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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05-12 21:52:20

이승만/평가/논란이 있는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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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독립운동가로서
2.1. 긍정적 평가
2.1.1. 개괄2.1.2. 대한민국 임시정부 승인 노력
2.2. 부정적 평가
2.2.1. 다른 독립운동가들과 빚은 갈등2.2.2. 독립운동 자금 횡령
2.3. 반박
2.3.1. 다른 독립운동가들과 벌였던 갈등?2.3.2. 안전한 미국에서 호의호식했다?
3. 징병제
3.1. 긍정적 시각3.2. 부정적 시각
4. 이승만이 친일파라는 주장
4.1. 긍정4.2. 부정
4.2.1. 일관된 반일 행보4.2.2. 강경한 반일 정책과 발언들
5. 미국의 앞잡이?6.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에서 이승만의 주도성 논쟁
6.1. 부정론6.2. 긍정론
7. 정부 수립과 건국 (이승만 국부 주장)8. 일본 망명 루머

1. 개요

대한민국 제1~3대 대통령 이승만에 대한 논란이 있는 평가를 작성하는 문서이다.

2. 독립운동가로서

2.1. 긍정적 평가

2.1.1. 개괄

이승만은 김구가 이끄는 국민의회(國民議會)[1]가 이승만을 대한민국 임시정부 마지막 주석으로 추대하고#, 여운형과 공산주의자 박헌영도 이승만을 조선인민공화국 주석으로 추대했을 정도로 거물급 독립운동가였다.#

독립운동 시기 이승만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주석직을 맡지 않아서 평가절하 되는 경향이 있는데, 이승만은 초기부터 광복 직후까지 매우 명망 높은 독립운동가였다.[2]
1945년 10월에 시행된 여론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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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 후보에 가장 적합한 지도자
- 선구(先驅) 여론조사 제2호 <내각의 적임자 조사>
후보 이승만 김구 여운형 모름
지지율 44.0% 30.0% 8.0% 18.0%
* 위 표는 잡지 선구(先驅) 1945년 12월호 p.45~51에 실린 정치지도자에 대한 여론조사 자료(편집인 安峰守, 발행인 高麟燦)를 바탕으로 만들었다. 여론조사는 1945.10.10 ~ 11.09 기간 동안에 시행되었다.
출처 및 참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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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승만입니다. 미국 워싱턴에서 해내, 해외에 산재한 우리 2,300만 동포에게 말합니다. 어데서든지 내 말 듣는 이는 자세히 들으시오. 들으면 아시려니와 내가 말한 것은 제일 긴요하고 제일 기쁜 소식입니다. 자세히 들어서 다른 동포에게 일일이 전하시오. 또 다른 동포를 시켜서 모든 동포에게 다 알게 하시오. 나 이승만이 지금 말하는 것은 우리 2,300만의 생명의 소식이요, 자유의 소식입니다. 저 포악무도한 왜적의 철망, 철사 중에서 호흡을 자유로 못하는 우리 민족에게 이 자유의 소식을 일일이 전하시오. 감옥 철창에서 백방 악형과 학대를 받는 우리 총애 남녀에게 이 소식을 전하시오. 독립의 소식이니 곧 생명의 소식입니다.

왜적이 저의 멸망을 재촉하느라고 미국의 준비 없는 것을 이용해서 하와이와 필리핀을 일시에 침략하야 여러 천 명의 인명을 살해한 것을 미국 정부와 백성이 잊지 아니하고 보복할 결심입니다. 아직은 미국이 몇 가지 관계로 하야 대병을 동하지 아니하였으매 왜적이 양양자득하야 온 세상이 다 저희 것으로 알지마는 얼마 아니해서 벼락불이 쏟아질 것이니 일황 히로히토의 멸망이 멀지 아니한 것을 세상이 다 아는 것입니다.

우리 임시정부는 중국 중경에 있어 애국 열사 김구, 이시영, 조완구, 조소앙 제씨가 합심 행정하야 가는 중이며, 우리 광복군은 이청천, 김약산, 유동열 등 여러 장군의 지휘하에서 총사령부를 세우고 각방으로 왜적을 항거하는 중이니, 중국 총사령장 장개석 장군과 그 부인의 원조로 군비·군물을 지배하며 정식으로 승인하야 완전한 독립국 군대의 자격을 가지게 되었으며, 미주와 하와이와 멕시코와 쿠바의 각지의 우리 동포가 재정을 연속 부송하는 중이며, 따라서 군비·군물의 거대한 후원을 연속히 보내게 되리니, 우리 광복군의 수효가 날로 늘 것이며 우리 군대의 용기가 날로 자랄 것입니다. 고진감래가 쉽지 아니하나니 37년 간을 남의 나라 영지에서 숨겨서 근거를 삼고 얼고 주리며 원수를 대적하던 우리 독립군이 지금은 중국과 영·미국의 당당한 연맹군으로 왜적을 타파할 기회를 가졌으니 우리 군인의 의기와 용맹을 세계에 드러내며 우리 민족의 정신을 천추에 발포할 것이 이 기회에 있다 합니다.

우리 내지와 일본과 만주와 중국과 서백리아 각처에 있는 동포들은 각각 행할 직책이 있으니 왜적의 군기창은 낱낱이 타파하시오. 왜적의 철로는 일일이 타상하시오. 적병의 지날 길은 처처에 끊어 버리시오. 언제든지 어데서든지 할 수 있는 경우에는 왜적을 없이해야만 될 것입니다.
이승만은 국외에서 이름이 알려진 독립운동가 중 한 사람으로서 노선으로서는 외교 독립론을 견지했다. 이승만은 한국 독립에 영향을 주는 여론을 미국 내에서 만들었고, 그가 미국 내에서 지지를 쌓아갈 때 태평양 전쟁이 시작되자 한국에 무지했던 미국 내에서 한국 독립에 대한 처리에 영향을 주는데 기여를 하였다.

외교 독립 노선이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성과가 없는 것도 아니었다. 외교 독립 노선이 성과가 없었다고 주장한다면 같은 잣대로 따졌을 때 무장 투쟁도 성과가 없었던건 어차피 마찬가지다. 무장 투쟁이 성공했다는 평가를 들으려면 무장 투쟁으로 한국이 일제에 결정적인 타격을 입히기라도 했어야 한다. 이승만이 다른 독립운동가들과 극심한 갈등을 일으켰다는 말도 궁색한 게, 이 시기 서로 안 싸운 개인/단체는 없다시피 했으며 오히려 무장투쟁 독립운동가끼리 암살과 총질까지 해대는 판국이었다.

애초에 광복은 일본 제국주의의 패망과 더불어 외교론, 무장 투쟁론, 실력 양성론 등 여러 독립운동 노선의 성과가 복합적으로 나타난 결과이다. 임시정부의 노선 역시 외교론에 무장 투쟁 노선을 결합한 형태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1941년 '일본 내막기'라는 책을 저술해 일본에 대해 순수한 시각을 갖고 있었던 미국인들에게 일본 제국주의의 위험성을 알렸다.[3]

3.1 운동이 벌어지자 이를 미국에서 대대적으로 선전한 것도 이승만이었다. 그 이전 대한제국 시절이던 1898년 4월에는 매일신문이라는 한국 최초의 민간 일간신문[4]을 양홍묵, 유영석과 함께 창간했다. 순한글 신문이었으며 민족의 대변지로 한글신문시대에 기여하였고, 외세에 저항하는 한국 신문의 전통을 확립하는데 선구적인 역할을 했으며 제국주의 열강의 이권요구와 횡포에 대해 가차없이 비판했다.# 후에 제국신문도 창간했다.

그리고 105인 사건이 벌어지자 미국 각지를 돌며 '조선에서 저렇게 일제에 의해 기독교인들에 대한 핍박이 이어지고 있는데 기독교 국가라는 미국은 왜 가만히 있느냐. 조선을 도와야한다'라며 미국내 여론 조성을 했다.

이승만은 미국의 대통령과 정부 관료들을 비롯한 고위층들과 지속적으로 접촉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승인을 받기 위해 노력했으며, 파리 강화 회의, 국제연맹 총회, 워싱턴 군축회의 등 각종 국제회의에서 국제사회의 지지를 이끌어내기 위해 한국의 실상과 독립 문제를 알렸다.

태평양 전쟁이 터지자 미국내에서 한국인들은 일본인과 같은 적성국민 취급을 받았는데 이승만이 미 법무장관 프랜시스 비들에게 미국내 한국인을 일본인과 동등하게 대우하지 말것을 요구하여 실제로 비들은 1942년 2월 9일에 "외국인등록법에 따라 등록한 한국인 가운데 자의로 일본 국적을 취득하지 않은 사람에 한해 적성국 외국인에 가해지는 규제에서 특별 면제한다"고 발표하였다. 이승만 덕분에 미국 내 한국인들이 보호를 받은 것이다.

그리고 항일단파방송 사건 등에서 드러나듯이 한국어 방송을 직접 진행하면서 태평양 전쟁에서 일제가 패망해가는 전쟁 상황을 고국의 동포들에게 전달하고 독립 운동을 독려했다. 또 미국 국무부에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승인을 요청한 것도 이승만이며, 한국인들을 연합군에 편입시켜 대일전쟁을 수행하도록 하여 독립권을 얻어내려고 했다.

이승만은 미국육군전략사무처(OSS)의 굿펠로우 부국장을 만나서 한인 특공대원들을 훈련시켜 한반도에 잠입시키는 게릴라전 계획도 추진했다.

결론적으로 이승만은 일제의 핍박을 받던 우리나라의 독립을 위해 누군가 반드시 해주어야 할 외교 활동을, 자신에게 주어진 상황에서 흔들리지 않고 실천했다. 총칼을 드는 것 역시 독립운동이지만, 교육이나 언론 등의 수단으로, 혹은 외교적 방법으로 외국에서 일제의 침략을 알리고 주권 회복을 위해 일하는 것도 독립운동이다. 이승만은 두 번째와 세 번째 케이스로, 기회주의적인 모습을 보였던 일부 인물들과 달리 끝까지 변절하지 않고 독립운동을 수행했다. 괜히 김구와 함께 해방직후 독립운동의 거두로 대표되는 것이 아니었다.

2.1.2. 대한민국 임시정부 승인 노력

1943년 5월 15일 이승만은 미국의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대략 다음과 같은 내용의 서한을 보냈다.
이제야말로 미국이 지난날 한국에 행한 잘못을 바로잡을 때다. 1905년과 1910년에 일본이 한국을 병탄하도록 도움으로써 1882년에 맺은 조미수호통상조약을 위반한 건 미국이다. 일본이 대한제국을 멸망시킨 것을 시작으로 팽창을 거듭한 결과가 진주만 공습으로 이어졌고 결국 미국은 막대한 병력과 비용을 낭비하게 되었다. 서양 정치인들이 일본의 팽창주의를 억제할 수 있는 것은 한국이 유일하며 독립된 한국이 동양 평화의 보루라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한데서 비롯된 일이다. 그런데 아직도 미국은 임시정부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 소련이 종전 후 한국에 '소비에트 조선 공화국'을 수립한다는 소문이 들리는 상황에서 그들의 극동 진출을 막고 현재의 대일 전쟁도 성공적으로 마무리하기 위해서는 미국이 당장 임시정부를 승인하고 한국인들을 대일 전쟁에 참전시켜 실질적으로 미국을 도울수 있게 해야한다. #
미국이 일제의 위험성을 알지 못하고 일제가 대한제국을 멸망시키는 것을 가만히 둔 결과가 진주만 공습으로까지 이어지고 그 결과 미국은 수많은 병력과 전비를 낭비하게 됐음을 지적하는 이 서한은 이승만의 국제적 통찰력을 잘 보여준다. 그러면서 독립된 한국만이 동양 평화의 보루임을 지적하며 일본소련을 견제하기 위해서 임시정부를 인정해 줄 것을 설득하고 공식적으로 태평양 전쟁에 참전하게 해야한다고 얘기했다.

위는 대표적인 예시일 뿐 이승만은 이 서한에서뿐만 아니라 평소에도 미국이 1882년의 조미수호통상조약을 어겼다는 점을 상기시키는 등 최대한 할 수 있는 여러 방법으로 루즈벨트와 미 국무부를 압박했다.[5] 임시정부는 결국 국제적 승인을 받지는 못했으나 이승만은 이렇게 백방으로 한국의 독립을 위해 노력했다. 이외에도 이승만은 미국내에서 자신이 가지고 있는 하버드, 프린스턴 인맥과 고위직 네트워크를 최대한 활용하려 했고 그가 미국의 이너 서클에 들어가려고 노력한 것도 이때문이다. 미국 내 여론전을 위해 엘리트 미국인들로 이루어진 한미협회도 발족시켰다. 이승만이 아니라면 당시 한국인들 중 이정도로 미국의 최고위급들과 연결될 수 있는 사람도 없었다.

2.2. 부정적 평가

독립운동시기부터 임시정부 대통령에서 결국 탄핵되는 등 부정적으로 여기는 사람들이 많았다. 또한 외부에서 보았을 때도 위선적인 면이 보여 부정적이었다.
이승만은 사적인 권력욕을 채우기 위해 독립운동을 했다. 이 목적을 추구하며 그는 자신의 출세를 위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CIA, 한국 생존의 전망(1948.10.28.) - 첨부파일A(이승만의 인격 부분)
민족문제연구소를 포함한 국내의 진보 진영에서는 그의 독립운동가적 자질이 의심을 받고 있다.

아래 독립기념관장 김삼웅이 쓴 <이승만 평전>에서 그의 독립운동 행적에 대한 비판을 보도록 하자.
1904년 8월 9일, 러일전쟁 와중에 일본 공사 하야시의 도움으로 한성감옥에서 석방되었다.


"장ㆍ전의 스티븐스 저격 사건이나 안중근의 이토 히로부미 총격 사건은 국가의 명예를 손상시킨 살인범이고, 일본과 같은 강국과 군사적으로 대치하는 것은 불가능한 꿈"이라는 망언을 서슴지 않았다.


이승만은 1912년 11월 18일 자 《워싱턴 포스트》회견에서 "지난 3년 사이에 한국은 전통이 지배하는 느림보 나라에서 활발하고 웅성대는 산업 경제의 한 중심으로 변했다"며 일제의 식민 지배를 사실상 옹호하는 발언을 일삼았다.


1913년 하와이에서 강연 중 "청일전쟁 시 각국 군사들은 행위가 부정하여 그 나라 국기의 빚이 다들 흑암한 추태를 입었으나 오직 일본 군인은 행위가 단정하여 일본의 태양기는 광명한 일광을 받아 공중에서 기색이 늠름하게 휘달렸다"는 믿기지 않은 일제 찬양 발언을 했다.


이승만은 1915년 《홀놀룰루 에드버타이스》지에서 "나는 한국은 물론 하와이에서도 혁명운동을 꿈꾼 적이 없다"고 주장했다.


이승만은 1915년 《홀놀룰루 스타블렌턴》지에서 "우리는 어떤 반일적인 내용도 가르치지 않는다. 정반대로 우리는 전 인류를 사랑하라는 기독교 원리를 가르치고 있다. 나는 우리 백성들 가운데서 어떤 반일 감정도 일으키길 원치 않는다"고 발언했다.


이승만은 1919년 일본 '천황'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만약 한국에 자유를 준다면 일본에 감사하고 우정을 느낄 것이고, 만약 우리의 요구를 거절한다면 일본은 정복자로서 불신과 멸시를 받을 것"이라는 '굴욕적인' 언행을 보였다.


이승만은 1922년 9월 하와이 귀환 기자회견에서 "대일전은 불가능하며 새로운 총독이 많은 개혁을 단행해 한국인들의 성원을 얻고 있다"는 망언을 거듭했다.이 밖에도 이승만의 대일 관련 망언은 수없이 많다.


최고 수훈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되어 훈장을 받기에는 그의 행적에 미심쩍은 점이 적지 않았다. 이승만은 독립운동가가 아니라 현실감각이 무딘 외교관이나 기독교 선교사라 해야 어울린다.
김삼웅, 이승만 평전(개정판), 두레, 2020, 129~130쪽.

이승만의 독립 운동 활동과 관련해 다음과 같은 비판이 있다.
미국에서 교포들 모아놓고 연설이나 하고 미국 대통령에게 진정서나 올리고 한 게 독립 운동이 되는 건가요? 똑바로 말해 그 사람들 독립 운동 때문에 우리가 독립된 거요? 독립 운동 했다는 거 말짱 엉터리요, 엉터리.
박정희 #[6]

2.2.1. 다른 독립운동가들과 빚은 갈등

박용만과의 하와이에서의 대립,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의 대립과 위임통치 청원 문제 등 꾸준히 이어졌다. 또한 상술했듯이 도산 안창호 선생과 대립 후 '이승만 친위대'라 불릴만한 동지회를 결성 기존 미주 한인 사회의 대한인국민회와 많은 갈등을 빚었다.
이승만은 미국에 충성하는 자기의 행동을 늘 정당화시켰다. 안창호, 박용만 그리고 김규식을 미군 정보당국과 민간 첩보기구에 급진적인 볼셰비키 공산주의자라고 보고했다.
<박용만 평전>
FBI보고에는 또 1931년의 문서를 인용하여 이승만이 박용만을 '간통자, 착취자' 그리고 나중에 '일본 밀정'으로 중상모략한 일이 있다.
방선주, <재미한인의 독립운동>, 1989, 89쪽

1924년 가을, 안창호는 미국 입국을 위해 상하이 주재 미국영사에게 입국비자를 신청하였으나 거절당했다. 서재필에게 알려 스펜서(Spencer) 상원의원을 통하여 미 국무성에 교섭한 즉, '워싱턴에 주재하고 있는 한인지도자가 안창호를 공산당원이라고 하였기 때문에 비자를 줄 수 없다.'라는 회답을 받았다.

1923년 1월의 일본 정보문서 또한 '이승만이 미국으로 돌아가 안창호를 공산주의자라고 선전하였기에 안창호의 미국에서의 신용은 추락하였다'고 본국에 보고하고 있다.[7] 그리고 이승만은 한길수, 김원봉, 김규식 등을 공산주의자로 몰아부쳤다.[8]
판사님! 이들은 박용만 패당이며, 미국 영토에 한국인 군대를 만들었습니다. 이들은 위험한 반일 행동을 하며, 일본 군함 이즈모가 호놀룰루에 도착하면 파괴하려는 음모까지 꾸민 무리들입니다. 이것은 미국과 일본 사이에 중대 사건을 일으켜 평화를 방해하려는 것입니다. 판사님. 저들을 조처해 주십시오!
이승만, 하와이 법정 증언에서

이승만은 미주에서의 박용만과 패권 싸움을 하는데 조직력을 낭비하고 그가 일구어 놓은 조직을 가로챈 점 등은 비판 받을 만한 행보다. 후에 조직을 빼앗긴 박용만 측에서 하와이에 정박해 있는 일본 순양함 이즈모 폭파 논의가 일어난 것을 두고 법정 같은 공개된 장소에서 폭로하였다. 이승만의 밀고는 "신한민보"와 "(국민회)공고서", "재미한인오십년사"(김원용)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2.2.2. 독립운동 자금 횡령

첫째, 하와이의 동포들이 공동 결의로서 임시정부에 직접 납입하려고 한 인구 세금을 중간에서 가로채 유용하고, 정부에서 임명한 세금 징수 사무를 맡아서 처리하는 징세 위원을 불법으로 처벌하였다.
둘째, 대통령에 위임 발행한 외국 공채의 수입도 거의 전부 유용하고 심지어는 수지보고조차도 하지 않았다.
셋째, 본래의 임무인 외교와 선전에 관해서도 하등의 볼 만한 성적이 없을 뿐만 아니라 또한 일편의 보고도 하지 않았다.
1925년 3월 10일 임시정부가 구미위원부 폐지를 의결하면서 주장한 부정, 비리 사항
# #

그가 주관하던 구미위원회는 밑에 파리통신부를 두고 외교업무를 직접 관장하였을 뿐만 아니라, 미국 동포의 인구세와 애국금까지 독점하는 등 임시정부 업무를 전횡하여, 대통령의 독주라는 비난을 받았다. 그 이전부터 임정으로 가게 되어 있던 재미 한인들의 독립성금을 멋대로 횡령해 개인 용도로 쓴 건 덤. 1924년 상해 임정 개혁파가 이승만 대통령을 탄핵하고 난 후에는 임정으로 보내던 소규모의 독립운동자금마저 끊어버렸으며, 결국 구미위원회는 이승만이 탄핵된 뒤 1928년 해체되었다.

2.3. 반박

2.3.1. 다른 독립운동가들과 벌였던 갈등?

위임통치 청원 사건에 대해서도 신채호는, '이완용은 있는 나라를 팔았는데 이승만은 없는 나라마저 파는구나'라고 비난했으나 이것도 비약이 대단히 심한 비난이며, 이승만이 했던 청원의 내용은 "한국의 완전한 독립을 보장한다는 조건하에 일본의 통치로부터 한국을 해방시켜 국제연맹의 위임통치 아래 두는 조치"였지 나라를 판다거나 타국의 식민지가 되는게 아니었다. 게다가 이건 이승만 뿐만 아니라 김규식이나 안창호 등 다른 독립운동가들도 유사하게 가지고 있던 구상이었다. 현대의 사람들 중에서도 이런 신채호의 시각을 일방적으로 추종하는 경우가 있는데 신채호의 저런 주장은 그가 국제정세와 국제법에 대해 제대로 아는게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치 이승만을 제외한 나머지 독립운동가들은 똘똘 뭉쳐있었는데 이승만이 분탕을 쳐서 '이승만 VS 나머지'의 갈등이었던 것처럼 사람들이 착각하곤 하지만 실제론 이승만과 상관없이 당시 임시정부를 비롯한 독립운동가들은 항상 분열되어 있었고 온갖 파벌로 나뉘어 싸우고 있었다. 당장 박용만누구에게 암살당했는지 생각해보라. 심지어 한길수는 독립운동을 한다는 사람이 미국이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승인하지 않도록 공작을 벌였으며, 김원봉도 임시정부 해체 운동을 벌인 바가 있다.[9] 분열이나 분탕이라는 것은 그 사람만 아니면 안정적으로 뭉쳐져 있을 때나 쓸 수 있는 표현이다. 모두가 사분오열인 상황에서 특정인만 분열자로 프레이밍 하는 것은 비합리적이다.

어떤식으로 독립을 해야하는가에 대한 노선 차이와 사상의 차이는 있을 수 밖에 없는 것이고 거기서 오는 갈등이라는건 혼자서 일어나는게 아니라 상호간에 일어나는 것이다. 서로 다른 노선과 사상에서 오는 갈등이 이승만에 대한 비판거리가 된다면 반대로 이승만과 갈등을 빚은 상대 독립운동가도 갈등을 빚은 것에 대해서 똑같은 비판을 받아야 할 것이다. 이승만이 누군가와 패권 싸움을 하는데 조직력을 낭비했다고 비판한다면 같은 논리로 그 상대에 대해서도 이승만과 패권 싸움을 하느라 조직력을 낭비했다고 비판할 수 있다. 상호간에 갈등을 빚었는데 그게 마치 이승만의 잘못이라는 일방적 비판은 이승만은 악이고 상대는 선이라는 정답을 정해놓고 얘기하는 이중잣대에 불과하다. 게다가 앞서 얘기했듯이 이승만이 아니어도 원래 분열과 파벌 싸움이 일상이었으며, 독립운동가들의 노선 갈등과 파벌 싸움은 한국뿐만 아니라 식민지배를 당한 다른 국가들에서도 흔히 볼 수 있던 일이었다.[10]

신채호는 분명히 위임 통치안정한경에 의해 초안이 작성되고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장 안창호의 정식 결의를 얻었으며, 이승만 뿐 아니라 김규식도 같은 문서를 각국에 발송되었다는 것을 모를리가 없었다. 즉, 그는 거짓 모함을 한 것이거나 아니면 잘 모르면서 저런 발언을 한 셈이다. 그러나 현순의 자서전인 현순자사(玄楯自史)를 보면 대강 왜 신채호가 저런 발언을 했는지 알 수 있는데, 임시정부에서 자신이 조소와 조롱거리로 놀림을 받은 것에 대한 악감정이 남아있던걸로 보인다.[11]
현안인 임시정부를 조직할새 2종의 숨겨진 흥미로운 일(逸事)이 있으니, 하나는 유위(有爲)의 청년들이 권총 목봉(木棒)들을 가지고 와서 한쪽은 회중을 보호하며 또 한쪽은 회중을 위협하여 공정한 조직을 개최한 것이오, 다른 하나는 신채호총리로 추천된 인사 즉 이승만, 박영효, 이상재 등을 반대하고 박용만을 천하니 그때 청년 중에서 현창운이 웃기려고 신채호를 추천하매 회중이 큰 소리로 웃자(齊聲大笑) 신씨가 노하여 자리를 떴다. 신씨가 이승만을 반대한 것은, 그 이유가 박용만이 신성에게 이승만이 위임 통치를 미국 정부에 청원하였다고 전보한 때문이었다. 그러나 당시 형세는 내외지를 막론하고 인심의 촉향이 오직 이승만에게 폭주하였었다.

2.3.2. 안전한 미국에서 호의호식했다?

이승만이 상해임시정부의 독립운동 자금을 횡령하여 그걸로 좋은 옷 사고 스테이크 썰면서 "안전한" 미국에서 사치를 부리며 호의호식했다고 비난을 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지나치게 편향적인 시각이다.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이승만이 재산도 없이 홀로 미국에 갔는데 무슨 돈이 나서 거기서 생활을 하냐?"라고 하지만 이승만은 미국 각지의 학교교회, 지역단체들에서 강연비를 받고 강연을 하며 돈을 벌었다. 그리고 현지 교민들로 이루어진 후원회와 개별적으로 이승만을 도와주는 미국인 후원자들도 있어서 이들이 이승만의 활동비를 지원해주기도 했다.

그리고 "안전한" 미국에서 활동했다며 공격하는 것은 공격을 위한 공격이라고 밖에 할 수가 없다. 독립운동의 목적은 조국의 독립이지 누가 더 열악한 곳에서 활동했나를 겨루는게 아니다. 당시 전세계 최고 강대국이자 동아시아에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 할 수 있는 나라가 미국이었다. 동북아에 가장 큰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나라에서 독립운동을 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그리고 저런 공격을 하는 세력들은 똑같이 미국에서 활동한 박용만이나 유일한 또는 프랑스에서 활동한 서영해 등에 대해서는 같은 공격을 하지 않는다는 점도 의아한 부분이다. 심지어 의열단은 중국 내에서도 잘 노는 생활로 유명했다.

이렇듯 중국에 있던 독립운동가들은 마치 일제강점기 수십년간 일체의 여가도 없이 산 줄로 생각하는 것도 하나의 착각이다. 이승만 또한 미국에서 현지 동료들과 또는 미국 지식인들과 만나서 일상적인 교우관계를 갖는 것을 두고 마치 엄청난 사치라도 한 것인양 호의호식이라고 표현하는건 다분히 의도적인 비난에 불과하다. 외국 사례만 봐도 동티모르조제 하무스오르타[12]도 이승만과 판박이로 미국, 유럽 등 안정된 장소에서 독립운동을 했는데 하무스오르타가 동티모르의 수많은 국민들이 무장독립운동에 나서며 10~20만 명인도네시아에게 학살당하는데 서양에서 별다른 목숨의 위협도 느끼지 않으며 편하게 수십년간 꿀빨았다고 비난하는 경우는 전혀 없다.

'이승만의 조직은 안창호의 국민회를 테러하여 자금을 탈취했다'는 주장도 있는데 이것도 여러 왜곡이 섞여 있다. 일단, 샌프란시스코에 있던 안창호의 국민회가 아니라 하와이에 있던 하와이 국민회였으며 테러를 하여 자금을 탈취한게 아니라 하와이 국민회가 회관 건축비를 유용했기 때문에 이승만이 그것을 문제 삼아 하와이 국민회 김종학 회장을 파면시켰던 것이다.

3. 징병제

3.1. 긍정적 시각

아래 부정적 시각의 문단에서처럼 수십 년 간 한국 남성들이 이승만 때문에 징병제로 고통받았다는 주장을 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것은 대단히 논리적 비약이 심한 억지다. 징병제는 김일성이 일으킨 6.25 전쟁 때문에 생긴 것이지 이승만 때문에 생긴게 아니다.

그리고 군대가 환경이 좋고 군인 대우가 좋으면 모병제로도 충분해서 징병제가 필요없다는 주장도 1960년에 임기가 끝난 이승만과는 무관한 얘기다. 오히려 문재인 정부 이전까지 병사의 월급이 역대 가장 높았던 정부가 이승만 정부였다. 병장준장 월급의 10%를 받았으며, 이는 기본급 기준 2020년에 들어서야 다시 달성하게 된다. 정부 수립 이후 72년의 시간이 지난 뒤였다. 일본 자위대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모병제가 된다고 반드시 군에 대한 대우가 좋아지는 것은 아니다. 군인에 대한 대우와 똥군기는 징병제와는 전혀 별개의 문제이며, 단순히 모병제로 바뀐다고 군인에 대한 대우가 좋아질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대단한 오산이다.

심지어 군인에 대한 대우가 좋다고 평가받는 미군조차도 이라크 전쟁 이후로는 지원자가 없어 인원수를 충당하기 위해 갱스터, 양아치, 경계성 지능 장애까지 모병해서 병사들의 질적 저하가 문제되고 있다. 또한 미군과 한국군을 비교하기도 힘든 것이, 미국은 이미 당시에 세계 1위 경제력을 자랑하던 국가였으며, 자국 군대를 넘어 유럽과 소련에게 물자 지원을 퍼줄 정도로 경제력이 넘사벽이었기에 병사들을 충분히 먹여 살릴 자본이 넘쳤지만, 정부수립 당시의 한국은 경제 전반이 빈약했다. 모병제조차도 나름의 문제점이 있으며, 모병제가 되었다고 무조건 징병제보다 낫다고 볼 수는 없다. 군인이란 직종은 목숨을 걸어야 한다는 점에서 이미 기피 직종이 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냉전이 끝난지 한참 지났고 이제서야 신냉전이 화두로 올라오는 2020년대의 상황을 20세기 중반의 냉전 시대와 비교하는 건 부적절한 것이다. 미국도 1973년까지 징병제를 굴렸고, 21세기에야 적화통일이라는 게 농담으로나 취급되는 이야기지만 20세기 중반에 그것은 정말로 현실적인 공포였으며, 임정의 최고 우방국마저 내전에서 패하여 영토 대부분이 공산화된 상황이었다. 막말로 옛 추축국철의 장막 코 앞에 있단 이유로 1956년부터 대규모 징병제를 굴려 NATO군 최전선을 탱킹해야만 했던 시대에, 한국전쟁으로 멸망할 뻔 했던 대한민국이 냉전 시대에 모병제로 자유진영 최전선을 탱킹하란 소리 자체가 판타지의 영역이다. 21세기 국군의 문제점은 '징병제라서' 있는 게 아니라 '징병제를 제대로 못 굴려서' 있는 것이고, 폐쇄성과 경직성, 낮은 처우 등은 모병제라고 해도 유사하게 일어났을 문제이다.[13]

오히려 징병제는 오히려 대한민국에 긍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1945년에 식민지에서 벗어난 이후 한국은 소수의 도시민들을 제외하곤 인구의 절대 다수를 차지하던 농촌 사람들은[14] 여전히 전근대적 구습과 가치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이들은 1950년대 실시된 징병제 아래 군대에서 처음으로 근대적인 생활양식을 배우고 근대적인 기계들을 다루는 기술도 배우고 글 읽는 법도 배웠다.[15] 박정희, 전두환 군사독재에 대한 부정적 인식 때문에 지금 우리는 군대라고 하면 왠지 구습의 상징 같은 시대에 뒤떨어진 곳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지만 1950년대 기준으로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징병제를 통해 전국 방방곳곳의 수많은 농촌 출신들이 근대화되었고 군대에서 배운 기술과 조직력, 협동심, 집단생활 경험은 1960년대의 경제발전에 긍정적으로 연결되었다.[16] 이러한 긍정적인 평가가 내려지는 데는 이승만이 군인 출신이 아니기 때문인 것도 한 몫 한다. 역으로 군인 출신인 박정희 때부터 나라 수준에 비해 군대는 더욱 열악해졌다.

3.2. 부정적 시각

1945년 광복 직후 미군정 시기에는 국군 창설을 준비하면서 의용병제 즉 모병제를 시행하였다. 그리고 이것은 1948년 정부 수립 이후에도 그대로 이어져서, 당시는 개별 부대의 지휘관들이 주둔지 부근 지역을 돌면서 청년들에게 입대를 권유하는 식으로 모병을 하였다.[17] 그러다가 1949년 8월 6일 병역법을 공표하면서 국민개병제, 즉 징병제를 도입하였고, 행정적인 준비를 거쳐서 그 다음해인 1950년 1월 6일에는 최초로 전국적인 징병검사를 시행하였다. 그러나 당시 국가재정을 전적으로 미국의 원조에 기대고 있던 상황에서 미국이 "국군 10만명 제한", "그 이상의 원조는 어떤 경우에도 없음"이라고 못을 밖으면서 징병제는 징병검사 한번 이후 바로 유야무야돼버렸다. 결국 1950년 3월 다시 병역법을 개정해서 징병제를 폐지하고 미국의 요구대로 모병제로 전환하였다. #

이승만 정권이 미국으로부터 물자 원조를 조금이라도 더 받아내려고 징병제를 고집했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모병제를 권유하는 미국을 설득하지도 못했고 국가 안보의 초석이 되어야 할 병역 제도가 고작 8개월 동안 모병제 → 징병제 → 모병제 식으로 지그재그 하면서 혼란만 일으켰다.

이후 6.25 전쟁이 발발하면서 당장 다급해진 이승만 정부는 가두모집 등의 방법으로 청년들을 징병하기 시작했고, 그 이듬해인 1951년 5월에야 병역법을 개정하면서 공식적으로 징병제를 재도입하였다. 그리고 그 뒤로는 미국의 감군 요구에도 불구하고 60만 대군을 유지해야 한다는 명분으로 현재까지, 60년이 넘게 징병제를 고수하게 된 것이다. # [18]

4. 이승만이 친일파라는 주장

4.1. 긍정

4.1.1. 친일반민족행위자 청산 방해

파일:이승만노덕술2.png 파일:노덕술과이승만.jpg
<rowcolor=#fff> 노덕술에 관한 이승만의 국무회의록
노덕술 피검에 관하여는 그가 치안기술자임을 비추어 정부가 보증하여서라도 보석하도록 함이 요망
불법조사관 2명 및 그 지휘자를 체포하여 의법처리하여 계속 감시하라 지령하시다
왜정시대에 악질적 해악을 저질렀다고 해도 지금 잘 하는 일이 있으면 애국자
1954년 4월 9일, 제3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이승만이 한 발언. 원문은 이와는 다른 문구이지만 전하고자 하는 내용은 동일하다. #

이승만은 독립운동가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정부 수립 이후 친일반민족행위자 처벌을 반대하고 방해했다. 개인적으로는 일본을 당대 정치인을 통틀어 그 누구보다도 극심하게 미워했으나, 정작 일본에 부역한 이들은 시대상을 감안하여 참작하여야 한다는 스탠스를 일관했다.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가 제대로 된 활동을 못하고 해체된 것도 이승만이 친일반민족행위자 청산에 적극적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히려 경찰은 반민특위원들을 빨갱이로 몰아 탄압했다.

당시 글을 읽은 사람은 모두 친일 민족 반역 행위를 했다는 의견도 있으나, 반민특위가 대상으로 삼은 사람들은 일제 치하에서 복무한 기술관료&군인&경찰과 친일 지식인 모두가 아니라 그들 중에서도 가장 악질적인 자들이거나 일제의 식민지 독립 운동 탄압에 앞장서며 악영향을 끼치던 수백 명이었다. 한편 이승만이 친일파 출신을 그대로 등용하되 권력의 핵심에 손이 닿지 않는 한직에 몰아넣는 방식으로 숙청했다는 주장도 있으나 독립운동가들을 잡아 고문하던 노덕술이나 김창룡[19]과 같은 자들을 측근으로 두고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는데 사용했다. 덤으로 이승만은 해방정국에 이들 이상의 악질 친일파였던 이종형[20]과도 밀착한 관계를 맺었다. #[21] 뼛속까지 뿌리박힌 증오심조차 권력욕을 이길 수 없다는 건가.

반민특위 활동이 소급입법금지원칙 위반이라는 주장도 있다. 정확히 말하자면 소급입법금지 대상은 이미 완료된 사실에 대한 입법(진정소급입법), 진행 중인 사실에 대한 입법(부진정소급입법)으로 분류된다. 친일반민족행위 문제는 통상 전자에 해당하는데, 진정소급입법의 경우 원칙적으로는 위헌이지만 예외적으로 정의실현 등의 차원에서 소급입법을 할 공익이 더 크다고 한다면 허용된다는 것이 한국의 학설과 헌법재판소 판례의 견해다. 한국의 경우, 군사 독재 문제와 친일반민족행위자 문제 두 부류에 한해서 진정소급입법을 허용하고 있는데 과거사 청산같이 그에 대한 예외 역시 정당하다면 보편적으로 인정된다. 친일반민족행위자 재산 환수에서 본 헌재의 판례[22]

이승만이 위에 서술된 것처럼 임기 내내 반일 성향을 숨기지 않았음에도 친일반민족행위자 처벌에 대해서 부정적으로 생각했던 이유는 명확하지 않다. 일반적으로는 국내에서 기반이 미약했던 이승만이 친일반민족행위자 중 일부를 권력에 끌어들인 대신 제공해준 대가라고 보고 있으며, 당시 중국의 국공내전이 발발하고, 대구 10.1 사건, 제주 4.3 사건, 여순반란사건 등을 진압하고 이승만 정권의 강경한 반공을 실천하기 위해 이승만 정부에 협력해줄 수 있는 친일반민족행위자들을 용서해주었다는 견해도 있다. 그리고 좌우의 대립으로 인한 국가적 위기 해결을 위해 친일파 청산에 대해 이승만이 소극적일 수 밖에 없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사실 이러한 스탠스는 이승만 개인만의 입장이라고 보기는 힘들었고, 김구, 조소앙, 신익희 등 주류를 형성하고 있던 우파 인사들 사이에서 어느 정도 공유된 인식이었으며,[23] 세부적인 스탠스 차이는 있지만 민족통일과 정부 수립 등의 과제를 친일파 청산보다 우선순위에 두고 친일파 청산은 추후에 해야 한다는 데에는 어느 정도 유사한 입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이렇게 시간을 번 친일파들이 그걸 착실하게 이용해서 청산 시도를 할 수 없게 만들었다는 게 문제가 되어버렸지만... 이후 친일인명사전이 발간되는 21세기가 되기까지 친일파 청산은 시도조차 되지 못했다.[24]

현재도 인명사전 발간으로 친일파의 존재들이 많이 알려지긴 했지만 이후 관련 처벌은 소급입법으로 가는 문제라 앞으로의 길도 난항이 예상되는 상태다. 실제로 초대 국회는 소급입법금지 원칙과 반민족행위자 처벌을 동시에 제헌헌법에 넣었고, 초대 국회만이 반민족 행위에 한해서 소급입법을 할 수 있다는 헌법 부칙으로 이 문제를 해결했지만, 이런 권한이 없는 현재의 국회에서는 소급입법을 함부로 했다가는 법 체계가 망가질 위험이 있다.

4.2. 부정

4.2.1. 일관된 반일 행보

일각에서는 이승만이 친일파라는 비판을 제기하기도 한다. 일제강점기 초기 미국에서 망명 생활을 하면서 일본 군함 이즈모호 폭파 시도를 미국 당국에 고발한 것, 반민특위 해체를 명령하고 친일파 인사들을 등용하며 자신에게 반대하는 독립운동가 출신 인사들을 탄압, 처형[25]시킨 것 등이 그 이유이다.

그러나 이승만은 역대 대통령 중 가장 지독한 반일적 성향으로 유명하며 일본 내에서도 인식이 매우 나쁘다. 일제강점기에도 독립운동가였고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수장이기도 했으며 대통령이 되고 난 1948년 이후에도 줄곧 반일 정책을 펴나갔다. 이승만이 친일파 인사들을 등용하거나[26] 반민특위를 해체했다고 하더라도 그가 일본과의 전쟁까지 불사하고 해군을 동원하여 독도일본의 압력으로부터 지켜낸 일은 그의 강력한 반일 신념 덕분이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27] 더구나 당시는 6.25 전쟁이 한창 진행 중이었고 온 나라가 초토화된 상황이었다. 심지어 북한군과 중공군이 쳐들어와 수도 서울이 두 차례나 함락되고, 나라가 망할 뻔한 절체절명의 위태로운 상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승만은 끝내 일본과 손을 잡지 않았다.

심지어 1954년 7월 29일 미국 대통령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와 가진 백악관 회담에서 이승만은 한일 국교 재개 문제로 실랑이를 벌이다, "내가 대통령에 있는 동안은 일본과 상종도 하지 않겠다."라고 단호하게 한일 국교 재개에 대해 반대했고, 그러자 화가 난 아이젠하워는 의자에서 일어나 나가 버렸다. 아무것도 가진 것도 없는 나라인데다 북한의 침략을 막아낸 것도 미국 덕택이었음에도 이승만은 일본과의 국교를 재개하라는 미국 대통령의 권유를 끝까지 거부할 정도로 매우 강경한 입장이었던 것이다.#[28]

이를 넘어 이승만은 6.25 전쟁 시 미국이 국군을 돕기 위해 구 일본군 전력을 동원하려는 의사를 타진하자 "일본군이 한반도에 오면 공산군과 싸우기 전에 일본군과 먼저 싸울 것"이라는 말을 남기기까지 했으며, 물론 일제강점기가 그립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공산주의자로 간주된 사람들과 같은 정치범이 되었다.

심지어 이승만에 대해 매우 부정적인 리영희조차 "미국 정부는 이승만의 반일적 고집에 골치를 앓았다."라고 서술하여 이승만의 강경한 반일 성향을 인정했다.[29] 북한에서도 이승만을 비난할 때 '친미주구 리승만역도'라고 하지 '친일주구'라고 하지는 않는다. 더구나 독립운동가 출신 독재자들이 집권 후 자신이랑 뜻을 같이하지 않는 독립운동가들을 탄압하거나 살해하는 일은 외국에서도 흔한 일이며, 식민지 부역자들을 독립운동가 탄압에 쓰는 일도 그렇게까지 드물지는 않다.[30]

4.2.2. 강경한 반일 정책과 발언들

리지웨이 장군, 왜 귀하는 싸울 태세를 갖추고 훈련된 한국 청년들을 무장시키지 않습니까? 왜 50만 한국 청년들을 공산당과 싸울 수 있도록 무장시키지 않습니까? 왜 귀하는 한국 청년들을 밀어 제쳐놓고, 대신 일본무장시켜 또다시 일본을 열강으로 만들려고 합니까?

우리나라가 당한 쓰라린 경험은 이러합니다. 우리는 일본 사람들러시아싸울 수 있게 이 땅을 통과시켜 주었더니 그들은 결코 우리나라를 떠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미국의 도움을 받아 한국에 머무르면서 40년 동안 한반도를 점령했었습니다. 바로 당신네들 미국이 1905년, 러시아와 싸울 수 있게 일본의 군비를 증강시켜 주었습니다.

그리고 2차 세계대전 중에 당신네들은 바로 그 러시아가 일본과 싸우도록 러시아의 군비를 증강시켜준 것입니다. 이제는 또다시 일본의 군비를 증강시켜 주려하고 있습니다. 러시아나 일본이나 그들 야망대로 남의 나라를 정복하기 위해 다같이 한국을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당신들은 언제나 한국이 아시아의 관건이라는 사실을 똑바로 보지 않으며, 또 이 두 열강이 그로인해 전쟁에 휘말렸다는 사실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귀국은 극동에서 한국을 강력한 보루로 만들어 이 두 세력을 견제하려 들지 않고, 우리의 적들만 부추기고 있습니다. 내 말을 명심하여 들으시오. 그러나 만약 당신이 우리의 청년들을 훈련하고 무장을 시킨다면, 결코 후회를 하지 않으리다.
1951년 1월 12일, 이승만리지웨이 장군에게 한국군 무장과 무기를 요청하면서[31][32]

대표적인 경우들을 거론한다면, 우선 1952년 1월 18일에 독도 해역을 지키기 위해 선언한 이른바 '평화선' 혹은 '이승만 라인'을 들 수 있다. 이승만이 평화선을 선포했다는 소식을 듣고 일본 언론들은 '오만 무례하고 불손한 한민족', '한국의 해양 주권 선언은 영토 침략'이라며 잔뜩 흥분하였다. 그리고 일본이 평화선을 불법이라고 항의하면서 고기잡이를 계속하자 이승만은 불법 어로를 하는 어선을 붙잡아 어민을 억류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1952년 9월 이승만이 해군에게 평화선을 침범하는 일본 어선은 나포하고 필요할 경우에는 발포하라는 명령을 내림으로써 한국과 일본 사이의 갈등은 뜨겁게 달아올랐다.[33] 나중에 그렇게 해서 한국 해군에 의해 억류당한 일본 어민의 수는 4천 명에 달했으며, 그 과정에서 44명의 일본 어민들이 죽었다.

두 번째로는 1954년 3월 14일 일본 도쿄 메이지 스타디움에서 개최된 월드컵 극동 예선에서 원래 한국과 일본 두 나라에서 한 번씩 경기를 하는 홈 앤드 어웨이가 원칙이었지만, 이승만은 한국 땅에 절대 일본 축구팀의 입국을 허용할 수 없다고 강력히 반대하여 두 경기를 모두 일본 도쿄에서 치러야 했다.[34] 이때 일본으로 경기하러 가는 대표팀을 모아놓고 이유형 감독과 대표팀으로부터 승리하지 못한다면 현해탄에 몸을 던지겠다는 각서를 받았다. # 도쿄대첩 항목 참고.
세 번째로 이승만은 1955년 12월에 미국 국무부 관리들이 한국을 희생해 일본을 지원하고 있다고 비난하면서 그들 중에는 일본과의 맹목적 사랑에 빠진 이들이 있다고 경고했으며[35], 미국인들 이외에 도대체 누가 일본을 믿느냐고 개탄하기까지 했다.[36]

네 번째로 이승만은 대만(중화민국)이 일본[37]과 가깝게 지내는 걸 비판하면서 심지어 "4억 중국인은 다시 일본의 지배하에 노예가 되느니 지금과 같은 공산주의의 속박을 원할 것이다."라는 말까지 했다.[38] 중국이 자신의 소원이던 북진통일을 완수 직전에 가로막았음에도 이런 말을 남겼다.

다섯 번째로 이승만은 1959년 6월 15일 대일 경제단교 및 일본 왕래금지 성명을 발표하였다. 당시 언론은 이승만 정권의 경제단교 조치에 대해 그것은 일본을 제재하는 게 아니라 한국을 제재하는 것이라고 비판하기까지 했다.[39]

그 밖에도 이승만은 6.25 전쟁 초기에 전황이 불리해지자 일본의 군대를 데려와야 한다는 미군의 제안에 "만약 그렇게 하면 공산군보다 먼저 일본군에 맞서 싸울 것"이라고 강력히 반대한 바 있다.[40][41] 또한 미군정의 제임스 하우스만 대위에 따르면 이승만은 항상 총독부 건물을 부숴야 한다고 얘기했으며, 육군 병기감 엄형섭이 자신에게 '대통령께서 군의 모든 장비를 동원해 총독부 건물을 부수라는데 큰일났다'며 걱정하더라는 얘기를 하기도 했다. 아울러 이승만은 조선은행에 보관되어 있던 금괴를 일본한테 빼앗겼다고 자주 분통을 터뜨렸다고도 한다. #.

또 이승만은 재임 기간 동안 국민들을 반공집회만큼이나 반일집회에 많이 동원했으며, 특히 1958년 재일조선인 북송사업이 시작되자 반일집회는 절정에 달했다. #

심지어 이승만은 1958년 12월 13일에는 부산을 방문하면서 일본은 공산당보다 무서우니 철저히 경계해야 한다고 강조하기도 했다. 당시 대한뉴스

또한 그의 집권 기간 12년 내내 일본과의 국교 수립은 끝내 이루어 지지 않았다. 수교 협상이 있긴 했으나 일본 측의 무리한 요구와 망발 등이 문제가 되어 결렬되었고, 일본과의 국교 수립은 박정희 집권 후이자 정부 수립 17년 후인인 1965년에야 한일기본조약으로 이루어졌다.

5. 미국의 앞잡이?

'이승만은 친일파다'라는 주장 말고도 이승만을 비하하려는 사람들이 말하는 대표적인 것이 '이승만은 미국의 앞잡이다', '미국 하수인이다'라는 주장이다. 그러나 이승만은 오히려 미국 대통령들을 비롯한 많은 미국 인사들과(해리 트루먼, 존 하지, 아이젠하워 등) 뜻이 달랐고 자주 부딪혔다.

왜냐면 이승만은 철저히 한국의 이익을 위해 미국을 활용하는 것에 모든 초점이 맞춰져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미국 내에서 "Sick man Rhee"[42]가 이승만의 별명이었을 정도였다. 갈등이 절정에 이르렀을 때는 이승만을 제거해야 한다는 주장까지 미국에서 나왔다.[43] 미국인들은 당연히 남의 나라인 한국의 입장이 아닌 자국 미국의 입장에서 볼 수 밖에 없으니 이승만이 맘에 들지 않았겠지만 한국의 입장에서 봤을 때 이승만은 철저히 한국의 이익을 위해 미국을 뽑아먹을 수 있는 한 최대한 뽑아먹는 대통령이었다. 이런 사람을 미국의 앞잡이라 할 수는 없다.

그가 대통령이 된 후 뿐만 아니라 그 전인 1946년 6월에도 미군정 사령관 존 하지는 이승만의 정치 자문가였던 로버트 올리버에게 "그의 그치지 않는 반소언동 때문에 미국이 장차 한국에서 설립할 어떤 정부에도 이승만은 결코 참여할 수 없을 것이다."라고 경고하기까지 했고 장택상에게 이승만을 정계에서 축출할 것을 제의하기도 했다.[44]

이승만이 대통령이 된 이후에도 마찬가지라서 이승만은 미국이 원하는대로 움직여주지 않았고 심지어 1953년에는 미국이 이승만을 제거하는 에버레디 계획을 세우기도 했을 정도다. 그리고 6.25 전쟁 후 아이젠하워가 한국과 일본이 수교를 맺고 잘 지내길 요청했을 때도 이승만은 거절했다. 아무것도 없는 신생약소국이자 6.25 전쟁에서도 미국 덕에 나라를 지킨 입장이었음에도 이런 대응을 한 것이다.

이런 이승만의 행보를 보면 아무리 봐도 그가 미국의 앞잡이였다거나 미국의 이익을 위해 움직이는 꼭두각시였다는 식의 평가는 절대 할 수 없다. 오히려 이승만은 미국을 국익에 적극적으로 이용한 사람이었다.

6.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에서 이승만의 주도성 논쟁

6.1. 부정론

이승만이 미국과의 관계에서 외교적 주도권을 장악하였다고 보기는 어렵다. 미국이 로버트슨을 대통령특사로 파견하기로 한 결정은 이승만의 반공포로석방 이전에 이루어졌다. 오히려 반공포로석방을계기로 미국은 특사 파견을 잠시 보류했지만, 결국 계획대로 추진한 것은 한미교섭을 통해 확보하고자 하는 목표가 분명하게 있었기 때문이었다. 반공포로석방은 한미간에 입장 차이가 있는 문제가 아니었으며, 이승만은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반공포로석방을 단행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승만이 원했던 상호방위조약 체결에 대한 것은 구체적 약속도, 휴전의 전제조건으로 관철되지도 못했다. 이승만의 협상력은 미국이 미리 상정하고 있던 제안 범위 내에서만 효과가 있는 것이었고, 이승만은 결국 미국의 요구를 수용하였다. 결과적으로 미국은 전후 주한미군의 한반도 영구주둔과 한국군 작전통제권 이양을 관철시켰다. 휴전 이후 체결된 한미상호방위조약과 한미합의의사록에서 한국정부는 유엔군사령부가 대한민국의 방위를 책임지는 한에서 한국군에 대한 작전통제권이 유엔군사령관에게 있음을 인정하였다.
김보영. (2009). 한국전쟁 시기 이승만의 반공포로석방과 한미교섭. 이화사학연구, 38, 183-206. #
5월 30일, 미 국무장관 및 차관, 국방장관, 육군참모총장과 국무, 국방부의 주요 보좌관들이 모여 한국문제를 다시 논의하였다. 이 모임에서 참석자들은 미국과 필리핀 및 ANZUS 조약과 같은 조약을 한국과 체결할 것을 대통령에게 건의하자는 내용과 미국은 어떠한 경우에도 이승만 정부를 군정으로 대치할 수 없다는 것을 결정하였다. 뒤이어 열린 백악관 회의에서 미 국무장관은 한국과 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한다는 내용을 건의하였고, 대통령이 이를 승인하였다. [45]
온창일. (2000). 한국전쟁(6ㆍ25전쟁)과 한미상호방위조약.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군사,(40), 105-137.#
이미 미국은 미일동맹을 체결하면서 한국과의 동맹을 준비하고 있었다는 내부논의 자료가 들어오면서 이승만의 역할에 대해서 학계에서 논쟁이 일어났다. 오히려 이승만이 반공포로를 석방하면서 미국은 이승만을 제거하려는 계획을 세웠으며, 이를 실행하기 직전까지 갔다.

이승만이 원했던 조약의 구체적 약속이나 휴전의 전제조건은 미국이 상정하고 있던 제안 범위 내에서만 효과가 있는 것이었고, 이승만은 결국 미국의 요구를 수용하였다. 결과적으로 미국은 한국과의 협상에서 늘 주도권을 가졌다.

다 망해가는 후진국 지도자의 의중은 초강대국의 정책앞에 아무 상관도 없는 것이었고, 오히려 이전부터 이승만을 골칫거리 독재자로 보단 미국은 반공포로 석방을 통해 에버레디 계획을 준비할 정도로 한국과 이승만에 불신하게 된다.

6.2. 긍정론

오늘날 미국의 국익 실현에서 대한민국이 갖는 중요성을 부정하는 사람은 없지만,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 당시에도 미국이 그렇게 생각했는지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이승만 대통령이 미국에 상호방위조약 체결을 강력하게 주장한 것은 사실이다. 여기에 대해 '미국은 어차피 그 당시에도 한반도를 중요하게 생각했으니까 상호방위조약을 체결했다'라고 평가하면 조약 체결에 있어 이승만의 역할은 미미했다고 할 수 있고, '미국은 당시에 한반도를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는데 이승만의 노력으로 상호방위조약을 체결했다'라고 평가하면 이승만의 역할이 컸다고 할 수 있다.

당시(1945~1950) 미국이 한반도에 전략적으로 한반도의 중요성을 간과하고 있던 점은 사실이다.[46] 이하의 내용은 냉전 초기, 즉 대략 애치슨 라인이 제기되기 전후의 미국이 한반도의 중요성을 어떻게 판단한 것인지를 서술한 것으로, 수십년째 이 조약으로 한미일 전체가 이 조약이 없었으면 누리지 못했을 안보적 이익을 누리는 것으로 알 수 있듯이 장기적인 관점에서는 틀린 판단이었다.

미국에서 냉전 당시 전면전을 대비함에 있어 한반도의 중요성은 그렇게 크지 않았다. M48 전차로 베이징을 밀어보고 싶던 말던 일단 조약 체결이 거론되던 시점에는 한반도 분단이 기정사실화된 시점이었다. 전쟁 수행 시 미국이 기갑 전력으로 38선에 돌파구를 뚫어도 적군 보병이 도보로 금방 다시 몰려와서 메워버리는 수준이었다. 냉전 당시 서유럽 평원에서도 기동을 위해 적어도 100km 이상은 보장되었는데 이보다도 좁은 한반도에서 전면전을 벌이게 되면 갈려나가는 건 보병이며, 이런 최악의 상황에서 중국 육군과 북한군, 그리고 북중소의 방공군 + 공군을 상대로 참호전을 이어나가는 건 미국 입장에서도 정말 피하고 싶은 전투다.

심지어 미국은 6.25 전쟁이 일어나기 전에 이미 한국에서 전쟁이 일어날 가능성이 높음을 인지하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 국방부는 남한에 미군 지상군을 주둔시키는 선택지를 극구 반대했다. 한국 전쟁에 개입했다가 중국·소련과 정면 충돌하기라도 하면 그 길로 제3차 세계 대전이 벌어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미국 합동참모본부는 "3차 대전 발발 시 한반도가 제2의 바탄 반도[47]가 될 것"이라는 경고까지 했다.

따라서 당시 미국의 시선에서 "미국의 입장에서 한반도가 중요한 이유는 한반도에 영향력을 행사하면 유사시 중국의 정치·경제 중심지를 가장 빠르게 육로로 타격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같은 대명제는 성립하지 않았다. 또한 한반도는 애초에 소련 극동군구 방공군의 작전반경 내였기에, 미국으로서는 한반도에서 애먼 병력만 축내느니 소련 극동군구를 알래스카 쪽에서 묶어둠으로써 소련이 서유럽에만 병력을 집중하지 못하고 방대한 중소 국경 지대에 병력과 정보자산을 분산 배치하도록 강요하는 게 최선의 시나리오였다.

이승만은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을 성사시키기 위해 냉전 초기는 물론이요 진주만 폭격 이전인 1940년대부터 한반도 교두보론[48]을 역설해왔으나, 미국의 군사전문가들은 상술한 이유로 한반도 교두보론에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 이런 영향으로 한미상호방위조약에는 미국이 일방적으로 조약을 파기할 수 있는 조항[49]이 존재하는 등 제약이 걸려 있다. 한미상호방위조약은 휴전으로 인해 지속될 한반도의 불안정한 정세와 천문학적인 국방예산 지출로 불안해하는 한국에 대한 외교적인 달래기였기 때문이다.

이승만이 1948년 8월에 미국에게 상호방위조약 체결 가능성을 물었을 때 존 무초 초대 주한미국대사는 "미국은 토머스 제퍼슨 대통령 이래 어느 국가와도 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한 일이 없다"고 답하며 거절했다.[50] 이승만은 1949년 6월에 주한미군이 철수한 후에도 상호방위조약을 요청했지만 미국은 '상호방위원조협정', '주한미군사고문단설치협정' 같은 큰 실익 없는 협정을 맺어주는 게 다였다.

이에 이승만은 미국을 상대로 보란듯이 반공포로 석방 사건 같은 초강수를 강행해 미국은 적극적으로 미국 내비준 상황에 대해 언급하며 한국과의 상호방위조약 체결에 대한 적극성을 보였다. 이승만의 ‘반공포로 석방’이 이승만이 목표로 했던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에 결정적인 계기를 마련하였다고 평가된다. #

미국 입장에서 한국을 최빈국에서 건실한 국가로 만들어 중국에 외교적인 압력을 가하거나 중국을 공격할 때 지원해줄 수 있게 하기 위해 들여야 할 비용은 애치슨 라인만을 방어하는 비용보다 천문학적으로 높았다. 한국은 국토가 작고 산악지형이 국토의 태반인 반면, 일본은 아무리 패전국 출신이었다한들 전신인 일본 제국이 미국과 무모하게 전쟁을 해볼정도의 해군력을 지닐 기술과 공업능력이 존재했었으며 한국에 군수물자를 수출하며 재건의 발판을 밟아가고 있었다. 미국이 한국보다 일본에 투자하고 싶어하는건 상식적인 판단이었다. 이승만이 주한미군과 상호방위조약을 못박음으로 산업경제의 패러다임을 변경하지 않았다면, 한국에게 결과는 처참했을 것이다.

그러나 유사시에 중국과 소련에게 역공을 가하려면 '한반도 장악이 필수다'는 점은 사실이다. 분명히 미군 지휘부가 3차 대전이 일어나면 안 된다는 강박 하에 간과하고 있거나 소극적으로 생각하고 있던 부분이다. 남한이 함락당하는걸 원치 않고 일본이 위협받는게 싫어서 6.25 전쟁에 참전해놓고, 그 이후에 한반도를 미군이 없는 완충지대로만 남겼다면, 한반도는 수시로 전쟁 위협이 시달려야 했거나, 전쟁에 돌입해야 했을 것이다. 세상에 이상적인 완충지대라는 것은 없기 때문이다.[51]

추가적으로 6.25 전쟁 당시 미국 국내 여론은 매우 안 좋았다. 해리 S. 트루먼 대통령은 1950년 6월 30일 미군 지상군을 한국에 파병했다. 당시 공산주의의 위협을 느낀 미국인의 78%는 트루먼의 군사 지원 결정에 찬성했고 15%는 반대했다. 그러나 이듬해에는 전쟁이 끝난지 5년도 안 되어서 다시 모르는 땅에서 전쟁을 벌이며 청년들이 죽는게 말이 되냐는 여론이 생성되어 대중의 지지가 줄어들었고 전쟁의 사건에 따라 변동했다. 미국의 외교사를 봐도 알겠지만, 동맹국들의 지원에 대해 여론/국내정치에 따라 급변하는 경향이 심했고 유일하게 전쟁이 끝날때까지 단결했던 것이 태평양 전쟁이다. 실제로 6.25 고착화 당시 트루먼의 지지율은 고작 22%[52]로 미국 역사상 꼴찌였고, 아이젠하워가 1953년 대통령이 될 당시 주요공약이 '한국전쟁 중단'이었다. 그당시 미국 입장에서 어떤 모양이든 휴전이 절박했고, 이를 위해서 주한미군 철수도 생각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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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더해 미국 국민은 대체로 6.25 전쟁을 3차세계대전의 시작으로 보고 있었다. 한국이 아니라 미국의 존립을 위해서 휴전이 최대한 빨리 와야하는 거였다. 미국 입장에서 휴전이 얼마나 절박한지 보여주는 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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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젠하워는 구체적으로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하고 싶어하지 않았다. 이승만 대통령이 상호방위조약을 이용해 미국을 또다른 전쟁으로 끌고 가려는 꼼수가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추가적으로 한국의 불안정한 국내정치상황은 동맹 파트너로 큰 하자였다. 아이젠하워는 또한 상호방위조약이 한반도에 대한 기존의 유엔 노력을 약화시키고 유엔사령부의 권한을 약화시킬 수 있다고 우려했다.[53]

이러한 미국의 마음을 돌린건 크게 두 가지였다. 첫째, 이승만 대통령은 줄곧 아시아 국가들의 반공연맹을 주창해왔는데, 아이젠하워는 이를 아시아판 나토로 변화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둘째로 이승만 대통령은 원래 휴전협정 서명일인 1953년 6월 18일 반공포로를 석방시켰다. 이에 미국은 한국이 다시는 휴전회담을 흔들지 않는 조건으로 상호방위조약에 동의했다.[54] 미국의 휴전에 대한 절박함을 역으로 이용한 결과다.[55]

냉전, 그리고 냉전 이후에도 미국은 전쟁에서 승리했든 패배했든 여론에 의해 군대를 철수하는 양상을 보여줬다. 군사파견은 애초에 운영비가 엄청나기 때문이며 미군의 철수 후 동맹국들은 대체로 살아남지 못하거나 도리어 중국과 러시아의 등쌀에 시달렸다. 1961년 피그만 침공의 처참한 실패, 1975년 남베트남과 라오스의 몰락, 그리고 최근 이라크/아프간 철군 등에서 미국이 처음 군사지원을 하면서 만든 약속을 지키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는 점을 보여준다.[56]

한반도는 일본의 최인접국이다. 최악의 경우 이러한 최인접국이 적화통일 된 뒤에 일본을 겨누고 있을 가능성도 있는데, 그랬다면 일본은 지금의 남한 못지 않게 징병제는 기본에 안보위협이 시달려야 했음은 물론, 북한이 통일한 한반도 영해와 중국 영해, 그리고 소련의 영해까지 삼면으로 대치해야 했을 것이다. 즉, 애치슨 라인은 단기적인 가성비 측면에 좀 더 의미를 둔 것이고, 장기적인 군사적 측면에서는 미국, 일본, 한국 그 어느쪽에도 이렇다할 유리한 환경을 주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는 명백한 실책이자 실패한 수 라고 볼 수 있다.

결국 미국은 한국에 군대를 더 주둔시키고 한미동맹을 맺는것이 최선이라고 판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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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공포로 석방’ 이전 이승만의 협상전략이 실패한 원인은 미국의 윈셋을 확대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미국은 공산주의 세력 확장을 막기 위해 한국에게 안보를 제공해야 하는 필요성은 갖고 있었지만, 상호방위조약 체결까지는 동기가 충분하지 않았다. 결국 이승만의 전략은 미국에게 어느 정도 수준의 위협이 되었지만, 미국이 윈셋을 확대할 만큼 충분하고 실현 가능한 위협으로 작용하지 못하였다. 이승만이 1953년 6월 18일 ‘반공포로 석방’ 조치를 하기 이전까지 미국은 이승만을 설득하며 공산 측과 휴전협정을 체결할 계획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승만의 ‘반공포로 석방’ 이후 미국은 적극적으로 미국 내비준 상황에 대해 언급하며 한국과의 상호방위조약 체결에 대한 적극성을 보였다. 따라서 이승만의 ‘반공포로 석방’이 미국의 윈셋을 확대한 근거로 작용한 결과임을 도출할 수 있었으며, 이승만의 ‘반공포로 석방’이 이승만이 목표로 했던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에 결정적인 계기를 마련하였다고 평가하였다. 이러한 측면에서 이승만의 ‘반공포로 석방’은 자국의 윈셋은 축소하고 상대국의 윈셋을 확대하여 협상에서 상대방보다 유리한 고지를 점령하고, 자국의 국가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구사한 협상전략의 하나의 사례로써 가치와 의의를 가진다.
박재홍. (2022). 퍼트넘의 양면게임이론에 근거한 이승만의 반공포로 석방에 관한 재조명 - 협상전략과 윈셋의 변화를 중심으로 -. 국방부군사편찬연구소,(45), 173-217.#
it is suggestive that bilateral interactions between the ROK-US and the Syngman Rhee Government's bargaining strategy in the process of a conclusion of mutual defense treaty even if the time has much passed. In sum, the conflictual international order represented by the Korea War and vulnerable resource mobilization capability of the ROK in that time reduced the bargaining power of the Syngman Rhee Government in the course of the ROK-US Mutual Defense Treaty negotiation. However, despite the negative impact of these factors, Syngman Rhee Government used for resistance bargaining strategy in response to the United States's indirect pressure, such as brinkmanship and bluffing. The objective of this strategy for the US was trying to obtain maximum yield. In contrast, under direct pressure such as withdrawal of the US troops, the ROK Government used compliance and resistance strategy. Such flexible and cross political strategy was able to made the conclusion of the ROK-US Mutual Defense Treaty.
(즉, 시간이 많이 지났지만 상호방위조약 체결 과정에서 한미 양국의 상호작용과 이승만 정부의 협상 전략이 시사된다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한국전쟁으로 대표되는 갈등적 국제질서와 당시 대한민국의 취약한 자원동원능력은 한미상호방위조약 협상과정에서 이승만 정부의 협상력을 약화시켰다. 그러나 이러한 요소들의 부정적 영향에도 불구하고 이승만 정부는 미국의 간접적 압력, 즉 벼랑끝 전술과 허세에 대응하여 저항적 협상전략을 구사했다. 이 전략의 목적은 미국에 있어서 최대의 이익을 얻는 것이었다. 반면, 미군 철수와 같은 직접적 압력 하에서는 대한민국 정부는 준수와 저항전략을 구사했다. 이러한 유연하고 교차적인 정치적 전략이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할 수 있었다.)
이성훈. (2010).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을 위한 이승만 정부의 협상전략. 국방부군사편찬연구소,(33), 251-283.#

그리고 이승만이 미국과의 협상에서 지지부진한 것도 반공포로 석방 이전까지의 시점에서 한국은 미국의 내적 비준을 얻을 수 있는 합의의 근거를 마련하지 못한 상태였던 것이 컸다. 애당초 양국간의 입장차이가 없었다면 한국측의 석방에 미국이 당황할 이유가 없었다. 반공포로 석방 사건을 강행한 후 당장 휴전에 급한 미국이 양보하여, 이승만은 휴전을 방해하지 않는 조건으로 미국으로부터 막대한 원조와 대한민국 국군 20개 사단의 무장 지원, 그리고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얻어내었다. 단지 휴전을 방해하지는 않겠다는 제스처 하나로 대한민국은 강대국들을 상대로 막대한 이득을 취할 수 있었다. 이로서 한국은 미국의 각종 원조와 확보된 안보를 토대로 이후 경제 발전에 자금을 올인할 수 있었고 반공포로 석방으로 미국의 허를 찔러 따낸 한미동맹은 이승만의 가장 큰 업적으로 꼽힌다.

당시 대한민국 정부는 미군 철수와 같은 직접적 압력 하에서는 순응과 저항 전략을 사용했다. 이러한 유연하고 교차적인 정치적 전략으로 인해 한미상호방위조약이 체결될 수 있었다. 이승만이 미국과의 협상에서 주도권을 차지하지 못하고 한국측의 협상안을 하나도 제대로 관철시키지 못했다는 것은 지나친 비약일 뿐이다.

7. 정부 수립과 건국 (이승만 국부 주장)

2000년대 중반 이후 뉴라이트[57] 진영을 중심으로 건국절 논란이 촉발되면서 이승만을 건국 대통령으로 추앙하는 목소리가 등장하기 시작했다. 소위 '이승만 국부론'이 바로 그것인데, 그에 따르면 이승만은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대한민국을 처음으로 건국한 사람이며 따라서 이승만은 조지 워싱턴과 같은 건국의 아버지라는 주장이다. 반면 이러한 주장에 대해 반대하는 측에서는 이승만은 사사오입 개헌3.15 부정선거 등으로 자유민주주의 헌정을 오히려 파괴한 인물이며 종국에는 4.19 혁명으로 불명예 퇴진해 이미 국부의 자격을 상실했다고 본다. 이승만이 대한민국을 '건국'했다고 보는 평가는 현대 한국 정치에서 진보와 보수를 가르는 첨예한 사안으로 자리하고 있다.

게다가 이승만을 국부로 해버리면 대한민국은 '국민의 대한민국'이 아니라 '이승만의 대한민국'이 되어버리고, 이리 되어버리면 이승만이 저지른 보도연맹 학살 사건 등 민간인 학살에 대한 반감이 대한민국으로 향하게 되어버릴지도 모르는 일이다. 역사학자들이 단독정부의 이승만은 과감하게 버리고 김구를 중심으로 하는 한민족주의 사관을 고집하는데에는 다 이유가 있다.[58][59][60]

미국과는 다르게 '한국(Korea)'라는 나라는 고조선 이래 몇 천년 전부터 존재해왔던 나라이고, 이는 이승만에 의해 '건국'된게 아니다. 대한민국 정부는 '정부'에 불과하다. 대한민국은 1948년에 시작된 '체제'에 불과하다. 국가는 '한국(Korea)'이다.[61][62]

한편 이승만이 남긴 여러 문헌 자료는 일각의 평가와 달리 이승만 스스로는 대한민국을 '건국'했다고 보지 않았음을 입증하고 있다. 이는 제헌 국회 개원식에서 이승만이 한 연설에서 잘 드러난다.
··· 나는 이 대회(大會)를 대표하여 오늘의 대한민주국(大韓民主國)이 다시 탄생된 것과, 따라서 이 국회가 우리 나라에 유일한 민족 대표 기관임을 세계 만방에 공포(公布)합니다. 이 민국은 기미년 3월 1일에 우리 13도(道) 대표들이 서울에 모여서 국민대회를 열고 대한 독립 민주국임을 세계에 공포하고 임시정부를 건설하여 민주주의의 기초를 세운 것입니다. 불행히 세계 대세(大勢)에 연유해서 우리 혁명이 그때에 성공하지 못했으나, 우리 애국 남녀가 해내 해외(海內海外)에서 그 정부를 지지하며 많은 생명을 바치고 혈전 고투하여 이 정신만을 지켜온 것이니, 오늘 여기에서 열리는 국회는 즉 대한국민대회의 계승이요, 이 국회에서 건설되는 정부는 즉 기미년에 서울에서 수립된 민국 임시정부의 계승이니 이날이 29년만의 민국의 부활일임을 우리는 이에 공포하며 민국 연호(民國年號)는 기미년에서 기산할 것이요, 이 국회는 전 민족(全民族)을 대표한 국회이며 이 국회에서 탄생되는 민국 정부는 완전히 한국 전체를 대표한 중앙 정부임을 공포하는 바입니다. ···

대한민국 30년 5월 31일
대한민국 국회의장 이승만

아울러 이승만은 3.1 운동으로 독립을 선포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수립한 1919년을 원년으로 하는 대한민국 연호를 강하게 주장한 인물이었다. 이승만이 대한민국 연호를 사용한 이유는 크게 4가지로 정리할 수 있는데, 첫째는 민주국의 기초가 3.1운동과 임시정부 수립 때 잡혔음을 표시하기 위함이고, 둘째는 무저항주의를 시작해서 성공한 역사를 드러내기 위함이며, 셋째는 남녀 선열의 위대한 공업을 인증함이며, 넷째는 단군기원이 지나치게 상고사적이어서 조상의 이름만 판다는 비판에서였다.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이를 통해 이승만은 본인 스스로 자유민주주의를 들여와 대한민국을 건국했다고 보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이승만의 역사관은 제3대 대통령 선거 공보물 1948년 약력에 기미년 3월 1일로부터 기산하여 29년만에 자주민국을 부활함이라고 적어놓은 것에서도 드러난다.

정리하자면, 적어도 이승만 본인은 대한민국을 '건국'했다는 의식이 없었으며, 도리어 자유민주주의 건국의 기원을 3.1 운동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찾았다. 한편 이승만 건국론을 전면에 내세운 뉴라이트 진영의 과거 사상적 기반이 주체사상이었기에 사상적 배경과 극단성은 그대로 둔 채 숭배의 대상만 김일성에서 이승만으로 바꾼 것이라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63]

첨언하자면 뉴라이트 이전에도 이승만을 '건국 대통령'이라고 일컫는 경우는 드물게 있긴 했지만,[64][65] 당시 국민들 사이에서 이승만이 '건국자'라는 이미지는 옅은 편이었다. 당장 이승만 생전인 1956년 나온 이승만 찬양가 '우리 대통령'의 첫 부분 가사(박목월 작사)도 "우리나라 대한나라 독립을 위해"지 "우리나라 대한나라 건국을 위해"가 아니다.

8. 일본 망명 루머

이승만 일본 망명설은 논쟁의 여지가 없는 역사왜곡으로, 망명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내세우는 근거는 무초 대사의 기록이며 이는 다음과 같다. 이승만은 서울 함락 추태로 당시 도망자 이미지가 강하지만, 실제 6.25 전쟁에서는 적극적인 전시지도자였으며 망명에 극도로 부정적이였다.
Acting PriMin[66] visited me 7 a.m. Confirmed President had left at 3 a.m heading for Chinhae and Cabinet at 7 a.m. for south both travelling by special trains. (중략) He despaired of saving anything and inquired possibility President and Cabinet moving to Japan as "government in exile." I made no commitment.
오전 7시에 총리 대리인 신성모가 와서 오전 3시에 대통령 진해를 향해 남쪽으로 떠났고 각료들도 오전 7시에 남쪽으로 떠났으며 모두 특별열차로 이동했다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중략) 신성모 국방장관은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것에 낙담하였고, 대통령과 내각이 일본으로 이동하여 망명정부를 세우는 가능성에 대해 물었다. 나는 아무것도 대답하지 않았다.
1950년 6월 27일 무초 주한 미국 대사의 보고서 중#

서울에 남아있던 국방장관 신성모는 1950년 6월 27일 아침에 미국대사였던 무초를 찾아가서 여러 가지 논의를 하는데 이 때 신성모가 일본에서 망명정부를 세울수 있는지를 물어본 것으로 이승만 정부가 일본에 망명을 했었다고 주장하는 서술이 존재하며, 황현필 등 이승만에 대해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사람들은 이 주장을 무비판적으로 인용하고 있다.

당시 상황을 앞 뒤로 자세히 보면 6월 25일-26일 전쟁 초 이승만의 행적은 도피가 아니라 적극적인 항전을 시도했었고, 대전으로의 피난 또한 이승만이 자발적으로 한 것이라기 보다 신성모가 억지로 내려보낸 것에 가깝고, 이승만 뿐 아니라 내각도 같이 남하했다.

새벽 2-3시에 신성모는 특별열차편으로 이승만을 피난시켰고, 7시에 신성모는 내각도 특별열차를 타고 피난시켰다.이 이후 신성모는 무초대사와의 단독 대면에서 저 발언을 한 것으로, 이승만의 입장이라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또한 정황 증거도 이승만이 망명을 적극적으로 추진했다고 보기 어려운데, 신성모가 준비한 열차는 본래 진해가 목적지였으나, 이승만은 서울로 돌아가려고 했으나 단념하고 대전으로 향했다. 이 진술은 한국 측 사료 및 미국 측 사료에 기록되어 있어 교차검증되는 사실이다. 이승만이 일본이나 미국으로 망명을 시도했으면 바로 부산으로 일본으로 도망쳤지 굳이 서울로 올라갈 필요는 없다.
서울 함락 등 전황에 대한 미 극동군사령부의 보고, 연월일 1950년 6월 28일
출전 미국 중앙정보국 정보보고서 Daily Report 1 ; 한국전쟁 자료총서 16, 5~6쪽
제목 : 한국 상황
I. 전황
워싱턴 시각으로 6월 28일 오전 7시(서울시각 6월 28일 오후 9시)에 맥아더 사령부로부터 접수한 정보에 따르면, 김포공항과
서울이 북한군에 의해 함락되었다. 남한군이 항복을 했다는 징후는 없다. (...)
II. 생존 가능성
남한의 저항이 계속되리라는 전망이 커지고 있다. 미국의 한국 정부에 대한 조기 원조와 개입은 남한 국민의 사기에 중요하고
시의적절한 효과를 가져 왔다. 비록 북한군의 진격이 완전히 중단되지 않고 서울이나 기타 중요 지역 함락이 남한 국민의 사기에
타격을 가하더라도, 미 공군 작전은 남한 정부와 군대, 그리고 국민들에게 거대한 심리적인 부양 효과를 가져 올 것다. 최근의
공식 보고에 따르면, 남한인들 사이에 정신적인 공황의 조짐은 없다.
미국의 계획을 안 이승만 대통령은 서울로 돌아가기를 원했으나 단념했다고 한다. 한국인의 사기, 특히 한국군의 사기는
적의 절대적인 대포와 전투기에 의해 압도되고 있다. 남한군이 만약 재편성될 수만 있다면 강력한 전투의지를 보일 것이다.
조직적인 저항시도가 계속되고 있다.

이 사건 이외에도 이승만은 전쟁 중 망명정부 운운에 대해서는 단호하게 반대했다.망명정부에 대해서는 전황이 불리해질 때마다 미국측에 의해 꾸준히 제기됐다.즉,망명정부는 낙동강선 방어 형성 전후와 중공군 개입 이후 이승만이 아니라 미국이 적극적으로 한국정부의 해외 및 제주도 이전 문제를 제기했다. 즉 이승만이 마음만 먹었으면 미국의 지지하에 얼마든지 망명 정부를 꾸릴 수 있는 상황이였다.

아래 문단에서는 보다 자세한 서술을 진행한다.

6.25 전쟁 시 망명정부에 대해 기술한 참고자료는 다음이 있다, 전쟁기념사업회,<한국전쟁사:북한군 침공과 한국군방어>제3권,행림출판사,1992;프란체스카 도너 리,<이승만과 6ᆞ25:프란체스카의 난중일기>[67],기파랑,2010;정일권,<전쟁과 휴전>,1986.

낙동강 방어선 전투가 격화될 때 미국 정부는 만일의 경우에 대비하여 철수계획을 수립해 놓고 있었다.철수지역으로는 필리핀,사모아,피지의 남양군도,하와이,홋카이도 등을 고려했으나,최종 후보지역은 제주도,일본, 류큐열도(오키나와 제외),대만 등으로 선정하였다.

이 당시 <이승만과 6ᆞ25:프란체스카의 난중일기>의 서술에 의하면, 이승만은 영부인인 프렌체스카를 일본으로 망명시키고 본인은 잔류한다는 대화집이 수록되어 있어, 이승만은 망명 의사가 없음을 보였고, 8월 14일 적의 총공세 당시에, 무초 대사는 제주도로 망명을 제안하였다.

이 무초 대사의 제안에 이승만은 권총으로 무초 대사를 협박하며, 정부를 절대로 한반도 밖으로 옯기지 않겠다고 언급한다. 다만 정치적으로 <이승만과 6ᆞ25:프란체스카의 난중일기> 자체를 신뢰하지 않는 경우가 있어 완벽한 반론으로 인정받지는 못한다.

그러나 이승만이 망명에 극도로 부정적이였다는 기록은 더 있으며 다음과 같다. 1950년 9월 초 대구 방어의 전략적 요충지인 영천이 점령당했을 당시의 정일권의 <전쟁과 휴전> 서적에 서술되어 있는 이승만의 망명 정부에 대한 반응이다.
미 제8군사령관 워커(WaltonH.Walker) 중장과 정일권 소장과의 대화,
출전: 정일권 <전쟁과 휴전> 86page
워커 중장: 이것은 극비 중의 극비입니다.제너럴 정과 나,두 사람만이 알고 있어야 합니다.당분간은 이승만 대통령한테도 말하지 말아야 합니다. 한국군 중에서가장 믿을 수 있고 가장 잘 싸우는 2개 사단과 각계각층의 민간인 10만명을 극비리에 선정해 주기 바랍니다.”
정일권 소장:누구의 구상입니까?워커 장군의 생각입니까?"
워커 중장:맥아더 사령관의 극비 긴급지시입니다)

워커는 9월 7일 영천방어가 가망 없어졌을 때 맥아더 사령관이 미 제8군의 전면철수를 고려하라고 했다면서 정일권에게 이에 대한 배경을 설명해주었다.한국군 2개 사단과 민간인 10만명에 대한 철수계획은 워커 자신의생각이라고 했다.워커는 정 장군이 승낙하면 맥아더 사령관에게 건의하여수송선박을 준비하겠다고 했다.철수장소에 대해서는 아메리카 군도라고 했으나,정일권은 괌 아니면 하와이가 될 것이라고 판단했다.

정일권은 사태의 중대성을 인식하고 이튿날 새벽 부산경무대로 이승만을 긴급 방문하고 미군 철수계획을 보고했다.이승만은 “워커,그 사람 보기보다는 여간 겁쟁이가 아니구먼.망명의 설움을 안고 하와이에서 외롭게 일본 제국주의와 싸웠던 나,이승만에게 이제는 겨레를 이끌고 다시 그곳으로 망명하라는 것인가!”라며 격노했다.그리고서 이승만은 “워커 장군에게 말하시오.나,대한민국 대통령이승만은 누가 가자고 해서 나의 조국을 등질 비겁자가 아니라고 말하시오. 나,이승만은 영천이 무너져 공산군이 여기 부산에 오면 내가 먼저 앞에나서서 싸울 것이오.그래서 내 침실 머리맡에는 언제나 권총이 준비돼 있다고 말하시오!”라고 의연하게 대처했다.[68]

이후 한국정부의 망명 문제는 중공군 개입 이후, UN군이 철수하는 과정에서 다시 제기되었다, 중공군이 신정공세를 시작함에 따라 미국은 최악의 경우 망명정부를 유치할 것을 계획했다. 미국 정부가 1951년 1월 12일 마련한 전쟁지도지침을 보면 유엔군은 일본으로 철수하고, 한국정부와 군경을 제주도로 이전시켜 저항을 계속할 수 있도록 지원한다 는 것이다.

미국이 극비리에 추진한 한국 정부의 제주도 이전계획에 포함된 대상인원은 행정부와 그 가족 36,000명,한국 육군 260,000명,경찰 60,000명,공무원ᆞ군인 및 경찰가족 400,0000명,기타 요원 등 총 100만 명으로 판단했다.미국은 어떠한 경우에도 한국인을 일본으로 이동시키지 않는다는 방침을 정했다.

망명시도 인정측 근거 가운데 야마구치현 관련 서술이 존재한다. 일본의 <야마구치현사> 의 총류편 현대2(山口県史 史料編 現代2)에서 6.25 전쟁 당시 아마구치 현 지사였던 다나카 다쓰오(田中 龍夫)의 회고를 기록하면서 여기서 일본 외무성에서 야마구치 현에 한국인 망명을 위한 시설을 지시했고 이과정을 다나카 지사가 외무성과 갈등을 빚은 일을 회고하고 있다.

이후 언론에서는 현사가 쓰여진 90년대부터 이 망명 캠프를 두고 이승만이 망명하려고 했다는 식으로 엮는데, 일단 이 망명 캠프가 이승만의 부탁으로 만들어 졌는지부터가 불분명하고 당시 미국 입장에서는 이승만이 망명하든 한국에서 죽든 적어도 반공시민들이 북한군에게 학살당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 대만의 경우처럼 한국인들을 피난시켜야 했는데 이것을 두고 이승만이 일본으로 망명하려 했다고 보기에는 증거가 부족하다.

망명정부 후보로 거론된 곳들 중에서 적어도 야마구치현 망명정부설은 이승만의 생애를 봐도 일고의 가치가 없는 거짓이자 허구이다. 야마구치현은 옛 이름이 조슈 번으로 요시다 쇼인정한론을 설파하여 한반도를 침략하려는 야욕을 품은 지역이고 이토 히로부미, 야마가타 아리토모, 미우라 고로등 조슈 번 출신들 즉 야마구치현 출신들이 일제강점기를 열었으며, 조선총독들 역시 조슈 번 출신이거나 조슈 번의 영향력 하에 있었던 일본 육군 출신들이었다. 이승만의 독립운동은 조슈 번(야마구치현)에 맞서 독립을 쟁취하는 대결이었던 것이다. 그런 철천지 원수들이 지배하는 지역에다 망명정부를 세운다는 발상은 도저히 생각할 수가 없다. 윗 문단에서도 하와이에서 외롭게 일본 제국주의와 싸웠다는 서술이 있는데 일본 제국주의자들의 근거지가 야마구치현이다.

그리고 위의 서술에서 이승만이 아니라 미국이 망명정부 추진에 더 적극적이였으며, 한국정부는 제주도로, UN군은 일본으로 피신하려 했다는 계획이 구체적으로 서술되어 있다, 즉 당시 망명 캠프 관련 기록은 오히려 이승만 측의 망명 거부를 서술을 뒷받침해주는 근거로 볼 수 있다.

2015년 6월 24일에 KBS에서는 단독 "이승만 정부, 한국전쟁 발발 직후 일 망명 타진"이라는 뉴스 기사를 내서 논란이 일어나기도 했는데 여기서 야마구치 현사에 '(1950. 6. 27)'이라는 문구로 원문에는 없는 날짜를 날조해서 넣었다. 후에 KBS는 이 가짜뉴스로 징계도 받았다. 그리고 단독 보도라고 했지만 이미 일본의 산케이 신문에서 1996년 4월14일에 보도한 바 있으며 그 다음날 조선일보(1996.04.15/사회/37면)에서조선일보를 시작으로 동아일보, 경향신문, 한겨레 등도 교도통신 등을 인용해 보도했었다.



[1] 김구는 국민의회(國民議會)를 소집해서 이승만을 주석, 자신을 부주석으로 추대했다.## 국민의회(國民議會)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입법기관이었다.#[2] 3.1 운동 직후인 1919년부터 이미 이승만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대통령으로 추대된 적이 있었다. 해방 직후에는 상기된 바와 같이 1945년에 박헌영여운형에 의해 조선인민공화국 주석으로 추대되었고, 1947년에는 김구에 의해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으로 추대되었다. 그 정도로 대중들 사이에서 명망 높은 독립운동가였다.[3] 발간 당시에는 별 관심을 받지 못했으나 몇 달 뒤 진주만 공습이 일어나자 인지도를 얻게 되었다.[4] 서재필이 창간한 독립신문은 2년 앞선 1896년 창간되었으나 주 3회 발간됐기 때문에 일간지는 아니었다. 독립신문이 일간으로 바뀐 시점은 1898년 7월로 매일신문보다 늦다.[5] 이승만이 1941년에 미국에서 출판한 일본 내막기에서도 이 부분을 지적하면서 미국인들의 치부를 자극했다. 펄 벅은 당시 한 잡지에 기고한 서평에서 '조미수호통상조약을 미국이 1905년에 수치스럽게 파기했다는, 미국인들 대부분이 모르고 있는 사실을 이승만이 지적해줘서 기뻤다'고 썼다.[6] 다만 교포들을 대상으로 활동한 건 주로 안창호였고 이승만은 주로 미국 현지인과 지식인들을 대상으로 한국의 실상을 알리고 여론 조성을 하는데 집중했다.[7] 조선총독부 경무국 상해정보(고경 제245호 : 1923.1.28) <일본외교사료관자료>[8] "이승만은 자신의 라이벌들의 도전에 어떻게 대응하였는가? 그는 한길수, 김원봉, 김규식 등을 모두 공산주의자로 몰아부쳤다." - "우남이승만과 건국사"[9] 심지어 현 대한민국 정부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이어받았다는 것을 생각하면 아는 결코 가볍게 넘어갈 문제가 아니다.[10] 특히 아일랜드는 독립 후에도 독립운동가들 사이의 갈등이 해소되지 못했고, 이는 아예 아일랜드 내전으로까지 번졌다.(당장 아일랜드 독립운동의 거물 마이클 콜린스를 암살한 사람이 독립운동 단체인 IRA 단원이었다) 알제리 전쟁에서도 독립운동을 주도한 FLN이 프랑스인뿐만 아니라 다른 알제리 독립운동 단체인 MNA 당원들을 학살하기도 했으며, 앙골라 내전도 독립 후 독립운동 단체들의 권력 투쟁이 주된 요인이었다. 짐바브웨에서도 독립한 조국의 시가에서 독립운동 단체들이 '전투'를 벌여 15명이 목숨을 잃기도 했으며, # 로버트 무가베파 독립군 출신 인사들이 주축이었던 제5여단이 구쿠라훈디 학살 과정에서 은데벨레족뿐만 아니라 조슈아 은코모파 독립군 출신 인사들을 학살하기도 했다. '조국의 독립/독립한 국가의 발전'이라는 같은 생각으로 똘똘 뭉쳐야 했던 독립전쟁 과정/독립 후에 있던 유혈 갈등이 이 정도였으니 독립운동 과정에 있던 독립운동가들 사이의 무혈 갈등도 한국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았을 수밖에 없는데, 그도 그럴 것이 동티모르에서는 아예 '동티모르가 포르투갈으로부터 독립하려면 인도네시아자치령으로 합병되어야 한다'고 진지하게 주장한 독립운동가까지 있어서 다른 독립운동가들에게 엄청나게 욕을 먹었다.[11] Hyun Soon, 《My autobiography by the reverend Soon Hyun 1878-1968 : with historical documents, photographs and analysis》, Chapter 16. 三一運動과 我의 使命, 2003, Institute for Modern Korean Studies Yonsei University Press.[12] 여담으로 동티모르의 또다른 과거 식민지배국이었던 포르투갈계 혼혈이다.[13] 만약 모병제 전환시 처우가 획기적으로 올라갈 거란 생각이 든다면, 당장 눈을 들고 초급 간부들 처우를 보면 된다. 기준을 최대한 깐깐하게 잡기 위해 의무복무만 채우려고 온 간부들을 모조리 거른다고 해도, 100% 자의로 군대에 온 여군(특성상 의무복무만 채우려고 온 사람은 있을 수 없다)이나 군무원(역시 의무복무와는 관계가 없다)들 처우를 보면 '징병제라서' 문제인 게 결코 아니다.[14] 50년대에 인구 2/3~3/4 가량이 농민이었다.[15] 대학은 커녕 학교 자체를 못 다닌 경우가 많아서 군에서 배운 기술로 먹고 살게되는 경우도 많았다.[16] 유영익, '1950년대를 보는 하나의 시각', "한국근현대사론", 262p[17] 한국전 참전 장성들의 회고에 자주 나오는 내용인데, 정작 청년들을 모아서 입대를 시켜도 군수물자 지원이 제대로 안돼서 훈련도 못시켰다는 이야기들이 많다.[18] 물론 당연하지만 지금까지 징병제가 유지되는 것은 이승만 때문이 아니다.[19] 심지어 이 자는 '이승만의 양자' 소리까지 들을 정도로 이승만의 최측근이었다.[20] 반민특위 해체 후 고향에서 국회의원으로 당당히 당선되었다가 교통사고로 죽었다.[21] 다만 모든 친일반민족행위자가 이승만을 지지한 것은 아니다. 주요한경향신문에 이승만 정권을 비판하는 칼럼을 싣다가 걸려서 경향신문이 폐간당할 정도였고, 박중양은 이승만을 비난하다가 정신병원에 끌려갔다. 간도특설대 출신 최남근은 아예 남조선로동당에 가담했다가 처형당했다. 이승만 관련은 아니긴 하나 신상묵은 유신 반대 운동을 하다가 수감된 바가 있으며, 이협우 역시 반유신 활동을 한 것으로 보인다.[22] 해외에서도 소급입법금지의 예외를 규정하는 경우는 꽤 있다. 가령, 남미의 경우 군사 독재 관련 과거사에 관해서는 소급입법의 예외로 둔 사례가 있으며 그 옛날 나치 문제, 기타 전쟁 범죄의 경우도 문제가 발생한 당시의 당사국에서는 처리가 곤란한 문제인 바 소급입법의 예외로 규정하곤 한다.[23] 사실 일각의 단편적인 이해와 달리 북한 역시 최승희, 황철, 문예봉 등 친일 경력이 있더라도 자신들의 정권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되는 인물들은 기용했다.[24] 그나마도 민간의 움직임이었지 국가적 움직임은 없었고 친일인명사전도 여야간 정치적 수단으로 악용되는 등 수많은 난항을 겪었다.[25] 보도연맹 학살 사건 당시 독립운동가도 처형당했다.[26] 사실 광복 직후 문맹률이 78%에 달했던 상황에서 국가 운영과 유지를 위해 실무 부역자(공무원, 법조인 등)들과 군인, 경찰들은 울며 겨자 먹기 격으로 등용해야 할 수밖에 없었다.(이는 타 식민지 국가들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국가 운영에 써먹을 수 있는 사람 대다수가 친일부역자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이승만의 친일파 청산 실패가 진짜로 비판받아야 하는 이유는 노덕술, 박종표(신상묵의 부하로 김주열의 시신을 유기해 3.15 의거의 단초를 제공한 인물이다)처럼 없어도 국가 운영에 아무 지장이 없고 있으면 오히려 해만 될 자들까지 모조리 면벌부를 주며 등용했다는 것이다.[27] 역대 한국 대통령들 가운데 어느 누구도 해군을 동원해서, 더구나 발포까지 하면서 독도 영해로 넘어오는 일본 어민들을 체포해서 잡아가두는 초강수를 둔 사람은 없었다.[28] 월간조선에 인용된 이른바 '왜관성명'으로, 한국일보 기자 출신인 박실(朴實) 전 의원의 《벼랑 끝 외교의 승리》(청미디어)에 따르면 부산에서 육군병원에 문병 갔다가 한국어를 잘 못하는 부상병을 발견했는데, ‘일본에서 온 군인들이라 그렇다’는 설명에 미국이 자신도 모르게 일본 군인을 참전시킨 것이라고 오해한 이승만이 “미국이 일본인을 미군에 넣어 참전시켰는데, 우리는 공산군과 싸우던 총부리를 일본으로 돌려 싸우겠다”고 한 발언이 저렇게 전해진 것이다. 나중에 가서 그 부상병은 일본 군인이 아니라 교포(자이니치) 출신 의용병임이 밝혀졌지만, 당장 북한군을 코앞에 둔 상황에서 일본군이 미군에 끼어 한국 땅에 와 있다는 오해만으로 저런 반응을 보였을 정도니 이승만의 반일 감정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하고도 남는다. #[29] "역정: 나의 청년시대- 리영희 자전적 에세이", 창작과비평사/ 1988년/ 370쪽[30] 자세한 것은 식민주의/영향 문서 참조.[31] 『6.25와 李承晚 : 프란체스카 亂中日記』, 耆婆郞, p. 379-381[32] 이처럼 이승만의 강경한 반일은 위에서 기술된 것처럼 강대국 틈바구니 속에 끼인 한국이 강력한 국가가 되어야만 동아시아 전체에 평화가 유지될 수 있다는 군사지정학적인 신념이 그 밑바탕에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심지어 말년에 하와이유폐된 후, 경제 개발을 위해 일본과의 관계를 개선하려는 박정희 정부에도 부담이 되어서 환국이 불허됬을 정도로 죽을 때까지 반일을 고집하였다.[33] 강준만 저/ 한국 현대사 산책 1950년대편 2권 261~264쪽[34] 강준만 저/ 한국 현대사 산책 1950년대편 2권 166쪽[35] 당시 미국 국무부 내부에는 한국을 희생해서라도 일본의 세력 팽창을 이루어내려는 친일 성향의 미국인 관리들이 상당히 많았다. 이승만의 국제 정세를 보는 안목이 굉장히 뛰어났음을 보여주는 증거.[36] 강준만 저/ 한국 현대사 산책 1950년대편 2권 270쪽[37] 중화민국과 일본은 1954년에 중일전쟁에 대한 강화조약을 체결해 외교관계를 회복했고, 장제스는 2차대전 승전 후 친일 세력을 강경하게 처벌한 것과는 달리 대만으로 피난간 이후에는 현지의 식민 체제 협조 세력에 대해 온건하게 대해준 편이다.[38] 강준만 저/ 한국 현대사 산책 1950년대편 2권 271쪽[39] 강준만 저/ 한국 현대사 산책 1950년대편 3권 236쪽[40] 이승만 집권기의 한국은 미국이 경제 원조를 끊으면 당장에 나라가 망할 만큼 경제 사정이 매우 부실했다. 그런 상황에서도 이승만은 미국의 제안을 거부했을 만큼, 반일 신념이 무척이나 강했던 것이다.[41] 이승만이 "공산당이었다면 부모 형제라도 용서하지 말고 처단해야 할 것이다."라는 말을 남겼을 정도로 극도의 반공주의자였다는 것을 감안하면, 비록 돕기 위한 목적이라 하더라도 일본군이 한국에 들어온다면 그렇게나 증오하던 공산당에게 지는 한이 있어도 일본부터 쫓아내겠다고 말한 이승만이 얼마나 일본을 진심으로 증오했는지 알 수 있다.[42] 싫증나는, 짜증 나는, 골치 아픈, 비호감 드는 이승만[43] 미국이 제거를 실제로 실행하지 못한 이유도 이승만에 대한 한국인들의 지지도가 워낙 높아서 제거했다간 역효과만 날 것 같아서였다.[44]존 하지는 문제가 많았는데 캘리포니아 주립대의 제임스 매트레이 교수는 미국이 그를 미군정 사령관으로 임명한 건 실책이었으며 그는 한국의 역사나 한국인에 대해 아는게 아무것도 없었고 행정경험도 없었기 때문에 정부조직을 이끄는 일에 문외한이었다고 평했다.[45] 반공포로 석방은 6월 18일[46] 중공군 참전 직후 2대 유엔군 사령관으로 부임한 매튜 B. 리지웨이 장군조차 "군인의 본분은 다하겠으나 우리가 왜 이 고약한 냄새를 풍기는 작은 나라를 지켜야 하는지 잘 모르겠다."며 한국전쟁에 부정적인 의중을 비췄을 정도였다.[47] 필리핀 루손섬에 위치한 반도로, 태평양 전쟁 당시 미군이 이곳의 좁은 회랑에서 포위 섬멸전을 당했다.[48] 한반도가 해양세력과 대륙세력의 교두보 역할을 수행한다는 주장.[49] 제6조: 본 조약은 무기한으로 유효하다. 어느 당사국이든지 타 당사국에 통고한 후 1년 후에 본 조약을 종지(終止, 종료)시킬 수 있다.[50] 이 발언 이후 미국은 1949년 4월 나토조약, 1951년 8월 미-필리핀 상호방위조약, 동년 9월 미국-호주-뉴질랜드 안보조약 등을 체결했다.#[51] 자신들의 외교를 대나무 외교(대나무처럼 이리저리 휘되 꺾이지 않는다는 뜻)로 칭하며 완충지대 외교를 펼쳤던 태국조차도, 냉전이 표면화된 이후부터는 (주변국들이 공산화되었기 때문에) 자유진영에 가담해야만 했다.[52] 어느 정도냐면 사임 직전의 리처드 닉슨의 최저 지지율이 24%였다![53] 실제로 그렇게 됐다.[54] Despite Rhee’s open hostility against a cease-fire, the US successfully came to terms with the PRC and DPRK on an Armistice agreement that would end the war in 1953. As a means to disrupt this agreement, Rhee ordered the release of anti-communist North Korean POWs on June 18, 1953, the same day that North Korean, Chinese, and UN forces planned on signing the Armistice. In response, the US offered Rhee treaty negotiations if he agreed to no longer disturb cease-fire negotiations.[55] 근데 이 사건을 통해서 미국은 여차하면 이승만을 축출할 계획인 에버레디 계획 실행을 진지하게 검토하였다.[56] 물론 엄밀히 말하면 남베트남과 라오스는 사실상 유기한 것에 가깝긴 하고, 이라크/아프간 같은 경우는 미국 내에서의 여론이 파탄나기도 하였고, 또한 명분 및 실익마저 사라졌기에 철수한 것이다.[57] 독립운동가 폄하, 일본 제국의 전쟁범죄 부정, 반일 민족주의 혐오, 식민지 근대화론(정확히는 식민지 시혜론) 주장 등 종일(從日)의 모습을 보이면서도 반일의 대표격인 이승만을 '건국 대통령'으로 찬양하는 심히 모순적인 행각을 보여주고 있다. 뉴라이트 인사들이 2019년에 공동저술한 책인 반일 종족주의에서는 한국의 반일 정서가 1980년대에 들어서 생겨났다거나 혹은 좌파들이 만든 것이라고 서술하고 있으나 이는 이승만의 사례만 봐도 얼마든지 반박이 가능한 허황된 주장이다. 1950년대를 쭉 집권했던 이승만 정부 당시 있었던 평화선 선포 같은 정책이나, 이승만 개인이 강경한 반공주의자이면서 반일 민족주의자였다는 사실만 봐도 뉴라이트의 주장은 터무니없는 정치적 진영 논리에 불과한 것을 알 수 있다. 뉴라이트 인사들 중 일부는 심지어 한국의 독도 영유권을 부정하거나 한국이 독도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 불법이고 저급한 반일 민족주의의 상징이라고 비난을 하기도 하는데 그 주장대로라면 평화선을 선포하고 해군까지 동원해 일본 어민들을 체포, 사살하면서 독도를 지킨 이승만은 불법으로 독도를 점거한 저급한 반일 민족주의의 상징이 되어버린다.[58] 정권의 잘못이 대한민국 체제에 대한 반감으로 이어지는 오류를 막을 수가 있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이승만"이라는 공식이 수립되어 버리면, 이승만은 양민학살을 너무 많이 저질렀기 때문에 '민족 vs 대한민국'이라는 대결구도로 이어질 수 있는 위험이 매우 크다.[59] 박정희가 이승만을 복권시키지 않고 이승만을 과감하게 버린 것에는 다 이유가 있을 것이다. 4.19 혁명대한민국에게 내려 준 선물은 생각 보다 매우 큰데 이를 역행하여 이승만을 국부로 추대하는 것은 매우 큰 실수가 될 수 있다. 이승만 정부와의 공감대 형성은 이승만이 저지른 양민학살에 대한 죄책감을 대한민국 국민들에게 전파하는 행위이고, 민족 중심 사관이 아닌 이승만의 관점에서 이승만이 한 행동(양민학살)을 정당화 하려 할 경우 김일성이 저지른 악행에 대한 '양시론'이 생겨버릴 수 있는 위험이 매우 크다. 그러한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굳이 이승만과의 공감대 형성을 해야 할 책무는 없다.[60] 이는 베트남에서 일어났던 일과 동일하다. 남베트남에 반감을 가진 남베트남인들은 남베트남(자기 진영)을 '국가'로 여겼고, 공산주의자들은 사회주의 베트남을 민족 중심 관점으로 바라보았다. 동서불문 '민족'이 존재하는 나라에서는 국가를 먼저 내세우고, 민족주의에 역행하면 매우 불리해진다. 민족이 분단되어 있는데, 민족 중심 관점을 버리고 국가 중심 관점을 가지면 오래 못간다. 민족 중심 관점을 가지면 '사상'의 문제이지만, 민족 내부문제를 '국가 대 국가' 문제로 바라보면 민족을 적대하는 '동족살해'가 되어버린다. 오랜 역사의 민족이 뻔히 존재하는데 '국가'가 최근에 '건국'되었다? 이리 되어버리면 정부와 국가를 동일시 하는 오류가 생기는 것은 덤이고, 수천년의 역사와 단절 될 수 있다. 대한민국을 국가가 아닌 '체제'로 여겨야 하는 이유다. 그리고 국가는 고조선부터 시작 된 오랜 역사의 '한국(Korea)'이다.[61] 6.25 전쟁은 '국가 vs 국가'가 아닌 한 나라 안에서 벌어진 '사상 vs 사상'이었다. 즉, 사상의 문제였다.[62] <건국절>을 논하며 대한민국 내셔널리즘을 추구하는 것은 완전히 국민 정체성을 바꾸는 것이고 너무나도 정치적 리스크가 크다. 고조선 때부터 있어왔던 '한국(Korea)'이라는 나라는 1948년에 '건국'된 것이 아니란 것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민족주의와 대립각을 세우면 아니된다.[63] 실제로도 뉴라이트가 이승만 외의 다른 독립운동가들을 폄하하는 것과 북한이 김일성 외의 다른 독립운동가들을 폄하하는 것, 그러면서 온전히 이승만/김일성만의 노력으로 한반도가 독립할 수 있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놀라울 정도로 비슷하다.[64] 심지어 이승만 집권기인 1956년에 '건국대통령의 창업'이라는 국책영화가 만들어진 바가 있다.[65] 당연히 이는 정부 수립과 건국을 별 구분 없이 혼용했던 거에 더 가깝다. 실제로 2006년 건국절 논란이 처음 제기될 때까지 그래왔다.[66] Prime Minister의 준말[67] 영부인이 쓴 사료기 때문에 신뢰성에 관해 정치적으로 논란이 되기도 하나 귀중한 역사적 사료임.[68] 정일권 <전쟁과 휴전> 86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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