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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25 23:55:17

동도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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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용어 설명2. 진행

1. 용어 설명

동도서기(西)는 조선의 상국인 청나라의 양무운동의 구호인 중체서용에 영향을 받아 조선이 19세기 위정척사파의 반발을 무마하고 개항 하여 근대화를 추구함을 표방한 구호이다.

즉 동아시아(東)의 우월한 정신문명(道)은 그대로 두고, 서양(西)의 기술(器)만 들여오겠다는 뜻이다. 특히 어느 분야 보다 서양식 무기 제조에 관심을 기울였다.

2. 진행

위정척사파들은 전면적으로 개항 자체에 반발을 했고, 서양 국가와 일본의 통상 요구에도 들은척도 안했다. 그러던 중에 청나라가 일본의 메이지 신정부와 대등하게 국교를 맺었고, 서양 열강과 국교를 맺어 세력 균형을 이루는게 청나라의 국익과 합치한다는 판단 아래 이홍장의 거듭된 압력, 청 조정과 총리아문의 "러시아 해군이 영흥만에서 나타나 조선을 침략할 경우 청나라는 도와줄 힘이 없다" 는 최종 통보를 받고 조선 조정은 동요하여 일본과 서양에 개항하게 되었다. (강화도 조약, 조미수호통상조약)

당시 청나라에서 양무운동이 진행되며 중체서용(中體西用)을 내걸고 역시 중화의 문명을 주체로 하여 서양의 문물을 받아들인다는 기치를 내걸었다. 그러나 청나라 내부에서도 요직을 독점한 만주족과 주자 성리학 이념의 한족 지식인들에게 번번히 정책 추진이 거부 당했고, 증극번, 이홍장 같은 소수인물에 의존하여 서양식 무기 생산 분야에만 집중 하였듯이, 조선에서도 1876년 개항 5년 후인 1881년에도 고종은 위정척사파의 압력에 스스로 척사윤음을 반포하며 공맹과 정주의 나라에서 사악한 기독교를 비롯한 서양 사상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천명한다. 이 과정에서 등장한 것이 동도서기다. 조선과 청나라 보수 세력들의 반발을 무마하기 위해 내세운 입장이었으나, 사실 그 당시 사람들을 납득시키기기에도 설득력이 떨어졌다.

조선의 위정척사파와 청의 보수파들은 아이러니하지만 현재의 시각과 마찬가지로 서양의 수학, 과학, 공학 기술이 들어오면 그들의 사상까지 같이 들어오지 기술만 선별적으로 골라 받아들이는 것은 불가능하고, 그런 식으로의 서양 흉내내기는 결국 실패할 것이라는 것을 예측하고 있었다.

대표적으로 조선에는 위정척사파 이항로, 청나라의 왜인(倭仁)[1]이 있는데 이항로를 비롯한 위정척사 문인들은 성리학을 제외한 다른 모든 사상과 학문은 문명상태에서 타락으로 변질된다고 여겼고, 청의 보수파들도 직접적인 서양의 군사력에 타격을 입었음에도 기존의 체제 유교 성리학 질서를 바꾸는 것보다 군사적 열세를 감수하고서 차라리 서양의 침략으로 계속 피를 흘리는게 낫다는 인식이었기 때문이다.

동도서기는 1880년 12월 통리기무아문을 설치하며 본격적으로 막이 올랐으나, 임오군란-갑신정변 등 국내 복잡한 상황 때문에 추진을 제대로 못 하고 끝나버렸다. 양무운동 조차 청일전쟁 패전으로 그 실패가 여실없이 드러났는데, 시스템 개혁 없이 화포와 철선 만드는데 필요한 수학, 공학, 과학 기술만 흉내내는 수준이었기 때문이었다. 반면 일본의 근대화는 과학기술과 현대의학 도입 뿐만이 아니라 초등학교 7만여개 설립 등 초중등교육 체제 확립, 제국대학 설립, 입헌, 의회설립, 선거제도, 사법권독립, 근대법 도입, 전신, 우편제도 신문 발행 징병제 등으로 시스템 전반을 서양식으로 새로 갈아엎는 일련의 개혁이었기 때문이다.

중국의 양무운동은 보수파와 서태후의 비협조, 청불전쟁, 청일전쟁 패전으로 좌절되었고, 조선의 동도서기론도 임오군란, 갑신정변 동학운동 등 정치적 격변으로 흐지부지 마무리 되었다.

일본에서도 처음에는 동도서기론, 중체서용론과 비슷한 화혼양재(和魂洋才)론이 있었지만[2] 사쓰에이 전쟁시모노세키 전쟁을 통해 서구 열강들과의 무력 격차를 뼈저리게 깨달은 사쓰마 번조슈 번은 온건파인 도쿠가와 막부 정권을 타도한 후 더 격렬하고 적극적으로 동아시아를 버리고 서양화를 통한 근대화를 추진한 것이 탈아입구메이지 유신이다.
[1] 몽골 정홍기 출신 팔기인으로 성명은 오제격리 왜인(烏齊格里 倭仁) 보수 유학자로 동치제의 스승인 태보, 도찰원 어사, 공부 상서, 문화전 대학사를 지내며 여러차례 양무운동 반대 상소를 올려 조정의 반대여론을 이끌어 근대화를 저지했다.[2] 화혼양재 자체가 과거 일본이 중국문물을 배울 때 사용한 화혼한재(和魂漢才)를 재활용한 단어로, 일본에선 극단적 존왕양이파들이 서양세력에 의해 개화에 나서자 정작 추진한 적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