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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시다 쇼인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375px-Yoshida_Shoin2.jpg
[ruby(吉田,ruby=よしだ)] [ruby(松陰,ruby=しょういん)]
(1830년 8월 4일 ~ 1859년 10월 27일, 향년 29세[1])

1. 개요2. 생애3. 사상
3.1. 일군만민론3.2. 정한론3.3. 화혼양재
4. 평가5. 대중매체에서6. 기타7. 둘러보기

1. 개요

파일:syouin.jpg
요시다 가문의 가몬.

일본 조슈 번(현 야마구치현) 하기[2] 출신의 하급 무사, 사상가, 교육자. 본명(諱)은 '노리가타'(矩方, 구방)이며, '쇼인'은 그의 호이다. 통칭은 '토라지로'(寅次郎)이다.

이른 나이에 죽어 생전에 큰 업적을 남기지는 못했지만 메이지 유신의 주역들이 그의 가르침[3]을 받은 조슈 번의 제자들로, 그들의 사상적 근간을 제공했기 때문에 오늘날 일본 일각에서 선구자로 받들여지는 인물이다.[4]

반면 한국에서는 인지도가 높지 않지만, 아는 사람들도 정한론[5] 훗날 일본 군국주의의 원조 격에 해당하는 주장을 한 것이 부각되어 부정적인 평이 지배적이다.

살림지식총서 - 《요시다 쇼인: 일본 민족주의의 원형》

2. 생애

그의 원래 성씨는 스기(杉) 씨로, 전국시대 당시 스오 지방을 다스렸던 오우치 가문의 중신을 맡았던 가문이었다. 그러다가 1551년에 오우치 요시타카가 다이네이지의 변으로 죽은 뒤 스기 가문은 모리 측과 오토모 측으로 분열되었다. 쇼인의 집안은 모리 측에서 살아남은 이들의 방계 후손이었는데, 그의 아버지인 스기 츠네미치(杉常道)[6] 때에는 이미 가난한 하급 무사 집안이 된 상태였다.

5세 때 야마가류 병학(兵學)[7]의 사범인 숙부(작은 아버지)의 양자가 되었다. 그런데 양부는 그가 6세 때 죽어, 불과 여섯 살의 나이에 한 집안의 호주(戶主)가 되었다. 하지만 나이가 어렸던 탓에 호적상으로만 양자로 하고, 원래 자랐던 부모님 집에서 자랐다. 그리고 가독을 잇는 자는 집안 대대로 이어 온 직업을 계승하는 것이 당연한 시대였기에 병학 사범이 되는 숙명을 짊어졌다. 그래서 또 다른 숙부인 타마키 분노신에게서 스파르타식으로 병학을 배웠다.[8]

12세 때는 조슈 번 13대 번주 모리 다카치카 앞에서 강의를 하고 칭찬을 받았다. 강의한 내용은《무교전서》라는 당시의 교범 중 하나였다고 한다. 조슈 번이 위치한 스오국, 나가토국 일대는 전국시대 이전부터 이미 일본에서 문화적으로 선진적인 지역이었다. 수백 년 동안 해당 지역을 다스렸던 오우치 가문은 백제 부여씨 왕족의 후손을 자칭하며 일찍부터 선진 문물을 적극 받아들이고 학문을 장려했으며 전국시대의 다이묘들이 대부분 무(武)를 숭상했던 것과 달리 문 • 무를 모두 중요시했고 오히려 문치를 더욱 중요시하여 문관들을 무관들보다 우대하기도 했다. 조선과 꾸준히 교류를 시도하여《조선왕조실록》에 거의 200년에 걸쳐서 수백 건의 기사가 등장한다.《조선왕조실록》에서 대내전(大內殿)이라고 언급된 세력이 바로 오우치 세력이다. 오우치씨가 멸망하고 모리 가문이 해당 지역을 차지한 이후에도 그런 풍토는 상당히 남아있었고 더군다나 조슈 번은 일본의 다른 여러 제번들과 달리 사족(士族)의 비율이 굉장히 높은 번이었다. 애당초 문화적으로 발달해 있었기도 했거니와 세키가하라 대전 이후 모리 가문이 120만 석에서 30만 석으로 감봉되고 영지가 스오, 나가토 2국으로 축소된 이후에도 기존 가신단이 그대로 잔류했기 때문이다. 일본에서 당시 법도로 사족은 농업에 종사할 수 없었으므로 자연스럽게 상공업과 학술이 발달할 토대가 되었던 것이다.

19세 때부터 사무라이 자제들을 위한 공립 교육기관인 번교 명륜관(明倫館)에서 병학의 정식 사범으로 학생들을 가르쳤다. 한편 이즈음 동아시아는 서양 열강 세력의 침략으로 급변하던 시기였다. 쇼인은 아편 전쟁의 사정을 알게 되었고, 자신이 배웠던 구닥다리 병학으로는 서양 세력을 이길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았다. 그래서 서양의 학문과 기술을 배워야 한다고 생각했다.

1850년, 20세의 쇼인은 규슈(九州)를 비롯한 일본 전국을 떠돌면서 여러 선생을 찾아가 가르침을 청하고, 세상 실정을 파악했다. 나가사키 데지마에서는 네덜란드 선박에 직접 올라가 살펴보기도 했고, 에도(江戶)에서는 사상가 사쿠마 쇼잔(佐久間象山)을 만나기도 했다. 러시아의 침략을 염려하여 도호쿠 지방을 살피러 갔을 때는 번의 통행 허가서를 기다리지 못해 탈번까지 했다.[9]

1853년(23세) 흑선내항 시기에는 사쿠마 쇼잔과 함께 직접 우라가로 찾아가 미국의 크고 아름다운 증기선을 목격했다.
"이제 병학자는 불학무술(不學無術)의 왜인(倭人), 실용적인 학문이 아니라 아무 쓸모도 없고 입만 번지르하게 되었습니다."
흑선을 보고난 후 숙부 타마키에게 보낸 편지 중에서

현재의 일본의 국력으로는 서양 세력을 물리칠 힘이나 기술도 없다고 느껴 적을 물리치기 위해서는 적을 알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스승 사쿠마 쇼잔의 권유도 있었기에 미국 유학을 결심, 1854년 3월, 나룻배를 훔쳐 제자이자 친구인 카네코 시게노스케(金子重之助)[10]미일화친조약을 위해 다시 내항한 페리 제독의 흑선 선단 중에서 해안에 당도하지 않았던 기함 포하탄(USS Pawhatan)을 찾아가 밀항을 부탁했다. 그러나 페리 제독에게 거절당해 그대로 쫓겨났다.

이후 쇼인과 카네는 시모다 부교소에 자수했고, 조슈 번으로 압송되어 14개월간 감옥 생활을 했다. 전해져 내려오는 이야기로는 감방 동료들끼리 서로 자신의 잘 아는 분야를 가르치고 배웠다고 한다.[11] 그러나 수감 도중 카네코는 위생 관리가 형편없던 서민 감옥에서 병사했다.

1855년 12월, 석방된 쇼인은 근신 처분을 받아 하기의 고향집으로 돌아와 유배 생활을 보냈다. 요시다 쇼인의 소문을 듣고 여러 학생들이 찾아왔지만 유배 중인 죄인의 신분에서 정식으로 학원을 차릴 수는 없어 막부의 법을 위반하는 불법 과외 같은 개인 지도를 시작했다. 처음에는 2평도 안 되는 자신이 거처하는 단칸방에서 찾아오는 학생들을 1대 1로 가르쳤고, 나중에는 현재까지 남아있는 큰 교실을 지어 옮겼다. 점차 모여드는 학생들이 많아지자 1857년 원래 숙부 타마키 분노신이 맡았던 쇼카손주쿠(松下村塾, 송하촌숙)의 숙장이 되어 약 2년간 제자들을 가르쳤다. 이는 조선으로 치면 마을의 작은 서당훈장으로, 조슈 번의 정식적인 인정을 받은 숙장으로서 가르친 기간은 단 5개월뿐이었다.

1858년, 일본에게 불리한 불평등 조약미일수호통상조약고메이 덴노의 승인을 받지 않은 채 체결한 에도 막부에 쇼인은 분노했다. 그래서 에도 막부의 고위 관료 로쥬(老中) 마나베 아키카츠를 납치해서 덴노에게 양이를 맹세할 것을 건의하고, 그것이 받아들이지 않으면 암살할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제자들 전원이 만류했다.

명나라명장이자 유학자인 왕양명이 일으킨 양명학의 영향을 받은 쇼인은 실천을 중시했다. 그래서 대의를 위해 나를 희생해서 죽을 수 있느냐, 아니면 일단은 목숨은 소중하니까 죽을 필요는 없고 지금은 참고 나중에 상황을 봐서 천천히 개선해도 되지 않느냐는 토론에서 "죽어서 불멸의 명성을 얻는다면 언제 죽어도 좋다. 살아서 대업을 이루고 싶다면 어떡하든 살아야 한다. 행동을 일으키면 그 뜻(志)은 반드시 후세에 전해진다."라고 주장하며, 실행을 강조했다. 그 정도로 존황양이를 위해서라면 직접적인 행동도 서슴지 않았던 행동파였다.

1858년부터 에도 막부에서 난키 파에 속하는 최고 권력자였던 대로(大老, 다이로) 이이 나오스케는 (히토츠바시 파 뿐만이 아닌) 막부에 반대하는 인사들을 탄압하는 안세이의 대옥사를 일으켰다. 에도 막부를 비판하고 도막 운동을 전개하는 쇼인을 위험분자로 판단한 번에서는 다시 그를 붙잡아 노야마 감옥에 투옥시켰다.

1859년, 존황양이 지사였던 우메다 운빈이 막부에 의해 체포되자, 요시다 쇼인은 그가 하기에 있을 때 만났다는 죄로 에도로 압송되었다. 평정소(評定所)에서 막부가 쇼인에게 심문한 것은 우메다 운빈과 어떤 대화를 나눴는가 였는데, 쇼인은 갑자기 묻지도 않은 막부의 고관인 로쥬(老中) 마나베 아키카쓰 암살 계획을 자백해버렸다. 결국 쇼인은 사형 판결을 받았지만 죽음에 임박해서도 야마토다마시(大和魂, 야마토 / 일본의 혼)를 외쳤다.
"かくすれば かくなるものと 知りながら やむにやまれぬ 大和魂"
이렇게 하면 이렇게 될 줄 알면서도 멈추려야 멈출 수 없는 야마토다마시[12]
쇼인이 옥중 생활 중 남긴 와카(和歌).

그해 10월 27일 쇼인은 참수되었다. 이는 안세이 대옥의 마지막 처형이었다. 그의 시체는 벌거벗겨져 나무통에 넣어진 채로 아무렇게 매장되었으나, 후에 격분한 제자들이 막부로부터 시체를 빼앗은 다음 예를 갖추어 이장했다.

요시다 쇼인이 죽은 후에 쇼카손주쿠는 숙부 타마키 분노신이 다시 이어받아서 운영했다. 요시다 쇼인의 영향을 받은 제자들인 타카스기 신사쿠, 쿠사카 겐즈이, 이노우에 가오루, 이토 히로부미 패거리는 양이 사상에 따라 주일영국공사관 방화사건(1862년)이라는 테러를 실행에 옮겼다.

3. 사상

3.1. 일군만민론

초망굴기(草莽崛起)
민초들이여 일어나라
- 1859년 쇼인이 지인에게 보낸 편지 중에서

저서 《강맹차기》(講孟箚記)는 《맹자》(孟子)를 실천적으로 해석하여 널리 알려졌다. '천하는 천황이 지배하고, 그 아래 만민은 평등하다', 즉 천황 아래에서 만인이 평등하다는 일군만민론(一君萬民論)을 주창했다. 이는 막부를 부정하는 사상으로 당시로서는 굉장히 급진적인 사상이었다. 그리고 《맹자》의 영향을 받아 일반 대중들이 들고 일어나 막부를 타도하자는 혁명을 주창했다.

일군만민론에 따라 쇼인은 기존의 교육자들과 달리 교육대상에 신분의 구별을 두지 않았다. 그래서 쇼카손주쿠에서 이토 히로부미 같은 출신이 낮은 사람들도 요시다 쇼인의 가르침을 받을 수 있었다. 그리고 수제자 타카스기 신사쿠는 쇼인의 사상을 실행에 옮겨 일반 민중으로 구성된 민병대키헤이타이(기병대)를 창설했다.

이 사상이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는 훌륭한 논조로 여겨질 수도 있지만, 놓치면 안되는 점은 천황에 대한 맹목적인 신념과 ‘일본은 신의 나라다.’라는 선민의식을 기반으로 한다는 사실이다.

3.2. 정한론

''무력 준비를 서둘러 군함과 포대를 갖추고 즉시 에조(홋카이도)를 개척하여 제후(諸侯)를 봉건(封建)하고 캄차카와 오호츠크를 빼앗으며, 류큐(오키나와)에 말하여 제후로 만들고, 조선을 책하여 옛날처럼 조공을 하게 만들며[13] 북으로는 만주(満州)를 점령하고, 남으로는 대만과 필리핀 루손 일대의 섬들을 노획하여 옛날의 영화를 되찾기 위한 진취적인 기세를 드러내야 한다."
- 《유수록》 (요시다 쇼인 저, 1854) 16쪽
国力を養い、取り易き朝鮮、満洲、支那を切りしたがえ、交易にて魯墨に失うところは、また土地にて鮮満に償うべし
"국력을 키워, 뺏기 쉬운 조선, 만주, 중국을 복종시키고, 교역에서 러시아, 미국에게 잃은 것은, 다시 토지로서 조선과 만주로부터 이를 충당해야 한다."
- <옥시장(獄是帳)>

존왕양이론자였던 쇼인은 무작정 서양을 배척한 것이 아니라, "강대국이 약소국을 정복하는 것은 당연하고 필연적인 것"이라는 제국주의 논리를 수긍했다. 그래서 서양 열강이 일본을 노리는 것은 서양 열강이 나빠서가 아니라 일본이 약하기 때문이고, 일본은 서양의 기술과 문물을 배워(부국강병) 국력을 길러 서양 열강과 대등한 관계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특히 쇼인은 일본의 국력을 키워 서양 열강에게 빼앗긴 것을 조선 등 주변 아시아의 약소국들을 약탈해 되찾아야 된다고 주장했다. 일본은 신의 나라라는 선민의식과 자국 우월주의, 민족주의, ‘진구 황후가 조선을 정벌했다.’는 엉터리 이야기가 담긴 『고사기(古事記)』의 내용과 ‘강대국이 약소국을 정복하는 건 당연한 일’이라는 제국주의적 마인드에 빠져 주변국을 정복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었다.

한국에서는 <정한론>의 선구자로 알려져 있지만 그 실상은 독창적으로 주창한 사상이 아닌 아이자와 야스시의 신론(新論)같은 이 시절 일본에 퍼진 민족주의 침략사상에 동조한 것이다. 사실 본인은 애초에 만 29세에 죽은 막말의 흔한 무사 교육자라, 제자들이 없었으면 역사에 단편적으로 기록된 일개 하급무사 정도로 남았을 가능성이 크다.
에조지(지금의 홋카이도)를 개간하여 여러 대명들에게 봉토를 주고 틈을 봐서 캄차카, 오호츠크를 탈취하고 류큐도 타일러 내지內地의 제후와 마찬가지로 참근參勤시키고 회동會同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 또 조선을 옛날과 마찬가지로 공납하도록 촉구하고, 북으로는 만주의 땅을 분할하여 빼앗고, 남으로는 대만, 루손(지금의 필리핀)의 여러 섬을 우리 수중에 넣어 점차 진취의 기세를 보여야만 할 것이다.
- 『유수록』

홋카이도 개척부터 류큐 흡수, 조선의 속국화, 만주대만필리핀의 영유화를 주장하기도 했지만 사실 이 당시 일본은 다른 나라를 쳐들어갈 국력도 없었고, 서양 열강의 침략 위협에 혼란을 겪는 어려운 시기라 현실성 없는 주장이었다.
조선, 만주에 진출할 때 다케시마(울릉도)[14]는 첫 번째 발판이다.
영국이 다케시마를 이미 점거했다면 그대로 두면 안 된다. 언제 일본에 쳐들어올지 모른다. 조슈번은 다케시마와 조선을 급선무로 점령해야 한다.(1858년 6월 28일)

다케시마는 겐로쿠(元祿, 1688~1704년) 시절 조선에 넘겨주었다. 그러나 지금은 대변혁의 시기이므로 조선에게 ‘섬을 비워두면 무익하므로 우리가 개발해주겠다.’라고 교섭하면 그들도 납득할 것이다. 만약 서양세력이 다케시마를 점령하면 조슈번으로서는 대단히 큰 위험에 처하게 된다.(1858년 7월 11일)

오스트레일리아(호주)는 여러 국가가 앞 다퉈 얻으려고 한다. ~ 만약 일본이 이곳을 손에 넣으면 분명히 큰 이익이 될 것이다. ~ 조선은 옛날에 일본에 속해 있지만 지금은 거들먹거리고 있다. 원래대로 되돌려 놓을 필요가 있다.
- 「유수록(幽囚錄)」

이 밖에도 오스트레일리아를 차지하고, 울릉도를 조선과 교섭하여 일본이 개간하자는 주장을 했다. #, pdf 주의

3.3. 화혼양재

쇼인은 화혼양재(和魂洋才)를 주창했는데, 이는 일본의 정체성을 유지한 채, 서양의 기술만을 도입하자는 주장으로 조선동도서기, 청나라중체서용과 비슷한 개념이다. 후쿠자와 유키치탈아입구를 제창했는데, 탈아입구는 화혼양재보다 더 급진적인 사상으로 동양스러운 것을 모두 버리고 서양의 것으로 갈아끼우자는 것이다. 사쓰에이 전쟁시모노세키 전쟁을 통해 서구 열강들과의 무력 격차를 뼈저리게 깨달은 사쓰마 번조슈 번은 이후 화혼양재에서 탈아입구로 넘어가게 된다.

4. 평가

고인이 된 아베 신조 전(前) 내각총리대신은 옛 조슈 번인 야마구치현 출신이다. 그는 외무대신과 집권 자민당의 간사장을 역임하기도 했던 자신의 아버지 아베 신타로 장례식에서도 쇼인의 글을 바탕으로 추모사를 낭독했을 정도로 고향의 역사적 인물 쇼인을 존경했다고 알려져 있다. 총리 재선에 성공한 직후인 2013년 8월 13일에는 쇼인의 묘지를 방문해 무릎을 꿇고 참배하며 ‘쇼인 선생의 뜻을 충실하게 이어가겠다.’고 다짐했다. 2016년 말 국회에서 쇼인의 ‘이십일회맹사’ 이야기를 언급하며 러시아 푸틴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에 임하는 각오를 밝히기도 했다. 한편, 도쿄의 헌정기념관에는 역대 총리들의 좌우명이 걸려있는데 아베 신조의 좌우명은 쇼인이 그토록 강조했던 ‘지성’이다. 참고로 쇼인의 학생이었던 이토 히로부미의 좌우명도 이와 같았다.

초등학교 교과서에는 요시다 쇼인이 엄청 훌륭하고, 미래를 예측한 인물로 그려졌다. 요시다 쇼인은 조슈 번의 의도대로 타고난 천재이며 박학다식한 지식을 가진, 일본이 가야 할 길을 제시하고 미래를 내다 본 선각자라는 지위를 차지하게 되었다. 메이지 정부에서 정권을 잡은 조슈 번 출신 세력은 이런 식으로 요시다 쇼인의 우상화 작업을 했다. 그 여파가 지금도 남아서 일본 우익 세력에서 요시다 쇼인 하면 위대한 위인이라는 이미지가 자리잡았다.

2010년대 들어서 아베 신조 전 총리를 비롯한 일본 우익 진영 일각에서 그를 사상적 지주라고 치켜세우는 경우가 있다보니, 그에 따르는 반작용으로 요시다 쇼인을 비판적으로 재평가하려는 관점도 제기되는 중이다.

당시 조슈 번과 사쓰마 번이 도쿠가와 요시노부가 이끄는 에도 막부를 무너뜨리고 정권을 차지했는데, 조슈 번의 라이벌이었던 사쓰마 번에는 사이고 다카모리라는 걸출한 인물이 있었다. 그에 비해 조슈 번이 내세울 만한 인물은 (과격한 양이운동을 하다가 젊은 나이에 다들 요절했고, 결국 거슬러 올라가면 이들의 정신적 스승인) 요시다 쇼인이었다. 29세의 나이로 참수당한 동네 서당의 선생님이라 뭔가 대외적으론 크게 이룩한 업적도 없는 인물이었다. 위의 행적에서 드러나듯이 체계적인 근대 교육을 받은 적도 없는 인물이다. 물론 근대 교육을 받지 않았다고 해서 사상가가 될 수 없는 것은 아니지만, 대단한 사상가라고 쳐주기에는 보여준 것도 딱히 없다. 대부분의 위대한 사상가들은 고등 교육을 받고 스스로의 학문적 체계를 다진 후, 그 학문적 체계를 비판 혹은 개선하고자 하면서 이론의 기반을 다져나갔다.

이처럼 요시다 쇼인이 일본사에서 주목받는 것은 본인의 행적이나 사상이 특출났다기 보다는, 그의 제자였던 죠슈 번 출신 인사들이 메이지 유신과 일본의 근대화, 부국강병을 이끄는 주역으로 떠오르면서 수혜를 입은 측면이 더 강하다고 할 수 있다. 요컨대 '일본의 근대화를 이끈 사상가'보다, '일본 근대화 주역들의 스승'이 그에게 더 부합하는 수식어인 셈이다.
파일:요시다 쇼인 사카모토 료마 교과서에서 퇴출.jpg 파일:요시다 쇼인 사카모토 료마 교과서에서 퇴출2.jpg

2017년경부터 다케다 신겐, 우에스기 겐신, 사카모토 료마와 함께 실제 역사상 역할과 의미가 크지 않다는 이유로 고등학교 역사 교과서에서 지워야 한다는 움직임이 일기도 했다. 이후 어떻게 됐는지는 확인이 필요하다.

5. 대중매체에서

6. 기타


파일:external/www.yoshida-shoin.com/sonjyuku-zenkei8.jpg
파일:external/www.yoshida-shoin.com/monaksei-gunzou4.jpg
쇼카손주쿠의 내부 모습. 요시다 쇼인에게 가르침을 받았던 문하생들의 사진이 전시되어 있다.

7.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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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문 시오노 나나미(로마인 이야기), 아즈마 히로키(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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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사망 당시 나이를 보면 알겠지만, 위의 그림은 실제 생김새랑은 꽤 차이가 나는 것으로 여겨진다. 아무래도 교육자, 사상가라는 이미지와 권위를 부각시키기 위해 좀 더 나이가 든 모습으로 묘사했다고 할 수 있다.[2] 에도 시대 기준 인구 약 3만 명.[3] 물론 쇼인에게 배운 것은 동네 서당 수준의 교육이었고, 훗날 메이지 유신 주역들은 서양 유학을 가는 등 고등교육을 따로 받았다.[4] 특히 일본 우익 진영 일각에서 '사상적 지주'로 삼는 경우가 많은 인물이다. 사실 2000년대까지만 해도 근대 이전 인물이라 딱히 좌우로 갈려서 평가받는 인물은 아니었지만, 생전의 아베 신조가 존경하던 인물로 부각된 2010년대를 기점으로 이와 같은 기류가 강해진 측면이 있다.[5] 사실 조선뿐만 아니라 홋카이도, 오키나와, 만주, 대만, 필리핀까지 정벌할 것을 주장했다.[6] 통칭 유리노스케.[7] 일반적인 군사학 뿐만 아니라, 무사도 같은 전인교육을 합친 내용[8] 전해져 오는 에피소드로, 타마키 분노신과 어린 쇼인이《논어》를 읽던 중에 날벌레가 쇼인의 얼굴에 달라붙자 쇼인은 쫓으려고 손을 휘둘렀다. 그러자 타마키가 벌컥 화를 내면서 "너는 공(公)을 위해 일해야 할 몸인데, 어찌하여 겨우 사(私)적인 것에 신경을 쓰는 거냐?"라며, 쇼인을 심하게 꾸짖었다고 한다.[9] 에도 시대에는 관서에서 관동으로 넘어갈 때와 관동에서 다른 지역으로 벗어날 때는 굉장히 철저한 검문 및 통관 절차를 거쳐야 했다. 불온한 세력이 함부로 막부가 있는 에도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막고, 참근교대 제도에 따라 에도에 머물게 된 다이묘들과 그 가족들이 다이묘의 가족들이 에도를 함부로 벗어나는 것을 엄격하게 차단했기 때문이다. (특히, 높은 신분의 여성은 외부에서 관동 지역을, 또는 관동을 벗어나서 여행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때문에 에도 막부나 유력 다이묘가 발행한 통행 허가서는 일종의 보증서 역할을 했다.[10] 염색업을 하던 평민 출신으로 당시 23세이었다.[11] 여기서 여자 죄인을 만나 사랑에 빠졌다고도 한다.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감옥에서 핀 꽃>(獄に咲く花, 2010)[12] 의역하면 "내 이렇게 될 줄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는 민족의 혼" 정도로 해석될 수 있다.[13] 조선은 유사 이래 한 번도 일본에 조공한 적이 없다. 신화적 존재로 생각되는 진구 황후의 삼한 정벌 고사를 철석같이 믿었거나, 조선 통신사를 조공 사절로 오해한 듯하다. 막부에서는 통신사를 조공행렬이라고 대내 선전했기 때문에 착각하기 쉬웠다. 사실 일본 뿐만 아니라 동아시아 국가들은 무역하러 온 외국인들은 조공사절로 받아들이는 경우가 많았다.[14] 참고로 지금과 달리 당시 일본에서는 울릉도를 다케시마(竹島), 혹은 이소다케시마(磯竹島)라 칭했다.[15] 이외에도 앙숙이었던 사쓰마(薩摩) 번과 조슈(長州) 번이 손잡고 메이지유신을 이뤄낸 것처럼, 한·일도 손잡으면 함께 동북아가 발전할 수 있다.라는 발언도 했다.#[16] 독음: 닛폰노 야마토다마시이[17] 가령 기도 다카요시는 요시다 쇼인과 3살 차이로 후배 내지는 동생 뻘의 나이였고, 가장 나이 차가 큰 이토 히로부미도 11세 밖에 차이가 나지 않았다.[18] 러일전쟁203고지 전투에서 다수의 사상자를 초래해 규탄받은 노기 마레스케 장군은 요시다 쇼인이 처형된 이후 쇼카손주쿠에 입학해서 쇼인으로부터 직접 가르침을 받은 적은 없다. 그러나 같은 동문 출신이라는 이유로 메이지 정부의 실세가 된 선배들의 도움을 받아 병졸에서 장군까지 빠르게 출세할 수 있었다.[19] 이에 한국에서는 반크 등에서 쇼카손주쿠를 한반도 침탈을 비롯한 '일본 제국주의 사상의 산실'로 규정해 세계유산 등재를 비판하기도 했다. 하지만 당시 한국 내 여론의 관심, 비판은 주로 조선인 노동자 강제징용 문제와 관련된 군함도의 등재에 집중되었고, 때문에 쇼카손주쿠는 상대적으로 주목을 덜 받았다.[20] 흥미롭게도 쇼카손주쿠와 마쓰시타 정경숙 모두 '松下'로 시작되는 명칭이다. 차이가 있다면 전자(쇼카)가 음독, 후자(마쓰시타)는 훈독이다. 이원복의 《먼나라 이웃나라 일본편》에서는 둘을 착각한 듯, "마쓰시타 손주쿠"라고 잘못 표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