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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03-06 02:16:52

호조 도키마사

파일:北条氏康の家紋アイコン (1).png
가마쿠라 막부 싯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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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군 (미야쇼군 계보) · 싯켄 }}}}}}}}}
'''가마쿠라 막부 초대 싯켄
호조 도키마사
[ruby(
'''
파일:호조도키마사.jpg
출생 1138년
(호엔 4년)
사망 1215년 2월 6일 (향년 78세)
(겐포 3년 1월 6일)
묘소 시즈오카현 이즈노쿠니시 지케 83-1
간죠쥬인(願成就院)
재임기간 호조씨 도쿠소케(得宗家) 초대 당주
1170년 이전 ~ 1205년 음력 윤7월 19일
초대 교토슈고
1185년 음력 11월 24일 ~ 1186년 음력 3월 27일
초대 싯켄
1203년 음력 9월 ~ 1205년 음력 윤7월 19일
서명 파일:호조 도키마사의 서명.p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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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호조 도키마사(北条時政)
통칭 호조 시로(北条四郎)
관위 종5위하 도토미노카미(遠江守)
부모 아버지 호조 도키카네(北条時兼) 혹 도키카타(時方)
어머니 도모노 다메후사(伴為房)의 딸
부인 이토 스케치카(伊東祐親)의 딸
마키노카타(牧の方)
자식 호조 무네토키(北条宗時, ? ~ 1180)
호조 마사코(北条政子, 1157 ~ 1225)
호조 요시토키(北条義時, 1163 ~ 1224)
아와노쓰보네(阿波局, ? ~ 1227)
호조 도키후사(北条時房, 1175 ~ 1240)
호조 마사노리(北条政範, 1189 ~ 1204)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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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가계3. 생애
3.1. 이즈국의 약소 호족3.2. 요리토모의 장인, 그리고 거병3.3. 가메노마에 사건3.4. 교토슈고3.5. 사임 이후, 후지산 사냥3.6. 막부의 권력을 장악하다3.7. 최후
4.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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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가마쿠라 막부의 초대 싯켄으로 무가 정권 시대를 연 초대 쇼군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장인이다.

2. 가계

호조씨는 간무 헤이시(桓武平氏) 다카모치류(高望流)의 다이라노 나오카타(平直方)의 자손으로 칭했으나 명확하진 않아 의심하는 부정적인 시각도 존재한다. 일설에는 본래 헤이케가 속한 이세 헤이시(伊勢平氏) 출신이며 나오카타의 자손인 호조노스케(北条介)[1]의 데릴사위가 되었다는 설이 있다.[2]

조부 이전 계보는 상이한 기록이 많아 매우 혼란스럽다. 전해지는 계보 기록[3]들에 따르면 도키마사는 나오카타의 5대손이며 아버지가 호조 도키카네(北条時兼) 혹은 도키카타(時方), 할아버지가 호조 도키이에(北条時家)인 점은 대부분 동일하다. 일부 계보에서 도키마사의 친척인 호조 도키사다(北条時定)의 아버지가 호조노스케 도키카네(北条介時兼)로 기록된 점을 들어 도키사다의 가계가 호조씨 본가가 아니었나 추정하기도 한다.[4]

3. 생애

3.1. 이즈국의 약소 호족

이즈국(伊豆国) 다카타군(田方郡) 호죠(北条)[5]에 거점을 둔 영세 호족으로 조부 도키이에 시기에 이즈국(伊豆国)에 정착하여 대대로 재청관인(在庁官人)[6]을 지냈을 것으로 추정된다. 지리적으로 이 지역은 관아인 고쿠후(国府)와 가깝고 동쪽의 관아로 향하는 도로와 서쪽의 수운(水運)에 필수적인 강 사이에 위치하여 교통망을 이용한 상업 활동에 종사 했을 가능성도 있다.

생애 전반기의 행적에 대해서는 불명한 점이 많지만, 요시다 다카나가(吉田隆長)[7]의 《기쓰쿠덴(吉口伝)》에서 잠깐 언급된다.
이즈국의 재청관인이던 호조 도키마사가 모쿠다이(目代)에게 포박되었을 때, 이즈노카미(伊豆守)였던 요시다 쓰네후사(吉田経房)의 대응에 감동한 적이 있다. 나중에 사위가 된 요리토모에게 그것을 이야기했더니, 요리토모가 쓰네후사를 '현인이자 감사한 사람(賢人ユユシキ人)'으로서 신뢰하게 되었다.
요시다 쓰네후사가 이즈노카미를 역임하던 시기는 1151년부터 1158년까지로 도키마사가 17~21세 때이다.

1160년 헤이지의 난(平治の乱)에서 패배했으나 이케노젠니(池禅尼)[8]의 탄원으로 살아남은 미나모토노 요리토모는 이즈국에 유배된다. 그의 관리 및 감시를 하게 된 인물은 이토 스케치카(伊東祐親)로 헤이케의 게닌(家人)[9]이자 도키마사의 장인이다. 1170년 4월, 이즈국 이즈오시마(伊豆大島)에 유배된 미나모토노 다메토모(源為朝)[10]의 토벌군에 참가했다고 한다. 1175년경, 이토 스케치카에게서 죽을 위기를 넘긴 요리토모의 감시역을 맡게 된다.

3.2. 요리토모의 장인, 그리고 거병

1177년경, 교토오반야쿠(京都大番役)[11]로 상경 중이던 때 장녀 호조 마사코와 요리토모가 눈에 맞게 된다. 이는 역적이 사위가 되는 상황이었기에 귀향한 도키마사는 극구 반대했지만, 두 사람이 인근 사찰로 도망가는 등 뜻을 굽히지 않자 결국 두 사람의 결혼을 인정하게 된다. 그 후 도키마사는 요리토모의 든든한 후원자가 된다.[12]

1180년 5월 26일, 모치히토 왕(以仁王)[13]이 헤이케 토벌을 호소하는 격문을 전국의 겐지(源氏)에게 보내고 난 뒤 각지에서 반(反) 헤이시 봉기가 일어나며 겐페이 전쟁의 시작된다. 1180년 8월 17일, 요리토모와 도키마사도 이즈를 비롯한 간토의 호족들의 협력을 얻어 3개월이 지난 미시마신사(三島神社)의 마츠리에 맞춰서 거병한다. 거사일까지 모인 46기(騎)[14]로 방비가 허술해진 이즈국 모쿠다이(目代) 야마키 가네타카(山木兼隆)[15]와 그의 후견인 쓰쓰이 노무토(堤信遠)를 습격하여 수급을 취한다. 호조씨는 도키마사와 아들 호조 무네토키, 요시토키, 친척 호조 도키사다(北条時定), 하인 겐토타(源藤太)가 참가한다. 첫 전투를 성공적으로 마치고 이즈를 제압하자 망설이던 이들이 합세하여 병력이 300여 기로 늘어난다. 그리고 사가미의 미우라씨(三浦氏)와 합류하기 위해서 사가미로 향한다. 8월 23일, 이시바시야마(石橋山)에 진을 친 요리토모의 군세는 사가미의 헤이케군 3000여 기와 전투를 벌이나, 수적 열세와 당일 폭우로 인하여 합류하기로 한 미우라군이 인근 강을 도하하지 못하고 이토 스케치카의 300여 기에게 후방을 공격당하면서 대패한다.(이시바시야마 전투) 도키마사와 요시토키 부자는 요리토모의 명으로 가이 겐지(甲斐源氏)가 통치하는 가이로 향하지만, 장남 무네토키(北条宗時)는 다른 길로 후퇴하다가 이토 스케치카의 군에 포위되어 전사한다. 도키마사 부자는 가이 겐지의 다케다 노부요시(武田信義)와 함께 스루가에 침공하여 헤이케군를 물리치고, 헤이케를 상대하기 위해 후지가와(富士川)에 온 요리토모에게 돌아간다.

3.3. 가메노마에 사건

후처 마키노카타(牧の方)와 혼인한 시기는 알 수 없으나, 지엔(慈円)[16]이 저술한 《구칸쇼(愚管抄)》에 서술된 구절의 해석에 따라 1180년 거병 전후로 설이 다양하다.[17]
時正(政)ワカキ妻ヲ設ケテ、ソレガ腹ニ子共設ケ、ムスメ多クモチタリケリ。
아즈마카가미(吾妻鏡)》의 1182년 기사 이전에 혼인했을 것으로 추측되지만, 그녀의 가문과는 거병 이전부터 교류가 있었을 것으로 본다.

요리토모의 장인으로서 존중을 받지만 권력에 다가갈 기회가 열리지 않던 중 한 사건이 발생한다. 1182년 11월 10일, 도키마사의 부인 마키노카타가 얼마 전 만쥬(万寿)를 출산한 마사코에게 요리토모의 첩에 대한 사실을 알려준다. 그로 인하여 마키노카타의 오라비 마키 무네치카(牧宗親)[18]에게 명하여 첩 가메노마에(亀の前)가 거주하던 요리토모의 측근 후시미 히로쓰나(伏見広綱)의 집을 파괴하여 후처치기(後妻打ち)[19]를 행하자, 이를 안 요리토모는 격노해서 행동한 마키 무네치카를 불러 질책하고 상투를 자르게 된다.[20] 이 소식을 들은 도키마사는 자신의 가족에게 행한 처사를 보고 자신에게 소홀했던 지난 일까지 생각나 홧김에 일족을 이끌고 본거지인 이즈로 항의성 낙향을 한다.[21] 그 후 행적은 기록의 누락으로 알 수 없지만, 가이 겐지의 다케다씨가 실각하면서 공백이 된 스루가슈고(駿河守護)를 맡게 된다.[22]

3.4. 교토슈고

1185년 3월 단노우라 전투의 승리로 5년간 이어진 겐페이 전쟁이 막을 내렸지만, 10월에 요리토모의 동생이자 전쟁영웅인 미나모토노 요시쓰네가 미나모토노 유키이에(源行家)[23]와 함께 요리토모에 대한 모반을 획책한 사실이 누설된다.[24] 11월 24일, 요리토모의 대관으로서 도키마사가 병력 천여 기를 이끌고 교토에 입경한다. 상경한 도키마사는 가장 먼저 조정과 교섭하여 11월 28일에 상황의 측근인 요시다 쓰네후사을 통하여 요시쓰네 추포와 이를 위한 슈고(守護), 지토(地頭) 설치를 인정받은 '분지 칙허(文治の勅許)'를 받고, 요시쓰네 대신 교토슈고(京都守護)로서 교토 부근의 치안유지, 헤이케 잔당 수색, 요시쓰네 문제 처리 등을 맡게 된다. 그리고 요리토모에게 면담을 나눴던 요시다 쓰네후사를 간토모시쓰기(関東申次)[25]에 천거하여 그에게 조정과 막부를 연결하는 역할을 맡긴다.

재임 중 도키마사는 도적들을 게비이시(検非違使)[26]에게 넘기지 않고 처벌하는 등 강권적인 면이 있었다. 그의 시책(施策)에 대해 호평을 받았던 한편, 촌놈이라고 창피 당한 적도 있다.
호조 도키마사님은 작년부터 교토에 주둔하여 슈고로서 무사들을 통솔하고 있는데, 매우 반듯하고 성실하여 사람들이 칭찬한다.
北條殿自去年在京, 執行武家事之間, 於事賢直, 貴賎之所美談也。
-《아즈마카가미(吾妻鏡)》 분지(文治) 2년 2월 25일
도키마사가 또 적(籍)을 올리자 스에나가(季長)가 받았는데, 그때 바로 웃어버렸다고 한다. "촌놈이라 그럴 만도 하다" 했다. (받은) 물건의 크기가 몹시 심상치 않다고 한다.
件男又進籍與季長朝臣, 其次第可咲云々。田舍之者尤可然, 物體太尋常也云々。
-《교쿠요(玉葉)》 분지 2년 3월 24일

그러나 4개월 만인 1186년 3월 1일에 조정에 7개국 지토(7ヵ国地頭=교토슈고)를 사임한다고 고시라카와 덴노에게 상주하고, 3월 27일에 호조 도키사다를 필두로 한 가신단 일부를 두고 교토에서 나와 가마쿠라로 내려간다.[27] 도키마사의 후임으로 요리토모의 매제 이치조 요시야스(一条能保)가 맡게 된다.

이 시기 요시쓰네의 장인인 가와고에 시게요리(河越重頼)가 인척인 이유로 1185년 11월 12일에 소령 몰수 및 무사시노쿠니루스도코로소켄교시키(武蔵国留守所惣検校職) 파면 당하고, 그 자리를 도키마사의 사위인 하타케야마 시게타다(畠山重忠)가 임명 받는다. 무사시노쿠니루스도코로소켄교시키는 무사시의 실무를 담당하는 재청관인 직함으로 12세기 이후 지치부씨(秩父氏)가 세습했다. 또한, 무사시의 무사들을 통솔 및 동원하는 권한을 갖고 있다. 이 때문에 요리토모는 자신에게 모반을 시도한 요시쓰네의 인척에서 지치부씨 중 자신의 처가 호조씨의 인척인 하타케야마씨(畠山氏)에게 옮긴다.

3.5. 사임 이후, 후지산 사냥

가마쿠라로 돌아온 도키마사는 교토에서의 활약이 거짓말인 것처럼 눈에 띈 활동이 보이지 않는다. 이 시기에는 본거지인 이즈국의 장악에 힘을 썼다고 생각된다. 한편, 1189년 7월 19일 오슈 합전(奥州合戦) 출진 명단에 호조 도키마사를 비롯한 호조씨 모두 종군한 것이 보인다. 특히, 요시토키는 요리토모의 측근으로 활동한다. 1192년 7월 12일, 요리토모가 세이이타이쇼군(征夷大将軍)에 오르면서 가마쿠라 막부의 초대 쇼군이 되었고, 도키마사 역시 쇼군의 장인으로서 지위적 위상이 한층 올라간다. 1193년 2월 25일 사에몬노죠(左衛門尉)로서 교토에 주재하며 교토슈고 이치조 요시야스를 보조하여 요시쓰네 잔당을 색출하던 친척 호조 도키사다가 사망한다.[28]

1193년 5월 8일부터 6월 7일까지 스루가의 후지노아이자와(富士野藍沢)에서 장대한 몰이 사냥이 진행된다. 이 사냥의 목적은 쇼군이 된 요리토모의 권위를 과시하거나 군사 훈련, 후계자 공표 등 여러 가지가 있었다. 요리토모의 명으로 도키마사가 준비를 위해 5월 2일에 내려가 이즈와 스루가의 고케닌을 지휘하고 가노 무네모치(狩野宗茂)와 함께 가옥 건설을 한다. 쇼군 요리토모를 비롯한 70여 명의 고케닌이 참가하고, 요리토모의 아들 미나모토노 요리이에의 사슴 사냥이 행해진다. 그러던 5월 28일 밤 사건이 발생한다. 이토 스케치카의 손자인 소가 스케나리(曾我祐成)와 소가 도키무네(曾我時致) 형제가 요리토모의 숙소에 난입하여 요리토모의 총신(寵臣) 구도 스케쓰네(工藤祐経)를 죽인다.[29] 이 소동으로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한다. 소가 스케나리는 닛타 다다쓰네(仁田忠常)가 처치하고, 소가 도키무네는 오토모 요시나오(大友能直)가 붙잡아 요리토모 앞에서 심문한 뒤 처형한다. 문제는 소가 형제가 도키마사의 비호를 받았고 특히나 소가 도키무네는 도키마사가 후견인이자 에보시오야(烏帽子親)로 편휘를 받아 '도키(時)'를 사용한 매우 깊은 관계으로 갖고 있었다는 점이다. 때문에 도키마사가 소가 형제를 통해서 요리토모를 죽이려 했다는 흑막 음모론이 있으나 정확한 진상은 알 수 없다.

이후 소가 형제 사건의 오보로 인하여 쇼군의 생사가 불분명한 때 한 발언으로 모반 혐의를 받게 된 동생 미나모토노 노리요리가 1193년 8월 17일 이즈에 유배되어 이후 알 수 없지만 일부 사료[30]에서는 주살되었다고 전한다. 그의 게닌도 불온한 움직임이 있다는 이유로 다음날(18일) 모두 토벌되고, 8월 24일에는 거병 이후 막부의 중신인 오바 가게요시(大庭景義)와 오카자키 요시자네(岡崎義実)가 갑자기 노쇠를 이유로 출가하게 된다. 한편, 1194년 8월 19일에 가이 겐지의 야스다 요시사다(安田義定)도 전년(1193년) 아들의 죄[31]도토미슈고(遠江守護) 해임과 소령 몰수된 후 모반 혐의으로 처형된 후 효수된다. 이즈의 유력자 구도 스케쓰네의 비명횡사와 도토미슈고 야스다 요시사다의 처형으로 이즈국 완전 장악과 슈고직 확대로 이즈, 스루가, 도토미 3개국의 슈고를 맡아 토대를 공고히 한다.

3.6. 막부의 권력을 장악하다

초대 쇼군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의 권력이 영원할 듯했지만 1199년, 예상밖 낙마 사고로 죽음을 맞이하면서 상황이 바뀌게 된다. 요리토모의 차남 미나모토노 요리이에가 2대 쇼군 자리에 오르긴 했지만 아버지만한 정치력을 발휘하지는 못했고 외려 유력 고케닌들의 반발을 사게 되었다. 그리고 이 중심에 도키마사와 호조 일족이 있었다.

도키마사와 호조 일족은 요리이에의 독주에 반대하며 13인의 합의제(十三人の合議制)를 시스템화해 견제했다. 물론 요리이에는 이에 반발해 친위세력을 키우려 했지만 외려 측근이었던 카지와라 카게토키가 반역의 누명을 쓰고 죽었고 외척이었던 히키 가문 역시 도키마사와 호조 가문이 자신들을 따르는 고케닌들을 규합해 제압하면서 수족을 모두 잃어 허수아비가 되고 말았다.[32]

결국 요리이에는 1203년 쇼군 자리에서 쫓겨났다 죽음을 맞이했고, 호조 가문은 미나모토노 사네토모를 쇼군으로 올리고 도키마사 본인이 싯켄에 오르면서 권력을 장악했다. 이즈의 호족이었던 그가 무사들을 지배하는 사실상의 최고 권력자가 된 것.

이후 막강한 권력을 누린 것으로 보이는데, 1205년 6월에는 유력 고케닌 중 한 명인 하타케야마 시게타다(畠山重忠) 부자를 사위[33] 히라가 도모마사의 참소만 믿고 단독으로 모반죄를 걸어 참살해버리기도 했다. 이때 아들인 호조 요시토키와 딸이자 초대 쇼군의 아내인 호조 마사코가 강력하게 말렸지만 이를 무시하면서 사이가 벌어지게 된다.

3.7. 최후

하지만 지나치게 욕심을 내다 화를 불렀다. 독단적으로 자신의 후처와 공모해 외손자 사네토모까지 살해하고 후처와의 사이에서 얻은 딸과 결혼한 사위 히라가 도모마사를 쇼군 자리에 올리려는 어처구니 없는 짓을 도모하다가 딸 호조 마사코와 아들 호조 요시토키에게 걸려버리는 마키씨 사건(牧氏事件)이 벌어졌다.

감히 쇼군을 살해하려고 했던 데다가 이미 자식들과의 사이가 크게 벌어진 상황이었기 때문에 반역죄로 죽음을 맞았어도 할 말이 없었지만 그래도 요시토키와 마사코가 자기 아버지인 도키마사를 죽일 수는 없었기 때문에 권력을 놓고 이즈국의 장원에 사실상 유폐당하는 선에서 그쳤다.

워낙 어처구니가 없는 사건인만큼 당대 및 후대에 여러 가지 해석이 나왔는데 가마쿠라 초기에 작성된 《육대승사기(六代勝事記)》[34]에는 도키마사가 모든 계획을 짜고 실행하려 했다고 적혀있는 반면, 가마쿠라 막부의 공식 역사서에 가까운 《아즈마카가미(吾妻鏡)》에는 도키마사가 나이가 많아 판단력이 흐려진 상태에서 후처의 선동에 놀아나서 무리한 시도를 했다고 적혀있다.

이후 권력은 후임 싯켄에 오른 요시토키가 장악하게 되었고, 본인은 계속 유폐당해 있다가 1215년, 종기가 악화되어 사망했다.

4. 여담

생애에서 볼 수 있다시피 지방 호족에서 일약 무가의 최고 실권자까지 올라간 입지전적인 인물이지만, 정작 당대에도 평은 좋지 않았는데 아무래도 만년의 노욕의 영향이 컸던 것으로 보인다. 끝이 좋아야 다 좋은 것이라는 말의 반면교사인셈.

특히 호조 도키마사 본인의 손자이자 3대 싯켄인 호조 야스토키는 일본 역사상 최초의 무가법(武家法)인 고세이바이시키모쿠(御成敗式目, ごせいばいしきもく)를 제정하면서 막부의 권력을 절대화한 인물로 유명한데 막부의 최고권력자로서 초대 쇼군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와 그 부인이자 자신의 고모 호조 마사코, 자신의 아버지 호조 요시토키를 막부의 조묘로 삼아 자주 참배하고 여러차례 예를 올렸지만 도키마사에 대해서는 반역자로 평가하며 사실상 존재를 부정하기도 했다.

[1] 스케(介)는 유력 재청관인(在庁官人)이자 현지 유력자를 의미하며, 대표적으로 미우라노스케(三浦介), 치바노스케(千葉介) 등이 있다.[2] 노구치 미노루(野口実)의 가설[3] 존비분맥(尊卑分脈), 계도찬요(系図纂要), 속군서류종(続群書類従), 묘혼지본(妙本寺本), 쇼주지본(正宗寺本), 쥬조케 문서(中条家文書), 산몬 문서(山門文書) 등[4] 오쿠토미 다카유키(奥富敬之)의 설[5] 시즈오카현 이즈노쿠니시 지케(寺家)[6] 헤이안 시대 중기부터 가마쿠라 시대까지 지방관청의 행정 실무를 종사한 지방관료를 뜻한다.[7] 요시다 쓰네후사(吉田経房)의 5대손[8] 다이라노 기요모리의 계모[9] 헤이안 시대 중기 이후 귀족을 섬기는 가신이나 종자(従者) 등을 부르는 용어[10]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의 삼촌[11] 헤이안 시대 후기에 지방 무사에게 교토의 경호를 맡긴 군역[12] 도키마사는 상경했을 때 불온해지는 중앙 정세를 보고 헤이케가 오래가지 못할 것을 예견하고 진행했을 가능성도 있다.[13] 고시라카와 덴노의 제3황자[14] 이 시대의 인원을 세는 단위인 기(騎)는 무사 한 명만 집계했기 때문에 그 휘하의 가인(家人)이나 잡병 등을 제외한 숫자이다. 1명의 무사가 1~5명까지 가인이나 잡병을 데리고 다녔기 때문에 표기된 인원에서 대략 2~3배의 인원이 참가했을 것으로 추정된다.[15] 이즈노카미 다이라노 도키타다(平時忠)의 게닌[16] 셋칸케(摂政家)의 후지와라노 다타미치(藤原忠通)의 아들이자 간파쿠(関白) 구조 가네자네(九条兼実)의 동생[17] 스기바시 다카오(杉橋隆夫)의 1159년 이전 설, 사카이 고이치(坂井孝一)의 1175년 이후 설, 호소카와 시게오(細川重男)의 1180년 이후 설 등[18] 사료에 따라 아버지라는 설과 오라비라는 설이 존재한다.[19] 헤이안 시대부터 에도 시대까지 행해지던 풍습으로 남편이 처와 이혼하고 후처와 결혼할 때, 전처가 예고하고 후처의 집을 습격하는 것이다.[20] 이 시대의 상투는 큰 의미를 지닌 것인데, 이를 자른 것은 매우 수치스럽고 원한을 사는 행동이었다.[21] 아들 요시토키는 같이 내려가지 않고 가마쿠라에 머물며 요리토모 곁을 지켰다.[22] 스루가국은 처가 마키씨(牧氏)의 소령 오오카마키(大岡牧)과 사위 아노 젠죠(阿野全成)의 연고지 아노장(阿野荘)이 있어 인척의 영지를 발판으로 공백이 된 이곳을 도모했다고 여겨진다.[23]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와 요시쓰네의 삼촌[24] 고시라카와 덴노가 미나모토노 요시쓰네의 요청대로 요리토모 토벌의 선지(宣旨)를 내렸으나, 이에 호응하는 이는 극소수뿐이었다.[25] 가마쿠라 시대 조정에 설치된 역직으로 막부와 조정・(院) 사이에서 연락 및 의견 조정을 맡았다.[26] 헤이안 시대 교토의 치안 유지와 민정 등을 관할하던 영외직으로 덴노의 직속 군사조직이다.[27] 호조 도키사다(北条時定), 아츠사노 신다이부(梓の新大夫), 노타노 헤이지(野太の平二), 야시하라노 쥬로(弥次原の十郎), 구하바라노 지로(桑原の二郎), 히젠노 에지(肥前の江次), 사카오 시로(さかを四郎), 사카오 하치로(さかを八郎), 나이토 시로(内藤四郎), 야겐지(弥源次), 히타치노보 쇼묘(常陸坊昌明), 헤이코 지로(平子二郎), 쥬하치(忠八), 쥬타(忠太), 우에하라 구로(上原の九郎), 다시리노 다로(田尻の太郎), 이와나노 다로(岩名の太郎), 이와나노 지로(岩名の二郎), 이와나노 헤이자(岩名の平三), 야와타노 로쿠로(八幡の六郎), 노이요노 고로타로(のいよの五郎太郎), 노이요노 사부로(のいよの三郎), 노이요노 고로(のいよの五郎), 시무라노 헤이자(志村の平三), 도노오카노 하치로(殿岡の八郎), 히로사와노 지로(広沢の二郎), 야시로(弥四郎), 야고로(弥五郎), 야로쿠로(弥六郎), 고나이(こうない), 오카타노 쥬로(大方十郎), 헤이이치노 사부로(平一の三郎), 이가노 헤이타(伊賀の平太), 이가노 시로(伊賀の四郎), 이가노 고로(伊賀の五郎)
이상 35인
《아즈마카가미》 1186년 3월 27일(文治2年3月27日)
[28] 아즈마카가미에서는 그가 호조 도키카네(北条時兼)의 아들로 도키마사의 종제라고 한다.[29] 거병하기 이전 요리토모의 명으로 이토 스케치카를 처단하러 갔을 때 그 옆에 있던 소가 형제의 아버지이자 이토 스케치카의 장남인 가와즈 스케야스(河津祐泰)를 죽여서 이에 대한 복수로 그를 죽인 것이다.[30] 《호랴쿠칸키(保暦間記)》, 《호조쿠다이키(北條九代記)》 등[31] 아들인 야스다 요시스케(安田義資)가 인의 궁녀에게 연애 편지를 보낸 죄[32] 요리토모의 지나친 친족 숙청으로 요리이에를 지켜줄 친위세력이 마땅치 않았던 영향이 크다.[33] 시게타다 역시 이나게 시게나리등과 함께 그의 사위중 한명이었다.[34] 다만 조큐의 난 직후 공가의 입장에서 쓰여진 책이기 때문에 상황파악이 좀 더 부정확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