 시작된 후 1986년에 완공되었으며[1] 다마스쿠스에서 북쪽으로 19km 떨어진 리프디마슈크에 위치하고 있는데 두 개의 건물이 붙은 'ㄱ'자 모양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국방부 장관의 관할 하에 있고 시리아 아랍군 헌병대가 운영하고 있었다.3. 실상
이곳을 거쳐가거나 수감되어 있던 정치범 중에는 알누스라 전선이나 무슬림 형제단 간부, 심지어 이라크 레반트 이슬람 국가 창립 멤버 아부 무함마드 알 아드나니와 같은 세속주의 정권 입장에서 제거해야 할 이슬람 원리주의 무장세력 핵심인물들도 포함되어 있었지만 근본적으로는 후술하는 것과 같이 양심수와 정권의 눈에 난 사람들, 외국인과 유학생들까지 간첩 혐의로 수감한 인권침해의 온상이었고 시리아 내전 이후로는 탄압이 극심해지면서 정치적 위험인물뿐 아니라 단순히 바트당, 아사드 일가를 욕했다던가 블로그에 정부를 비난하는 글을 올렸다는 이유로 15년 동안 수감된 인물(#) 등 일반 시민들은 물론 아사드 정권이 심심하면 내정간섭을 일삼았던 레바논의 반시리아 인사들, 튀르키예, 요르단, 미국 시민 등 외국인까지 닥치는 대로 수감해 내전 전이던 2008년에는 1500~2000명 규모였던 수감자 수가 국제앰네스티에 따르면 최대 2만 명까지 폭발적으로 증가하였다.이들은 대부분 몇 분밖에 걸리지 않는 형식적인 비밀 재판 이후 투옥되어 열악한 환경[2]과 고문[열람주의], 처형[4] 속에서 2011년부터 2018년까지 3만 명[5]이 이 감옥에서 목숨을 잃었다고 한다.
시리아 인권 네트워크에 따르면 2011년 3월부터 2024년 12월까지 시리아 내전 동안 3,698명의 어린이와 8,504명의 여성을 포함한 136,614명 이상이 시리아 감옥에 구금되었다고 한다. #
하마의 수감자들과 함께 일하는 시리아 변호사는 이 감옥에 들어가는 사람의 75%는 살아서 나오지 못한다고 증언했다. #
2020년에 세드나야 교도소 수감자 및 실종자 협회(ADMSP)가 교도소 수감자와 그 가족을 지원하기 위해 설립되었다.
2023년 기준으로 시리아 인구(2323만 명) 1.3%에 달하는 30만 명 이상이 시리아에서 수감 중이었다는 증언이 나왔다.[6] 어느 정도로 심각한 거냐면 북한 정치범수용소 수감자 수도 20만 명 안팎으로 북한 인구(약 2500만 명)의 0.8% 안팎 수준이다. #[7]
3.1. 시설 공개
2024년 12월 8일, 바샤르 알아사드 정권의 패망으로 시리아 내전에서 승리한 시리아 반군들에 의해 12월 9일 개방됨과 동시에 실상이 공개되었다.알아사드 가문이 몰락하자마자 이곳에 수감되었던 죄수들은 모두 석방되었는데 처형을 하루 남기고 겨우 풀려 나온 사형수#, 10여년 이상 수감당해 감옥에서 뛰쳐나오면서도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인지 알지 못하는 수감자는 기본에#[8] 10살도 되지 않은 어린이가 감옥에서 발견되는가 하면#[9] 수감으로부터 무려 42년 만에야 세상의 빛을 본 사람도 있었으며[10] 시리아인이 아닌 요르단 국적임에도 끌려가 38년 동안 수감되어 본국에선 실종자로 간주된 사람이 풀려나는 등# 별의별 장기수들이 발견되고 있다. 이 때문에 수감자 중에는 자기를 잡아 가둔 하페즈 알아사드가 아직 살아 있다고 여기거나[11]# 자신을 풀어준 군대가 (2003년 실각된) 사담 후세인의 이라크군이라고 믿었을 정도로[12][13] 외부와 완전히 단절된 사람들도 있었다.
끔찍하게도 전술한 인권탄압 사례들은 그나마 상황이 나은 지상구역의 이야기다. 이곳에는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지하 3층 규모의 감옥 시설이 더 있었다.# 지하감옥에 수감된 이들은 한 번도 햇빛을 본 적이 없다거나 산소가 부족한 환경에 장기간 감금되어 있었다는 증언이 나오고 있으며 처형장에서 교수형 집행용 매듭 더미나 수용자들의 옷, 신발 무더기가 쌓인 방은 물론# 용도불명의 유압프레스기가 발견되었고[14]# 처형한 수감자 시신을 산성용액으로 처리한 흔적과 시간이 다급하여 미처 다 처리하지 못한 시신 더미가 쌓여 있는 영안실이 발견되기도 했다.[열람주의2] 마젠 알하마다[16]를 비롯한 실종 상태였던 시리아 내 활동가들의 시신이 발견되었고, 고문으로 인해 자기 자신의 이름조차 기억하지 못하거나 백치 상태로 방치되어 있는 재소자들이 발견되었다.
심지어 반군이 처음 이 지하 시설을 발견했을 때 구 시리아 아랍군 인원이 아닌 이상 시설 문을 해제조차 할 수 없는 기술이 적용되어[17] 현장 인원들이 도움을 요청하기도 했다.
12월 9일부터 구호단체 화이트 헬멧이 투입되어 이곳의 실태를 조사하였다.# 화이트 헬멧은 현재 발견된 영역 외에도 그 안에 숨겨진 블랙 사이트가 더 있을 것이라고 보고 이를 제보하는 공익제보를 받고 수색했으나, 10일경 발견된 시설 외의 블랙 사이트는 더 이상 없다고 결론내렸다.#
더 끔찍한 것은 이곳은 수도에 가까워 가장 규모가 거대했고 10일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급박하게 아사드 정권이 무너지는 바람에 진상 은폐에 실패하고 실상이 공개된 것이지, 시리아 전역에 이런 식의 감옥이 더 존재했을 것이며 이들은 성공적으로 은폐되었을 가능성이 더 크다는 것이다. 실제로 아사드 시기 시리아에는 정치범수용소가 27개나 존재했다고 하며 다른 수용소들은 이곳보다 한술 더 떠서 이디 아민 시기 우간다의 강제수용소, 야세노바츠 강제수용소랑 비교해야 하는 인세의 지옥 수준이었다는 증언도 많다.[18][열람주의3] 이곳이 공개되면서 북한의 정치범수용소의 완전통제구역[20] 역시 이런 식이거나 그 이상의 인권유린이 벌어지고 있을 것이라는 추측이 더욱 힘을 얻게 되었다.[21]더 가디언 BBC CNN 한겨레 해당 기사에서 이곳의 참혹한 실상을 엿볼 수 있다.
4. 폐쇄 이후
- 12월 10일 시리아 민방위대 화이트 헬멧은 감옥 내의 모든 생존 재소자가 감옥을 떠나 귀가했다고 밝혔다.
- 당연하게도 이 곳의 전현직 근무자들은 시리아 신정부와 시민들의 추적을 받고 있다. 시리아 신정부는 다마스쿠스를 함락하자마자 구 시리아 아랍군이나 공무원 대다수에 대해 사면령을 내렸고 실제로 투항한 시리아 아랍군에게 무장해제만 시킨후 사복을 입혀 귀가[22]시키거나 공무원들에게 현직에 복귀할것을 요청하면서, 실제로 교통경찰관 등 복귀한 인원들은 일선에 배치하기도 했지만 이곳 관련 인원들만큼은 폭행까지 불사해가며 강제로 연행해 끌고 가는 모습이 포착되었다.(#) 시민들 역시 이들을 발견하면 신발로 때리거나 발로 걷어차는 등 집단 구타에 동참하고 있는데 발을 터부시하는 이슬람권에서 신발은 사람의 가장 밑바닥에 비유하기 때문에 사람을 발로 차거나 신발로 때리는 짓은 사람 밑바닥만도 못한 자로 취급하는 심각한 모욕 및 명예훼손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이들을 제지해야 하는 HTS 조직원들도 별다른 제지를 하지 않거나 실실 웃는등 동조하고 있어 평소 시민들에게 이 감옥이 가진 이미지가 어땠는지 짐작할 수 있다.(#)
[1] 첫 수감자는 1987년에 수감되었다.[2] 3m x 3m 크기의 3평도 안 되는 작은 방에 50명 이상이 감금된 경우도 있다. 장기간 음식은커녕 물도 주지 않고 의료 환경도 좋을 리가 없었다.[열람주의] 대표적으로 끊임없는 구타는 기본에 물 속에 서 있게 하는 등의 물고문, '날아다니는 카펫'(피해자를 평평한 판자에 묶은 후 판자를 반으로 접어 피해자의 얼굴이 다리에 닿게 했다)과 '타이어 방법'(피해자의 허리를 구부리고 머리, 목, 다리, 때로는 팔을 자동차 타이어 안쪽에 집어넣었다) 등 복잡한 자세 강요, 수감자의 손목을 묶은 후 수감자가 바닥에 닿을락말락 천장에 매달기, 거꾸로 매달기, 갈증에 시달리는 수감자에게 소금 먹이기, 성기 등에 전기고문하기, 신체를 뜨거운 물과 담뱃불로 지지기, 손톱 뽑기, 손을 등 뒤로 묶은 후 미리 박혀 있는 금속 막대가 등 부위만 건드리는 벽에 새우기, 성기 묶기, 모의 처형, 추위와 더위에 노출시키기, 남녀노소 상관없는 강간(수감자들끼리 서로를 강간하도록 강요하기도 했다), 장기적출 등이 자행되었다. 2012년 휴먼라이츠워치가 작성한 시리아 고문 보고서[4] 2017년 2월 국제앰네스티는 2011년 9월부터 2015년 12월 사이에 세드나야에서 5,000명에서 13,000명 사이가 사법 절차 없이 처형된 것으로 추산했다. # 처형 방식은 참수, 화형 등이 있었으며 시체들을 처리하기 위해 화장터도 건설되었다.[5] 어림잡아 매일매일 빠짐없이 10명 이상이 죽어나갔다는 말이다![6] 참고로 독재자들이 정치범수용소를 운영하는 타국에서는 이사이아스 아페웨르키가 집권 중인 에리트레아애서는 인구의 0.3~0.6%, 사파르무라트 니야조프 시기 투르크메니스탄에서는 인구의 0.4%, 엔베르 호자 시기 알바니아에서는 인구의 1.1%가 정치범수용소에 수감되었다.[7] 사실 30만 명 수감설은 2014년에도 나온 주장이긴 하다. #[8] 자세히 보면 고문 후유증으로 다리를 절고 있다.[9] 보통 감옥에 어린이가 있는 경우는 수감자가 아이를 직접 양육할 필요가 인정되어 아이가 여성 수감자 엄마와 일시적으로 함께 살다가 어느 정도 크면 정신건강을 위해 외가나 친척 등 연고자에게 가는 것이 정상이지만 국제앰네스티에서 언급하기를 이 감옥에서 볼 수 있는 어린이들은 간수가 수감자를 강간해 원하지 않는 임신으로 정치범수용소에서 태어난 아이들이라고 한다. 쉽게 말해 세드나야 교도소에서 태어나 평생동안 쇠창살 속의 좁은 세상에서 살아야 했으며 바깥 세상이 존재한다는 것은 전혀 모른 채로 자랐다는 뜻이다. 이는 집단농장 구조인 북한 정치범수용소에서 태어나거나 아주 어린 나이에 수감되어 죽을 때까지 그 수용소에서 살아가는 경우가 이론상으로 가능하다는 것과 너무나 유사하다.[10] 그 주인공은 하마 학살 당시 하마 시를 폭격하라는 명령을 거부했다가 파면 후 투옥된 전 시리아 공군 파일럿 라기드 알타타리(رغيد الططري)다. 완공 시기에서 알수 있듯 군영창, 2015년 IS에게 파괴된것으로 알려진 타드모르 형무소를 거쳐 세드나야 교도소로 이감되었다.[11] 이에 대해 한국 네티즌들 사이에서는 "한국으로 치면 남북통일로 북한 정치범수용소에서 풀려난 납북 일본인이 한국 군인에게 '올해가 쇼와 몇년이냐'고 묻는 것이 아니냐"고 경악하거나 하페즈가 2000년에 사망했다는 것을 들며 "아마 이들 수감자들은 21세기가 왔다는 것도 모르는 게 아닐까" 하고 지적하는 안타까운 의견도 나왔다. #[12] 왜 하필 사담 후세인이냐면 이라크의 바트당과 시리아의 바트당은 이름만 같은 바트당이었지 노선 차이, 정통성 다툼 등 여러 이유로 서로 사이가 무지하게 나빴기 때문이다. 하페즈 알아사드는 후세인의 이라크와 친하게 지내느니 차라리 미국, 유럽, 이집트 등과의 친교를 위해 걸프 전쟁에 후세인에 맞서 참전하기도 했을 정도이다. 사담 후세인은 이 수감자가 풀려나기 18년 전인 2006년 12월 사형당했으니 얼마나 지독하게 외부와 격리되어 있었는지를 시사한다.[13] 자유 시리아군의 국기와 바트주의 이라크의 국기 모양이 삼색기에 별 3개로 비슷한 것도 이들이 반군을 후세인 정권 이라크군으로 착각한 원인 중 하나로 추정된다.[14] 처음에는 처형한 수감자들을 압착하여 처리하는 장치라는 루머가 돌았으나 거미줄이 쳐져있는 점에서 실제로 사용되진 않은 것으로 보이며 현 시점에서 실제 용도는 불명이다. 평범하게 생각한다면 쓰레기 압착처리용이겠지만 그게 사형집행장에 있는 시점에서 시신처리용 혹은 고문용으로 들여왔다가 문제가 생겨 방치한 것으로 추정된다.[열람주의2] 산성용액으로 처리된 시신무덤, 발견된 영안실. 실제로는 말이 영안실이지 냉동창고에 시체포대를 던져놓은 수준이다.[16] 1977~? 본래 공과대학을 나와 슐럼버거에서 관리책임자로 근무했으나 시리아 민주화 운동 당시 시위를 구경했다는 이유로 경찰에 체포되어 극심한 고초를 겪었고 망명 후 이 사실을 네덜란드 언론에 증언하면서 활동가로 명성을 얻게 되었다. 그러나 시리아 내전이 극심해진 데다 IS까지 등장하면서 세계의 관심이 식은데다가 '세속적 독재자'로서 바샤르 알아사드가 재조명되는(당장 나무위키에도 아사드 재평가론까지 서술되었을 정도였다) 이런 현실에 고통 받던 중 자신과 수감자들을 사면하겠다는 회유에 넘어가 2020년 귀국했는데, 귀국 당일 공항 입국장에서 정보부에 붙들려 실종되었다. 시신의 상태로 보아 줄곧 수감생활을 하다가 정권 붕괴 직전에 집단으로 처형된 것으로 보인다.[17] 애초에 수감자들과 전문가들조차 그 존재를 전혀 몰랐던 극비 구역이었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18] 이는 민주 캄푸치아의 뚜올쓸라엥과도 유사하다. 뚜올쓸라엥이 유명해진 것도 12명이나마 살아남아 참상을 외부에 전할 수 있었기 때문이며 생존자도 전무하고 증언도 거의 남아 있지 않은 지방 강제수용소들은 그 뚜올쓸라엥이 양호해 보일 수준이었다고 전해진다.[열람주의3] 피와 곰팡이로 오염된 감자와 계란을 제공받은 경우는 애교에(#) 수감자에게 친인척이나 친구를 죽이게 하거나 다른 수감자의 인육을 먹을 것을 강요한 사례(#)도 보고되었다. 후자는 이디 아민이나 하던 짓인데 그걸 21세기에도 했다는 말이다.[20] 그나마 세드나야 수감자들은 4명 중 1명이라도 살아남을 수 있었지, 완전통제구역 수감자들은 하늘이 도운 경우를 제외하면 석방&생존 가능성이 0%다. 완전통제구역의 실상을 전한 안명철은 수용소 경비병이었지 수감자가 아니었다.[21] 특히 세드나야 교도소의 지상 감방보다도 훨씬 악랄했던 지하 감방은 아사드의 몰락 직전까지는 외부에 지상 감옥의 참상을 전한 생존자들과 시리아 내전 연구자들조차 아무도 그 존재를 몰랐을 정도로 극비 중의 극비 사항이었는데, 외부에 드러난 실상만으로도 세드나야보다 더 악랄한 모습을 보여줬던 북한 정치범수용소의 경우 외부에 존재조차 드러나지 않은 극비 구역과 참혹한 모습이 존재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22] 반군이 시리아 구정부군에게 "당신은 우리 형제들을 고문하고, 죽였고, 외세까지 끌어들여 죽이려 했지. 하지만 우리는 당신들을 용서하겠다. 어서 들어가라."고 하는 영상이 공개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