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일본의 동북지방(도호쿠)을 뜻하는 '오슈'를 지배했던 지방정권인 후지와라 가문을 말한다. 섭정 및 관백을 대대로 역임했던 섭관가 후지와라 성씨와는 별개의 가문이다.헤이안 시대 말기에 후지와라노 히데사토의 후손을 자처하는 가문의 일부가 변방이었던[1] 오슈 지방으로 낙향하여 재청관인(在廳官人)이 되었고, 오슈 전역을 휩쓴 전9년의 역·후3년의 역에서 살아남은 유일한 생존자였던 후지와라노 기요히라(藤原淸衡)가 오슈 후지와라씨의 초대 당주로서 히라이즈미를 자신의 거점으로 삼고 일문을 발전시켰다.
본거지는 히라이즈미에 있었다.
2. 역사
2.1. 후지와라노 기요히라
히라이즈미의 기반을 닦고, 오슈 후지와라씨의 초대 당주가 된 후지와라노 기요히라의 일생은 그 자체로 한 편의 드라마나 다름이 없는 기구한 생애였다.기요히라의 아버지이자 후지와라씨 12세 손인 후지와라노 츠네키요(藤原經淸, ?~1062)[2]는 후지와라노 히데사토의 후손이자 당시 무츠노쿠니 고쿠가(國衙, 국아)에 속한 재청관인이었고, 동시에 무츠 지역의 오쿠 6군을 실질적으로 지배하고 있었던 대호족 무츠(오슈) 아베씨[3]의 사위였는데, 고쿠시(國司, 국사) 미나모토노 요리요시(源賴義, 988~1075)[4]와 무츠(오슈) 아베씨[5] 사이에 현지 지배권을 놓고 충돌이 발생하자(전9년의 역) 고민 끝에 휘하 800기를 거느리고 장인인 아베 가문에 가담했다. 츠네키요가 아베 가문에 붙어버리면서 전쟁이 9년을 끌며 고착화될 지경에 이르자 미나모토노 요리요시는 데와의 또 다른 후슈 대호족 기요하라씨(出羽淸原氏)를 아군으로 끌어들여 가까스로 승리할 수 있었고, 후지와라노 츠네키요가 처형된 뒤에[6] 기요히라 역시 죽임을 당해야 했으나, 츠네키요의 아내 즉 기요히라의 어머니(아베노 요리토키의 딸)가 데와 기요하라씨의 당주 기요하라노 다케노리(淸原武則, ?~?)의 맏아들 다케사다(武貞, ?~?)의 아내로 넘겨져[7] 목숨을 부지했다. 기요히라의 어머니는 그와의 사이에서 기요하라노 이에히라(淸原家衡, ?~1087)라는 아이를 낳았다. 후지와라노 기요히라는 원복을 치른 뒤 양아버지 다케사다의 성과 기요하라 집안의 돌림자 '히라'(衡)를 사용해 '기요하라노 기요히라'(淸原淸衡)라는 이름을 쓰게 되었다.
기요하라노 다케사다에게는 차후 데와 기요하라씨의 당주가 될 기요하라노 사네히라(淸原眞衡, ?~1087)라는 아들이 있었는데, 사네히라는 데와 기요하라씨를 이세 헤이시나 가와치 겐지와 같은 도료(당주) 1인이 독재적으로 다스리는 체제로 개혁하려고 했고, 이 과정에서 기존의 기요하라씨의 가신들과 충돌하게 되었다. 기요하라씨를 섬겨왔으나 사네히라와 사이가 나빴던 기미코노 히데타케는 자신을 치려는 사네히라에 맞서 그의 이복 형제인 기요히라와 이에히라를 꾀어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인 후 사네히라에 맞서게 했다. 이 기요하라씨의 분쟁에 당시의 무츠노카미(陸奥守)였던 미나모토노 요시이에(源義家)[8]가 개입해 사네히라를 도와 기요히라·이에히라를 대패시켰고, 형제는 도망치던 중에 결국 요시이에에게 항복했다. 이후 사네히라가 급서하면서 다시금 요시이에가 나서서 옛 기요하라 집안 소유의 영지를 기요히라와 이에히라에게 나누어 주었는데, 이 중재에 불만을 품은 이에히라가 이부(異父) 형인 기요히라의 저택을 급습해 기요히라의 처자들이 모두 죽게 되었다(후3년의 역). 목숨을 건져 도망친 기요히라는 미나모토노 요시이에에게 도움을 청하여 동생인 이에히라와 싸웠고, 최종적으로 이에히라를 죽이고 승자가 되었다.[9]
무츠 아베씨의 피를 이은 인물이자 데와 기요하라씨의 양자로써 무츠 · 데와 양 지역을 장악한 기요히라는 아버지 츠네키요의 성인 후지와라를 회복해 후지와라노 기요히라(藤原淸衡)라는 이름을 쓰게 되었고, 미나모토노 요시이에가 이후 다른 지역의 고쿠시로 전출되면서 사실상 오슈 전역의 실질적인 통치자가 되었다.
기요히라는 가호(嘉保)[10] 연간(1094년 ~ 1095년) 즈음에 지금의 이와테현 히라이즈미(平泉)로 거처를 옮기고 이곳에 정치·문화의 중심도시를 건설하는 데 착수했다. 1108년에는 주손지(中尊寺, 중존사)의 중창불사를 행했는데, 기요히라 자신이 지은 주손지 공양원문의 필사본에는 "다시는 이 땅에서 전란의 참상이 벌어져서도 안 되고, 나와 같은 불행을 겪는 이가 나와서도 안 된다.", "적이든 아군이든 사람이든 짐승이든 상관없다. 구원이 필요한 자는 누구든 오라. 다 함께 공평하게 극락정토로 인도한다"는 신념으로 히라이즈미를 불교의 도시로 건설해 나갔다고 밝히고 있다. 이러한 기요히라의 유지를 받들어 이후 가문을 이어받은 모토히라나 히데히라 모두 중앙 조정의 일에 관여하지 않고, 자신들이 지배하는 지역 내의 문제를 단속하거나 모쓰지(毛越寺),[11] 무료코인(無量光院)[12] 등 광대한 사찰을 짓고 불교계의 후원자로써 사찰을 경영하는 데만 주력하게 되었다.
기요히라가 지은 주손지 낙경공양원문(中尊寺落慶供養願文)은 자신이 세운 절의 규모를 세세하게 기록하고 이 절을 짓게 된 자신의 동기를 소개하고 있는데, 원문은 사라지고 남북조 시대에 진수부장군(鎮守府将軍)으로 무쓰에 온 기타바타케 아키이에가 필사한 사본만 전해진다. 주손지를 지은 것에 대한 공양원문이라고 제목에 붙어 있지만 원문 안에 나오는 사찰의 주요 전각 구성을 볼 때에 주손지보다는 모쓰지[13]에 더 가깝지 않느냐는 견해가 있다.
所為者何、弟子者東夷之遠酋也、生逢聖代之無征戦、長屬明時之多仁恩、蠻 陬夷落為之少事、虜陣戎庭為之不虞、當于斯時、弟子苟資祖考之餘業、謬居俘囚之上頭、出羽・陸奥之土俗、如従風草、粛愼把婁之海蠻、類向陽葵、垂拱寧息三 十餘年、然間時享歳貢之勤、職業無失、羽毛歯皮之贄、参期無違、因茲乾憐頻降、遠優奉國之節、天恩無改、己過杖郷之齢、雖知運命之在天、争忘忠貞之報國、 憶其報謝、不如修善、是以調貢職之羨餘、抛財幣之涓露、占吉土而建堂塔、冶眞金而顯佛経、経蔵・鐘樓・大門・大垣、依高築山、就窪穿池、龍虎協宜、即之四神具足之地也、蠻夷歸善、豈非諸佛摩頂之場乎、又設萬燈曾供十方尊、薫修定遍法界、素意盍成悉地.
인연이 닿아 이 제자(기요히라)는 동이의 원추가 되어, 요행히도 성대의 전쟁 없는 삶을 만나 장수하며 밝은 시대의 인의를 누려왔습니다. 이곳 오랑캐의 마을에서는 싸움도 적고, 포로를 이주시킨 땅이나 전쟁터였던 곳이나 잘 다스려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시대에 나는 분에 맞지 않게 조상이 남긴 사업을 계승하게 되었고, 어쩌다 부수의 상두 자리에 앉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데와나 무쓰의 백성들의 마음이라고 하는 것은 바람에 풀이 나부끼듯 순종하고 있습니다. 숙신이나 읍루 같은 해외의 오랑캐들 또한 태양을 향하는 해바라기처럼 잘 따르고 있습니다. 힘 닿는 대로 다스리기를 30년 이상, 그동안의 시간을 누리면서, 해마다 조세를 납부하기에 힘써 왔습니다. 생업을 잃지도 않았고, 새의 날개나 모피, 짐승의 송곳니를 바치는 일도 게을리하지 않았습니다. 이로 인해 여러 번 두터운 정을 베풀어 주셔서 먼 도읍지에서 나라를 위해 힘쓴 보상을 받았고, 그 은혜에 감사하지 않은 날이 하루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이미 '장향의 나이'[14]를 지나 버렸습니다. 사람의 운명은 하늘에 달린 것이기는 합니다만, 어찌 충의와 정절의 나라로 나아가는 마음을 잊은 적이 있으리까. 주신 은혜에 보답할 것을 생각하면 선행을 쌓는 것 외에는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에 조세로 공을 세우고 남은 것을 조사하여 남은 재화를 가려서 길지를 점쳐 당탑을 세우고 순금을 녹여 불경을 베끼게 한 것입니다. 경장, 종루, 대문, 큰 울타리 등을 지어 높은 곳에는 산을 쌓고, 구덩이에는 연못을 팠습니다. 이렇게 히라이즈미 땅은 용과 범이 뜻대로 이룬다는 '사신구족의 땅'이 되었습니다. 에미시도 불법의 선함에 귀의하게 되니 바로 이 땅은 제불(諸佛)을 예배하는 영지라고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또 만등회(萬燈曾)를 마련하여 시방세계의 세존들을 공양하고 있습니다. 옷에 스민 향내가 널리 법계에 정착하여, 이 나의 예전부터의 생각이 틀림없이 보통 대지를 덮을 것입니다. #
인연이 닿아 이 제자(기요히라)는 동이의 원추가 되어, 요행히도 성대의 전쟁 없는 삶을 만나 장수하며 밝은 시대의 인의를 누려왔습니다. 이곳 오랑캐의 마을에서는 싸움도 적고, 포로를 이주시킨 땅이나 전쟁터였던 곳이나 잘 다스려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시대에 나는 분에 맞지 않게 조상이 남긴 사업을 계승하게 되었고, 어쩌다 부수의 상두 자리에 앉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데와나 무쓰의 백성들의 마음이라고 하는 것은 바람에 풀이 나부끼듯 순종하고 있습니다. 숙신이나 읍루 같은 해외의 오랑캐들 또한 태양을 향하는 해바라기처럼 잘 따르고 있습니다. 힘 닿는 대로 다스리기를 30년 이상, 그동안의 시간을 누리면서, 해마다 조세를 납부하기에 힘써 왔습니다. 생업을 잃지도 않았고, 새의 날개나 모피, 짐승의 송곳니를 바치는 일도 게을리하지 않았습니다. 이로 인해 여러 번 두터운 정을 베풀어 주셔서 먼 도읍지에서 나라를 위해 힘쓴 보상을 받았고, 그 은혜에 감사하지 않은 날이 하루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이미 '장향의 나이'[14]를 지나 버렸습니다. 사람의 운명은 하늘에 달린 것이기는 합니다만, 어찌 충의와 정절의 나라로 나아가는 마음을 잊은 적이 있으리까. 주신 은혜에 보답할 것을 생각하면 선행을 쌓는 것 외에는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에 조세로 공을 세우고 남은 것을 조사하여 남은 재화를 가려서 길지를 점쳐 당탑을 세우고 순금을 녹여 불경을 베끼게 한 것입니다. 경장, 종루, 대문, 큰 울타리 등을 지어 높은 곳에는 산을 쌓고, 구덩이에는 연못을 팠습니다. 이렇게 히라이즈미 땅은 용과 범이 뜻대로 이룬다는 '사신구족의 땅'이 되었습니다. 에미시도 불법의 선함에 귀의하게 되니 바로 이 땅은 제불(諸佛)을 예배하는 영지라고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또 만등회(萬燈曾)를 마련하여 시방세계의 세존들을 공양하고 있습니다. 옷에 스민 향내가 널리 법계에 정착하여, 이 나의 예전부터의 생각이 틀림없이 보통 대지를 덮을 것입니다. #
주손지의 금당격인 곤지키도(金色堂, 금색당)[15]의 낙성식이 있고 그 이듬해에 기요히라는 73세의 나이로 사망했는데, 그의 시신은 주손지 곤지키도의 수미단(불단) 아래에 미라 처리되어 안치되었다. 이후 기요히라의 아들 모토히라와 손자 히데히라의 유해도 미라 처리되어 수미단에 안치되었는데, 시신을 미라로 처리하는 것은 일본 열도 내에서도 아이누들의 매장 방식과 유사하다는 것이 알려져 있다. 기요히라 자신도 스스로를 아즈마에비스(東夷, 동이)의 원추(遠酋),[16] 부수[17]의 우두머리(上頭)[18]로 표현했다. 정황상 오슈 후지와라씨는 현지 에미시 호족들과 통혼하며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도호쿠 지방에서는 금과 명마가 산출되었기 때문에 이를 조정과 셋칸케(攝關家, 섭관가)에 바치고, 오슈 후지와라씨는 번영을 누렸는데, 오슈의 중심지 히라이즈미는 교토에 버금가는 도시였다고 여겨진다. 특히 히라이즈미의 주손지 같은 경우, 내부 곤지키도를 보면 이름인 곤지키도(금색당)에 걸맞게 온통 금박을 입히고 나전칠기로 내부를 화려하게 꾸며 놓아 오슈 후지와라 일문이 가졌던 권력과 재력 그리고 문화 수준을 보여주는 상징물로 평가되며, 심지어 유명한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에서 "극동의 지팡구라는 나라는 황금이 넘쳐나서 마룻바닥에 황금을 깐 것은 물론 지붕까지도 황금으로 올린다더라"라는 소문의 진원지가 사실 히라이즈미의 주손지 곤지키도가 아니었겠느냐는 주장도 나오기도 한다. #
2.2. 후지와라노 모토히라
후지와라노 기요히라는 그의 생에나 사후에나 다시는 오슈 땅에 전란의 참상이 없기를 바랬지만, 당장 기요히라 사후 아들인 제2대 당주 모토히라(基衡, 1105~1157) 때부터 그러한 기요히라의 바램은 깨졌다. 모토히라는 기요히라의 차남으로, 이복 형인 고레쓰네(惟常)[19]와의 항쟁으로 고레쓰네를 제치고 오슈 후지와라의 당주가 되었다. 모토히라가 먼저 고레쓰네의 저택을 습격하자 고레쓰네는 가족을 거느리고 작은 배로 에치고로 가서 다른 형제의 도움을 빌어 모토히라에게 맞서려 했지만, 하필 역풍이 불어 배가 출발지로 돌아왔고, 앞서 육로로 모토히라가 보냈던 추격군에게 붙잡혀 그의 자식들과 함께 처형되고 말았다는 것이다.미나모토노 모로토키(源師時)의 일기 《조슈기(長秋記)》 다이지(大治) 5년(1130년) 6월 8일조에는 후지와라노 기요히라의 전처[20]라는 여성이 교토에서 게비이시(検非違使) 미나모토노 요시나리(源義成)와 재혼하였으며, 교토 곳곳에서 재물을 뿌리며 이 고레쓰네-모토히라 형제간의 항쟁을 교토 사람들에게 이야기하고 다녔다고 나온다. 어쩌면 이 기요히라의 전처는 고레쓰네를 지지해서 고레쓰네가 이복 동생 모토히라에게 쫓겨나고 죽임을 당한 것에 대해 교토 사람들에게 호소해 지지를 얻어 보려고 한 것인지도 모르지만, 정작 그의 활동에 교토 사람들은 시큰둥했다고.
후지와라노 모토히라는 무쓰노카미 후지와라노 모로쓰나(藤原師綱)의 후임으로 고지(康治) 2년(1143년)에 무쓰에 부임해 온 후지와라노 모토나리(藤原基成, 1120~?)와 사돈을 맺고, 조정에 공물을 보내며 조정에서 파견해 오는 지방관을 대부분 받아들인다. 이는 전임 무쓰노카미 후지와라노 모로쓰나와의 충돌에서 얻은 교훈이었다. 고지 원년(1142년)에 부임한 무쓰노카미 후지와라노 모로쓰나가 현지 장원에 대한 검주(토지 조사)를 단행하려 들자 모토히라는 무력시위까지 벌여서 막으려 했지만, 이 과정에서 무력 시위의 선두에 섰던 자신의 가신 사토 스에하루(佐藤季治, ?~1142)[21]를 구명하는 데 실패했다.
후지와라노 모토나리의 딸과 아들 히데히라의 혼사도 모로쓰나와의 충돌 조정으로부터 파견되어 오는 지방관과의 관계를 유지할 필요가 있음을 느낀 결과물이었다. 후지와라노 모토나리는 당시 후지와라 셋칸케를 제치고 권력을 장악하여 인세이를 행하던 시라카와인(白河院)의 근신(近臣)이기도 했기에, 모토나리와의 혼사로 맺어진 인맥으로 조정에 로비를 넣어서 조정에서 이 지역으로 보내는 지방관들 거의가 오슈 후지와라씨와 혈연적으로 혹은 지연으로 얽혀있는 사람들로 대체하는 데 성공했다.
오슈 후지와라씨 또한 지방의 다른 무사들처럼 현지 셋칸케 소유의 장원을 관리하고, 독자적인 무사단을 키우며 반 독립적인 지위를 유지했다. 히데히라의 시대에 오슈 후지와라씨의 군세는 무쓰 · 데와 두 구니를 합쳐 '17만 기(騎)'에 달했다고 한다. 또한 사다이진(左大臣, 좌대신) 후지와라노 요리나가(藤原賴長, 1120 ~ 1156)[22]가 오슈 현지에 있었던 셋칸케 소유의 장원 12곳 가운데 요리나가 자신이 상속받은 장원의 연공(年貢)을 늘릴 것을 요구해 온 것에 대해서 5년 동안 공방을 벌인 끝에 당초 요리나가가 요구했던 양보다 대폭 줄인 연공만을 바치는 것으로 문제의 타결을 보는 데 성공했고, 요리나가는 이에 분개했다고 한다.
흥미로운 것은 후지와라노 요리나가 자신의 일기인 《다이키(台記)》에 이 사건을 기록했는데, 분개하는 요리나가 옆에서 나리스케(成佐)라는 가신이 "원래 흉노들은 예의를 모르는 족속들입니다. 마님께서 너그러이 넘어가시지요"라고 달래는 장면이 나온다는 것이다. 오슈 후지와라씨를 야만족인 흉노라 비하할 정도로 후지와라 본가와 오슈 간 사이가 멀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일화이다.
2.3. 후지와라노 히데히라
제3대 당주 후지와라노 히데히라(藤原秀衡, 1122~1187)의 대에 이르른 가오(嘉應)[23] 2년(1170년) 5월 25일, 히데히라가 진주후쇼군(鎭守府將軍, 진수부장군)의 지위를 얻게 되면서 오슈 후지와라씨는 전성기를 맞이하게 되었다.후지와라노 히데히라가 진수부장군으로 임명된 것은 당시 교토를 장악하고 있었던 타이라노 키요모리의 헤이케 정권이 오슈 후지와라씨를 포섭하기 위한 정치적 안배였는데, 헤이케 타도를 외치며 도고쿠 각지에서 미나모토노 요리토모·미나모토노 요시나카 등 카와치 겐지 세력이 거병하자 다시금 요와(養和)[24] 원년(1181년) 8월 25일, 후지와라노 히데히라를 종5위상 무쓰노카미로 서임했다.
당시 조정의 구교였던 구조 가네자네(九條兼實, 1149~1207)는 히데히라에 대한 진주후쇼군 임명에 대해 자신의 일기 《교쿠요》(玉葉)에 "오슈의 이적에게 북쪽의 이적(에미시)을 막는 진주후쇼군의 자리를 맡기다니, 난세의 시작이 될 일", "천하의 수치가 어디 이같을 수 있으랴, 슬프고도 슬프구나"라는 한탄이 섞인 말을 남겼고, 산기(參議) 요시다 쓰네후사(吉田經房, 1143~1200)도 "사람으로서 한탄스러워 차마 기록할 수도 없다"고 자신의 일기인 《깃키》(吉記)에 적었다. 한마디로 "야만족 오랑캐를 막는 무관 자리를 그 야만족 오랑캐에게 준다는 게 말이 되냐"라는 건데, 가만히 보면 기요히라에서 모토히라·히데히라까지 오슈 후지와라씨 3대 당주 모두가 '이적' · '오랑캐' 등으로 자처하거나 지칭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다만 오슈 후지와라씨가 그저 헤이케의 뜻대로 움직인 것은 아니어서, 겐페이 전쟁 기간 동안 오슈 후지와라씨는 철저히 중립을 지켰다. 겐지를 견제하기 위해서 관위를 미끼로 자신들을 끌어들이려는 헤이케의 의도를 히데히라는 훤히 꿰뚫고 있었고, 헤이케의 감시를 받고 있었던 샤나오(훗날의 미나모토노 요시츠네)가 히라이즈미로 오자 그를 숨겨주었으며, 미나모토노 요시나카나 헤이케의 군사 동원 요청에도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으면서 구리가라 고개에서 헤이케에 승리한 미나모토노 요시나카에게 축하한다면서 명마 두 필을 보내거나, 헤이케에 의해 불타버린 도다이지(東大寺, 동대사)의 재건과 대불 도금을 위해 벌인 모금에서 미나모토노 요리토모보다 5배나 많은 황금 5천 냥을 기부하는 등 탁월한 수완을 발휘했다.
특히 교토의 구라마데라에 구금되어 있다가 달아나 히라이즈미로 도망쳐 온 미나모토노 요시츠네를 거두어 숨겨주고, 헤이케로부터 보호해 준 것도 제3대 당주 후지와라노 히데히라의 뜻이었는데, 요리토모가 거병한 뒤에 히데히라 자신의 반대도 무릅쓰고 몰래 히라이즈미를 빠져나가려는 요시츠네를 어쩔 수 없이 보내주면서도 자신의 가신인 사토 쓰구노부(佐藤継信, 1158~1185) · 타타노부(佐藤忠信, 1153~1186) 형제를 붙여주기도 했다.
나중에 형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와 대립하게 된 미나모토노 요시츠네가 히라이즈미로 도망쳐 왔을 때도 그를 다시 한 번 받아주었고, 요리토모로부터 숨겨 주기까지 했다. 죽기 직전까지 야스히라 등 자신의 아들들에게 "절대로 요시츠네를 요리토모에게 넘겨주지 말고, 그를 장군으로 추대하며[25] 형제가 단합해 요리토모와 맞서 히라이즈미를 지켜야 한다"고 유언을 남겼을 정도였다.
헤이케를 멸망시킨 시점에서 이미 다른 상대가 없게 된 요리토모에게 거슬려 쫓기게 된 요시츠네를 받아준 것은 히데히라 자신이 그만큼 정세를 읽는 눈이 탁월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헤이케가 몰락한 시점에서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의 눈은 당연히 가마쿠라의 배후에 위치한 오슈 후지와라씨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고, 그 점을 히데히라는 미리 간파하고 있었던 것이다.[26] 오슈 후지와라씨는 도호쿠의 지방 정권에 지나지 않았지만 나중에 요리토모가 세운 가마쿠라 막부도 간토의 지방 정권에 지나지 않았으니 큰 차이는 없었던 셈이었고, 그렇기에 동격에 가까운 상대로서[27] 위협을 느끼기는 충분했던 것이다. 요리토모가 진수부장군을 자칭하는 후지와라씨에 라이벌 의식을 느껴서 막부 정이대장군의 지위를 요구하기도 했다는 설도 있을 정도이다.
2.4. 후지와라노 야스히라
히데히라가 죽은 뒤, 차기 당주가 된 후지와라노 야스히라(藤原泰衡)는 "요시츠네를 내놓든지 아니면 멸망할 것인지"를 결정하라고 으름장을 놓는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에 굴복해, 끝내 아버지 히데히라의 유언도 어기고 미나모토노 요시츠네를 급습해 자결시키는 방법으로 살해하고 그 목을 보냈다. 하지만 요리토모는 "난 요시츠네를 살려서 잡아오라고 했지, 죽이라고 한 적은 없는데? 누가 니 마음대로 내 가신을 함부로 죽이래?"라며 곧 오슈를 공격했다.요리토모가 지휘하는 20만 기(騎)의 공격에 오슈는 초토화되었으며[28] 히라이즈미는 변변한 저항 한 번 하지 못하고 가마쿠라군에 함락되었다. 후지와라노 야스히라는 가마쿠라군이 히라이즈미로 들이닥치기 전에 히라이즈미의 저택에 불을 지르고 북쪽으로 도주했다. [29] 요인들은 포로로 잡혀와서 참수되었고, 영지는 몰수당하는 참사를 겪으며 오슈 후지와라씨의 영화는 종말을 맞이했다.[30]
북쪽으로 달아난 후지와라노 야스히라는 "요시츠네를 보호하고 숨겨준 것은 제가 아니라 아버지인데, 이제 와서라도 당신의 명령을 받들어 요시츠네를 처리한 저한테 왜 이러십니까?"라며 요리토모에게 목숨을 구걸하면서 북쪽으로 달아나다가 가신의 배신으로 죽임을 당했고, 동북의 영주 오슈 후지와라씨는 멸망했다.
히데히라의 동생이었던 후지와라노 히데히사(藤原秀栄, ?~?)는 토사미나토(十三湊)[31]에 이주하여 그의 후손들이 명맥을 이어갔으나, 1229년에 안도 사다스에(安東貞季, ?~?)[32]의 공격을 받고 패배하여 멸망했다.
3. 매체에서의 오슈 후지와라
- 아라키 히로히코가 히라이즈미 홍보를 위해 그린 일러스트가 존재한다.# 마침 히라이즈미가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시점이 동일본 대지진과 맞물려 있었기 때문에, 이와테현에서는 히라이즈미 건설의 이념을 동일본 대지진 피해의 재건에 투영하고자 한다는 결의로 <도호쿠 부흥 히라이즈미 선언>을 발표하는 동시에 아라키로부터[33] 해당 선언의 일러스트를 받았다.
- <징기스칸 4>의 1번 시나리오에서 가마쿠라 정권과 함께 일본에 있는 두 세력 중 하나로 나온다. 휘하에 최상급 장수인 미나모토 요시츠네와 무사시보 벤케이가 있고 이들의 충성도가 낮기 때문에, 고려로 플레이하는 경우 최충헌으로 이 둘을 빼 오는 플레이가 고려 플레이의 필승법이다. 두 장수가 거의 이 게임의 여포급으로 강해서 직접 플레이하면 난이도가 쉽지만 ai가 조종하면 아무래도 국력이 딸려서 가만 놔두면 거의 가마쿠라 정권에게 멸망한다.
- <토탈 워: 쇼군2/사무라이의 태동>에서 히라이즈미 후지와라라는 이름으로 미나모토, 다이라와 함께 플레이어블 세력으로 등장한다.
[1] 오슈를 비롯한 도호쿠 북부는 아이누 계통 종족인 에미시가 별개의 세력을 이루었던 지역이다. 히라이즈미 등 이와테 중남부 지역은 9세기 경 야마토 정권의 영토에 편입되었고, 이와테, 아키타 북부와 아오모리 일대는 11세기 경에 편입되었다. 따라서 오슈 후지와라 정권의 성립 당시 히라이즈미 일대는 일본령이 된지 만 300년 정도 지난 변방이자 여전히 에미시 세력이 잔존하는 문명의 변경지였다.[2] 통칭 와타리노 곤노다이후(亘理權大夫). 와타리는 지금의 일본 미야기현 남동부 아부쿠마 강 하구의 지명이다.[3] 일본의 야마토 왕권에 투항한 에미시 계통으로 알려져 있다. 조정에 항복한 에미시를 후슈(俘囚, 부수)라고 했는데, 이들은 일본 각지에 사민되어 조세나 부역을 면제받는 대신 현지 군사력으로 동원되었다.[4] 무가 가와치 겐지의 초대 당주 미나모토노 요리노부(賴信, 968 ~ 1048)의 아들로 이 사람의 후손이 바로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와 미나모토노 요시츠네였다.[5] 당시 무츠(오슈) 아베 가문의 당주는 아베노 요리토키와 그 아들 아베노 사다토가 맡고 있었다. 요리토키의 딸이자 사다토의 여동생이 후지와라노 기요히라의 생모였다. 아베노 사다토는 니토베 이나조가 쓴 《무사도》에도 그 이름이 잠깐 언급된다.[6] 후지와라노 츠네키요는 원래 무쓰 고쿠가에 속한 재청관인이었으나 고쿠가를 배신하고, 아베씨에 붙었다고 해서 일부러 이를 깬 칼로 톱질하듯이 목을 베어 죽였다고 한다.[7] 단 원래 기요히라도, 그의 어머니도 모두 죽이려고 했던 것을, 기요하라노 다케사다가 죽일 바에 전리품으로서 달라고 청함으로써 목숨을 건질 수 있었던 것이었다. 그리고 의외로 다케사다는 나름 공평한 인물이라 적의 자식인 기요히라를 자기 자식들과 차별하지 않았다.[8] 미나모토노 요리요시의 아들로 흔히 하치만타로 요시이에(八幡太郞義家)로 알려진 인물이다.[9] 후3년의 역은 전9년의 역과는 달리 교토의 조정으로부터 공적인 전투로 인정받지 못했기 때문에 요시이에는 자신의 개인 연줄로 도고쿠 무사들을 동원해야 했고, 조정에서 후3년의 역이 요시이에 개인의 사적인 전투라 해서 은상을 줄 수 없다고 통보했을 때 개인 사재를 털어서 무사들에게 은상을 주었기 때문에, 도고쿠 무사단 사이에서 요시이에와 가와치 겐지 일문의 위상을 크게 높이는 데 기여했다.[10] 호리카와 덴노 시절 연호이다.[11] 모월사, 이와테현 히라이즈미초에 있는 천태종 절[12] 무량광원, 이와테현 히라이즈미초에 있는 정토종 절이었다. 오슈 후지와라씨의 멸망 이후에도 남았지만 화재로 소실되었고 소나무 숲과 연못만이 남아 있다. 1952년에 처음 발굴하고, 2012년에 한 번 더 발굴사업을 진행하여 거대한 사찰이었음이 밝혀졌다.[13] 후지와라노 모토히라가 지은 사찰이다.[14] 예순 살.[15] 이와테현 니시와이군 히라이즈미초에 있는 천태종 도호쿠 대본산 사찰인 주손지 안에 있다.[16] 東夷之遠酋, 동이지원추. 동쪽 오랑캐의 족장.[17] 조정에 복속한 에미시 일족을 이르는 말. 포로를 뜻하는 게 아니다. 기요하라가 츄손지에 자신을 이렇게 표현한 발문을 올릴 때에 존재한 요 왕조에서 여진족을 통제력 수준에 따라 숙여진과 생여진으로 구분지은 것처럼 이 당시 일본 조정도 복속한 에미시는 후슈(俘囚, 부수), 복속하지 않은 에미시는 이후(夷俘, 이부)라고 불렀다.[18] 俘囚之上頭.[19] 이에키요(家清) 또는 고레히라(惟衡)라고도 한다.[20] 후지와라노 기요히라의 정실인 기타카타 다이라 씨(北方平氏)를 말한다. 기존에는 모토히라의 생모가 기타가타 다이라 씨라고 여겨져 왔는데, 실제로는 아베 씨(安倍氏) 또는 시노부 사토 씨(信夫佐藤氏)라고 여겨진다. 고레쓰네의 생모는 기요하라 씨로 고레쓰네와 모토히라는 이복 형제인 것이다.[21] 오슈에서 이복형 요리토모를 찾아서 도고쿠로 간 미나모토노 요시츠네를 따랐던 게닌 사토 쓰구노부(佐藤継信) ・ 사토 다다노부(佐藤忠信) 형제가 이 사람의 손자라는 설도 있다. 모토히라의 생모가 시노부 사토 씨라는 설이 맞다면 스에하루는 모토히라의 가신인 동시에 외척인 셈이다.[22] 호겐의 난 당시 스토쿠 천황 편에 섰다가 패배한 후, 살해당했다.[23] 다카쿠라 덴노의 연호[24] 안토쿠 덴노 시절 연호[25] 요시츠네 개인이 가진 뛰어난 군사적 재능은 물론이고, 요시츠네도 요리토모처럼 조정으로부터 게비이시나 이요노카미 관직을 받은 인물이고, 요리토모와 같은 가와치 겐지 도료의 피를 잇고 있었으므로 그를 내세우면 요리토모와 대립할 명분을 세울 수도 있었다.[26] 안타깝게도 히데히라의 안목은 아들 야스히라에게까지 전수되지 못했다.[27] 격 자체는 정이대장군인 요리토모가 진수부장군인 오슈 후지와라씨보다 조금 더 높다.[28] 아츠카시 산에서 야스히라의 이복형 구니히라가 군사를 이끌고 항전했지만 패배했고, 이후 이렇다 할 저항도 없었다.[29] 그나마 주손지 등의 중요 사찰은 화마를 피했고, 일본 황실과도 연줄이 있다고 해서 요리토모가 특별히 보호를 명령했으므로 무사했다.[30] 혹자는 이를 딱 982년 전의 요동의 리버스 버전으로 비유하기도 한다. 공손강은 조조가 요동을 밀어버릴 생각까진 없다는 걸 눈치챘기 때문에 원상·원희를 조조에게 넙죽 바쳤지만, 히데히라는 요리모토가 조조와 달리 히라이즈미를 놔둘 생각이 아예 없다는 걸 짐작했으므로 조정의 추토 명령에도 요시츠네를 생명줄처럼 붙들려 한 것이다. 대놓고 관문을 넘어오는데도 요시츠네 같은 전력을 내쳐버렸으니 요리토모가 야스히라를 얼마나 한심하게 여겼을 지 알 만하다.[31] 현재의 도호쿠 지방의 아오모리 현 고쇼가와라시의 일부.[32] 안도 씨는 安藤氏라고도 하는데, 아베노 사다토의 먼 후손이라는 설도 있다. 즉 오슈(무쓰) 아베씨 후손으로 후슈(에미시) 일족인 셈이다. 일본에서도 안도 씨가 에미시계다 아니다를 놓고 설이 나뉘지만 대체로 아니라는 쪽이 더 무게가 실린다. 분명한 것은 안도 씨는 가마쿠라 막부로부터 에조간레이(蝦夷管領) 즉 북방의 에미시를 관리하고 교역에 관여하는 직책을 받아 세습했다는 것이다.[33] 아라키 히로히코 역시 도호쿠(센다이) 출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