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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도 막부 江戸幕府 | ||
상선기[1] | 가몬[2] | |
1603년 ~ 1868년 | ||
성립 이전 | 해체 이후 | |
센고쿠 시대 | 대일본제국 | |
위치 | 혼슈, 규슈, 시코쿠, 홋카이도[3] | |
수도 | 조정: 헤이안쿄 (현 교토) 막부: 에도 (현 도쿄) | |
정부형태 | 막번 체제 (일본식 봉건제) | |
국가원수 | 천황 | |
정부수반 | 쇼군[4] | |
주요 쇼군 | 1603년 ~ 1605년: 도쿠가와 이에야스 (초대) 1866년 ~ 1867년: 도쿠가와 요시노부 (말대) | |
주요 실권자 | 다누마 오키쓰구 마츠다이라 사다노부 이이 나오스케 | |
언어 | 근대 일본어 → 현대 일본어 | |
문자 | 가나 문자, 한자 | |
민족 | 야마토족, 아이누족 등 | |
종교 | 신토, 대승 불교, 유교 | |
비공인 종교 | 가톨릭(카쿠레키리시탄) | |
역사 | 1603년 막부수립 1614년~1615년 오사카 전투 → 겐나엔부 1637년~1638년 시마바라의 난 1639년 쇄국정책 개시 1853년 쿠로후네 사건, 쇄국정책 포기 1867년 대정봉환 1868년 왕정복고의 대호령 → 보신전쟁 → 막부 해체 | |
통화 | 료[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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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에도 시대에 일본을 통치했던 막부. 일본 역사에서 세 번째이자 마지막 막부정이었다. 보통 중심지였던 지명을[6] 따서 에도 막부라고 부르지만 종종 집권 쇼군(정이대장군)의 성씨를 따 도쿠가와 막부라고 부르기도 한다.[7]2. 특징
1603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도요토미 가문 내의 반 도쿠가와 세력을 격파한 도쿠가와 이에야스에 의해 수립되어, 제15대 정이대장군 도쿠가와 요시노부가 천황에게 권력을 반납하는 1867년 11월 9일의 대정봉환까지 약 264년간 일본을 통치하여 일본사의 무가 정권 중 가장 오랫동안 존속되었다.초기에는 오사카 전투와 시마바라의 난이 있었고 막부 말기에는 미국에 의한 강제 개항과 조정, 막부의 혼란상으로 기회를 잡은 사쓰마 번, 조슈 번 등의 번들이 사실상 막부에 반란을 일으키면서 내분으로 혼란스럽기도 했다. 하지만 혼란기를 제외하더라도 1615년 겐나엔부 또는 1638년 시마바라의 난 진압 이후부터 1853년 쿠로후네 사건 이전까지 가마쿠라 막부, 무로마치 막부와는 다르게 200년 이상 동안 일본 전체를 안정적으로 지배했다.
이렇게 안정기가 지속되다 보니 무가(武家) 정권이면서 사무라이가 칼을 뽑으면 사형, 사무라이끼리 싸우면 사형처럼, 전국시대에는 당연시되던 폭력을 지양하는 모습을 보였고,[8] 개쇼군이라고 불리기도 한 도쿠가와 츠나요시처럼 무사 기질을 극단적으로 통제하는 묘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이시기 일본은 전국시대의 혼란기를 수습하고 인구나 국력 면에서 많은 신장을 하게 된다.
에도 막부의 주요 가도(고카이도) |
반면 에도 막부는 상대적으로 쇼군가의 자리를 잃는 일도, 특정 가문이 지나치게 발호하는 일도, 분열이 일어나는 일도 적었다. 막말에 웅번들이 일어서긴 했어도 이는 외부적 요인(쿠로후네 사건)에서 기인한 뜻밖의 일이었기 때문에 전국시대를 불러온 무로마치 막부와 비교하긴 어렵다. 존속기간 역시도 140여 년 존속한 가마쿠라 막부, 235년 존속한 무로마치 막부에 비해 265년 존속해 가장 오래 갔다.[11]
전대 막부의 쇼군들과 달리 시해당한 쇼군이 한 명도 없다는 특징이 있다. 일찍 사망한 경우는 있지만 전부 자연사했다. 막부의 지배력이 전대 막부에 비해 안정적이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부분이다. 도쿠가와 츠나요시는 당대에 정실인 노부코에게 암살당했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고, 도쿠가와 이에사다도 독살설이 나돌았지만 명확한 근거는 없다. 도쿠가와 이에모치도 유체의 상태에 근거해서 독살설이 제기된 바 있다.
또한 이전까지는 조정 최고위 관직인 태정대신 직위를 받은 쇼군이 아시카가 요시미츠 한명 뿐이었으나 에도 막부에는 태정대신 직위를 받은 쇼군이 3명(도쿠가와 이에야스, 도쿠가와 히데타다, 도쿠가와 이에나리)이나 존재한다. 특히 제109대 천황인 메이쇼 천황은 2대 쇼군 도쿠가와 히데타다의 외손녀이기도 하다.
3. 통치 체제
에도 막부는 금교령(禁教令)을 시행하여 일본 내에서 불교, 신토와 마찰을 빚을 것을 우려한 기독교를 금지하고, 데지마의 네덜란드 선박 외 모든 서양 선박의 입항 또한 금지했다. 그리고 각 번들이 막부의 허가 없이 외국과 교류하는 것을 금지하는 등 이른바 쇄국을 시행하여 내부 통제를 강화하고 막부의 수장인 정이대장군과 번의 수장인 다이묘들 간의 봉건제적인 주종관계인 막번체제(幕藩体制)를 바탕으로 무사(사무라이)계급의 통치를 안정화했다.또한 도쿠가와 쇼군가의 직계 가문인 어삼가(御三家)를 각각 일본의 주요 도시 교토, 에도, 오사카 근방의 요충지인 오와리 번, 미토 번, 기슈 번의 번주로 삼아 혹시라도 있을지 모를 지방 다이묘들의 반란으로부터 막부체제를 수호하는 역할을 할 수 있도록 했으며 후다이 다이묘, 도자마 다이묘 등 막부에 대한 충성도에 따라 영주들 간의 서열을 분류하고 개역[改易], 참근교대[參勤交代] 등 강력한 다이묘(大名) 통제 정책으로 성공적인 지방 통제를 수행하였다.
또한 이를 유지하기 위해 유교적 질서 체제 하에서[14] 엄격한 사농공상의 신분제를 일본사에서 처음으로 구현했으며, 일본 전체의 1/4 과 주요 도시, 화폐 발행 등을 막부가 통제하고, 5~6만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이러한 체제에서 나오는 권력을 봉행을 통해 행사하였다. 참근교대에 의해 촉발되어 전국 단위로 발달한 상업 또한 뒷날 자본주의가 번성하는 발판이 되었다. 그렇기에 일본사 기준으로는 중앙정부의 권력이 다른 막부에 비해 막강하였다. 중기 이후로는 정이대장군들의 능력이 초기에 비해 부족하였고 본가의 혈통이 단절되다 보니 그 휘하의 노중(老中)에게 실권이 쏠리고 쇼군은 다소 상징적인 존재로 물러나게 된다. 이런 점은 상대적으로 더 심하긴 하나 호조 가문의 집권에게 실권이 몰렸던 가마쿠라 막부와 비슷한 점도 있다.
다만 에도 막부는 특정 가문에게 실권이 넘어가지는 않았다. 노중의 힘이 강해진 것도 실무 대행의 성격이 강하다. 주로 노중을 맡은 후다이 다이묘들은 영지 자체가 10만 석 미만으로 작은 편이라 개인의 힘은 강하지 않았고, 막나간다면 쇼군이나 다른 후다이 가문들의 견제로 본인이든 다음 대에서든 그 대가를 치르곤 했다. 영지가 큰 신판 다이묘들이나 도자마 다이묘들은 아예 중앙정치 참여가 제한되어 있었다. 쇼군의 권위 자체가 흔들리는 일은 흑선내항 후 막부 말기가 되어서야 비로소 나타났다.
후다이 다이묘가 맡았던 노중 4~5명이 평상시 최고 실무직이었으며, 월별로 돌아가며 국정을 맡았다. 노중 중 한 명을 노중수좌(老中首座, 勝手掛老中)로 삼아 정무를 책임지게 하기도 했다. 노중의 아래에는 마찬가지로 후다이 다이묘 출신인 와카도시요리(若年寄) 4~5명이 있어 주로 도쿠가와 가문 내부의 일을 담당했다. 또한 봉행(奉行)을 여러 명 두어 각 분야의 실무를 관리하게 했다. 특히 종교 및 사법, 주민 통제를 맡은 사사봉행(寺社奉行), 재정과 군사를 관리한 감정봉행(勘定奉行). 에도의 행정 및 사법을 담당한 정봉행(町奉行) 등은 3봉행으로 불리며 요직으로 꼽혔다. 도로를 관리한 도중봉행(道中奉行), 에도가 아닌 지방 도시를 맡은 원국봉행(遠国奉行), 서책을 관리한 서물봉행(書物奉行) 등도 있었다.
특수한 상황에서는 로주의 상위 직책으로 대로(大老) 1명이 임명되기도 했다. 대로를 배출한 가문은 이이, 사카이, 도이, 홋타 등 주요 후다이 4가문뿐이었다. 4가문 중에서도 대대로 대로를 배출한 가문은 히코네 이이가(이이 나오마사의 후손)과 히메지(및 오바마) 사카이가[15] 둘 밖에 없었다. 도이가의 유일한 대로인 도이 토시카츠는 대로로 임명받던 때 이미 중풍으로 쓰러진지라 명예직으로 받은 것 뿐이었고, 홋타씨는 애초에 카스가노츠보네의 후광이 아니었으면 대로나 노중은커녕 후다이 다이묘로도 취급받지 못할 가문이었고 다이로가 된 사례도 카스가노츠보네의 양자 홋타 마사토시가 유일했다. 도쿠가와 사천왕 중 이이 나오마사를 제외한 나머지 3명의 후손조차도 대로를 배출하지 못했다. 나머지 가문들은 노중이 대로로 승격되는 형태로 취임했지만, 후다이 필두격인 이이 가문은 가문의 격이 너무 높아[16] 노중 취임 없이 곧바로 대로를 맡는 형태였다. 가장 유명한 대로로 막말 시기의 이이 나오스케가 있다.
4. 역사
자세한 내용은 일본/역사 문서 참고하십시오.5. 막부군
자세한 내용은 막부군 문서 참고하십시오.6. 대외관계
에도 막부가 존속한 기간은 대체로 외국과 교류하지 않은 쇄국주의를 고집하던 시대와 일치하지만, 조선과는 도요토미 가문을 멸망시켰다는 명분 등으로 국교를 맺어 사이가 괜찮은 편이었다. 류큐 왕국은 1609년 사츠마 번에 의해 침략당한 후 복속되어 종종 에도에 사절단을 보내 조빙하는 등 교류하였다. 또한 에조치(홋카이도)를 완전히 점령하고 가라후토(사할린)와 치시마 열도(쿠릴 열도) 남단까지 세력을 뻗쳐 아이누에 직간접적인 영향력을 행사했다.특히 조선에서는 총 12회에 걸쳐 조선 통신사를 파견해 두 나라 간의 우호통상관계와 쇼군의 권위 과시, 당시 대륙의 선진 문화[17]의 수용에 큰 기여를 하였다.[18]
국교를 맺지는 않았지만 네덜란드, 청나라 등과도 교역하였다. 특히 데지마를 통해 소규모로나마 네덜란드와 지속적으로 교류한 덕분에 쇄국주의를 표방하면서도 서방 세계를 비롯한 국제 정세에 대해 비교적 정확히 알 수 있었고, 네덜란드에서 전해진 기술과 학문 등 서구문물을 국가적 차원에서 연구하는데도 도움이 되었는데 이를 '난학'이라고 한다. 이러한 서구 세계와의 경험은 훗날 개항 이후 일본이 비교적 빠르게 근대화하는데 기반이 된다.
동녕국과도 교역을 했는데 정지룡, 정성공, 정경은 일본에 원병을 청하기도 했다. 하지만 에도 막부는 교역으로 일본도 등을 수출하는 것은 묵인했지만, 쇄국정책을 유지해 원병 자체는 거절했다.
7. 역대 쇼군
에도 막부 정이대장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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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도 막부의 역대 쇼군(정이대장군) | |||
이름 | 재임기간 | 비고 | |
<colbgcolor=#003400> 1대 |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 | 1603 ~ 1605 | 세키가하라 전투 승리로 막부 개창 1605년~1616년 오고쇼(大御所, 대어소)[19] 역임. 태정대신 |
2대 | 도쿠가와 히데타다(德川秀忠) | 1605 ~ 1623 | 오사카 전투→ 겐나엔부, 무가제법도와 금중병공가제법도 제정, 조선과의 국교 재개 1623년~1632년 오고쇼 역임. 태정대신 |
3대 | 도쿠가와 이에미츠(德川家光) | 1623 ~ 1651 | 참근교대, 시마바라의 난, 조선통신사 정례화[20] 막번 체제의 공고화 |
4대 | 도쿠가와 이에츠나(德川家綱) | 1651 ~ 1680 | 막번 체제 완성, 메이레키 대화재(1657) |
5대 | 도쿠가와 츠나요시(徳川綱吉) | 1680 ~ 1709 | 개 쇼군 겐로쿠 시대, 추신구라 사건 |
6대 | 도쿠가와 이에노부(徳川家宣) | 1709 ~ 1712 | 학자 쇼군, 금은 개혁[21] |
7대 | 도쿠가와 이에츠구(徳川家継) | 1713[22] ~ 1716 | 소년 쇼군, 거인증, 쇼토쿠의 치 |
8대 | 도쿠가와 요시무네(徳川吉宗) | 1716 ~ 1745 | 최초의 방계 계승.[23] 쌀 쇼군, 쿄호 개혁. 1745년~1751년 오고쇼 역임. |
9대 | 도쿠가와 이에시게(徳川家重) | 1745 ~ 1760 | 다누마 오키쓰구를 중용 |
10대 | 도쿠가와 이에하루(徳川家治) | 1760 ~ 1786 | 텐메이 대기근 |
11대 | 도쿠가와 이에나리(徳川家斉) | 1786 ~ 1837 | 역대 최장 재임 막부 최대 판도,[24] 칸세이 개혁 최후의 조선 통신사가 파견됨 1837년~1841년 오고쇼 역임 태정대신, 물개 쇼군 |
12대 | 도쿠가와 이에요시(徳川家慶) | 1837 ~ 1853 | 덴포 개혁, 쿠로후네 사건 |
13대 | 도쿠가와 이에사다(徳川家定) | 1853 ~ 1858 | 고구마 쇼군 |
14대 | 도쿠가와 이에모치(徳川家茂) | 1858 ~ 1866 | 각기병 쇼군, 청년 쇼군 |
15대 | 도쿠가와 요시노부(徳川慶喜) | 1866 ~ 1867 | 대정봉환, 보신 전쟁 → 메이지 유신 역대 쇼군 중 최장수[25] |
1. 이에야스 | ||||||
2. 히데타다 | 요리노부 | 요리후사 | ||||
3. 이에미츠 | 미츠사다 | 요리시게 | ||||
4. 이에츠나 | 이에시게 | 5. 츠나요시 | 8. 요시무네 | 요리아키 | ||
6. 이에노부 | 9. 이에시게 | 무네타다 | 요리토요 | |||
7. 이에츠구 | 10. 이에하루 | 하루사다 | 무네타카 | |||
11. 이에나리 | 무네모토 | |||||
12. 이에요시 | 나리유키 | 하루모리 | ||||
13. 이에사다 | 14. 이에모치 | 하루토시 | ||||
나리아키 | ||||||
15. 요시노부 |
8. 여담
- 에도 시대의 에도 막부 쇼군들을 상세히 다룬 NHK 대하드라마로 아오이 도쿠가와 삼대, 8대 쇼군 요시무네, 도쿠가와 요시노부(드라마)가 있다.
- 이전 막부와는 달리 오오쿠라는 쇼군만을 위한 여성들을 모은 공간을 만들어 운영했다.
[1] 1854년 막부 말기에 제정. 대중흑기(大中黒旗)라 하며 도쿠가와 가문의 조상인 닛타 요시사다 가문의 인양문에서 유래하여 막부의 상선기로 쓰였다. 다만 시마즈 나리아키라가 일장기를 상선기로 건의해서 자주 쓰이진 않았다. 호오마루[鳳凰丸], 아사히마루[旭日丸]와 같이 일장기와 함께 걸고 돛 색깔을 대중흑기로 칠한 절충안도 있었다.[2] 기존에는 '세 잎 접시꽃'으로 알려져 있었으나 족도리풀이라는 설도 있다. #[3] 무로마치 시대까지 홋카이도 남단을 제외한 대부분은 '에조치'로 불리며 이역으로 여겨졌으나 일본은 에도 시대에 접어들면서 마츠마에 번을 중심으로 홋카이도에 대한 영향력을 점차 확대했다. 에도 시대 초인 17세기에 이르면 홋카이도 섬 전역에 일본의 세력이 미치기 시작했고 샤쿠샤인 봉기(1669~1672)를 계기로 일본의 홋카이도 지배력이 강화되었다. 에도 시대 초중반 홋카이도에 대한 일본의 영향력은 일본의 지도와 18세기 초 러시아 탐험대의 보고서 등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일례로 당시 러시아의 극동 탐험대는 사할린, 쿠릴, 홋카이도 등 오호츠크 해 연안의 섬을 탐사하며 기록을 남겼는데 사할린과 쿠릴의 경우 세가 약한 원주민(아이누, 윌타, 니브흐)만이 존재해 언제든 러시아령으로 편입할 수 있는 토지로 인식한 반면, 홋카이도는 일본령으로 확실히 인식했고 정벌할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물론 메이지 시대 이후 본격적인 홋카이도 개척이 시작되지만 국토 개발 사업의 일환이었지 국제적으로 영유권을 인정받기 위한 정책이 아니었다. 상술했듯 애초에 러시아를 비롯한 서양 국가들은 18세기 무렵부터 홋카이도를 일본의 영토로 인지했고 서구권 지도들도 홋카이도를 일본과 같은 색으로 칠했으며 아직 에도 시대였던 1855년 시모다 조약을 통해 이를 재확인했다.[4] 대외적으로는 일본국 대군(大君)으로 자칭했다. 다만 중기부터 막부 본가의 혈통 단절과 능력이 부족한 쇼군의 즉위가 이어지며 실권은 쇼군을 보좌하는 노중(老中)들과 그보다 격이 높은 비상설직인 대로(大老)에 쏠리게 되었다.[兩] 금화인 코슈킨(甲州金) 등으로 유통되었다. 단위는 1료(兩)=4부(分)=16슈(朱)=64이토메(糸目). 막부 말기 사회 혼란시기 이전까지는 1료≒쌀 한 섬이었다. 이외에 은화나 동전도 널리 쓰였다.[6] 에도는 오늘날의 도쿄로, 당시 시골이었던 에도가 일본의 최대 도시로 성장한 시기가 에도 시대이다.[7] 위키백과에서는 일본을 포함한 한자문화권 언어들은 에도 막부라고 하고, 나머지 언어들은 대부분 도쿠가와 막부(Tokugawa Shogunate)라고 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8] 이 시기에도 아코 사건(추신구라)과 같은 복수극이 있긴 했지만, 조큐의 난과 원구 등의 내우외환에 시달렸던 가마쿠라 막부나 아예 일본 전체가 전쟁터가 되었던 무로마치 막부에 비하면 해프닝 수준이었다.[9] 우리나라의 동아시아사, 세계사 교과서에선 이를 중앙집권적 봉건제도라 설명한다.[10] 가마쿠라 막부를 세운 미나모토노 요리토모가 자기 외의 미나모토씨를 가진 일가친척들을 죄다 숙청해버리는 바람에 대가 끊어지게 되었고 아내 호조 마사코의 가문인 호조씨에게 권력을 넘겨주게 된 것이다. 이때 숙청된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일본사 3대 아이돌 중 한 명인 미나모토노 요시츠네.(참고로 나머지 둘은 오다 노부나가와 사카모토 료마)[11] 그나마 235년 존속한 무로마치 막부는 100여 년 동안 전국시대로 인해 힘을 못 쓰는 존재였기에 실질적으로 작동한 기간이 가마쿠라 막부와 비슷하다.[改易] かいえき. 번주의 영지를 몰수하는 것.[參勤交代] さんきんこうたい. 1년에 1번 씩 영지와 에도를 번갈아 오가며 거주하는 것.[14] 임진왜란을 통해 포로로 잡혀온 조선의 유학자들로부터(사실 조선의 선비들 중 유학자가 아닌 자는 없닫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황의 성리학을 배웠다. 대표적으로 원래부터 성리학에 관심이 높았던 승려출신 학자 후지와라 세이카가 강항으로부터 성리학을 배웠고, 이후 후지와라는 에도 막부의 요청으로 성리학을 강의하기도 하였다.[15] 사카이 타다츠구의 후손인 쇼나이 사카이 가문이 아닌, 이에야스의 다른 가신인 사카이 시게타다의 후손 가문[16] 시코세키 기준으로 어삼가/어삼경이 들어가는 오로카(大廊下), 국주급 도자마 다이묘들이 들어가는 오히로마(大広間) 다음 급인 타마리즈메(溜詰)에 대대로 배정되는 격이었는데, 같은 격의 가문은 둘 다 신판인 아이즈 마쓰다이라씨와 다카마쓰 마쓰다이라씨뿐이었다. 사카이씨를 비롯한 다른 어떠한 유력 후다이들도 초기에는 1대 한정으로만 타마리즈메에 들어갈 수 있었다. 영지의 규모 역시 다른 후다이 다이묘 중에는 명목 석고가 20만석을 넘는 가문이 없었는데 이이 가문만 독보적으로 히코네 30만석이라는 막대한 규모의 영지를 전봉 없이 계속 보유했다.[17] 정확히는 주자학(성리학) 중심의 중국계 문화. 주자학은 당시 일본의 체제정비에 큰 영향을 끼친다.[18] 그래서인지 조일 관계는 에도 시대가 끝난 후 정한론을 내세운 인물들이 상당하던 메이지 정부가 들어서자 급속도로 악화되기 시작한다. 애초에 메이지 유신을 주도한 세력이 다이묘 가문이 도요토미 일가를 지지했던 가문(모리, 시마즈)들이었기에 에도 시대 동안 숨죽이고 있던 조슈번과 사쓰마번이었던 걸 감안하면 참 묘하다.[19] 본래는 은거한 친왕이나 섭정이나 관백의 부친으로서 실권을 가진 사람을 뜻하는 단어였는데, 에도 시대에는 은퇴한 전임 쇼군을 일컫는 단어로 자리잡았다. 오늘날 일본에서는 '현역에서 물러났지만 여전히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원로'를 일컫는 관용어로 쓰인다.[20] 이전까지 통신사는 사신을 파견해 달라는 일본 측의 요구에 '회답' 함과 동시에 임진왜란 당시에 포로로 잡혀 갔던 조선인을 다시 데려오는 것('쇄환')이 주 임무라 하여 '회답겸쇄환사' 라 불렸는데, 1636년을 시작으로 통신사라 불리게 되었다. 그리고 이 이전까지 통신사의 최종 목적지는 일정하지 않았으나, 이 이후 최후의 통신사인 1811년을 제외하면 모두 에도로 고정되었다.[21] 순금/은 순도를 이에야스 시대로 끌어올렸지만... 바로 하쿠세키의 불황을 초래했다.[22] 이에노부 사후 쇼군직을 승계받는데 시간이 좀 걸렸다.[23] 이에야스의 10남 요리노부의 자손이다.[24] 1799년부터 몇 년간 북방 탐험으로 사할린 남부와 쿠릴 4도를 얻었다.[25] 도쿠가와 막부 뿐 아니라 일본사의 모든 쇼군직을 지낸 인물들 중 가장 장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