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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4-15 15:06:08

다이카 개신

아스카 시대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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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bd0029> 역사 <colcolor=#000,#fff>다이카 개신 | 다이호 율령
국가원수 천황
행정구역 나라현(아스카쿄 | 후지와라쿄) | 고키시치도
문화 사천왕사 | 아스카사 | 호류지(호류지 금당벽화)
종교 신토
인물 쇼토쿠 태자 | 오노노 이모코 | 소가노 우마코 | 소가노 에미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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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역사3. 논쟁4. 기타

1. 개요

다이카 개신(大化の改新)은 일본사아스카 시대645년, 나카노오에 황자(中大兄皇子)가 을사의 변으로 권신 소가노 이루카(蘇我入鹿)를 숙청해 정권을 장악하고, 삼촌 카루 황자(經皇子)를 코토쿠 덴노(孝徳天皇)로 세운 직후 646년에 실시한 정치 개혁이다. 이 개혁을 통해 기존까지 지방호족들의 연합왕국이었던 야마토는 고대의 중앙 집권 국가로 일신했다.[1]

2. 역사

二年春正月甲子朔。賀正禮畢。即宣改新之詔曰。
其一曰。罷昔在天皇等所立。子代之民。處々屯倉及別臣連。伴造。國造。村首所有部曲之民。處處田庄。仍賜食封大夫以上。各有差。降以布帛賜官人。百姓有差。又曰。大夫所使治民也。能盡其治則民頼之。故重其祿所以爲民也。

2년 봄 정월[2] 갑자일 초하루. 신년 축하 의식이 끝났다. (천황이) 개신의 조를 선포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
첫째로 말하길, 옛날 천황 등이 세운 코시로(子代)[3]의 민(民), 곳곳의 미야케(屯倉)[4], 아울러 그 외 오미(臣), 무라지(連)[5], 토모노미야츠코(伴造)[6], 쿠니노미야츠코(国造)[7], 무라노오비토(村首)[8]가 소유한 카키베(部曲)[9]의 민(民), 곳곳의 타도코로(田庄)를 없애라. 이에 따라 식봉을 대부 이상에게 주는데 각각 차이가 있게 하라... (하략)
일본서기》 권 제26 코토쿠 덴노(孝德天皇)

수ㆍ당의 율령제를 도입하고 중앙집권제를 수립하기 위해 646년 1월에 개신의 조를 선포해 네 가지 사항을 발표했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3. 논쟁

역사학자들은 다이카 개신의 작업이라고 기록된 내용 중 일부는 선언에 그치거나, 후대에 실시한 제도를 윤색해 기록했다고 본다. 다이카 개신 이후로도 여전히 호족들이 토지를 소유했으므로 토지국유화는 실시되지 못했음이 분명하다. 다만 굳이 의의를 찾자면 왕토사상(공지공민)을 천명함으로서 천황을 중심으로 하는 국가구조의 기틀을 쌓았다는 점에선 평가해줄 수는 있다. 군(郡)을 규정하는 내용이 있지만, 연구에 따르면 지방의 편제인 코오리(評)[14]가 군(郡)으로 바뀐 때는 다이호 율령 이후인 701년이라고 하고, 반전수수법이 시행된 것도 마찬가지이고 호적이 작성된 것도 670년이라고 한다.

세 가지의 내용들은 제대로 실시되지 못했지만 부역을 폐지하고 토지, 사람, 호에 부과한 조용조에 대해서는 당시에 시행되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다이카 연간인 645년에서 650년까지뿐만 아니라 덴지 덴노(天智天皇), 덴무 덴노(天武天皇), 지토 덴노(持統天皇)에 이르는 기간까지를 다이카 개신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일본서기 연구 결과 중국인 혹은 한문에 능통한 사람이 작성한 순한문체 부분과, 한문으로 썼지만 일본인의 일본어 습관이 남아있는 두 부분이 섞여있다. 을사의 변과 개신 부분은 이 중 후자가 작성했다고 밝혀졌다. 그래서 후대에 가필했다는 의혹이 있다. 여기에 을사의 변은 고사기에는 나와있지 않기에 더더욱 의혹이 증폭되는 부분.

4. 기타



[1] 혹은 쇼토쿠 태자17조 헌법 발표나 다이호 율령을 일본 중앙 집권 국가의 시작이라고 보는 시각도 존재한다. 이에 대해서는 하단의 기타 항목 참조.[2] 다이카 2년(646년) 1월.[3] 왕과 호족의 하위에 소속되어 직역을 수행하는 제도인 부민제에서 오오키미, 즉 왕의 직할로 소속되어 직역을 수행하고 공납을 바치는 부민을 뜻한다[4] 직역하면 둔창인데, 당시 일본은 오오키미들이 직접 개발한 직할지나 기타 요충지 등에 둔창을 설치하고 이 둔창을 중심으로 그곳 호족에데 마을을 지배하게 했다.[5] 카바네로, 야마토 지방에 거주하며 중앙 조정의 고관을 역임하는 일족을 말한다[6] 역시 카바네로 야마토 지방에 거주하며 중앙 조정에 출사하는 것은 맞지만 일반적으로는 무라지보다 격이 낮게 여겨졌다. 즉 중하위 관료들을 말한다[7] 직역하면 국조로, 지방 호족들 중 위세가 더 커 폭넓은 자치권을 누린 호족들을 말한다[8] 카바네(姓)이다. 카바네는 직책이나 가문의 등급 등을 나타내던 표지이다. 오비토는 카바네 중 중소 호족들이나 둔창을 관리하는 이들이 쓰던 카바네로, 여기서 무라노오비토는 작은 마을을 다스리는 소규모 호족으로 볼 수 있다[9] 직역하면 부곡인데, 부민제에서 기본 단위가 되는 부민을 뜻한다[10] 이를 공지공민(公地公民)의 원리라고 부르는데, 일본 고대사에 있어 핵심이념이다.[11] 수도권.[12] 국(國)은 보통 나라를 가리키지만 고대 일본에서의 쿠니(国)는 한국의 시(市)나 도(道) 처럼 지방행정의 단위이기도 했다. 가령 가와바타 야스나리가 쓴 유명한 소설 설국도 여기에 해당한다.[13] 일정액의 구분전을 양인남녀, 노비에게 차등을 두어 호마다 지급해 6년에 한 번 징수했다.[14] 일본 연구자들이 아무리 샅샅이 연구를 해봐도 '고오리'란 단어의 어원을 찾지 못했다. 현재는 코오리가 한국어 고을고어가 아닐까 하는 추측이 지배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