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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6-03-27 17:43:37

쇄국


1. 개요2. 용어3. 역사
3.1. 동아시아
3.1.1. 조선의 통상수교 거부정책3.1.2. 중국의 해금령3.1.3. 일본의 쇄국 정책
3.1.3.1. 전근대 동아시아 국가들과의 차별성?
3.2. 오해3.3. 근현대
3.3.1. 알바니아 사회주의 인민공화국의 쇄국 정책3.3.2. 북한의 쇄국 정책3.3.3. 중국의 쇄국 정책3.3.4. 근현대 대한민국의 쇄국 정책3.3.5.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 유행과의 비교

1. 개요

쇄국()은 국경을 폐쇄하여 타국과의 통상 및 교역을 제한하는 일련의 정책 방향성을 말한다. 좀 더 현대적인 용어로는 고립주의가 이 쇄국을 포함한다.

2. 용어

이 용어는 본래 일본에서 만든 조어로, 나가사키 출신의 난학자 시즈키 다다오(志筑忠雄)가 유럽의 서적을 번역하며 1801년에 만든 단어다.

한국사에서는 주로 조선 시대 흥선대원군척화비로 대표되는 통상 수교 거부 정책을 일컫는 데 쓰인다. 쇄국이란 용어는 당대에 사용하지 않은 말이고, 일본에서 만들어진 조어인 데다가 일본이 흥선대원군의 정책을 비판하는 의도로 사용한 것을 한국인들이 그대로 받아들인 것이기에 한국사 교과서에서는 좀 더 중립적이고 의미를 명확하게 나타내는 통상 수교 거부 정책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3. 역사

3.1. 동아시아

쇄국은 근세 동아시아만의 특이한 현상이다. 한 · 중 양국은 공식적인 무역은 조공 무역으로 한정짓고 민간 무역은 국가에서 통제했으며 서양 상인들이 요청하는 상호 대등한 관계 속에서 이뤄지는 무역은 거부했다. 반대로 일본은 민간 무역을 통제하던 조정이 쇠퇴하고, 지방분권화가 가속화됨에 따라 민간 무역이 활성화되었으며 무로마치 막부 같은 경우에도 중국과의 감합 무역 추진에 적극적인 태도를 보였다. 이후, 에도 막부가 무역 이익을 독점하고 대외 무역 통제를 강화하면서 일본의 무역 정책 기조도 변화했다.

현대 사학계에서는 중국의 해금령은 정치 · 군사적인 목적으로 인식하고 있다. 일반적인 설명은 왜구 등 해적에 대항하여 수립한 방어책의 결과라는 것. 명대의 위정자들은 해금과 동시에 조공 무역을 활용하는 양면책을 써서 외국 정부들이 조공 체제를 준수하고 비협조적인 통치자들을 압박하도록 유도하는 강력한 도구로 활용했다. 명 왕조는 무로마치 막부와 감합 무역 문제를 놓고 교섭하며 왜구 문제를 해결할 것을 강하게 요구했다.

3.1.1. 조선의 통상수교 거부정책

한국사에서 쇄국 정책이라고 하면 흥선대원군의 통상 수교 거부 정책을 의미하는 경우가 많다. 흔히 흥선대원군을 쇄국 정책의 대명사로 알지만 흥선대원군 집권기 이전인 철종, 헌종, 순조, 정조 재위기에도 서양의 함선은 간헐적으로 접근해왔다.

쿠로시오 해류가 지나는 일본과 동남아시아 연안만 따라가도 닿는 중국과 달리 한반도는 쿠로시오 해류의 영향을 적게 받는 지리적 문제 때문에 서양인들은 우연으로라도 한반도에 올 기회가 적었고, 한반도의 물산이 특출나지 않아 관심도 떨어졌다. 그래서 18세기 말 이전에 조선에 다다른 이양선들은 보통 본국이나 중국, 일본으로 가다가 풍랑에 밀려 조선에 우연히 온 경우가 많아 조선과의 무역보다는 귀환에 더 관심이 많았지만, 18세기 말부터 사정이 달라지기 시작한다.

조선 조정은 지속적으로 찾아와 접촉하는 외국 상인들의 교역 요구를 거부하고 물자만 주고 돌려보내는 한편, 국가 안보를 위해 서양인들의 침범을 막기 위한 조치를 취하기도 했다.

정조 21년(1797년) 영국 해군 군함 프로비던스 호가 부산 용당포(지금의 부산 남구 용당동)에 도착했다. 네덜란드 상선 드 혼드 호가 우연히 조선에 정박했을 때는 지방 변장들이 36명의 군졸들을 데리고 무력 진압을 시도한 적도 있었고, 이양선의 출현에 무력 진압을 시도하다가 이양선 선원들의 반격을 보고 겁을 먹는 지휘관들이 놀라 달아나는 바람에 진압에 실패한 일도 있다.

냉정하게 말해 조선은 재부흥기로 꼽히는 영 · 정조 시대부터 서양과의 교류를 거부했기 때문에 열강들의 손아귀 아래 놓일 미래는 피할 수 없었다는 주장도 있으나, 개항을 선택한 아프리카 · 아시아 · 인도의 여러 나라들도 식민화를 피할 수 없었으며 일본도 개항 이후, 서양인들의 금 · 은 대량 환전 거래와 개항지의 물가 폭등으로 심각한 고통을 받은 것을 생각하면 개항을 빨리 한다고 식민화를 피했을 거라고 주장하는 것은 결과론이며 식민지가 된 여러 나라들의 사정을 고려하지 않은 주장이다.

정조 이후에도 조선은 종래의 방식을 반복하고 더욱 방어적인 태도를 취했다. 중국에서 아편 전쟁과 태평천국 운동이 일어나 국제 정세가 혼란스러워졌으며 일본도 서구 열강의 침탈을 당하고 있었다. 게다가 황사영 백서 사건을 비롯해 국가 내부에 존재하는 천주교 신자들의 존재는 서양에 대한 인식을 더욱 나빠지게 만들었다. 조정 입장에서 서양은 먼 바다에서 온 기이한 사람들이 아니라 국가 전복과 사회 붕괴를 꾀하는 무부무군한 사이비 이단 세력의 후원자이자, 이웃한 중국과 일본을 공격한 침략자였다.

그리고, 제너럴 셔먼호 사건, 병인양요와 신미양요가 일어난 결과, 흥선대원군은 1871년 전국에 척화비를 세워서 조선의 통상 수교 거부 정책을 가속화했으나, 조정과 국왕의 인식 변화, 흥선 대원군의 실각으로 조정의 중론은 개항으로 선회했다. 이후, 원치 않는 방식이었으나 조선은 강화도 조약을 체결해 통상 수교 거부 정책을 끝내고 근대화의 길로 나아간다.

그러나 1880년대의 세계는 이미 크게 변해 있었다. 이웃나라 일본은 보신 전쟁 시기에 국제 정세가 일본에게 신경을 쓰지 않았던 엄청난 행운이 따라주면서 영국식 제도와 독일식 법전을 갖춘 근대 국가로 성장했으며 이미 이와테현 가마이시시를 시작으로 제철소가 가동에 들어가 중화학 공업이 이루어지는 나라였다.[1]

중국의 청나라는 광활한 영토와 생산력을 가졌으며 아편전쟁 이후 근대화를 추진해 빠른 속도로 외국의 문물을 받아들였다. 1881년에 허베이성 탕산시에 중국 최초의 철도를 깔았으며 주요 대도시(베이징, 난징, 시안, 청두 등)에 전신선을 가설하고 있었다. 청일 전쟁의 패배로 인하여 중국의 근대화 성과가 자주 폄하당하고 있으나, 실질적으로 중국은 근대적인 산업 · 교육 인프라 등을 일본보다 더 빨리, 더 대규모로 건설하고 있었다.

3.1.2. 중국의 해금령



본래 중국은 당 · 송 · 원 3대 왕조 동안 대외 무역이 활발했으나, 원말명초의 혼란으로 인해 큰 혼란을 빚었고 왜구의 해안가 침탈이 극심했다. 그래서 홍무제 치세에 해금령을 내리는 한편, 조공 무역 체제를 부활시켜 해외 각국의 사절단을 초빙했다. 이후, 정화의 원정으로 새로운 항로를 개척하고 대외 거점과 동남아 지역에 대한 영향력을 확보한 영락제는 자신의 권위 신장을 위해 해외 사절단에게 후한 대우와 특혜를 주고 조공 무역 체제를 확대했다.

허나, 영락제 사후부터 재정적 부담 때문에 사절단과 동남아 상인들에 대한 특권 및 조공 횟수를 제한한 탓에 무역량이 줄어들어 이익이 감소하고 해외 거점들도 점차 상실해 조공 무역 체제는 크게 쇠퇴한 반면, 무역 통제책인 해금령은 그대로 남아 문제가 되었다. 그래서 명 왕조의 대외 무역은 불법 · 탈법적인 민간 무역을 중심으로 이뤄지다가 융경제 시기의 해금령 완화 조치(융경 개양)로 통제가 상당 부분 풀린 덕에 크게 성장하기 시작했다.

명 왕조의 해금령은 청나라 때도 유지되었다. 청 왕조는 대만의 정씨 세력을 고사시키기 위해 순치 연간에 여러 차례 해금령을 실시했으나, 별 효용이 없었고 강희 연간에 재차 강력한 해금령을 실시하고 해군력을 육성해 대만 정씨 왕국을 무너뜨리는데 성공한다. 대만을 복속한 강희제는 민절 · 양광 · 양강 등 해안 지역의 재건을 추진하고 4개 항구를 개항했다. 그러다 예수회와의 관계 악화, 여러 차례의 교안, 해적 문제 등으로 인해 건륭제의 치세에 무역항을 광저우 1곳으로 제한했다. [2]

이를 현대 중국에선 공행 무역 체제라고 부른다. 하지만 이러한 청나라의 교역 방침은 영국을 비롯한 서구 열강들의 장기적인 불만을 야기했고, 이 때문에 일어난 전쟁이 바로 역사상 가장 더러운 전쟁으로 불리는 아편전쟁이다.

3.1.3. 일본의 쇄국 정책

전국시대의 일본은 중앙 정부가 유명무실하고 규제가 없다 보니 지방 세력들이 개별적으로 포르투갈, 영국, 네덜란드 등의 유럽 국가들과 무역을 하고 일본인이 동남아시아로 진출해서 니혼마치(日本町)라 불리는 일본인 집단 거주지가 동남아시아 곳곳에 생겼을 정도로 개방적인 분위기였다. 특히 야마다 나가마사(山田長政)는 스페인의 침공으로부터 태국을 방어한 공로로 시암 공주와 결혼하고 송탐(ทรงธรรม) 국왕으로부터 태국에 자신의 영지를 받아 일본인 거주지의 영주로서 활동하기도 했다. 덴쇼 소년사절단은 유럽인들에게 일본의 존재가 널리 알려지게 했는데 이들은 펠리페 2세와 교황 그레고리오 13세를 만나고 왔다.

하지만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거쳐 도쿠가와 이에야스에도 막부가 수립되면서 일본은 통일되었고 일본 전국을 통제할 능력이 있는 막부는 외세와의 교류를 통제하려 했다. 전국 시대처럼 무역 활동을 방관하면 대외 무역으로 창출하는 막대한 이익을 지방 세력들이 뜯어 먹을 수 있고, 무역으로 부를 쌓고 신무기를 손에 넣은 지방 영주들이 막부에 대항할지도 모른다고 여겼던 것이다.

이는 괜한 우려가 아니었다. 다테 마사무네 같은 이들은 서양식 선박을 건조하고 사절단을 유럽에 보내 무역 협상을 추진했다. 하세쿠라 츠네나가가 그 사절단의 대표이며 그는 유럽에서 교황을 만나고 오기도 했다. 오늘날에야 이를 두고 당대 일본의 국제성이라며 홍보하지만, 에도 막부의 시각에서 보면 마사무네의 행동은 막부를 무시하고 제멋대로 해외 국가와 외교 관계를 수립하려 한 짓이었다. 막부는 센다이 번이 사절단 파견을 심각한 문제로 인식했으며 쇄국 조치를 내려 센다이의 무역 허가증을 무용지물로 만들었다.

에도 막부는 유럽인들의 활동을 나가사키로 한정짓고 일본인들의 도해를 금지한 뒤, 일본 국내에 남아 있는 가톨릭 공동체들은 분쇄해 버렸다. 본격적인 쇄국은 도쿠가와 히데타다가 시작했으며 스페인, 포르투갈, 영국 등과의 교류가 끊겼다. 에도 막부 존속 기간 내내 일본과 교류한 네덜란드마저도 쇄국 정책 초기에는 '기독교인(기리시탄)'이라는 이유로 초기에는 관계가 험악했으나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가 가톨릭과 개신교의 차이를 설명하고 네덜란드인은 데지마를 이탈하지 않을 것, 기독교 선교 역시 금지할 것, 막부의 군사 정책에 협조할 것 등 번거로운 조건들을 전부 통과한 뒤에 일본과의 제한적인 무역을 허가받을 수 있었다.

그래서 나가사키의 네덜란드용 창구 데지마조선 통신사, 속국화한 류큐 왕국[3], 아이누용 창구인 홋카이도 남부의 마츠마에번 같은 예외적인 몇몇 사례를 뺀 모든 해외 교역을 중단했지만, 미국매튜 페리쿠로후네 사건을 일으켜 강제로 개항했다. 이는 조선보다 20여년 가량 이른 시기였다. 그 뒤, 그레이트 게임, 남북전쟁, 프랑스-프로이센 전쟁으로 서양 열강이 일본 내전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지 못하는 사이, 보신 전쟁에서 승리한 도막파가 메이지 유신을 성공시켰고 청일전쟁러일전쟁에서 승전한 뒤에는 아시아의 신흥 열강으로 약진했다.
3.1.3.1. 전근대 동아시아 국가들과의 차별성?
결론부터 말하자면, 일본과 전근대 동아시아 국가들과의 차별성 따윈 없다. 차별성을 적용할 수 있는 나라는 서양과의 직접 무역을 거부하던 조선 밖에 없으며 나머지 아시아 국가들은 일본과 유사하게 무역을 통제하거나, 대외 무역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일본은 중국과 마찬가지로 중앙 정부가 대외 무역을 통제해 대외 무역의 이익을 독점하는 정책을 구사했고, 이러한 방식으로도 천문학적인 양의 은을 수출했다. 전근대 시기 일본에서 수출한 은의 총량은 평균적으로 아시아에서 유통하던 은의 30%에 달한다.

허나, 이 정도 규모도 전세계 은의 30% 이상을 먹어 치우던 중국의 무역 규모에는 비교할 바가 되지 못했다. 청나라 수도 베이징에서는 예수회 선교사들을 비롯해 다수의 유럽인들이 활동했고[4] 광저우의 무역은 데지마와는 비교를 불허할 정도로 활발했다. [5]

따라서 최근에는 일본에서도 쇄국이란 말을 지양하고 있으며 '막부의 대외 정책'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려고 했으나 기존에 있던 쇄국이란 단어가 일본 사회에 뿌리 깊게 퍼진 탓에 이 둘을 절충한 '쇄국 등 막부의 대외 정책'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기로 했다고 한다.

당시 나가사키를 통해서는 청나라, 네덜란드와 교역하였으며 대마도로는 조선, 사쓰마로는 류큐 왕국[6], 마츠마에로는 에조와 무역을 했다. 유럽 국가들과의 교역이 네덜란드를 제외하고 끊겼을 뿐이지 동북아시아 국가들과의 교역은 유지되었으며 동남아시아 국가들과도 규모는 축소되었을지언정 무역 자체는 계속되었다. 당장 이웃한 동아시아의 청나라, 조선과의 교류는 오히려 도쿠가와 정권이 나서서 임진왜란의 책임을 청산하고 당당하게 나가사키 부교, 조선 통신사라는 공식 제도를 통해 정권 차원에서 공식 교류하면서 오히려 이전보다 더 안정적이고 늘었다는 시각도 있다.

에도 시대는 난학(蘭学)이라고 불리는 네덜란드 학문이 유행하였으며 이에 따라 1776년 네덜란드 상인에 의해 소개된 에레키테르(エレキテル)를 이용한 전기 실험에서부터 수소, 산소 등 유럽의 각종 화학적 지식을 수입했다. 다만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여전히 사회적 주류 학문은 유학이었다. 난학에 대해서는 사회적 시선이 곱지 않아 심심찮게 모진 탄압이 가해진 바 있다.

와타나베 히로시가 대표적으로 에도 시기 이베리아발 서양과의 해상무역을 통한 접촉은 전국시대, 아즈치-모모야마 시대에 비해 줄었지만 반대로 조선, 청과의 교류는 더 깊어졌기 때문에 에도 시대의 '쇄국'은 성리학적 농경사회를 공식적인 관의 이데올로기로 밀어주며 현실보다 더 정적인 사회상을 연출하려고 했던 막부와 탈아입구적인 결과론적 관점에서 포르투갈, 네덜란드 같은 서양세력과의 교류에 더 주목하는 후대인들의 시각이 만들어낸 환상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다.

3.2. 오해

일본, 조선이 공통적으로 취한 외국과의 통상하지 않는 정책은 본래 명나라의 영향이며, 명나라의 건국자 주원장이 만든 해금령이 계속 이어지고 발전해 동아시아 지역이 외국과 수교를 계속 금지하는 고립주의적 외교 정책을 고집하게 되었다고 하지만, 이는 오랜 낭설이다. 홍무제의 해금령은 그 아들인 영락제가 계승하지만, 영락제는 정화의 원정으로 개척한 대외적인 영향력과 거점을 적극적으로 활용해 조공 무역을 대폭 확장했다. 조정에서 해외 사절단과 상인들에게 지나치게 특권을 많이 준다고 황제에게 진언할 정도로 영락제는 동남아와 남아시아 지역 국가들과의 교류와 명의 영향력을 넓히는데 몰두했다.

게다가 쇄국을 처음 시행했다는 홍무제도 동남아 각국에 사신단을 파견하고, 사절단을 후대하는 조공 무역 체제를 구축했다. 주원장은 중국의 우위를 인정하고 책봉을 요청하는 국가들과 외교 관계를 수립하고 사절단을 중심으로 하는 무역을 허가했다. 사절단을 따라 온 외국 상인들은 조공품을 바치고, 그 외 물품은 중국의 시장이나 무역이 허가된 호시(互市)에서 처분하거나 중국의 재화와 교환했다.

이는 기존의 통일 왕조가 취한 조공 무역 정책과 별 다를 게 없다. 홍무제의 잘못은 시박제거사를 폐지하고 조선업과 해운업의 성장을 막아 민간 무역의 근간을 박살낸 것이지, 외국과의 수교를 금지하는 고립주의적 외교 정책을 실시해서가 아니다. 홍무제가 고립주의 노선을 취했다면, '해외 각국들이 중국에 왕래하며 사신이 끊이지 않았다.'는 명 태조 실록의 기록은 중화인민공화국 정부가 남방 공정을 추진하면서 첨삭한 가필이란 말인가? 이러한 주장은 외국과의 교류와 수교를 구분치 못하고 쇄국이란 말 한 마디에 꽂혀 제대로 된 조사도 하지 않고 수백 년 내내 무역이 없었을 것이란 망상을 표현한 것에 불과하다.

외국과의 교역을 부정적으로 인식하고 상업을 천시하는 유교 사상이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자급자족적 농촌 사회를 만들고 싶어했던 홍무제가 해금령을 추진했다는 설도 있으나, 홍무제가 해금령을 추진한 건 명 태조 실록에도 나오듯이 왜구를 위시한 해상의 무법자들에 맞서기 위한 게 가장 큰 요인이었다.

해금령을 재반포한 영락제의 후계자들도 영락제가 물려준 유산을 지키기 위해 동남아와의 무역을 진흥시킬 방안을 모색하거나 해외 거점 및 동남아 세력에 대한 통제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다.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조공 무역 자체의 한계점과 이익 감소, 군사비 증가 등의 요인으로 인해 명 왕조의 대외 영향력과 해외 거점들은 차차 소멸하지만, 단순히 황제의 칙령이 몇 번 반포된 것만으로 모든 대외 무역이 금지되었다고 인식하는 것은 지나치게 현대인의 시각에서 과거를 재단한 것이며 조공 무역과 민간 무역을 구분하지 못한 무지의 소치다.

게다가 세계 초강대국인 명 왕조의 군주가 내린 해금령은 민절 지역에서 그렇게까지 큰 영향력을 미치지 못했다. 생존과 부의 창출을 위해 해안 지역의 주민과 상인들은 불법적으로 해외 무역에 종사했고, 현지 지방관들은 이를 묵인하거나 단속했다. 융경 연간까지 이 불법적인 민간 무역에 대한 단속을 요구하는 상소들이 지속적으로 상주되었다는 점 또한 해금령이 중국의 '고립'을 이뤄내지 못했다는 증거이다.

쇄국 정책이 '자급자족적인 농업 사회에서는 교역을 해봤자 사치품이나 받고 식량을 내줘야해서 손해만 본다.'는 경제적 합리적인 이유가 있다고 해석하는 경우도 있으나, 실제로는 전혀 그렇지 않았고, 쇄국 정책 자체를 잘못 이해한 것이다. 동아시아 각국의 무역은 사치품과 공예품, 기호품, 은과 동전을 거래하는 방식이 주를 이루었고, 중국과 유럽, 동남아 각국과의 무역도 중국의 도자기(공예품), 비단(사치품), 차(기호품)을 은(귀금속), 기호품(향료), 각종 사치품으로 교환하는 방식이 많았다.

당장 기원전 3천년 전의 메소포타미아 문명 시대에도 인더스 문명, 이집트 문명과 활발히 교역했다는 증거가 무수히 많다. 인간이 생존하기 위한 필수품인 소금만 해도 내륙에서는 극히 구하기 힘들어서 농촌 사회에서도 교역을 안 할래야 안 할 수가 없다. 되려 전근대에도 자급자족적인 농업 사회는 실현하는 것이 더 어렵다.

쇄국 정책이 경제적으로 막심한 손해를 만들었다는 주장도 있다. 한반도나 일본 수준의 나라는 나라를 운영하기 위해 필수적인 온갖 자원이 부족해서 가난에 시달렸다는 것. 당장 조선의 경우 구리 부족으로 전기에는 화폐 발행 자체에 실패했고, 상평통보가 널리 사용된 후기에도 구리가 부족해서 돈을 못 찍는다고 끝없이 문제가 제기되었다.

그러나, 한반도나 일본은 국가 운영에 필요한 온갖 자원을 중국과의 무역을 통해 확보했으며 조선 전기 화폐 발행 실패 문제의 원인을 고작 구리 부족 문제만으로 치부하는 것은 지나치게 게으른 인식이다. 조선 전기의 화폐 발행 실패는 정부의 통화 정책 오류, 시장 경제의 발달 미진, 금속 화폐에 대한 신용 부족, 오승포와 쌀 같은 실물 화폐의 높은 신용 등 온갖 다양한 요인들이 섞여 있다. 상평통보가 널리 사용된 후기의 구리 부족 문제는 조선 내부의 통화량 증가와 주요 구리 수입처인 일본의 구리값 인상이 원인이었지, 무슨 쇄국 정책 때문이 아니었다.

중국도 명나라 때는 은자가 널리 돈으로 쓰였으나 정작 중국에는 큰 은광이 없어서 극심한 은 부족에 계속해서 시달렸다는 주장도 있다. 당장 융경제가 명나라의 수명을 늘렸다는 평가를 듣는 것도 해금을 완화해서 해외의 막대한 은이 중국으로 유입되어서 중국의 은 부족이 해소되어서 경제가 원활해지고 세수가 증가하고 재정이 강화되어 국력이 전반적으로 팽창했기 때문이다.

허나, 이는 선후 관계와 당대 중국에서 은이 수행한 역할을 잘못 짚은 오류이다. 상술했다시피 해금령이 유지되긴 했지만, 민간에서는 정부의 눈을 피해 대외 무역을 진행했고, 그 덕에 왕조 중기부터 스페인산 은이 계속 유입되고 은화 유통도 증가했다. 또한 명 왕조는 초기부터 민간의 금 · 은 거래를 금지하고 송 · 원 왕조의 유산인 지폐 제도를 계속 유지하려고 발버둥치는 중이었다. 지폐의 가치 하락과 신용 부족으로 인해 정부의 금령에도 불구하고 민간에서는 금은을 고가의 화폐로 사용하고 있었지만, 은 부족에 시달리는 상황은 아니었다.

명 왕조는 은이 부족해서 고통받던 게 아니라, 해외에서 은이 유입되면서 은화 사용량이 증가했고 해금령을 완화한 융경개양은 은화 유입을 더욱 촉진시킨 조치였다.

일본의 경우, 서아프리카 부족 국가들만큼은 아니어도 유럽의 주요 노예 공급처 중 하나였다. 규슈의 다이묘, 특히 가톨릭 신도였던 다이묘들은 상대 번국과 전쟁을 벌여 얻은 포로들을 서양 상인들에게 팔아치우고 그 대가로 조총화약을 사 왔고 이는 다시 일본 국내의 전란을 격화시키는 악순환으로 이어졌다. 때문에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포르투갈 상인들과 지방 다이묘들에 의해 일본인 노예무역이 이루어지는 것을 알게 되자 말 그대로 격노하여 유럽인 추방령을 선포했다.

일국의 위정자로써 이는 당연한 조치였으며 오늘날까지 그의 대표적인 공적 중 하나로 여겨진다는 것인데, 헛소리다. 히데요시는 노부나가의 정책을 계승해 선교사와 서양 상인들에게 호의와 관용을 베풀었다. 조선 침공 계획에 포르투갈 상인과 예수회의 협조를 얻어내어 대포와 서양식 선박, 화약과 조총을 확보하는 방안까지 추진한 게 히데요시였다.

그런데, 제공받은 선박과 화약 무기가 기대에 못 미치는 데다 규슈 지역의 일본인 노예 무역 문제, 현지 불교와 기독교 간의 갈등 문제, 나가사키의 서양인 이주 문제 등 여러 가지 문제가 겹치자, 히데요시는 바테렌(선교사) 추방령을 내렸다. 하지만, 히데요시의 추방 조치는 유럽인을 모조리 추방하는 것도 아니고 선교사들을 추방하는 것이었으며 서양 상인들의 상행위는 아무 문제 없이 허용했다. 1590년에 예수회 측에서 히데요시에게 진귀한 선물을 상납하고 조선 침공에 적극적으로 협력하겠다는 의사를 밝혀 히데요시의 기분을 누그러뜨리려 노력한 일도 있고, 추방령의 집행도 지역과 시기에 따라 오락가락하는 경향을 보였기에 바테렌 추방령은 일본과 유럽 각국 간의 무역을 약화시키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3.3. 근현대

3.3.1. 알바니아 사회주의 인민공화국의 쇄국 정책

알바니아는 특이하게도 유럽 국가 중에서 근현대까지 쇄국을 고집하였다. 이는 알바니아 사회주의 인민공화국 시기에 무려 41년이나 장기집권한 독재자 엔베르 호자 때문인데 호자 시기의 알바니아는 북한보다도 더한 폐쇄적인 국가였다. 실제로 호자 시기 알바니아에서는 공무원들을 제외한 모든 국민들의 해외 출국이 금지되었으며 해외에 출국한 공무원이 알바니아에 돌아오지 않으면 운이 좋아야 징역 10년, 최대 사형을 선고받았고 극히 일부의 외국인들만 알바니아에 입국하도록 허락한 후 외국인들도 에스코트 없이 자유롭게 돌아다니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호자가 얼마나 폐쇄적으로 나라를 운영했는지 알바니아에는 이렇다 할 항공사도 없었던 데다[7] 알바니아가 '유럽에서 가장 가난한 국가'로 꼽히던 1980년대에도 알바니아인의 대다수는 알바니아를 '유럽에서 가장 번창한 국가'로 생각했을 정도였다고 한다.

사실 알바니아는 원래 같은 제3세계 공산권 국가였던 유고슬라비아와 친하게 지냈다가 티토와 스탈린이 결별하자 엔베르 호자가 티토를 수정주의자라고 비난하고 이후 소련에서 니키타 흐루쇼프가 정권을 잡고 스탈린 격하 운동을 펼치고 1956년 헝가리 혁명이 일어나면서 헝가리를 침략하자 바르샤바 조약 기구를 탈퇴하는 바람에 동유럽 공산 국가들과 사이가 멀어지고 중국과 친밀한 관계를 맺었지만 덩샤오핑이 개혁개방 정책을 펼치자 중국과 사실상 연을 끊고[8] 아예 포기했는지 알바니아는 세계 유일의 정통 원조 사회주의 국가라고 선언하였다. 심지어 같은 쇄국 정책을 펼치던 북한마저 수정주의자라고 비난해 자본주의 국가는 물론이고 공산권 국가들 사이에서도 외톨이가 되었다.

덕분에 냉전 기간 동안 알바니아는 유럽에서 가장 가난한 국가였고 쇄국 정책의 후유증으로 알바니아인들은 자본주의 사회의 경제 작동 메커니즘을 알지 못한 채로 1990년대에 체제 전환을 겪어 지독한 빈곤에 시달리고 1997년 알바니아 금융사기 사건이 일어나는 계기 중 하나가 되었다는 말도 있다. 물론 현재는 선거 등에서 부정부패 의혹이 끊이질 않지만 과거의 쇄국정책을 포기하고 개방하였으며 꾸준히 경제가 성장하고 금융사기 사건을 비롯한 여러 사건으로 인해 한동안 불안정하던 치안도 개선되었다. 그러나 아직도 우크라이나, 코소보, 몰도바에 버금가는 유럽에서 빈곤한 국가로 손꼽힌다.

다만 개방 이후 오히려 더 추락하고 제1세계제2세계에 잠식당한 경제와 카눈과 같은 각종 악습이 부활하는 등의 이유로 이를 고평가하는 사람도 많아졌다.

3.3.2. 북한의 쇄국 정책

2025년 현재 북한에리트레아와 함께 지구상에서 가장 고립되어 있고 베일에 싸여있는 나라로 꼽힌다. 김일성 시대부터 주체를 주창하며 중국과 소련 사이에 줄다리기를 하느라 공산권 국가들과의 관계가 원래 좋지 못했고 80년대 후반 공산권 붕괴 이후 구 동구권 국가들을 배신자로 비난하면서 구 동구권, 서방권과 사이가 사실상 모두 단절되었다.[9] 1983년 김정일이 방중했을 때 덩샤오핑이 개혁개방을 권유하였으나 오히려 크게 불쾌하게 여겼는데 "중국엔 사회주의공산주의도 없고, 있는 건 수정주의뿐"이라고 비난하였을 정도였다. 북한 정권은 개방이라는 말을 몹시 꺼리며 당 간부들도 이런 말을 함부로 말하지 못한다.

김일성 시기에는 지금 북한도 저리가라 할 수준으로 폐쇄적이었는데 어느 정도였냐면 1980년대 말까지도 북한 주민들은 북한이 세계에서 제일 잘 사는 나라인 줄 알고 있었을 정도였다고 한다.

이후에도 북한은 고난의 행군으로부터의 회복, 핵 무력 확보를 최우선 과제로 내걸고 수교국만 늘었지만 진지한 관계개선은 이뤄지지 못한 채 10여년을 보냈다. 2012년 도쿄신문에 의하면 김정은은 간부들 앞에서 "개방이라는 말은 사용하지 말라"고까지 당부하였다. 기사

북한이 쇄국을 그만두게/그만두도록 하는 것은 남북통일 이전에 먼저 선행되어야 할 제1차적 목표이기도 하다. 사실 통일이 돼야 가능하다고 알려진 북부 지방 방문 등 많은 것들이 북한이 쇄국만 그만두면 그 날로 제한적으로라도 가능하게 된다.[10] 당장은 휴전선을 자유롭게 넘나들기는 시기상조라고 해도[11] 예를 들어 쇄국으로 북한에서 막혀 있던 인터넷이 풀리면 한국에서 만든 한국어 사이트 이용이 가능하기 때문에 양측 국민간에 자유로운 소통이 가능해질 것이다. 일단 정권 차원에서도 북한이 정상적으로 대화가 통하는 상태가 돼야 좀 더 구체적이고 추가적인 논의도 가능하기 때문이다.

물론 백두혈통을 필두로 한 수뇌부는 외국 문화와 제품을 잘만 향유하고 있다.#

3.3.3. 중국의 쇄국 정책

중국, 인터넷 쇄국주의 노골화..온라인 규제 만리장성 쌓는 中…韓인터넷 기업 적신호

중국유튜브구글 관련 서비스,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X(구 트위터) 등의 자국 접촉을 금지해 놓았다. 해외기업을 배척하고 자국 IT기업을 키울 목적이라고 한다.

그러나 중국의 이같은 조치는 인터넷 검열을 통한 정치 사상 단속으로, 시진핑의 3선 집권 연장을 통한 독재를 강화할 목적에서 시행한 것이다.

3.3.4. 근현대 대한민국의 쇄국 정책

일본 문화 유입을 차단할 목적으로 한국에서 방영한 일본 애니메이션들은 왜색이 짙은 부분들을 검열삭제하는 조치를 취했으며 일부 가요들도 왜색이라는 이유로 금지시켰다. # 이 같은 문화 검열은 일본 문화 수입 개방이 된 2000년대에도 이어졌다.

1970년대 유신독재 체제가 출범했을 때는 미국 문화도 배척되었는지 영어 단어들이 너무 많이 적힌 T셔츠를 입은 청년이 경찰에 체포되는 일까지 있었으며, 계층간의 위화감을 핑계로 수입품 거래를 막기도 하고 컬러티비 방송을 송출하지 않는 일도 있었다.

다만 이러한 정책을 폈던 박정희 대통령은 일본 소설를 보고, 가요를 부르고 시바스 리갈을 마시는 등 이중적인 모습을 보여서 비판을 받기도 했다.#

1989년 노태우 정부 출범 이후 외국 여행 자유화 정책이 실행되기 전까지는 공무원이나 기업인 같은 특수 직업 종사자가 아닌 일반 국민들은 외국 여행도 마음대로 갈 수 없었다. 그래서 199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외국에 나간 한국인에게 외국인이 종종 묻는 말이 "한국이 어디에 있는 나라냐?"였다. 워낙 오랫동안 국민들이 국외로 나가지 못하고 폐쇄적으로 살았고 국민들이 국외로 자유롭게 드나들지 못해서 외국인들과의 접촉이 매우 뜸했으니, 국제 사회에서 한국이라는 나라가 가진 인지도가 매우 낮았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2010년대 초반까지 서양 일반인들은 한국이 동남아 국가들과 비슷한 수준인 나라인 줄 아는 경우가 많았을 정도로 한국은 국력 대비 인지도가 심각하게 떨어지는 나라였다.

다만 이 해외여행 통제는 한국뿐만 아니라 20세기 당시에는 대부분의 나라가 시행하고 있었음을 감안할 필요는 있다. 당장 일본도 1970년대 말에 들어서야 자유로운 해외여행이 가능했고, 서유럽 국가들도 1950년대까지는 대다수의 국민들에게 해외여행이 통제되었다. 이는 당대 경제성장기에 국민들이 외화를 가지고 나가 국내 외환보유고가 비는 문제를 방지하고자 하는 목적이 가장 컸으며, 한국, 일본 등지에서는 외국 문화의 유입으로 인한 사회혼란의 방지 등의 목적도 있었다. 게다가 국민들의 경제 수준이 낮았던 당시에는 해외여행이 자유로워봤자 극소수 부유층만 해외여행이 가능했기에, 큰 문제가 되지도 않았다.

3.3.5.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 유행과의 비교

2020년대 초반에는 중국 우한시에서 발생해 전 세계로 확산된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로 인해 각국이 출입국 및 외국 여행 제한에 들아가면서 사실상 쇄국 체제에 들어갔는데 자세한 건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국가별 대응 문서 참조. 다만 각국도 문을 닫고 싶어 닫은 건 아니라 관광 등 비필수적 인적 교류가 차단되었을 뿐 외교나 무역 분야의 교류는 유지되었기 때문에 진정한 의미의 쇄국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실제로 인터넷에선 화상으로 국경을 넘어 활발한 교류가 이루어졌으며 코로나 19의 대유행이 끝난 2023년에 와서는 단계적 일상회복이 이루어져 인적 교류도 재개되면서 코로나 19 이전으로 되돌아가는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1] 일본보다 수십년은 근대화가 빨랐던 베트남과 이집트의 운명을 생각하면 일본도 내전으로 나라가 절단났어도 하등 이상하지 않았을 상황이었다. 그러나 보신 전쟁이 일어나던 시기에 그레이트 게임프로이센-프랑스 전쟁으로 대표되는 유럽 열강들끼리의 경쟁, 서부개척시대의 개막과 남북전쟁으로 대표되는 미국의 정세는 일본에게 군사적인 영향력을 끼치기엔 무리일 수밖에 없었다. 결국 보신 전쟁을 외세의 개입이 약해진 시기에 내전의 규모에서 끝내고 근대화된 문명을 형성하자 열강들은 '미개한 동양인이 스스로 우리와 격을 맞췄다'는 이유로 일본을 국제 사회의 일원으로 맞아줬다.[2] 예외로 포르투갈령 마카오도 있었지만 어차피 광저우 근처였다.[3] 사쓰마 번이 류큐 왕국을 속국화한 뒤 류큐가 중국에 조공하고 하사품을 받는 형식으로 일본은 간접적으로 중국과 교역했다.[4] 예수회 선교사들은 강희제에서 건륭제로 이어지는 시기 동안 청나라 조정 곳곳에서 관직을 맡으면서 유럽 지식을 전파했다. 육로 국경을 접한 러시아 제국과는 몽골 일대에서 교류했다. 베이징에는 우크라이나계 코사크의 후손인 알바진인 집단이 거주하고 신학교에서 러시아인 성직자들이 중국어를 번역하고 있었다.[5] 건륭제의 무역 축소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4개 항구에 유럽인들이 드나들었다. 광동 13행 한 곳으로 개항장이 축소된 후에도 네덜란드, 덴마크, 영국, 미국, 스웨덴스페인까지 6개 국가가 상관을 두고 상시 무역을 이어갔으며 인접한 마카오에서는 포르투갈인들이 머물렀다. 오스트리아 역시 잠시 무역선단을 보냈던 바 있다.[6] 이 시기의 류큐 왕국은 사실상 일본에 점령당한 상태여서 이것을 국제 무역으로 볼 수 있는가가 조금 애매하지만 류큐 왕국 명의로 중국에 조공 무역을 하면서 일본은 간접적으로 중국과 교역했다.[7] 그 북한의 고려항공(당시에는 조선민항)도 김일성 시기에는 공산권 국가는 물론이고 일본, 말레이시아, 태국, 쿠웨이트, 심지어 스위스까지 취항한 적이 있었던 것과 달리 알바니아의 유일한 항공사였던 Albtransport는 자체적인 항공기도 없이 알바니아 공군으로부터 임대받은 Il-14 3대만 가지고 국내선과 동구권 노선 극소수만 산발적으로 운항했을 정도였다.[8] 1976년 전에 1억 달러를 넘었던 교역량이 겨우 165달러로 떨어질 정도였다. 참고로 이는 2022년 환율로 환산해도 865달러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9] 북중관계는 좀 특이한데 일단 북한은 무역이 식량까지 구입할 정도로 중국에 지나치게 예속되어 있다. 반면 대한민국은 전 세계에 시장을 다각화해서 수출, 수입을 한다.[10] 비슷하게 이념 문제로 인한 분단국가중국대만, 키프로스북키프로스도 남북한처럼 서로 완전히 단절된 상태가 결코 아니며 허가를 받아서 상대편을 여행하거나 상호 국제결혼 등 교류가 가능하다. 과거의 분단국가였던 독일, 예멘, 베트남도 마찬가지였다.[11] 일단은 외국을 갈 때 여권비자가 필요하듯 통일부에서 발급하는 방문증명서를 받아야 갔다올 수 있는 허가제가 시행될 가능성이 높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