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learfix]
1. 개요
承久の乱조큐의 난은 일본 가마쿠라 시대인 조큐 3년(1221년) 6월 일본의 고토바 상황이 가마쿠라 막부를 토벌하기 위해 거병한 사건이다.
처음에 각지의 슈고들은 조정[1]이 가진 권위로 당황했으나, 가마쿠라 막부의 개창자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의 부인인 호조 마사코가 단호하게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의 은혜는 산과 바다와 같다. 조정을 토벌하라. 떠날 자는 떠나라"
라고 명령하여 190,000명에 달하는 대군이 교토로 들이닥쳤고, 고토바 상황은 오키 제도로 유배되었다.2. 배경과 과정
겐페이 전쟁에서 카와치 겐지가 헤이케에게 승리를 거두면서 헤이케 가문이 몰락한 이후, 일본에는 전쟁의 최종 승자로 겐지의 대표격이었던 미나모토노 요리토모가 세이이타이쇼군에 취임하면서 가마쿠라 막부를 세웠다. 이렇게 되면서 황실과 귀족 세력이 좌지우지하던 교토 조정이 쇠락하고, 조정과 막부 두 세력의 이중 정치가 시행되기 시작했다.그러나 요리토모 사망 후 막부는 허약한 계승자로 이어졌으며, 요리토모의 처가인 호조가에서 싯켄직을 차지하며 실권을 장악했다. 권력의 이동을 감지한 고토바인(後鳥羽院)[2]이 싯켄 호조 요시토키 추토를 명령하는 명령을 내리고, 기나이(기내)를 비롯한 인근 쿠니의 병사들을 소집해 막부 토벌의 군사를 일으켰던 것이다.
당초 고토바인 측에서는 이를 시작으로 호조 가문의 권력 독점에 불만을 품은 무사 세력이 집결할 것이라고 예상했지만 초대 쇼군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의 배우자인 호조 마사코의 호소에 힘입은 반도(坂東) 무사들의 결집으로[3] 그런 상황은 당장은 일어나지 않았다.
고토바 상황이 추토 대상으로 지목한 막부의 싯켄 요시토키의 아들로 군사를 지휘하게 된 호조 야스토키가 가마쿠라를 출발해 교토까지 오는 길에 병력이 늘어나 최종적으로 190,000기(騎)라는 대병력이 되었다. 이는 각지에서 무사들이 손익 계산으로 비추어 막부에 붙는 것이 자신들에게 유리하다는 판단으로 속속들이 야스토키의 막부군에 합류한 결과였다. 《아즈마카가미》에는 요시토키가 한 술 더 떠서 앞서 자신이 체포한 고토바원의 사자를 교토로 돌려보내면서
"제가 아무 죄도 없는데 이렇게 무함을 당하고, 토벌 인젠이 나오게 되었으니 어쩔 줄을 모르겠습니다. 제가 보기에 인(院, 상황)께서 싸움을 좋아하시는 것 같아서 제 동생 호조 토키후사(北条時房)와 아들 호조 야스토키에게 19만 기를 주어 보냈습니다. 부족하다 여기신다면, 발이 빠른 사자를 즉각 보내 주십시오. 그 즉시 이 요시토키가 몸소 20만 기를 더 거느리고 교토로 올라가겠나이다. 부디 인께서는 주렴 뒤에서 그 싸움을 편히 관전해 주시지요"
라고 고토바인에게 대놓고 블러핑을 친다. 이게 왜 '블러핑'이냐면, 호조 요시토키는 일선에서 군사를 지휘하게 된 아들 야스토키가 중간에 "만약에 인께서 몸소 출전해 지휘하고 있으면 어떻게 해야 하죠?"
라고 물어왔을 때, 요시토키는 "신하가 임금에게 활을 겨눌 수는 없다. 인께서 직접 출전해 지휘하고 있다면 그냥 활시위 끊고 항복해라. 하지만 병력만 보내 왔다면 전력을 다해 깨부숴라"
라고 지침을 줬다고 한다. 어쨌든 군주가 출전한 마당에 신하가 그걸 또 한 판 붙자고 덤비는 것도 분명 위험한 일인 건 틀림없는 일이고, 막부 최고의 권력자라 해도 덴노의 신하인 이상 '신하가 군주에게 함부로 싸움을 걸 수는 없다'는 인식을 아주 버리지는 못했음을 보여 준다.[4]조정군은 17,500기라는 막부군에 비하면 거의 새발의 피만큼도 안 되는 병력을 분산시켜 배치해 놓았고,[5] 이것이 실책이 되어 미노-오와리 방면에서 벌어졌던 오와리 강 전투(尾張川の戦い)에서 막부군에 의해 각개격파당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다케다 노부미쓰(武田信光) 및 오가사와라 나가키요(小笠原長淸)가 이끄는 도산도군 50,000여 기가 오이도와타리(大井戶渡)에 진을 치고 있었던 교토측 오우치 고레노부(大内惟信)의 2,000기를 격파하자, 조정군을 지휘하던 후지와라노 히데야스와 미우라 다네요시는 우지(宇治) · 세타(瀨田)로 물러났고, 6일 호조 야스토키와 호조 토키후사가 이끄는 막부군 주력인 도카이도 방면군 100,000기가 오와리 강을 건너 스노마타(墨俣)에 진을 쳤으며, 조정측의 야마다 시게타다(山田重忠) 등이 구이세(杭瀨) 강에서 분전했으나 패배했다.(구이세 강 전투) 야스토키의 동생 호조 토모토키(北條朝時)가 이끄는 호쿠리쿠도 방면 40,000기도 교토측 군세를 격파하고 카가(加賀)에 난입했다.
미노와 오와리에서의 패전 소식에 교토는 말 그대로 패닉이 되었다. 고토바인은 직접 무장하고 히에이 산으로 가서 소헤이(僧兵, 승병)들의 협력을 구하려 했지만, 히에이 산은
"우린 그저 미약한(?) 불제자일 뿐인데 저 억센 아즈마 무사(東士)들을 무슨 힘으로 감당해 내겠습니까?"
라며 이를 거절했고[6] 어쩔 수 없이 교토측은 남은 전 병력을 모아 우지 · 세타에 진을 치고 우지 강에서 막부군을 방어하기로 결정했다. 이때 귀족들도 대장군(大將軍)의 자격으로 출전했다. 6월 13일에 드디어 양쪽은 충돌했다. 비가 내리는 와중에도 교토측은 우지 강의 다리를 부순 채 활을 쏘며 결사적으로 항전했고, 막부군도 호우로 불어난 물 때문에 강을 건너지 못하다가 다음날인 14일, 수많은 병력 손실을 감수해가며(익사 혹은 화살에 맞고 전사) 도하를 강행해 기어이 승리, 교토로 들이닥쳤다.(우지 강 전투)《조큐기》에 보면 우지 강에서의 최후의 항전도 실패한 후지와라노 히데야스와 미우라 타네요시, 야마다 시게타다는 최후의 일전을 준비하고자 대궐로 달려갔지만, 고토바인은 대궐 문을 굳게 닫은 채 그들을 돌려 보냈고, 야마다 시게타다는
"겁쟁이 주군에게 속았다!"
며 대궐 문을 치면서 분개했다고 한다. 한 술 더 떠서 고토바인은 막부군에게 사자를 보내 "이번 난은 내가 아니라 모신(謀臣)이 기획한 것"
이라며 호조 요시토키 추토의 선지를 취소하고, 대신 후지와라노 히데야스와 미우라 다네요시 등을 잡아들일 것을 명령하는 선지를 내렸으니, 교토측 무사들은 토지(東寺, 동사)에서 버티면서 저항했지만, 막부측 고케닌이었던 미우라 요시무라[7]의 공격에 미우라 타네요시는 분전 끝에 자결[8]하고, 후지와라노 히데야스나 야마다 시게타다는 도망쳤으나 히데야스는 카와치에서 체포되어 교토로 압송되어 처형되었고, 야마다 시게타다는 교토 근교의 사가 한냐지 산(嵯峨般若寺山)에서 자결했다. 또한 오우치 고레노부는 겨우 목숨을 건지고 서쪽으로 유배되었다.[9]교토 조정이 더 이상 저항할 힘을 잃은 지 1개월 뒤인 7월 9일, 190,000명의 대군을 이끌고 상경한 요시토키의 적남 호조 야스토키에 의해, 고토바인은 오키 제도(隱岐諸島)에 유배되었고, 고토바인의 막부 타도 계획에 적극적으로 협력했던 준토쿠인(順德院)도 사도(佐渡)에 유배되자 이 일에는 관여하지 않았던 쓰치미카도인(土御門院)도 스스로 자청해 토사(土佐)에 옮겨갔다.[10] 3명의 인(상황)뿐 아니라 마사나리(雅成) 친왕은 다지마(但馬), 요리히토(賴仁) 친왕도 비젠(備前)에 각각 유배되었다.
여기에 재위한지 불과 3개월도 안 된 어린 구조 덴노도 폐위되었고[11] 타카쿠라 덴노의 손자인 시게히토 왕(茂仁王)이 즉위하여 그 아버지로서 즉위는 고사하고 태자가 된 적도 없는 모리사다 친왕이 고타카쿠라인(後高倉院)이라 불리며 인세이를 행하게 되었다.
고토바인은 오키에 유배되기 직전에 출가해 법황(法皇)이 되었다. 분랴쿠(文曆) 2년(1235년) 봄에 섭정 구조 미치이에(九條道家)가 고토바인과 준토쿠인의 교토 귀환을 막부에 제안했지만, 호조 야스토키는 받아 들이지 않았다고 후지와라노 데이카는 일기《메이게쓰키》(明月記)에 적고 있다. 시조 덴노(四條天皇) 때인 엔오(延應) 원년(1239년) 2월 20일, 고토바인은 유배지에서 죽었다.
이후 가마쿠라 막부는 교토 조정을 상시 감시할 필요성을 느끼고, 토벌군 사령관인 야스토키와 토키후사를 로쿠하라 단다이(六波羅探題, 육파라 탐제)로 임명해 각각 교토 북부와 남부를 관할하도록 했다.
3. 결과
가마쿠라 막부 극초기만 해도 헤이안 시대의 기풍이 남아 교토 조정의 권위는 최소한이라도 남아있었다. 초대 쇼군인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조차 간토의 변방 영토 위주로 지배권을 가졌던 것이다. 그러나 조큐의 난을 기점으로 조정의 권위는 완벽하게 붕괴했고, 일본에서 막부 정치가 뿌리내리는 결정적인 계기를 마련했기 때문에 일본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들 중 하나로 손꼽힌다. 예를 들어 덴노의 계승 문제마저 막부에게 허락을 받아야 했으니 껍데기만 국왕이지, 사실상 무신(武臣)의 장기말로 전락한 것이었다. 비록 가마쿠라 막부는 아시카가 다카우지의 공격으로 1332년에 멸망하지만 완전히 실추된 교토 조정의 권위는 19세기 메이지 유신 직전까지 회복되지 않았다.조큐의 난의 후속 조치로 토지를 몰수당한 공가와 무사들은 생존을 위해 세토 내해에서 해상 무장 세력으로 변신하게 되었고 그 결과 고려 등 이웃 국가들에 왜구가 들끓게 한 결과를 초래했다.[12]
4. 반란(亂)인가 참변(變)인가
가마쿠라 막부의 공식 역사서인 《아즈마카가미》에는 이 사건을 조큐 병란(承久兵乱), 조큐 역란(承久逆乱), 조큐 3년의 합전(承久三年合戦), 조큐 3년의 대란(承久三年大乱) 등으로 기록하고 있는데, 이를 시작으로 일본의 대부분의 사서들은 막부라는 조직 자체가 사라지게 된 다이쇼 중기까지 이 사건, 즉 고토바 상황이 가마쿠라 막부 타도를 꾀하여 그것을 명령하는 선지를 냈으나 도리어 막부의 권력자였던 호조 요시토키와 그를 위시한 막부측 무사들에게 참패하고 고토바 상황 자신은 물론 그의 아들들까지 모조리 유배당하게 된 일련의 사건들을 조큐의 난(亂), 즉 반란으로 불렀다.그러다가 황국사관(皇国史観)의 발호로 이 사건에 대해 조큐의 변(変)으로 표기해야 한다는 움직임이 적극적으로 일어났다. 1920년 일본의 국정교과서인《심상소학국사》(尋常小学国史)에서 '변'으로 표기한 것이 그 시작이었다. 이 사건의 최종 책임자가 다름 아닌 고토바 상황, 즉 천황이었고 천황 중심의 국가주의가 팽배해지면서
"이 일본은 천황 폐하의 나라이고, 천황 폐하께서 감히 신하 주제에 폐하의 권위에 도전해 일본 전역을 지배하려 드는 '간신' 막부를 타도하고자 했다가 도리어 쫓겨나는 불측한 지경이 되셨는데, 그걸 어떻게 '반란'이라 부를 수 있느냐"
라며, 존황론의 관점에서 이의를 제기한 것이었다. [13]조큐의 난이라는 사건이 조큐의 '반란'이 아니라 조큐의 '참변'으로 불려야 마땅하다는 주장이 황국사관을 추종하는 학자들에 의해 제기된 뒤에 일본 학계에서는 '반란'(乱)이라는 기왕의 표기를 쓰거나, 아니면 중립적으로 '전역'(役), '합전'(合戦) 등의 표기를 쓰기도 했는데, 일본이 태평양 전쟁을 일으키고부터는 군국주의가 일본 사회 전반에 팽배해지면서 '조큐의 변'이라는 표기가 거의 주류를 이루게 되었다. 이 시대에는 기존의 막부 쇼군들도 거의 이미지가 바닥을 치다시피 했다. 메이지 신정부가 무너뜨린 에도 막부의 초대 쇼군이었던 도쿠가와 이에야스도 평가가 절하되었고, 아예 고다이고 덴노와 대립했던 무로마치 막부의 초대 쇼군 아시카가 타카우지는 제대로 역적 취급을 당해, 그의 후손이 역사 수업 시간만 되면 '역적의 후손'이라며 놀림을 당했다는 증언이나, 상공대신(상공부 장관)이 타카우지에 대해
"그래도 인격적으로는 괜찮은 사람이었다."
는 내용을 기고했다가 "야 이 역적놈의 새끼야!"라는 비난에 결국 상공대신 자리까지 사임하게 된 것이 이 시대 일본이었다.고토바인의 조큐의 난이라는 사건을 전후해 보인 태도는 당대의 사람들도 그랬지만, 지금 시각에서 봐도 결코 곱게 봐 주기 힘든 점이 많은 것도 사실이다. 아무리 '치천의 군'으로서 후계자를 마음대로 지명할 수 있다고는 하지만 특별히 실책이 없었던 쓰치미카도 덴노를 반강제로 물러나게 하고, 자신이 총애하던 준토쿠 덴노를 앉혀 그 자손이 대통을 잇도록 한 것은 당시의 귀족 사회는 물론 다른 종친들의 불만까지 불렀고, 제2대 쇼군 미나모토노 사네토모의 암살을 기회라 여기며, 전국 각지에 가마쿠라 막부 타도를 명령하는 선지를 내려 놓고 "선지가 내려졌으니 무사들도 인젠대로 호조 요시토키와 가마쿠라 막부를 공격하겠지?"라고 상황을 마냥 낙관적으로만 생각하면서 어떤 책략이나 대비도 세우지 않는 안일함을 보였으며, 심지어 교토군이 패주하자 그대로 상황 자신이 명령한 '막부 타도' 명령을 손바닥 뒤집듯 뒤집고, 막부와 싸운 무사들에 대한 추토 명령을 내리며, 상황 자신의 명령으로 자신을 도와 막부와 싸웠던 무사들을 헌신짝 버리듯 내버린 것은 전형적인 기회주의자의 행보라는 비난을 피하기 어렵다.
고토바인이 막부 타도를 명령하는 선지를 내리기 직전에도 교토 조정과 가마쿠라 막부의 사이는 그리 험악하다고 볼 수 없었으며, 그렇게 죽고 못 사는 살가운 사이야 아니었다 한들, 양자간에 특별히 눈에 띄는 큰 충돌이 일어난 것도 아니었다. 그런 상황에서 미나모토노 사네토모가 암살당해 카와치 겐지 쇼군의 직계가 끊기고, 그걸 기회라 여겨 '막부 토벌'이라는 계획을 실행에 옮긴 것에 대해 소수 고토바인의 측근[14]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귀족, 지샤 세력들은 드디어 천황 폐하의 권위가 회복될 것이라고 환호하기는 커녕 아니, 저 양반 갑자기 대체 왜 저러냐는 투의 굉장히 싸늘한 반응들이 대부분이었다. 《구칸쇼》(愚管抄)[15],《로쿠다이승사기》(六代勝事記),《신황정통기》(神皇正統記)[16] 모두 일관되게 "막부가 싫은 건 싫은 거고 그거랑 상관없이 고토바인 그 사람 국왕으로서는 실격이고, 결격이었던 거 맞다"라는 인식을 보인다. 조큐의 난이 실패로 끝나고 막부에 의해 유배에 처해진 것 역시 "국왕이랍시고 지 맘대로 하더니 저렇게 될 줄 알았지. 자업자득이다", "아무리 막부가 조정에 위협이 된다고 해도 그렇지, 막부가 조정에 대해 일부러 대놓고 크게 실례한 것도 없고, 그렇다고 지들끼리 무슨 빈틈을 보인 적도 없는데 명분도 없이 그저 덮어놓고 '막부 타도하라'고 명령하면 사람들이 국왕의 어명이니까 네 알겠습니다 이러고 따를 줄 알았냐?"라며 냉혹하게 평가하고 있다.
조큐의 반란인가, 아니면 조큐의 참변인가, 라는 논쟁을 두고 일본의 사학자인 야스다 모토히사는 '변(変)'은 주로 뜻하지 않은 정치•사회적 사건에 대해, '난(乱)'은 주로 무력을 동반한 사건에 쓰인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실제 무력 충돌이 벌어지기까지 했던 이 사건을 '난(乱)'이라고 부르는 것에 의문의 여지는 없다며, '조큐의 난'이라는 호칭을 주장했다.
1945년 패망 이후 일본에서는 다시 '조큐의 난'이라는 표기가 주류가 되었지만, 일본의 보수, 우익 일각에서는 여전히 천황 중심 사관의 견지에서 이 사건을 '조큐의 변'이라고 부르고 있는데, 다나카 다카시(田中卓)의《교양 일본사》(教養日本史)를 시작으로 메이쇼샤(明成社)의 고등학교용 교과서《최신 일본사》(最新日本史), 한국에도 우익 역사 교과서 편찬으로 알려진 새로운 역사 교과서를 만드는 모임[17]에서 내놓은 중학교용 교과서《새로운 역사 교과서》(新しい歴史教科書) 등이다.
[1] 정확히는 상황의 인세이(원정)[2] 인은 상황에 대한 존호다. 원래 상황의 처소를 가리키던 말이 상황 그 자체를 가리키는 말로 굳어진 것으로, 인세이가 장기화된 후에는 아예 덴노 그 자체를 가리키는 용어로까지 의미가 확장되었다.[3] 정확하게는 간토의 무사들 역시 막부가 사라지고 예전처럼 조정에 예속되는 상황을 원하지 않았다. 조큐의 난을 다룬 군키모노가타리인《조큐기》(承久記) 자광사본(慈光寺本)에는 호조 마사코의 연설에 마음이 움직인 가이국(甲斐国)의 다케다 노부미쓰(武田信光)가 출진 후에 이웃한 시나노의 다른 무사 오가사와라 나가키요(小笠原長清)에게 "가마쿠라가 이기면 가마쿠라를 따르고, 교토가 이기면 교토를 따른다.(鎌倉が勝てば鎌倉につき、京方が勝てば京方につく) 그것이 무사의 관습이다."라고 자신이 언제든 돌아설 수 있음을 대놓고 내비치며, 싯켄 요시토키의 이복 동생인 토키후사(時房)로부터 승리한 뒤의 은상을 보장한다는 문서를 받아 내고서야 적극적으로 진군을 시작했다고 나온다. 가마쿠라 막부의 편에 나서서 싸우는 와중에도 머릿속으로 복잡하게 계산기를 돌리며, 이해타산을 따지고 있었던 것은 다케다 노부미쓰 한 사람만이 아니었다.[4] 이것도 《아즈마카가미》의 서술이라서 막부와 호조씨에 치우친 편향이 들어가지 않았다고 장담할 수는 없다.[5] 막부군의 3개 방면군 중 가장 소수가 호쿠리쿠도 방면군이었는데, 이마저도 무려 40,000기로 교토 조정 휘하 전체 병력의 2배를 넘었다.[6] 앞서 고토바 상황이 지샤에 대해 취한 억제책 때문에 불만을 품고 있었다.[7] 미우라 타네요시의 형이다.[8] 처형되었다고도 한다.[9] 흔히 백제 임성태자의 후손으로 알려진 스오 오우치 가문과는 다른 계통으로 이쪽은 카와치 겐지 요시미츠류, 즉 미나모토노 요시미츠의 후손이었다.[10] 다만 쓰치미카도인이 조큐의 난에 가담하지 않은 것을 참작하여 편의를 봐주기 위함이었는지, 이후 유배지를 교토에 더 가까운 아와로 변경하고, 따로 쓰치미카도인을 위해 대궐을 더 짓도록 했다.[11] 당시 4살이었다. 이후 메이지 시대에 와서야 '주쿄 덴노'라는 시호가 주어졌다.[12] 물론 극초기의 왜구들은 고려 후기의 왜구에 비하면 빈도도 그리 많지 않았고, 가마쿠라 막부도 고려 조정의 요청으로 이들을 제때 제압할 정도의 치안 유지가 가능할 무렵에는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왜구가 제대로 고려, 나아가 동아시아 역사의 변수로 떠오른 것은 14세기의 일이었다. 고려 말 왜구의 침입 참조.[13] 이미 조짐은 그 전부터 있었는데, 에도 시대(江戸時代)에 존왕(尊王)을 주장한 미토학의 사상을 토대로 한《대일본사》(大日本史)가 이 사건을 조큐의 난리(難)로 표기했다. 에도 시대에 유학(성리학)이 도입되면서 자신의 주군인 쇼군을 몰아내고, 허수아비 쇼군을 앉혀 막부를 장악한 '권신' 호조 요시토키에 대한 비판이 일었고(아라이 하쿠세키의 경우는 아예 "일본 역사에 (호조) 요시토키만한 소인배도 없다"며, 요시토키의 죽음에 대해 제기되는 암살 의혹에 대해 "그런 흉악한 소인배가 자리보전해서 죽었을 리가 있나? 당연히 누군가에 의해 암살을 당했다는 주장이 맞지"라고 제대로 비난했다.), 요시토키에 대한 비판에 맞추어 그런 요시토키를 타도하라는 명령을 내렸다가 망한 고토바 상황을 호조 요시토키에 의해 피해를 입은 피해자로 보는 시각도 대두한 것이다. 하지만 조큐의 난 혹은 조큐의 변이라는 사건에 있어 고토바 상황의 실책들 역시 분명했으며 그에 대한 비판도 충분히 온당한 것이었기에, 그리고 아직 에도 막부가 서슬 퍼렇게 칼을 들고 통치하던 시절이었기에 미토학파의 학자들도 한 발 물러나서 '반란'과 '난리'라는 말을 같이 사용했던 것이다.[14] 일본 역사에서는 이런 식으로 인세이에 참여한 상황의 측근 신하들을 인의 근신(院近臣)이라는 용어로 부른다.[15] 저자인 승정 지엔은 고토바인과 거의 동시대에 살았던 인물이다.[16] 저자인 기타바타케 지카후사는 키타바타케 아키이에의 아버지로 부자 모두 고다이고 덴노와 그의 조정의 편에 서서 아시카가 타카우지 및 북조-막부와 싸웠다. 《구칸쇼》와 《신황정통기》는 모두 한국어로도 번역되어 있으니 관심있는 사람은 일독을 권한다.[17] 新しい歴史教科書をつくる会