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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11 16:46:45

통리기무아문


파일:조선 어기 문장.svg 개화기 조선의 개혁 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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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변사)
삼군부
통리기무아문
삼군부 기무처
감생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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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리군국사무아문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
내무부
교정청 내무아문 외무아문
군국기무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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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상세
2.1. 설치 이전2.2. 구성2.3. 역할
3. 폐지

1. 개요

통리기무아문()은 조선 말 개화 정책을 추진하기 위해 설치된 정1품아문 관청이다. 당시 청나라의 총리각국사무아문(總理各國事務衙門)을 참고하여 설치하였다.

2. 상세

2.1. 설치 이전

통리기무아문이 설치되던 시기의 국제 정세는 날이 다르게 변화해가고 있었다. 조선 역시 일본과 최초의 근대적 조약인 강화도 조약을 맺고 수신사를 파견하는 등 이러한 변화의 흐름에서 예외는 아니었다. 조선에서 본격적인 개화의 흐름은 1880년대부터 시작되었는데, 이에 맞추어 변화를 이끌고 근대적 내정 사무를 관장할 기구로 통리기무아문이 설치되었다.

정확한 설치 날짜는 1880년(고종 17) 12월 21일#이다. 참고로 고종이 외교와 군사 업무를 담당하는 새로운 아문의 설치를 명한 것은 같은 해 12월 5일이었다.

통리기무아문이 설치되면서 사실상 유명무실해진 삼군부는 결국 1882년(고종 19) 6월경 완전히 폐지된다.

2.2. 구성[1]

2.3. 역할

통리기무아문은 군국기무(軍國機務)를 총괄하는 역할을 맡았는데, 여기서 군국기무란 국가의 군사 업무와 일반 국정#을 뜻한다. 즉 통리기무아문은 당시 조선의 정치 전반에 대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실제 통리기무아문은 대신(大臣) 중에서 총리(總理)를 마련하고 통제하거나 정무를 보는 것을 의정부와 같게 할 정도로 막강한 권위를 자랑하였다.

3. 폐지

1882년 7월 임오군란이 발발하여 개화정책을 뒤엎는 와중에 폐지되었고 삼군부가 부활하였다. 그러나 흥선대원군이 실각한 이후 삼군부는 동년 12월에 폐지되었다.
[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