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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27 01:08:33

호조 요시토키

파일:北条氏康の家紋アイコン (1).png
가마쿠라 막부 싯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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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마쿠라 막부 제2대 싯켄
호조 요시토키
北条義時
파일:yositoki.jpg
생몰년도 1163년 ~ 1224년 7월 1일 (향년 62세)
재임기간 제2대 싯켄
1205년 ~ 1224년

1. 개요2. 생애
2.1. 청년 시절, 가문과 함께한 도박에 성공하다2.2. 권력 쟁탈전의 승자가 되다
3. 대중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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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가마쿠라 막부의 제2대 싯켄. 호조 가문의 당주이자 초대 싯켄 호조 도키마사의 둘째 아들이었다.

1219년미나모토노 사네토모를 마지막으로 카와치 겐지의 혈통, 정확히는 요리토모의 직계가 단절되자 요리토모의 먼 친척이자 섭관가 출신의 후지와라노 요리츠네쇼군으로 옹립시켰다. 이후로도 사실상 실질적인 지도자로서 막부를 이끌었으며 조큐의 난에서는 무려 상황을 3명이나 유배시켰다.[1][2]

2. 생애

2.1. 청년 시절, 가문과 함께한 도박에 성공하다

1163년, 이즈국(伊豆国)의 지역 호족인 호조 도키마사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일반적인 상황이라면 평범한 무사 집안의 아들로 생을 마감했겠지만, 요시토키가 막 15살쯤이 되던 시절 누나인 호조 마사코가 이즈국으로 유배온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와 결혼을 선택하면서 파란만장한 새로운 삶이 시작되었다.

타이라노 키요모리가 이끄는 헤이케의 시대인만큼 매우 위험한 선택이었지만, 요시토키를 비롯한 호조 가문은 요리토모에게 도박을 걸기로 했고 1180년 이시바시산 전투를 시작으로 겐페이 합전이 시작되면서 전란의 소용돌이로 들어간다. 첫 전투였던 이시바시산 전투에서 패하고 형인 무네토키(宗時)가 전사하면서 형을 대신해 요시토키가 측근이 되어 요리토모를 보필하게 됐다.

1181년, 가마쿠라에 터를 잡은 요리토모로부터 최측근(家子)으로 지정되었고 요리토모를 따르는 겐지 직계 무사들과 고케닌들 중 가장 큰 신뢰를 받았다고 전해진다. 한편 이 시점 호조 가문 내에서 요시토키의 위치는 애매한데 형인 무네토키를 대신해 호조 가문의 장자가 되었다는 분석이 일반적이긴 하나, 가마쿠라 막부의 정식 사서 격인 『아즈마카가미(吾妻鏡)』에서는 이 무렵의 요시토키를 다루면서 호조 가문으로 다루기보다 요시토키 개인이 영지로 하사받은 에마(江間)로 표기가 되고있는지라 요시토키는 에마 가문으로 분가하고 호조 가문의 장자 자리는 요시토키의 이복동생인 호조 마사노리(北條政範)에게 넘어간 것이 아닌가하는 추정도 있다.

1185년에는 미나모토노 노리요리가 이끄는 헤이케 정벌군에 가담해 겐페이 전쟁에서 겐지 가문이 최종 승리하는데 일조한다. 물론 이 과정에서 가장 빛나는 활약을 펼친건 미나모토노 요시츠네지만 요시토키 역시 아시야우라(葦屋浦) 전투에서 나름의 공을 세운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아버지는 일약 쇼군의 장인이 되고, 누나는 쇼군의 부인인 미다이도코로가 되는 등 호조 가문의 도박은 대성공으로 끝난 것.

전란의 시기가 끝나고 세이이타이쇼군이 되어 일약 최고 실권자가 된 요리토모의 공신 숙청이 시작됐지만 이 과정에서 신뢰를 잃지 않고 꾸준히 활약했다. 대표적으로 1190년에는 요리토모의 교토 상경에 함께하고 오슈 후지와라 및 요시츠네 토벌에도 종군한 것으로 전해진다.

요리토모가 살아있던 시절에는 그의 최측근으로 활약했음에도 그 활약이 역사에 두드러지게 남는 상황은 아니었지만, 요시토키의 시간은 아직 시작도 되지 않았다. 그 시간은 1199년 가마쿠라 막부의 초대 쇼군 요리토모가 갑작스런 죽음을 맞이하면서 비로소 찾아오게 된다.

2.2. 권력 쟁탈전의 승자가 되다

1199년, 미나모토노 요리토모가 급사하고 미나모토노 요리이에가 2대 쇼군에 오른 뒤 젊은 쇼군의 독주를 막기 위해 아버지 도키마사와 함께 13인의 합의제(十三人の合議制)의 일원이 된다. 그리고 도키마사와 함께 요리이에와 히키 가문을 숙청하고 권력을 장악한다.

그러나 아버지 도키마사가 후처와 도모해 3대 쇼군 미나모토노 사네토모를 제거하고 사위 히라가 도모마사를 쇼군 자리에 올리려 하자 도키마사를 이즈국으로 유폐시켰다.

1221년, 3대 쇼군 미나모토노 사네토모가 사망하여 요리토모의 직계가 단절되자 이때를 노린 고토바 상황이 막부 토벌의 칙령을 내려 조큐의 난이 발발하였다. 그러나 싯켄이 된 요시토키는 조정의 역습을 진압하고, 고토바 상황을 포함한 상황 3인을 유배보냈다.

여담으로 호조 요시토키 재위기는 고려무신정권최충헌 재위기랑 비슷하며 호조 요시토키 재위 당시 고려 최충헌 무신정권하고 사이가 그리 좋지는 않았다고 한다.[3]

3. 대중 문화

파일:北条義時.jpg 파일:北条義時1.jpg
100만인의 노부나가의 야망


[1] 덤으로 친왕도 둘을 유배보내고 천황도 폐위하고 새로 옹립했다.[2] 다만 쓰치미카도 덴노아버지동생이 망망대해의 섬으로 유배가는데 자기만 편히 있는거에 양심의 가책을 느껴 굳이 자기도 유배보내달라 요청해서 소원을 성취시켜준거에 가깝긴 하다.[3] 가마쿠라 막부는 고려의 무신정권이 아닌 고려 왕실하고 외교를 이어갔다는걸 감안해보면 무신정권 입장에선 이런 일본측의 태도의 반발이 컸을듯 하다.[4] 이 드라마의 주인공은 미나모토노 요리토모호조 마사코로 주인공은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