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c29f6d><colcolor=#000> 헤이지의 난 平治の乱 | ||
기간 | 1159년 12월 9일 ~ 1160년 1월 3일 | |
장소 | 교토 | |
교전 세력 |
신제이 |
후지와라노 노부요리 |
지휘관 | 타이라노 키요모리 타이라노 시게모리 | 미나모토노 요시토모† 미나모토노 요시히라† |
병력 | 불명 | 불명 |
결과 | 니조 덴노 측 승리 고시라카와 상황 유배, 헤이케 무인정권의 설립 |
1. 개요
1159년, 일본 헤이안 시대 말기에 니조 덴노 중심의 천황파 세력과 고시라카와 상황 중심의 상황파 세력 사이에 내전이 발생했다. 이 전쟁에서 천황파의 무력 기반인 타이라 가문(헤이케)이, 상황파의 무력 기반인 미나모토 가문(겐지)을 물리치면서, 무사 출신인 타이라 가문을 중심으로 한 헤이케 정권이 수립되었다.'헤이지'란 이름은 당시의 연호에서 유래되었다.
2. 배경
1156년 7월, 호겐의 난을 통해 고시라카와 덴노가 정국의 주도권을 장악했다. 즉위 2년 후 퇴위하고 상황으로 물러난 뒤 인세이(院政)를 단행하며 실질적인 통치 권한을 유지했다. 하지만 새로운 덴노로로 즉위한 니조 덴노와 양모인 미후쿠몬인(美福門院)은 현직 덴노 중심의 친정 체제를 확립하려 했고, 이는 고시라카와의 인세이 체제와 충돌하게 된다.미후쿠몬인은 도바 상황으로부터 광대한 장원을 상속받은 당대 최대의 장원 영주였으며, 자신의 양자인 니조의 즉위를 고시라카와가 아닌 신제이(信西)를 통해 실현시켰다. 신제이는 고시라카와의 정치적 측근이자 개혁의 주체였으나, 제도적 차원에서는 덴노 중심 통치 원리에 충실한 관리였기 때문에, 미후쿠몬인의 정치적 지원을 받은 이상 고시라카와와 일정한 거리를 둘 수밖에 없었다. 이때문에 조정 내부에는 고시라카와 인세이파, 니조 친정파, 신제이 일문, 무사 세력이라는 다중 권력 축이 병존하게 되었다.
고시라카와는 자신에게 충성하는 새로운 측근 세력의 육성이 절실해졌고, 이에 따라 후지와라노 노부요리(藤原信頼)가 발탁되었다. 노부요리는 불과 2년여 만에 수령직에서 권중납언까지 급속히 출세하며 실권자로 부상하였고, 무사 세력의 중심 중 한 명이었으나 신제이 체제 하에서 기요모리에 비해 푸대접을 받고 있던 겐지의 미나모토노 요시토모와 긴밀히 제휴했다. 노부요리는 이에 더불어 섭관가와의 정략혼, 무력 기반 확보, 인청 내 핵심 관직 장악을 통해 고시라카와의 인세이를 물리적으로 뒷받침할 인물이 되었다.
한편, 신제이는 기록소 설치, 장원 정리, 후원령 재편 등의 제도 개혁을 추진하며 정국 개편을 시도했지만 고시라카와, 니조 양측 모두의 불신을 사기 시작했고, 정치적으로 점점 고립되었다. 이 와중에도 헤이케의 다이라노 기요모리는 조정 내에서 실리를 극대화한 전략적 행보를 이어갔다. 호겐의 난 이후 신제이와 밀착해 그 권력을 뒷받침하면서 수개국의 수령직을 얻어낸 뒤 일족에게 분산시켜 중앙에서 입지를 다졌고, 규슈에서 송나라와의 무역을 독점해 독자적인 경제 기반을 확보하였다.
동시에, 노부요리가 부상한 이후에는 신제이와 노부요리 양가 모두에 딸을 시집보내며 양측 모두와 혼맥을 구축하고, 난 직전까지는 특정 편을 지나치게 들지 않고 중립적 입장을 유지하며 충돌을 피하는 데 성공하였다.
이처럼 고시라카와 인세이파와 니조 친정파의 권력 이중 구조, 신제이 일문의 개혁 독주에 대한 반발, 무사 계급 내의 패권 경쟁, 그리고 정치 실세들의 혼맥·이권 다툼은 결국 1159년 헤이지의 난으로 폭발하게 된다.
3. 진행
3.1. 산조도노 공격
1159년 12월 9일 깊은 밤, 후지와라노 노부요리와 그에게 동조한 무장 세력이 고시라카와 상황(上皇)의 거처인 산조도노(三条殿)를 습하였다. 이들은 고시라카와와 이복 누이 조세이몬인(上西門院)의 신병을 확보한 뒤, 저택에 불을 지르고 탈출을 시도하는 이들에게는 무차별적으로 화살을 퍼부었다. 이 과정에서 경비 책임자를 비롯해 여러 관인과 궁녀들이 희생되었으나, 당초 목표였던 신제이(信西) 일문은 이미 사전에 도주한 상태였다.이러한 기습은 단순한 정변이 아니라, 노부요리 개인의 권력 기반을 지키기 위한 선제적 쿠데타였다. 노부요리는 본래 고시라카와의 측근으로 출세했으나, 정권 운영의 실권이 여전히 고시라카와의 오래된 참모 신제이에게 남아 있고, 상황 또한 그와 완전히 결별하지 않았다는 점에 불안감을 품고 있었던 것.
노부요리는 고시라카와가 신제이와의 결별을 망설이자 자신이 배신당할지도 모른다는 위기의식에 사로잡혔다. 설상가상으로 니조 덴노 측도 신제이 제거 이후 그를 배제하고 독자 체제를 구축하려 하자, 노부요리는 결국 모든 세력에게 버림받을지도 모른다는 공포에 휩싸여 행동에 나서게 되었다.
결국 노부요리는 선수를 쳐 고시라카와를 완전히 장악하고자 마음먹었고, 명목상으로는 고시라카와를 옹립하는 형식을 취하면서도, 실질적으로는 인세이를 무력화하고 자신이 권력을 잡으려 했다. 노부요리 측은 고시라카와와 조세이몬인을 니조 덴노의 거처인 잇폰고쇼쇼(一本御書所)로 이송하여 사실상 연금 상태에 두었다. 『구간쇼(愚管抄)』에는 고시라카와가 이곳에 “머물렀다(すゑまいらせて)”는 표현이 있어, 노부요리가 고시라카와를 실질적 정치 포로이자 명분용 인물로 활용하려 했음을 암시한다.
이로 인해 피치 못하게 서로 정적이 된 두 부자, 고시라카와와 니조가 함께 같은 어소에 구금되는 웃지 못할 상황이 펼쳐졌다. 다만 이 역시 단순한 코미디처럼 볼 수만은 없는 것이 당시 이 공격에 가담한 마나모토노 미쓰모토가 미후쿠몬인의 가신 미쓰야스의 조카였으며, 당시 교토 치안을 책임지고 있던 검비위사 역시 또한 니조 덴노측 인물인 후지와라노 코레카타(藤原惟方)던 점에서, 쿠데타가 오히려 니조 친정파의 묵인 또는 협력 아래 진행되었을 가능성도 지적된다.
반란 이튿날인 12월 10일, 신제이의 아들들이 연달아 체포되었고, 전원 유배를 가게 됐다. 한편, 신제이 본인은 3일뒤인 12월 13일, 야마시로국 다하라[1]로 도주해 땅속에 묻은 나무상자 안에 몸을 숨겼으나, 추격병들에게 들키게 생기자 자결을 택하였다. 시신은 미쓰야스에 의해 수습되었고, 목이 베여 교토로 이송된 후 대로에서 효수되었다.
3.2. 노부요리의 정권 장악
신제이가 자결한 다음 날인 12월 14일, 후지와라노 노부요리는 고시라카와 상황과 니조 덴노를 확보한 상태에서 정권의 찬탈하고, 이를 공식화하기 위해 인사를 단행했다. 당시 자신의 대표적인 우군 세력이었던 미나모토노 요시토모는 하리마노카미(播磨守)로 임명했고, 그 맏아들인 미나모토노 요리토모는 우효에곤노스케(右兵衛権佐)[2]라는 관직을 받았다. 헤이케모노가타리에는 노부요리 자신을 근위대장에 스스로 임명했다 기록도 있으나 다른 기록에서 이 부분은 찾아보기 어렵다.이러한 인사는 노부요리가 정변의 정당성을 과시하며 권력 기반을 공식화하려 한 조치였지만, 동시에 많은 귀족들에게는 반란으로 쟁취한 권력을 정당화하는 위선적 행위로 비쳤다. 당시 대신이었던 후지와라노 고레미치(藤原伊通)는 이를 두고 “사람을 많이 죽인 자가 높은 관직을 받는다면, 왜 산조도노 우물에 관직을 주지 않는가?”라고 조롱[3]했다고 전해진다.
실제로 노부요리의 권력 찬탈은 조정 내 다수 귀족들의 반감을 샀으며, 니조 덴노 역시 그를 더 이상 통제할 수 없는 위험 인물로 판단하고, 측근들과 함께 노부요리를 배제할 방안을 물밑에서 모색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아즈마노쿠니에서 올라온 미나모토노 요시히라(源義平)는 정세의 흐름을 재빨리 읽고, 노부요리에게 다이라노 기요모리의 진로를 먼저 나서 차단해야한다고 강력히 주장하였다. 그러나 노부요리는 자신의 아들이 기요모리의 딸과 혼인 관계에 있다는 점을 들어, 기요모리가 자신과 협력할 것이라 주장한 뒤 이를 거부했는데 이 판단은 노부요리의 가장 치명적인 오판으로, 곧 이어질 권력 역전극의 시발점이 된다.
3.3. 니조 덴노의 탈출극
다이라노 기요모리는 이때 기이국 구마노 3산 일대에서 참배를 하고 있다가 뒤늦게 교토에서 일어난 정변 소식을 접했다. 큰 충격을 받은 뒤 규슈로 도피하는 방안까지 고민했지만, 기이국 무사인 유아사 무네시게와 구마노 사원의 주지스님인 탄카이의 도움을 12월 17일 극적으로 교토로 돌아왔다.기요모리가 귀환길에 이토 카게츠나, 다테 사다야스 등 이가·이세 지역의 무장들을 세력에 흡수하면서 병력을 불린 반면 기요모리의 라이벌 미나모토노 요시토모는 노부요리 쿠데타 당시 워낙 은밀하게 움직인데다가, 애초부터 전면전을 염두에 두지도 않았기 때문에 준비된 병력이 많지 않았다. 기요모리의 복귀로 교토 내 군사력 균형은 급격히 흔들리기 시작했고, 노부요리 측의 군사적 우위는 한순간에 사라졌다.
이 불편한 균형 가운데 신제이와 가까웠던 내대신 산조노 기미노리가 몰래 기요모리와 접촉했다. 동시에, 니조 덴노의 측근인 후지와라노 츠네무네와 후지와라노 코레카타도 함께 움직이며, 노부요리를 배제하고 정권을 재정비하려는 움직임이 물밑에서 진행되었다. 신제이를 제거한 이상, 노부요리 세력은 더는 필요 없었기 때문.
이들은 결국 니조 덴노를 탈출시켜 기요모리에게 합류시키는 계획, 즉 이른바 ‘로쿠하라 행차(六波羅行幸)’를 준비했다. 후지와라노 타다아키라가 밀명을 띠고 궁궐 안으로 들어갔고, 12월 25일 새벽, 기요모리는 노부요리에게 인명부를 제출하고 항복 의사를 내비치는 기만책을 펼쳤고, 사위였던 노부치카도 돌려보냈다. 노부요리는 이를 진심으로 받아들이고 기뻐했지만, 요시토모는 기요모리 쪽 무사들이 모두 실전에 강한 정예들이라며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그날 밤, 코레카타가 고시라카와 상황을 따로 찾아가 먼저 탈출 계획을 알리자, 고시라카와는 곧바로 닌나지(仁和寺)로 몸을 피했다. 그리고 다음 날인 12월 26일 새벽 2시, 니조 덴노가 은밀히 궁을 빠져나와 기요모리의 저택인 로쿠하라로 탈출했다. 탈출에 성공한 뒤 타다아키라가 이 사실을 공표하자, 궁정의 고위 귀족들과 실무 관료들이 앞다투어 로쿠하라로 모여들었고, 한때 노부요리와 제휴했던 섭정가의 수장 타다미치와 아들 모토자네까지 기요모리 진영에 합류하면서, 로쿠하라는 명실상부한 관군 본거지로 탈바꿈했다.
이제 주도권은 완전히 기요모리 측으로 넘어갔고, 곧바로 노부요리와 요시토모를 역적으로 규정하는 토벌령(追討宣旨)이 내려졌다. 한편 덴노의 도피와 상황의 도주 소식을 들은 노부요리파는 큰 충격에 빠졌고, 요시토모는 노부요리를 가리켜 “일본 제일의 바보같으니라고”라고 일갈했다고 전해진다. 노부요리, 노부치카부자와 요시토모는 함께 무장을 갖추고 출진했으나, 미나모토노 모로나카는 몸을 피하기 위해 삼종신기 중 하나인 야타노카가미를 몰래 들고 도주하였다.
3.4. 로쿠하라 전투
노부요리 측의 병력은 산조도노 습격에 가담했던 미나모토노 요시토모를 중심으로, 그의 아들들과 측근 무사들로 이루어진 소규모 혼성군이었다. 이들은 대부분 요시토모와 혈연이나 개인적 인연으로 연결된 무사들이었고, 공식 동원이 아닌 개인적 소집을 통해 모인 사병이었기 때문에 전체 병력 규모는 작았다.이에 맞선 다이라노 기요모리는 전장을 궁궐로 끌어들이는 것을 피하고자, 로쿠하라 지역으로 전투를 유도하는 전술을 택했다. 그는 장남 시게모리와 동생 요리모리를 먼저 출진시켰다. 전투 중, 궁궐 요메이몬을 지키고 있던 미쓰야스와 미쓰모토가 기요모리 측으로 이탈했다.
특히 미쓰야스는 니조 덴노의 양모인 미후쿠몬인의 가신으로, 본래 니조 친정파에 가까운 인물이었고, 신제이 타도를 위해 노부요리 측에 잠깐 가담했던 것이었만큼 기세가 기요모리 쪽으로 기울자 곧바로 노선을 바꾼 것이다.
기요모리 측은 계획대로 전장을 점차 로쿠하라 인근으로 유도하며 지형적으로 유리한 위치를 선점했고, 요시토모는 전세를 뒤집기 위해 필사적으로 진군했으나, 결국 교토 남쪽의 로쿠조 강변(六条河原)에서 대패하고 말았다. 부하 무사들의 필사적인 분전 덕분에 요시토모는 가까스로 전장을 빠져나갔지만, 이렇게 헤이지의 난은 사실상 끝을 맺었다.
4. 결과
로쿠하라 전투가 끝난 후, 후지와라노 노부요리와 그 동생 나리치카는 뒤늦게 고시라카와가 피신해있는 닌나지의 각쇼 법친왕[4]에게 몸을 의탁하려 했지만 정세는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국면으로 접어든 뒤였다. 결국 노부요리는 난을 진압한 다이라노 기요모리 앞에 끌려와 헤이지의 난을 일으킨 주동자로서 처형되었다.그나마 나리치카는 기요모리의 장남 시게모리의 처형제였다는 점이 참작되어 죽음을 면하고 관직에서 쫓겨나는 선에서 그쳤고 야타노카가미을 가지고 도망쳤던 미나모토노 모로나카 역시 로쿠하라에 스스로 출두해 항복해 죽음을 면하고 시모츠케국으로 유배되었다.
미나모토노 요시토모는 패전 후 고향 아즈마노쿠니로 탈출을 시도했으나, 도중에 아들 요리토모와 흩어졌고, 장남 토모나가와 숙부 요시타카도 전사했다. 12월 29일, 오와리국 내카이 장원에서 장원 관리자 나가타 다다치카에게 몸을 의탁했지만, 동행 중이던 가마다 마사키요와 함께 배신당해 피살되었다. 두 사람의 머리는 이듬해 정월 9일, 역적으로서 교토 도성에 효수되었다.
요리토모의 형인 요시히라 역시 난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적에게 붙잡혀 1월 21일, 로쿠조 강변에서 처형당했다. 이로써 요시토모 진영은 결국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졌다. 요시토모와 행동을 함께했던 시게나리와 스에자네도 죽음을 피하지 못했고, 이렇게 고시라카와 인세이를 지지했던 공가, 무가 세력은 완전히 괴멸되었다
그나마 요리토모 역시 체포되어 기요모리의 동생인 요리모리에게 넘겨져 죽음을 맞이할뻔했으나, 처형 직전 기요모리의 계모인 이케노젠니(池禅尼)가 탄원해 가까스로 목숨을 건지고 이즈국으로 유배됐다. 이는 요리토모가 아직 어렸고, 그의 생모가 정치적으로 영향력 있는 아츠타 신궁 대궁사 가문 출신이었으며, 이케노젠니와도 일정한 인척 관계를 맺고 있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물론 이 선택이 나중에 어떤 결과를 만들었는지를 돌이켜보면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대목이다.
한편 12월 29일, 논공행상이 단행되었는데, 헤이케 주요 인사들이 각각 오와리, 이요, 도토미, 엣추, 이가 등 지방국을 통치하는 관리(国司)로 임명되었고, 이로써 헤이케가 실질적으로 다스리는 지행국(知行国, 위임 통치와 수입을 맡은 지방 단위 국)은 5곳에서 7곳으로 늘어났다. 무가 권력으로서의 헤이케가 조정으로부터 공인되는 상징적 장면이었다.
같은 날, 니조 덴노는 미후쿠몬인의 저택인 하치조도노(八条殿)로 행차하였고, 다이라노 기요모리는 이를 직접 호위하며 황실과의 유대를 과시했다. 이는 기요모리가 황권과 연결된 실질 권력자로 부상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었다.
5. 이후
헤이지의 난 직후, 니조 덴노 측은 정권을 장악하며 고시라카와 상황을 노골적으로 압박하기 시작했다. 실권을 상실한 고시라카와는 점차 조정 내에서 고립되었고, 이에 대한 모욕 역시 점점 노골적인 형태로 드러났다. 1160년 정월 초엿새, 고시라카와가 귀족 저택에 들러 하치조 대로(八条大路)의 행사를 관람하던 중, 누군가 고의로 시야를 차단하기 위해 목재 더미를 쌓아 올리는 일이 벌어졌다. 고시라카와에 대한 공개적 조롱이자 황실 권위에 대한 노골적인 도전으로 받아들여졌다.격분한 고시라카와는 다이라노 기요모리에게 이 사건의 배후로 지목된 니조 덴노 측 실력자, 후지와라노 쓰네무네와 후지와라노 코레카타를 체포하라며 강력히 압박했다. 두 사람은 각각 니조 덴노의 외척 및 유모 인척으로, 당시 니조 친정 체제를 실질적으로 운영하던 핵심 세력이었다. 기요모리는 의외로 빠르게 반응해 측근들을 동원, 두 사람을 체포해 고시라카와에게 넘겼다. 이 장면은 기요모리가 정치적 기회를 포착해 점차 고시라카와와도 접점을 넓혀가던 순간으로 해석된다.
이 체포극에는 당시 조정의 최고 원로이자 섭정가의 수장이었던 후지와라노 다다미치도 동참했는데, 그는 현장에서 고시라카와의 입장에 힘을 실어주며 기요모리의 행동을 묵인 혹은 지지했다. 이로써 기요모리는 고시라카와-섭정가 양측과의 유대를 강화하게 되었고, 니조 덴노는 사실상 이를 수용할 수밖에 없었다. 결과적으로 고시라카와는 기요모리 및 타다미치와의 일시적 공조를 통해, 니조 친정 체제를 견제하는 데 성공했다.
물론 니조 진영 역시 이를 지켜만보고 있지는 않았고 1162년경, 니조 덴노는 고시라카와 측근들이 주술로 정국을 농락하려 했다는 혐의를 문제삼아 이들을 처벌하며 반격에 나섰다. 이는 고시라카와와 니조 간의 권력 투쟁이 여전히 진행 중임을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하지만 1165년, 니조 덴노가 요절하고 겨우 두 살의 로쿠조 덴노가 즉위하면서, 헤이지의 난 이후 유지되던 권력 균형의 추가 무너지게 되었다. 로쿠조는 실질적인 친정이 불가능한 나이였고, 이는 고시라카와 법황의 인세이 복귀를 정당화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이후 고시라카와는 로쿠조를 옹립한 형식 아래 다시 조정의 실권자로 복귀하였으며, 인사권과 국정 운영 전반을 장악하며 과거의 고립을 되갚듯 적극적인 정치 개입에 나섰다.
이 와중에 다이라노 기요모리 역시 결정적인 정치적 부상을 이룬다. 1167년, 무가 출신으로서는 전례 없는 태정대신에 오르며 조정의 최고위 관직을 차지하게 된다. 무사로서 궁중 귀족 사회에 진입했을 뿐 아니라, 자신의 일족과 측근들을 주요 관직에 배치하여 헤이케 정권이라 불릴 만한 정치 구도를 형성하기 시작했다. 기요모리의 정치력은 단순한 무력에 그치지 않았으며, 인세이 체제를 지지하는 대가로 고시라카와와의 협력 관계를 강화하면서, 무가의 권력 기반을 제도적으로 확대해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