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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4-03 10:20:53

후지와라

사성(四姓) 『겐페이토키츠(源平藤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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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uby(藤,ruby=ふじ)][ruby(原,ruby=わら)][ruby(氏,ruby=し)]
후지와라씨
파일:후지와라씨 가몬.svg
<colbgcolor=#000> 후지와라 가문의 가몬
늘어뜨린 등나무[1]
下がり藤
씨성 후지와라노 아손(藤原朝臣)
시조 아메노코야네(天児屋命)
본가 나카토미(中臣)
씨조 후지와라노 카마타리(藤原鎌足)
종별 신별(神別)(아마츠카미)
본관 야마토국 타카이치군 후지와라
(大和国高市郡藤原)
후예 후지와라 북가(藤原北家)
후지와라 남가(藤原南家)
후지와라 식가(藤原式家)
후지와라 경가(藤原京家)

1. 개요2. 역사
2.1. 기원2.2. 후지와라 4가의 성립2.3. 셋칸 정치의 시작2.4. 세도의 절정 2.5. 권세의 쇠락2.6. 호겐의 난과 막부 성립 이후
3. 여담
3.1. 현대의 후지와라 씨
4. 해당 성을 쓰는 인물
4.1. 실존 인물4.2. 가공 인물
5. 제3의 용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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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나모토(源), 타이라(平), 타치바나(橘)와 함께 일본의 4대 본성 겐페이토키츠 중 하나. 미나모토와 타이라가 각각 겐지(원씨), 헤이시(평씨)로 불리듯 후지와라도 약칭으로 토우지(藤氏)[2]로 불렸다.[3]

'후지와라노'라고 쓰여진 이름도 '후지와라' 를 의미한다. '노'()는 '~의'라는 뜻으로 '후지와라 가문의'라는 뜻이었다. 일본 고대 귀족의 이름을 쓸 때 이렇게 쓰는데[4] 서양식으로 따지면 독일의 '폰(VON)'과 같은 식으로 쓰던 것이다. 관련된 번역서에 따라 혼동을 막기 위해 '노' 부분을 띄어 쓰거나, 아예 생략하기도 한다.

아스카 시대 중인 668년에 창건됐다.

아스카 시대를 대표하던 가문 소가씨가 을사의 변으로 몰락하자 그 자리를 채워앉아 나라 시대때 기반을 다지고 헤이안 시대섭정 가문으로 전성기를 누렸다. 후지와라 외의 4대 본성미나모토 가문타이라 가문은 황실에서 사성을 받고, 신적강하분가들로 여러 방계들이 있었으며, 타치바나 가문은 후지와라씨 북가의 대두 이후 몰락했다. 4대 본성 중 유일하게 사성을 받은 황실 방계가 아닌 일반 귀족 가문이었다.[5][6]

2. 역사

2.1. 기원

선조는 현재 교토의 야마시나 지역을 거점으로 삼았던 토착 종교의 신관 가문인 나카토미(中臣) 가였다. 나가토미 가문은 자신들이 하늘에서 내려온 아메노코야네 신(天児屋命)의 자손이라고 주장하며 아메노코야네를 시조신으로 모셨다.

가문의 일원이었던 나카토미노 카마타리다이카 개신에서 활약한 공로로 38대 덴지 덴노로부터 669년에 후지와라씨를 사성받은 것이 시작이었지만 그 자신은 사망한 후에 후지와라 씨를 사성받았기 때문에(669년) 실질적인 시조이자 번성하기 시작한 건 둘째 아들이었던 후지와라노 후히토 때부터였다. 나카토미노 카마타리는 덴지 덴노로부터 하사받은 여인에게서 후히토를 낳았다고 하는데 그래서 후히토가 실제로는 덴지 덴노의 아들이 아니냐는 소문이 있었다. 훗날 헤이케 정권의 수장이었던 타이라노 키요모리와 비슷한 케이스라 할 수 있다. 물론 진위 여부는 불명이다.

후지와라노 후히토는 자신의 외손이자 차기 황위 계승자로서 45대 쇼무 덴노가 되는 오비토(首皇子) 친왕[7]에게 미인으로 유명하던 딸을 주어 비황족 출신으로는 최초로 황후(코묘 황후)로 세우는 데 성공하면서 외척 가문의 지위를 굳혔다. 후지와라노 후히토는 자기 혈통을 황위에 올리고자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은 사람이었는데, 그 과정에서 여러 친왕을 올렸으나, 후손이었던 쇼무 덴노가 즉위하기 전에 본인이 죽었다.

후지와라노 후히토는 실질적인 《고사기》와 《일본서기》의 편찬 저자였는데, 현대의 일본 사학계를 헷갈리게 만든 만세일계를 만든 만악의 근원이기도 하다. 40대 덴무 덴노 이전까지 오키미(大王)였던 칭호를 원래부터 덴노(천황)로 기술한 건 애교고, 1대 진무 덴노~9대 카이카 덴노, 12대 케이코 덴노~진구 황후는 전부 허구로 추정되는 데다[8] 고훈 시대 덴노 중에서도 22대 세이네이 덴노나 25대 부레츠 덴노는 가공인물설이 중론이다. 소가씨도 을사의 변 이전에는 26대 케이타이 덴노 직계와 대왕위를 공유하지 않았냐는 설이 있다. 소가씨 왕조설에서 33대 스이코 덴노와 35대 고교쿠 덴노/37대 사이메이 덴노를 기술한 것은 당대 45대 쇼무 덴노를 즉위시키는 과정에서 43대 겐메이 덴노와 44대 겐쇼 덴노 모녀를 거쳤고, 쇼무 덴노에게 잘 물려주라는 뜻에서 여왕-태자 구도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이후 지속적인 모략과 숙청을 통해 타치바나 가문을 비롯한 여러 귀족들을 몰아내고, 권력을 장악하였다.

2.2. 후지와라 4가의 성립

후지와라노 후히토에게는 무치마로, 후사사키, 우마카이, 마로라는 4명의 아들이 있었다. 이들의 후손들은 각각 남(南), 북(北), 식(式), 경(京)[9]의 네 가문으로 분가하여 후지와라 4가를 이루게 되었다. 후히토의 아들들은 729년 당시 덴무 덴노의 손자로서 조정의 실세였던 나가야 왕을 모함해 자결시키고 권력을 쥐었다(나가야 왕의 변). 그리고 그 권세를 바탕으로 누이 고묘시를 황후로 책봉하려 했다. 그 때문에 황족과 귀족들이 강력하게 반대했으나 결국 코묘 황후로 책봉시켜 황족의 황후 독점을 깨뜨렸다. 이로써 외척 후지와라 가문의 위세가 시작되는 듯이 보였다.

그러나 737년 형제 모두가 천연두로 일찍 죽어 권력은 나가야 왕의 아우 스즈카 왕(鈴鹿王)과 강력한 귀족이었던 타치바나(橘) 가문으로 넘어갔다. 후지와라 가의 4형제는 어린 자손들만을 남겼으나 이들이 장성하여 가문을 중흥시키게 된다. 그러나 740년 우마카이(藤原宇合)의 아들로서 '시키케(式家, 식가)'의 일원이었던 후지와라노 히로츠구(藤原広嗣)가 다자이쇼니(大宰少弐)로서 규슈의 다자이후로 부임하게 된 일에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켰다가 진압당하자, 그로 인해 시키케가 제일 먼저 몰락하게 되었다.

여기에 후지와라노 무치마로(武智麻呂)의 차남으로 후지와라 '난케(南家, 남가)'였던 후지와라노 나카마로(藤原仲麻呂) 역시 훗날 일가와 함께 몰락하게 되지만, 그는 재능이 뛰어나 고모였던 코묘 황태후의 후원을 받으며 형인 후지와라노 토요나리(藤原豊成)를 제치고 승승장구했다. 755년 강력한 타치바나 가문의 권신이었던 숙적 타치바나노 모로에를 실각시켰고, 757년 황위 계승 문제로 발생한 타치바나노 나라마로의 난(橘奈良麻呂の亂)을 진압하며, 모로에의 아들이던 타치바나노 나라마로(橘奈良麻呂)를 비롯한 타치바나 일족을 숙청하고, 권력을 장악했다. 그는 '에미노 오시카츠(惠美押勝)'라는 이름을 하사받았고, 760년 다이조다이진(태정대신, 太政大臣)이 되었으며, 사신이 추방당한 일로 원한을 품고, 신라 정벌 계획도 추진하면서 상당한 군사권도 손에 쥐어 권세의 절정에 이르렀다. 그러나 고모이자 후원자이던 코묘 황태후 사후 상황으로 있던 46대 코켄 덴노 및 그 최측근인 승려 도쿄(道鏡)와 사이가 멀어지던 그는 위험을 느끼고 결국 반란을 일으켰으나 진압되어 난케 일족이 두 번째로 몰락했다.

770년 퇴위와 복위라는 파란만장한 치세를 보내었던 48대 쇼토쿠 덴노[10]가 붕어했는데, 덴무 덴노 계열이던 여제는 자식이 없었기에 후계 문제가 대두되었다. 이때 후지와라 가문은 덴무 계열의 자손들 대신 선제의 제부이던 덴지 덴노계의 시라카베 왕(白壁王)을 추천하여 결국 60세의 시라카베 왕이 코닌 덴노로 즉위했다.

49대 코닌 덴노는 덴지계인 쇼무 덴노의 딸이자 코켄 덴노의 이복 언니이던 이노우에 내친왕(井上內親王)을 정실로 맞았었으나, 저주 사건이 일어나면서 황후와 황후 소생의 태자를 폐립하고, 웅진백제의 중흥 군주이던 무령왕의 후손이라 여겨지는 타카노노 니이가사(高野新笠) 소생의 야마노베 친왕(山部親王)을 황태자로 세웠다. 이 사람이 50대 간무 덴노로 781년 즉위해, 784년 나카오카쿄(長岡京)로 천도했다가, 794년 헤이안쿄(平安京)로 천도, 헤이안 시대를 개막했다. 그리고 덴지계를 옹립하고 통치에 협력했던 후지와라 가문은 덴노의 신임을 받으며 중용되었다.

이후 후지와라 가문 중에서도 후히토의 차남 후사사키(藤原房前)의 자손들인 홋케(北家, 북가)가 대두했다. 후지와라노 소노히토(藤原園人)는 정1품 사다이진(左大臣, 좌대신)까지 승진하는 등 조정의 중신으로서 율령(형법과 행정법) 정비와 토지의 사유 억제에 힘썼다. 소노히토 사후 활약한 후지와라노 후유츠구(藤原冬嗣)는 중신이자 외척으로서 가문의 지위를 다졌다. 후유츠구는 52대 사가 덴노의 신임을 받아 신설된 측근직인 구로도노토(蔵人頭, 장인두. 천황비서실장격. 조선으로 치면 도승지)에 임명되었으며, 훗날 사다이진에 올라 조정을 주도하며 《코닌 격식》(弘仁格式) 편찬을 주도하는 등 율령 정비에 공헌했다. 또한 후유츠구는 덴노의 외조부가 되어 그 권세를 강화했다.

2.3. 셋칸 정치의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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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유츠구의 차남이었던 후지와라노 요시후사(藤原良房)는 조와의 변을 진압한 이후 권력을 장악하고, 857년 조카인 몬토쿠 덴노(55대) 치세하에서 조정의 최고위 관직이었던 태정대신(太政大臣)에 임명되었다. 858년 요시후사와 대립하던 몬토쿠 덴노가 의문스럽게 급사하자 요시후사는 자신의 외손인 9세의 세이와 덴노(56대)를 옹립했다. 태정대신이었던 요시후사는 덴노에 오른 어린 외손을 대신하여 사실상 셋쇼(섭정, 摂政)에 준하는 권력을 가지게 되었고 이때부터 후지와라 북가는 명실공히 외척 권세가로서의 지위를 굳혔다.

866년에는 오텐몬의 변(応天門の変)으로 다이나곤(大納言, 대납언) 토모노 요시오(伴善男) 등의 정적들이 숙청되자 요시후사는 정식으로 셋쇼(섭정, 摂政)에 임명되어 권력을 유지했다. 884년 요시후사 사후 권력을 쥔 양자 후지와라노 모토츠네(藤原基経, 요시후사의 조카)는 외조카 요제이 덴노(57대)를 폭군으로 몰아 퇴위시킨 후, 고코 덴노(58대)를 옹립하여 권력을 굳혔다. 모토츠네는 55세인 성인 천황의 치세에서도 섭정의 권력을 갖는 칸파쿠(관백, 關白)에 임명되어 권력을 유지했다. 이로써 후지와라 북가는 셋칸케(섭관가, 摂関家)[11]로서 두 지위를 독점하게 되었다.[12] 이후 9세기에서 12세기에 걸쳐 외척 후지와라 북가의 지배가 행해지게 되었다. 이 시기는 후유츠구 이래 개간이 장려되어 생산물이 늘어나고, 《조간 격식》(貞観格式)의 편찬과 같이 문물이 정비되던, 비교적 평온한 시기로 전해진다. 그러면서도 수도 교토에서는 후지와라 북가가 권력을 강화하며 그 세력을 키웠고, 반대파 귀족과 북가가 아닌 후지와라 일문들은 고위직에서 밀려나고 있었다.

9세기 말 후지와라의 외손이 아니었던 우다 덴노(59대)가 즉위하면서 후지와라 셋칸케의 권세에 견제가 가해졌으나 젊은 신임 당주였던 후지와라노 토키히라(藤原時平)가 후지와라 가문을 따르는 조정 내 세력을 이용해 저항함으로써 그 권세가 무너지지 않았다. 오히려 다이고 덴노(60대)에게 정적 스가와라노 미치자네를 참소하여 실각시켰으며(쇼타이의 변, 昌泰の変), 천황도 신하들을 좌지우지하던 외척 후지와라 가문과 협력해야 국정을 이끌 수 있었다. 그러나 토키히라는 통치면에서는 황실과 협조하여 《엔기 격식》(延喜格式)의 편찬 및 <반전여행령>(班田励行令) 반포를 통해 율령 정비와 농민 보호를 행하기도 했다. 이렇게 후지와라 가문은 지속적으로 황후를 배출하고, 어린 외손을 저택에서 키우면서 친밀감을 쌓아 율령제의 틀 안에서 천황을 능가하는 권세를 누릴 수 있었다.

토키히라의 아우 후지와라노 다다히라는 부호층을 용인하고, 토지세를 수취하는 방향으로 국정을 이끌어 기존 율령제 파괴의 단초를 제공했다. 이 다다히라의 자손들이 셋칸직을 이으며 권세를 누렸다. 타이라노 마사카도가 반란을 일으켰으나, 후지와라노 히데사토 등에 의해 토벌된 시기가 이때였다.

2.4. 세도의 절정

この世をば わが世とぞ思ふ 望月の 欠けたることもなしと思へば
(이 세상은 모두 나의 것. 저 보름달처럼 부족함이 없노라)
- 후지와라노 미치나가[13]

969년에는 칸파쿠 겸 다이조다이진인 후지와라노 사네요리(藤原実頼)와 우다이진(右大臣, 우대신)인 후지와라노 모로타다(藤原師尹)를 비롯한 후지와라 세력이 정적인 사다이진(左大臣, 좌대신) 미나모토노 타카아키라(源高明)를 실각시키고, 엔유 덴노(64대)를 옹립해 셋칸케의 권세를 강화했으니 이것이 안나의 변(安和の変)이었다. 이 사건은 후지와라 가문이 지방의 여러 세력들까지 포섭하고, 중앙의 대귀족들의 지위와 천황위의 향방도 좌우할 수 있음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사네요리 사후 벌어진 형제 간의 권력 다툼에서 최종적으로 승리하여 권력을 쥔 후지와라노 가네이에(藤原兼家)는 982년 자신과 충돌하던 카잔 덴노(65대)를 퇴위시키고, 외손자인 이치조 덴노(66대)를 옹립해 권세를 굳혔다.

카잔 덴노는 남설되어 국고를 위협하고, 농민층을 내몰던 대장원을 억제하려 하는 등 후지와라 가문과 기득권층의 이해관계를 건드리는 정책을 펼쳤다. 이에 대해 가네이에가 후지와라 가문 내의 권력 투쟁에서 우위를 점한 후 자신의 외손을 옹립해 권세를 굳히고자 했던 것이 원인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황위를 좌우할 정도의 권세가 지속되면서 후지와라 가문의 셋칸직과 그 권세는 관례화되기에 이르렀으며, 최고의 귀족이자 전통적인 외척 가문으로 남게 되었다. 무라카미 미나모토씨(村上源氏)를 비롯한 고위 귀족과 방계 황족들은 이들의 견제를 받았고, 후지와라 방계를 비롯한 다른 귀족들 역시 이들의 위세에 눌린 채 가문에 따른 품계의 제한이 확고해졌다. 이후의 권력 향배는 후지와라 씨장자 가문의 자손들 간의 씨장자와 외척 자리를 놓고 벌이는 다툼에서 결정되었다.

이들은 자신들이 양육하여 친밀감을 쌓은 미성년의 외손을 덴노로 옹립하고 폐위하기까지 했으며, 덴노를 정무에서 밀어내고, 율령제의 틀 안에서 덴노의 후견인이자 외척으로서 권력을 휘둘렀다. 또한 막대한 장원을 기진받아 강력한 경제력과 사병 동원력을 갖게 되었다. 후지와라 출신의 황후나 중궁들은 이런 권세를 뒷받침했으며, 지속적으로 친정 출신의 여인들이 궁중에 들어와 황자를 낳게끔 조력했다. 후지와라 가문이 후원한 씨사들 역시 막대한 장원과 승병을 거느리고 친 후지와라 세력으로서 위세를 부렸는데, 특히 현재의 나라현 지방인 야마토가 극심했다.

9세기 말엽부터 심각해지는 국가 수취 체계의 문란과 대장원의 확대는 농민의 곤궁을 초래하여 반란을 불러일으켰고, 율령제하의 징병 체제가 와해되었기에 조정은 부농 무장층을 무사 계층으로 삼아 군사력으로 동원했다. 여기서 무가가 싹트게 되었다.[14] 이런 사회적 혼란속에서 지방관인 고쿠시(国司, 국사)들은 많은 권한을 위임받아 상당히 자율적인 지방 지배권을 가지게 되었으며, 교토의 조정은 조세 징수에 중점을 두었다. 반란이 일어난 경우, 무사 씨족의 수장을 지방관이나 토벌대 장군으로 파견했는데 그 과정에서 토지 소유자인 지방의 무사들과 지방관으로 지역의 권력을 쥐었던 유력 무사 씨족의 수장이 유착하여 봉건적인 관계를 형성하게 되었다. 후지와라 셋칸케의 정치는 이런 변천을 막지 못했고, 오히려 11세기 고정된 세율의 조세 부과 및 각 쿠니(国, 국)별 수취와 같은 세제 개편을 통해 봉건화를 촉진시켜 버렸다.

10세기 말 일가 내 다툼에서 우위를 점한 후지와라노 모로스케(藤原師輔)의 손자 후지와라노 미치나가 때, 셋칸케의 권력이 절정에 이르렀다고 여겨지는데, 미치나가가 《겐지모노가타리》(원씨물어)의 히카루 겐지의 모델이라는 이야기도 있을 정도였다. 칸파쿠가 되지는 않았다고 하나 '나이란(內覽, 내람)'으로서 황실 기밀문서를 관장하고, 조정 정사를 장악하여 자신의 저택인 히가시산조도노(東三条殿)에서 실권자로서 군림했으며 형과 조카들을 밀어내고 네 딸을 덴노의 비로 들여보내 외손들을 덴노로 세웠다.

그러나 미치나가가 추진했던 조세 제도 개편이나 약소한 장원 억제책은 큰 소용이 없어[15] 지방에서는 토지를 둘러싼 호족 간의 다툼이 지속되었고, 동북 일대를 중심으로 중앙의 통제력 역시 약화되고 있었으며[16], 세이와 겐지(原氏)간무 헤이시(平氏)라는 강력한 무사 일족이 대두하고 있었다. 이에 후지와라 가문은 주로 카와치 겐지 일족(河内 源氏, 하내 원씨)을[17] 통해 반란이나 대사원 소속 승병들의 강소 등을 막아내는 등 무력을 행사하여 정권을 유지했다.

미치나가의 권력은 형의 일족과 외손을 밀어내고, 외척이자 후지와라 가문 당주로서의 지위를 굳히면서 절정에 달했다. 덴노를 능가하여 수틀리면 압박해 퇴위시키거나, 동궁을 마음대로 바꾸는 지경이었고, 헤이안, 즉 교토에 화재가 일어나 황궁인 다이리(内裏, 내리)와 미치나가의 저택이 불탄 상황에서 수령들이 미치나가의 저택 재건에만 성의를 보이고, 미치나가에게 물품들을 바치는 등 그 위세가 천황을 능가하기에 이르렀다. 마찬가지로 아들 요리미치(藤原賴通) 역시 50여 년간 셋칸으로서 권세를 누렸다. 이후 미치나가의 자손들인 미도류(御堂流)[18]가 후지와라 가문의 씨장자의 자리를 잇는 셋칸케(摂関家)로서 훗날 고셋케(五摂家)를 이루게 되었으며 이후로는 이들 가문에서 셋칸이 임명되는 것이 완전히 관례화되어 버렸다.

2.5. 권세의 쇠락

이렇게 절정에 이르렀던 후지와라가의 권력은 11세기 초 황족 출신의 어머니를 두었던 고산조 덴노(71대)가 즉위하면서 도전받게 되었다. 천황은 비 셋칸 가문으로 권력의 중심에서 소외되었던 후지와라 방계 출신 귀족들과 무라카미 겐지 같은 황실 방계 출신 귀족, 그밖의 하급 귀족들과 지방 세력들을 기용하여 외척의 자리에서 밀려난 후지와라 가문의 권력을 약화시켰다. 칸파쿠 요리미치는 은거했고, 후지와라 가문은 씨장자 자리를 놓고 분란이 일어 효과적인 대응을 하지 못했다. 고산조 덴노는 이들을 수족으로 하여 엔큐의 선정(延久の善政)으로 칭송받는 개혁 정치를 시행해 대장원을 대거 정리하여 국가로 환수하고, 무너져가던 율령제도의 정비를 도모했다. 이로서 장원제의 폐단이 완화되었고, 국고가 충실해졌으며 셋칸케의 경제적 기반이 약화되었다[19]

고산조 덴노의 아들 시라카와 덴노(72대)는 후지와라 가문 비섭관가 계열의 외손으로 반 후지와라 정책을 지속했다. 그는 아들에게 양위한 이후 인세이(원정)를 실시해 중•하류 귀족과 무사 가문 타이라씨를 중용하면서 후지와라 가문을 견제했다. 자세한 내용은 인세이 참조. 다만 이 시기에도 황후나 중궁은 황족이 아닌 이상 대개 후지와라 가문의 여인들이 되었고, 비섭관가 여인들은 섭관가의 양녀가 되기도 했다. 한편 후지와라노 미치나가가 황태후의 승인을 얻어 셋칸에 취임했던 선례가 이 시기에는 조코(상황)의 승인에 따른 셋칸 취임으로 이어지면서 조코의 권위가 더 높아졌다.

2.6. 호겐의 난과 막부 성립 이후

고셋케(五摂家)
파일:고노에 가문.png
파일:타카츠카사 가몬.jpg
파일:Kujō_Fuji_inverted.png
파일:니죠 가몬.png
파일:Ichijō_Fuji_inverted.png


1156년호겐의 난(保元の乱)은 황실과 후지와라 셋칸케의 내부 분열 및 권력 투쟁이 뒤얽혀 폭발한 대사건이었다. 당시의 셋쇼(摂政) 후지와라노 다다미치(藤原忠通)는 당주인 부친 타다자네(藤原忠實) 및 부친이 차기 당주로 내세우던 동생 나이다이진(內大臣, 내대신) 요리나가(藤原頼長)와 대립했다. 타다자네는 셋쇼인 장자 다다미치 대신 총애하던 요리나가를 후계로 세우고자 하여 씨장자의 인장, 씨장자의 상징인 주기대반(朱器臺盤)을 장남에게서 빼앗아 요리나가에게 주어 다다미치의 반발을 샀다. 후지와라 가문의 씨장자(우지노초자:藤氏長者)는 후지와라 셋칸케에 속한 막대한 장원과 씨사 등을 관할했으며, 후지와라 모든 일족을 총괄할 수 있는 권한이 있었다. 원래 셋칸이 이를 겸하는 것이 관례였는데 가문의 최고 어른이던 타다자네가 이를 뒤집은 것이었다.

이는 천황가의 내분과 연계되어 호겐의 난으로 이어졌는데 다다미치는 우세를 점하던 고시라카와 덴노(77대) 편에 섰고, 형과 고시라카와 세력에 의해 조정에서 고립되어가던 요리나가는 스토쿠인(崇德院)과 손을 잡았다. 전란의 풍문이 떠돌고, 고시라카와 덴노 측이 압박을 강화하면서 무력 충돌이 예견되었다. 요리나가가 후지와라 가문의 장원에서 차출한 사병들과 무사 씨족의 병사들이 소집되어[20] 전투가 벌어졌다. 한밤의 전투에서 미나모토노 요시토모와 타이라노 키요모리가 이끌던 고시라카와 덴노의 군대가 승리했으며, 스토쿠 상황파의 요리나가는 화살에 맞아 전사했다.

그 결과, 셋쇼 다다미치는 경쟁자를 제거하고 아버지 타다자네를 굴복시켰으나, 스토쿠 상황을 지지했던 아버지와 동생을 대역죄인으로 몰게 되어 불효자라는 낙인이 찍혔다. 또한 당주 문제에 있어서도 최초로 천황에 의해 당주임을 인정받게 되어 후지와라 씨장자의 평판과 위세가 크게 약화되었다. 여기에다 무력 기반이었던 카와치 겐지 일족도 여럿이 전사하거나 처형되어 세력이 약화되었으며, 이후 미나모토노 요시토모타이라노 키요모리가 격돌한 헤이지의 난에서 몰락하여 황실과 이세 헤이시(헤이케)의 위세 앞에 눌리게 되었다. 다다미치는 부친과 동생의 영지가 상당수 몰수되어 경제적으로도 약화되기에 이르렀다. 다만 다다미치가 고시라카와 덴노의 후지와라가 당주 결정을 받아들인 후 셋칸케 씨장자에 귀속된 영지 다수는 돌려받을 수 있었다.

이 다다미치의 장자 모토자네가 고노에(近御) 가문을, 당시 반 헤이시(平氏)의 선봉이었고, 한때 후지와라 셋칸케의 씨장자 자리에 오르기도 했던 차남 모토후사가 마츠도노(松殿) 가문(단절됨)을, 모토후사 사후 정권을 잡았던 그 동생 가네자네가 구조(九条) 가문을 개창했다.

이후 헤이케 정권의 타이라노 키요모리나 가마쿠라 막부의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와 같은 무사 세력이 권력을 장악하게 되면서 교토의 조정이 실권을 잃고, 그에 따라 셋칸케의 힘도 약화되었으며 장원도 많이 상실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정 내에서 후지와라 셋칸케의 자손들은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고, 관례적으로 외척의 신분과 고위직을 독점·세습했다. 그러나 센코쿠 시대에 들어서 전란으로 교토가 잿더미가 되고, 덴노가 끼니를 걱정하는 처지에 이르면서 이들의 처지도 악화되었고, 도요토미 히데요시에도 막부의 지원으로 가문을 꾸리는 처지에 이르게 되었다. 그나마 황후 선출만은 그대로 독점했다.

가마쿠라 시대고노에(近衛),[21]고노에 후미마로라는 희대의 막장 정치인이 있었다. 해당 항목 참조.] 구조(九条), 이치조(一条), 니조(二条), 다카쓰카사(鷹司)로 분할된 것이 고셋케(五摂家, 오섭가)였으며, 이 다섯 가문만이 칸파쿠에 오를 수 있었다.[22] 고노에 가의 분가다카쓰카사 가문이었고, 구조 가문의 분가이치조, 니조 가문이었다. 적장자의 후손인 고노에 가는 고셋케의 수장격의 지위를 가졌으나, 각 가문들이 배출한 인물들의 능력이나 관위에 따라 가세가 달라졌다. 이들을 싯페이케(執柄家, 집병가)라고도 했다.

이렇게 나뉜 5개 가문은 실권은 없었지만 에도 시대 이후로 각 가문별로 시마즈 가문 등의 유력 다이묘 가문, 도쿠가와 쇼군 가문 등의 무가와 겹겹이 혼인을 맺으면서 막말의 정치사를 흥미롭게 만들었다.

고셋케로 나뉠 때부터 후지와라 은 공식문서에서만 쓰였고, 일반적으로는 각 가문명을 사용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 외에도 고셋케의 바로 아래 서열에 해당하는 세이가케(清華家, 청화가)에도 후지와라의 자손들이 대다수라 9개의 가문 중 7개가 후지와라의 자손(이 중 2개는 고셋케의 북가 미도류 자손), 2개가 무라카미 겐지, 오기마치 겐지의 자손이었다.[23] 그 외 다이진케(大臣家, 대신가)를 비롯한 구게(公家, 공가) 중 다수가 후지와라 가문의 자손이었다.

메이지 유신 이후 이들 가문은 각 가격에 따라 화족으로서 작위를 받게 되었는데, 고셋케공작, 세이가케는 후작,[24] 대신가 및 대납언을 배출한 우림가 이하 일부 가문은 백작, 그 이하의 당상가는 자작으로 서작되었다.

그 밖에 헤이안 시대 말기 세력을 떨쳤던 오슈(奥州) 후지와라씨도 후지와라 가문의 방계로 여겨지고 있으며 그 밖에 지방으로 내려가 무가를 이룬 후지와라의 자손들도 있었다.

3. 여담

3.1. 현대의 후지와라 씨

현대 일본에도 후지와라라는 성씨(묘지)를 가진 사람은 많으나, 그 사람들 모두가 앞에서 설명한 후지와라 가문의 후손은 아니다. 헤이안 시대 중기부터 후지와라 가문을 자칭한 사람들도 많고, 고셋케 분할 이후에는 헤이안 셋칸 가문 후지와라의 후손들이 시대의 흐름을 타고 성(우지)을 쓰지 않고 각 분가의 씨(묘지)를 썼기 때문이다.[25] 또한 메이지 덴노 시대에 평민에게도 성을 주면서 후지와라 가문을 위해 일했거나, 단순히 그 근방에 살고 있던 사람들에게도 후지와라의 성씨[26]를 주었다. 따라서 본성(우지)으로 쓰인 경우만 위에서 설명한 후지와라 가문 출신이고[27], 그냥 성(묘지)으로 쓰인 경우는 평범한 성이라고 보면 된다.[28]

현대 일본에서 후지타(藤田), 후지이(藤井), 후지모토(藤本), 후지무라(藤村), 후지미야(藤宮), 사토(佐藤), 카토(加藤), 이토(伊藤), 고토(後藤), 콘도(近藤), 엔도(遠藤) 등과 같이 등나무 등(藤)자가 들어간 성씨들을 매우 흔하게 찾아볼 수 있는데, 이 성씨들이 바로 후지와라 가문의 분가, 혹은 후지와라 가문의 하청업체 가문예를 들면 소작농에서 유래한 성씨인 경우가 많다. 사실 묘지로 후지와라(藤原)의 등(藤)을 따오는 전통은 메이지 유신 이전부터 꽤 오래되었는데, 예를 들어 이세(伊勢)지방에 정착한 후지와라의 후손이나 그 하청업자 집안은 이토(伊藤), 카가(加賀)지방의 경우 카토(加藤)[29]라는 식으로 묘지를 지어내는 작법이 16세기 전국시대 때에도 이미 만연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상술했다시피 현대 일본에서는 이러한 성씨들을 가진 사람들이 모두 후지와라 가문의 각 분가와 직접적인 관계가 있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4. 해당 성을 쓰는 인물

※ 본성으로 쓰인 경우는 ◎ 표시.

4.1. 실존 인물

4.2. 가공 인물

5. 제3의 용례



[1] 눈썰미가 있는 사람은 알겠지만, 이 문장은 용각산에 그려진 그 문양이다. 이는 용각산을 처음 만든 후지이(藤井)씨도 등나무 문장을 사용했기 때문인데, 등나무 문장을 쓰는 가문은 후지와라씨, 후지이씨 말고도 사이토(斎藤)씨, 이토(伊藤)씨가 있다.[2] 후지와라 가문의 씨장자(氏長者 우지노 쵸자 : 종손)를 토우지쵸자(藤氏長者)라 불렀다.[3] 이는 나라 시대~헤이안 시대 초기에 성행했던 당풍(唐風) 문화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4] 이는 본성을 쓰는 이름이면 원칙상 전부 해당된다.[5] 그렇지만 가격(家格)은 황실 방계보다 오히려 더 높았다. 대대로 황후를 배출하는 가문이었기 때문이었다. 관백에 오를 수 있는 최고의 명문가인 셋칸케(섭관가, 또는 오섭가)는 모두 실질적으로 후지와라씨를 처음 사용한 후지와라노 후히토의 둘째 아들 후지와라노 후사사키의 후손인 후지와라 북가, 그 중에서도 후지와라노 미치나가의 후손인 미도류였으며, 그 다음 계급인 세이가케(청화가)는 섭관가의 방계 중에서 격이 높은 가문들이었다. 일부 미나모토 계통의 가문들이 나중에 청화가로 격상되긴 했으나 후지와라 계통의 청화가들보다는 낮은 가문들로 인식되었다. 다이진케(대신가) 이하의 귀족 가문들 상당수도 후지와라 가문의 방계들이었다. 사실상 전성기의 후지와라 본가는 부제(副帝)나 다름없는 위치였다.[6] 다만 고셋케고노에가, 다카쓰카사가, 이치조가는 에도 시대에 이르러 적남(嫡男)의 대가 끊겨 황실이나 친왕가로부터 양자를 들여 대통을 이었다. 이 세 가문을 황별섭가(皇別摂家)라고 한다.[7] 몬무 덴노에게 장녀를 후궁으로 보냈고, 이 딸이 낳은 아들이 오비토다.[8] 시호가 7~8세기에 나타난 타라시, 히코, 야마토네코로 나오기 때문이다.[9] 무치마로의 저택이 헤이조쿄의 남쪽에 있었기 때문에 남가, 후사사키의 저택이 헤이조쿄의 북쪽에 있었기 때문에 북가, 우마카이가 식부경을 역임했기 때문에 식가, 마로가 좌경대부를 역임했기 때문에 경가였다.[10] 코켄 덴노가 나카마로의 반란 이후 47대 준닌 덴노를 폐위하고 복위한 이후의 이름이다.[11] 고노에, 다카쓰카사, 구조, 이치조, 니조로 분화되어 관백 지위는 오로지 이 다섯 가문만이 할 수 있었고, 이 다섯 가문이 돌아가면서 역임했다. 섭관가의 방계들이 섭관가 다음 가격인 청화가를 이루고, 이후 일부 미나모토 계통들이 청화가로 격상되기도 했으나, 후지와라 계통에 비해서는 낮은 격으로 인식되었다. 참고로 덴노 가에서 혈연적으로 멀어져서 미나모토라든지 타이라신적강하하는 경우, 후지와라 섭관가라든지, 그 섭관가의 방계인 청화가보다도 낮은 대신가의 가격을 부여받았다. 후지와라 가문이 황후 가문으로써 그만큼 높은 대우를 받았던 것이다. 더군다나 태정대신은 막부의 수장들이 오르기 시작하기 전까지는 오로지 섭관가와 청화가의 사람들만이 역임할 수 있었다.[12] 이후 셋쇼와 칸파쿠는 메이지 유신 때 완전히 폐지되기 전까지 수백년간 지속되었고, 96대 고다이고 덴노겐무 신정기나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경우만이 예외로 남았다. 다만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경우는 명목상으로 고노에 가문의 양자로 입적하는 방식으로 관백에 올랐다가 '도요토미'라는 본성(혼세)를 새로 사성받은 경우였다.[13] 후지와라씨 셋칸 정치의 최전성기를 구축한 미치나가가 연회 중에 달을 보고 읊었다는 유명한 와카(화가). <망월의 노래>(望月の歌)라고 불린다. 셋칸 정치의 최전성기를 상징하는 그야말로 권력자의 노래라고 할 만한 작품이었다. 한편으로는 1025년 어느 대신이 "천하의 땅은 송두리째 셋칸 소유가 되어 공령(국가의 땅)은 송곳 하나 꽂을 자리가 없다." 라는 기록을 남기기도 했다. 이는 과정이 좀 섞였겠지만 가히 미치나가가 "이 세상은 모두 나의 것"이라 말할 만했다.[14] 한편 내몰린 농민들이 장원을 보유한 거대 사원에 들어가 승병으로 동원되어 국가의 골칫거리가 되기도 한다.[15] 일단 후지와라 가문부터가 막대한 장원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다른 귀족들도 사정이 비슷해 귀족들의 지지를 받기도 어려웠다.[16] 이미 이런 문제로 인해 타이라노 마사카도의 난이 일어나기도 했다. 그때도 무사 세력을 동원해 진압했으며 그 와중에 진압군의 수장이었던 세이와(청화) 겐지(원씨, 미나모토) 일족이 동국에 세력을 쌓고, 간무(환무) 헤이시(평씨, 타이라) 일족이 서쪽으로 이주하게 되었다.[17] 세이와 겐지의 분파이다.[18] 미치나가의 별호인 '미도칸파쿠'(御堂関白)에서 유래했다.[19]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셋칸케의 장원은 막대했기에 이후로도 천황들이 계속 후지와라 가문을 경계하는 한 가지 이유가 되었다. 간무 헤이시 중 이세 헤이시였던 헤이케 일족은 황실이 후지와라 가문을 경계한 덕분에 황실의 후원을 받으며 성장할 수 있었다[20] 당시 가장 유력했던 무사 씨족인 세이와 겐지 중의 카와치 겐지와 간무 헤이시 중의 이세 헤이시 모두 가문 안이 양분되어 싸웠다.[21] 이 가문의 당주 중에[22] 도요토미 히데요시고노에 사키히사의 양자로 들어가는 형태로 이 제한을 벗어나서 칸파쿠에 오를 수 있었다.[23] 세이가케 9개 가문 중 산조, 사이온지, 도쿠다이지의 3개 가문은 후지와라노 미치나가의 숙부 킨스에를 시조로 하는 후지와라씨 칸인류에서 분기한 가문으로 킨스에의 고손자뻘인 후지와라노 킨자네의 아들 대에서 각각 분기하였으며, 여기에 사이온지의 분가인 이마데가와(키쿠테이) 가문을 포함한 4개 가문이 칸인류에 해당했다. 원래는 사이온지의 분가 중 토인 가문도 세이가케의 일원이었으나 토인 가문의 경우 무로마치 막부 시기 경제적 곤궁을 이유로 당시의 당주가 스스로 폐문하여 단절되었다. 쿠가 가문은 무라카미 덴노의 후손인 무라카미 겐지의 적통 가문이었으며, 쿠가의 분가인 츠치미카도 가문도 한때 세이가케의 일원이었으나 이쪽도 무로마치 막부 시기 당주가 요절하며 가문이 단절되었다. 카산노인 가문과 오이노미카도 가문은 후지와라노 미치나가의 손자 후지와라노 모로자네의 차남과 3남이 각각 분기한 가문으로 이 두 가문을 통틀어 후지와라씨 모로자네류 또는 카산노인류로 분류했다. 원래 세이가케는 이 7개 가문을 지칭하는 단어였으나 에도 시대 이후 오기마치 겐지 적통인 히로하타 가문과 고셋케 이치조 가의 분가 다이고 가문이 새로 세이가케의 자리에 올랐다. 그러나 이 두 가문은 세이가케이긴 하나 조정 최고직인 태정대신을 배출하지 못했으며 전통있는 7개 가문에 비해선 상대적으로 하급으로 취급되었다.[24] 산조 가문은 유신 과정에서의 공훈을 인정받아 공작으로 서작되었고, 사이온지 가문과 도쿠다이지 가문도 후에 공작으로 승격되었다.[25] 비슷한 예로 타이라 가문의 우지를 가진 호조 가문, 미나모토 가문의 우지를 가진 타케다 가문 등이 있다.[26] 묘지로 후지와라씨(氏)를 받은 걸 의미하는 듯.[27] 현대 일본인의 대부분은 우지가 없음을 주의. 우지는 말 그대로 천황이 하사하는 사성이고, 인구의 5% 미만을 차지하는 귀족의 신분을 의미한다.[28] 성씨의 고대 중국식본래 사용법으로 적용하면 후지와라는 성(姓)이 되고 분가(의 묘지)는 씨(氏)가 된다.[29] 히데요시의 친인척이었던 가등청정의 그 카토(加藤)가 맞다.[30] 본명이 후지와라 시오리이다.[31] 예전 개그콤비들은 간단하게 콤비의 성(또는 예명)을 늘어놓거나 합쳐서 이름을 짓는 경우가 많았는데, FUJIWARA의 경우엔 후지모토 토시후미에서 후지, 하라니시 타카유키에서 하라를 따와서 후지와라라고 짓고 한자로 藤原로 썼다가 이후 Fuji-Wara를 거쳐 현재의 이름으로 정착했다. 즉 후지와라라는 단독의 성씨가 아니라 멤버 두명의 이름을 합친 합성어이기에 제3의 용례인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