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옛 지명 나가토국의 별칭 조슈(長州)에 대한 내용은 나가토국 문서 참고하십시오.
<colbgcolor=#000><colcolor=#fff> 조슈 번 長州藩 | ||
중심지 | ||
現 야마구치현 하기시 → 야마구치시[1] | ||
다이묘 | 모리 가문 | |
고쿠다카 | 37만 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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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슈 번(長州藩)은 지금의 일본 야마구치현에 위치했던 에도시대의 4, 5위 안에 드는 경제력과 군사력을 갖춘 큰 번으로, 도자마 다이묘[2]인 모리 가문에서 다스렸다. 하기 번(萩藩), 스오 야마구치 번(周防山口藩), '보초'(防長) 등 이명으로도 칭해졌으며, 메이지 유신 시대의 폐번치현을 통해 야마구치현으로 거듭나며 사라지게 되었다. 번청은 하기 성, 야마구치 성에 두었다. 번명인 조슈는 하기 성이 있는 나가토 국의 중국식 별명[3]인 조슈(長州)에서 따온 것으로, 번청이 스오 국의 야마구치[4]로 옮겨간 뒤에도 널리 쓰였다.메이지유신을 사쓰마번, 도사번, 사가번과 함께 주도했고, 유신 후 기도 다카요시, 히로사와 사네오미, 오무라 마스지로를 필두로하여 조슈번 출신 정치인, 군인들이 신정부에서 활약한다.
정한론(征韓論)을 주창한 요시다 쇼인이 조슈 번 출신이며, 이토 히로부미를 비롯한 요시다 쇼인의 수많은 제자들과 이곳 출신 인물들이 일본 제국주의 시대의 중심에 서서 활동했다. 때문에 일본의 우익 세력들에겐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 곳이다. 2012년부터 2020년까지 총리를 지낸 아베 신조의 본적지가 야마구치현 나가토시로 조슈 번 지역에 해당된다.[5]
또한 세계대전 연간 일본군 육군의 연고지이기도 하다. 조선 총독이 전부 군관 출신이라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지만, 이러한 점으로 인해 그 중에서도 조선 총독은 단 한 명 빼고 전부 육군 출신 인사들이었다. 거기다 조선 초대 통감인 이토 히로부미까지 포함하면 한국이랑은 질긴 악연으로 엮인 번이라 볼 수 있다.[6]
2. 역사
2.1. 에도 막부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당시 모리 가문은 명목상 총지휘관으로써 서군에 있었던지라, 기존 6개국(國) 120만 석에서 나가토·스오 2개국(國) 29만 8천 석으로 대대적인 감봉 조치를 당했다. 그럼에도 조슈 번은 꾸준히 수확량을 늘려 1610년엔 59만 9천 석 정도를 막부에 신고하였으나, 막부는 너무 많다고 여겨 신고된 수치에서 20만 석을 줄인 36만 9천 석만 조슈 번의 공식적인 고쿠다카(石高)로 인정했고 이 수치는 막말까지 변하지 않았는데 이 조치가 후일 막부가 조슈 번에게 망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이후로도 조슈 번은 내부적으로 토지 개발과 교역 등을 통해 꾸준히 고쿠다카를 늘려서 1626년에는 65만 8천 석, 1687년 81만 8천 석까지 증가시켰다. 나중에는 실질적인 내부 고쿠다카가 97만 8천 석이 되었다.에도 막부 말기(1840년경) 조슈 번의 인구는 70만 명으로, 당시 일본 전체의 인구는 3500만 명 정도였다. 그리고 이 시기 실시한 조사 자료가 남아있는데 실질적인 경제 규모는 152만 석이었다.
조슈 번의 사무라이들은 옛부터 학문을 중시 여겼는데, 그것은 중국, 조선과 같은 대륙과 가까워서 중세 이전부터 한학(유학)이 흥했고 국제관계에 대해서도 민감했다.[7] 다이묘였던 모리 가문도 학식을 갖춘 인물이 많아 기록을 많이 남겼고, 그 가신도 자서전을 쓸 정도의 교양이 있었다. 이런 교양과 학식을 갖춘 번은 일본 전국에서 찾아보기 힘들었다. 또한 조슈 번은 기록과 문서를 중시해서, 지방에서 물품 구입한 사소한 영수증 하나까지 모두 중앙행정기관에서 보관하는 등, 과거 문서를 뒤져보면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알 수 있도록 엄청난 문서 기록 및 관리 시스템이 있었다.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 3만 명이었던 가신 중 2만 명은 로닌이 되어 농사를 지었고, 마을에 서당을 열어 농민들의 자녀들을 가르쳐, 신분에 관계없이 교육을 받는 환경이 되었다.[8] 그리고 감봉조치로 짊어진 재정난을 타파하기 위해 노력했고, 그를 위해 우수하고 실용적인 관료들을 등용할 제도와 인재들을 양성하는 데 힘을 써왔다.
7대 번주 모리 시게타카는 소금, 밀랍(양초 재료), 종이, 창고업과 금융업 등을 번의 전매 사업으로 경영하였다. 어찌보면 오늘날의 종합 상사 시스템을 만들어서, 넉넉한 재정을 비축할 수 있었다. 에도막부는 고지식하게 토지(쌀 수확)에만 세금을 거뒀는데, 이런 헛점을 지방 번주들은 깨닫고 상업으로 막대한 이윤을 챙겼다. 쉽게 설명하면 지방 번주들이 돈을 빌려주고 이자를 받는데, 에도막부는 이런 이윤에 세금을 받지 못했다. 누가 누구에게 돈 빌려주고 이자를 받는 것을 파악할 수 있는 시스템이 없었다. 그리고 물건을 팔아 장사를 해서 얻은 이윤에도 세금이 없었는데, 역시 이런 내역을 파악할 수 있는 시스템이 없었다. 이는 에도막부가 재정적자로 망해간 이유이기도 하다. 또, 13대 번주 모리 다카치카는 정치 시스템을 개혁해서, 상급 무사와 하급 무사가 협의해서 행정에 참여할 수 있는 제도를 마련했다. 이런 것들이 메이지 유신을 주도하고 성공시켜 메이지 정부를 이끄는 배경이 되었다.
2.2. 막부 말기
막부 말기에는 도사 번, 사쓰마 번 등과 함께 존왕양이, 토막 세력[9]의 중심이 되었으며, 요시다 쇼인, 카츠라 코고로, 쿠사카 겐즈이, 이토 슌스케 등의 메이저급 유신지사들을 대거 양성하였고, 타카스기 신사쿠, 오무라 마스지로, 야마가타 아리토모 등의 뛰어난 무관들도 다수 배출해냈다.상술된 수많은 유신지사들의 요람과도 같았던 곳으로, 흑선내항 이후 대두된, 그러나 다른 번에서는 하급 무사들을 중심으로 퍼져나갔던 존황양이 사상이 가장 자리를 잘 잡았던 곳이었으며[10], 또 막부 말기 난세의 중심에 있었던 번이었다. 요시다 쇼인을 중심으로 양성된 조슈의 유신지사들은 요시다 쇼인의 사후에도 활발하게 활동하여 조슈 번의 정국을 장악, 더 나아가 중앙 정치에도 나아가려 하였다.
이들은 산조 사네토미를 중심으로 한 조정의 쿠게[11]들을 앞세워 천황으로 하여금 막부에게 양이를 명하게 만드는 등 기세가 하늘을 찌를 정도였으나, 천황의 명으로 분큐 3년 5월 10일(서기 1863년 7월 20일)에 개시된 양이에서 홀로 외로이 서양 무역선을 공격했다가, 이후 서양 함대에게 풍비박산이 나버렸고[12] 같은 해, 공무합체파[13]의 반격으로 벌어진 8.18 정변으로 조정과 교토에서 조슈 양이파들이 전부 일소됨으로써 실권을 잃었다.
하지만 포기를 모르는 조슈 번 존황양이의 근성은 겐지 원년 6월 5일(1864년 7월 8일), 과격파 유신지사들을 중심으로 교토에 방화를 해서 천황을 되찾자는 방식으로 표출된다.[14][15] 그러나 이는 신센구미에게 발각되어 저지되고 마는데 이것이 바로 이케다야 사건. 이 사건으로 조슈번은 유신지사들을 다수 잃고는 아예 군사를 동원한 쿠데타를 감행, 같은 해 7월 19일(8월 20일), 교토에서 금문의 변을 일으켰다. 하지만 미리 기다리던 막부군과 사쓰마군에게 참패, 쿠사카 겐즈이, 키지마 마타베 등 주요 유신지사들을 또 한 번 잃었다. 황궁을 향해 포격을 했다는 이유로 조적(朝敵: 조정의 적, 역적)으로 지명받음은 덤.
같은 해 8월 5일(9월 5일) 벌어진 시모노세키 전쟁과 조적 토벌령을 받은 막부-사쓰마 연합군의 제1차 조슈정벌[16]로 결국 굴복할 수밖에 없었던 조슈 번은 유신지사들을 옥에 가두고 가로들을 할복시키는 등 굴욕적인 평화 조약을 맺었고, 이후 조슈 번의 정국은 보수파들이 장악하게 된다. 그러나 그해 12월, 타카스기 신사쿠를 중심으로 한 유신지사들이 고잔지에서 거병(시모노세키 거병), 보수파들이 쫓겨나고 카츠라 코고로를 중심으로 한 존황양이파들이 다시금 조슈 번의 정권을 잡았다.
당연히 막부는 이를 좌시하지 않았고, 제2차 조슈 정벌을 준비했다. 게이오 원년(1865) 도쿠가와 이에모치가 교토로 상경, 고메이 덴노로부터 다시금 토벌령을 받고자 하였으나 천황은 1년간 시간을 질질 끌며 쉽사리 2차 토벌령을 내려주지 않았다. 금문의 변과 같은 빼도 박도 못하는 반역질을 저지른 것도 아니었고 조정 또한 한번 밟아놓은 조슈를 단지 지도층이 바뀌었다는 이유 만으로 또 다시 조적으로 칭한다는 건 권력쟁탈전에 불과하다고 여긴 나머지 회의적인 시각이었던 것. 결국 지속적인 막부의 압박으로[17] 이듬해 게이오 2년(1866), 결국 조슈 번 토벌령이 다시금 떨어져 2차 조슈 정벌이 막이 올랐지만 그 1년 동안 조슈가 가만히 있을 리가 없었다.
신사쿠를 중심으로 결성된 '기병대(奇兵隊)'[18]는 사무라이, 농민, 상인 등의 신분을 가리지 않고 병사들을 모집해 훈련에 몰두했고, 기도 다카요시, 히로사와 사네오미를 중심으로 조슈 번사들은 오히려 단단히 뭉쳤다. 조슈번이 유일하게 마련하지 못한 것은 바로 신식 소총, 신식 함선과 같은 신무기였는데, 이때 사카모토 료마가 주선한 삿초 동맹을 통해 해결했다. 당시 폐쇄된 해군조련소의 동기들과 카메야마 조합[19]을 운영하며 조슈, 사쓰마 등과 거래를 하던 료마는 사쓰마가 제2차 조슈 정벌에 병사를 내기 꺼린다는 사실을 알고는 사쓰마와 조슈 간 동맹을 끌어내고자 했다. 금문의 변으로 사쓰마에 대한 반감이 하늘을 찌르던 조슈였지만, 료마의 제안으로 사쓰마 번에서 화해의 선물[20]로 보낸 신식 군함과 소총을 입수했다. 이후 거대한 막부군에 맞서야 하는 현실을 직시한 뒤 게이오 2년 1월 8일(1866년 3월 7일)[21], 교토의 사쓰마 번 저택에서 비밀리에 사쓰마 번과 동맹을 맺었다.
같은 해 6월, 막부에서 조슈에 선전포고를 한 뒤, 막부군의 전함이 오오시마에 포격을 개시하는 것으로 2차 조슈 정벌이 개전했다. 사쓰마가 군사를 내지 않은 덕분에 후방이 안전해진 조슈 번은 신무기로 무장한 키헤이타이를 앞세워 전력을 다해 막부군에 맞섰다. 개전 초기에는 막부군이 오오시마를 순조롭게 점령하는 등, 막부군에 우세하게 돌아갔으나, 신무기로 무장한 신사쿠와 키헤이타이를 중심으로 시작된 오오시마 탈환전을 기점으로 승기가 조슈군에게 기울어졌다.
숫적으로 불리했지만 무장이 더 우세했던 조슈군은 정면 대결을 피하고 게릴라전을 펼쳐 막부군을 지속적으로 압박했다. 여기에 타카스기 신사쿠와 오무라 마스지로의 통솔력이 빛을 발하여 막부군은 연전연패를 당했다. 설상가상으로 조슈정벌 때문에 쌀값이 크게 오르자 불만을 품은 농민들이 전국 각지에서 잇키를 일으키는 등, 정국 혼란이 오히려 가중되어 막부는 전쟁을 지속하기가 점점 어려워졌다. 반면 조슈군은 연전연승으로 사기가 오르자 아예 막부군을 상대로 전면전을 피하지 않았고, 파죽지세로 진군했다. 결국 조슈군이 코쿠라성을 함락시킨 것을 기점으로 막부군은 싸울 여력이 남지 않았다. 결국 토벌령 수행을 명받은 쇼군 도쿠가와 이에모치마저 심장질환으로 그해 7월 20일(8월 29일)에 사망하자 명분마저 사라져버린 막부는 결국 조슈 정벌을 포기했다.
2.3. 보신전쟁과 메이지 유신
유신지사들은 막부군을 격퇴한 기세를 몰아붙여 에도까지 밀고 올라갈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사카모토 료마의 직소[22]로 토사 번주 야마우치 요도가 막부에 대정봉환을 촉구, 결국 대정봉환이 이루어져 에도 막부가 사라지게 되자 삿초 동맹은 전쟁을 이어갈 명분을 잃어버렸다. 하지만 1867년 10월 조슈의 히로사와 사네오미와 사쓰마의 오쿠보 도시미치가 맺은 막부 토벌을 위한 밀약을 조인하였으며 천황이 여전히 강력한 구 막부 세력의 힘을 두려워하여 비밀리에 막부 토벌령을 사쓰마 번에 내림으로써[23] 1867년 11월 조슈와 사쓰마 동맹군은 교토로 진군하여 황거를 확보하였다. 그리고 본격적인 보신전쟁이 발발했다. 전쟁의 진행 과정은 해당 문서 참조.보신전쟁은 신정부의 승리로 끝났으며, 이때 가장 큰 공을 세웠던 사쓰마 번과 조슈 번의 유신지사들은 당연하게도 일본의 정국을 장악하고 메이지 유신을 주도하는 세력으로 발돋움했다. 그러나 조슈 번 자체는 폐번치현으로 야마구치현으로 전환, 역사 속으로 사라졌고, 번주는 영지와 실권을 상실했다.
유신을 주도한 양대 본산이었던 만큼 메이지 유신 이후에 기도 다카요시와 히로사와 사네오미를 필두로 많은 정치가들을 배출하였고, 이들은 일종의 정치 파벌인 '조슈바츠(長州閥)'를 형성했다. 조슈바츠는 사쓰마바츠와 함께 삿초바쓰(薩長閥)라는 정치적 대립구도를 형성했는데, 이는 한바츠 정치(번벌정치/藩閥政治)[24]라고 불렸다.
이후 발발한 서남전쟁에서 조슈 파벌의 신정부군이 사이고 다카모리를 따르는 사쓰마 파벌을 궤멸시키며 일본의 주도권은 조슈파가 장악하게 되었다. 구로다 기요타카, 사이고 주도, 오야마 이와오, 마쓰카타 마사요시 등 서남전쟁에서 조정에 남았거나 아예 진압군으로 참가한 사쓰마 번사들도 있었고, 이들은 전쟁 뒤 메이지 정부에서 요직에 앉았지만 조슈에 비해서는 상대적으로 세력이 약했다. 사쓰마 출신이었지만 사이고와의 정쟁으로 고향에서 미움받은 오쿠보 도시미치가 암살된 후 조슈 출신의 이토 히로부미가 그의 후계자가 되었다. 이토와 야마가타 아리토모, 이노우에 가오루 등 이른바 조슈3존을 중심으로 한 조슈 번사들이 사쓰마를 제치고 각종 요직을 차지했다. 특히 야마가타를 중심으로 조슈벌이 육군을 장악했고[25] 사쓰마번은 상대적으로 해군에 많이 분포하여 이후 일본군의 육해군 대립에도 큰 영향을 끼친다.
3. 관할 지역
조슈 번은 나가토국과 스오국 두 개 쿠니를 지배했다. 조슈 번의 명칭은 나가토 국의 별칭인 조슈(長州:長門+州)에서 따왔다.4. 출신 인물
※ 에도 막부 성립 이전, 메이지 유신 이후 출생의 인물들에 대해서는 야마구치현 항목을 참고하자.- 가쓰라 다로
- 고다마 겐타로 - 노기 마레스케의 친우이자 대만 총독, 러일전쟁 당시 만주군 총참모장
- 기도 다카요시/카츠라 코고로
- 노기 마레스케 - 203고지 전투로 유명한 일본군 장성
- 다나카 기이치
- 데라우치 마사타케 - 초대 조선 총독
- 미우라 고로 - 을미사변의 주범
- 소네 아라스케 - 2대 조선 통감
- 소다 가이치 - 일제강점기 당시 조선의 고아들을 위해 헌신했던 사람이다. #
- 야마가타 아리토모 - 3대 내각총리대신
- 요시다 쇼인 - 조슈벌의 정신적 지주
- 이토 히로부미 - 초대 조선 통감, 초대 내각총리대신
- 이노우에 가오루
- 타네다 산토카 - 하이쿠 시인
- 타카스기 신사쿠
- 하세가와 요시미치 - 2대 조선 총독
- 히로사와 사네오미 - 유신십걸 중 한명이며 기도 다카요시와 함께 메이지 신정부에서 조슈번 대표로 활동
[1] 1863년 지금의 야마구치현청 자리에 있었던 야마구치 성으로 옮겼다.[2] 막부의 중앙정치에는 관여할 수 없고 오로지 군사동원에만 응할 의무를 가진 다이묘들을 지칭하는 말. 대체로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서군측에 섰던 가문이 도자마 다이묘가 되었다. 그러나 그러한 인식은 명백하지 않다. 명목상 도자마 다이묘인 마에다 가문이 거의 신판 다이묘 급으로 우대받았거니와 센다이 번의 다테 가문은 도자마 다이묘임에도 막부 초기부터 막부의 중역을 맡았고, 죠슈의 모리 가문과 비슷한 처지의 도자마 다이묘인 사쓰마 번의 시마즈는 도쿠가와 쇼군가의 외척이 되어 막부 내정을 총괄하는 노중(老中)에 오르기도 했고 천황가와도 혼맥을 맺었다. 오히려 비록 명목상으로는 도쿠가와 쇼군가의 가신이지만 후다이 다이묘들과 달리 직속가신처럼 대하지 않고 별도로 우대한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3] 삼국지의 형주, 익주 등이 예시이다.[4] 모리씨처럼 스오와 나가토 양국을 세력 기반으로 한 오우치씨 당시의 중심 도시이기도 했다.[5] 아베 신타로가 야마구치현 출생으로 아는 사람이 많으나, 출생 자체는 도쿄도에서 했다. 다만 유년기를 야마구치현에서 보내고, 중의원 선거도 야마구치에서 치렀다.[6] 거기다 극우의 대명사로 반한파의 대표인사였던 아베 신조도 본적이 이쪽이라(본인 자체는 도쿄도 출신이다.) 현대까지도 이어지고 있는 질긴 악연이다.[7] 수백 년간 조슈(스오+나가토)의 원 주인이던 오우치 가문은 스오 국을 본거지로 삼아 주고쿠 일대는 물론, 큐슈 북부에도 큰 영지를 소유한 오오다이묘였다. 센코쿠 시대의 다이묘답지 않게 무장뿐만 아니라 문관을 중요시하고 백제 임성태자의 후예를 자처하며 조선 조정과 통상을 타진해보기도 했다. 오우치 가문이 조슈를 다스리던 때는 물론, 조슈번의 옆 동네 아키국의 군소 호족이던 모리 가문이 오우치 가문을 멸망시키고 조슈의 주인이 된 이후로도 이러한 기조를 이어갔다.[8] 메이지 정부 시절 자료에 의하면 야마구치 현에는 사숙(개인학원)이 106곳, 서당이 1304곳이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번 차원에서는 사무라이 집안 자제한테는 초슈 번이 모든 비용을 대는 엘리트 육성 무상교육기관을 운영했다. 요시다 쇼인은 이 기관의 사범 출신이다.[9] 막부 토벌 즉, 반 막부 세력을 의미한다.[10] 상급무사의 우두머리라고 할 수 있는 번주(다이묘)가 양이파를 인정했다.[11] 공가(公家). 무관인 사무라이들과 대비되는 문관들을 지칭한다. 물론 시대가 시대인지라 사무라이가 문/무 업무를 모두 총괄하였으므로 막부 말기의 혼란기에 천황에게 힘이 실리기 이전까지는 그저 허수아비 에 불과했었다.[12] 이는 천황(사실상 조슈)의 압박으로 하고 싶지 않은데도 어쩔 수 없이 외국과 전쟁을 해야 했던 막부의 계책 때문이었다. 당시 막부는 지방의 각 다이묘들에게 '우리가 5월 10일에 외국하고 싸워야 하는데, 할지 안 할지는 님들 재량임.' 하고 명령 아닌 명령을 내렸고, 당연히 강대한 외국과는 싸우기 싫었던 대다수 번들은 양이에 참여하지 않았다.[13] 공무합체(公武合體)란 공가(천황가)와 무가(쇼군가)의 결합을 의미한다. 공무합체파란 말 그대로 공무합체를 지지하던 사무라이 집단을 의미하는데, 이들은 공무합체를 통해 흑선내항 이후 땅으로 떨어진 쇼군가의 권위를 되살리고자 했다. 사쿠라다문밖의 변으로 그 힘을 잃은 쇄국파를 대신하여 일선에 등장하였으며, 이들은 안도 노부마사를 중심으로 고메이 덴노의 이복 여동생인 가즈노미야 지카코 내친왕과 쇼군 도쿠가와 이에모치의 결혼을 추진하였다. 하지만 천황을 신처럼 섬겼던 존황양이파 무사들은 천황의 혈통에 쇼군가의 피가 섞임을 못마땅하게 여겼고, 결국 안도 노부마사도 사카시타문밖의 변으로 실각했다. 그러나 공무합체파는 사쓰마 번의 시마즈 히사미츠, 조정의 구니노미야 아사히코 친왕 등을 중심으로 그 명맥을 이어나가 존황양이파에 맞서는 큰 세력으로 발전했다.[14] 얄짤없는 테러다. 이들이 이런 과격 행동을 감행했던 이유는 그 짧은 시간 내에 '천황이 우리를 진심으로 내쳤을 리가 없다.'는 믿음 때문이었다.[15] 어소 방화 계획 자체가 신센구미가 거짓 자백으로 조작했거나 착각한 것으로,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았다는 학설도 있다. 단, 유신지사들이 모종의 계획을 위해 이케다야에 모인 것은 확실시된다.[16] 실질적 군사적 충돌은 없었기에 조슈 동란이라고 부르기도 한다.[17] 1년이라는 시간 동안 당연히 막부에서 그저 발만 동동 구르지는 않았으며. 아예 조슈 번으로 사람을 보내어 '니들 지금이라도 고개 숙이면 우리가 적당한 선에서 봐주겠음.' 하고 설득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비밀리에 삿초 동맹을 맺은 조슈 번은 거절했다.[18] 한자를 보면 알겠지만 말타는 기병이 아니라 기습부대라는 뜻이다.[19] 미츠비시의 전신이 되는 기업. 일본 최초의 해운상사 기업이기도 했다.[20] 사실 사카모토 료마와 나가오카 신타로의 주도 하에 의외로 순조롭게 진행되던 삿초동맹이 시모노세키로 향하던 사이고 타카모리가 모종의 이유로 교토로 향해버렸던 일로 한 차례 무산되어 조슈 번이 단단히 삐져있었던 것도 이 화해의 선물을 보내는 데 한몫 했다.[21] 협상이 시작된 날짜이다. 협상이 타결된 날짜는 같은 해 1월 21일(3월 20일)이었다. 협상에 난항이 많았기 때문.[22] 자신의 주군에게 올리는 일종의 상소. 그러나 직소는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할복해야 하는 위험한 행위이기도 했다.[23] 이 토벌령이 사실은 이와쿠라 토모미 등이 조작한 것이란 설이 있다.[24] 지연으로 묶인 파벌을 기반으로 이루어지는 정치 정도로 이해하면 쉽다.[25] 오야마 이와오 등 일부 사쓰마 출신들도 육군에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했는데, 오야마는 야마가타와 사이가 좋은 편이었고 정치 관여를 자제했기 때문에 야마가타의 영향력이 더 강하게 드러난 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