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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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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재평가 논란3. 긍정적 평가4. 부정적 평가5. 논란이 있는 평가
5.1. 징병제
5.1.1. 긍정적 시각5.1.2. 부정적 시각
5.2. 독립운동가로서
5.2.1. 긍정적 평가
5.2.1.1. 개관5.2.1.2. 다른 독립운동가들과 벌였던 갈등?5.2.1.3. 안전한 미국에서 호의호식했다?5.2.1.4. 대한민국 임시정부 승인 노력
5.2.2. 부정적 평가
5.2.2.1. 다른 독립운동가들과 빚은 갈등5.2.2.2. 독립운동 자금 횡령
5.3. 친일파 대통령이라는 오해
5.3.1. 일관된 반일 행보5.3.2. 강경한 반일 정책과 발언들5.3.3. 친일반민족행위자 청산 방해
5.4. 미국의 앞잡이?5.5. 순수혈통주의에 기반한 국제입양5.6. 정부 수립과 건국5.7. 일본 망명 루머

1. 개요

이승만의 행적을 평가하는 문서다.

2. 재평가 논란

이승만은 독립운동가 시절부터 대한민국의 국가 형성기를 이끌었으며 6.25 전쟁이라는 국난을 겪고 4.19 혁명으로 하야하기까지 수많은 업적과 실책을 남긴 인물로, 그는 대한민국 역사의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했으며 단순하게 평가하기 어려운 인물이었다.

그러나 이승만에 대한 대중적인 평가는 그의 재임 시절부터 간단 명료하였는데, <외교에는 귀신, 정치는 등신> 이라는 문구가 대표적이다. 이는 이승만 시대부터 군부 독재 시절[단]까지 이승만에 대한 일반적인 평가였으며, 귀신같은 외교로 나라를 세우고 전쟁통의 나라를 구했으나, 등신같은 인사와 통치로 나라를 망쳤다는 뜻[2]이다. 이런 평가는 비록 이승만과 박정희의 독재 치하를 거쳤음에도 반공 이데올로기가 국민들에게 전반적으로 받아들여졌으며, 미국에 대해 국민들의 전반적인 우호 분위기가 깔려있었기 때문이다.

이승만의 평가가 뒤집어진 사건은 1979년 발행된 해방전후사의 인식이 운동권과 진보 진영에서 무비판적으로 수용되면서 발생하였는데, 베트남 전쟁, 12.12 군사반란, 5.18 민주화운동 등의 영향으로 반미사상이 전국적으로 유행하게 되면서, 이승만의 국가 건설의 공마저 완전히 부정하는 평가가 주를 이루게 된다.[3] 이들은 이승만과 미국 때문에 반민특위가 해산되며 친일파가 국내에 득세하여 국가 건설의 첫 단추마저 잘못되었다라는 인식을 공유하였으며, 이승만의 독립 활동마저 격하하였고 이승만이 종미파, 친일파였다는 주장까지 발전한다.

추후 해방 전후사의 재인식이 발간되고, 이들 저자 가운데 일부가 현재 이승만 미화에 앞장서는[4] 뉴라이트로 분열된 것은 우연의 일치가 아니며, 뉴라이트가 보수 세력 내에서 성장하게 되었다.[5] 이들 중 일부는 이승만에 대한 재평가가 아니라, 독재와 학살을 정당화, 왜곡을 통한 무리수를 남발하는 행보를 보이게 된다. 이러한 대립은 이승만에 대한 연구가 학술적인 것이 아닌, 사상 대결 및 정치 대결까지 확대되게 하였다. 덕분에 이승만에 대한 온갖 왜곡, 미화, 격하가 수없이 교차되게 되어 평가가 극과 극으로 치닫게 되었으며, 중립적으로 이승만을 평가하는 시도조차 어렵게 되었다.[6]

보수 진영의 이승만에 대한 재평가는 김영삼 문민정부 출범 이후 본격적으로 태동하였다. 군부 독재 정권이 몰락한 뒤 운동권이 주축이 된 역사 인식이 유행하며 일부 보수 언론들은 이승만 재평가 운동을 시작하게 된다. 조선일보의 방우영 회장은 <이승만과 나라 세우기> 라는 특별전을 기획하였는데 당시 김영삼[7] 대통령이 여기에 방문하면서 당시 역사학계에서 큰 논란이 일어났다. ###
● <이승만과 나라 세우기>를 김영삼 대통령이 방문한 후 청와대 관계자의 발언
* 초대 대통령이 나라를 세운 발자취를 14대 대통령으로 둘러본 것은 여러 함축적인 의미를 가진다. 요즘 우리 사회에서 현대사를 너무 부정적 측면에서 보는 시각들이 많으나, 이 박사가 나라의 독립을 위해 헌신하고 나라를 세웠으며 북한의 침략을 받고도 나라를 지키고 한미안보조약으로 오늘날 안보의 초석을 마련하는 등 큰 공적을 남겼다는 것을 김대통령(김영삼)도 인지하고 있다.
당시 관계자의 이러한 발언은, 운동권 이전의 이승만에 대한 평가[8] <외교는 귀신, 정치는 등신> 이라는 평가를 계승하는 성격으로 국가 형성의 공적은 인지한다는 의미였으나, 당시의 학자들은 이에 반발하여 이승만 되살리기 운동에 대한 토론회를 열고, 다음을 이유로써 이승만 재평가가 발생했다고 격하하였다.
● <'이승만 재평가' 에 대한 기동성 있는 응전> 발췌. 1995년 3월 한국역사연구회
분단 덕에 부와 권세를 누린 자들이 가진 능력을 총동원하여 분단 50주년의 해에 민족 배신자 이승만을 해방, 독립 투사로 둔갑시켜보겠다고 설치고 있으니 무슨 해괴망측한 일인가.[9]
토론회를 통해 드러났듯이 이승만 되살리기 운동이 시작된 이유는 다음으로 정리해 볼 수 있게 된다.
1. 남북대결을 지양하여 화해, 협력으로 나아가는 탈냉전을 거부하고 다시금 냉전구도로 나가겠다는 회귀음모를 꾸미는 세력이 있다.
2. 역대 독재자들로부터 막강한 혜택 누려온 보수 언론사들의 자기방어에 기인한다.
3. 통일 과정에서 남쪽 정권의 역사적 정통성을 주장하겠다는 표현이다.[10]
4. 현 정부 (*당시 김영삼)의 개혁노선에 반발하는 보수세력의 반동적 형태 때문이다.
5. 이승만과 인연이 있는 몇몇 언론인들과 인맥들의 부추김, 대재벌 언론들의 오만과 불손 탓이다.
이들은 이승만의 역사적 평가는 종료되었다고 선언하였으며, 이승만에 대한 재평가 움직임 자체를 보수세력의 준동과 친일적, 반민족적 행위라고 규정하였다.

마찬가지로 반대급부에 있던 이승만 되살리기 운동 또한 순수한 학문적인 접근이 아니었는데, 이들 중에는 운동권에 반발하는 보수 세력과 뉴라이트로 발전하는 세력이 있었고, 이들은 <역사의 기승전결론>을 주장했다. 이승만이 근대민족국가를 수립하여 나라를 세웠고, 박정희가 이를 계승 및 발전시켜 5, 6공을 통해 전개되다 김영삼에 이르러 문민정부로 꽃피어 완성된다는 단계발전론이 핵심 사상이다. 자세한 내용과 비판점은 뉴라이트 문서 참조.

김영삼 정부 이후에 출범된 김대중 정부는 역사 화해의 명분으로 박정희 기념관 건립에 나섰으며 1992년 12월 국회에서도 이승만 동상 건립 안건이 통과되는 등 관대한 움직임을 이어나가지만[11], 당시 이 안건에 반대한 의원 중 한 명은 노무현 대통령으로, 재임 당시 보도연맹학살사건에 관련한 국가의 사과 및 조사가 벌어지는 등 이승만 재평가 움직임은 노무현 대통령 시절 움츠러들고 이후 재개되었다. 이런 움직임은 이명박, 박근혜 정부를 이어서 현재 윤석열 정부에서 이승만 기념관 논란까지 이어지게 된다.

정치적인 움직임과 별개로 1990년대 이후 이승만에 대한 학문적인 긍정적/부정적 재평가의 움직임도 자연스레 발생하였다.[12] 대표적인 사례가 남침유도론 폐지인데, 정병준 교수는 2006년 <한국전쟁: 38선 충돌과 전쟁의 형성> 을 집필하며 북한 노획 문서, 소련 문서, 남한 문서를 참조하여 전쟁 형성 과정을 객관적으로 기술하였으며, 이는 해방정국과 이승만에 대한 여러 평가가 뒤바뀌게 된 사례 중 하나이다.
정진아- <이승만 정권의 자립경제론, 그 지향과 현실>
* "이승만 정권의 경제 정책과 정책론을 연구합니다"
"그 당시에도 경제 정책이라는 게 있었습니까?"
이승만 정권의 경제 정책을 연구한다고 하면 많은 사람들이 위와 같은 질문을 던지곤 한다. 어떤 정권이라도 집권하면 당연히 정책의 논리를 세우고 그에 바탕한 경제 정책을 수립하기 마련이다, 그런데 이 같은 당연한 전제가 이승만 정권에게는 적용되지 않는 모양이다.2008년 현재 이승만에 대한 재평가가 한창 진행 중이다. '건국의 아버지' 평가부터 '분단의 주역' 이라는 평가까지, '친미 사대주의자' 평가부터 '자주적 내셔널리스트' 라는 평가까지, 박정희와 더불어 그처럼 극과 극의 평가를 넘나드는 정치인도 드물다.
경제정책에 대한 이미지는 박정희 정권이 5.16 쿠데타의 명분중 하나로 이승만정부의 경제적무능, 무계획 등을 내세운 뒤 뉴스, 신문, 학교, 지방정부 등을 통한 대대적인 선전을통해 그러한 인식을 심었고 그 영향이 컸던것으로 보인다.
2000년대 이후에도 학계에서는 이승만 시대에 대한 연구 및 재평가[13]가 꾸준히 계속되고 있으나, 사상적 대립이 격화되고 있기에 역사학자들이 선뜻 긍정적/부정적 재평가 논란에 적극적으로 뛰어들지는 않고 있다. 이는 이승만에 대한 새로운 역사적 사실의 발견을 억누르고, 이미 발견된 사실, 사료를 왜곡/조작/미화/격하 하는 등 소모성 논쟁으로 이어지게 하였다. 따라서 이승만이라는 인물의 평가는 방대한 행적과 인물의 복잡성 탓에 신중히 접근해야 하는데도 공은 공대로, 과는 과대로 제대로 평가되기 힘든 상황이다.

3. 긍정적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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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부정적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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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논란이 있는 평가

5.1. 징병제

5.1.1. 긍정적 시각

아래 부정적 시각의 문단에서처럼 수십 년 간 한국 남성들이 이승만 때문에 징병제로 고통받았다는 주장을 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것은 대단히 논리적 비약이 심한 억지다. 징병제는 김일성이 일으킨 6.25 전쟁 때문에 생긴 것이지 이승만 때문에 생긴게 아니다. 그리고 군대가 환경이 좋고 군인 대우가 좋으면 모병제로도 충분해서 징병제가 필요없다는 주장도 1960년에 임기가 끝난 이승만과는 무관한 얘기다. 오히려 문재인 정부 이전까지 병사의 월급이 역대 가장 높았던 정부가 이승만 정부였다. 병장준장 월급의 10%를 받았으며, 이는 기본급 기준 2020년에 들어서야 다시 달성하게 된다. 정부 수립 이후 72년의 시간이 지난 뒤였다.

일본 자위대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모병제가 된다고 반드시 군에 대한 대우가 좋아지는 것은 아니다. 군인에 대한 대우와 똥군기는 징병제와는 전혀 별개의 문제이며, 단순히 모병제로 바뀐다고 군인에 대한 대우가 좋아질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대단한 오산이다.

심지어 군인에 대한 대우가 좋다고 평가받는 미군조차도 이라크 전쟁 이후로는 지원자가 없어 인원수를 충당하기 위해 갱스터, 양아치, 경계성 지능 장애까지 모병해서 병사들의 질적 저하가 문제되고 있다. 또한 미군과 한국군을 비교하기도 힘든 것이, 미국은 이미 당시에 세계 1위 경제력을 자랑하던 국가였으며, 자국 군대를 넘어 유럽과 소련에게 물자 지원을 퍼줄 정도로 경제력이 넘사벽이었기에 병사들을 충분히 먹여 살릴 자본이 넘쳤지만, 정부수립 당시의 한국은 경제 전반이 빈약했다. 모병제조차도 나름의 문제점이 있으며, 모병제가 되었다고 무조건 징병제보다 낫다고 볼 수는 없다. 군인이란 직종은 목숨을 걸어야 한다는 점에서 이미 기피 직종이 되기 때문이다.

당시 징병제는 오히려 대한민국에 긍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1945년에 식민지에서 벗어난 이후 한국은 소수의 도시민들을 제외하곤 인구의 절대 다수를 차지하던 농촌 사람들은[14] 여전히 전근대적 구습과 가치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이들은 1950년대 실시된 징병제 아래 군대에서 처음으로 근대적인 생활양식을 배우고 근대적인 기계들을 다루는 기술도 배우고 글 읽는 법도 배웠다.[15] 박정희, 전두환 군사독재에 대한 부정적 인식 때문에 지금 우리는 군대라고 하면 왠지 구습의 상징 같은 시대에 뒤떨어진 곳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지만 1950년대 기준으로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징병제를 통해 전국 방방곳곳의 수많은 농촌 출신들이 근대화되었고 군대에서 배운 기술과 조직력, 협동심, 집단생활 경험은 1960년대의 경제발전에 긍정적으로 연결되었다.[16] 이러한 긍정적인 평가가 내려지는 데는 이승만이 군인 출신이 아니기 때문인 것도 한 몫 한다. 역으로 군인 출신인 박정희 때부터 나라 수준에 비해 군대는 더욱 열악해졌다.

5.1.2. 부정적 시각

1945년 광복 직후 미군정 시기에는 국군 창설을 준비하면서 의용병제 즉 모병제를 시행하였다. 그리고 이것은 1948년 정부 수립 이후에도 그대로 이어져서, 당시는 개별 부대의 지휘관들이 주둔지 부근 지역을 돌면서 청년들에게 입대를 권유하는 식으로 모병을 하였다.[17] 그러다가 1949년 8월 6일 병역법을 공표하면서 국민개병제, 즉 징병제를 도입하였고, 행정적인 준비를 거쳐서 그 다음해인 1950년 1월 6일에는 최초로 전국적인 징병검사를 시행하였다. 그러나 당시 국가재정을 전적으로 미국의 원조에 기대고 있던 상황에서 미국이 "국군 10만명 제한", "그 이상의 원조는 어떤 경우에도 없음"이라고 못을 밖으면서 징병제는 징병검사 한번 이후 바로 유야무야돼버렸다. 결국 1950년 3월 다시 병역법을 개정해서 징병제를 폐지하고 미국의 요구대로 모병제로 전환하였다. #

이승만 정권이 미국으로부터 물자 원조를 조금이라도 더 받아내려고 징병제를 고집했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모병제를 권유하는 미국을 설득하지도 못했고 국가 안보의 초석이 되어야 할 병역 제도가 고작 8개월 동안 모병제 → 징병제 → 모병제 식으로 지그재그 하면서 혼란만 일으켰다.

이후 6.25 전쟁이 발발하면서 당장 다급해진 이승만 정부는 가두모집 등의 방법으로 청년들을 징병하기 시작했고, 그 이듬해인 1951년 5월에야 병역법을 개정하면서 공식적으로 징병제를 재도입하였다. 그리고 그 뒤로는 미국의 감군 요구에도 불구하고 60만 대군을 유지해야 한다는 명분으로 현재까지, 60년이 넘게 징병제를 고수하게 된 것이다. # [18]

5.2. 독립운동가로서

5.2.1. 긍정적 평가

5.2.1.1. 개관
이승만은 국외에서 이름이 알려진 독립운동가 중 한 사람으로서 노선으로서는 외교 독립론을 견지했다. 이승만은 한국 독립에 영향을 주는 여론을 미국 내에서 만들었고, 그가 미국 내에서 지지를 쌓아갈 때 태평양 전쟁이 시작되자 한국에 무지했던 미국 내에서 한국 독립에 대한 처리에 영향을 주는데 기여를 하였다.

외교 독립 노선이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성과가 없는 것도 아니었다. 외교 독립 노선이 성과가 없었다고 주장한다면 같은 잣대로 따졌을 때 무장 투쟁도 성과가 없었던건 어차피 마찬가지다. 무장 투쟁이 성공했다는 평가를 들으려면 무장 투쟁으로 한국이 일제에 결정적인 타격을 입히기라도 했어야 한다. 이승만이 다른 독립운동가들과 극심한 갈등을 일으켰다는 말도 궁색한 게, 이 시기 서로 안 싸운 개인/단체는 없다시피 했으며 오히려 무장투쟁 독립운동가끼리 암살과 총질까지 해대는 판국이었다.

애초에 광복은 일본 제국주의의 패망과 더불어 외교론, 무장 투쟁론, 실력 양성론 등 여러 독립운동 노선의 성과가 복합적으로 나타난 결과이다. 임시정부의 노선 역시 외교론에 무장 투쟁 노선을 결합한 형태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1941년 '일본 내막기'라는 책을 저술해 일본에 대해 순수한 시각을 갖고 있었던 미국인들에게 일본 제국주의의 위험성을 알렸다.[19]

3.1 운동이 벌어지자 이를 미국에서 대대적으로 선전한 것도 이승만이었다. 그 이전 대한제국 시절이던 1898년 4월에는 매일신문이라는 한국 최초의 민간 일간신문[20]을 양홍묵, 유영석과 함께 창간했다. 순한글 신문이었으며 민족의 대변지로 한글신문시대에 기여하였고, 외세에 저항하는 한국 신문의 전통을 확립하는데 선구적인 역할을 했으며 제국주의 열강의 이권요구와 횡포에 대해 가차없이 비판했다.# 후에 제국신문도 창간했다.

그리고 105인 사건이 벌어지자 미국 각지를 돌며 '조선에서 저렇게 일제에 의해 기독교인들에 대한 핍박이 이어지고 있는데 기독교 국가라는 미국은 왜 가만히 있느냐. 조선을 도와야한다'라며 미국내 여론 조성을 했다.

이승만은 미국의 대통령과 정부 관료들을 비롯한 고위층들과 지속적으로 접촉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승인을 받기 위해 노력했으며, 파리 강화 회의, 국제연맹 총회, 워싱턴 군축회의 등 각종 국제회의에서 국제사회의 지지를 이끌어내기 위해 한국의 실상과 독립 문제를 알렸다.

태평양 전쟁이 터지자 미국내에서 한국인들은 일본인과 같은 적성국민 취급을 받았는데 이승만이 미 법무장관 프랜시스 비들에게 미국내 한국인을 일본인과 동등하게 대우하지 말것을 요구하여 실제로 비들은 1942년 2월 9일에 "외국인등록법에 따라 등록한 한국인 가운데 자의로 일본 국적을 취득하지 않은 사람에 한해 적성국 외국인에 가해지는 규제에서 특별 면제한다"고 발표하였다. 이승만 덕분에 미국 내 한국인들이 보호를 받은 것이다.

그리고 항일단파방송 사건 등에서 드러나듯이 한국어 방송을 직접 진행하면서 태평양 전쟁에서 일제가 패망해가는 전쟁 상황을 고국의 동포들에게 전달하고 독립 운동을 독려했다. 또 미국 국무부에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승인을 요청한 것도 이승만이며, 한국인들을 연합군에 편입시켜 대일전쟁을 수행하도록 하여 독립권을 얻어내려고 했다.

이승만은 미국육군전략사무처(OSS)의 굿펠로우 부국장을 만나서 한인 특공대원들을 훈련시켜 한반도에 잠입시키는 게릴라전 계획도 추진했다.

결론적으로 이승만은 일제의 핍박을 받던 우리나라의 독립을 위해 누군가 반드시 해주어야 할 외교 활동을, 자신에게 주어진 상황에서 흔들리지 않고 실천했다. 총칼을 드는 것 역시 독립운동이지만, 교육이나 언론 등의 수단으로, 혹은 외교적 방법으로 외국에서 일제의 침략을 알리고 주권 회복을 위해 일하는 것도 독립운동이다. 이승만은 두 번째와 세 번째 케이스로, 기회주의적인 모습을 보였던 일부 인물들과 달리 끝까지 변절하지 않고 독립운동을 수행했다. 괜히 김구와 함께 해방직후 독립운동의 거두로 대표되는 것이 아니었다.
5.2.1.2. 다른 독립운동가들과 벌였던 갈등?
이와 관련하여 특히 스티븐스 저격사건이 자주 지적 당하는데, 당시 이승만이 이에 대한 통역을 거절했던 것은 미국의 여론이 매우 안 좋았고 외교독립론자였던 그는 이 사건자체를 독립에 있어서 부정적으로 봤기 때문이었다. 그 당시 약소국이며 어디에 있는 나라인지도 모를 대한제국이라는 나라 사람들이 자국(미국)의 현직 외교관을 살해한 것이니 현지의 여론이 좋을 리가 없다. 이승만은 스티븐스 저격사건을 지극히 현실주의적인 입장에서 바라본 것이다.

본래 현대 외교관은 군주, 곧 국가의 "주권"의 대리자 개념으로 시작한 근대 외교관에 기반하고 있으며 이는 지금도 유효하다.[21] 따라서 외교관을 살해하는 것은 해당 국가의 주권을 짓밟는 모욕 행위에 해당된다. 현대에 비해 외교관이 가지는 대중적 위신이 엄청났던 당시엔 더욱 그러하였고, 게다가 지금보다 인종차별도 비할 바 없이 극심했던 때였으니, 당시 미국인들의 눈에 스티븐스 저격 사건이 어떻게 보였을지는 더 말할 필요조차 없을 것이다.
내가 하버드 대학에 재학하고 있을 때 일본이 한국을 말살하기 위해 한국정부의 고문으로 앉혀놓은 스티븐스가 두 한국 사람에 의해 샌프란시스코에서 암살되었다. (중략) 그리고 안중근 열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하얼빈에서 살해했다. 신문에는 한국 사람들은 잔인한 살인광들이며 무지몽매해서 그들의 가장 좋은 친우인 이토 히로부미와 스티븐스를 살해했다는 기사들이 가득 실리곤 하였다. 어떤 학생들은 나와 이야기하는 것을 두려워 했고 나의 교수는 나를 얼마나 무서워했는지 나의 석사논문을 나에게 우송해 주고는 떠나기 전에 나를 만나주지 않았다.
이승만이 1912년에 쓴 '청년 이승만 자서전' 中
위에 나온 이승만의 글을 보면 스티븐스와 이토 히로부미 암살 사건 때[22] 당시 미국 내의 여론분위기가 어떤 상황이었는지를 알 수 있다.

아무리 친일 미국인이라 하더라도 한 나라의 외교관을 죽이는 행동은 미국인들로 하여금 한국을 적으로 여기게끔 만들 뿐이었다. 이승만이 생각하기에 일본인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교육받은 근대화된 한국인들이 해외로 나오는 것이었다. 한국인들이 해외에 나가 활동하며 "우리 한국인들은 일제의 탄압이 어울리지 않는 문명인이자 개화인이자 자유인들이다"라는 인식을 서방 국가들에게 심어줘야 한국 독립의 당위성이 설득이 되고, 미국의 심장부에서도 그런 인식이 통용이 되어야 그것이 곧 독립으로 가는 길이라 판단했다.

또한 위임통치 청원 사건에 대해서도 신채호는,
이완용은 있는 나라를 팔았는데 이승만은 없는 나라마저 파는구나
신채호
하고 비난했으나 이것도 비약이 대단히 심한 비난이며, 이승만이 했던 청원의 내용은 "한국의 완전한 독립을 보장한다는 조건하에 일본의 통치로부터 한국을 해방시켜 국제연맹의 위임통치 아래 두는 조치"였지 나라를 판다거나 타국의 식민지가 되는게 아니었다. 게다가 이건 이승만 뿐만 아니라 김규식이나 안창호 등 다른 독립운동가들도 유사하게 가지고 있던 구상이었다. 현대의 사람들 중에서도 이런 신채호의 시각을 일방적으로 추종하는 경우가 있는데 신채호의 저런 주장은 그가 국제정세와 국제법에 대해 제대로 아는게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치 이승만을 제외한 나머지 독립운동가들은 똘똘 뭉쳐있었는데 이승만이 분탕을 쳐서 '이승만 VS 나머지'의 갈등이었던 것처럼 사람들이 착각하곤 하지만 실제론 이승만과 상관없이 당시 임시정부를 비롯한 독립운동가들은 항상 분열되어 있었고 온갖 파벌로 나뉘어져 싸우고 있었다. 당장 박용만누구에게 암살당했는지 생각해보라. 심지어 한길수는 독립운동을 한다는 사람이 미국이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승인하지 않도록 공작을 벌였으며, 김원봉도 임시정부 해체 운동을 벌인 바가 있다.[23] 분열이나 분탕이라는 것은 그 사람만 아니면 안정적으로 뭉쳐져 있을 때나 쓸 수 있는 표현이다. 모두가 사분오열인 상황에서 특정인만 분열자로 프레이밍 하는 것은 비합리적이다.

어떤식으로 독립을 해야하는가에 대한 노선 차이와 사상의 차이는 있을 수 밖에 없는 것이고 거기서 오는 갈등이라는건 혼자서 일어나는게 아니라 상호간에 일어나는 것이다. 서로 다른 노선과 사상에서 오는 갈등이 이승만에 대한 비판거리가 된다면 반대로 이승만과 갈등을 빚은 상대 독립운동가도 갈등을 빚은 것에 대해서 똑같은 비판을 받아야 할 것이다. 이승만이 누군가와 패권 싸움을 하는데 조직력을 낭비했다고 비판한다면 같은 논리로 그 상대에 대해서도 이승만과 패권 싸움을 하느라 조직력을 낭비했다고 비판할 수 있다. 상호간에 갈등을 빚었는데 그게 마치 이승만의 잘못이라는 일방적 비판은 이승만은 악이고 상대는 선이라는 정답을 정해놓고 얘기하는 이중잣대에 불과하다. 게다가 앞서 얘기했듯이 이승만이 아니어도 원래 분열과 파벌 싸움이 일상이었으며, 독립운동가들의 노선 갈등과 파벌 싸움은 한국뿐만 아니라 식민지배를 당한 다른 국가들에서도 흔히 볼 수 있던 일이었다.[24]

신채호는 분명히 위임 통치안정한경에 의해 초안이 작성되고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장 안창호의 정식 결의를 얻었으며, 이승만 뿐 아니라 김규식도 같은 문서를 각국에 발송되었다는 것을 모를리가 없었다. 즉, 그는 거짓 모함을 한 것이거나 아니면 잘 모르면서 저런 발언을 한 셈이다. 그러나 현순의 자서전인 현순자사(玄楯自史)를 보면 대강 왜 신채호가 저런 발언을 했는지 알 수 있는데, 임시정부에서 자신이 조소와 조롱거리로 놀림을 받은 것에 대한 악감정이 남아있던걸로 보인다.[25]
현안인 임시정부를 조직할새 2종의 숨겨진 흥미로운 일(逸事)이 있으니, 하나는 유위(有爲)의 청년들이 권총 목봉(木棒)들을 가지고 와서 한쪽은 회중을 보호하며 또 한쪽은 회중을 위협하여 공정한 조직을 개최한 것이오, 다른 하나는 신채호총리로 추천된 인사 즉 이승만, 박영효, 이상재 등을 반대하고 박용만을 천하니 그때 청년 중에서 현창운이 웃기려고 신채호를 추천하매 회중이 큰 소리로 웃자(齊聲大笑) 신씨가 노하여 자리를 떴다. 신씨가 이승만을 반대한 것은, 그 이유가 박용만이 신성에게 이승만이 위임 통치를 미국 정부에 청원하였다고 전보한 때문이었다. 그러나 당시 형세는 내외지를 막론하고 인심의 촉향이 오직 이승만에게 폭주하였었다.
5.2.1.3. 안전한 미국에서 호의호식했다?
이승만이 상해임시정부의 독립운동 자금을 횡령하여 그걸로 좋은 옷 사고 스테이크 썰면서 "안전한" 미국에서 사치를 부리며 호의호식했다고 비난을 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지나치게 편향적인 시각이다.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이승만이 재산도 없이 홀로 미국에 갔는데 무슨 돈이 나서 거기서 생활을 하냐?"라고 하지만 이승만은 미국 각지의 학교교회, 지역단체들에서 강연비를 받고 강연을 하며 돈을 벌었다. 그리고 현지 교민들로 이루어진 후원회와 개별적으로 이승만을 도와주는 미국인 후원자들도 있어서 이들이 이승만의 활동비를 지원해주기도 했다.

그리고 "안전한" 미국에서 활동했다며 공격하는 것은 공격을 위한 공격이라고 밖에 할 수가 없다. 독립운동의 목적은 조국의 독립이지 누가 더 열악한 곳에서 활동했나를 겨루는게 아니다. 당시 전세계 최고 강대국이자 동아시아에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 할 수 있는 나라가 미국이었다. 동북아에 가장 큰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나라에서 독립운동을 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그리고 저런 공격을 하는 세력들은 똑같이 미국에서 활동한 박용만이나 유일한 또는 프랑스에서 활동한 서영해 등에 대해서는 같은 공격을 하지 않는다는 점도 재밌는 부분이다. 심지어 의열단은 중국 내에서도 잘 노는 생활로 유명했다.

이렇듯 중국에 있던 독립운동가들은 마치 일제강점기 수십년간 일체의 여가도 없이 산 줄로 생각하는 것도 하나의 착각이다. 이승만 또한 미국에서 현지 동료들과 또는 미국 지식인들과 만나서 일상적인 교우관계를 갖는 것을 두고 마치 엄청난 사치라도 한 것인양 호의호식이라고 표현하는건 다분히 의도적인 비난에 불과하다. 외국 사례만 봐도 동티모르조제 하무스오르타[26]도 이승만과 판박이로 미국, 유럽 등 안정된 장소에서 독립운동을 했는데 하무스오르타가 동티모르의 수많은 국민들이 무장독립운동에 나서며 10~20만 명인도네시아에게 학살당하는데 서양에서 별다른 목숨의 위협도 느끼지 않으며 편하게 수십년간 꿀빨았다고 비난하는 경우는 전혀 없다.

'이승만의 조직은 안창호의 국민회를 테러하여 자금을 탈취했다'는 주장도 있는데 이것도 여러 왜곡이 섞여 있다. 일단, 샌프란시스코에 있던 안창호의 국민회가 아니라 하와이에 있던 하와이 국민회였으며 테러를 하여 자금을 탈취한게 아니라 하와이 국민회가 회관 건축비를 유용했기 때문에 이승만이 그것을 문제 삼아 하와이 국민회 김종학 회장을 파면시켰던 것이다.
5.2.1.4. 대한민국 임시정부 승인 노력
1943년 5월 15일 이승만은 미국의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대략 다음과 같은 내용의 서한을 보냈다.
이제야말로 미국이 지난날 한국에 행한 잘못을 바로잡을 때다. 1905년과 1910년에 일본이 한국을 병탄하도록 도움으로써 1882년에 맺은 조미수호통상조약을 위반한 건 미국이다. 일본이 대한제국을 멸망시킨 것을 시작으로 팽창을 거듭한 결과가 진주만 공습으로 이어졌고 결국 미국은 막대한 병력과 비용을 낭비하게 되었다. 서양 정치인들이 일본의 팽창주의를 억제할 수 있는 것은 한국이 유일하며 독립된 한국이 동양 평화의 보루라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한데서 비롯된 일이다. 그런데 아직도 미국은 임시정부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 소련이 종전 후 한국에 '소비에트 조선 공화국'을 수립한다는 소문이 들리는 상황에서 그들의 극동 진출을 막고 현재의 대일 전쟁도 성공적으로 마무리하기 위해서는 미국이 당장 임시정부를 승인하고 한국인들을 대일 전쟁에 참전시켜 실질적으로 미국을 도울수 있게 해야한다. #
미국이 일제의 위험성을 알지 못하고 일제가 대한제국을 멸망시키는 것을 가만히 둔 결과가 진주만 공습으로까지 이어지고 그 결과 미국은 수많은 병력과 전비를 낭비하게 됐음을 지적하는 이 서한은 이승만의 국제적 통찰력을 잘 보여준다. 그러면서 독립된 한국만이 동양 평화의 보루임을 지적하며 일본소련을 견제하기 위해서 임시정부를 인정해 줄 것을 설득하고 공식적으로 태평양 전쟁에 참전하게 해야한다고 얘기했다.

위는 대표적인 예시일 뿐 이승만은 이 서한에서뿐만 아니라 평소에도 미국이 1882년의 조미수호통상조약을 어겼다는 점을 상기시키는 등 최대한 할 수 있는 여러 방법으로 루즈벨트와 미 국무부를 압박했다.[27] 임시정부는 결국 국제적 승인을 받지는 못했으나 이승만은 이렇게 백방으로 한국의 독립을 위해 노력했다. 이외에도 이승만은 미국내에서 자신이 가지고 있는 하버드, 프린스턴 인맥과 고위직 네트워크를 최대한 활용하려 했고 그가 미국의 이너 서클에 들어가려고 노력한 것도 이때문이다. 미국 내 여론전을 위해 엘리트 미국인들로 이루어진 한미협회도 발족시켰다. 이승만이 아니라면 당시 한국인들 중 이정도로 미국의 최고위급들과 연결될 수 있는 사람도 없었다.

5.2.2. 부정적 평가

독립운동시기부터 임시정부 대통령에서 결국 탄핵되는 등 부정적으로 여기는 사람들이 많았다. 또한 외부에서 보았을 때도 위선적인 면이 보여 부정적이었다.
이승만은 사적인 권력욕을 채우기 위해 독립운동을 했다. 이 목적을 추구하며 그는 자신의 출세를 위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CIA, 한국 생존의 전망(1948.10.28.) - 첨부파일A(이승만의 인격 부분)
민족문제연구소를 포함한 국내의 민족주의 진영이나 혹은 진보 진영에서 그의 독립운동가적 자질이 의심을 받고 있다.

아래 독립기념관장 김삼웅이 쓴 <이승만 평전>에서 그의 독립운동 행적에 대한 비판을 보도록 하자.
1904년 8월 9일, 러일전쟁 와중에 일본 공사 하야시의 도움으로 한성감옥에서 석방되었다.


"장ㆍ전의 스티븐스 저격 사건이나 안중근의 이토 히로부미 총격 사건은 국가의 명예를 손상시킨 살인범이고, 일본과 같은 강국과 군사적으로 대치하는 것은 불가능한 꿈"이라는 망언을 서슴지 않았다.


이승만은 1912년 11월 18일 자 《워싱턴 포스트》회견에서 "지난 3년 사이에 한국은 전통이 지배하는 느림보 나라에서 활발하고 웅성대는 산업 경제의 한 중심으로 변했다"며 일제의 식민 지배를 사실상 옹호하는 발언을 일삼았다.


1913년 하와이에서 강연 중 "청일전쟁 시 각국 군사들은 행위가 부정하여 그 나라 국기의 빚이 다들 흑암한 추태를 입었으나 오직 일본 군인은 행위가 단정하여 일본의 태양기는 광명한 일광을 받아 공중에서 기색이 늠름하게 휘달렸다"는 믿기지 않은 일제 찬양 발언을 했다.


이승만은 1915년 《홀놀룰루 에드버타이스》지에서 "나는 한국은 물론 하와이에서도 혁명운동을 꿈꾼 적이 없다"고 주장했다.


이승만은 1915년 《홀놀룰루 스타블렌턴》지에서 "우리는 어떤 반일적인 내용도 가르치지 않는다. 정반대로 우리는 전 인류를 사랑하라는 기독교 원리를 가르치고 있다. 나는 우리 백성들 가운데서 어떤 반일 감정도 일으키길 원치 않는다"고 발언했다.


이승만은 1919년 일본 '천황'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만약 한국에 자유를 준다면 일본에 감사하고 우정을 느낄 것이고, 만약 우리의 요구를 거절한다면 일본은 정복자로서 불신과 멸시를 받을 것"이라는 '굴욕적인' 언행을 보였다.


이승만은 1922년 9월 하와이 귀환 기자회견에서 "대일전은 불가능하며 새로운 총독이 많은 개혁을 단행해 한국인들의 성원을 얻고 있다"는 망언을 거듭했다.이 밖에도 이승만의 대일 관련 망언은 수없이 많다.


최고 수훈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되어 훈장을 받기에는 그의 행적에 미심쩍은 점이 적지 않았다. 이승만은 독립운동가가 아니라 현실감각이 무딘 외교관이나 기독교 선교사라 해야 어울린다.
김삼웅, 이승만 평전(개정판), 두레, 2020, 129~130쪽.

이승만의 독립 운동 활동과 관련해 다음과 같은 비판이 있다.
미국에서 교포들 모아놓고 연설이나 하고 미국 대통령에게 진정서나 올리고 한 게 독립 운동이 되는 건가요? 똑바로 말해 그 사람들 독립 운동 때문에 우리가 독립된 거요? 독립 운동 했다는 거 말짱 엉터리요, 엉터리.
박정희 #[28]
5.2.2.1. 다른 독립운동가들과 빚은 갈등
이승만은 독립운동 시기 다른 독립운동가들과 갈등을 빚었다. 이 시작은 유학 시기 장인환, 전명운 의사의 더럼 스티븐스 저격사건 통역을 자신은 살인자를 두둔하지 않는다는 이유에서 거절하였다. 박용만과의 하와이에서의 대립,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의 대립과 위임통치 청원 문제 등 꾸준히 이어졌다. 또한 상술했듯이 도산 안창호 선생과 대립 후 '이승만 친위대'라 불릴만한 동지회를 결성 기존 미주 한인 사회의 대한인국민회와 많은 갈등을 빚었다.
이승만은 미국에 충성하는 자기의 행동을 늘 정당화시켰다. 안창호, 박용만 그리고 김규식을 미군 정보당국과 민간 첩보기구에 급진적인 볼셰비키 공산주의자라고 보고했다.
<박용만 평전>
FBI보고에는 또 1931년의 문서를 인용하여 이승만이 박용만을 '간통자, 착취자' 그리고 나중에 '일본 밀정'으로 중상모략한 일이 있다.
방선주, <재미한인의 독립운동>, 1989, 89쪽

1924년 가을, 안창호는 미국 입국을 위해 상하이 주재 미국영사에게 입국비자를 신청하였으나 거절당했다. 서재필에게 알려 스펜서(Spencer) 상원의원을 통하여 미 국무성에 교섭한 즉, '워싱턴에 주재하고 있는 한인지도자가 안창호를 공산당원이라고 하였기 때문에 비자를 줄 수 없다.'라는 회답을 받았다.

1923년 1월의 일본 정보문서 또한 '이승만이 미국으로 돌아가 안창호를 공산주의자라고 선전하였기에 안창호의 미국에서의 신용은 추락하였다'고 본국에 보고하고 있다.[29] 그리고 이승만은 한길수, 김원봉, 김규식 등을 공산주의자로 몰아부쳤다.[30]
판사님! 이들은 박용만 패당이며, 미국 영토에 한국인 군대를 만들었습니다. 이들은 위험한 반일 행동을 하며, 일본 군함 이즈모가 호놀룰루에 도착하면 파괴하려는 음모까지 꾸민 무리들입니다. 이것은 미국과 일본 사이에 중대 사건을 일으켜 평화를 방해하려는 것입니다. 판사님. 저들을 조처해 주십시오!
이승만, 하와이 법정 증언에서

이승만은 미주에서의 박용만과 패권 싸움을 하는데 조직력을 낭비하고 그가 일구어 놓은 조직을 가로챈 점 등은 비판 받을 만한 행보다. 후에 조직을 빼앗긴 박용만 측에서 하와이에 정박해 있는 일본 순양함 이즈모 폭파 논의가 일어난 것을 두고 법정 같은 공개된 장소에서 폭로하였다. 이승만의 밀고는 "신한민보"와 "(국민회)공고서", "재미한인오십년사"(김원용)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5.2.2.2. 독립운동 자금 횡령
첫째, 하와이의 동포들이 공동 결의로서 임시정부에 직접 납입하려고 한 인구 세금을 중간에서 가로채 유용하고, 정부에서 임명한 세금 징수 사무를 맡아서 처리하는 징세 위원을 불법으로 처벌하였다.
둘째, 대통령에 위임 발행한 외국 공채의 수입도 거의 전부 유용하고 심지어는 수지보고조차도 하지 않았다.
셋째, 본래의 임무인 외교와 선전에 관해서도 하등의 볼 만한 성적이 없을 뿐만 아니라 또한 일편의 보고도 하지 않았다.
1925년 3월 10일 임시정부가 구미위원부 폐지를 의결하면서 주장한 부정, 비리 사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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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주관하던 구미위원회는 밑에 파리통신부를 두고 외교업무를 직접 관장하였을 뿐만 아니라, 미국 동포의 인구세와 애국금까지 독점하는 등 임시정부 업무를 전횡하여, 대통령의 독주라는 비난을 받았다. 그 이전부터 임정으로 가게 되어 있던 재미 한인들의 독립성금을 멋대로 횡령해 개인 용도로 쓴 건 덤. 1924년 상해 임정 개혁파가 이승만 대통령을 탄핵하고 난 후에는 임정으로 보내던 소규모의 독립운동자금마저 끊어버렸으며, 결국 구미위원회는 이승만이 탄핵된 뒤 1928년 해체되었다.

5.3. 친일파 대통령이라는 오해

5.3.1. 일관된 반일 행보

일각에서는 이승만이 친일파라는 비판을 제기하기도 한다. 일제강점기 초기 미국에서 망명 생활을 하면서 일본 군함 이즈모호 폭파 시도를 미국 당국에 고발한 것, 반민특위 해체를 명령하고 친일파 인사들을 등용하며 자신에게 반대하는 독립운동가 출신 인사들을 탄압, 처형[31]시킨 것 등이 그 이유이다.

그러나 이승만은 역대 대통령 중 가장 지독한 반일적 성향으로 유명하며 일본 내에서도 인식이 매우 나쁘다. 일제강점기에도 독립운동가였고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수장이기도 했으며 대통령이 되고 난 1948년 이후에도 줄곧 반일 정책을 펴나갔다. 이승만이 친일파 인사들을 등용하거나[32] 반민특위를 해체했다고 하더라도 그가 일본과의 전쟁까지 불사하고 해군을 동원하여 독도일본의 압력으로부터 지켜낸 일은 그의 강력한 반일 신념 덕분이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33] 더구나 당시는 6.25 전쟁이 한창 진행 중이었고 온 나라가 초토화된 상황이었다. 심지어 북한군과 중공군이 쳐들어와 수도 서울이 두 차례나 함락되고, 나라가 망할 뻔한 절체절명의 위태로운 상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승만은 끝내 일본과 손을 잡지 않았다.

심지어 1954년 7월 29일 미국 대통령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와 가진 백악관 회담에서 이승만은 한일 국교 재개 문제로 실랑이를 벌이다, "내가 대통령에 있는 동안은 일본과 상종도 하지 않겠다."라고 단호하게 한일 국교 재개에 대해 반대했고, 그러자 화가 난 아이젠하워는 의자에서 일어나 나가 버렸다. 아무것도 가진 것도 없는 나라인데다 북한의 침략을 막아낸 것도 미국 덕택이었음에도 이승만은 일본과의 국교를 재개하라는 미국 대통령의 권유를 끝까지 거부할 정도로 매우 강경한 입장이었던 것이다.#[34]

이를 넘어 이승만은 6.25 전쟁 시 미국이 국군을 돕기 위해 구 일본군 전력을 동원하려는 의사를 타진하자 "일본군이 한반도에 오면 공산군과 싸우기 전에 일본군과 먼저 싸울 것"이라는 말을 남기기까지 했으며, 물론 일제강점기가 그립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공산주의자로 간주된 사람들과 같은 정치범이 되었다.

심지어 이승만에 대해 매우 부정적인 리영희조차 그의 책인 "역정: 나의 청년시대- 리영희 자전적 에세이"[35]에서 "미국 정부는 이승만의 반일적 고집에 골치를 앓았다."라고 서술하여 이승만의 강경한 반일 성향을 인정했다. 북한에서도 이승만을 비난할 때 '친미주구 리승만역도'라고 하지 '친일주구'라고 하지는 않는다. 더구나 독립운동가 출신 독재자들이 집권 후 자신이랑 뜻을 같이하지 않는 독립운동가들을 탄압하거나 살해하는 일은 외국에서도 흔한 일이며, 식민지 부역자들을 독립운동가 탄압에 쓰는 일도 그렇게까지 드물지는 않다.[36]

웃긴 것은 이승만이 이런 점에서 국가원수로서 한국에서 '반일'을 정치적으로 이용할 수 있다는 선례를 만들고 써먹은 첫 번째 인물이라고도 할 수 있다. 심지어 이승만은 자신에게 반대한 사람에 대한 일종의 '친일몰이'를 벌였는데, 1952년 5월 임시 수도 부산에서 이승만은 장기 집권을 목적으로 하고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골자로 하는 개헌을 야당 의원을 감금한 뒤에 강행하고는 임시수도 부산에 '비상 계엄'을 선포, 당시 육군참모총장이었던 이종찬에게 전방부대 1개 사단을 부산에 배치하라 명령했다. 이종찬은 "군대는 정치에 개입해서는 안 된다"며 이승만의 병력 배치 명령을 거부하고, 더 나아가 '군의 정치적 중립'을 강조한 육군본부 훈령 217호를 전 육군에 하달한다. 이에 이승만은 결국 헌병대를 동원해 따로 병력 동원을 명령하고 이종찬을 총장에서 해임하는데, 이종찬이 해임되기 얼마 전에 부임해 온 신임 유엔군 사령관 마크 클라크(Mark W. Clark) 앞에서 이승만은 한국군 장군들을 일일이 소개하며 인사시키는 와중에 이종찬을 두고 "이 사람(이종찬)의 할아버지한일합방 때 도장 찍어 나라 팔아먹은 양반"이라고 소개했다. 이종찬의 면전에서 말이다. #[37]

5.3.2. 강경한 반일 정책과 발언들

리지웨이 장군, 왜 귀하는 싸울 태세를 갖추고 훈련된 한국 청년들을 무장시키지 않습니까? 왜 50만 한국 청년들을 공산당과 싸울 수 있도록 무장시키지 않습니까? 왜 귀하는 한국 청년들을 밀어 제쳐놓고, 대신 일본무장시켜 또다시 일본을 열강으로 만들려고 합니까?

우리나라가 당한 쓰라린 경험은 이러합니다. 우리는 일본 사람들러시아싸울 수 있게 이 땅을 통과시켜 주었더니 그들은 결코 우리나라를 떠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미국의 도움을 받아 한국에 머무르면서 40년 동안 한반도를 점령했었습니다. 바로 당신네들 미국이 1905년, 러시아와 싸울 수 있게 일본의 군비를 증강시켜 주었습니다.

그리고 2차 세계대전 중에 당신네들은 바로 그 러시아가 일본과 싸우도록 러시아의 군비를 증강시켜준 것입니다. 이제는 또다시 일본의 군비를 증강시켜 주려하고 있습니다. 러시아나 일본이나 그들 야망대로 남의 나라를 정복하기 위해 다같이 한국을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당신들은 언제나 한국이 아시아의 관건이라는 사실을 똑바로 보지 않으며, 또 이 두 열강이 그로인해 전쟁에 휘말렸다는 사실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귀국은 극동에서 한국을 강력한 보루로 만들어 이 두 세력을 견제하려 들지 않고, 우리의 적들만 부추기고 있습니다. 내 말을 명심하여 들으시오. 그러나 만약 당신이 우리의 청년들을 훈련하고 무장을 시킨다면, 결코 후회를 하지 않으리다.
1951년 1월 12일, 이승만리지웨이 장군에게 한국군 무장과 무기를 요청하면서[38][39]

대표적인 경우들을 거론한다면, 우선 1952년 1월 18일에 독도 해역을 지키기 위해 선언한 이른바 '평화선' 혹은 '이승만 라인'을 들 수 있다. 이승만이 평화선을 선포했다는 소식을 듣고 일본 언론들은 '오만 무례하고 불손한 한민족', '한국의 해양 주권 선언은 영토 침략'이라며 잔뜩 흥분하였다. 그리고 일본이 평화선을 불법이라고 항의하면서 고기잡이를 계속하자 이승만은 불법 어로를 하는 어선을 붙잡아 어민을 억류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1952년 9월 이승만이 해군에게 평화선을 침범하는 일본 어선은 나포하고 필요할 경우에는 발포하라는 명령을 내림으로써 한국과 일본 사이의 갈등은 뜨겁게 달아올랐다.[40] 나중에 그렇게 해서 한국 해군에 의해 억류당한 일본 어민의 수는 4천 명에 달했으며, 그 과정에서 44명의 일본 어민들이 죽었다.

두 번째로는 1954년 3월 14일 일본 도쿄 메이지 스타디움에서 개최된 월드컵 극동 예선에서 원래 한국과 일본 두 나라에서 한 번씩 경기를 하는 홈 앤드 어웨이가 원칙이었지만, 이승만은 한국 땅에 절대 일본 축구팀의 입국을 허용할 수 없다고 강력히 반대하여 두 경기를 모두 일본 도쿄에서 치러야 했다.[41] 이때 일본으로 경기하러 가는 대표팀을 모아놓고 이유형 감독과 대표팀으로부터 승리하지 못한다면 현해탄에 몸을 던지겠다는 각서를 받았다. # 도쿄대첩 항목 참고.
세 번째로 이승만은 1955년 12월에 미국 국무부 관리들이 한국을 희생해 일본을 지원하고 있다고 비난하면서 그들 중에는 일본과의 맹목적 사랑에 빠진 이들이 있다고 경고했으며[42], 미국인들 이외에 도대체 누가 일본을 믿느냐고 개탄하기까지 했다.[43]

네 번째로 이승만은 대만(중화민국)이 일본[44]과 가깝게 지내는 걸 비판하면서 심지어 "4억 중국인은 다시 일본의 지배하에 노예가 되느니 지금과 같은 공산주의의 속박을 원할 것이다."라는 말까지 했다.[45] 중국이 자신의 소원이던 북진통일을 완수 직전에 가로막았음에도 이런 말을 남겼다.

다섯 번째로 이승만은 1959년 6월 15일 대일 경제단교 및 일본 왕래금지 성명을 발표하였다. 당시 언론은 이승만 정권의 경제단교 조치에 대해 그것은 일본을 제재하는 게 아니라 한국을 제재하는 것이라고 비판하기까지 했다.[46]

그 밖에도 이승만은 6.25 전쟁 초기에 전황이 불리해지자 일본의 군대를 데려와야 한다는 미군의 제안에 "만약 그렇게 하면 공산군보다 먼저 일본군에 맞서 싸울 것"이라고 강력히 반대한 바 있다.[47][48] 또한 미군정의 제임스 하우스만 대위에 따르면 이승만은 항상 총독부 건물을 부숴야 한다고 얘기했으며, 육군 병기감 엄형섭이 자신에게 '대통령께서 군의 모든 장비를 동원해 총독부 건물을 부수라는데 큰일났다'며 걱정하더라는 얘기를 하기도 했다. 아울러 이승만은 조선은행에 보관되어 있던 금괴를 일본한테 빼앗겼다고 자주 분통을 터뜨렸다고도 한다. #.

또 이승만은 재임 기간 동안 국민들을 반공집회만큼이나 반일집회에 많이 동원했으며, 특히 1958년 재일조선인 북송사업이 시작되자 반일집회는 절정에 달했다. #

심지어 이승만은 1958년 12월 13일에는 부산을 방문하면서 일본은 공산당보다 무서우니 철저히 경계해야 한다고 강조하기도 했다. 당시 대한뉴스

또한 그의 집권 기간 12년 내내 일본과의 국교 수립은 끝내 이루어 지지 않았다. 수교 협상이 있긴 했으나 일본 측의 무리한 요구와 망발 등이 문제가 되어 결렬되었고, 일본과의 국교 수립은 박정희 집권 후이자 정부 수립 17년 후인인 1965년에야 한일기본조약으로 이루어졌다.

5.3.3. 친일반민족행위자 청산 방해

파일:이승만노덕술2.png
파일:노덕술과이승만.jpg
<rowcolor=#fff> 노덕술에 관한 이승만의 국무회의록
노덕술 피검에 관하여는 그가 치안기술자임을 비추어 정부가 보증하여서라도 보석하도록 함이 요망
불법조사관 2명 및 그 지휘자를 체포하여 의법처리하여 계속 감시하라 지령하시다
왜정시대에 악질적 해악을 저질렀다고 해도 지금 잘 하는 일이 있으면 애국자
1954년 4월 9일, 제3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이승만이 한 발언. 원문은 이와는 다른 문구이지만 전하고자 하는 내용은 동일하다. #

이승만은 독립운동가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정부 수립 이후 친일반민족행위자 처벌을 반대하고 방해했다. 개인적으로는 일본을 당대 정치인을 통틀어 그 누구보다도 극심하게 미워했으나, 정작 일본에 부역한 이들은 시대상을 감안하여 참작하여야 한다는 스탠스를 일관했다.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가 제대로 된 활동을 못하고 해체된 것도 이승만이 친일반민족행위자 청산에 적극적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히려 경찰은 반민특위원들을 빨갱이로 몰아 탄압했다.

당시 글을 읽은 사람은 모두 친일 민족 반역 행위를 했다는 의견도 있으나, 반민특위가 대상으로 삼은 사람들은 일제 치하에서 복무한 기술관료&군인&경찰과 친일 지식인 모두가 아니라 그들 중에서도 가장 악질적인 자들이거나 일제의 식민지 독립 운동 탄압에 앞장서며 악영향을 끼치던 수백 명이었다. 한편 이승만이 친일파 출신을 그대로 등용하되 권력의 핵심에 손이 닿지 않는 한직에 몰아넣는 방식으로 숙청했다는 주장도 있으나 독립운동가들을 잡아 고문하던 노덕술이나 김창룡[49]과 같은 자들을 측근으로 두고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는데 사용했다. 덤으로 이승만은 해방정국에 이들 이상의 악질 친일파였던 이종형[50]과도 밀착한 관계를 맺었다. #[51] 뼛속까지 뿌리박힌 증오심조차 권력욕을 이길 수 없다는 건가.

반민특위 활동이 소급입법금지원칙 위반이라는 주장도 있다. 정확히 말하자면 소급입법금지 대상은 이미 완료된 사실에 대한 입법(진정소급입법), 진행 중인 사실에 대한 입법(부진정소급입법)으로 분류된다. 친일반민족행위 문제는 통상 전자에 해당하는데, 진정소급입법의 경우 원칙적으로는 위헌이지만 예외적으로 정의실현 등의 차원에서 소급입법을 할 공익이 더 크다고 한다면 허용된다는 것이 한국의 학설과 헌법재판소 판례의 견해다. 한국의 경우, 군사 독재 문제와 친일반민족행위자 문제 두 부류에 한해서 진정소급입법을 허용하고 있는데 과거사 청산같이 그에 대한 예외 역시 정당하다면 보편적으로 인정된다. 친일반민족행위자 재산 환수에서 본 헌재의 판례[52]

이승만이 위에 서술된 것처럼 임기 내내 반일 성향을 숨기지 않았음에도 친일반민족행위자 처벌에 대해서 부정적으로 생각했던 이유는 명확하지 않다. 일반적으로는 국내에서 기반이 미약했던 이승만이 친일반민족행위자 중 일부를 권력에 끌어들인 대신 제공해준 대가라고 보고 있으며, 당시 중국의 국공내전이 발발하고, 대구 10.1 사건, 제주 4.3 사건, 여순반란사건 등을 진압하고 이승만 정권의 강경한 반공을 실천하기 위해 이승만 정부에 협력해줄 수 있는 친일반민족행위자들을 용서해주었다는 견해도 있다. 그리고 좌우의 대립으로 인한 국가적 위기 해결을 위해 친일파 청산에 대해 이승만이 소극적일 수 밖에 없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사실 이러한 스탠스는 이승만 개인만의 입장이라고 보기는 힘들었고, 김구, 조소앙, 신익희 등 주류를 형성하고 있던 우파 인사들 사이에서 어느 정도 공유된 인식이었으며,[53] 세부적인 스탠스 차이는 있지만 민족통일과 정부 수립 등의 과제를 친일파 청산보다 우선순위에 두고 친일파 청산은 추후에 해야 한다는 데에는 어느 정도 유사한 입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이렇게 시간을 번 친일파들이 그걸 착실하게 이용해서 청산 시도를 할 수 없게 만들었다는 게 문제가 되어버렸지만... 이후 친일인명사전이 발간되는 21세기가 되기까지 친일파 청산은 시도조차 되지 못했다.[54]

현재도 인명사전 발간으로 친일파의 존재들이 많이 알려지긴 했지만 이후 관련 처벌은 소급입법으로 가는 문제라 앞으로의 길도 난항이 예상되는 상태다. 실제로 초대 국회는 소급입법금지 원칙과 반민족행위자 처벌을 동시에 제헌헌법에 넣었고, 초대 국회만이 반민족 행위에 한해서 소급입법을 할 수 있다는 헌법 부칙으로 이 문제를 해결했지만, 이런 권한이 없는 현재의 국회에서는 소급입법을 함부로 했다가는 법 체계가 망가질 위험이 있다.

5.4. 미국의 앞잡이?

'이승만은 친일파다'라는 주장 말고도 이승만을 비하하려는 사람들이 말하는 대표적인 것이 '이승만은 미국의 앞잡이다', '미국 하수인이다'라는 주장이다. 그러나 이승만은 오히려 미국 대통령들을 비롯한 많은 미국 인사들과(해리 트루먼, 존 하지, 아이젠하워 등) 뜻이 달랐고 자주 부딪혔다.

왜냐면 이승만은 철저히 한국의 이익을 위해 미국을 활용하는 것에 모든 초점이 맞춰져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미국 내에서 "Sick man Rhee"가 이승만의 별명이었을 정도였다. 갈등이 절정에 이르렀을 때는 이승만을 제거해야 한다는 주장까지 미국에서 나왔다.[55] 미국인들은 당연히 남의 나라인 한국의 입장이 아닌 자국 미국의 입장에서 볼 수 밖에 없으니 이승만이 맘에 들지 않았겠지만 한국의 입장에서 봤을 때 이승만은 철저히 한국의 이익을 위해 미국을 뽑아먹을 수 있는 한 최대한 뽑아먹는 대통령이었다. 이런 사람을 미국의 앞잡이라 할 수는 없다.

그가 대통령이 된 후 뿐만 아니라 그 전인 1946년 6월에도 미군정 사령관 존 하지는 이승만의 정치 자문가였던 로버트 올리버에게 "그의 그치지 않는 반소언동 때문에 미국이 장차 한국에서 설립할 어떤 정부에도 이승만은 결코 참여할 수 없을 것이다."라고 경고하기까지 했고 장택상에게 이승만을 정계에서 축출할 것을 제의하기도 했다.[56]

이승만이 대통령이 된 이후에도 마찬가지라서 이승만은 미국이 원하는대로 움직여주지 않았고 심지어 1953년에는 미국이 이승만을 제거하는 에버레디 계획을 세우기도 했을 정도다. 그리고 6.25 전쟁 후 아이젠하워가 한국과 일본이 수교를 맺고 잘 지내길 요청했을 때도 이승만은 거절했다. 아무것도 없는 신생약소국이자 6.25 전쟁에서도 미국 덕에 나라를 지킨 입장이었음에도 이런 대응을 한 것이다.

이런 이승만의 행보를 보면 아무리 봐도 그가 미국의 앞잡이였다거나 미국의 이익을 위해 움직이는 꼭두각시였다는 식의 평가는 절대 할 수 없다. 오히려 이승만은 미국을 국익에 적극적으로 이용한 사람이었다.

5.5. 순수혈통주의에 기반한 국제입양

제인 정 트렌카 대표는 6.25 전쟁 이후 혼혈아동의 국제입양에 대해 "당시 많은 나라가 전쟁을 겪었다. 또 전쟁 과정에서 혼혈아동을 포함해 보호를 필요로 하는 많은 아동이 발생했다. 그러나 다른 어떤 나라도 '아버지의 나라'로 보낸다며 이렇게 대거 입양을 보낸 사례가 없다"며 "심지어 혼혈아동이 전쟁을 벌인 적군의 아이들도 아니었는데 왜 이들을 내보내야 했는지 정말 이해하기 힘든 일이다"고 말했다. #
한국의 해외입양은 1953년 이승만 정권 때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는데 이승만은 '일국일민(一國一民)주의'를 정치적 신념으로 내세우며 6.25 전쟁 당시 외국군과 한국 여성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아동은 아버지의 나라로 강제로 보냈다.

5.6. 정부 수립과 건국

2000년대 중반 이후 뉴라이트[57] 진영을 중심으로 건국절 논란이 촉발되면서 이승만을 건국 대통령으로 추앙하는 목소리가 등장하기 시작했다. 소위 '이승만 국부론'이 바로 그것인데, 그에 따르면 이승만은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대한민국을 처음으로 건국한 사람이며 따라서 이승만은 조지 워싱턴과 같은 건국의 아버지라는 주장이다. 반면 이러한 주장에 대해 반대하는 측에서는 이승만은 사사오입 개헌3.15 부정선거 등으로 자유민주주의 헌정을 오히려 파괴한 인물이며 종국에는 4.19 혁명으로 불명예 퇴진해 이미 국부의 자격을 상실했다고 본다. 이승만이 대한민국을 '건국'했다고 보는 평가는 현대 한국 정치에서 진보와 보수를 가르는 첨예한 사안으로 자리하고 있다.

한편 이승만이 남긴 여러 문헌 자료는 일각의 평가와 달리 이승만 스스로는 대한민국을 '건국'했다고 보지 않았음을 입증하고 있다. 이는 제헌 국회 개원식에서 이승만이 한 연설에서 잘 드러난다.
··· 나는 이 대회(大會)를 대표하여 오늘의 대한민주국(大韓民主國)이 다시 탄생된 것과, 따라서 이 국회가 우리 나라에 유일한 민족 대표 기관임을 세계 만방에 공포(公布)합니다. 이 민국은 기미년 3월 1일에 우리 13도(道) 대표들이 서울에 모여서 국민대회를 열고 대한 독립 민주국임을 세계에 공포하고 임시정부를 건설하여 민주주의의 기초를 세운 것입니다. 불행히 세계 대세(大勢)에 연유해서 우리 혁명이 그때에 성공하지 못했으나, 우리 애국 남녀가 해내 해외(海內海外)에서 그 정부를 지지하며 많은 생명을 바치고 혈전 고투하여 이 정신만을 지켜온 것이니, 오늘 여기에서 열리는 국회는 즉 대한국민대회의 계승이요, 이 국회에서 건설되는 정부는 즉 기미년에 서울에서 수립된 민국 임시정부의 계승이니 이날이 29년만의 민국의 부활일임을 우리는 이에 공포하며 민국 연호(民國年號)는 기미년에서 기산할 것이요, 이 국회는 전 민족(全民族)을 대표한 국회이며 이 국회에서 탄생되는 민국 정부는 완전히 한국 전체를 대표한 중앙 정부임을 공포하는 바입니다. ···

대한민국 30년 5월 31일
대한민국 국회의장 이승만

아울러 이승만은 3.1 운동으로 독립을 선포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수립한 1919년을 원년으로 하는 대한민국 연호를 강하게 주장한 인물이었다. 이승만이 대한민국 연호를 사용한 이유는 크게 4가지로 정리할 수 있는데, 첫째는 민주국의 기초가 3.1운동과 임시정부 수립 때 잡혔음을 표시하기 위함이고, 둘째는 무저항주의를 시작해서 성공한 역사를 드러내기 위함이며, 셋째는 남녀 선열의 위대한 공업을 인증함이며, 넷째는 단군기원이 지나치게 상고사적이어서 조상의 이름만 판다는 비판에서였다.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이를 통해 이승만은 본인 스스로 자유민주주의를 들여와 대한민국을 건국했다고 보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이승만의 역사관은 제3대 대통령 선거 공보물 1948년 약력에 기미년 3월 1일로부터 기산하여 29년만에 자주민국을 부활함이라고 적어놓은 것에서도 드러난다.

정리하자면, 적어도 이승만 본인은 대한민국을 '건국'했다는 의식이 없었으며, 도리어 자유민주주의 건국의 기원을 3.1 운동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찾았다. 한편 이승만 건국론을 전면에 내세운 뉴라이트 진영의 과거 사상적 기반이 주체사상이었기에 사상적 배경과 극단성은 그대로 둔 채 숭배의 대상만 김일성에서 이승만으로 바꾼 것이라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58]

첨언하자면 뉴라이트 이전에도 이승만을 '건국 대통령'이라고 일컫는 경우는 드물게 있긴 했지만,[59][60] 당시 국민들 사이에서 이승만이 '건국자'라는 이미지는 옅은 편이었다. 당장 이승만 생전인 1956년 나온 이승만 찬양가 '우리 대통령'의 첫 부분 가사(박목월 작사)도 "우리나라 대한나라 독립을 위해"지 "우리나라 대한나라 건국을 위해"가 아니다.

5.7. 일본 망명 루머

이승만 일본 망명설은 논쟁의 여지가 없는 역사왜곡으로, 망명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내세우는 근거는 무초 대사의 기록이며 이는 다음과 같다. 이승만은 서울 함락 추태로 당시 도망자 이미지가 강하지만, 실제 6.25 전쟁에서는 적극적인 전시지도자였으며 망명에 극도로 부정적이였다.
Acting PriMin[61] visited me 7 a.m. Confirmed President had left at 3 a.m heading for Chinhae and Cabinet at 7 a.m. for south both travelling by special trains. (중략) He despaired of saving anything and inquired possibility President and Cabinet moving to Japan as "government in exile." I made no commitment.
오전 7시에 총리 대리인 신성모가 와서 오전 3시에 대통령 진해를 향해 남쪽으로 떠났고 각료들도 오전 7시에 남쪽으로 떠났으며 모두 특별열차로 이동했다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중략) 신성모 국방장관은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것에 낙담하였고, 대통령과 내각이 일본으로 이동하여 망명정부를 세우는 가능성에 대해 물었다. 나는 아무것도 대답하지 않았다.
1950년 6월 27일 무초 주한 미국 대사의 보고서 중#

서울에 남아있던 국방장관 신성모는 1950년 6월 27일 아침에 미국대사였던 무초를 찾아가서 여러가지 논의를 하는데 이 때 신성모가 일본에서 망명정부를 세울수 있는지를 물어본 것으로 이승만 정부가 일본에 망명을 했었다고 주장하는 서술이 존재하며, 황현필 등 이승만에 대해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사람들은 이 주장을 무비판적으로 인용하고 있다.

당시 상황을 앞 뒤로 자세히 보면 6월 25일-26일 전쟁 초 이승만의 행적은 도피가 아니라 적극적인 항전을 시도했었고, 대전으로의 피난 또한 이승만이 자발적으로 한 것이라기 보다 신성모가 억지로 내려보낸 것에 가깝고, 이승만 뿐 아니라 내각도 같이 남하했다.

새벽 2-3시에 신성모는 특별열차편으로 이승만을 피난시켰고, 7시에 신성모는 내각도 특별열차를 타고 피난시켰다.이 이후 신성모는 무초대사와의 단독 대면에서 저 발언을 한 것으로, 이승만의 입장이라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또한 정황 증거도 이승만이 망명을 적극적으로 추진했다고 보기 어려운데, 신성모가 준비한 열차는 본래 진해가 목적지였으나, 이승만은 서울로 돌아가려고 했으나 단념하고 대전으로 향했다. 이 진술은 한국 측 사료 및 미국 측 사료에 기록되어 있어 교차검증되는 사실이다. 이승만이 일본이나 미국으로 망명을 시도했으면 바로 부산으로 일본으로 도망쳤지 굳이 서울로 올라갈 필요는 없다.
서울 함락 등 전황에 대한 미 극동군사령부의 보고, 연월일 1950년 6월 28일
출전 미국 중앙정보국 정보보고서 Daily Report 1 ; 한국전쟁 자료총서 16, 5~6쪽
제목 : 한국 상황
I. 전황
워싱턴 시각으로 6월 28일 오전 7시(서울시각 6월 28일 오후 9시)에 맥아더 사령부로부터 접수한 정보에 따르면, 김포공항과
서울이 북한군에 의해 함락되었다. 남한군이 항복을 했다는 징후는 없다. (...)
II. 생존 가능성
남한의 저항이 계속되리라는 전망이 커지고 있다. 미국의 한국 정부에 대한 조기 원조와 개입은 남한 국민의 사기에 중요하고
시의적절한 효과를 가져 왔다. 비록 북한군의 진격이 완전히 중단되지 않고 서울이나 기타 중요 지역 함락이 남한 국민의 사기에
타격을 가하더라도, 미 공군 작전은 남한 정부와 군대, 그리고 국민들에게 거대한 심리적인 부양 효과를 가져 올 것다. 최근의
공식 보고에 따르면, 남한인들 사이에 정신적인 공황의 조짐은 없다.
미국의 계획을 안 이승만 대통령은 서울로 돌아가기를 원했으나 단념했다고 한다. 한국인의 사기, 특히 한국군의 사기는
적의 절대적인 대포와 전투기에 의해 압도되고 있다. 남한군이 만약 재편성될 수만 있다면 강력한 전투의지를 보일 것이다.
조직적인 저항시도가 계속되고 있다.

이 사건 이외에도 이승만은 전쟁 중 망명정부 운운에 대해서는 단호하게 반대했다.망명정부에 대해서는 전황이 불리해질 때마다 미국측에 의해 꾸준히 제기됐다.즉,망명정부는 낙동강선 방어 형성 전후와 중공군 개입 이후 이승만이 아니라 미국이 적극적으로 한국정부의 해외 및 제주도 이전 문제를 제기했다. 즉 이승만이 마음만 먹었으면 미국의 지지하에 얼마든지 망명 정부를 꾸릴 수 있는 상황이였다.

아래 문단에서는 보다 자세한 서술을 진행한다.

6.25 전쟁 시 망명정부에 대해 기술한 참고자료는 다음이 있다, 전쟁기념사업회,<한국전쟁사:북한군 침공과 한국군방어>제3권,행림출판사,1992;프란체스카 도너 리,<이승만과 6ᆞ25:프란체스카의 난중일기>[62],기파랑,2010;정일권,<전쟁과 휴전>,1986.

낙동강 방어선 전투가 격화될 때 미국 정부는 만일의 경우에 대비하여 철수계획을 수립해 놓고 있었다.철수지역으로는 필리핀,사모아,피지의 남양군도,하와이,홋카이도 등을 고려했으나,최종 후보지역은 제주도,일본, 류큐열도(오키나와 제외),대만 등으로 선정하였다.

이 당시 <이승만과 6ᆞ25:프란체스카의 난중일기>의 서술에 의하면, 이승만은 영부인인 프렌체스카를 일본으로 망명시키고 본인은 잔류한다는 대화집이 수록되어 있어, 이승만은 망명 의사가 없음을 보였고, 8월 14일 적의 총공세 당시에, 무초 대사는 제주도로 망명을 제안하였다.

이 무초 대사의 제안에 이승만은 권총으로 무초 대사를 협박하며, 정부를 절대로 한반도 밖으로 옯기지 않겠다고 언급한다. 다만 정치적으로 <이승만과 6ᆞ25:프란체스카의 난중일기> 자체를 신뢰하지 않는 경우가 있어 완벽한 반론으로 인정받지는 못한다.

그러나 이승만이 망명에 극도로 부정적이였다는 기록은 더 있으며 다음과 같다. 1950년 9월 초 대구 방어의 전략적 요충지인 영천이 점령당했을 당시의 정일권의 <전쟁과 휴전> 서적에 서술되어 있는 이승만의 망명 정부에 대한 반응이다.
미 제8군사령관 워커(WaltonH.Walker) 중장과 정일권 소장과의 대화,
출전: 정일권 <전쟁과 휴전> 86page
워커 중장: 이것은 극비 중의 극비입니다.제너럴 정과 나,두 사람만이 알고 있어야 합니다.당분간은 이승만 대통령한테도 말하지 말아야 합니다. 한국군 중에서가장 믿을 수 있고 가장 잘 싸우는 2개 사단과 각계각층의 민간인 10만명을 극비리에 선정해 주기 바랍니다.”
정일권 소장:누구의 구상입니까?워커 장군의 생각입니까?"
워커 중장:맥아더 사령관의 극비 긴급지시입니다)

워커는 9월 7일 영천방어가 가망 없어졌을 때 맥아더 사령관이 미 제8군의 전면철수를 고려하라고 했다면서 정일권에게 이에 대한 배경을 설명해주었다.한국군 2개 사단과 민간인 10만명에 대한 철수계획은 워커 자신의생각이라고 했다.워커는 정 장군이 승낙하면 맥아더 사령관에게 건의하여수송선박을 준비하겠다고 했다.철수장소에 대해서는 아메리카 군도라고 했으나,정일권은 괌 아니면 하와이가 될 것이라고 판단했다.

정일권은 사태의 중대성을 인식하고 이튿날 새벽 부산경무대로 이승만을 긴급 방문하고 미군 철수계획을 보고했다.이승만은 “워커,그 사람 보기보다는 여간 겁쟁이가 아니구먼.망명의 설움을 안고 하와이에서 외롭게 일본 제국주의와 싸웠던 나,이승만에게 이제는 겨레를 이끌고 다시 그곳으로 망명하라는 것인가!”라며 격노했다.그리고서 이승만은 “워커 장군에게 말하시오.나,대한민국 대통령이승만은 누가 가자고 해서 나의 조국을 등질 비겁자가 아니라고 말하시오. 나,이승만은 영천이 무너져 공산군이 여기 부산에 오면 내가 먼저 앞에나서서 싸울 것이오.그래서 내 침실 머리맡에는 언제나 권총이 준비돼 있다고 말하시오!”라고 의연하게 대처했다.[63]

이후 한국정부의 망명 문제는 중공군 개입 이후, UN군이 철수하는 과정에서 다시 제기되었다, 중공군이 신정공세를 시작함에 따라 미국은 최악의 경우 망명정부를 유치할 것을 계획했다. 미국 정부가 1951년 1월 12일 마련한 전쟁지도지침을 보면 유엔군은 일본으로 철수하고, 한국정부와 군경을 제주도로 이전시켜 저항을 계속할 수 있도록 지원한다 는 것이다.

미국이 극비리에 추진한 한국 정부의 제주도 이전계획에 포함된 대상인원은 행정부와 그 가족 36,000명,한국 육군 260,000명,경찰 60,000명,공무원ᆞ군인 및 경찰가족 400,0000명,기타 요원 등 총 100만 명으로 판단했다.미국은 어떠한 경우에도 한국인을 일본으로 이동시키지 않는다는 방침을 정했다.

망명시도 인정측 근거 가운데 야마구치현 관련 서술이 존재한다. 일본의 <야마구치현사> 의 총류편 현대2(山口県史 史料編 現代2)에서 6.25 전쟁 당시 아마구치 현 지사였던 다나카 다쓰오(田中 龍夫)의 회고를 기록하면서 여기서 일본 외무성에서 야마구치 현에 한국인 망명을 위한 시설을 지시했고 이과정을 다나카 지사가 외무성과 갈등을 빚은 일을 회고하고 있다.

이후 언론에서는 현사가 쓰여진 90년대부터 이 망명 캠프를 두고 이승만이 망명하려고 했다는 식으로 엮는데, 일단 이 망명 캠프가 이승만의 부탁으로 만들어 졌는지부터가 불분명하고 당시 미국 입장에서는 이승만이 망명하든 한국에서 죽든 적어도 반공시민들이 북한군에게 학살당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 대만의 경우처럼 한국인들을 피난시켜야 했는데 이것을 두고 이승만이 일본으로 망명하려 했다고 보기에는 증거가 부족하다.

망명정부 후보로 거론된 곳들 중에서 적어도 야마구치현 망명정부설은 이승만의 생애를 봐도 일고의 가치가 없는 거짓이자 허구이다. 야마구치현은 옛 이름이 조슈 번으로 요시다 쇼인정한론을 설파하여 한반도를 침략하려는 야욕을 품은 지역이고 이토 히로부미, 야마가타 아리토모, 미우라 고로등 조슈 번 출신들 즉 야마구치현 출신들이 일제강점기를 열었으며, 조선총독들 역시 조슈 번 출신이거나 조슈 번의 영향력 하에 있었던 일본 육군 출신들이었다. 이승만의 독립운동은 조슈 번(야마구치현)에 맞서 독립을 쟁취하는 대결이었던 것이다. 그런 철천지 원수들이 지배하는 지역에다 망명정부를 세운다는 발상은 도저히 생각할 수가 없다. 윗 문단에서도 하와이에서 외롭게 일본 제국주의와 싸웠다는 서술이 있는데 일본 제국주의자들의 근거지가 야마구치현이다.

그리고 위의 서술에서 이승만이 아니라 미국이 망명정부 추진에 더 적극적이였으며, 한국정부는 제주도로, UN군은 일본으로 피신하려 했다는 계획이 구체적으로 서술되어 있다, 즉 당시 망명 캠프 관련 기록은 오히려 이승만 측의 망명 거부를 서술을 뒷받침해주는 근거로 볼 수 있다.

2015년 6월 24일에 KBS에서는 단독 "이승만 정부, 한국전쟁 발발 직후 일 망명 타진"이라는 뉴스 기사를 내서 논란이 일어나기도 했는데 여기서 야마구치 현사에 '(1950. 6. 27)'이라는 문구로 원문에는 없는 날짜를 날조해서 넣었다. 후에 KBS는 이 가짜뉴스로 징계도 받았다. 그리고 단독 보도라고 했지만 이미 일본의 산케이 신문에서 1996년 4월14일에 보도한 바 있으며 그 다음날 조선일보(1996.04.15/사회/37면)에서조선일보를 시작으로 동아일보, 경향신문, 한겨레 등도 교도통신 등을 인용해 보도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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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박정희 정부는 예외적으로 더 비판적이었다.[2] 즉 당시에도 이승만의 정치에 대한 평가는 좋지 않았다.[3] 자세한 내용은 NL(정파) 참조.[4] 재평가와 미화는 다르다.[5] 이승만에 관련한 왜곡 논란이 있는 다큐멘터리 백년전쟁/건국전쟁의 대립은 이 당시 사건의 연장선이다.[6] 단 여기서 중립적이란 사실관계를 재확인시키고 각 주장들을 재 확인하는 시점을 말한다.[7] 원래 자유당 출신이었으나 사사오입 개헌에 분노하여 탈당, 민주당에 입당했다.[8] 일반 대중 및 역사학계 등[9] 이승만은 분명히 독립운동가이며, 현재는 역사학계도 이를 부정하지 않는다. 즉 저 발언은 당시 역사학계 주류가 가진 인식을, 그리고 이들 또한 역사관의 편향 문제에서 전혀 자유로울 수 없다는 점을 보여준다.[10] 이 말은 결국 정통성이 북한에 있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는 발언이므로 당시 학계를 NL(정파) 세력이 장악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11] 하지만 김대중 본인은 이승만을 긍정적으로 평가하지 않았다.[12] 한 인물의 역사적 평가는 후대로 갈 수록 새로운 해석과 사료가 발굴되면서 조금씩 바뀌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다.[13] 긍정/부정 전부 포함.[14] 50년대에 인구 2/3~3/4 가량이 농민이었다.[15] 대학은 커녕 학교 자체를 못 다닌 경우가 많아서 군에서 배운 기술로 먹고 살게되는 경우도 많았다.[16] 유영익, '1950년대를 보는 하나의 시각', "한국근현대사론", 262p[17] 한국전 참전 장성들의 회고에 자주 나오는 내용인데, 정작 청년들을 모아서 입대를 시켜도 군수물자 지원이 제대로 안돼서 훈련도 못시켰다는 이야기들이 많다.[18] 물론 당연하지만 지금까지 징병제가 유지되는 것은 이승만 때문이 아니다.[19] 발간 당시에는 별 관심을 받지 못했으나 몇 달 뒤 진주만 공습이 일어나자 인지도를 얻게 되었다.[20] 서재필이 창간한 독립신문은 2년 앞선 1896년 창간되었으나 주 3회 발간됐기 때문에 일간지는 아니었다. 독립신문이 일간으로 바뀐 시점은 1898년 7월로 매일신문보다 늦다.[21] 이제는 외교 업무가 너무 힘들어져서 대사 파견이 기본이 되었기에 예전만한 존재감이 안 느껴질 뿐이다.[22] 두 사건은 불과 1년 간격으로 일어났다.[23] 심지어 현 대한민국 정부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이어받았다는 것을 생각하면 아는 결코 가볍게 넘어갈 문제가 아니다.[24] 특히 아일랜드는 독립 후에도 독립운동가들 사이의 갈등이 해소되지 못했고, 이는 아예 아일랜드 내전으로까지 번졌다.(당장 아일랜드 독립운동의 거물 마이클 콜린스를 암살한 사람이 독립운동 단체인 IRA 단원이었다) 알제리 전쟁에서도 독립운동을 주도한 FLN이 프랑스인뿐만 아니라 다른 알제리 독립운동 단체인 MNA 당원들을 학살하기도 했으며, 앙골라 내전도 독립 후 독립운동 단체들의 권력 투쟁이 주된 요인이었다. 짐바브웨에서도 독립한 조국의 시가에서 독립운동 단체들이 '전투'를 벌여 15명이 목숨을 잃기도 했으며, # 로버트 무가베파 독립군 출신 인사들이 주축이었던 제5여단이 구쿠라훈디 학살 과정에서 은데벨레족뿐만 아니라 조슈아 은코모파 독립군 출신 인사들을 학살하기도 했다. '조국의 독립/독립한 국가의 발전'이라는 같은 생각으로 똘똘 뭉쳐야 했던 독립전쟁 과정/독립 후에 있던 유혈 갈등이 이 정도였으니 독립운동 과정에 있던 독립운동가들 사이의 무혈 갈등도 한국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았을 수밖에 없는데, 그도 그럴 것이 동티모르에서는 아예 '동티모르가 포르투갈으로부터 독립하려면 인도네시아자치령으로 합병되어야 한다'고 진지하게 주장한 독립운동가까지 있어서 다른 독립운동가들에게 엄청나게 욕을 먹었다.[25] Hyun Soon, 《My autobiography by the reverend Soon Hyun 1878-1968 : with historical documents, photographs and analysis》, Chapter 16. 三一運動과 我의 使命, 2003, Institute for Modern Korean Studies Yonsei University Press.[26] 여담으로 동티모르의 또다른 과거 식민지배국이었던 포르투갈계 혼혈이다.[27] 이승만이 1941년에 미국에서 출판한 일본 내막기에서도 이 부분을 지적하면서 미국인들의 치부를 자극했다. 펄 벅은 당시 한 잡지에 기고한 서평에서 '조미수호통상조약을 미국이 1905년에 수치스럽게 파기했다는, 미국인들 대부분이 모르고 있는 사실을 이승만이 지적해줘서 기뻤다'고 썼다.[28] 다만 교포들을 대상으로 활동한 건 주로 안창호였고 이승만은 주로 미국 현지인과 지식인들을 대상으로 한국의 실상을 알리고 여론 조성을 하는데 집중했다.[29] 조선총독부 경무국 상해정보(고경 제245호 : 1923.1.28) <일본외교사료관자료>[30] "이승만은 자신의 라이벌들의 도전에 어떻게 대응하였는가? 그는 한길수, 김원봉, 김규식 등을 모두 공산주의자로 몰아부쳤다." - "우남이승만과 건국사"[31] 보도연맹 학살 사건 당시 독립운동가도 처형당했다.[32] 사실 광복 직후 문맹률이 78%에 달했던 상황에서 국가 운영과 유지를 위해 실무 부역자(공무원, 법조인 등)들과 군인, 경찰들은 울며 겨자 먹기 격으로 등용해야 할 수밖에 없었다.(이는 타 식민지 국가들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국가 운영에 써먹을 수 있는 사람 대다수가 친일부역자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이승만의 친일파 청산 실패가 진짜로 비판받아야 하는 이유는 노덕술, 박종표(신상묵의 부하로 김주열의 시신을 유기해 3.15 의거의 단초를 제공한 인물이다)처럼 없어도 국가 운영에 아무 지장이 없고 있으면 오히려 해만 될 자들까지 모조리 면벌부를 주며 등용했다는 것이다.[33] 역대 한국 대통령들 가운데 어느 누구도 해군을 동원해서, 더구나 발포까지 하면서 독도 영해로 넘어오는 일본 어민들을 체포해서 잡아가두는 초강수를 둔 사람은 없었다.[34] 월간조선에 인용된 이른바 '왜관성명'으로, 한국일보 기자 출신인 박실(朴實) 전 의원의 《벼랑 끝 외교의 승리》(청미디어)에 따르면 부산에서 육군병원에 문병 갔다가 한국어를 잘 못하는 부상병을 발견했는데, ‘일본에서 온 군인들이라 그렇다’는 설명에 미국이 자신도 모르게 일본 군인을 참전시킨 것이라고 오해한 이승만이 “미국이 일본인을 미군에 넣어 참전시켰는데, 우리는 공산군과 싸우던 총부리를 일본으로 돌려 싸우겠다”고 한 발언이 저렇게 전해진 것이다. 나중에 가서 그 부상병은 일본 군인이 아니라 교포(자이니치) 출신 의용병임이 밝혀졌지만, 당장 북한군을 코앞에 둔 상황에서 일본군이 미군에 끼어 한국 땅에 와 있다는 오해만으로 저런 반응을 보였을 정도니 이승만의 반일 감정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하고도 남는다. #[35] 창작과비평사/ 1988년/ 370쪽[36] 자세한 것은 식민주의/영향 문서 참조.[37] 강준만 <한국 근대사 산책>2, 창작과비평사. 정작 이승만 본인이 반민특위를 억지 해산시켜가며 친일파들에 대한 제대로 된 처벌은커녕 오히려 정부 요인으로 중용한 것을 생각하면 이종찬에게 행한 것은 빼도박도 못할 이율배반이고 내로남불이다. 정작 이종찬 본인은 할아버지의 친일 행적으로 고위 귀족이 되고 일본군 장교로 있으면서 가문의 작위를 세습하기를 거부했고, 해방 뒤에는 "일본군에 부역한 내가 무슨 염치가 있느냐"며 공직에서 물러나 친일 행적에 대해 반성하고 자숙하는 모습을 보였던 인물이다.[38] 『6.25와 李承晚 : 프란체스카 亂中日記』, 耆婆郞, p. 379-381[39] 이처럼 이승만의 강경한 반일은 위에서 기술된 것처럼 강대국 틈바구니 속에 끼인 한국이 강력한 국가가 되어야만 동아시아 전체에 평화가 유지될 수 있다는 군사지정학적인 신념이 그 밑바탕에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심지어 말년에 하와이유폐된 후, 경제 개발을 위해 일본과의 관계를 개선하려는 박정희 정부에도 부담이 되어서 환국이 불허됬을 정도로 죽을 때까지 반일을 고집하였다.[40] 강준만 저/ 한국 현대사 산책 1950년대편 2권 261~264쪽[41] 강준만 저/ 한국 현대사 산책 1950년대편 2권 166쪽[42] 당시 미국 국무부 내부에는 한국을 희생해서라도 일본의 세력 팽창을 이루어내려는 친일 성향의 미국인 관리들이 상당히 많았다. 이승만의 국제 정세를 보는 안목이 굉장히 뛰어났음을 보여주는 증거.[43] 강준만 저/ 한국 현대사 산책 1950년대편 2권 270쪽[44] 중화민국과 일본은 1954년에 중일전쟁에 대한 강화조약을 체결해 외교관계를 회복했고, 장제스는 2차대전 승전 후 친일 세력을 강경하게 처벌한 것과는 달리 대만으로 피난간 이후에는 현지의 식민 체제 협조 세력에 대해 온건하게 대해준 편이다.[45] 강준만 저/ 한국 현대사 산책 1950년대편 2권 271쪽[46] 강준만 저/ 한국 현대사 산책 1950년대편 3권 236쪽[47] 이승만 집권기의 한국은 미국이 경제 원조를 끊으면 당장에 나라가 망할 만큼 경제 사정이 매우 부실했다. 그런 상황에서도 이승만은 미국의 제안을 거부했을 만큼, 반일 신념이 무척이나 강했던 것이다.[48] 이승만이 "공산당이었다면 부모 형제라도 용서하지 말고 처단해야 할 것이다."라는 말을 남겼을 정도로 극도의 반공주의자였다는 것을 감안하면, 비록 돕기 위한 목적이라 하더라도 일본군이 한국에 들어온다면 그렇게나 증오하던 공산당에게 지는 한이 있어도 일본부터 쫓아내겠다고 말한 이승만이 얼마나 일본을 진심으로 증오했는지 알 수 있다.[49] 심지어 이 자는 '이승만의 양자' 소리까지 들을 정도로 이승만의 최측근이었다.[50] 반민특위 해체 후 고향에서 국회의원으로 당당히 당선되었다가 교통사고로 죽었다.[51] 다만 모든 친일반민족행위자가 이승만을 지지한 것은 아니다. 주요한경향신문에 이승만 정권을 비판하는 칼럼을 싣다가 걸려서 경향신문이 폐간당할 정도였고, 박중양은 이승만을 비난하다가 정신병원에 끌려갔다. 간도특설대 출신 최남근은 아예 남조선로동당에 가담했다가 처형당했다. 이승만 관련은 아니긴 하나 신상묵은 유신 반대 운동을 하다가 수감된 바가 있으며, 이협우 역시 반유신 활동을 한 것으로 보인다.[52] 해외에서도 소급입법금지의 예외를 규정하는 경우는 꽤 있다. 가령, 남미의 경우 군사 독재 관련 과거사에 관해서는 소급입법의 예외로 둔 사례가 있으며 그 옛날 나치 문제, 기타 전쟁 범죄의 경우도 문제가 발생한 당시의 당사국에서는 처리가 곤란한 문제인 바 소급입법의 예외로 규정하곤 한다.[53] 사실 일각의 단편적인 이해와 달리 북한 역시 최승희, 황철, 문예봉 등 친일 경력이 있더라도 자신들의 정권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되는 인물들은 기용했다.[54] 그나마도 민간의 움직임이었지 국가적 움직임은 없었고 친일인명사전도 여야간 정치적 수단으로 악용되는 등 수많은 난항을 겪었다.[55] 미국이 제거를 실제로 실행하지 못한 이유도 이승만에 대한 한국인들의 지지도가 워낙 높아서 제거했다간 역효과만 날 것 같아서였다.[56]존 하지는 문제가 많았는데 캘리포니아 주립대의 제임스 매트레이 교수는 미국이 그를 미군정 사령관으로 임명한 건 실책이었으며 그는 한국의 역사나 한국인에 대해 아는게 아무것도 없었고 행정경험도 없었기 때문에 정부조직을 이끄는 일에 문외한이었다고 평했다.[57] 독립운동가 폄하, 일본 제국의 전쟁범죄 부정, 반일 민족주의 혐오, 식민지 근대화론(정확히는 식민지 시혜론) 주장 등 종일(從日)의 모습을 보이면서도 반일의 대표격인 이승만을 '건국 대통령'으로 찬양하는 심히 모순적인 행각을 보여주고 있다. 뉴라이트 인사들이 2019년에 공동저술한 책인 반일 종족주의에서는 한국의 반일 정서가 1980년대에 들어서 생겨났다거나 혹은 좌파들이 만든 것이라고 서술하고 있으나 이는 이승만의 사례만 봐도 얼마든지 반박이 가능한 허황된 주장이다. 1950년대를 쭉 집권했던 이승만 정부 당시 있었던 평화선 선포 같은 정책이나, 이승만 개인이 강경한 반공주의자이면서 반일 민족주의자였다는 사실만 봐도 뉴라이트의 주장은 터무니없는 정치적 진영 논리에 불과한 것을 알 수 있다. 뉴라이트 인사들 중 일부는 심지어 한국의 독도 영유권을 부정하거나 한국이 독도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 불법이고 저급한 반일 민족주의의 상징이라고 비난을 하기도 하는데 그 주장대로라면 평화선을 선포하고 해군까지 동원해 일본 어민들을 체포, 사살하면서 독도를 지킨 이승만은 불법으로 독도를 점거한 저급한 반일 민족주의의 상징이 되어버린다.[58] 실제로도 뉴라이트가 이승만 외의 다른 독립운동가들을 폄하하는 것과 북한이 김일성 외의 다른 독립운동가들을 폄하하는 것, 그러면서 온전히 이승만/김일성만의 노력으로 한반도가 독립할 수 있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놀라울 정도로 비슷하다.[59] 심지어 이승만 집권기인 1956년에 '건국대통령의 창업'이라는 국책영화가 만들어진 바가 있다.[60] 물론 이는 정부 수립과 건국을 별 구분 없이 혼용했던 거에 더 가깝다. 실제로 2006년 건국절 논란이 처음 제기될 때까지 그래왔다.[61] Prime Minister의 준말[62] 영부인이 쓴 사료기 때문에 신뢰성에 관해 정치적으로 논란이 되기도 하나 귀중한 역사적 사료임.[63] 정일권 <전쟁과 휴전> 86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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