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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튜 페리(군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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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대 동인도함대사령관
매튜 캘브레이스 페리
Matthew Calbraith Perry[1]
파일:commodore-perry-portrait.jpg
출생 1794년 4월 10일
미국 로드아일랜드뉴포트
사망 1858년 3월 4일 (향년 63세)
미국 뉴욕주 뉴욕시
국적 파일:미국 국기(1851-1858).svg 미국
재임기간 제10대 동인도함대사령관
1852년 11월 20일 ~ 1854년 9월 6일
서명
파일:Signature of Matthew Calbraith Perry.p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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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무 미합중국 해군
최종 계급 미국 해군 준장
복무 기간 1809년 ~ 1858년
신체 192~195cm[2]
참전 미영전쟁
제2차 바르바리 전쟁
미국-멕시코 전쟁
소속 단체 프리메이슨[3]
종교 무종교
가족 아버지 크리스토퍼 레이몬드 페리[4]
어머니 사라 월레스 알렉산더
올리버 해저드 페리[5]
배우자 제인 슬라이델 페리
자녀 10명 }}}}}}}}}
1. 개요2. 생애3. 여담4. 창작물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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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파일:home_main_img01.jpg
페리 상륙 기념비[6]

미국의 함대 사령관. 흔히 '페리 제독'으로 알려진 인물이다. 쇄국을 하고 있던 일본에도 막부에 함대를 이끌고 내항하여 미일화친조약을 통해 일본을 개항하게끔 만든 사람이다. 한마디로 일본 근대사에 매우 큰 영향을 끼친 인물이다.[7]

2. 생애

로드아일랜드 주 뉴포트에서 미국 해군 사략선장 크리스토퍼 레이먼드 페리와 처 세라의 사이에서 3남으로 태어났다. 1809년에 자신도 해군에 들어가고, 1812년부터 미영전쟁에 두 명의 형과 함께 참가한다. 1833년에 브루클린 해군공창의 조선소장이 되고, 1837년에 미국 해군 최초의 증기선 풀턴 함을 건조한다.

동년 해군 대령으로 승진하고 1841년에는 브루클린 해군공창의 사령관이 되었다. 증기선을 주력으로 하는 해군의 강화책을 진행함과 동시에 사관교육의 임무를 맡은 그는 증기선 해군의 아버지라고 칭송받게 되었다.

1852년 3월에 동인도함대 사령관에 취임하여 일본을 개국하라는 지령을 부여 받았다. 동년 11월 13대 미국 대통령 밀러드 필모어의 친서를 휴대하고 버지니아 주 노퍽을 출항했다. 프리깃함 USS 미시시피 함을 기함으로 한 4척의 함대카나리아 제도·케이프타운·싱가포르·영국령 홍콩·상하이·류큐 왕국·오가사와라 제도를 경유하여 1853년 7월 8일, 우라가(浦賀)에 입항했다[8].

7월 14일에 막부 측이 지정한 구리하마에 호위를 거느리고 상륙하여 도다 우지요시·이도 히로미치에게 대통령의 친서를 전달했다. 여기에서는 구체적인 협의를 진행하지는 않은 채 개국의 요구를 한 것으로 보이며, 만을 며칠간 측량한 후 식료 등 함대의 사정도 있어서 막부에 다음 해까지 유예를 주어 류큐 왕국으로 돌아가고 영국령 홍콩에 기항했다. (쿠로후네 사건 참고.)

태평천국의 난이 일어나면서 미국에 극동사정이 전해지는 중이던 1854년 2월 13일에 기함 USS 서스케하나 함 등 7척의 군함을 이끌고 현재의 요코하마시 가나자와구 앞바다에 육박해 조약체결을 요구하여, 3월 31일에 가나가와에서 미일화친조약을 조인했다. 또 그 후, 나하에 기항하여, 7월 11일에는 류큐 왕국과도 미류수호조약을 체결했다.

귀국한 후는 함대 복무 시절의 경험을 담은 원정기 등을 썼다. 말년에는 가발을 착용했다. 1858년 3월 4일에 64세로 뉴욕에서 죽었다. 묘소는 로드아일랜드주의 아일랜드 묘지에 있다.

3. 여담

4. 창작물에서

일본 입장에서는 자국 역사에 매우 큰 영향을 끼친 인물이라 상기한 바와 같이 그의 상륙을 기념하는 축제를 열기도 하지만, 꽤나 위협적이고 고압적인 통상체결을 이끈 인물이라 마냥 좋게만 봐줄 수는 없는 인물이어서 그런지 일본의 대중매체에서는 부정적으로 묘사되는 경우도 꽤 있는 편이다. 막부 말기를 그려내는 창작물에서 필수 요소로 등장할 때가 많다.

[1] 내항 당시의 막부는 네덜란드어 통역을 사용하고 있었기 때문에, 당시의 문서에는 네덜란드어식 발음의 '페루리(ペルリ)'로 불렸으며 한자로는 피리(彼理)라 표기했다.[2] 매튜 페리를 실제로 본 칸노 하치로(菅野八郎)가 기록한 키다. 당대에는 말할 것도 없고 현대에 와서도 엄청난 장신이다.[3] 1819년에 가입했다.[4] 미국 해군의 장교로, 1780년 로드아일랜드주 워싱턴 카운티의 대법원장으로 임명되어 1791년까지 근무했다.[5] 이리 호 전투에서 활약한 미합중국 해군의 영웅이다. 올리버 해저드 페리급 호위함의 1번함 이름이 된 인물이다.[6] 가나가와현 요코스카시 구리하마에 페리 상륙을 기념해 건립되었다. 태평양 전쟁 당시 반미 감정이 커져서 철거됐지만, 이후 일본의 항복 후 다시 재건됐다. 기념비 철거에 참여한 사람들은 일본의 항복 후 미국 측으로부터 전범으로 몰릴까 싶어 두려움에 떨었다고 한다.[7] 일본 학교의 근대사 시간에 무조건 등장하는 인물이라고 보면 된다. 더 나아가, 간혹 중학교~고등학교 세계사를 배울 때 일본 하면 나오는 다이카 개신과 더불어 반드시 나온다. 둘 다 타 국가의 선진문물을 받아들여 국가 체제를 크게 바꾸었다는 공통점이 있기 때문. 대한민국 세계사/동아시아사에서도 중요하게 다룬다.[8] 파나마 운하수에즈 운하가 완성 전임을 기억하자. 파나마 운하와 수에즈 운하는 각각 1869년(파나마 운하), 1914년(수에즈 운하)에 완공되었다.[9] 다가시카시에 개인적으로 관심이 있던 스기타 본인이 TVA 1기 방영 당시 공식 트위터에 올라오는 관련 정보를 여러 번 리트윗했는데, 이걸 눈여겨 본 포니케니언(다가시카시 1기의 메인 스폰서)측에서 고맙다는 표시로 페리 제독 역을 제안했고 나중에 니코니코 동화에서 송출된 다가시카시 이벤트 방송에도 게스트로 나와 페리 제독 코스프레를 선보였다.# 참고로 스기타는 일본 성우들 중 가장 많은 158만명이란 트위터 팔로워를 지닌 인기인이라 이런 리트윗만 해줘도 엄청난 홍보 효과가 있었을 테니, 스폰서 측에서도 고마워하는 게 당연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