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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21 17:31:22

동학 농민 혁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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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한제국기의 사건 포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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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c29f6d><colcolor=#000> 동학 농민 혁명
東學農民革命
Donghak Peasant Revolution[1]
파일:동학농민혁명 사발통문.jpg
동학 농민 혁명의 시작 사발통문
시기 1894년 음력 3월 20일 ~ 11월 27일
장소 조선 전라도, 충청도, 강원도, 황해도
원인 지배층의 부패 및 수탈에 대한 반발심
교전 세력 파일:조선 국기(1893).svg 조선
파일:청나라 국기.svg 청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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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휘관 파일:조선 국기(1893).svg 고종 (국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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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일본 제국 국기.svg 야마가타 아리토모
파일:일본 제국 국기.svg 이토 스케유키
파일:일본 제국 국기.svg 노기 마레스케
병력 3,000명~50,000명 남: 15,000명~300,000명
북: 10,000~300,000명
500명~3,000명
피해 6,000명 불명 불명
결과 조일 연합군의 농민군 진압
영향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
청일전쟁 발발

1. 개요2. 배경
2.1. 개항 이후 사회 변화2.2. 교조 신원 운동
3. 전개
3.1. 고부 민란
3.1.1. 호남의 탐관오리3.1.2. 고부 봉기3.1.3. 봉기 수습
3.2. 1차 봉기
3.2.1. 이용태의 만행과 봉기 준비3.2.2. 백산대회3.2.3. 황토현 전투3.2.4. 장성 황룡촌 전투3.2.5. 전주성 함락3.2.6. 완산 전투
3.3. 고종의 청군 파병 요청과 외세 개입3.4. 전주 화약3.5. 2차 봉기
3.5.1.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청일전쟁3.5.2. 농민군의 재봉기3.5.3. 조정과 일본의 진압태세3.5.4. 우금치 전투3.5.5. 청주성 전투
3.6. 혁명의 종말
3.6.1. 연산 전투3.6.2. 논산 전투3.6.3. 원평 전투3.6.4. 태인 전투3.6.5. 대둔산 전투3.6.6. 농민군의 최후
4. 평가 및 영향
4.1. 명칭 관련 논쟁
5. 기타
5.1. 세계기록유산 등재5.2. 관련 인물들의 이후 행보5.3. 기념 사업
5.3.1. 관련 단체/기관
5.4. 마지막 생존자5.5. 일본의 연구
6. 대중매체에서7. 관련 어록8. 관련 문서9.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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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894년(고종 31) 동학(現 천도교의 전신) 세력이 주축이 되어 일으킨 민란. '동학농민운동', '동학농민전쟁', '갑오농민전쟁', '동학란()', '동학 민란'으로도 불린다.

조선의 양반이자 사상가인 최제우가 창시한 동학의 개념은 인간의 존엄성 존중을 바탕으로 하는데 당시 대부분의 농민들은 조선 말기 순조 시대부터 시작된 세도정치탐관오리들의 수탈에 크게 시달리고 있었던 상황이었기에 많은 사람들이 새로운 세계를 찾아나서듯 자연스럽게 동학에 매료될 수밖에 없었다. 기본적으로 국가와 관리들에 대한 대중적인 불신, 농민들의 분노로 인해 발생한 혁명이다.

표현의 자유가 제한되었던 왕정하에서 농민들이 집회와 결사의 자유를 주장하는 것은, 사실상 목숨을 걸고 죽을 각오를 해야 되는 큰일이었다. 그렇기에 조선 조정에서는 이러한 움직임을 반란으로 여겨 상국인 청나라에 진압을 요청했고 이 과정에서 톈진 조약을 근거로 일본 제국군까지 개입하여 혁명을 진압했다. 혁명 진압 전후로 청일전쟁의 발발, 청나라의 완전한 몰락과 임오군란으로 이후 변질된 중화 질서 붕괴[2], 대한제국 수립과 한국의 친러화[3], 일본의 아시아 패권 장악과 제국주의 본격화로 이어져 한국사는 물론이고 세계사의 흐름에도 상당한 영향력을 끼친 사건이다.[4]

오늘날 대한민국에서 높게 평가되는 역사적인 사건이며, 그 역사적 중요성을 국제적으로도 인정받아 2023년 5월 18일, 동학 농민 혁명 기록물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다.[5]

2. 배경

2.1. 개항 이후 사회 변화

1876년 강화도 조약 이후 조선은 서양 열강들과 통상조약을 맺어 문호를 개방했지만 불평등조약이었기에 조선의 이권이 침탈당하고 내륙까지 외국 상인들이 드나드는 처지가 된다. 이런 상황에서 지주들은 쌀을 외국에 팔아 이득을 얻었지만 소작농들은 생계조차 위협받을 정도로 고통받았다. 또한 조선 상인들과 객주, 여각 등 포구의 상인들도 침투해오는 일본, 중국 상인들에게 밀려 몰락하였다. 또한 일본화폐의 유통확대, 정부의 화폐정책 실패, 과중한 세금은 안 그래도 고통스러운 민중들을 더욱 옥죄었다.

이런 상황에서 농민층의 항쟁도 격화되어 갔다. 19세기 들어 농민들은 소지(所志)를 작성하여 수령에게 억울한 일을 해결해 줄 것을 요구하는 정소운동(呈訴運動)을 벌였다. 정소운동은 문자를 깨우친 농민적 지식인층이 형성되었기에 이루어질 수 있었던 것으로, 훗날 동학 농민 혁명의 지도자인 전봉준도 농민들의 소지를 대신 작성해주는 일을 하고 있었다. 이들 지식인층은 농민봉기의 지도자가 되기도 했다. 지식인들 외에도 농민들의 민회나 리회 등의 농민집회가 각 고을마다 있었고 두레 같은 농민공동체도 있어 농민들의 조직 역량 또한 발전해갔다.

농민봉기 이외에 처음부터 무장봉기를 계획한 반란도 빈발했다. 1869년 광양에서 민회행(閔晦行)이 일으킨 광양란, 1871년 이필제가 일으킨 이필제의 난이 좋은 예시다. 또한 정감록 같은 도참비기는 반란의 사상적 근거가 되었으며 지식인층은 동학이나 도참비기에 의지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동학 농민 혁명은 이러한 흐름이 합쳐져 벌어진 거대한 사건이었다.

2.2. 교조 신원 운동

1860년, 수운 최제우동학을 창시했다. 도탄에 빠진 민중들은 최제우의 가르침에 이끌렸지만 최제우는 혹세무민을 이유로 1864년 처형당했다. 하지만 그의 제자인 최시형이 교단을 물려받아 동학의 지도체제를 확립하고 경전을 집필하는 등 동학의 기틀을 다졌다. 일시적으로 위축된 동학은 1880년대 충청도를 중심으로 교세가 확산되었으며 위협을 느낀 지배층들은 동학교도의 재산을 갈취하거나 체포하는 등 탄압을 이어나갔다.

동학교도들은 도망치거나 돈을 내고 풀려나는 등 소극적인 방법으로 저항했지만 1890년대가 되자 교조(敎祖) 최제우를 신원함으로써 정부의 인정을 받고 포교의 자유를 얻어내려 했다. 1892년 10월 17일 공주취회에서 모인 접주와 교도들은 10월 20일 충청감영에 교조신원을 요구하는 통문을 제출했는데, 이것이 최초의 교조 신원 운동이다. 동학교도들은 최제우의 신원과 함께 서학과 일본 상인들의 이권 침탈을 비판하는 글을 올렸다. 하지만 충청감사 조병식[6] 내 권한이 아니라고 답변한 뒤 동학을 뿌리뽑겠다는 명분으로 수령이 하는 수탈행위를 금한다는 감결(甘結)을[7] 수령들에게 내렸다. 이는 기만적인 조치였으나 동학교도들은 그러한 감결을 얻어냈다는 것만으로도 기뻐할 일이었다.

고무된 동학교도들은 이번에는 전라감영을 찾아갔다. 1892년 11월 2일 수천 명의 동학교도들이 전라도 삼례에 모인 가운데 전라감사 이경직(李耕稙)에게 교조 신원과 함께 포교의 자유를 인정해달라는 글을 올렸다. 또한 공주취회에서 했던 것처럼 동학은 윤리도 없는 분별도 없는 서학과 다르다고 주장하며 외세의 창궐을 경고하는 등 반외세 의식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전라감영은 침묵을 지켰고, 동학교도들이 독촉장을 보내서야 입을 열었다. 11월 9일 이경직은 동학교도들의 요구는 들어줄 수 없다는 짧은 답변을 내놨는데 동학교도들이 격분하자 이틀 뒤 동학 탄압을 빌미로 수탈행위를 하는 것을 금지한다는 감결을 내렸다. 그러자 동학 지도부는 해산을 명령했지만 상당수 교도들은 삼례에 남아있었고 21일에 되어서야 완전히 해산하였다.

동학교도들은 충청감사와 전라감사에서 "동학 탄압을 명분으로 수령들이 수탈행의를 하는 것을 금한다"는 공식적인 명령을 얻어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동학의 공인과 교조 신원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러자 교도들은 목표를 바꿔, 중앙 조정에게 직접 신원을 요청하기로 했다. 12월 6일 복합상소에[8] 대비해 충청도 보은에 도소를 설치했는데 각지에서 교도들이 몰려오자 출입을 제한해야 했다. 그러나 지도부 내부에서 복합상소에 대한 의견이 갈렸는데, 교주 최시형의 허가도 못 얻어냈고 상소의 성과도 알 수 없었으며 그 다음에 탄압이 이어질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동학 지도부는 상경하는 대신 조정에 소장을 올리는 식으로 타협했다. 상소장은 동학이 이단이 아님을 역설하는 부분과 전라도, 충청도 관리들의 탐학을 고발하며 조정의 공평한 조처를 요청하는 부분으로 나뉘어 있었다. 그러나 조정은 응답이 없었고 동학 지도부는 본격적으로 복합상소를 준비했다. 2월 11일 수많은 동학교도들의 광화문 앞에 가서 복소를 시작했다. 하지만 조정은 14일 집으로 돌아가면 원하는 대로 해주겠다는 짧은 답만 내두었고 동학 탄압을 멈추지 않았다.

1893년 3월 11일 충청도 보은에서 3만 명이 넘는 도인들이 모였다. 도인들은 평지에 성을 쌓고 척왜양창의(斥倭洋倡義)라는 깃발을 내걸며 통문을 붙였다. 3월 11일 자에 나온 보은 집회의 1차 통유문은 교조 신원과 사회 개혁을 위주로 하여 작성되었으나, 3월 16일에 2차로 나온 통유문은 척양척왜(斥洋斥倭)와 보국안민(輔國安民)을 앞에 내세웠다. 보은 군수 이중익(李重益)이 3월 16일 해산명령을 내렸지만 해산을 거부하고 더더욱 강력한 반외세 정서를 표출했다. 3월 22일 다시 해산명령이 내려졌지만 이번에도 거부하고 지방 수령들의 탐학을 비판하였다.

보은취회가 멈출 기미를 보이지 않자 조정은 3월 25일 조병식을 충청감사에서 파직하고 양호선무사에 어윤중을 임명하였으며 충청병사 홍계훈에게 병사 3백 명을 이끌고 집회가 열린 보은 장내리로 향하게 했다. 어윤중은 회유와 협박으로 도인들을 흔들었고 지도부는 해산을 약속하며 노약자와 어린이를 돌려보냈다. 4월 1일 어윤중이 공주영장, 충청감영 군관, 보은군수를 대동하고 찾아와 왕의 윤음을 읽은 뒤 퇴산을 명하자 도인들은 사흘 안에 해산을 약속했고 최시형, 손병희, 서병학 등은 다음날 밤 도망쳤다.

한편 보은취회와 함께 전라도 금구현 원평에서도 동학교인들의 집회가 열렸다. 1만여명에 달하는 도인들이 모였고 주도자는 전봉준이었다.

3. 전개

19세기 후반 지배층의 수탈과 외세의 경제 침탈에 시달리던 농민들 사이에서 동학은 큰 호응을 얻으면서 빠르게 퍼져 나갔다. 1894년 지배층의 폭정에 항거하여 '나랏일을 돕고 백성을 편안하게 한다'라는 보국안민(輔國安民)을 내세우며 동학 농민 운동이 일어났다. 동학 농민군은 황토현에서 전라 감영군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고 전주성까지 점령하였다. 이후 동학 농민군은 조정에 폐정 개혁안을 제시하고 각지에 자치 기구를 설치하여 개혁을 추진하여 나갔다.
독립기념관 공식 소개문
파일:동학농민군 1차 봉기.jpg
1차 봉기의 전개도
파일:동학농민군 2차 봉기.jpg
2차 봉기의 전개도

3.1. 고부 민란

파일:/image/032/2007/02/27/7b2723a.jpg

3.1.1. 호남의 탐관오리

예로부터 호남은 따뜻한 남쪽이며 넓은 평야가 있는 곡창 지대였으나 이러한 지리적, 경제적 이점으로 인하여 전라도민들은 지속적인 수탈의 대상이었다. 그 중에서 고부(현 정읍시 일부)는 드넓은 평야와 더불어 네 개의 포구가 있어 자체적으로 생산하는 곡식은 물론 외부에서 들어오는 곡식도 상당한 풍요로운 곳이었는데, 그 때문에 다른 지방보다 탐관오리의 학정(虐政)이 심했다.

1892년 고부군수로 부임한 조병갑은 이듬해부터 본색을 드러내어 백성들을 마구 쥐어짜기 시작했다. 이미 동진강으로 흘러들어가는 태인천과 정읍천에 농민들이 보를 쌓아두었건만 조병갑은 별 이상이 없는대도 농민들을 동원해서 동진강에 만석보를 축조하여 저수지를 조성하더니, 그 사용료를 거두어들여 무려 700여석을 벌었다. 또한 조금 살만한 집이 있으며 불효니 음행이니 하는 온갖 죄목을 씌워 2만 냥에 달하는 재물을 빼앗았다. 황무지를 개간하면 세금을 받지 않겠다고 약속해놓고 가을이 되면 세금을 매겼고, 농민들에 거두어들인 대동미를 착복하고 정부에는 나쁜 쌀을 사서 바치는 등 온갖 부정부패를 저질렀다. 그뿐이랴, 자기 아버지가 예전에 태인군수를 지냈다며 공덕비를 세운답시고 백성들에게 천여 냥에 달하는 돈을 거두어들였다.

여기에 엎친데 덮친 격으로, 호남균전사(均田使)[9] 김창석(金昌錫) 또한 탐관오리라서 농민들을 수탈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1893년 전라도에 가뭄이 들어 농사를 망친 농민들이 먹고살기 위해 고향을 떠나자 김창석은 면세를 약속하며 묵은 땅을 개간하도록 했지만, 약속을 어기고 추수를 하자마자 세금을 거두어갔다. 그러자 농민들은 농사를 짓기를 거부했지만 김창석은 그러든지 말든지 세금을 거두어갔다.

농민을 수탈하는 데 있어 전운사(轉運使)[10] 조필영(趙弼永)도 뒤지지 않았다. 조선은 오랫동안 조운선으로 세곡을 운반했지만, 1886년부터 전운국을 설치하고 외국의 기선을 도입하여 세곡을 운반했다. 그런데 1893년 공미 운수사업을 위해 이운사가 만들어지고 농민들에게 선박 수선비 및 파손비 등을 거두었다. 조필영은 불응하는 농민들을 잔인하게 고문하여 농민들의 원성을 샀다.

결국 더 이상 견디지 못한 고부 고을의 백성들은 글깨나 배웠다는 전봉준의 아버지인 전창혁을 대표로 삼아 탄원서를 제출하게 하였으나, 돌아오는 것은 곤장뿐이었다. 이로 인해 전창혁은 반죽음 상태로 돌아왔고, 보름이 채 안 되어 장독[11]이 올라 죽고 말았다. 이에 분노한 그의 아들 전봉준은 봉기를 계획하게 되었고[12] 주변 지역에서 가장 세력이 큰 무장 접주[13] 손화중[14]을 포섭하려 하였으나 손화중은 거절하였다.

당시의 전봉준 등의 계획은 '고부 관아를 점령하고 조병갑을 처형한다'뿐만 아니라 '전주부성을 점령하고 한양으로 상경한다'까지 매우 포괄적인 계획이었다. 이것이 그 유명한 사발통문으로, 1968년 12월, 사발통문에 서명한 송대화(宋大和)의 아들인 송후섭(宋後燮)의 집에서 발견되었다. 이 사발통문의 내용에서 알 수 있듯, 이전까지의 민란은 백성들이 아무리 분해도 수령은 왕의 대리인이라고 여겨 수령에게 모욕을 가해도 수령을 죽이지는 않는 분풀이였으나, 동학 농민 운동은 첫 봉기에서부터 '수령을 죽이고 전주까지 치고 올라간다' 고 하는 등 기존의 농민 봉기와 그 시작부터 크게 달랐다.

3.1.2. 고부 봉기

파일:고부관아터.jpg
고부 관아터(지금의 고부 초등학교)
그러나 조병갑익산으로 발령받아 유야무야되었는데 1894년 1월 9일 전라감사 김문현의 요청으로 조병갑의 발령이 취소되어 고부로 돌아왔다. 그러자 1월 11일 아침 고부의 백성 1천여 명이 말목장터에 모여 전봉준을 지도자로 추대하고 무리를 둘로 나누어 고부 관아로 쳐들어갔다. 조병갑은 홀로 전주 감영으로 도망쳤고, 농민들은 관아를 수월하게 접수한 뒤 아전들을 붙잡아 처벌하고 무기고에서 무기를 꺼냈다. 또한 조병갑이 거두어들인 양곡 1,400여석을 몰수하며 세곡을 주인에게 돌려주고 만석보를 허물었다.

이것이 바로 동학 혁명의 첫 신호탄이었는데 오랜 세월 동안 탐관오리들의 온갖 수탈과 부정부패를 일삼던 양반들에 의해 짓눌려 왔던 백성들의 울분과 분노가 한꺼번에 폭발하는 순간이었다.
파일:만석보_혁파_선정비.jpg
만석보 혁파 선정비
농민들은 한동안 읍내에 진을 치고 있다가 1월 17일 말목장터로 진을 옮기고, 노약자들을 돌려보내 장정만 남겨 민란 무리가 아닌 '농민군'을 구성하였다. 고부 봉기는 탐관오리의 학정에 분노한 농민들이 들고일어선 흔한 민란에 불과했지만 여기에 '제세안민(濟世安民)'의[15] 큰 뜻을 품은 혁명가 전봉준이 결합되자 조직적인 반란으로 비화된 것이다.

다만 대대적인 사회개혁을 꿈꿨던 전봉준과 달리 대다수 백성들은 조병갑의 폭정 때문에 일어섰기 때문에 전봉준과 농민들이 갈등하는 일도 있었다. 농민들은 창고의 곡식을 나눈 뒤 알아서 해산하려고 했지만 전봉준은 관아의 곡식을 먹었으니 죽을 죄에 해당한다며 같이 살 길을 찾자고 농민들을 설득해서 해산을 막았고, 전봉준은 조필영도 족치려 했지만 농민들은 그러다가 진짜 반란군이 된다며 해산하려고 했다. 전봉준은 이를 막기 위해 동장이나 집강 같은 향촌 자치기구를 활용했다.

또한 고부 민란은 우발적인 봉기였기 때문에 전봉준은 미처 거사 준비를 마치지 못하고 민란의 지도자가 되었다. 그래서 다른 고을과 연락 또는 협력이 이루어지지 않아 조병갑을 몰아냈지만 주변의 호응이 없어 고립된 상태였다. 따라서 이때까지만 해도 고부 봉기는 대규모 반란으로 번지지 않고 한 고을의 민란으로 남아 있었다.

3.1.3. 봉기 수습

김문현은 조병갑을 고부로 재부임시켰다가 민란이 터진 책임을 추궁당할까 두려워 은밀히 병사들을 보내 민란을 진압하려 했다. 전주감영의 군위 정석진과 부하 10여명이 농민군으로 위장하여 정탐에 나섰지만, 정체가 발각되는 바람에 농민군에게 살해당했다.

2월 15일 김문현이 올린 민란 보고가 조정에 들어갔고 의정부는 조병갑을 추천한 김문현에게 감봉처분을 내리고 조병갑을 체포했다. 뒤이어 용안현감 박원명(朴源明)을 고부군수로, 장홍부사 이용태를 안핵사(按覈使)로[16] 임명하여 민란을 진정시키도록 했다. 조병갑은 민란이 일어난 책임을 물어 5월 4일 고금도로 유배되었지만 이듬해 석방되었다.

박원명은 고부읍을 점거한 농민군에게 같이 시정을 논의하고 싶다는 글을 보내어 농민군을 달래기 시작했다. 3월 3일에는 성대한 잔치를 열어 농민군을 달래고, 조정에서 농민군을 용서했다는 뜻을 전하는 등 회유책을 펼쳤다. 그러자 농민들도 조병갑 대신 말이 좀 통하는 군수로 바뀌었고, 빼앗긴 양곡도 돌려받았으며, 조정의 용서도 받았으니 더 이상 민란을 지속할 실익이 없다고 여겨 자진 해산하였다.

농민들이 해산하자 전봉준을 비롯한 봉기의 주모자들은 모습을 감추었다. 여기서 끝났다면 동학 농민 혁명은 그저 흔한 동네 소요에 불과했을 것이다.

3.2. 1차 봉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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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36
1894년 5월 31일, 도쿄/밴쿠버 경유
조선에서의 혁명

<동학 혁명에 대한 보고 문서>

존경하는 백작 각하,
조선에서 혁명이 불타오르고 있습니다. 동학이라고 불리는 반란의 당파는 그 수와 영향력을 점점 늘려가고 있으며, 가장 우려되는 바이겠습니다만, 주민의 공감도 점점 커지고 있습니다. 거론되는 폭도들의 수는 4천에서 일만 사이를 오가고 있습니다. 이달 1일 봉기자들은 서울의 정부가 이들을 진압하려 파견한 군대를 패배시켰습니다. 수도의 관리들과 친정부파들 사이에는 아연실색하는 분위기가 역력합니다. 왜냐하면 이 혁명의 목표가 현 정부의 전복이며 우선은 막강한 민씨 가문의 전복이기 때문입니다. 이 가문은 왕을 지배하고 있으며 모든 관식과 고관직들을 그들의 권력 안에 쥐고 있지요. <중략> 그들은 백성들에게 잘해주고 있으며 여하한 폭력 행위도 삼가는 대신 정부에 속하는 것에 대해서는 그만큼 철저히 약탈합니다. 동학의 강령에는 외국인 추방이라는 것도 들어 있습니다만, 이것은 다분히 협박을 위한 코미디에 불과합니다.
삼가 경의를 표하며 글을 맺습니다.

주일 오스트리아-헝가리 대사, 하인리히 폰 쿠덴호베칼레르기 백작
- 1894년 5월 31일, 주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공사관에서 본국 외무부에 동학 농민 운동에 대하여 보낸 보고서.

3.2.1. 이용태의 만행과 봉기 준비

하지만 이용태는 농민군을 가만히 냅둘 생각이 없었다. 그는 2월 16일에 안핵사로 임명되었지만 병을 핑계로 움직이려 들지 않다가 민란이 마무리될 무렵인 3월 2일에 역졸 8백여 명을 거느리고 고부에 왔다. 그는 조병갑을 두둔하며 민란을 일으킨 농민들을 반역죄로 족치려 들었으며 박원명을 협박하여 민란 참가자와 수괴를 색출하려 했다. 그가 데려온 역졸들은 동학교도들을 체포하거나 재산을 빼앗고 마을 사람들을 살해하는 것은 물론 아녀자들까지 겁탈을 일삼았으며 마을 주변에 불을 지르는 만행을 저질렀다.

물론 그냥 데모 수준을 넘어 유혈 사태로 번진 민란이었던 만큼 조정은 슬쩍 넘기기 쉽지 않았던 사태였긴 했지만, 하다못해 일반적인 민란의 뒤처리 수준[17] 정도로만 일을 처리했더라도 대책 없이 사태가 커지지는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18] 하지만 그 수준을 훨씬 뛰어넘은 이용태의 행위[19]에 고부 백성들은 크게 분노했다.

한편 전봉준은 민란이 답보상태에 빠지자 인근 고을의 동지들을 모아 본격적인 반란의 불씨를 당기려 했다. 어느 한 고을만 봉기하는 통상적인 민란이 아니라 여러 고을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봉기하는 반란을 구상한 것이다. 그리고 그 반란에 동원된 것은 바로 동학조직이었다. 이미 고부 민란이 소강상태에 빠진 2월 무렵부터 "보국안민창대의(保國安民倡大義)'라는 깃발이 전라도 각지에 내걸리고, 동학교도들이 깃발 아래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전봉준은 여기에 추가타로 2월 20일경에 민중의 궐기를 촉구하는 '창의격문(倡義檄文)'을 전라도 각지로 날렸다.
백성을 지키고 길러야 할 지방관은 치민(治民)의 도를 모르고 돈벌이를 본원으로 삼는다. 여기에 더하여 전운영이 창설됨으로써 폐단이 번극(煩劇)하여 민인들이 도탄에 빠졌고 나라가 위태롭다. 우리는 비록 초야의 유민(遺民)이지만 차마 나라의 위기를 좌시할 수 없다. 원컨대 각 읍의 여러 군자들은 한 목소리로 의를 떨쳐 일어나 나라를 해치는 적을 제거하여 위로는 종사(宗社)를 보전하고 아래로는 백성들을 편안케 하자.
전봉준의 창의격문 출처

이후 전라도 고을들에서 농민들이 무기를 마련하고 어딘가로 이동하는 모습이 지속적으로 관찰되었다. 전라감영에서도 이 사실을 인지하여 2월 22일 김문현이 다섯 진영과 11개 고을의 군대를 점검하여 만일의 사태를 대비하라고 명령했다. 3월 3일 고부의 농민들이 해산하자 전봉준을 모습을 감추고 무장으로 가서 무장 접주 손화중, 태인 접주 김개남, 금구 접주 김덕명, 최경선 등의 동지들을 모아 본격적으로 반란을 일으켰다. 이것이 바로 제1차 봉기이다.[20]

3.2.2. 백산대회

파일:부안 백산성.jpg
부안 백산성
1894년 3월 20일, 전봉준은 태인의 김개남과 무장현의 손화중과 함께 무장현(茂長)에서 기포하였다. 전봉준은 동학 조직을 활용하여 단기간에 4천 명에 달하는 농민군을 소집할 수 있었으며, 손화중, 김개남과 함께 탐관오리의 숙청과 보국안민을 위해 일어서자는 내용의 창의문(倡義文)을 발표했다.
이 세상에서 사람이 가장 귀한 것은 인륜이 있기 때문이다. 군신(君臣)과 부자(父子) 사이의 인륜은 그 중에서 으뜸가는 것이다. 임금이 어질고 신하가 강직하며, 어버이가 인자하고 자식이 효도를 한 이후에야 나라가 성립되고 한없는 복을 누릴 수 있는 법이다. 지금 우리 임금께서는 어질고 효성스러우며 자애롭고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셨으며, 신통력 있는 명확함과 성스러운 명석함을 지니셨다. 현명하고 어질며 바르고 강직한 신하가 전하를 보좌하여 밝게 한다면 요순(堯舜)의 덕화와 문경(文景)의 통치를 손꼽아 바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신하라는 자들은 나라에 충성을 다할 생각하지 않고 다만 녹봉과 지위를 도둑질하며, 전하의 총명을 가리고 아부하고 뜻만 맞추면서 충성을 간하는 말을 요사스러운 말이라 하고, 정직한 자를 비도(匪徒)라고 한다. 안으로는 나랏일을 도울[輔國] 인재가 없고, 밖으로는 백성을 학대하는 관리가 많아, 백성들의 마음은 날이 갈수록 더욱 변하였다. 집 안에 들어가서는 즐겁게 살아갈 생업이 없고, 밖에 나와서는 몸을 보호할 방법이 없다. 학정이 날마다 심하여 원성이 그치지 아니하니, 군신의 의리와 부자의 윤리, 상하의 명분이 뒤집어지거나 무너져 남은 것이 없게 되었다.

관자(管子)가 말하기를 “사유(四維)가 바로 서지 못하면 나라가 망한다”라고 하였으니, 지금의 형세는 옛날보다 더욱 심하다. 정승 이하부터 방백과 수령에 이르기까지 나라의 위태로움을 생각하지 않고 그저 자기 배를 불리고 자기 집안을 윤택하게 할 생각에만 골몰하고, 관리를 선발하는 통로를 재물이 생기는 길로 생각하여 과거 시험을 보는 장소는 물건을 사고파는 장터가 되었다. 나라의 많은 재화와 물건들이 나라 창고로 들어가지 않고 도리어 개인 호주머니만 채우고 있다. 또한 나라 빚은 쌓여만 가는데 아무도 갚을 생각은 하지 않고, 그저 교만하고 사치하며 방탕한 짓을 하는 것이 도무지 거리낌이 없다. 전국은 모두 어육(魚肉)이 되고 모든 백성은 도탄에 빠졌는데도 수령들의 탐학이 참으로 그대로이니, 어찌 백성이 곤궁해지지 않겠는가.

백성은 나라의 근본인 바, 근본이 쇠약해지면 나라도 쇠약해진다. 나랏일을 도와 백성을 편안하게 할(輔國安民) 방책은 생각하지 않고 시골에 집을 지어 오직 혼자만 온전할 방법만을 찾고 오로지 녹봉과 지위를 도둑질하니, 이것을 어찌 도리라 하겠는가.

우리는 초야에서 사는 백성이지만, 임금의 땅에서 먹고 임금이 준 옷을 입고 있으므로 나라의 위태로움을 좌시할 수 없다. 이에 전국은 한마음으로 수많은 백성과 의논하여 오늘 이 의로운 깃발을 들어 나라를 바로잡고 백성을 편안하게 만들 것을 죽음으로써 맹세를 하였다. 오늘의 상황이 비록 놀랄 만한 일이겠지만 절대로 두려워하거나 동요하지 말고 각기 생업에 편안히 종사하라. 함께 태평한 세월이 오기를 기원하며, 모두 임금의 덕화(德化)를 입을 수 있다면 천만다행이겠노라.
무장에서 전봉준이 발표한 창의문. 출처
전봉준은 농민군을 이끌고 첫 번째 목표로 고부읍을 향해 진군했다. 태인접주 최경선이 3백여명의 농민군과 함께 합류했고 뒤이어 고부에서 일어난 농민군 1천명이 합류했으며 미리 민가에 숨겨놓았던 총과 창 수백 개를 꺼내 농민군을 무장시켰다. 3월 20일 밤 농민군은 고부를 공격했고 안핵사 이용태와 역졸들은 농민군의 기세에 압도된 나머지 전주로 도망쳤으며, 남은 좌수(座首)와 이속(吏屬)들은 항복했다.

농민군은 감옥을 열어 고부민란의 주동자들과 억울하게 옥살이를 한 농민들을 석방하고 무기고를 털어 무기를 확보하며 죽창을 깎아 비무장 농민들에게 나눠주었다. 그리고 탐학한 관속을 처형하고 창고를 열어 빈민들에게 식량을 나눠주었다. 그러는 사이 각지에서 봉기한 농민군들이 고부에 집결하면서 농민군의 수는 8천 명에 육박했다.

서기 1894년 음력 3월 25일, 보국안민의 기치 아래 농민군은 백산에 집결했다. 백산은 흰옷에 죽창을 든 농민들로 넘쳐났고, 서면 백산, 앉으면 죽산이란 말이 그때 생겨났다. 전봉준을 동도 대장(東徒大將)으로 추대하고, 비서에는 송희옥(宋熹玉)과 정백현(鄭伯賢), 영솔장(領率長)에는 최경선(崔景善), 총참모에는 김덕명(金德明)과 오시영(吳時泳), 그리고 총관령(總管領)에는 손화중과 김개남으로 추대했다. 또한 다음과 같은 격문을 띄우고 4대 강령을 발표하여 반봉건, 반외세라는 봉기 방향을 분명히 했다. 농민들의 봉기는 조정의 탐관오리들을 비롯한 양반들과 서양의 외국 세력을 몰아내기 위한 선전 포고를 한 것과 다름없었다.
우리가 의를 들어 차(此)에 지(至)함은 그 본의가 단단(斷斷) 타(他)에 있지 아니하고 창생(蒼生)을 도탄의 중에서 건지고 국가를 반석 위에다 두자 함이라. 안으로는 탐학(貪虐)한 관리의 머리를 버히고 밖으로는 횡포한 강적의 무리를 구축(驅逐)하자 함이다. 양반과 부호의 앞에 고통을 받는 민중들과 방백(方伯)과 수령의 밑에 굴욕을 받는 소리(小吏)들은 우리와 같이 원한이 깊은 자라. 조금도 주저치 말고 이 시각으로 일어서라. 만일 기회를 잃으면 후회하여도 미치지 못하리라.
백산집회 후 농민군이 공표한 격문. 출처
첫째, 사람을 함부로 죽이거나 백성의 재물을 빼앗지 말지어다. (不殺人不殺物)

둘째, 충과 효를 모두 온전히 하며 세상을 구제하고 백성을 편안케 할 것이다. (忠孝雙全 濟世安民)

셋째, 왜적과 오랑캐를 몰아내고 나라의 거룩한 길을 밝힐 것이다. (逐滅倭夷 澄淸聖道)

넷째, 군사들을 이끌고 한양으로 진격하여 권귀[21]들을 모두 멸할 것이다. (驅兵入京 盡滅權貴)
동학 농민군 4대 강령
백산에서 전열을 정비한 농민군은 기율을 발표하여 농민군의 군기를 엄정히 하고, 첫 번째 목표로 전라도의 중심지, 전주부성을 향해 전진하기 시작했다.

3.2.3. 황토현 전투

파일:황토현 전투와 황룡촌 전투(동학혁명기념관).jpg
황토현 전투와 황룡촌 전투
농민군은 각지의 관청을 함락하면서 전주로 나아갔다. 각 관아는 농민군을 막아낼 능력이 없었고 3월 28일에 태인이 농민군의 손에 떨어졌으며 4월 1일에는 금구현 원평에 도달했다. 또한 농민군 별동대는 부안으로 가 그곳에서 봉기한 농민군과 합류하고 4월 1일 부안에 도착했다.

전라도 관찰사 김문현은 뒤늦게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감영군을 소집했다. 주력은 친군무남영(親軍武南營)[22] 3백명에 각 고을에서 모은 향병과 보부상이 진압군에 편성되었다. 우영관 이경호(李璟鎬)가 지휘관이 되었고 영병 7백, 토병 5백, 보부상 1천 명으로 합쳐 2천여 명의 진압군이 4월 3일 금구로 출발했다. 화력이 우수한 경군이 남하하고 있었으나, 김문현은 단독으로 공을 세울 욕심을 갖고 무리하게 출병한다. 특히 김문현은 수령으로서 잘못된 통치로 봉기를 허용한 죄가 있기 때문에 공을 세워서 지금까지의 실패를 만회하려는 욕심이 있었던 것이다.

이 소식을 접한 농민군은 4월 3일 태인으로 진을 옮겨 그곳에서 하루를 보낸 뒤 몇몇만 견제를 위해 태인에 남겨두고 부안으로 향했다. 4월 4일 현지의 농민군과 합류한 동학 농민군 주력부대는 부안 관아에 들이닥쳐 현감 이철화(李喆和)와 아전들을 붙잡았다. 또한 영광 법성포의 이향에게 여러 폐단을 시정하기 위해 봉기하였다는 내용의 통문을 보냈다.

4월 6일 농민군은 부안을 떠났고 태인에 남은 농민군도 고부 황토현으로 향했다. 농민군의 뒤를 쫓던 관군도 백산을 지나 고부로 향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기강이 해이해진 관군은 노략질을 하거나 백성들에게 민폐를 끼치는 등 각종 대민범죄를 저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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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토현 전적비
서기 1894년 음력 4월 6일 오후, 4천 명이 넘는 농민군과 2천여 명의 감영군이 격돌했다. 오후 4시에 전투가 시작되었는데 이것은 일종의 탐색전으로, 농민군은 거짓으로 패한 척 후퇴하여 황토현 인근 사시봉에 진을 쳤다. 감영군이 추적했지만 날이 저물자 추격을 중단하고 숙영한다. 그러나 비가 내린지 얼마 지나지 않아 안개가 끼었고 감영군은 지리도 잘 몰랐으며 농민군을 과소평가하여 승리감에 도취되어 있었다.

그러나 4월 7일 새벽 4시, 농민군이 관군의 진영을 기습 공격하여 승리를 거두었다. 농민군은 삼면을 포위하여 포격을 퍼부었고 관군은 참패하여 영관 이경호가 전사했으며 1천여 명의 사상자를 내고 패주했다. 첫 전투의 승리로 농민들의 사기는 하늘을 찌르고, 주변의 농민들도 하나 둘 농민군에 가담하기 시작했다.

3.2.4. 장성 황룡촌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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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장성 황룡 전적.jpg
장성 황룡 전적
농민들의 봉기 소식에 당황한 조정은 사태확산의 주범인 이용태를 4월 15일 파면하고 21일 금산군으로 유배를 보냈다. 그리고 전라병사 홍계훈[23] 4월 2일 양호초토사(兩湖招討使)로 임명하고, 8백 명의 경군(京軍)[24]을 주어 전봉준의 동학군을 진압하도록 명령했다.

4월 2일, 홍계훈의 경군이 한성을 출발했다. 경군은 해상로를 통해 인천 제물포를 출발해 군산에 상륙하여 전주성으로 향했다. 이때 경군이 소유하던 무기들이 이 당시로선 상당히 고급이었는데, 독일게베어 1871 소총과 극로백(크루프 포), 회룡총(레밍턴 롤링블럭 소총), 그리고 결정적으로 회선포(개틀링 기관총)를 보유하고 있었다. 충분히 관군 수준에서 농민군을 진압할 수 있었다는 말.

황토현에서 전라 감영군을 격퇴한 전봉준의 호남 창의군은 전주로 북상하지 않고 오히려 남하하며 경군을 유인하기 시작했다. 이는 화력이 강력한 경군과 무리하게 정면 승부를 벌이기보다는 유인하여 기습 공격을 하려는 전략이었다. 농민군은 꼬리에 경군을 달고 고창군, 영광군, 함평군서해를 끼고 남하하다가 나주를 기점으로 급격히 북상하기 시작하였고 경군 지휘관이었던 양호초토사 홍계훈은 대관 이학승에게 친군 심영[25] 병사 300여 명을 주어 막게 하였으나, 장성에 위치한 황룡촌에서 관군은 대패하고 이 전투에서 대관 이학승이 전사했으며 관군의 신식 무기가 장태를 이용한 동학군에게 넘어간다.

3.2.5. 전주성 함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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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계훈의 경군
1894년 4월 27일 황토현과 황룡촌에서의 전투로 사기가 충천하여 기세가 오른 전봉준의 동학군은 이러한 기회를 놓치지 않고 이 기세를 몰아 파죽지세로 전라 감영이 있는 전주부성에 무혈입성한다. 이때 전주성을 지키고 있던 전라 감사 김문현은 이미 도주하고 전라도 전역은 완전히 동학군의 수중에 들어가게 된다.

조선에서 전주성은 전라북도와 일대 지역의 주요 관문이자 한양으로 연결되는 교통의 요지일 뿐만 아니라 조선 왕실 씨족 전주 이씨의 본거지라는 점에서 엄청난 의미가 있었기에 고종을 비롯한 조선 왕실은 그야말로 발칵 뒤집히는 중대 사안이었다.

고부 이외에도 황해도의 황주해주, 경상도의 김해에서 봉기가 일어났고, 충청도의 옥천회덕에 이어 목천보은 등지에서도 동학군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봉기가 일어났다. 물론 농민군을 싫어하는 고을들도 많았다. 일례로 나주에선 나주 목사 민종렬이 관군은 물론 민보군(民堡軍)[26]과 향병대까지 동원해서 동학군을 필사적으로 거부했으며[27], 전북에서는 남원도 반발하였지만 나주와는 달리 남원김개남에 의해 무력 점령 당했다.

이때 도마 안중근 의사도 동학군 진압에 참여한 적이 있다.[28] 하지만 동학군이란 이름으로 약탈질을 하던 자들도 있었기에, 농민군을 막은 걸 무작정 뭐라고 비난만 할 수도 없다. 앞서 말했듯, 농민 봉기는 황건적이나 홍건적이 그랬듯 도적의 성격을 함께 가질 수밖에 없다. 특히 황건적, 홍건적, 프랑스 초기 혁명군, 러시아 적군, 중공 홍군 등... 기존의 국가 체계가 건재한 상황에서, 혹은 붕괴한 상황에서 일어나는 '모든' 종류의 군사적 세력은 혁명 세력 + 그냥 배고픈 농민 세력 + 이 참에 한몫 잡자는 도적들이 혼성된 군벌 집단일 수밖에 없다. 안정적인 보급 체계와 신상필벌 체계를 갖췄다면, 그건 봉기 세력이 아니라 이미 완성된 국가다.[29]

참고로 백백교의 시조 백도교 교주인 전정운은 바로 전봉준의 먼 친척이며, 전봉준과 동학의 이름으로 온갖 나쁜 짓은 다 저질러서 동학을 오해하고 진압군에 나서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백범일지에 의하면 김구(김창수) 또한 인천에 수감되어 복역할 당시 무뢰배에 불과한 사람이 동학의 두령이었다고 자칭하며 약탈, 살인 등 강도 행각을 무용담처럼 자랑하는 모습을 보며 한숨 지은 바 있다.[30]

3.2.6. 완산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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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성을 공격하는 경군

전봉준이 이끄는 동학 농민군에 의해 전주부성이 무혈함락되자 양호초토사 홍계훈은 4월 28일 전주성이 훤히 내보이는 완산에 진을 치고 시험 삼아 전주성을 향해 대포 3발을 발사했다. 그러자 농민군 수천 명이 서문과 남문을 열고 완산의 경군을 향해 몰려왔으며, 전주성의 보루에서도 완산을 향해 총을 쏴댔다. 하지만 동쪽 능선에 있던 관군이 응사하자 가장 먼저 돌진한 농민군의 정예병 30여명이 죽었고 서쪽 능선의 관군도 쏘자 농민군은 패주하여 수백 명의 사상자를 냈다. 하지만 관군의 포격으로도 성문이 무너지지 않았고, 농민군이 대포를 쏴대고 해까지 저물자 관군도 공성을 그만두고 진지로 돌아왔다.

4월 29일 농민군은 북문으로 나와 황학대를 공격했으나 관군의 회선포 사격으로 수백 명이 죽었다. 5월 1일에는 남문을 열고 공격했지만 이번에도 기관총 사격 앞에 맥없이 무너져 300여명의 전사자를 냈다. 5월 2일에는 농민군이 서문을 열어 용머리고개에 있는 관군을 공격했으나 관군의 포격으로 또 물러났다.

5월 3일, 농민군 수천 명이 북문을 열고 출성하여 관군이 주둔한 유연대와 다가산을 함락하고 완산에 있는 관군의 본영을 공격했다. 그러나 이번에도 관군의 화력을 당해내지 못하고 패퇴했다. 이 전투에서 전봉준은 왼쪽 허벅지에 총상을 입었고 열네 살 소년 장사(童壯士) 이복용(李福用)과 용장 김순명(金順明)이 참살당했으며 농민군 500여명이 죽었고 총칼 500여자루와 대장기를 빼앗겼다. 연이은 패배에 동학농민군은 혼란에 빠져 도망자가 속출하고 심지어 전봉준을 붙잡아 홍계훈에 바치자는 소리까지 나왔다.

하지만 봉기 초기 관군이 맥없이 무너지고, 호남의 중심인 전주성이 함락되자 조정은 동요하였고 고종은 최악의 선택을 내리고 만다. 청나라에게 군대를 파병해 달라고 요청한 것이다.

3.3. 고종의 청군 파병 요청과 외세 개입

당시 고종은 위기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고 농민군에게 책임을 뒤집어씌웁니다. 저들 때문에 청·일이 와서 나라가 위태롭게 되어 (농민군은) 죽어 마땅하다고 했죠. 아랫것들이 국기를 흔든다는 인식이었죠. 지금도 사회 분열이 만만치 않잖아요. 그때와 마찬가지로 국민과 사회 통합이 가장 중요하다고 봅니다
조재곤 서강대 학술연구교수‘조선인들의 청일전쟁’ 펴낸 조재곤 서강대 학술연구교수
고종은 자국군의 역량을 믿지 못하고 스스로 말려 청나라에게 동학군을 진압할 군대를 파병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이 선택은 후일 청일 전쟁시모노세키 조약으로 이어졌다. 외국군에 자국민 유혈 진압을 요청한 결과 조선을 침략할 명분만을 찾던 일본에 더 빠르게 합병되는 결과를 야기하였기에, 성과도 없고 후대에 비난은 비난대로 받게 되었다. 역사적으로 볼 때 내부의 분란을 진압하기 위해 외세에 도움을 요청하면 십중팔구 이용만 당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31] 게다가 이 시기는 제국주의로 특히 일본이 대륙 진출을 위해 기회를 노리고 있을 때였으니,[32] 한 마디로 "날 잡아 드십쇼" 꼴이 되어 버렸다. 결과적으로 이 선택은 고종에게도 최악의 선택이었으며, 끼친 영향을 생각하면 조선 역사를 통틀어 최악의 결정이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일단 농민군은 주력이 관군의 반격을 당해 음력 5월 초부터는 오히려 전주성에서 위기에 빠진 상황이었다. 강력한 청군을 동원할 수만 있다면 단숨에 농민 반란을 진압할 수 있다고 보았다. 이에 고종이 직접 청병의 파병안을 제기하였다. 이에 김병시톈진 조약에 의거해[33] 일본군이 진입할 빌미를 내줄 수도 있다고 강력 반대하며 경고하였으나, 고종과 민씨 일족이자 실권자였던 민영준이 "청군이 먼저 들어올 텐데 일본군들이 어떻게 감히 이럴 수가 있단 말인가?" 하고 상큼하게 무시해 버렸다. 또한 파병을 적극 찬성하는 민영준은 파병을 반대하는 대신들에게 "청나라 군대가 오면 청나라 속국이 될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조선의 정권을 계속 우리들이 잡을 수 있다. 동학군에 의해 정권을 잃는 것보다는 청나라의 속국이 되더라도 계속 정권을 잡는 것이 중요하다."라며 파병 반대를 외치는 대신들을 회유하거나 무력화시켰다. 또한 민영준은 위안스카이와 비밀리에 접촉까지 하여 청군의 파병을 직접 요청까지 하였다.

파일:청병 차용.jpg

게다가 고종은 이미 보은 집회가 열렸던 당시부터 "서울 병력을 빼는 건 힘드니까 외국 군대 동원해서 막자"고 말하고 있었다. 과거에 청나라가 영국군을 빌려서 난을 진압한 적이 있었다고 하던데[34] 우리도 비슷한 일을 할 수 있지 않겠는가?"라고 누구보다도 먼저 말을 꺼낸 것. 그때는 대신들의 반대와 어윤중의 회유가 먹혀서 없던 일이 되었지만, 청나라 군대 파병 요청은 이미 예견되어 온 일이었던 것이다.

나중에 조선왕조실록에 지석영의 상소문을 보면 민영준(민영휘)이 원병을 불러들이게 만들었다고 쓰여 있는데, 이는 위안스카이의 군대 파병에 민영준이 관여했음을 시사한다. 한 가지 알아두어야 할 점이 동학란은 어디까지나 조선 내부 문제이기 때문에 타국인 청나라나 일본이 명분 없이 관여하는 것은 침략 행위이다. 즉 명분 없이 타국에 군대를 파병하는 것은 불법이고 처벌 대상이라는 것이다. 민영준의 경우에는 민씨 일족 중에서 다른 민씨들이 친청에서 친러로 전향할 때 유일하게 친청 성향을 유지해서 위안스카이하고도 가까웠을 뿐만 아니라, 또한 동학란 당시에 고종과 함께 주도적으로 청군의 파병을 요청한 인물이기도 하다. 거기다 민영준은 당시에 병조판서로 군사 관련 업무까지도 담당하고 있었다. 여튼 중국과 일본 측 기록까지 보면 파병이 성사된 주범은 고종, 민영준, 위안스카이 셋이다.

그리하여 1894년 5월 5일 아산만에 청군이 상륙하였다. 전력은 북양함대 소속 제원급 방호순양함 제원(濟遠)함과 양위급 방호순양함 양위(揚威)함, 그리고 제독 섭지초(葉志超)와 총병 섭사성(聶士成)이 이끄는 청병 1,500명이었다. 그런데 고종과 대신들의 예상과는 달리 바로 다음 날인 5월 6일, 일본군이 제물포 조약을 명분으로 들며 전격적으로 제물포에 상륙한다. 동학 농민 운동은 오늘날의 전북 지방에서 일어난 봉기이므로 이를 진압하려면 남부 지방에 병력을 보내야 하고, 실제로 청군은 아산만에 병력을 보냈는데 일본군은 엉뚱한 제물포(인천)에다가 군을 상륙시킨다. 이는 농민군 진압 따위는 알 바 없고 한성 장악이 우선이었다는 강력한 반증이 된다.

====# 증거 #====
고종이 청군 차병을 자진했다는 증거는 조선 측 자료, 주한일본공사관기록 문서, 청의 문서 등 무려 세 국가에서 증거가 나오고 있다.
보은 집회 당시 1893년 3월에 고종은 청군 출병 의사를 보였고 신하들이 거부에도 상당히 적극적으로 의사 표명을 하며 반복적으로 의견을 구했다.
여(고종): 요충지가 모두 몇 개나 됩니까?

심순택: 수원과 용인이 직로입니다. 심영과 기영의 병정들을 먼저 수원과 용인 등지에 파견하여 주둔케 하고 경군은 상황을 보면서 조용함이 좋을 듯합니다.

여(고종): 경군은 절대 절대 파견할 수 없습니다. 타국의 군사를 차용하는 방법 또한 여러 나라에 전례들이 있습니다만, 군을 차용하는 것은 어떨까요?

심순택: 그것은 아니 됩니다. 만약 타국 군사를 차용하면 군량을 어쩔 수 없이 우리나라에서 보태야 하는 것입니다.

여(고종): 중국에서도 일찍이 영국군을 차용했던 일이 있습니다.

정범조: 어찌 중국을 본받는단 말입니까?

여(고종): 여러 나라의 군사를 차용하려는 것이 아니라 청병을 차용할 수 있기 때문에 하는 말입니다.

정범조: 청병을 차용하는 것은 비록 여러 나라의 군사를 차용하는 것과 다르지만 처음부터 차용하지 않음이 좋지 않겠습니까?
강문호, 동학농민혁명과 청군, 동학연구, Vol.17, 2004, page 109
이런 대화 내용은 승정원 일기, 일성록, 고종실록이라는 세 가지 자료에서 교차 검증이 되고 있다.[김명섭,1994,7][구선희,1999,219][강문호,2004,109][엄찬호,2006,5][신영우,2009,19~20,26][유바다,2017,336]

의견을 구하는 형식으로 묻더니 신하들이 거절하니 끈질기게 동일 의견을 반복하였다. 이것을 오직 의견만 구했을 뿐이라고 해석하는 건 이태진 등 극소수이며 김명섭, 구선희, 강문호, 엄찬호, 신영우, 유바다 등 대부분의 학자는 고종이 청군 차병을 원한 의지나 의사를 표명한 것으로 해석한다.
양호초토사 홍계훈은 (동학군을 실제보다 과대평가하여) 청군 차병을 요청하는 문건을 정부에 보냈고 그 사료가 남아있다.[김명섭,1994,5~6][강문호,2004,116][신영우,2009,26]

강문호 교수의 논문에 인용된 일본 문서와 청의 문서에 고종 측근인 홍계훈이 청군 파병을 요청했다는 사실이 나와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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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이 홍계훈의 요청을 듣고 진지하게 생각했다는 점도 지적하고 있고 민영준이 위안스카이와 밀약을 한 사실도 나와있다.
홍계훈이 조선 정부에게 청군 차병을 요청한 사실이 주한일본공사관 측에 확실히 남아있다. 음력 4월 19일에 그 사실이 분명히 기록되어 있다.[강문호,2004,120~121][유바다,2017,336]

일본 임시 대리 공사가 조선 측 반응을 조사한 후 조선 정부가 청병 차병 방안을 채택할 것을 예상한 문서도 있다.[구선희,1999,222~223]

고종이 청군 차병을 결정짓고 회의도 열지 않은 채 원세개 측에 비밀리에 파견을 하여 청병 차병을 결정했다는 기록, 5월 1일 조선 정부가 청국에게 공식적으로 청군 차병을 요청한 상태라는 것. 조선 정부가 원세개에게 출병 요청하자 다음 날 임시 대리 공사 스기무라 후카시가 외무대신 무츠 무네미츠에게 보고를 한 것. 청국이 조선의 차병안을 받아들여 군사를 출병한다는 전보를 일본 정부가 받았고 휴가 중이던 오토리 게이스케(大鳥圭介) 공사에게 조선으로 돌아갈 것을 명하였다는 사실들이 주한일본공사관기록 문서에도 분명히 적혀있다.[김명섭,1994,12][구선희,1999,225][엄찬호,2006,13][신영우,2009,27][김경록,2018,37~39]
1893년 보은 집회 당시 고종의 청병 차병안이 신하들의 반대로 무산됐음에도 고종이 “동학의 세가 창궐하여 충청 병영의 병정으로는 진무할 힘이 없고, 경병 역시 파송할 수 없으므로 청병을 빌려서 뿌리 뽑고자”하며 비밀리에 박제순을 파견하여 원세개에게 청 병력 파견을 의논한 사실이 기록된 문서도 있다.[구선희,1999,220~221][김보경,2004,95][엄찬호,2006,5]

1894년 4월 28일에 청병 차병 공문이 완성됐음을 조선 정부 측에서 사람을 보내 원세개에 알렸음을 전하는 문서가 있다.[구선희,1999,226]

고종의 내명을 받은 민영준이 원세개와 교섭하여 4월 29일 출병 동의를 얻은 것을 전하는 문서가 있다.[엄찬호,2006,7]

고종이 청병 차병을 공식적으로 요청한 것, 임오군란이나 갑신정변이 모두 청의 도움으로 진압된 전례에 비추어 이번 사태도 청국 군대가 대신 소멸시켜 줄 것을 공식으로 요청한 것 이 문서에 남아있다.[김명섭,1994,12~13][구선희,1999,227][강문호,2004,127~128][엄찬호,2006,7][신영우,2009,27][유바다,2017,337]

위와 같이 청의 문서에서도 고종이 청병 차병을 요청했음이 확실하게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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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문호 교수의 논문에서 고종이 자발적으로 청군 파병을 요청했다고 설명되는 부분. 이 논문에도 청군 파병의 주체는 고종이라고 나온다.

그리고 2008년 1월 중국 안휘 교육 출판사(安徽教育出版社)에서 총 39권에서 2,600여만 자라는 분량으로 이홍장 전집이 새로 출간됐으나, 여기서도 기존 사실을 뒤집는 증거는 전혀 나오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예를 들면 유바다 박사는 “顧廷龍․戴逸 主編, 2007, 李鴻章全集 1~39, 安徽敎育出版社”라는 방대한 분량의 사료집을 참고해서 박사 학위 논문을 작성하였다.[유바다,2017,411]

하지만 여기서도 고종이 청에게 청군 차병을 요청하였다고 나오고 있다. 그리고 국사편찬위원회 연구원인 구선희 박사가 이홍장 전집에 대한 해제를 했었는데도 여기서도 청의 문서가 '고종의 청병 차병의 증거'로 설명하고 있으며 이홍장은 오히려 조선이 뒤처리하게 놓아두고 가능하면 빨리 조선에서 철수하기를 원하였다는 자료가 나온다고 설명하였다.[구선희,2017,33~35]

참고로 이홍장 전집에서 일부 소수 분량의 내용이 발췌돼서 문서집에 포함된 적이 있다. 동학농민혁명 종합지식정보시스템 동학농민혁명 신국역총서 9권의 번역집은 http://www.e-donghak.or.kr/dirFrameSet.jsp?item=bdata 이 링크에서 [자료소개] [발간자료집]『동학농민혁명 신국역총서 9』(자료 다운로드) 2017-12-26 427을 클릭하면 다운로드 가능하다 .

실제 동학농민혁명 종합지식정보시스템에 자료집을 구할 수 있고 친절하게 자료도 다 알려준다. 구선희란 인물이 전집 해설도 해주는데 검색해 보니깐 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관이시고 조선과 청 관계로 박사 학위 논문 받은 사람이다. 이 자료집의 내용을 읽어보자.

이게 4월 28일 고종의 파병 요청을 알리는 문서이다. 문서 번호는 G20-04-034
파일:G20-04-034.png
위안스카이는 문서를 기다리고 있다.
다음 문서 날짜는 4월 29일 문서 번호는 G20-04-036.
파일:G20-04-036.png
다음 문서는 4월 30일, 문서 번호는 G20-04-037.
파일:G20-04-037.png

여기에 의하면 고종은 군이 패배하면 즉각 파병 요청 문서를 보낼 것이라고 위안스카이에게 전했다.

그리고 아래가 G20-05-001 문서.
파일:G20-05-001.png
사실 고종은 파병 요청을 보낼 예정을 4월 29일에 미리 전하고 약속대로 정식으로 전했었다.
문서 번호는 G20-05-001인데 고종이 청 정부에게 이런 문서를 보냈다.
"‘폐국(弊國) 전라도 관할의 태인과 고부 등의 현(縣)은 민풍(民風)이 사납고 성정이 음험하고 간사하여 평소 다스리기 어려운 곳이라고 일컬어지는 곳입니다.

몇 개월 사이에 동학에 붙은 교비(敎匪)들이 무리 만여 명을 모아 현읍(縣邑) 10여 곳을 공격하여 함락시켰고, 지금은 다시 북으로 잠입하여 전주(全州)성을 함락시켰습니다. 전에 연군(練軍)을 파견하여 현지에 가서 토벌하고 위무토록 했지만 그 교비들은 끝내 감히 죽음을 불사하고 맞서 싸워 연군이 패배하여 잃어버린 총포 등 무기가 다수에 이르렀습니다. 이 흉악하고 완고한 자들이 오랫동안 소란을 피우면 특히 우려할 만한데, 하물며 한성과의 거리가 겨우 400하고도 수십 리 떨어진 곳에서 만약 그들이 다시 북으로 잠입하도록 내버려둔다면 경기(京畿) 지역이 시끄럽게 요동을 칠 것이니 손실이 적지 않을 것입니다.

게다가 폐국의 새로 훈련시킨 각 부대는 현재의 인원이 겨우 도성을 지킬 만할 뿐이고 또한 아직 전투를 치른 경험도 없으니 특히 흉악한 구적(寇賊)을 섬멸시키는 데 쓰기 어렵습니다. 만약 오랫동안 만연하면 청에 많은 근심거리를 남기게 될 것입니다. 조사해 보면, 임오년과 갑신년에 폐국에서 두 차례 내란이 일어났을 때 모두 중국의 병사들이 대신 평정해 주었습니다. 이에 전의 사례에 의거하여 청컨대 번거롭더라도 귀 총리(總理, 위안스카이)가 신속하게 즉각 북양대신에게 전보를 보내면 참작하여 몇 개의 부대를 보내어 속히 와서 대신 토벌케 하고, 아울러 폐국의 각 병사들로 하여금 군무(軍務)를 따라 익히게 하여 앞으로 수비하는 데 도움이 되도록 하고자 합니다. 사나운 교비들이 섬멸되기를 기다려 즉각 철수를 청할 것이며 감히 계속 머물러 지켜 주기를 청하여 천조(天朝)의 병사들이 외지에서 오랫동안 피로케 하지 않을 것입니다. 아울러 청컨대 귀 총리가 조속히 적절하게 조력할 방안을 강구하여 급박한 형세를 구원하기를 절실하게 기다립니다"

고종이 청에게 보낸 문서 G20-05-001에 수록
실제로는 4월 29일에 고종이 미리 예고를 하고 예고에 따라 정식으로 파병 요청을 했었다. 예고 문서도 미리 보내고 예고한 대로 그대로 문서를 보냈다.

해제한 구선희 국사편찬위원회 연구원도 G20-05-001이 조선의 청 파병 요청 근거라고 가르키고 있다. 그리고 이홍장 문서에 의하면 오히려 이홍장은 파병을 꺼리는 문서도 있다. 이홍장은 오히려 조선이 알아서 정리하게 두고 청군을 얼른 철수시키기를 원했다는 자료도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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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홍장 전집 같은 방대한 1차 사료를 연구한 유바다 박사의 논문은 의외로 유사 역사학 커뮤니티에서 주목받지 않으며 그들은 그들의 출처 없는 게시글들이 더 신뢰 있는 자료로 판단한다.
5월 1일[五月初一日]

(…) 먼저 순변사(巡邊使)를 차송(差送)한 뒤에 원임대신이 입시하여 사사로이 뵐 때, 임금께서 청병(淸兵)에게 구원을 요청하는 일로 하교하시길, “총리 원세개(袁世凱)가 말하기를 만약 조회(照會)하는 일이 있으면 당연히 전보로 통지하면, 며칠이 안 되어 군함이 내박한다고 하였다” 여러 대신들은 모두 사세가 어쩔 수 없다는 뜻으로 상주하였다. 임금께서는 일본인이 인연(夤緣)하여 같이 움직이지 않을까 걱정하셨다. 판부사 김홍집(金弘集, 호는 道園)이 말하기를, “지금 우리 군대가 적도를 소탕하지 못하고 있으니, 이것은 부득이한 사정에서 나온 조치입니다. 일본은 우리가 처음부터 구원을 요청하지 않았는데, 어찌 함부로 움직인단 말입니까?” 하였다. 경연에서 물러난 뒤에 보국(輔國, 보국숭록대부) 민영준(閔泳駿)이 영돈[영돈령부사] 김병시(金炳始, 호는 용엄(蓉庵))에게 편지를 보내고, 또 사람까지 보내어 몰래 질문하길, “경연하는 자리에서 청병에게 구원을 요청하는 일을 가지고 여러 대신이 충분한 논의가 있었는데, 합하(閤下)의 뜻이 어떠한지 모르겠습니다. 대개 구원을 요청하는 일이 어찌 어렵고 신중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또한 일본 군대도 걱정거리가 아니겠습니까?” 하였다. 김병시가 찾아온 사람에게 조용히 말하길, “대개 이 일은 이미 정론(定論)이 있다고 하니 억측으로 질문에 대답하기에는 어려움이 있습니다. 그러나 비도(匪徒, 동학의 무리)의 죄는 비록 용서할 수 없지만, 모두 우리 백성입니다. 어찌 우리 병사로 소탕하지 않고서 다른 나라 병사를 빌려 토벌하면, 우리 백성의 마음이 어떠하겠습니까? 민심이 따라서 쉽게 흩어질 것이니, 이것은 정말 신중하게 살펴야 합니다. 일본의 문제도 근심이 없을 수 없습니다. 청관(淸館)의 조회(照會)가 지금 잠시 늦추어졌고 이미 우리 병사도 출발하였으니, 잠시 하회를 관망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라고 하였다. 민대감[閔泳駿]께서 ≪궁궐에≫ 들어가 이 말을 상주하니, 임금께서는 “이 논의가 매우 좋다. 그러나 닥쳐올 일을 헤아릴 수 없는 데다 여러 대신들의 논의 역시 ≪청병의≫ 구원을 요청하는 것이 마땅하니, 청관 조회의 발송을 재촉하는 것이 좋겠다”라고 하였다. 성기운(成岐運)이 청관에 가서 총리 원세개에게 조회의 건을 전달하니, ≪청관에서는≫ 곧장 천진(天津)으로 전보를 보내었다. 며칠이 되지 않아 청병의 전함이 연안에 정박하고 도독(都督) 섭지초(葉志超)가 2천여병을 거느리고 아산에 상륙하니, 이중하(李重夏)가 영접하여 머물렀다.

갑오실기, 갑오년 5월 음력 1894년 5월 http://www.e-donghak.or.kr/

이 자료는 저자가 미상이라 결정적인 증거는 아니나 이 자료는 청과 일본 측 문서와 교차 검증이 되며 논문에서도 교차 검증되는 부분이 근거로 사용된다.[신영우,2009,27]

====# 학계 다수설 #====
고종이 자진해서 청군에게 출병했다는 건 명백한 학계 다수설이다. 무슨 학계가 적폐라서 모른 척하는 것도 아니고 조선 측, 주한일본공사관기록 문서, 청의 문서(이홍집 전집 발간 이후 포함) 등 증거까지 명확한 상태다.

다음은 고종이 자진해서 청군 차병을 요청했다고 설명하는 논문, 학술서의 목록이다.

목록: [김창수,1981,42~50][김창수,1985,3~9][박종근,1995,8~17][구선희,1999,220~227][구선희,2006,94][김보경,2004,95~99][강문호,2004,109~110,116,117,127~128][차경애,2008,67][엄찬호,2006,7~13][육군본부육군군사연구소,2012,253~254][유바다,2017,336~337][학리리,2018,208~209][김경록,2018,37~39][장경호,2018,52~53][동북아역사재단한국외교사편찬위원회,2018,473]
====# 고종의 자진 청병설이 일본의 조작인가? #====
학계 가설로 고종의 청병이 일본의 조작이란 주장이 있으나 일반적으로 학계에서 통용되지 않는다. 그리고 그 가설을 제기한 이태진도 고종이 청군 차병을 허용한 것은 과오라고 평가한다는 점에서 아래에서 비판되는 2019년 무렵에 인터넷 커뮤니티에 유포된 내용은 사실 이태진의 가설과도 다르다.

소수설 내지는 가설조차 아닌 출처가 모호한 속설[⒜]에 의해 학계 동향이나 사료 발굴에 대한 오류가 확산된다. 이런 유의 글들은 자료의 출처가 모호하거나 아예 기재되어 있지 않으며, 오히려 연구자들의 학설들과도 정면으로 대치된다. 종종 자료 조작도 확인된다고 한다.

서지 정보도 50년 이상 오류가 난다. 서지 사항을 전문적으로 검토할 때 당연히 시기별 학계 동향이나 사료 발굴 시기를 고려해야 하는데 해당 글들[⒜]단군기원을 사용한 1957년 국사편찬위원회 발행 자료가 2019년 최신 발굴 됐다는 황당한 정보까지 유포된다. 이 때문에 정말 새로이 발굴된 사료에 의한 최신 학설인 줄 알고 유포하기도 한다.

주한일본공사관기록 문서에서는 분명 고종이 청에게 청군 차병을 한 것으로 나와있고 여러 연구자들이 직간접적으로 해당 사료를 인용하고 있다. 그러나 2019년에 퍼진 속설[⒜]에 의하면 ‘최신 발굴한 주한일본공사관 문서에 의하면 고종은 출병 요청을 한 적이 없고 원세개가 단독으로 요청한 사실이 드러났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속설[⒜]에서는 그 주한일본공사관기록 문서가 어디서 가져온 것이지 출처는 설명을 하지 못하고 있다. 혹은 주한일본공사관 문서의 출처를 “주한일본공사관기록 문서”라고만 적으면 출처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들에 비해 김명섭, 구선희, 강문호, 엄찬호, 신영우, 김경록 등의 연구자들은 주한일본공사관기록 문서의 출처가 어디인지 정확하게 서술하고 있다.[85][86][87][88][89][90][91]
2008년 1월 중국 안휘 교육 출판사(安徽教育出版社)에서 출판된 방대한 분량의 『이홍장 전집』에서 총 39권에서 2,600여 만 자로 된 자료집[92]이 새로 출간했으나 여기서도 기존 사실을 뒤집을 만한 기록은 전혀 나오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예를 들면 유바다는 “顧廷龍․戴逸 主編, 2007, 李鴻章全集 1~39, 安徽敎育出版社”라는 방대한 분량의 사료집을 참고해서 박사 학위 논문을 작성하였다.[93] 하지만 여기서도 고종이 청에게 청군 차병을 요청하였다고 서술한다. 그리고 국사편찬위원회 연구원인 구선희가 이홍장 전집에 대한 해제를 했었는데도 여기서도 청의 문서가 '고종의 청병 차병의 증거'로 설명하고 있으며 이홍장은 오히려 조선이 뒤처리하게 놓아두고 가능하면 빨리 조선에서 철수하기를 원하였다는 자료가 나온다고 설명하였다.[94]

그런데 청의 문서 역시 속설의 일환[⒜]으로 왜곡된 내용이 전파되고 있다. 일각에 의해 전파되는 내용은 출처 불명의 자칭 이홍장 전집에 의한 자칭 최신 학설이다. 그에 의하면 ‘새로 발굴된 『이홍장 전집』에 의하면 음력 4월 28일에 조선 정부가 청군 차병을 결정하였다가 4월 29일에 철회하였는데 원세개가 분노하여 철회를 자의적으로 해석하여 고종의 차병 요청이라 왜곡해서 조선에 밀고 들어왔다. 이 자료가 발굴되지 않아 학계에서 알려지지 않았다가 최근(2019)에야 발굴됐다.’는 것이 대략적인 논지이다.

다음 속설[⒜]의 요지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음력 4월 28일에 조선 정부는 청군 출병을 결정했으나 4월 29일에 철회했다. 그러나 원세개는 4월 29일의 철회 결정을 자의적으로 해석하여 4월 29일의 철회 결정을 '조선 정부가 청군 출병 요청을 했다'고 해석하여 밀고 들어왔다. 이 사실은 기존에 사료가 발굴되지 않아 알려지지 않아 기존 교과서에 반영되지 못했으나 최근에 사료가 발굴됐음으로 '고종이 청군을 불러서 백성을 학살했다'는 설이 부정됐다.

그러나 이 주장은 속설[⒜] 외에는 출처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이 글들은 이홍장 전집 문서의 출처를 "이홍장 전집"이라고만 적어놓고 무조건 출처라고 주장하고 있다. 기밀 문서의 출처가 어디냐고 질문하는데 "기밀 문서"라 적으면 출처라고 주장하는 격. 하지만 이홍장 전집이라면 달려있을 문서의 번호를 전혀 설명하지 못하는데 분명 이홍장 전집에는 문서마다 번호가 존재한다.

왕왕 『동학농민혁명 신국역총서 9』의 발췌본을 참고하고 이홍장 전집을 출처로 했다고 유포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 책에서도 전문가의 설명을 포함해서 일각의 설명이 없다. 그리고 『동학농민혁명 신국역총서 9』를 출처로 한 것이면 이홍장 전집을 출처로 한 것도 아니다. 『이홍장 전집』은 총 39권에서 2,600여만 자라는 분량인데 동학농민혁명 신국역총서 9에서 수록된 건 그중 극소수 분량을 발췌한 내용일 뿐이다. 그러므로 극소수 분량을 발췌한 내용에 대한 번역을 『이홍장 전집』을 본 것이라 하는 건 자료의 성격이 무엇인지 모르고 인용했다고 말하는 셈이다.

실제로 거대한 분량인 『이홍장 전집』 1권~39권을 참고한 연구자는 유바다 같은 연구자의 논문이다. 그러나 놀랍게도 이러한 속설[⒜]에서는 선행 연구 같은 건 (논문 등이 무료로 공개되어 있음에도) 읽지 않으며 트위터, 블로그, 카페를 출처로 한 신뢰성 없는 내용을 학설 내지는 연구라 주장한다.

그리고 역시 속설[⒜]에서는 '이홍장이 작성한 문건'이라 주장하는 문서가 존재한다. 하지만 이 유포된 글들에선 문서의 출처는 제시하지 못하는데 이 글들이 주장하는 문서 내용의 일부이다.
조사해 보면, 임오년과 갑십년에 폐국에서 두 차례 내란이 일어났을 때 모두 중국의 병사들이 대신 평정해 주었습니다.(중략)
원세개가 보낸 글이라고 왜곡된 문서의 일부
그러나 이 문서의 정체는 G20-05-001은 실제로는 고종 측이 청에게 보낸 문서이며 실제 김명섭, 구선희, 강문호, 엄찬호, 신영우, 유바다 등의 연구자들은 분명 논문에서 고종 측이 보낸 문서라 설명한다'[100][101][102][103][104][105] 즉 해당 문서가 원세개가 보낸 문서라는 속설[⒜]들은 서지 사항을 변조한 것이다.

마찬가지로 한국에서 실제 번역된 문서에 의하면 내용이 전혀 다르다. 음력 4월 28일에 고종은 신하들에게 동의받아야 할 공식적인 결정도 하지 않고 독단적으로 청군 출병 요청을 원세개에게 전달했으나 제대로 된 문서를 갖추지 않았다. (G20-04-034) 같은 28일에 다른 신하가 고종의 결정에 반대해서 문서를 보내지 않았다. (G20-04-036)  4월 29일에 조선 정부는 청군 출병을 요청하는 문서를 이미 완성했음을 원세개에게 전했다. (G20-04-037) 그리고 원세개는 4월 30일에 방금 문서를 받았다고 보고를 하였고 그 문서가 청군 출병 요청서라는 걸 전달하고 고종이 보낸 문서를 그대로 전달했다. (G20-05-001)[107]

청의 문서에는 그 어디에도 '(음력) 4월 28일에 조선 정부가 파병을 결정하고 29일에 파병을 철회했는데 원세개가 29일의 철회 결정을 자의적으로 해석한 주장을 보내어 청군 출병을 요청했다' 같은 내용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문서 내용이나 김명섭, 구선희, 강문호, 엄찬호, 신영우, 유바다 등의 연구자들이 분명 고종이 보낸 문서라 설명하는 증거 자료이다.

그리고 출처가 없는 자칭 ''이홍장 전집"과 같이 제시되는 출처가 육군 본부의 《한국군사사》인데 본 문서에서 직접 인용된 내용처럼 실제 서적에는 그런 내용이 없다. 출처 없는 자칭 전집과 조작된 출처 외에는 사실상 출처가 없는 것이다.

청의 문서와 주한일본공사에 근거한 '고종의 청병 왜곡설'은 1999년에 나와 학계에 검토받았으나 여전히 비주류설이며 다수 학자들에게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최근 속설[⒜]에 의하면 이것이 '최근' 발굴이나 학설이라는 허위 정보가 존재한다. 그리고 상술했듯이 서지 사항 왜곡도 동반된다.
이 속설[⒜]에 의하면 《양호초토등록》이 2019년, '최근'에 '발굴'됐다고 한다.[110]

그러나
저자 국사편찬위원회

발행사항[과천] : 국사편찬위원회, 단기4290[1957]

발행연도 1957

DDC 951.04

목차 (Table of Contents)

목차
서문 = 1
갑오실기 = 1
갑오약력 = 63
금영래찰(도원) = 77
동(운양) = 85
곡성군수보상 = 99
취어 = 101
동도문변 = 155
양호초토등록 = 161
선봉진일기 = 219
양호우선봉일기 = 259
선봉진서목 : 부령관·별군관·수령서목 = 335
순무선봉진등록 = 381
#

실제로는 1957년에 국사편찬위원회가 발행한 자료집에 그대로 실려있다. 심지어는 단군기원을 사용하는 시기에 발행됐다.

단군기원을 사용한 1957년에 국가 기관에서 발행한 도서를 속설[⒜]에서는 2019년에 발굴한 최신 사료라고 주장한 것이다. 1957년 단군기원 사용 시대에 정부 기관 사료집에 기본적으로 포함된 자료조차 최근 발굴이라고 소개한다는 점에서 전형적인 사이비 사학과 그 맥을 같이한다.
최근 발굴된 주한일본공사관 문서에서는 고종이 요청한 게 아니라 원세개의 독단적 출병이라는 사료가 발굴됐다'는 왜곡이 19~20년 무렵에 확산되었으나 실은 1980년부터 인용된 바 있다. '주한일본공사관'문서는 박종근의 《청일전쟁과 조선》(1982)에서도 인용하며 일본 외교 문서와 청의 문서를 인용해 '고종의 청군 자진 출병'을 서술한다.

이미 발굴을 넘어 사료 정리집이 나온 시기가 90년대다.
주한일본공사관기록

영인본
1988~1994년

교서본(교서・탈초・입력)
1986~2000년
#

문서 발굴 시기가 아니라 사료집 발매 시기가 위와 같다. 90년대에 이미 사료가 정리된 자료를 2019년 '최신' 발굴이라고 주장한 터무니없는 속설[⒜]의 실체이다.
같은 속설[⒜]의 다른 자료 왜곡에서는 '최근 발굴된 이홍장 전집에선 고종이 요청한 게 아니라 원세개의 독단으로 출병한 것이라는 사료가 발굴됐다'는 2019년 속설이 돌았으나 역시 출처는 그 속설이 전부. 해제에서 설명한 것처럼 문서 번호만 언급하면 되는 일이었다. 하지만 새로 발굴됐다는 문서 번호를 언급하지 못한다. 위의 구선희의 이홍장 문서 해설에도 동학 농민 전쟁 당시 파병 문제로 새로운 사료가 발견됐다는 내용이 일절 없다. 이홍장 전집에선 새로 발굴된 사료가 일부 포함될 뿐 문서집이 새로 발굴된 자료 모음집이 아니고 동학의 비중은 이 문서집에서 극소수다. 즉 이홍장 전집 ≠ 새로 발굴된 이홍장 문서 ≠ 동학에 대한 이홍장 전집이다.

2008년 1월 중국 안휘 교육 출판사(安徽教育出版社)에서 출판된 방대한 분량의 『이홍장 전집』에서 총 39권에서 2,600여만 자로 된 자료집[114]으로 이 중에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발행 도서 『동학농민혁명 신국역총서 9』에서 포함된 자료는 극소수이다. 즉 출처라 서술할 것이면 『동학농민혁명 신국역총서 9』라고 적어야 옳은 걸 속설에서는 방대한 문서집을 출처로 한 것이라 허위 사실을 기재한 것. 그리고 국역총서의 구선희의 해제 중 그 어느 내용에도 동학과 관련된 사료 최신 발굴이란 내용이 없다. 즉 동학 농민 혁명 관련 청 측 문서가 최근(2019년) 발굴됐다는 내용의 출처는 속설들뿐이다. [⒜]

그리고 위의 설명된 이홍장 전집 내의 청의 문서는 90년대 구선희의박사학위 논문(개화기 조선의 대청 정책 연구)에서 개별로 인용된 것이 확인된다. 이홍장 전집의 존재 이전에도 학계에서 인용됐다. 그리고 실제 번역된 위의 이홍장 전집 내의 문서나 구선희 설명을 읽어보면 '고종이 요청한 게 아니라 원세개가 독단으로 불러들인 것이라는 증거' 같은 이야기는 전무하고 오히려 '조선이 출병을 요청했다'고 서술된다.
참고로 고종이 절차에 의해 공식으로 요청서를 보내기 전에도 청군은 출병할 의지가 가득했다. 그런데 이것을 가지고 ‘기존 학계에서 발굴되지 않아 교과서에 실리지 않다가 최근(2019년)에 새로운 청의 사료가 발굴되었다.’는 뒷북이 근래의 속설을 중심으로 돌았다. 이 속설에 의하면 원세개가 능동적으로 출병 준비를 하였다는 청의 문서를 제시하며 2019년 최신발굴이라거나 최신설이라는 주장하는데 그 출처마저 그 속설[⒜]뿐이다. 한단계 더 나아가 ‘고종이 출병요청하지 않았는데 사료발굴이 안 돼서 학계가 몰랐다’는 소문이 있다. 그러나 출처없는 소문과 달리 원세개의 파병의지 사실은 학계에서 한참전에 파악한 내용이다. 조선이 파병요청을 할 경우 조선에 청군을 파병하여 조선내정에 관여하거나 영향력을 행사할 목적이 있었다, 같은 문서와 사실은 이미 학계에서 한참 전부터 알고 있던 사실이다.[117][118]

물론 이 논문들에서도 청이 군대 출병에 대해 신중한 태도를 취했다는 사실은 확실히 설명하고 넘어간다. 실제로 이홍장이 파병 여부를 신중하게 검토했다는 건 청 내부의 자료에서 확인된다.[119]
'사료가 최신에 발굴돼 최신학설이 교과서에 반영되지 않았다.'(2019년)는 비난은 사실이 아니다. 특히 '이홍장 전집이 최근에 번역돼서 교과서에 반영되지 않았다.'는 말은 거짓이다. 이 설명은 명백한 말장난인데 국내에 극소수의 발췌된 동학관련 편집본이 번역으로 출간하는 것과 국내학자들이 중국어 문서를 연구에 인용하는 건 별개다. 중국어 사료도 못 읽는 사람이 대학원에서 석박사 학위 정도의 연구를 할 수 있을 리가 없다.

2018년에 동북아역사재단의 한국의 대외관계와 외교사 근대 편 이 출간됐으나 여전히 고종이 원세개, 민영준과 더불어 청군 출병의 주체라 설명된다.

동북아역사재단 한국외교사편찬위원회가 서적을 발간한 목적은 다음과 같다.
이번에 발간하는『한국의 대외관계와 외교사』는 우리 역사에 나타난 사실과 행위들을 우리의 시각에서 체계화함으로써 한국 국제정치학 발전의 새로운 토대를 구축한다는 의의를 갖는다.(...)

본서는 한국의 대외관계와 외교사를 고대•고려•조선•근대 등 총 4편으로 나누어 편제하고, 각 시기 별로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정치적 환경의 변화와 그에 조응한 국내정치의 변화•발전의 양상을 규명하고자 했다. 특히 본서의 집필에는 국제정치학 뿐 아니라 한국사•일본사•중국사 등 다양한 분야의 권위있는 연구자 50여명이 참여했다. 이와 같은 방대한 규모의 집필진을 동원한 한국 외교사 통사 서술 작업은 우리 학계 초유의 일
동북아역사재단 한국외교사편찬위원회 편, 한국의 대외관계와 외교사 근대 편, 2018, 6-9쪽

본서는 새로운 토대를 구축하며 학계 초유의 일이라 설명될 정도로 학계 전문가들이 참여한 학술서다. 이 학술서엔 분명 고종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청병차병에 대한 결정을 보지 못하자 고종은 비밀리에 성기운을 원세개에게 보내 상담하면서 청병차병을 암암리에 결정했다. 결국 청병차병은 왕권을 유지하려는 고종과 정권의 기득권을 놓치지 않으려는 민씨세력의 실권자 민영준, 그리고 외압세력의 대표 원세개 사이에서 담합이 이루어져 결정되었다.
동북아역사재단 한국외교사편찬위원회 편, 한국의 대외관계와 외교사 근대 편, 2018, 473쪽

청병차병 결정에 대한 편찬을 맡은 연구자 구선희 박사이다. 즉 위의 동학농민혁명 신국역총서 9권 이홍장 전집 발췌 편집본을 해제한 박사와 동일인이다.

겨우 동학관련 발췌 본의편집본(원본 전집에서 극소수 분량)이 2017년에 번역됐으니 '최근 학설'이 그 이후 나왔다는 설명부터 말장난이다.
고종의 자진출병요청설 허위설의 출처도 왜곡됐다. 이 속설[⒜]에서는 그 출처가 《한국군사사》라고 애매모호하게 주장하는데 이것도 서지사항이 엉터리로 되어있다. 발행연도, 발행자는 물론 몇권인지도 기재하지 않는 등 출처를 엉망인데 한국군사사 중 동학농민혁명을 다룬 것은 '육군본부, 《한국군사사》9(2012)'이다. 그러나 실제 '한국군사사'에서는 전혀 다른 내용을 서술하고 있다.
동학농민군에 의한 전주점령 직후부터 정부의 차병 논의는 본격화되었다. 동학농민군을 ‘미친벌떼와 궁한 개’로 비유한 선혜청 당상 민영준은 무기력한 중앙군과 지방군의 힘으로는 도저히 이에 대적할 수 없다고 판단하였다. 4월 28일 전주 함락의 보고를 듣고 민영준을 국왕의 내락을 받아 위안스카이에게 차병안을 제의하였다. 집권 민씨세력은 초토사 홍계훈의 청에 따라 청국 ‘천병’의 힘을 빌려 이들을 토벌토록 하는 방안을 마련하고 비밀리에 이를 관철시키고자 하였다.(…) 농민들의 봉기원인을 직시하고 있던 영돈령부사 김병시는 “수렴정치에 견디지 못하여 백성이 기뇨한 것을, 바로 동학도에게 그 책임을 돌려서 수천명을 살상한 것도 참지 못하겠거니와, 여기서 청병을 청원한 것은 또 하나의 실책이다. 다른 나라의 군사를 빌려서 우리 백성을 살해한다는 것이 어찌 있을 수 있는 일인가”라고 하면서 민영준 등의 차병주장을 힐책했다.

그런데도 청국군을 부르는 것이 당시 집권세력층의 입장에서는 부득이 취할 수 밖에 없는 선택이었다. 4월 30일 조선정부에서 청나라에 정식으로 공문을 보냈다. 정부는 위안스카이를 통해 군사파견 요청서를 전달하였고, 이에 따라 청국은 군함을 곧바로 조선에 파견하였다.
육군본부 육군군사연구소, 한국군사사 9 근·현대 1, 계룡: 육군본부 군사연구소; 서울: 경인문화사, 2012, page 253~254

즉 《한국군사사》를 출처로 한 내용이 아니다. 이홍장전집, 한국군사사 둘다 실제 출처가 아니다.
고종 옹호자들은 프랑스 정부의 문서가 있다고 조작하기도 한다. 하지만 실상은
(28) [조선사변에 관한 청국내 외국인의 의향보고의 건]
기밀제8호
이번 조선 내란으로 인한 일·청 양국의 출병에 관한 건에 대하여 이곳에 있는 주요한 외국인들이 말하는 말투를 보면, 영국인은 청국이 한국 정부의 요구에 응하여 출병한 것은 정당한 일이고, 일본이 이 때문에 이의를 제기할 이유가 없고, 따라서 일·청 양국은 모두 폭동이 진정되면 조속히 따로따로 군대를 철수하면 그만이라고 하였습니다. 프랑스인은 한층 더 상세하게 평을 하였는데, 원래 이가 파병하게 된 원인은 조선 국왕의 뜻에서 나온 것이 아니고 원세개의 재량에서 나온 것이며, 또 이홍장이 출병 전 경성주재 외국공사와 영사가 모두 청병의 보호를 희망하고 있었던 것 같이 말하지만 이는 전적으로 근거가 없는 일이라고 했습니다. 또 독일인은 영국인과 별로 차이점이 없었으나, 일본이 공관과 자국민의 보호를 위하여 출병한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하였습니다
"(28) [朝鮮事變에 관한 淸國內 外國人의 意向報告의 件]" 駐韓日本公使館記錄 4권, http://db.history.go.kr/id/jh_004r_0040_0280
실상은 청국 내 외국인 중 프랑스인의 반응을 전달했을 뿐이고 해당 외국인 여론과 반응이 일치한다는 프랑스 외교문서에 대해서는 아무런 입증도 하지 못 한다. 대한민국으로 치면 이명박 시절의 국민들이 광우뻥을 믿거나 천안함 음모론을 믿는 여론이 존재한다는 사례를 가지고 대한민국의 행정 문서라고 조작하는 것과 동급이다.

그리고 청의 문서와 주한일본공사에 근거한 '고종의 청군출병자진요청 일제의 조작설'은 1999년에 나와 이미 학계에 검토를 받았다. '이태진(1999), "1894년 6월 淸軍 朝鮮 출병 결정 과정의 眞相: 조선정부 자진 요청설 비판"'이 그것이다. 이태진은 본인이 기존 학설을 비판했다고 명시한다. 즉 이 논문은 저자가 직접 비주류설임을 명시했는데 논문에서 '주한일본공사관 문서에 의한 실증'을 강조하고 있다. 이미 강조하는 논문이 1999년에 나왔음을 알 수 있다. 이 논문에선 기존학자들이 문서를 오독했다 주장한다. 즉 '최근발굴'같은 설은 이태진도 하지 않았다.

이태진은 직접적으로 기존의 통설이 식민사관의 아류라 주장하고《고종시대의 재조명》(2000)의 서문에서 통설을 침략사관설(5쪽)이라 주장한다.[121] 그러나 본인도 인정한 것처럼 이태진의 주장을 입증할 증거가 없다.
이상에 의하면 6월 3일 국왕은 다음과 같은 조건 아래 청병에 동의하게 되었던 것이라고 정리할 수 있다.

첫째, 동학농민군 진압을 위한 일차적 대응은 위안스카이가 순무 초토사의 병력을 직접 지휘하는 것으로 한다.
둘째, 조선정부의 요청으로 출병하는 청군은 동학농민군의 동향을 보고 하륙하여 움직인다.
셋째, 청군 출병이 동학농민군의 기세를 조기 제압하는 효과를 달성하고 청군이 한성에 진입하지 않는다면 만국공법이 정하는 외국병이 수도에 진입할 수 있는 조건에 따르면 일본을 비롯한 어느 나라 병력도 한성에 들어올 수 있는 구실은 없다.

위의 두번째 조건은 기록상 확실하게 입증해주는 것이 없다. 단지 위안스카이의 현장 지휘가 처음부터의 조건부였다면 출병 청군이 농민군 진압의 일선을 담당하기 위한 것이었다고는 볼 수 없다. 아산만에 도착한 청군은 실제로 동학농민군과 교전상태에 들어간 적이 없다. 그렇더라도 위와 같은 정도의 조건에서 고종이 청병을 허용하는 판단을 내렸다는 것은 결코 잘한 처사라고는 할 수 없다.
이태진, 고종시대의 재조명, 서울 : 태학사, 2000, 221
이태진도 본인의 가설에 입증할 기록은 없으며 고종이 청병을 허용한 잘못된 처사를 한 것은 이태진도 인정하고 있다.

그리고 대다수의 연구자들은 '고종의 청군출병자진요청 조작설'을 인정하지 않는다.

이태진은 이후 2010~2013년에 국사편찬위원회 위원장이였다. 당시 교과서에 핵심적인 영향력이 있었으나 당시에도 교과서의 설명은 수정되지 않았다. 이태진의 '고종의 출병자진요청설 일제의 조작설'은 여전히 비주류설이었다. 이점은 육군본부 육군군사연구소가 기획한 '한국군사사'에서도 확인된다. 당시 '한국군사사' 는 이태진 국사편찬위원장이 편찬위원장이었다. 즉 이태진은 국사편찬위원장+육군군사연구소 기획 학술서의 편찬위원장이었다. 고조선서 광복군까지… 軍制·전쟁기술 총망라

그러나 이태진의 주장은 여기서도 인정받지 못한다.
동학농민군에 의한 전주점령 직후부터 정부의 차병 논의는 본격화되었다. 동학농민군을 ‘미친벌떼와 궁한 개’로 비유한 선혜청 당상 민영준은 무기력한 중앙군과 지방군의 힘으로는 도저히 이에 대적할 수 없다고 판단하였다. 4월 28일 전주 함락의 보고를 듣고 민영준을 국왕의 내락을 받아 위안스카이에게 차병안을 제의하였다. 집권 민씨세력은 초토사 홍계훈의 청에 따라 청국 ‘천병’의 힘을 빌려 이들을 토벌토록 하는 방안을 마련하고 비밀리에 이를 관철시키고자 하였다.(…) 농민들의 봉기원인을 직시하고 있던 영돈령부사 김병시는 “수렴정치에 견디지 못하여 백성이 기뇨한 것을, 바로 동학도에게 그 책임을 돌려서 수천명을 살상한 것도 참지 못하겠거니와, 여기서 청병을 청원한 것은 또 하나의 실책이다. 다른 나라의 군사를 빌려서 우리 백성을 살해한다는 것이 어찌 있을 수 있는 일인가”라고 하면서 민영준 등의 차병주장을 힐책했다.

그런데도 청국군을 부르는 것이 당시 집권세력층의 입장에서는 부득이 취할 수 밖에 없는 선택이었다. 4월 30일 조선정부에서 청나라에 정식으로 공문을 보냈다. 정부는 위안스카이를 통해 군사파견 요청서를 전달하였고, 이에 따라 청국은 군함을 곧바로 조선에 파견하였다.
육군본부 육군군사연구소, 한국군사사 9 근·현대 1, 계룡: 육군본부 군사연구소; 서울: 경인문화사, 2012, page 253~254.

이라 설명된다. 이태진의 주장은 주석으로만 따로 설명되고 본문에서 인용되지 못한다. 이태진은 영향력이 높은 학자임에도 일제 조작설은 대부분의 학자들에게 인정받지 못함을 알 수 있다.

위에서 거론된 속설[⒜]의 공통점은 최소 50년대~80년부터 인용된 자료를 2019~2020년에 '최근 발굴'이라고 소개한다는 것이다. 학계를 반박하지 못하니 '사료가 최근에 발굴됐다.'(그러니 전문가들이 인용 못 했다.)고 왜곡하는 것이다.

그리고 2019년에 퍼진 주장은 사실 이태진의 주장도 아니다.

사실관계가 아니라 '논란이 있으므로 확신할 수 없다'는 식으로 나오기도 한다. 물론 어떻게 논란이 있다는 건지 학계 논의나 사료발굴 시기에 대한 증거는 없다. 유일한 증거는 이 속설[⒜](...)

사실관계가 아니라 '논란이 있으므로 확신할 수 없다'는 식으로 나오기도 한다. 어떻게 논란이 있다는 건지 학계 논의나 사료발굴 시기에 대한 증거는 없다.

학계 다수설을 반박하지 못하는 아마추어[⒜]들은 '논란이다', '학계에서도 갑론을박이 오간다.', '전문가들도 무엇이 사실인지 심하게 갈린다'는 식으로 말장난을 남발하며, 그것도 모자라 자칭 '논란'이란 것을 다수설을 부정하는 근거로 사용한다. 그러나 그들의 자칭 '논란'의 출처는 블로그, 트위터 썰 외에는 없다.

위에서 인용된 이태진의 논문에 대한 설명을 보라. 이태진도 분명 본인이 기존 다수설과 반대된다고 했지 '논란'이라는 주장은 전혀 하지 않았다.

이 속설[⒜]의 주장을 정리하면 '아무튼 다수설을 부정하는 학자가 있으면 무조건 논란이다. 논란이므로 사실관계를 확신할 수 없다.'는 황당한 논리구조이다.

3.4. 전주 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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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상과는 달리 일본군이 빠르게 상륙하는 흐름이 되자 놀란 조정과 동학군은 협상으로 방향을 틀었다. 동학군은 완산 전투에서 관군에게 대판 깨져서 더 이상 싸우기 어려웠을 뿐더러, 대다수 농민들에게 매우 중요한 농번기가 다가오고 있었고, 외국군대의 진주로 분쟁이 확대되는 것을 원치 않았기에 화약을 제의했다.

조정 입장에서도 청군은 물론 일본군까지 오자 곤경에 빠졌고, 완산 전투의 승리로 관군의 힘으로도 농민군을 제압할 수 있다는 사실이 입증되자 외국군의 힘을 빌릴 이유도 없어졌다. 따라서 최대한 빨리 전주성을 탈환하여 외국군의 진주 명분을 없애는 것이 중요했다. 청과 일본 양측의 군대 파병이 톈진 조약에 의거한 것이라면, 조선의 변란이 진정됐을 경우 양국 모두 즉시 병력을 철수하여야 하며 잔류하지 못한다는 조항 또한 톈진 조약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자연스럽게 협상 테이블이 마련되었다. 5월 4일 전봉준은 폐정개혁안이 담긴 청원서를 홍계훈에게 보냈으나, 다음 날 조정은 홍계훈에게 화의를 거부하고 농민군을 격멸하라는 전보를 보냈다. 그러나 다음 날 전봉준은 사자를 보내 휴전을 제의했고, 그 다음날에도 이전에 보낸 폐정개혁안을 실시하면 해산하겠다는 각서를 제출했다. 조정도 긴박한 상황 속에서 최대한 빨리 전주성을 되찾기 위해 신임 전라도 관찰사 김학진에게 전권을 주어 협상에 나섰다. 그리하여 5월 7일, 전봉준이 제의한 폐정개혁안을 김학진과 홍계훈이 수용하면서 전주 화약이 맺어진다. 다음 날 농민군이 전주성에서 나가 자진 해산하면서 1차 봉기는 마무리된다.

해산 이후 조선 조정은 6월 11일 교정청(校正廳)을 설치하고 12조 개혁안을 발표하는 등 개혁을 추진하니 이것이 바로 1차 갑오개혁이다. 한편 1차 봉기의 여파로 전라도 일대의 행정이 마비되자 전라감사 김학진과 전봉준의 6월에 만나 관민의 화합을 위해 농민들의 자치기구 설립을 합의하니 이것이 바로 집강소(執綱所)이다. 집강소는 본래 동학의 교단조직에서 유래한 것으로 전봉준이 전주에 대도소를 설치하여 집강소를 통솔하고, 전라도 53개 주읍에 집강소를 설치하여 종래의 지방 관아를 대신하여 지역을 통치하고 폐정개혁을 시행하도록 하였다. 동학 지도자였던 오지영의 소설 동학사는 이때 그 유명한 폐정 개혁안 12조가 실시되었다고 기술한다.

3.5. 2차 봉기

3.5.1.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청일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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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황이 안정되자 조선 조정은 청군과 일본군에게 이제 됐으니 철군하라고 요구했으나, 갑신정변 이후 다시 조선에 영향력을 뻗칠 기회만 노리던 일본은 이렇게 천재일우의 기회[126]를 놓칠 생각 따윈 없었다. 일본은 조선의 철군 요구에 "우리가 알아본 결과 동학난이 진압되었다는 것은 거짓이다."라는 궤변을 늘어놓으며 철군 요구를 무시하고 조선 주둔을 천명했다.

청군은 의외로 얌전하게 철군을 준비했으나[127], 일본군은 철군할 생각이 눈곱만큼도 없었고 러시아와 영국을 비롯한 유럽의 중재도 단칼에 씹어버렸다. 청의 이홍장이 공동 철수를 제안했으나 두번 다시 오지않을 기회였기에 이 역시 단호하게 거부했고, 오히려 일본은 청에게 공동으로 조선의 내정 개혁에 착수하자는 제안을 한다. 이에 청은 "동학의 난은 이미 다 끝난 상태이고 조선의 개혁은 조선 사람들의 몫이지 우리들이 이래라 저래라할 권리는 없다."고 일본의 요구를 거부했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청을 향한 일본군의 도발이 시작된다.

6월 21일, 일본군이 경복궁을 기습 점령하여 고종의 신병을 확보하고 거짓 왕명을 내세워 저항하는 조선군의 무장을 해제했다. 조선인들은 큰 충격을 받았고 일본은 얼굴마담으로 흥선대원군을 내세운 뒤 김홍집 내각을 구성하고 군국기무처를 설치하여 조선의 자주국 선언과 개혁을 강요하니 이것이 2차 갑오개혁이다.

6월 23일, 풍도 앞바다에서 일본군이 청군 해군을 기습 공격하여 2척을 침몰시키면서 청일전쟁이 발발한다. 조선 땅은 전쟁터가 되었고 청군은 일본군에게 참패하여 조선 땅에서 쫓겨났다. 이어지는 위기는 조선인들에게 위기감을 심어주었고 동학 농민군 2차 봉기의 발단이 되었다.

3.5.2. 농민군의 재봉기

일본군이 경복궁을 점령하자 농민군들은 재빨리 재무장과 재봉기를 준비하였다. 전국의 동학 조직들은 백성들을 동학에 입교시켜 세를 불리고, 무기와 군량미를 모으기 시작했다. 고을마다 설치된 집강소가 농민군과 군수물자를 모으는 역할을 했다. 그러나 동학농민군은 여러 지도자들의 합의로 굴러가는 시스템이라서 재봉기에는 시간이 걸렸으며, 재봉기 준비도 각 지도자들에 의해 따로따로 진행되었다.

여기에 대해 외부에서 동학 농민군의 기포를 유도하는 시도가 있었다는 주장이 있다. 첫 번째는 흥선대원군인데, 구한 말 정변에는 모두 대원군 개입설이 있으며 상당히 유력하다. 흥선대원군이 동학농민군을 서울로 불러들여 고종을 몰아내고 손자 이준용을 왕으로 옹립하려고 했다는 것이다.

대원군은 겉으로는 효유문을 내려 동학농민군의 봉기를 꾸짖었으나, 뒤로는 자신이 아끼는 인물인 정석모를 통해 효유문이 본인의 뜻이 아님을 알리는 효유문을 김개남에게 전달했고, 그와 별개로 거병하여 서올로 올라올 것을 촉구하는 밀지를 이건영을 통해 전봉준과 김개남에게 전달했다. 또한 대원군은 동학과 밀통하던 이준용의 연락책인 이병휘가 경무사 이윤용에게 투서하자 즉시 그를 체포하여 입을 막으려 들었다.

다만 이 시기에는 일본의 경복궁 침공이 있었으므로 고종이 억류된 상황이었는데, 대원군이 고종의 밀서를 위조해서 전봉준에게 봉기를 지시했다는 이야기도 존재한다. 동학의 2차 봉기가 고종과 연결되어 있는지, 대원군과 연결되어 있느냐는 나름대로 중요한 의미가 있... 을 수도 있었다. 뭐 결국 실패하면서 크게 영향력이 없어져 버렸지만. 정부와 일본 측에서도 봉기를 진압한 후 전봉준에게 동학과 대원군의 관련성을 물었지만 전봉준은 마지막까지 대원군과의 관련성을 부인했다.

두 번째는 일본이다. 일본군 참모 가와키미 소로쿠와 히라오카 쇼타로가 '청국을 토벌한다'는 묵계 아래 우치다 료헤이 등 14명의 낭인들이 천후협단이라는 조직을 만들었다. 이들은 조선으로 가 전봉준을 만나 거사를 촉구하고 무기를 지원하였으며, 홍계훈이 농민군에 보낸 사자를 죽이기까지 했다. 물론 동학군이 승리했다는 둥, 지명이나 인원이 훨씬 적고 쌩뚱맞다는 점에서 신빙성 있는 기록은 아니다.

동학 측 기록인 《천도교 창건사》에도 "일본인 다케다 한지(武田範之) 등 15명이 금시계 1개와 마노(瑪瑙: 보석의 일종) 하나를 보내어 믿음을 보이고 면회를 청한 즉 전봉준이 거리낌 없이 이들을 면담하고 시국을 서로 논하였다"라는 말이 있다. 하지만 2차 봉기 이후, 대원군 등에 의해 성격이 청과 (전략적으로) 손잡고 일본과 싸운다는 것으로 바뀌면서 FAIL.

어쨌든 이렇게 재봉기를 준비하던 동학 지도자 중 가장 움직임이 빠른 자는 김개남이었다. 남원을 중심으로 전라좌도를 세력권으로 가지던 김개남은 두 달 동안 준비한 끝에 8월 25일 재봉기를 선언했다. 전봉준과 손화중은 시기상조라며 반대했지만 김개남은 흩어진 대중은 다시 모으기 어렵다며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미 8월 말에 예천에서 읍내의 민보군과 농민군의 교전이 벌어지고, 경상도 북서부에 설치된 일본군 보급기지에 농민군이 모여 일본군에 위협을 가하고 일본군 정탐조를 죽였으며, 이에 일본군이 예천과 산양의 농민군 근거지를 습격하여 무기를 탈취하는 등 전운이 고조되고 있었다.

전봉준은 수많은 사람들은 일시에 집결시키기 어렵고, 추수철이 다가오고 있으며, 자신에게도 병이 있다는 이유로 재봉기를 미루었다. 하지만 김개남이 독자적으로 재봉기를 결정하고, 각지의 동학조직이 무기를 들어 재봉기 한 것이나 다름없게 되자 전봉준도 더는 미루지 못하고 9월 초순에 다시 거병하였다. 전봉준은 농민군의 대도소를 삼례에 설치했지만 김개남은 오지 않았다.[128]

한편 동학의 2대 교주인 최시형은 1차 봉기 때부터 시기상조론을 내세워 전봉준의 봉기에 호응하지 않고 되려 충청도의 동학조직이 전봉준에 가담하지 못하도록 했다. 과거 이필제의 난 때 이필제를 지원했다가 크게 데인 기억이 있었던 데다가 전봉준의 봉기가 동학조직의 위계질서를 무너뜨리는 행위라고 보았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북접은 남접군을 몰아내겠다고 출병까지 고려하고 있었다. 북접은 난이 정치성을 띠는 걸 경계하였으며 특히 대원군과의 결탁을 탐탁치 않아 하였다. 이걸 막은 것은 남접이 생각보다 잘 싸웠기 때문이지, 일본과의 문제가 벌어졌기 때문이 아니다. 교도들을 죽을걸 뻔히 아는 상황으로 내모는 것은 교주인 최시형 관점에서 못할 짓이었으며 그렇기에 무장봉기를 일으킨 남접을 곱게 볼 수 없었던 것이다. 말 그대로 남접이 생각 이상으로 잘 싸웠기에 호응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지 만약 남접이 패배했더라면 자신은 물론이고 동학교도 전체의 목숨이 위험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1차 봉기의 승리는 충청도의 동학조직도 술렁이게 했고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은 동학교도의 분노를 불러일으켰다. 이렇게 되자 최시형도 입장을 바꿔 9월 18일 기포령을 선언했고 손병희를 지휘관으로 삼았다. 각지의 동학조직은 기다렸다는 듯이 거병하여 관군, 일본군과 교전하고 청주성을 공략하는 등 무장활동에 들어갔다. 9월 10일 전봉준은 삼례에 대도소를 설치했고 진안, 금구, 전주, 정읍, 부안 등지의 접주들이 삼례로 모였다. 전봉준은 거병에 동참할 것을 호소하는 통문을 각지에 돌리고 손화중, 최경선, 김개남 등 다른 동학 지도자들과 연락하였으며, 하부 조직들을 동원해 거병에 필요한 식량과 무기를 모았다. 농민군은 각지의 관아를 습격하여 무기를 탈취해 무장했다. 1차 봉기 때와 마찬가지로 경기도, 경상도, 평안도 등지에서도 농민군의 봉기가 잇따랐다.

3.5.3. 조정과 일본의 진압태세

조선 조정 또한 상황이 심상치 않게 돌아간다는 사실은 이미 파악하고 있었다. 농민군이 서울로 쳐들어온다는 소문이 나돌고, 경기도에서도 농민군의 봉기가 일어나자 조정은 즉시 진압에 착수했다. 9월 10일 무관 이두황(李斗璜)과 성하영(成夏泳)을 봉기가 일어난 죽산과 안성의 수령으로 임명했으며, 9월 21일에는 양호순무영을 설치하고 신정희(申正熙)를 도순무사로 삼은 뒤 각지에 소모사(召募使)와[129] 토포사(討捕使)를[130] 파견했다.

하지만 점점 봉기는 격렬해져갔고, 농민군 수만 명이 충청감영을 공격하는 등 지방군의 병력으로는 봉기를 진압할 수 없다는 사실이 명백해지자 조정은 9월 29일 양호선무사를 폐지함으로써 무력진압에 나서게 된다.

한편 일본도 9월쯤에 농민군이 봉기할 거라는 사실을 예측하고 있었다. 일본군은 동학의 재봉기 이후 비공식적으로 농민군 진압을 시작하고 있었는데, 정식으로 조선정부가 일본 측에 진압요청을 하기 전부터 오오토리 일본공사가 조선 정부에 농민군을 진압하라고 강요하였다. 일본군이 조선정부에게 동학 농민군을 진압하라고 강요한 명분은 일부 동학군이 청군과 결탁하여 일본군에 대항한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조일연합군의 진압 작전은 철저하게 일본군 지휘 하에 이루어졌다.[131]

이 당시 조선군은 보급난에 시달렸는데, 정사와 야사 모두 일본군이 경복궁을 무력으로 점령할 당시 조선군이 자신들의 군수 물자와 생산 시설을 죄다 파기해버렸기 때문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주력 소총인 마우저와 레밍턴의 탄약은 물론 주요 지원 화기인 회선포와 크루프 야포들의 포탄도 제대로 보급이 안 돼 일선에서는 탄약을 줄기차게 요구하였고, 1선에서 물러난 암스트롱 야포까지 끌고 올 정도였다. 그래서 1차 동학난 때 동학군을 전주성에 몰아넣고 크루프 야포와 개틀링 기관총으로 도륙한 조선군은 2차 때에 이르면 일본군이 주는 물자에 의지하지 않을 수가 없게 되어버린 것이다. 이 때문에 물자 보급이 제대로 되질 않아 이 당시 조선군의 보급은 일본군이 해주고 있었다.

조선 조정은 일본에 도움을 요청했고, 일본은 9월 18일 도와주겠다는 의사를 표시했다. 9월 21일 조선은 일본의 제의를 수락했고 9월 28일 신임 일본공사 이노우에가 일본 대본영에게 1개 대대의 병력을 파견해 달라고 요청했다. 10월 2일 대본영은 미나미 고시로 보병소좌가 지휘하는 일본군 후비보병 독립 19대대를 조선에 파견했다.

그러나 전술한 대로 일본은 조선의 요청이 있기 전에 단독으로 농민군에 대응하고 있었다. 9월 17일 일본은 농민군을 진압하기 위해 군을 내려보내기로 결정했고 9월 말과 10월 초에 인천과 용산수비대에서 병력을 차출하여 충주로 내려보내 농민군과 교전했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진압작전에 참여한 일본군은 미나미 고시로가 지휘하는 제19대대를 중심으로 제18대대와 제10연대에서 1개 중대씩 차출하고 제6연대에서 차출한 4개 중대까지 합쳐서 모두 9개 중대 1,900여 명이었다. 조선군은 순무영(巡撫營)[132] 및 친군 경리청(親軍經理廳) 2개 대대(약 1,000명)와 일본군에게 훈련받고 일본군 지휘계통 아래 있던 최정예 교도중대(350여명)이 진압작전에 참여했다.

3.5.4. 우금치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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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봉준은 삼례에 대도소를 설치한 이후 1달 동안 삼례에 머무르며 추수철이 끝나기를 기다리고, 군수물자를 모았다. 10월 12일 농민군 4천여명이 북상을 개시했고, 그와 함께 여러 동학 지도자들이 행동을 개시했다. 남원의 김개남은 49일을 채워야 한다는 참위설을 내세워 움직이기를 거부했지만 최경선과 손화중은 바다에서 온다는 일본군을 막기 위해 광주로 내려가고 김복용, 박덕칠, 박인용, 김인배는 각각 중앙축선, 서해안 평야지대, 해안가로 남하/상륙하는 관군과 일본군을 막기로 했다.

9월 18일 기포를 결정한 북접에서도 동원령을 전달하고 청산대회를 열어 전열을 정비하는 등 봉기를 준비했다. 10월 12일 남접의 농민군은 논산에 도착했고 전봉준은 다시 농민군을 모아 군세를 불렸다. 10월 16일 남접과 북접은 논산대회를 개최하여 전봉준을 총대장으로 선출했고, 전봉준은 스스로를 양호창의군(兩湖倡義軍)의 영수(領袖)라 칭하며 충청감사 박제순에게 봉기에 동참할 것을 권유하는 글을 보냈다. 이때 전봉준은 1만~4만에 달하는 대병력을 거느리고 있었다. 이에 맞서 공주를 지키는 군사들은 관군과 일본군 합쳐 1,200여명 정도였다. 열흘에 걸쳐 힘을 비축한 전봉준은 10월 22일 이인을 점령하면서 공주 공략에 나섰다.

하지만 10월 21일에 발발한 세성산 전투에서 김복용 부대가 진압군에게 격파당하고, 전봉준과 손병희의 공주 공략 또한 10월 25일의 능치 전투에서 패배하면서 실패하였다. 그리고 10월 28일에는 홍주성 전투에서 농민군이 관군에게 패하고 말았다.

첫 번째 공략이 실패하자 전봉준은 조금 뒤로 물러나 농민군의 기세를 가다듬고, 부족한 병력을 보충한 뒤에 다시 공주 공략에 나섰다. 하지만 관군과 일본군도 세성산 전투와 홍주성 전투에서 승리하여 공주 방면에 집중할 수 있게 되었고 일본군 19대대와 경군 부대들이 차례차례 도착하면서 전력이 증강되었다. 전봉준과 손병희는 다시 한 번 공주를 협공하려고 했고 초전에서 이인과 널티를 점령하며 공주 점령의 교두보를 확보하지만 11월 9일 우금치 고개에서 우월한 신식 무기로 공격하는 관군-일본군의 맹렬한 사격을 버티지 못하고 전봉준의 부대가 패주하고 말았다. 전봉준과 같은 시기에 능치를 공격하던 손병희의 부대도 위장한 관군의 급습에 부대가 와해되며 패배하였다. 이것이 바로 동학 농민 혁명의 성패를 결정지은 우금치 전투이다.

3.5.5. 청주성 전투

청주성은 한양으로 올라가는 길목에 위치하고 있어 2차 봉기 이후 농민군의 공격을 받았다. 청주의 동학 지도자인 손천민(孫天民)은[133] 9월 23일 농민군과 함께 청주읍성을 공격하였다. 성을 지키던 청추병사 이장회(李長會)는 성문을 닫고 구원군을 기다렸지만 원군이 오지 않자 출성하여 농민군을 공격했다. 농민군은 패퇴했고 청주 병영의 군관 이용정(李容正)은 청주 일대의 농민군 근거지를 돌아다니면서 손천민의 근거지 솔뫼마을을 파괴했다. 수십 명의 전사자를 내고 패퇴한 농민군은 청주를 떠나 보은으로 후퇴했다.

이후 10월 29일 다시 한번 농민군이 청주성 공략을 시도했다. 하지만 문의에 있던 친군진남영[134] 병사 30명과 미야모토 소위가 지휘하는 일본군이 청주성으로 돌아오자 농민군은 다시 후퇴했다. 하지만 미처 소식을 듣지 못하고 남아있던 농민군은 토벌군의 기습을 당했고 16명이 체포당했다. 이렇듯 청주성에 주둔하고 있는 진남영은 스나이더-엔필드 소총을 보유한 정예부대로 몇 번이나 농민군의 공격을 막아냈으나, 10월 31일 대전평에서 관군 73명이 농민군의 기습으로 전멸하면서 사기가 떨어져 있었다.

마지막으로 청주를 공략한 사람은 바로 김개남이었다. 김개남은 한동안 근거지인 남원에 남아있다가 10월 14일 남원을 떠나 16일 전주성에 입성했다. 그리고 신임 남원부사 이용헌, 고부군수 양필환, 순천부사 이수홍을 탐관오리로 몰아 처벌했다. 김개남은 전주에 머무르다가 11월 초 북상을 시작하여 1만 5천 명의 농민군을 이끌고 진잠과 신탄진을 거쳐 청주로 향했고 문의에서 올라온 농민군 1만과 합류하여 2만 5천 명에 달하는 병력을 거느렸다. 반대로 청주성은 진남영과 이장회의 요청에 따라 구와하라(桑原榮次郞) 소위가 지휘하는 일본군 1개 소대가 지키고 있었다.

11월 12일 밤, 김개남은 부대를 둘로 쪼개 하나는 문의, 나머지 하나는 신탄진으로 진격시켜 청주 공략을 시도했다. 일본군은 청주성 남문으로부터 600m 정도 떨어진 고지에 숨어 농민군을 기다렸다. 농민군이 청주성 공략을 위해 진격하자 일본군은 기다렸다가 농민군의 뒤를 쳤다. 남문 500m 앞까지 진격하여 교전하던 농민군은 일본군의 기습을 받자 20여명의 전사자와 수많은 군수물자를 잃고 퇴각했다.

김개남은 진잠으로 후퇴했지만 여기서 민보군의 공격을 받아 또 물러날 수밖에 없었으며 연산에서 다시 한 번 일본군과 접전한 뒤 논산으로 후퇴하여 전봉준과 재회했다. 하지만 수만을 헤아리던 그의 부대는 이제 겨우 500여명만 남아 있었다. 청주성 전투와 비슷한 시기 우금치에서 전봉준이 패배하면서 농민군의 한성 탈환은 좌절되고 전황은 농민군의 퇴각과 토벌군의 추격으로 전환된다.

3.6. 혁명의 종말

3.6.1. 연산 전투

우금치 전투가 한창 벌어질 무렵 일본군 3중대와 본부대대는 공주로 남하하던 중 농민군의 저항에 부딛쳐 진로를 변경, 13일 오후 4시를 기해 연산에 입성했다. 이들은 2중대와 힘을 합쳐 노성에 있는 전봉준손병희의 농민군 대지휘소를 공격할 생각이었다. 이에 맞서 공주의 동학농민군 대지휘소는 김순갑과 임동호에게 농민군 수만 명을 주어 연산을 치도록 했다. 이들은 김개남과 합류하여 황산성을 중심으로 여러 고지를 선점하였다. 때마침 연산 현감 이병제가 농민군에게 호의적이라서 일본군은 진격을 도울 인부도 제대로 못 구하는 등 시간을 낭비하였다.

11월 14일 일본군은 예정보다 늦은 시각에 연산을 떠났지만 불과 몇 분 지나지 않아 동학군과 교전하기 시작했다. 일본군 지휘관 미나미 고시로 소좌는 2개 분대로 농민군의 배후를 공격하려고 했으며 본대는 정오 무렵에 연산을 출발했지만 곧바로 황산성과 인근 언덕들을 점령한 농민군 수천 명과 마주했다.

일본군 전위소대는 산을 올라 농민군 지휘소를 공격하고, 각각 1개 분대가 좌우와 후방을 지켰다. 농민군은 레밍턴, 스나이더 소총 등 신식무기를 보유하고 있었지만 오후 2시경 일본군이 전방에 2개 분대를 추가로 보내 공세 수위를 높이자 농민군 11명이 죽었다. 2시 30분을 기해 농민군은 마을에 불을 질러 방어벽을 만들고 서서히 후퇴하기 시작했다. 각 고지의 농민군은 서서히 밀려나고 있었고 황산성에 있는 농민군 지휘부는 4시간이 넘도록 저항하였다. 그러나 은진으로 갔던 일본군 1개 지대가 농민군에 막혀 돌아가던 중 본대가 농민군에 포위된 걸 보고 배후에서 공격해서 농민군의 진영을 흔들었고 그 틈을 타 일본군이 총공세에 들어가면서 농민군은 패배했다.

농민군의 주력부대는 4시 45분에 노성, 은진 방면으로 퇴각했고 일본군은 2개 분대로 소탕전을 벌여 농민군 패잔병을 모조리 패퇴시켰다. 이 전투에서 농민군은 김순갑과 농민군 50명이 죽었고 일본군은 상병 스기노 토라키치(杉野寅吉)[135] 빼고는 누구도 죽지 않았다. 그러나 농민군은 이 전투로 2중대와 3중대의 협공을 차단하여 농민군 지휘부가 공주에서 노성으로 후퇴할 틈을 벌었다.

3.6.2. 논산 전투

11월 13일, 우금치에서 패배한 농민군 지도부는 노성의 봉화산[136]으로 이동했다. 그리고 관군과 백성을 대상으로 다음과 같은 격문을 내걸어 반외세에 기반한 단결과 지지를 호소했다.
다름이 아니다. 일본과 조선이 개국 이후로 비록 이웃나라이기는 하지만 누대로 적국이었다. 그런데 임금의 인후(仁厚)하심에 힘입어 세 항구를 개항하여 통상을 허락하였다. 이후 갑신년(1884년) 10월에 4명의 흉적이[137] 적의 위세를 등에 업음에 따라 임금의 안위가 조석에 달려 있었으나, 종묘사직이 부흥하여 간당(奸黨)을 소멸하였다. 금년(1894년) 10월에[138] 간악한 개화당(開化黨)이 왜국(倭國)과 결탁하여 밤을 틈타 서울로 들어와서, 임금을 핍박하고 국권(國權)을 제멋대로 농단하였다. 더구나 방백(方伯)과 수령이 모두 개화당 소속으로 백성을 보살피지 않고 즐겁게 살륙(殺戮)을 자행하며 생령을 도탄에 빠뜨렸다. 이에 우리 동도(東徒)가 의병을 일으켜 왜적을 소멸하고 개화당을 제압하며 조정을 태평하게 하고 사직을 보전하고자 한다.

그런데 의병이 이르는 곳마다 관군과 군교(軍校)가 의리(義理)를 생각하지 않고 나와서 접전을 하여 승패(勝敗)는 나지 않고 인명만 상하니 어찌 불쌍하지 않겠는가? 사실 조선 사람끼리 서로 싸우자는 것이 아닌데, 이처럼 골육상전(骨肉相戰)을 벌이니 어찌 애달프지 않겠는가? 또 공주(公州)와 한밭[대전]의 일로 논하더라도, 이것이 비록 원수를 갚은 것이라고는 하나 일이 참혹하고 후회막급이다. 방금 대군[일본군]이 서울로 들이닥쳐 사방이 흉흉한데 편벽되게 서로 싸우기만 한다면 이는 골육상전이라 할 만하다. 한편 생각건대, 조선 사람끼리는 도(道)는 다르지만 왜를 배척하고 중국을 배척하는 의리는 마찬가지이다.

이에 두어 자 글로 의혹을 풀어 알게 하노니, 각자 자신을 돌아보아 임금에게 충성하고 나라를 걱정하는 마음이 있다면 귀의(歸義)하여 서로 의논하여 함께 왜와 중국을 배척하여 조선이 왜국이 되지 않도록 몸과 마음을 합하여 큰 일을 이루도록 해야 할 것이다.

갑오년 11월 12일
동도창의소(東徒倡義所)
농민군 지휘부가 노성에서 내건 격문 출처
농민군 지휘부는 연산에 병력을 보내고 군량을 마련하는 등 병력을 재정비했다. 전봉준이 노성에 있다는 보고가 들어오자 일본군 1소대와 장위영병 1대대, 통위영병 200명으로 구성된 810명의 조일 연합군이 노성으로 향했다. 15일 자정 무렵 토벌군은 토벌작전을 개시하여 세 부대가 세 갈래 길로 봉화산을 압박해 갔지만 이미 농민군 지휘부는 논산으로 떠난 뒤였다. 일본군은 노성에 남아있던 농민군 10여명을 죽였을 뿐이었고 토벌군은 노성에 모인 뒤 오전 8시에 논산으로 향했다.

논산으로 퇴각한 농민군 지도부는 허기와 추위에 시달리고 있었지만 여산접주 최난선과 김개남이 합류하여 3천여 명의 병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오후 2시가 되자 일본군과 통위영 병력이 소토산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농민군은 총포를 쏴대며 토벌군의 진입을 막았지만 일본군은 800m 지점까지 진격했고 통위영은 농민군의 우익을, 니시오카 조장이 이끄는 일본군 1소대는 정면과 좌익을 공격했다. 오후 3시가 되자 일본군 1소대는 600m 지점까지 진격했고, 일제 사격을 퍼부어 통위영의 진격을 엄호하는 한편 자신들도 100m 진격했다.

오후 3시 30분이 되자 토벌군의 맹렬한 공격이 이어졌고 농민군 지휘부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1소대와 통위영이 함께 돌격하니 농민군은 소토산을 버리고 성벽이 있는 황화대로[139] 후퇴했다. 통위영 병사들은 소토산 정상까지 진격하여 깃발을 뽑아버리고 자신들의 대장기를 꽂아 소토산을 함락했음을 알렸다.

농민군은 사방이 탁 트이고 성벽이 있어 방어하기 편한 황화대를 다음 결전장으로 삼았다. 소토산 전투로 지친 일본군과 통위영을 대신해서 밥 먹고 오느라 뒤늦게 도착한 장위영이 황화대를 공략하게 되었다. 여기서 관군과 일본군의 기록이 차이가 있는데, 관군 쪽 기록은 장위영 2개 소대가 황화대의 서남쪽을 포위하고, 참영관 원세록이 반 개 소대로 허수아비 병사들을 만들어 적을 속이며, 대관 박영호, 이규식, 별군관 김광수가 1개 반 소대를 이끌고 황화대 동북쪽의 작은 능선을 따라 공략하고, 서남쪽을 포위한 병력과 함께 올라가 농민군 300여명을 사살했다고 한다.

반대로 일본군 쪽은 일본군과 통위영이 황화대 동쪽 고지대를 점령한 뒤 일제사격을 가해 농민군 대령를 흐트러트리고, 그 사이 장위영과 통위영, 일본군이 세 방향에서 공격을 가하자 농민군이 퇴각했다고 하고 있다. 일본군 기록에 의하면 아군 사상자는 전무하고 적군은 20명의 전사자를 냈으며 활과 화살, 잡색 깃발을 노획하고 나머지는 불태웠다고 하고 있다.

어느 쪽 기록을 따르든 동학농민군은 황화대 전투에서도 패배했다. 농민군은 황화대를 버리고 전주로 도망칠 수밖에 없었으며 인적 피해는 물론 대장기와 목인(木印)을 빼앗기는 치욕을 당했다.

3.6.3. 원평 전투

연산, 논산 전투의 패배로 농민군은 충청도에서 밀려나 전라도로 쫓겨났으며 전봉준 휘하 병력은 500명에 불과했다. 전주성에서 농민군은 둘로 나뉘어 전봉준과 손병희는 고부로, 김개남은 남원으로 이동했다. 11월 23일 전주성은 관군과 일본군의 손에 들어왔고 전봉준은 금구에서 초모하여 병력을 보충하고 원평에 있는 마을 구미란(龜尾卵)[140] 뒷산에 1만의 농민군으로 품(品)자 진형을 짰다. 전봉준 뒤에는 일본군 제19대대 소속 1개 대와 대관 최영학(崔永學)이 이끄는 교도중대가 뒤쫓고 있었다.

11월 25일 오전 9시, 구미란 뒷산에서 농민군은 추격하는 관군-일본군과 교전했다. 농민군은 총포를 쏴대며 저항했지만 최영학이 칼을 빼들고 돌격하자 관군과 일본군 병사들이 뒤따라 돌격하여 농민군을 무너뜨렸다. 당초부터 구미란 뒷산은 그리 높지 않았던 탓에 고지의 이점이 별로 크지 않았고, 농민군은 전사자 37명을 내며 패주했다. 관군과 일본군 사상자는 한 명도 없었으며 농민군이 버리고 간 회룡총 10정와 조총 60정, 자포(子砲) 10좌(坐), 총칼과 화약, 탄환 등 무기 뿐만 아니라 쌀과 돈, 소와 말 등 군수물자까지 노획하였다. 구미란을 함락한 교도중대와 일본군은 금구읍으로 향하고, 우금치에서 전봉준과 싸웠던 일본군 서로분진대와 경군 장위영 부대가 태인으로 후퇴한 전봉준의 뒤를 쫓았다.

3.6.4. 태인 전투

원평에서도 패배한 전봉준은 태인에서 8,000여 명의 농민군으로 다시 결전을 시도했다. 11월 27일 농민군은 성황산, 항가산, 도리산 등 9개 봉우리에 진을 치고 방어선을 구축하였다. 이에 관군 230명과 일본군 40명으로 구성된 토벌군이 군을 나누어 태인 공략에 나섰다.

농민군은 고지대에서 총을 쏴대며 관군을 공격하였다. 관군 90명과 일본군 20명은 서쪽 길로 방어선을 공격했고 관군 140명과 일본군 20명이 동쪽 길로 나아갔다. 총격전이 이어졌고 토벌군이 달려오자 농민군이 겁에 질린 나머지 대열이 무너져 흩어져버렸다. 하지만 도리산과 항가산에서 밀려난 농민군이 성황산에 모여 회룡총을 쏴대며 저항을 이어가자 토벌군은 다시 산에서 내려와 모인 뒤 네 갈래로 나뉘어 총을 쏘면서 성황산으로 돌격했다. 그러자 농민군은 당해내지 못하고 또 패배하여 고부와 남원으로 패주했다. 토벌군은 패주하는 농민군은 20리 정도 추격했다.

태인에서도 농민군은 크게 패하여 40여명이 죽었고 50여명이 붙잡혔으며, 회룡총 15자루와 조총 200여 자루, 탄약과 죽창, 말 6필을 빼앗겼다. 반면 토벌군은 이번에도 한 명도 죽지 않았다. 농민군이 진을 친 산들은 그리 높지 않았고 겨울이라 낙엽이 다 떨어져 몸을 숨기기에도 여의치 않았다.

더 이상 싸우기 어려워진 전봉준은 농민군을 해산했다. 후방에 남아서 나주를 공략하던 손화중, 최경선도 대세가 기울어지자 12월 1일 농민군을 해산했다. 반면 북접은 태인의 패배 이후에도 포기하지 않고 충청도로 돌아와 손병희의 지도 하에 12월 내내 항전을 계속했지만, 청주 영병과 민보군, 보부상의 저항으로 패배했고 일본군과 관군의 연이은 습격으로 더 이상 싸우기 어려워지자 12월 말 최시형의 명으로 농민군을 해산했다.

3.6.5. 대둔산 전투

우금치 전투가 그렇게 막을 내리고 나서 전봉준, 김개남이 체포된 후 더 이상 기반을 잃은 동학 농민군의 잔당은 동학의 접주급 이상 지도자 25명이 마지막 항쟁을 결의하고 대둔산[141]으로 피신하여 산세가 험난한 정상부에 요새를 설치한다. 1894년 12월 중순부터 약 석 달여간 관군 및 일본군과 치열한 항전을 벌이다가 1895년 2월 18일 포로로 붙잡힌 어린 소년 1명을 제외하고 전원이 전사한 대둔산 전투가 있었다.

1894년 12월 경, 이곳에 함께 들어간 동학 농민군 지도부는 최학연(崔鶴淵)과 최공우(崔公雨), 김재순(金在醇), 김석순(金石醇), 진수환(陳秀煥), 강태종(姜泰鍾), 김치삼(金致三), 장문화(張文化), 김태경(金台景), 정옥남(鄭玉男), 고판광(高判光), 송인업(宋仁業) 등의 간부급 지도자와 가족들을 포함해서 30여 명이 되어 험난한 대둔산에 조그마한 진지를 짓고 끝까지 최후의 농성을 벌이게 된다. 마침내 1895년 1월 9일(양력 2월 3일)에 충청도 감영은 대둔산에 입산한 동학 농민군을 토벌하기 위하여 관군을 출동시켰다. 지휘관인 양호소모사 문석봉(文錫鳳)은 양총(洋銃)[142]으로 무장한 40여 명의 영군을 이끌고 10일에 터골(基洞)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험준한 바위 봉우리로 이루어 진 대둔산 산세를 보고 접근하여 공격할 엄두도 내지 못하고 조방장(助防將) 김학립(金鶴立)으로 하여금 미륵 바위 서남쪽 100m 떨어진 계곡 너머 능선에서 몇 차례 사격하는 것을 끝으로 진산으로 철수하고 말았다. 그 당시 주한 일본 공사관 기록에는 "터골(基洞)에 이르자 전주에서 파견된 한병(韓兵)(사관 1명, 병졸 30명)이 대포를 산 위로 끌어올려 적의 소굴을 향해 줄곧 포격하고 있었다. 대포가 1,500m나 떨어져 있는 데다 200~300m 아래쪽에서 포격하니 포탄은 적의 소굴 훨씬 전방에 떨어져 한 발도 명중하지 않았다." 라고 기록되어 있어서, 험준한 지형으로 인해서 쉽사리 동학 농민군 공략이 여의치 않았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1월 23일(양 2월 17일)에 신식 무기로 무장한 강화 심영병(沁營兵)과 일본군 3개 분대[143]가 터골에 도착하여 1895년 1월 24일(양력 2월 18일) 아침 공격을 개시하니 상황은 급박해졌다. 이 전투의 기록을 담은 대둔산 부근 전투 상보에 의하면 동학 농민군은 후방에서 기습한 관군과 일본군을 막지 못해 처참한 최후를 맞았다고 전해진다. 그 당시 이들을 이끌던 동학의 접주인 김석순은 일본군의 포로가 되는것을 완강히 거부하고 1세 ~ 2세가 된 그의 갓난아기를 안고 투신하여 자결을 하였고, 험난한 산중의 뒤에서 기습을 할 줄 모르고 앞을 중심으로 방어하던 농민군들도 우왕좌왕하다가 결국 전원이 전사하고 말았다.

3.6.6. 농민군의 최후

일본군은 포상금을 조건으로 동학군의 소재를 밀고하는 자의 안내에 따라 대대적인 소탕작전을 벌였다. 주요 인물 중 하나였던 김개남은 그의 매부 서영기의 집에 숨어있다가 잡힌 후 전주로 압송되었고 그곳에서 바로 참수되었는데, 이는 전라 감사 이도재의 독단으로 당시 법률로는 불법이었다. [144] 이도재의 독단적인 판단 때문에 조선 정부와 일본의 마찰이 생겼다. 일본 측에서는 공사를 파견하여 이도재의 독단 행위를 조사하고 처벌을 같이 상의하자고 하였으나 조선 정부가 그를 감싸면서 이도재는 결국 감봉 3개월의 가벼운 처벌만 받을 수 있었다.

최시형손병희는 농민군을 해산한 뒤 강원도와 충청도를 오가면서 최대한 관군의 추격을 따돌렸지만 1898년 최시형은 손경인의 밀고로 체포되어 교수형에 처해졌다. 손병희는 최시형이 이끌던 북접을 물려받았지만 탄압을 견디지 못하고 1901년 일본으로 넘어갔다. 손화중은 1895년 유생 이봉우의 밀고로 관군에게 체포되어 교수형을 당했고, 김덕명, 최경선도 같은 해 처형당했다.

금구로 도피한 전봉준은 다시 동학군을 재건하려 했으나 1894년 11월 내부 배신자의 밀고로 순창에서 관군에 체포당했고 다른 주모자인 손화중, 최경선, 서장옥 등도 역시 체포되었다. 재판 공초를 보면 배후, 특히 대원군과의 관계를 캐묻는 심문관과 이에 대해 자신이 주모하였음을 주장하는 전봉준의 모습이 나타난다.[145] 일본군은 전봉준을 포섭하기 위해 최대한 그를 살려보려 하였으나 전봉준은 그럴 마음 따윈 없어서 결국 교수형에 처해진다. 봉기가 시작된지 1년 2개월 만인 1895년 음력 3월의 일이었다. 그렇게 1894년 ~ 1895년, 1년 만에 모든 사건은 종료되었다.

2차 봉기는 전국적인 봉기였기에 황해도 동학도도 봉기하였다. 여기서는 해주성을 공략해보았으나 실패하였는데, 이 동학군의 지도자가 바로 김창수(김구)다. 그리고 이때 황해도에서 민병대를 조직하여 동학군을 토벌한 유력자가 안중근의 아버지 안태훈인데, 안태훈은 김창수가 아까운 인물이라 생각하여 도움을 주고 이후 김구와 안태훈은 친분을 맺게 된다.[146]

동학농민군을 토벌한 일본 육군 제19대대의 행로를 기록한 『종군일지(日淸交戰 從軍日誌)』에서는 동학농민군을 진압하는 많은 동학농민군이 총살(銃殺), 돌살(突殺, 착검한 총을 돌격하여 찔러 죽임), 타살(打殺, 총이나 몽둥이로 때려죽임), 소살(燒殺, 불 태워 죽임) 등으로 처참하게 목숨을 빼앗은 사례, 민간인 학살과 약탈도 자행되었다.[147]

4. 평가 및 영향

파일:갑오개혁 반영내용.png
폐정 개혁안과 갑오개혁에 반영된 내용.
교과서 수준에서는 반봉건 반외세에 기초한 근대성을 지향한 운동이었다고 언급되지만 유교적 근왕주의에 기초한 민란으로도 평가된다. 동학 운동이 근대적 국가를 지향한 운동이었음의 증거로 제시되는 폐정 개혁안 12조가 오지영이 1940년대 쓴 《동학사》에만 등장하는데, 문제는 동학사가 역사 소설이라는 것. 이에 대해 오지영의 '소설'이란 표현은 겸양의 표현일 뿐 픽션의 의미로 쓰이지 않았다고 반박하였으나, 이후 국사 편찬 위원회는 폐정 개혁안 12조가 동학사에만 출전이 있다는 것을 명시하는 것으로 정리하였다.

실제 전봉준이 작성한 무장 창의문을 보면 근왕주의적 색채가 매우 뚜렷하며, 심지어 김개남은 스스로 왕을 참칭하기도 하였다. 아무래도 시기가 시기이다 보니 지금 시점에서의 근대성과는 거리가 좀 있었다는 것이 중론. 다만 모든 동학교도들이 근왕주의적 성향을 가졌던 것은 아니며, 상당수는 조선 왕조를 부정하는 예언서인 정감록의 예언을 믿고서 "이제 곧 조선 왕조가 망하고 새로운 왕조가 들어선다."라는 주장을 펴기도 했다. [148][149]

전주 화약에서 보듯 농민군의 주장이 갑오개혁에 반영된 바 아래로부터의 개혁의 시초라 할 수 있으며, 반외세를 내건 최초의 무장 투쟁으로써 그 정신은 이후 의병 운동으로 이어진다고 본다. 다만 향반 지주 계층과 농민군은 완전히 척을 지게 되었고, 농민군 진압 후에도 관련자 색출 및 학살은 이어졌다. 의병을 이끈 향반층은 곧 농민군에 대항한 계층이기도 하다. 물론 의병 전쟁기까지 살아남은 농민군도 의병 활동을 벌였지만.

세계사적으로 볼 때 동학 농민 운동은 동아시아의 세력 균형을 무너뜨린 계기가 된 사건으로, 청일전쟁의 결과로 청과 일본 간 체결된 시모노세키 조약을 통해 청은 기존 조선에 대한 독점적 영향력을 상실함으로써 전통적 중화주의 외교 질서는 완전히 붕괴하였다. 이후 동아시아는 일본 & 영국과 러시아의 대립 구도로 재편되었다.

북한의 교과서 《조선력사》는 80년대 당시 남한 학계와 달리 "농민 전쟁"으로 평가했다. 개화파가 지도층이고 농민이 이를 추동한다는 주장 하에 '부르죠아 개혁 사상'의 영향 하에 있었다고 주장한다. 당시에는 김일성과 연관된 인물이 적었으므로 그의 아버지 김형직의 우상화를 위해 평양의 3.1운동이 강조된 것과 달리 '과거의 봉건통치배'가 얼마나 나쁜가를 강조하는 내용이 적혀 있다. 지역주의를 대놓고 강조하는 것은 북한도 적화통일을 위해 꺼리고 '지방주의'라며 금기시 되므로 '우리나라'는 한반도와 그 부속도서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그곳의 모든 역사를 가르친다. 홍경래의 난도 중요하게 다루어지지만 이 내용은 아예 "1894년 농민전쟁"이라며 목차까지 잡아놓고 가르친다. # 2000년대에도 내용은 비슷하다. '노동계급의 당'이 영도하지 않으면 모두 의도한 바를 이룰 수 없이 실패한다는 원칙을 여기서도 드러낸다. # 2002년 교과서에서도 홍경래의 난이 아예 별도 목차로 추가되었으나 동학 농민 혁명도 그 분량은 "갑오 농민 전쟁"이라며 한 절의 목차로 잡혀 있으며, 분량은 홍경래의 난은 물론 3.1운동보다도 많다. 단일 사건으로는 임진왜란 다음으로 많은 비중이다. # 신라 적고적, 고려 망이와 망소이의 난, 조선 홍경래의 난이나 진주농민항쟁보다도 높게 취급하며 태평천국 운동, 세포이 항쟁 급의 가장 급이 높은 사건으로 취급하지만 김일성의 우상화를 위해 김일성 같은 인물이 지도하지 않은 한계가 있었다고 결론 내린다.

소설가 박태원이 말년에 동학 농민 운동을 소재로 한 대하 역사 소설 "갑오농민전쟁"을 집필했으며, 이는 박태원의 마지막 작품이다.

비교적 근세에 일어난 일이라 호남 지역에는 가까운 조상이 동학에 가담했던 케이스가 매우 많다. 특히 동학 참여 이후 생존자들은 고향에 돌아갈 수가 없었는데, 그 때문에 당시 고향을 등지고 다른 호남 지역으로 가서 정착한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자기 부모님이나 할아버지의 고향이 호남 지역이라면 한 번 알아보도록 하자.

일반 시민들 중에는 대한민국의 민주주의 뿌리를 동학 혁명으로 보는 사람들도 있다. 아시아 국가들은 대부분 독재나 권위주의적 사회주의 형태의 국가들이 많은데, 대한민국이 아시아에서는 드물게 서구 민주주의 국가들과 같은 수준의 민주화를 이룩한 건 국민들의 피와 노력으로 이루어진 것이고, 그 뿌리는 동학 혁명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하지만 상술했듯 동학 농민 운동의 대표자로 유명한 전봉준조차 전제군주정에 호의적인 입장이었음을 고려하면[150] 이는 좀 지나친 비약이다. 동학 농민 운동이 내세운 폐정개혁안 12개조를 보면 고위층을 처벌하라는 내용은 있을지언정 고위층을 아예 폐지하라는 식으로 완전한 자유민주국가를 요구하는 내용이나, 고위층은 보존하되 의회 설치 등을 통한 입헌군주제식 민주국가를 요구하는 내용은 하나도 없다. 한국의 민주화 운동과 동학 농민 운동의 공통점은 단지 아래에서 중앙에 대항해서 일어난 저항 운동이라는 점 하나뿐이다.

그렇지만 19세기 전제국가의 국민들이 현대 민주주의 이념을 주장하지 않았다고 동학농민운동을 단순한 민란이라고 취급할 수는 없다. 왕에게 청원하는 것이 전부였던 이전의 민란들과는 달리 동학군의 지도자들은 왕명을 받은 군수와 협상하거나 양반을 배제한 향촌자치를 실현하기도 하는 등 농민들이 정치적인 주체로 등장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에서 일반적인 민란과는 다른 모습을 보인다.
제1차 농민전쟁은 1894년 3월 20일 전라도 무장에서 <포고문>을 발포하면서 시작되었다. <포고문>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상대적으로 소홀하게 취급되었지만, 농민군의 생각과 행동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사람이 세상에서 가장 귀한 것은 사람에게 인륜이 있기 때문이다. [ruby(君臣, ruby=군신)]과 [ruby(父子, ruby=부자)]의 관계는 가장 큰 인륜이다. 임금이 어질고 신하가 충직하며, 아버지가 자애롭고 아들이 효성스러운 뒤에야 [ruby(家國, ruby=가국)]이 이루어지고 끝없는 복이 미칠 수 있다. 지금 우리 임금께서는 어질고 효성스러우며 자애롭고 총명하며 슬기롭다. [ruby(賢良, ruby=현량)]하고 정직한 신하가 밝은 임금을 보좌한다면 [ruby(堯舜, ruby=요순)]의 [ruby(德化, ruby=덕화)]와 [ruby(漢, ruby=한)]나라 [ruby(文帝, ruby=문제)]와 [ruby(景帝, ruby=경제)]의 치세를 날짜를 손꼽으며 바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중략) [ruby(虐政, ruby=학정)]은 날로 더해지고 원성이 이어지고, 군신의 의리와 부자의 윤리와 상하의 분별이 드디어 무너져 남아 있는 것이 없다. [ruby(管子, ruby=관자)]가 말하기를 “[ruby(四維, ruby=사유)][[ruby(禮義廉恥, ruby=예의염치)]]가 베풀어지지 않으면 나라가 곧 망한다”고 하였다. 바야흐로 지금의 형세는 옛날보다 더욱 심하다. [ruby(公卿, ruby=공경)]으로부터 [ruby(方伯守令, ruby=방백수령)]에 이르기까지 국가의 위태로움을 생각하지 않고, 단지 남몰래 자신을 살찌우고 제 집을 윤택하게 하는 계책만 생각하여 벼슬아치를 뽑는 일을 재물이 생기는 길로 여기며, 과거 보는 장소를 온통 사고파는 장터로 만들었다. 허다한 재화와 뇌물이 국고로 들어가지 않고 도리어 개인의 창고를 채우고 있다. 국가에는 쌓인 부채가 있는데도 갚을 방도를 생각하지 않고, 교만하고 사치하며 음탕하게 노는 데 거리낌이 없어서 온 나라가 어육이 되고 만백성이 도탄에 빠졌다. 참으로 지방관들의 탐학 때문이다. 어찌 백성들이 곤궁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다. 근본이 약해지면 나라가 멸망한다. 그런데도 보국안민의 방책을 생각지 않고 시골에 저택이나 짓고 오직 저 혼자서 살 길만 도모하면서 벼슬자리만 도적질하니 어찌 올바른 도리이겠는가. 우리들은 비록 [ruby(草野, ruby=초야)]의 [ruby(遺民, ruby=유민)]이지만 임금의 땅에서 농사지어 먹고 임금이 준 옷을 입고 살아가고 있으니 국가의 [ruby(危亡, ruby=위망)]을 [ruby(坐視, ruby=좌시)]할 수 없어서, 온 나라 사람들이 마음을 합치고 [ruby(億兆蒼生, ruby=억조창생)]이 [ruby(詢議, ruby=순의)]하여 지금 [ruby(義, ruby=의)]의 깃발을 치켜들고 ‘[ruby(保國安民, ruby=보국안민)]’을 생사의 맹세로 삼았다. 금일 이러한 광경은 비록 놀랄만한 것이지만 절대로 두려워하지 말고 각자 자신의 생업에 편안히 종사하여 모두 태평성대를 축원하고 다 함께 임금의 교화를 누릴 수 있다면 천만다행이겠다.[151]

<포고문>은 유교적 언어, 유교적 사유에 의한 현실 진단과 비판이 민본과 인정 이념에 입각하여 매우 분명하게 제시되어 있다.[152] 이러한 현실진단을 바탕으로 농민군들은 비록 자신들이 시골에 사는 이름 없는 백성[[ruby(草野遺民, ruby=초야유민)]]에 불과하지만, 사리사욕만 추구하는 치자계층을 대신하여 임금의 땅에서 먹고 사는 왕민으로서 국가의 위급함을 구하기 위해 “보국안민”의 [ruby(義旗, ruby=의기)]를 들게 되었다고 하였다. 곧 민본이념이 붕괴되고 인정이 실종되었기 때문에 그것을 스스로의 힘으로 회복함으로써 보국안민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한 것이다.
지금까지의 연구에서는 동학농민전쟁의 사상적 기반을 동학경전의 자구나 내용 분석에서 찾는 경우도 있고, 동학사상과의 직접적인 연결을 회피하면서도 동학에 대한 새로운 해석 혹은 이단적 해석이 농민전쟁의 사상적 기반이 되었다는 견해도 적지 않다. 이러한 주장은 기본적으로 다음과 같은 발상에서 나온 것이다. 우선 농민전쟁을 농민들의 일상생활은 물론 민란에 비추어 볼 때도 하나의 도약 내지 비약으로 받아들이고, 둘째, 이러한 도약을 위해서는 의식면에서 혹은 사상면에서 도약대가 필요하다는 것이며, 셋째, 동학이야말로 그 도약대 역할을 하였거나, 농민들의 행동에 정당성을 부여한 근거였다는 이해이다.[153]

그러나 이상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 농민군들의 요구나 지향이 반드시 사상적 도약대가 필요할 만큼 세계관의 대전환을 요구하거나 “개벽”적인 것은 아니었다. 사실 동학의 가장 중요한 경전인『 동경대전』에는「 개벽」이라는 용례가 전혀 나오지 않으며,『 용담유사』에는 5회 나오지만, ‘천지개벽’적 상황을 전제한 것은 아니었다.[154] 동학농민전쟁 당시 농민군들의 행동 역시 기본적으로 유교적 사회질서에 대해 정면 도전한 적이 없으며, 전제왕권을 자명한 전제로 하고 있었다. <[ruby(弊政改革案, ruby=폐정개혁안)]>에서 보이는 농민군의 요구조건 역시 “개벽”적인 상황과는 거리가 멀었다.

교조신원운동 시기부터 제2차 농민전쟁 시기에 이르기까지 동학교도나 농민군들이 내세운 핵심 목표는 계속 바뀌어 갔고, 자신들의 정체성에 대해 규정하는 내용도 변해갔다. 그러나 동학의 우수성을 강조하던 교조신원운동 시기에 조차도 유교적 가치를 부정한 적은 없다. 척왜양운동 시기에는 화이론적 세계관과 충효사상이, 농민전쟁 시기에는 민본과 인정 등 유교 이념이 자신들의 행동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핵심 사상이 되었다.[155] 이 점은 다른 나라의 민중운동에서도 보이는 일반적인 모습이기도 하다.[156]
배항섭(2017), 「동학농민전쟁의 사상적 기반과 유교」, 『역사학보』 236, 역사학회
이글은 교조신원운동 시기부터 제2차 농민전쟁 시기까지 동학교도 혹은 농민군의 격문이나 통문을 통해 농민군의 사상적 기반이 변화해 나가는 모습을 살핀 것이다. 교조신원운동 시기 동학교도돌의 목표는 교조의 신원이나 포교의 자유 등 종교적 요구에서 척왜양으로 변화하였다. 이어 고부봉기 시기부터는 치자층의 탐학이나 부정부패를 반대하는 방향으로 변해갔다. 제2차 봉기에서는 다시 척왜양이 전면에 등장한다. 정체성 면에서 동학과 관련된 내용은 점차 약화되는 경향을 보이다가 제2차 농민전쟁 시기에 들어 다시 동학과 관련된 요소가 강화되고 있었다.
지금까지의 연구에서는 동학농민전쟁의 사상적 기반을 동학의 ‘개벽’ 사상에서 찾는 경우도 있었고, 동학사상과의 직접적인 연결을 회피하면서도 동학에 대한 새로운 해석 혹은 이단적 해석이 농민전쟁의 사상적 기반이 되었다는 견해도 적지 않다.
그러나 농민군들의 요구나 지향이 반드시 세계관의 대전환을 요구할 만큼 “개벽”적인 것은 아니었다. 농민군들은 유교적 사회질서에 대해 정면 도전한 적이 없으며, 전제왕권을 자명한 전제로 하고 있었다.
-배항섭, 같은 논문 초록

농민군들 스스로가 내세운 말에서도 매우 유교적이고 근왕적인 세계관이 엿보인다. 1차 농민전쟁에서 농민군은 "임금의 교화"를 누리고자 하였으며, "군신의 의리와 부자의 윤리와 상하의 분별"이 무너졌음을 한탄했다. 교조신원운동에서조차 유교적 가치를 부정하지 않았으며, 새로운 질서를 새우자는 움직임이 아니라 무너져가는 기존의 질서를 회복하자는 움직임이었다. 이러한 동학농민운동을 서양의 시민혁명과 연결하거나 한국 민주정의 뿌리로 인식하는 것은 서구의 역사적 경험을 한국사에 억지로 끼워맞춘 서구중심적, 근대중심적 역사인식에 가깝다.

또한 동학과 동학농민군을 완전히 동일시할 순 없지만, 최시형의 사상도 신분해방과는 거리가 있다.그것은 농민전쟁이 실패로 끝난 뒤 도피 중이던 최시형은 제자들에게 당부한 다음과 같은 훈시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ruby(天生萬民, ruby=천생만민)]이로되 [ruby(各其分數, ruby=각기분수)]가 모두 있느니라. [ruby(儒生, ruby=유생)]과 농민의 [ruby(衣食品數, ruby=의식품수)]가 모두 다르니라. 선비는 [ruby(布木, ruby=포목)]이라도 8-9승의 가늘게 입고, [ruby(食器, ruby=식기)]가 조금 적게 조처하는 것이 분수요, 농민으로 일꾼은 옷도 5-6승에 불과하고 식기도 조금 [ruby(高大, ruby=고대)]하게 하는 것이 각기 직분이니 매사를 분수대로 대인접물도 하려니와 분수를 [ruby(善守手, ruby=선수수)]할지어다. 사람들이 자기 분수에 지나치면 이 또한 [ruby(違基命, ruby=위기명)]이니라고 교훈하시더라.
-曺錫憲, 「昌山后人曺錫憲歷史」, 『총서』 10, p.202.

또한 최제우에 대한 미담(하녀 두 명을 수양딸과 며느리로 삼음)도 신분제 철폐 주장을 동학이 하였다고 확증하는 것은 아니다. 만인을 존귀하게 대우하는 것과 사회적인 신분제 철폐 주장은 다른 것이니까.
물론 동학사상이 유학과 동일한 것은 아니다. 동학경전에는 유교를 상대화하는 구절이 들어 있는 등 기성의 권위에 대한 도전적 요소가 없지 않다.[157] 그러나 전체적으로 볼 때 동학경전에는 지배이데올로기인 유교에 대한 도전이 거의 없다 할 정도로 체제에 대한 비판이 매우 취약하다. “유도 불도 누천년의 운이 역시 다했던가”라는[158] 상대적으로 과격한 표현도 있지만, 다른 데서는 오히려 유교와 "[ruby(大同而小異, ruby=대동이소이)]"하다는 점이 강조되고 있다.[159]

또 “요순성세 다시 와서 국태민안 되지만은”이라는 구절도[160] 동학이 유교를 배척한 것은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용담유사』에서 보이는 다음의 몇 가지 구절 역시 동학이 유학을 전혀 배척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유교적 덕목이나 가치를 자연스럽게 수용하고 있음을 확인해준다.
이는 역시 그러해도 수신제가 아니하고 도성입덕 무엇이며 삼강오륜 다버리고 현인군자 무엇이며[161]
강산구경 다던지고 인심풍속 살펴보니 부자유친 군신유의 부부유별 장유유서 붕우유신 있지마는 인심풍속 괴이하다.[162]
나도 또한 충렬손이 초야에 자라나서 군신유의 몰랐으니 득죄군왕 아닐런가.[163]
요순지세에도 도척이 있었거든 하물며 이세상에 악인음해 없단말가 공자지세에도 환퇴가 있었으니 우리역시 이세상에 악인지설 피할소냐 수심정기 하여내어 인의예지 지켜두고 군자말씀 본받아서 성경이자 지켜내어 선왕고례 잃잖으니 그 어찌 혐의되며 세간오륜 밝은법은 인성지강으로서 잃지말자 맹세하니 그 어찌 혐의될꼬.[164]
임금에게 공경하면 충신열사 아닐런가.[165]

동학사상에는 이미 유교적 요소가 매우 많이 포함되어 있었다. 또 동학의 포교과정에서 제2세 교주 최시형은 유교적 요소를 더욱 강조하는 태도를 보였다. 동학농민전쟁의 최고지도자 전봉준 역시 동학을 유교적 측면에서 수용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농민전쟁에는 수많은 동학교도들이 참가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내건 요구조건이나 격문, 통문류에는 동학사상과 관련된 것이 특이할 정도로 없다시피 하다. 오히려 <무장포고문>을 비롯한 농민군의 통문, 격문류는 유교적 언어로 점철되어 있었다. 요구조건이나 통문, 격문에 동학과 관련된 내용이 나타나지 않고 오히려 유교적 언어로 점철된 특이한 현상은 지도부나 농민군 대중이 동학을 유교에 대한 재해석 내지 새로운 해석으로 받아들였다는 점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
배항섭(2018), 「 동학에서 보이는 ‘전통’과 새로운 사유 」, 『민족문화논총 』 70, 영남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물론 모든 농민군 구성원을 하나의 사상으로 일반화시켜 설명하기는 어렵다. 1893년 조선에서 활동하던 프랑스의 천주교 주교인 뮈텔 주교한테 보내진 이른바 '뮈텔 문서'에 의하면, 1892년 8월에 전라남도 무장의 사찰인 선운사를 습격하여 돌부처에 숨겨진 금과 은을 빼앗은 300여 명의 동학교도들이 "먼저 서양과 왜적을 멸한 후에 나라 안의 크고 작은 이씨와 민씨들을 전멸시키겠다."라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여기서 이씨란 조선왕조의 왕족인 이씨들이고 민씨는 명성황후 민씨와 그녀의 친족들이니, 이 선운사 사건을 저지른 동학교도들은 조선왕조의 지배층들을 모두 절멸시키겠다는 의도를 갖고 있었던 것이다. 사실 구한말의 동학교도들이 모두 전봉준처럼 근왕 사상을 지녔던 것은 아니었고, 오히려 적지 않은 동학교도들은 예언서 정감록에 적힌 "이씨 조선 왕조는 곧 망하고 이제 정씨 왕조가 계룡산에 들어선다."는 예언을 믿었다.[김탁,2016]

실제로 구한말 동학교도들이 일으킨 행동들을 보면, 그들이 충실한 근왕 세력이라고 보기 힘들다. 당장 1871년 3월 10일 경상북도 영해(寧海)의 관아를 공격하여 부사 이정(李政)을 죽이고 관아를 점령한 이른바 이필제의 난에 가담한 180여명의 사람들 중에서 상당수가 동학교도였고, 심지어 이 반란에 자금을 지원한 인물이 동학의 2대 교주인 최시형(崔時亨 1827~1898년)이었다. 비록 동학군의 지도자인 전봉준이 격문에서 근왕을 외쳤어도, 당시 동학군을 관찰한 황현과 박봉양 같은 지식인들이 남긴 기록들 중 대부분은 동학군이 조선왕조를 부정하고 정씨 왕조의 등장을 예언한 정감록을 신봉했다고 언급했다. 그렇기 때문에 조선 조정이 전봉준의 격문에 적힌 근왕 성향을 믿지 못하고, 동학교도들이 왕조의 전복을 노리는 반정부 세력이라고 규정하여 잔혹하게 진압했을 가능성도 있다.

4.1. 명칭 관련 논쟁

일본에서는 갑오농민전쟁(甲午農民戦争), 중국에서는 동학당기의(东学党起义)[167], 북한에서도 갑오농민전쟁[168]으로 부른다. 동학란[169], 동학 폭동[170], 동학농민봉기, 동학혁명, 갑오농민전쟁 등 다양한 칭호로 불리기도 하나, 현재는 동학농민운동이라 불린다.

동학 농민 봉기 혹은 동학란의 경우에는 사건의 중요성을 이전에 소규모로 빈발하던 농민봉기 수준으로 격하시킨다는 비판을 받으며,[171] 동학혁명은 진보나 사회주의 세력 등 주로 극좌 쪽에서 농민이 주도적으로 국가 정치의 대변혁을 시도했음을 높이 사는 이름이지만, 이들의 활동이 혁명이라기에는 이념의 구심점이 약했다는 비판이나 혁명을 너무 중시하는 사회주의적 평가라는 비판을 받는다. 또한 서구와 별개로 발전되어온 한국의 역사적 경험을, 서구 역사에 끼워맞춰서 이해하려 하는 서구중심주의라는 비판을 피하기 어려울 것이다. 비유하자면, 비빔국수는 비빔국수로 이해하여야지, 스파게티의 맹아이니 뭐니 하는게 도대체 어딜봐서 비빔국수를 존중하는 해석이란 말인가?[172] 반대로 박정희 당시 국가재건위원회 의장이 척왜(척양은 배제)와 근대화 측면에서 5.16 쿠데타를 혁명으로 정당화하기 위해 갑오동학혁명기념탑을 세운 적도 있어서 조금은 복잡한 문제이다. 마지막으로 갑오농민전쟁의 경우에는 16세기 독일의 농민전쟁에 영향을 받은 칭호이나, 둘간의 차이가 상당하고 동학군은 조선 왕조 자체를 어떻게 할 생각은 없었기 때문에 전쟁이라고 보기 힘들다.[173] 논문에서는 동학농민항쟁이란 용어도 많이 쓴다. 이 경우는 운동이나 봉기 같은 축소 단어가 아니며 격렬한 전투를 나타내면서도 전쟁이 아닌 것은 잘 나타내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논란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현대사학계 주류에서는 이미 90년대부터 1894년 농민전쟁, 갑오농민전쟁으로 명칭이 굳어진 상황이다.# 그 이유는 첫째, 동학의 역할이 이념적 구심점이었다기 보다는 일종의 커뮤니티 성격을 많이 띄고 있었으며 둘째, 근왕주의적인 성격이 있었다고는 하나, 군대를 조직하여 당시 고종 정권에 정면으로 맞섰던 데다 셋째, 당시 농민군이 지향했던 지점이 조선왕조와는 차이가 분명히 존재했기 때문이다.[174]

다만 오늘날 가장 대중적으로 쓰이는 동학농민운동도 새마을'운동'과는 전혀 다르지 않냐는 지적도 꽤 된다. 비슷한 경우로 3.1 운동도 '운동'이라는 이름에 많은 비판이 있음에도 지금까지 쓰이는 실정. 사실 성격이 무력 전쟁의 성격이 강한 점에서는 동학은 3·1 운동과도 다르다. 영어로는 비슷한 사건에 규모와 큰 상관 없이 Rebellion(반란, 모반)나 Uprising(봉기)를 많이 붙이는 편이다. 예컨데 브리태니커 대백과사전의 표제어를 보면 의화단의 난Boxer Rebellion, 태평천국Taiping Rebellion, 부활절 봉기Easter Rising으로 되어있으며, 본 문서가 설명하는 사건은 Tonghak Uprising으로 되어있다. 또한 홍경래의 난도 그 혁명적 성격을 모르는 것이 아니듯이, 그냥 동학농민란, 혹은 동학민란이라고 하는 게 의미가 있다는 해석도 있다.

비슷한 경우로 황건적의 난중화인민공화국 수립 이후 '황건기의'로 바뀌었다.

대한민국 정부에서는 동학농민혁명 기념사업회의 명칭을 존중해 동학농민혁명이란 표현을 공식 명칭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2004년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등의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이 대표적[175]이고, 2019년에는 5월 11일을 동학농민혁명 기념일로 제정했다. 다만 교육부의 검인정을 받아 출판되는 한국사 교과서와 각종 EBS 교재에는 '동학농민운동'이라는 명칭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사실상 정부에서도 두 명칭을 혼용하고 있다고 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북한은 동학농민혁명의 성격을 '반봉건 반외세'으로 규정하고, 이청원의 논리를 진전시켜 1945년 초등학생용 문고판으로 <갑오농민전쟁>을 펴냈다. 이후에도 농민전쟁이라는 기본 시각이 확립되었고, 그에 따라 갑오농민전쟁이라고 불렀다. 1981년에 출판된 <조선전사> 등에서 동학농민혁명을 갑오농민전쟁, 1894년 농민전쟁으로 정착되기에 이른다.

5. 기타

5.1. 세계기록유산 등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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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민정음(해례본)』

『조선왕조실록』
[朝鮮王朝實錄
]

『불조직지심체요절』 하권-
佛祖直指心體要節 (下卷)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고려대장경판 및 제경판
(高麗大藏經板-諸經板)

조선왕조 『의궤(儀軌)』

『동의보감(東醫寶鑑)』

1980년 인권기록유산
5·18 광주 민주화운동 기록물

『일성록(日省錄)』

『난중일기(亂中日記)』:
이순신 장군의 진중일기(陣中日記)

새마을운동 기록물

KBS특별생방송
‘이산가족을 찾습니다’ 기록물

한국의 유교책판

조선통신사에 관한 기록 –
17세기~19세기 한일 간 평화구축과
문화교류의 역사

조선왕실 어보와 어책

국채보상운동 기록물

4.19혁명 기록물

동학농민혁명기록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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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파일: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로고.svg
이름 한국어 동학농민혁명 기록물
영어 Archives of the Donghak Peasant Revolution
불어 Archives de la révolte paysanne du Donghak
국가·위치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대한민국
소장·관리
등재유형 기록유산
등재연도 2023년
제작시기 1894년 ~ 189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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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4년부터 1895년까지 일어난 동학농민혁명 당시 조선 조정과 동학농민군, 농민군의 진압에 참여한 민간인, 일본공사관 등이 생산한 자료 총 185점이 2023년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되었다.

등재 신청 심사 당시 동학농민혁명 기록물은 조선 백성이 주체가 돼 자유·평등·인권의 보편적 가치를 지향했던 '기억의 저장소'로서 세계사적 중요성을 널리 인정받았다.

5.2. 관련 인물들의 이후 행보

5.3. 기념 사업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이후 정읍 등 관련 지역민들의 주도로 전봉준에 대한 기념 사업을 조촐하게 이어 오다가, 1963년 10월 3일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참석한 기념탑 제막식이 열렸다. 탑 이름은 동학혁명 기념탑이다. #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은 이날에 "동학혁명은 부패와 당파 싸움, 그리고 사대주의에 물든 탐관오리들의 도약에 항거한 최초의 대규모 서민 혁명으로서 정신은 길이 계승되어야 한다"고 말하며 "5.16 혁명도 이념 면으로 동학혁명과 일맥상통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며 "동학혁명은 비록 성공은 못했지만 우리나라의 근대화에 봉건 잔재 타파에 커다란 이정표가 됐다", "어떠한 정부도 백성을 잘 살리는데 근본 목표를 삼아야 하며 그렇지 못하다면 백성은 용서하지 않을 것" 이라고 평가했다. # 이처럼 박정희가 동학농민혁명에 대해 높이 평가한 데에는 아버지인 박성빈이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했던 경력도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1973년 11월 11일엔 우금치 고개에서 위령탑을 제막했는데, 박정희 대통령이 탑에 "동학혁명군 위령탑"이라고 썼다. #

1980년대 들어 황토현 전적지 등 주요 사적지를 정비하는 사업이 대규모로 행해졌다. 전두환 대통령이 전봉준 장군과 같은 전씨라는 이유로 강력하게 추진했다고 한다.[176] 다만 거창한 사업 내용과는 달리 실제로는 고증이 졸속으로 이루어져 엉터리가 된 것들이 많다. 1992년 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가 세워지고 1994년 100주년을 기념해 각종 공연, 전시회 등 문화예술 행사들이 열려 주목을 받았다.

2004년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등의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 제정 후 국무총리 직속기구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명예회복 심의위원회'를 출범해 2009년 해산 때까지 유족 10,576명을 등록했고,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등의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 시행령이 2015년 12월 31일 최종 공포되었다. # 이에 따라 '동학농민혁명'도 국가가 공인한 명칭이 되었다.

2018년 9월 초 문화체육관광부 주도로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명예회복 심의위원회'를 재출범하고, 유족 등록 업무를 시작했다. # 유족 등록과 기념관 설립 계획에 관해 많은 비판을 받았다.

2019년에 5월 11일을 # 국가 기념일로 지정하였다. 참고로 이날은 동학농민군이 대승을 거둔 최초의 싸움인 황토현 전투가 일어난 날이다. 또한 음력으로는 4월 7일이다.

2020년, 전북 정읍시는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유족 수당 지급에 관한 조례'를 제정하고 당해부터 유족에게 매월 10만원씩 수당을 지급한다고 밝혔다. # 이에 대해 일부 네티즌들은 "125년 전 조선시대에 발생한 사건의 유족에게 수당을 지급하는 것이 말이 되느냐. 조선 건국에 기여한 신진사대부 유족도 찾아서 보상하고 임진왜란 유족도 보상하라"며 황당하다는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 #

2023년에는 '동학농민혁명 유공자의 집'이라는 명패를 제공(#)했고, 2024년에는 정읍시에 이어 전북에서도 수당을 지급(#)하기로 했다.[177] 특별법 우선의 원칙에 따라 특별법을 우선 제정하고 그를 기반으로 보상이나 처벌을 집행하는 형태가 반복되고 있는 것을 감안하면,[178] 다른 사례도 이처럼 악용될 수 있어서 주의가 필요한 부분이다.

5.3.1. 관련 단체/기관

5.4. 마지막 생존자

동학농민운동 관련자 중 1985년에 110세의 나이로 사망한 엄이경이라는 사람이 있다. 그는 운동의 발단인 만석보 축조 당시에 돌을 나른 것을 시작으로 20살 때인 1895년에 동학에 가담하여 동학혁명 시기 각종 전투에 참가했으며, 전봉준 장군의 경호원 겸 연락 담당을 맡았다고 한다. 개항과 동년에 출생하여 동학농민운동부터 서울의 봄까지 모두 지켜봤던 셈. 비록 6월 민주 항쟁과 민주화 이후는 보지 못했으나 이 정도만 해도 한국 근현대사의 증인이나 다름없다.[179]

사람은 아니지만 비교적 최근까지 남아있던 산 증인은 전라북도 정읍시 이평면에 위치하고 있던 이른바 "말목장터"의 감나무였다. 예전부터 역참과 장터가 위치해 그 특성상 사람들이 자주 모이는 곳이었다. 고부군수 조병갑의 탐학이 날이 갈수록 심해지자 전봉준은 이곳을 찾아 감나무 위에 올라가 장터의 군중들에게 조병갑의 행패를 낱낱이 알리고 관아로 쳐들어갈 것을 촉구했고, 이에 호응한 농민들이 고부 관아(현재의 고부초등학교 및 고부면사무소 자리)를 습격하면서 동학농민운동의 불씨가 타 올랐다. 2001년 전라북도 기념물 지정 당시 수령 180년 가량이었던 이 감나무는 항쟁의 진압과 일제강점기, 광복한국 전쟁, 산업화민주화, 노무현참여정부까지를 모두 지켜보고 주변[180]이 초가집에서 슬레이트, 상가 주택으로 바뀌는 2000년대 초반까지 남아 있다가 2003년 태풍 매미로 쓰러져 고사했다.[181] 나무는 잔가지와 잔뿌리를 잘라내고 동학농민혁명기념관에 옮겨져 전시되고 있다.#

5.5. 일본의 연구

일본 학계에서도 동학농민운동을 연구하는 사례도 있는데, 몇 부분에선 한국도 놓친 부분을 일구어내는 높은 성과를 보였다. 그 예로 이노우에 가쓰오라는 학자가 있다. 이 학자는 홋카이도대학 연구실에서 우연히 동학농민군의 유골을 발견하고 의문이 들어서 이 부분에 대해 연구를 하였으며, 일본군이 벌인 농민군 제노사이드를 연구하였다. # 흔히 제노사이드라 하면 6.25 전쟁을 생각하는데, 이 부분으로 성과를 이룬 건 한국에서 보기 드문 업적이다.

6. 대중매체에서

한국 근현대사에 큰 영향을 미친 대단한 사건으로 출판매체로는 종종 소재로 다루어진 편이지만, 아직 드라마영화로 영상화된 작품은 많지 않다.

미국의 뉴 아메리칸 시네마 붐에 영향을 받은 천재 감독 하길종이 이 사건을 영화로 내기 위해 각본도 쓰고 준비를 했었으나, 1979년에 갑자기 뇌졸중으로 사망하여 프로젝트가 무산되었다.

2017년이 되어서야 동학 농민 운동의 지도자인 전봉준의 일대기를 다룬 영화 '전봉준(가제)'가 제작을 위한 준비에 들어가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아직 제대로 된 소식은 없는 상태. #

1984년작 KBS1 대하드라마 독립문이 있다, 전봉준역에 성우 양지운이 출연하며 드라마 1회에서 동학 농민 혁명을 다루었다.

1994년 5월 1일 ~ 22일까지 KBS 1TV "다큐멘터리극장" 동학농민혁명: 100주년 특집이 총4부작으로 방송 되었다 제1부 미명의 황토, 제2부 일어서는 땅, 제3부 하늘이 열리다, 제4부 녹두꽃은 떨어지고 이상 4편으로 전문 연기자들의 심도있는 연기로 사실성을 더했다

MBC에서는 1994년 3월 7일부터 1994년 3월 29일까지 방영된 동학혁명 100주년 특별기획 드라마 《새야 새야 파랑새야》가 있다

1991년작 영화 개벽이 있다, 동학 제 2대 교주 해월 최시형의 생애를 그린 작품이다. 작품은 배경은 동학 제 1대 교주 수운 최제우의 죽음 이후부터 1898년까지 묘사되고 있다. 또 1894년에 일어난 동학 농민 운동 또한 다루었다. 감독에 임권택, 최시형 역에 이덕화, 전봉준역에 김명곤 등이 출연함.


2012년 5월 ebs의 역사채널e에서 방송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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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2019년 SBS에서 동학 농민 운동을 소재로 한 드라마 <녹두꽃>이 전파를 탔다. KBS <정도전>을 집필했던 정현민 작가가 극본을 맡았다.

시인 신동엽은 이 사건을 토대로 한 장편 서사시 「금강」을 썼다. 이 시는 2부작으로 되어 있고 총 30장 4,800여 행의 크기를 자랑한다. 내용은 실존 인물인 전봉준과 가상 인물인 '김하늬'가 동학 농민 운동에 뛰어들어 활동하다가 죽음을 맞는다는 것이다. 이 시에서는 그 특유의 성질인 백성의 세계관과 반외세 성향을 잘 드러내고 있으며, 시의 묘사도 서정이 느껴지면서 역사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소설가 박태원북한에 있으면서 그의 말년에 《갑오농민전쟁》이라는 제목으로 대하소설을 썼다. 그는 김일성숙청에서 겨우 살아난지라 그 후유증으로 전신불수가 되었는데, 그럼에도 1970년대 후반부터 아내가 자신을 보조하는 방식으로 소설 집필을 이어나갔다. 그리하여 1980년부터 1986년까지 총 3부작으로 소설이 간행되었다.

복거일의 첫 작품이자 대표작인 비명을 찾아서에서 일본 민주주의를 촉구하는 일본인 교수의 글에서 동학란이 언급되며, 일본과는 독자적인 역사를 가졌다는 해석에 이를 몰랐던 주인공은 혼란을 느낀다.

혼불문학상 5회 수상작인 이광재의 《나라 없는 나라》는 동학운동 중 실재사건을 기반으로 작가의 상상력을 통해 재구성했다. 흥미롭게도 전봉준과 흥선대원군과의 연계설을 다루었다.

언론인 출신 소설가 전진우의 장편소설 《동백》은 전봉준 시점에서 서당 훈장 시절부터 그의 최후까지 다뤘으며, 이성수의 소설 《70일의 비밀》은 특이하게 동학 운동의 마지막 항전지인 대둔산을 무대로 다뤘다.

웹툰으로는 전라남도 장흥군에서 발생한 동학 농민군과 진압군 간의 마지막 혈전을 다룬 <갑오>가 있다. 이 웹툰은 전자책 전문 기업 링거스 커뮤니케이션즈의 후원에 이뤄진 것으로서 그림 작가는 웹툰 칼부림을 그리고 있는 고일권이다. 이 웹툰에서는 동학 농민 운동의 여성 접주 '이소사'와 10대 소년 접주 '최동린'이라는 실존 인물을 토대로 이야기를 진행시키고 있다. #

연극 연출가로 활동하고 있는 권호성은 이 사건을 정면으로 다룬 저항가요를 작곡하기도 하였다. 제목은 <동학농민가>로 동학 농민 운동 당시 봉기하였던 농민들의 분노와 한을 잘 드러내고 있다.

1절
붉은노을 한울에 퍼져 핍박의 설움이 받쳐
보국안민 기치가 높이 솟았다 한울북 울리며
흙묻은 팔뚝엔 불거진 핏줄 황토벌판에 모여선 그날
유도 불도 누천년의 운이 다했다 농민들의 흐느낌이다
2절
검은 강물 햇살에 잠겨 억눌림의 설움이 받쳐
척양척왜 기치가 높이 솟았다 개벽고 울리며
주린배를 움켜잡고서 죽창들고 일어선 그날
태평곡 격앙가를 볼 것이다 농민들의 아우성이다
3절
한울도 울고 땅도 울었다 가렴주구의 설움이 받쳐
제폭구민 기치가 높이 솟았다 성주소리 드높이며
초근피죽 한사발에 울고 울었다 갈가마귀떼 울부짖던 그날
춘삼월 호시절을 볼 것이다 농민들의 불망기이다
후렴
저 흰 산 위엔 대나무 숲을 이루고 봉황대엔 달이 비춘다
검은 해가 비로서 빛을 내던 날 황토현의 햇불이 탄다
하늘아래 들판의 산 위에 가슴마다 타는 분노는 무엇이었나
갑오년의 핏발어린 외침은 우리 동학 농민피다
야야야야야야야야야야야야야야야야야야야야
야야야야야야야야야야야야야야야야야야야야야
야야야야야야야야야야야야야야야야야야야야야
야야야야야야야야야야야야야야야야야야야야야

일본 만화가 야스히코 요시카즈가 지은 사극물 왕도의 개에서도 동학 농민 운동이 묘사된다.

조선 최고의 화가 장승업의 일대기를 다룬 배우 최민식, 안성기 주연의 영화 취화선의 시대배경은 조선 말기의 동학 농민 운동이다. 그래서 배우 김응수탐관오리 조병갑 배역으로 등장한다.

일본의 마에다 겐지 다큐멘터리 감독이 동학농민운동에 관련된 다큐멘터리를 제작하고 있다. #

조선에는 쿠데타가 필요해요에서는 항상 선역으로만 나오는 다른 매체들과 다르게 1부에서 주인공의 초반 주적으로 등장한다. 특히 다른 매체들에선 띄워주기만 하느라 애써 외면했던 동학군의 어두운 일면도 재조명해주는 건 덤이다.

7. 관련 어록

서면 백산, 앉으면 죽산.(立卽白山 座卽竹山)[182]
우리가 의를 들어 이에 이르니 그 본의가 단연코 다른 데 있지 아니하고 백성들을 도탄 중에서 건지고 국가를 반석 위에 두기 위함인데, 안으로는 탐학한 관리의 머리를 베고 밖으로는 횡포한 강적의 무리를 몰아내고자 한다. 양반과 부호의 앞에서 고통받는 민중들과, 방백 수령 밑에 굴욕 받는 아전들은 우리와 같이 원한이 깊은 자다. 조금도 주저하지 말고 이 시각으로 일어서라. 만일 기회를 잃으면 후회를 하여도 미치지 못하리라.
-1894년 5월 4일, 고부군 백산면에서 봉기 당시 전봉준이 발표한 격문-
우리들은 비록 [ruby(草野, ruby=초야)]의 [ruby(遺民, ruby=유민)]이지만 임금의 땅에서 농사지어 먹고 임금이 준 옷을 입고 살아가고 있으니 국가의 [ruby(危亡, ruby=위망)]을 [ruby(坐視, ruby=좌시)]할 수 없어서, 온 나라 사람들이 마음을 합치고 [ruby(億兆蒼生, ruby=억조창생)]이 [ruby(詢議, ruby=순의)]하여 지금 [ruby(義, ruby=의)]의 깃발을 치켜들고 ‘[ruby(輔國安民, ruby=보국안민)]’을 생사의 맹세로 삼았다. 금일 이러한 광경은 비록 놀랄만한 것이지만 절대로 두려워하지 말고 각자 자신의 생업에 편안히 종사하여 모두 태평성대를 축원하고 다 함께 임금의 교화를 누릴 수 있다면 천만다행이겠다.
-「무장포고문」
진멸권귀(盡滅權貴):
권세 있고 부귀한 무리들을 멸하고,
축멸왜이(逐滅倭夷):
왜적양이들을 구축하여 없이하며,
제세안민(濟世安民):
세상을 구원하고 백성을 편안케 한다.
천하의 대세를 논해 보더라도 위대한 청나라는 100년 동안 중화를 지배한 종주국으로 우리 종묘사직이 섬기는 나라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을 배반하는 것은 상서롭지 못한 일이니, 의리에 있어 어찌 밝다고 하겠습니까? 그리고 청나라 병사 10만 명이 현재 인천항에 포진하여 있고 또 소사에서 전투를 치르고 있으니, 이것은 일대 쾌거입니다. 그런데 우리 임금께서 어찌 청나라를 도와 일본을 토벌하려고 하지 않겠습니까?

- 1894년 9월 28일 서상철의 안동 지역 동학농민군 격문#
압수문서 중에,“청나라는 우리 조선을 위해 진력하고 있으니 방관하지 않을 것이다. 협력하여 왜적을 쳐부수자”는 등의 글귀가 있었습니다. 참으로 뭐라 말할 수 없는 어리석은 백성입니다.

-일본군이 공주 지역에서 동학농민군을 토벌하고 작성한 보고서.#

8.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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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농민혁명
東學農民革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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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출처: 동학농민혁명 기념재단 표제어[2] 전통의 중화 질서는 조공국의 내정과 전쟁 이외의 외교에 간섭을 하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즉 임오군란 이후 청나라가 원세개를 통해서 내정간섭을 일삼았기에 이미 전통의 중화 질서하고는 거리가 멀다. 즉 임오군란으로 인해 전통적인 중화 질서가 이미 막을 내린 것이다.[3] 러시아 제국과 대영제국의 그레이트 게임이 이어지던 당대 국제 정세 속에서 일본 제국을 견제하고자 러시아 제국에 밀착하는 대한제국의 행보는 곧 미국과 대영제국이 러시아 제국의 남하를 견제하기 위해 한국을 배제하고 일본 제국을 집중적으로 지원하는 결과를 낳았다. 이는 곧 일본 제국이 러일전쟁에서 승리하고 일제의 한일 병합 야욕을 미국과 대영제국이 묵인하게 되는 흐름으로 이어졌다.[4] 해외에서도 아시아의 패권이 청에서 일본 제국으로 넘어가 당대 국제정세의 판도를 뒤바꾼 청일전쟁의 발발 계기가 한국에서 벌어진 민중 봉기에 있던 것으로 전제하는 것이 일반적이다.[5] 4.19 혁명 기록물과 같이 등재되었다.[6] 동학 농민 혁명의 발단이 된 조병갑의 사촌으로 방곡령으로도 유명하다.[7] 상급 관아에서 하급 관아로 보내는 공문.[8] 승정원을 거치지 않고 직접 임금에게 상소문을 올리는 것.[9] 조정에서 양전 사업이나 황무지 개간 등의 농지 사무를 위해 지방에 파견하는 관리.[10] 세곡의 운반을 맡는 전운서의 책임자.[11] 태형으로 인한 체력 약화와 상처가 감염되어 생기는 병.[12] 전창혁의 사망 경위는 명확치 않다. 대체로 조병갑에 항의하다 장살(杖殺)당했다는 것이 다수설이나, 그 시기에 대해서는 논쟁이 있다. 다만 전봉준이 사발통문을 돌린 1893년 11월경에는 이미 세상을 떠났던 것으로 생각된다.[13] 동학에서 쓰였던 한 지역의 지도자를 일컫는 단어로, 즉 지금의 고창군의 일부인 무장현의 지부장.[14] 인망이 있어 그를 따르는 동학도만 약 2천이었다고 기록은 전한다.[15] 세상을 구제하고 백성을 편안하게 함.[16] 민란이 발생했을 때 이를 진정시키기 위해 파견하는 관리.[17] 수괴급은 사형. 그 외 주동자급 및 중죄를 저지른 게 밝혀진 사람은 귀양. 나머지 단순 가담자들은 훈방 또는 무죄. 임술민란 때도 대부분 이 정도로 처리되었다.[18] 당장 임술민란 때도 유계춘 같은 주모자들이 여럿 참수되었지만, 그 때문에 사태가 대책 없이 커지거나 하지는 않았다. 임술민란 이후에도 민란이 계속 이어진 건 정부에서 삼정의 문란을 고치겠다고 약속해 놓고 입 씻거나 실효성 없는 정책만 내놓았고, 수령들과 지방 사족들의 가렴주구가 계속 되었기 때문이다.[19] 이용태는 민란을 우려하여 만류하는 신임 군수 박원명까지 협박해 가면서 농민 봉기의 주모자와 참여자를 색출해 냈고, 이렇게 그가 색출해 내었던 농민은 모두 동학교도라고 규정한 뒤, 동학교도들을 모두 역적으로 몰아 집을 불태운 뒤 교도들과 연좌제를 적용하여 교도들의 처자식까지 잡아서 살육하였다. 교도들의 재산 또한 강제로 몰수했다. 아무리 연좌제가 용인되던 당시의 사회 풍조라도 이 정도면 고을 하나가 사라질 만한 일가족 몰살에 줄초상까지 벌어질 정도로 참담한 만행이었다. 거기에 동학교도가 아니던 단순 가담자들을 역시 모두 동학교도로 단정하여 그들 역시 죽였으니, 억울하게 죽은 사람들이야 이루 말할 수 없을 거다.[20] 이상이 자생적 고부 민란이 확대되었다는 견해에 입각한 서술이며 또한 다수설이나, 전봉준이 흥선대원군의 식객으로 지낸 바가 있어 서로가 안면이 있었고, 1893년 11월 작성된 사발통문에 전주성 점령 및 한양으로의 진격이 명시된 데 비추어 보아 대원군이 발단에 개입한 계획적 거사로 보는 견해도 있다. 실제 전봉준은 대원군과의 관계를 모병 과정에서 강조하였으며, 대원군 또한 난 발발 이전부터 동학의 지속적인 청원을 이용해 이준용을 왕으로 세우려 하였고, 또 다른 농민군 지도자였던 손화중도 대원군과 그의 사이에 밀약이 있었다는 주장이 있다.[21] 권세를 가진 귀족들을 일컫는 말.[22] 친군영 중 하나로, 1893년 창설되었으며 전주에 주둔하고 있었다. 동학 혁명 발발 당시 불과 몇 달 전에 신설된 부대라 훈련이 제대로 되어 있지 않고 정원수도 제대로 채우지 못한 상태였다.[23] 임오군란명성황후 민씨를 구하고 을미사변 때 시위대로서 근무하여 민씨를 보호하다 살해당한 그 홍계훈 맞다.[24] 친군장위영(親軍將衛營) 병력과 친군심영(親軍沁營) 병력.[25] 강화도에 주둔하던 친군영.[26] 동학군을 막기 위해 지역 양반들이 주도해서 만든 민병대.[27] 당시 나주는 대대로 관리들의 부정부패가 심하고 동학교도에 대한 탄압이 심한 고을이었다. 나주 목사 민종렬을 위시한 관군의 강한 저항과 나주의 지리적 요건으로 인해 동학군은 결국 나주를 점령하는 데 실패한다.[28] 안중근 의사의 부친 안태훈은 이때 동도서기론을 지지하는 온건 개화파이면서 근왕파 유생이었기 때문에 동학 조직이 주도하는 농민군에 대해서는 매우 부정적인 노선을 취했다. 독실한 천주교 신자여서 그랬다고 알고 있는 사람도 있으나, 이 시기는 아직 안태훈 일가가 천주교에 입교하기 이전이었다. 또 안중근이 사형 직전에 쓴 《안응칠 자서전》을 보면, 안중근은 농민군과 일진회를 동족으로 알고 있었다. 같은 동학 출신인 건 맞지만....[29] 농민이 시초도 아니고 봉기라고 할 수 없던, 양치기로 시작하여 농민도 일부 참여한 양치기 십자군도 도적질을 저질러 결국 프랑스군에게 무수히 참살당하며 진압되었다....[30] 김구의 고향에서는 "창수가 동학하다가 끌려갔다"는 소문이 퍼져 있었을 정도. 참고로 창수는 김구가 젊었을 적에 쓰던 이름이다.[31] 외국군을 끌어들였다가 그로 인해 외부의 내정 간섭을 받게 되는 일은 세계 역사상 비일비재했다. 과거 유다 왕국은 자신들의 내분 과정에서 로마군을 끌여들였다가 유다 왕국 자체가 로마의 속국으로 떨어져 버렸고, 중국은 위진 남북조 시기에 선비족을 끌어들이거나 당나라 후기에 위구르인들을 끌어들였다가 많은 낭패를 보았다. 한반도에서도 신라가 고구려군의 지원으로 위기를 극복한 대신 고구려의 속국으로 떨어졌으며, 가야 연맹 중 안라국이 백제의 지원을 기대했다가 오히려 백제의 간섭을 받는 처지로 떨어졌다. 게다가 저런 사례들과 달리 이 일은 외국과의 전쟁 과정에서 제3국을 데려오는 것도 아니고 국내 반란 진압에 외국군을 데려오는 것이니 문제가 더 심각하다. 괜히 신하들이 일본군의 개입을 우려한 것이 아니다.[32] 일본은 이전에 발생한 사건인 임오군란제물포 조약갑신정변한성 조약에서 피해 보상 차원으로 이미 여러 이권을 훔쳐간 상황이었고, 청나라는 청나라대로 조선의 종주국으로서 지위를 지키겠다고 도움을 주기는커녕 간섭하기에 바빴다.[33] 청과 일본 사이의 조약으로, "일본은 조선에 대해 청과 동일한 파병권을 갖는다"는 조항이 있어 청이 조선에 군대를 파병하면 마찬가지로 일본도 조선에 군대를 파병할 수 있는 근거가 되는 조약이었다.[34] 아마도 태평천국의 난을 말하는 듯 한데, 이는 고종이 완전히 잘못 알고 있는 것이다. 애초에 영국이 청을 지원한 것은 청을 짓밟고 불평등 조약 체결을 강요한 1860년 이후이며, 이때의 청은 외세의 군사력 지원도 없이 회군과 상군을 동원해 내분으로 약해진 태평군을 몰아붙이고 있었다. 그리고 영국은 태평천국의 난 진압을 위해 군대를 동원하지도 않았다. 다만 찰스 조지 고든을 비롯해 영국-프랑스 군인들이 용병 형식으로 청군을 지휘하거나 지원한 적이 있다.[김명섭,1994,7] 김명섭, 제1차 갑오농민전쟁기의 차병론과 경장론, 학위논문(석사)-- 단국대학교 대학원: 사학과 한국사전공, 서울: 단국대학교, 1994, page 7[구선희,1999,219] 구선희, 韓國近代 對淸政策史 硏究, 서울 : 혜안, 1999, page 219[강문호,2004,109] 강문호, 동학농민혁명과 청군, 동학연구, Vol.17, 2004, page 109[엄찬호,2006,5] 엄찬호, 淸日戰爭에 대한 조선의 대응, 한일관계사연구, No.25, 2006, page 5 (KCI)[신영우,2009,19~20,26] 신영우, 1894년 왕조정부의 동학농민군 인식과 대응, 한국 근현대사 연구, No.51, 2009, page 19~20, 26[유바다,2017,336] 유바다, 19세기 후반 조선의 국제법적 지위에 관한 연구, 학위논문(박사)-- 고려대학교 대학원: 한국사학과, 서울 : 고려대학교 대학원, 2017, page 336[김명섭,1994,5~6] 김명섭, 제1차 갑오농민전쟁기의 차병론과 경장론, 학위논문(석사)-- 단국대학교 대학원: 사학과 한국사전공, 서울: 단국대학교, 1994, page 5~6[강문호,2004,116] 강문호, 동학농민혁명과 청군, 동학연구, Vol.17, 2004, page 116[신영우,2009,26] 신영우, 1894년 왕조정부의 동학농민군 인식과 대응, 한국 근현대사 연구, No.51, 2009, page 26[강문호,2004,120~121] 강문호, 동학농민혁명과 청군, 동학연구, Vol.17, 2004, page 120~121[유바다,2017,336] 유바다, 19세기 후반 조선의 국제법적 지위에 관한 연구, 학위논문(박사)-- 고려대학교 대학원: 한국사학과, 서울 : 고려대학교 대학원, 2017, page 336[구선희,1999,222~223] 구선희, 韓國近代 對淸政策史 硏究, 서울 : 혜안, 1999, page 222~223[김명섭,1994,12] 김명섭, 제1차 갑오농민전쟁기의 차병론과 경장론, 학위논문(석사)-- 단국대학교 대학원: 사학과 한국사전공, 서울: 단국대학교, 1994, page 12[구선희,1999,225] 구선희, 韓國近代 對淸政策史 硏究, 서울 : 혜안, 1999, page 225[엄찬호,2006,13] 엄찬호, 淸日戰爭에 대한 조선의 대응, 한일관계사연구, Vol.0 No.25, 2006, page 13 (KCI)[신영우,2009,27] 신영우, 1894년 왕조정부의 동학농민군 인식과 대응, 한국 근현대사 연구, No.51, 2009, page 27[김경록,2018,37~39] 김경록, 청일전쟁과 일제의 군사강점, 서울 :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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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영우, 1894년 왕조정부의 동학농민군 인식과 대응, 한국 근현대사 연구, No.51, 2009, page 27[90] 유바다, 2017, 336 유바다, 19세기 후반 조선의 국제법적 지위에 관한 연구, 학위논문(박사)-- 고려대학교 대학원: 한국사학과, 서울 : 고려대학교 대학원, 2017, page 336[91] 김경록, 2018, 37~39 김경록, 청일전쟁과 일제의 군사강점, 서울 :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2018, page 37~39[92] 國家淸史編纂委員會文獻叢刊, 『李鴻章全集』, 北京 : 安徽敎育出版社, 2008 중 總序와 凡例[93] 유바다, 19세기 후반 조선의 국제법적 지위에 관한 연구, 학위논문(박사)-- 고려대학교 대학원: 한국사학과, 서울 : 고려대학교 대학원, 2017, page 411[94] 구선희의 해제, 동학농민혁명 신국역총서 9, 정읍 :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2017, page 33~35[⒜] [⒜] [⒜] [⒜] [⒜] [100] 김명섭, 1994, 12~13 김명섭, 제1차 갑오농민전쟁기의 차병론과 경장론, 학위논문(석사)-- 단국대학교 대학원: 사학과 한국사전공, 서울: 단국대학교, 1994, page 12~13[101] 구선희, 1999, 227 구선희, 韓國近代 對淸政策史 硏究, 서울 : 혜안, 1999, page 227[102] 강문호, 2004, 127~128 강문호, 동학농민혁명과 청군, 동학연구, Vol.17, 2004, page 127~128[103] 엄찬호, 2006, 7 엄찬호, 淸日戰爭에 대한 조선의 대응, 한일관계사연구, Vol.0 No.25, 2006, page 7 (KCI)[104] 신영우, 2009, 27 신영우, 1894년 왕조정부의 동학농민군 인식과 대응, 한국 근현대사 연구, No.51, 2009, page 27[105] 유바다, 2017, 337 유바다, 19세기 후반 조선의 국제법적 지위에 관한 연구, 학위논문(박사)-- 고려대학교 대학원: 한국사학과, 서울 : 고려대학교 대학원, 2017, page 337[⒜] [107] 『동학농민혁명 신국역총서 9』 105~110)[⒜] [⒜] [110] 유포된 내용이 무엇인지 대체역사 마이너 갤러리에서 기록된 게 있다. 대체역사 마이너 갤러리 "과연 조선은 동학 농민 운동 때 청에 원병 지원을 요청했는가? 에 대한 것입니다. 일단 대체적으로 고종이 직접 원병을 불렀다...라고 이야기하는 것이 다수설처럼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최근 발굴한 양호초토등록이나 주한일본공사관 문서, 프랑스 외교 문서 등을 보면 또 고개를 갸우뚱할 만한 기록들이 넘쳐납니다." 여기서 프랑스 문서는 1차 출처가 네이버 블로그이며 블로그 외에는 출처가 없다. 프랑스 외교 문서의 실체는 '존재하지 않는 프랑스 외교 문서 위조' 참조. 실제로는 외국인 아무개의 반응을 외교 문서라고 조작한 것이다. 물론 2010년 기준에서도 옛날 문서다.[⒜] [⒜] [⒜] [114] 國家淸史編纂委員會文獻叢刊, 『李鴻章全集』, 北京 : 安徽敎育出版社, 2008 중 總序와 凡例[⒜] [⒜] [117] 엄찬호, 淸日戰爭에 대한 조선의 대응, 한일관계사연구, Vol.0 No.25, 2006, page 8~9 (KCI.)[118] 구선희, 韓國近代 對淸政策史 硏究, 서울 : 혜안, 1999, 224~225[119] 엄찬호, 淸日戰爭에 대한 조선의 대응, 한일관계사연구, Vol.0 No.25, 2006, page 8~9 (KCI)[⒜] [121] 다만 이 경우는 고종에 대한 부정적인 설을 포괄한 것이다.[⒜] [⒜] [⒜] [⒜] [126] 이토 히로부미의 말이다. 이토 히로부미가 이런 말을 할 만했던 게, 당시 일본제국 의회에서 내각 불신임 상주안을 가결시켜버려 당시 총리였던 이토는 물론이고 내각까지 벼랑 끝으로 내몰렸던 시기였다. 그러니까 하늘이 일본 제국에게 준 기회라는 뜻도 있고 그것이 역사적으로 중요하지만, 따지자면 자기에게 준 기회라는 뜻이 강하다(...)[127] 당시 청 내부에서 조선을 전통적 조공속국 개념을 넘어 근대적 의미의 식민지로 만들자는 의견이 없었던 건 아니었으나, 주류가 아니었다. 당장 청 조정의 수장인 이홍장부터 조선 식민지화는 되도 않은 소리라고 반대했다. 지금처럼 속국 관계나 유지시키자는 게 당시 청의 주류 의견이었으니, 무리하게 조약을 어기거나 할 이유가 없었던 셈. 게다가 청은 조선과 나쁜 감정도 없었고 조선이 오랫동안 청을 상국으로 잘 섬겨온 판국에 굳이 식민지로 삼을 필요가 없었다. 무엇보다 당시 청나라는 도저히 다른 나라와의 전쟁을, 하다못해 조선과의 전쟁조차 감당할 판국이 아니었기 때문에, 별 이유도 없이 조선을 무리하게 집어삼키려다가 조선이 청을 상대로 저항하거나 일본에 붙어버리면 낭패였다. 특히 한반도의 지형은 중국에서 위로 급히 꺾이는 지형이기 때문에, 황무지나 다름없는 만주를 완전히 장악 및 개척하지 않고서는 조선을 효과적으로 지배할 수 없었다. 이때문에 한반도 완전 병탄은 중국사를 통틀어 단 한 번도 성공한 적이 없었다. 몽골조차도 고려를 속국/부마국으로 만드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을 지경. 당시 만국의 병신(...)(정말로 병 걸린 자, 그러니까 병신이라고 불렀다.) 소리를 듣던 청 입장에서는 도저히 무리였다.[128] 김개남은 이후에도 전봉준이 북상할 때 합류하지 않고 나중에 북상하여 청주성을 공략하는 등 단독행동을 많이 벌였는데 이 때문에 후세의 비판을 샀다.(#[129] 의병 모집을 위해 파견하는 관리.[130] 도적을 체포하기 위해 파견하는 관리.[131] 청일전쟁·러일전쟁-한반도에서 벌어진 국제전을 바라보는 한국학계의 시각. 서영희 # 5쪽[132] 반란이나 국경에 소란이 생기면 편성되는 임시 군영.[133] 손병희의 친척으로 글을 배워서 교조 신원 운동 때 상소문이나 소장을 작성했다. 또한 손병희를 동학에 입도시킨 장본인이기도 하다.[134] 친군영 설치에 따라 1887년 청주에 창설된 지방군 부대.[135] 동학 농민 혁명에서 유일한 일본군 전사자이다.[136] 지금의 충청남도 논산시에 있는 노성산이다.[137] 갑신정변의 주역인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홍영식을 일컫는다.[138] 일본군이 경복궁을 점령한 것은 6월의 일인데, 아마도 잘못 기재한 것으로 보인다.[139] 지금의 충청남도 논산시에 있는 황화산성으로, 백제 시대부터 있던 성이며 조선시대에도 봉화대로 사용된 바 있다.[140] 지금의 전라북도 김제시 금산면 용호리.[141] 논산시, 금산군, 완주군의 경계에 있다.[142] 서양에서 들어온 총기를 이르는 말인데, 그 당시 사용한 총기는 일본군에게 지급받은 신무기인 영국제 후장식 스나이더 소총으로 무장하였다.[143] 양측 합쳐서 50여 명. 이들은 새벽부터 등산용 사다리와 밧줄 등을 이용하여 험난한 산길을 줄에 의지하여 무려 4시간 반 동안 등반하였다고 한다. 그 결과 방어가 허술한 뒤쪽 평지에 도착하여 기습에 성공하였다. 당시 일본군 3개 분대는 본국에서 자체 제작한 무라타 소총을 사용하고, 심영병들은 1차 공격시 사용한 스나이더를 사용하였다.[144] 전근대 법률로 따져도 사형 권한이 국왕에게만 있기에 함부로 사형을 집행하는 것은 중대한 왕권 침해였으며 더군다나 당시에는 갑오개혁 이후 참형이 폐지된 상태였다. 나중에 전봉준 등이 반역죄로 재판을 받았음에도 교형 판결을 받은 것도 이 때문이다. 황현은 김개남을 처형한 후 원한이 있던 자들이 그의 내장을 씹어먹고 인육을 제삿상에 올렸다는 기록을 남겼다.[145] 동학군의 목적은 이견이 많다. 가장 흔한 학설은 대원군과 연계되어서 대원군 복위와 국왕 교체(고종의 큰 형의 아들인 이준용을 등극하고 고종을 상왕 옹립)를 노렸다는 것이고 고종과 직접 연결되었다는 설도 있을 정도. 이후에 등장한 주장이 대원군이 고종의 밀서를 위조했다는 것. 이 시기는 일본군의 경복궁 침공으로 고종이 일본군의 손에 떨어진 상태였기 때문에 재봉기 시 고종의 안위가 위태롭다는 이유로 봉기가 미뤄졌는데, 대원군이 고종의 밀서를 위조해서 전봉군에게 궐기를 요구했다는 것이다. 대원군의 목적은 당연히 자신의 재집권. 그 과정에서 이재면 즉위도 실제로 대원군이 수 차례 시행한 일이므로 자연스럽게 확률이 높아진다. 전봉준 - 대원군 - 고종을 묶는 가장 설득력 높은 주장이긴 한데, 그런데 이렇게 되면 아무리 좋게 해석해도 대원군이 단순히 자신의 집권을 위해서 고종과 동학을 모두 이용한 혐의가 된다.[146] 백범일지에 따르면 안태훈이 먼저 김구 측에 접근하여 서로 싸우지 말 것을 청하고 이후 동학이 몰락하자 김구를 식객으로 받아들여 잘 대우했다고 한다.[147] 일본군 병사의 눈으로 본 동학농민군 진압.신진희 #[148] 조선의 예언사상 하/ 김탁 지음/ 북코리아[149] 어떻게 보자면 새 왕조가 들어서긴 했다. 왜냐하면 정말로 조선 왕조가 망해버렸고, 이후에 일제 강점기가 시작되었기 때문.[150] 실제로 2차 봉기의 목적은 일제가 경복궁을 무단으로 점거하고 고종을 인질로 잡으니까 고종을 구출하려고 들고 일어난 것이다. 이 때문에 1차 봉기에선 정치에 간섭하기 싫어서 참여하지 않았던 북접이 2차 봉기에서는 '왕을 구하려고' 참여한 것이다. 즉 동학 농민 운동은 명백하게 민주주의가 아닌 전제군주제를 긍정하는 입장임을 보여준 것이다.[151] (논문 내 주석)「 隨錄」(茂長縣謄上東學人布告文)『 총서』 5, 157~159쪽「; 茂長布告文」『 東學亂記錄』 上(서울, 국사편찬위원회, 1957), 142~143쪽「; 東學文書」(茂長縣東學布告文)『 총서』 5, 136쪽「; 東匪討錄」(東學輩布告文『) 동학서』, 303~304쪽.[152] (논문 내 주석)동학농민전쟁이 근대를 지향했다고 주장하는 대표적 학자 가운데 하나인 신용하는 <무장포고문>에 대한 분석을 외면하면서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곧 <포고문>은 농민전쟁 초기에 나온 것이기 때문에 백성들의 지지를 널리 구하기 위하여 그들이 국왕에 반역하는 것이 아니라 충성하는 것임을 강조하려는 의도에서 유교의 언어와 사상으로 粉飾되어 있다는 것이다[신용하「, 갑오농민전쟁의 제1차 농민전쟁」『 한국학보』 40(서울, 일지사, 1985), 126쪽]. 그러나 이러한 이유는 농민전쟁 초기뿐만 아니라, 농민군이 승승장구하던 시기는 물론 농민전쟁이 끝날 때까지도 농민군이 제시한 글의 대부분은 그러한 “분식된 유교의 언어”로 가득 차 있다는 점을 고려할 때 납득하기 어렵다. 농민군의 생각에 대한 새로운 접근이 필요하다.[153] (논문 내 주석)정창렬「, 갑오농민전쟁연구」(서울, 연세대 박사학위논문, 1991), 238쪽; 조경달/박맹수 옮김『, 이단의 민중반란』(서울, 역사비평사, 2008), 27~28쪽.[154] (논문 내 주석)『 용담유사』에 나오는 ‘개벽’의 사례는 다음과 같다.「 용담가」(2회, “한울님 하신말씀 개벽 후 오만년에/네가 또한 첨이로다 나도 또한 개벽 이후”)「 안심가」(2회, “개벽시 국초일을 만지장서 나리시고”, “십이제국 괴질운수 다시개벽 아닐런가”)「, 몽중노소문답가」(1회, “십이제국 괴질 운수 다시개벽 아닐런가”).[155] (논문 내 주석)농민전쟁에는 수많은 동학교도들이 참가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내건 요구조건이나 격문, 통문류에는 동학사상과 관련된 내용이 특이할 정도로 없다시피 하다. 오히려 <무장포고문>을 비롯한 농민군의 통문, 격문류는 유교적 언어로 점철되어 있다. 요구조건이나 통문, 격문에 동학과 관련된 내용이 나타나지 않고 오히려 유교적 언어로 점철된 특이한 현상은 지도부나 농민군 대중이 동학을 유교에 대한 재해석 내지 새로운 해석으로 받아들였다는 점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배항섭, 「1880~90년대 동학의 확산과 동학에 대한 민중의 인식-유교 이념과의 관련을 중심으로-」『조선시대사학보』 77(서울, 조선시대사학회, 2016b) 참조).[156] (논문 내 주석)이에 대해서는 배항섭, 「19세기 지배질서의 변화와 정치문화의 변용 -仁政 願望의 향방을 중심으로-」 『한국사학보』39(서울, 고려사학회, 2010), 114쪽 참조.[157] (논문 내 주석)농민군의 언행에도 이단적 요소가 있었다. 黃玹에 따르면 동학교도들은 “장차 이씨는 망하고 정씨가 일어나는데 앞으로 큰 난이 일어나 동학을 믿는 사람이 아니면 살아남을 수 없다”는 말로 양민을 속였다고 한다(黃玹, 「梧下記聞」『총서』 1, pp.42-43). 이는 적어도 일부 교도들 가운데는 이단적 그룹이 존재했음을 잘 보여준다.[158] (논문 내 주석)「교훈가」, 『용담유사』[159] (논문 내 주석)“覺來夫子之道則一理之所定也論其惟我之道則大同而小異也”(「수덕문」, 『동경대전』)[160] (논문 내 주석)「안심가」, 『용담유사』[161] (논문 내 주석)「도수가」, 『용담유사』[162] (논문 내 주석)「권학가」, 『용담유사』[163] (논문 내 주석)「권학가」, 『용담유사』[164] (논문 내 주석)「도덕가」, 『용담유사』[165] (논문 내 주석)「권학가」, 『용담유사』[김탁,2016] 출처: 조선의 예언 사상 하/ 김탁 지음/ 북코리아[167] 중국에서는 농민이나 백성의 봉기를 '기의(起義: 의로써 일어남)'라고 칭하는데, 일례로 황건적의 난을 '황건기의'라고 칭하거나, 왕조 교체기나 혼란기의 농민 봉기 세력을 '기의군(起義軍)'이라고 칭하기도 한다.[168] 교과서 등에서 가장 많이 쓰이는 명칭이다.[169] 당시 동학군의 멸칭으로 동비(東匪; 동학+비적)라는 단어도 있었다.[170] 북한에서도 갑오농민폭동이라고 부른다. 다만 북한에서 폭동이란 단어는 긍정적인 의미로 주로 사용되는 편이므로 유의. 일례로 임오군란임오군인폭동으로 부르며 '애국적 군인들과 도시 빈민들이 일본 침략자들과 봉건 통치배들을 반대하며 일으킨 대중적 폭동이라 평가한다.[171] 그러나 '봉기' 혹은 '난'이라는 표현이 사건의 중요성을 축소한다고 볼 순 없다. 황건적의 난이나 태평천국의 난 등의 표현이 사건의 중요성을 축소하지 않는다.[172] 특히 마르크스주의 및 이에 영향 받은 사관에서 '스파게티맹아론'의 오류를 많이 저지르는데, 이들은 역사적 발전에 따라서 한식에서는 '당연히' 스파게티가 나와야 한다고 전제하고는 "비빔국수는 스파게티로 발전했으니(혹은 발전할 맹아가 있었으니) 자체적 발전 동력을 가지고 있었다"라고 설명하려는 집착을 보인다. 그런데 이런 해석에서 주인공은 스파게티이지 비빔국수가 아닌데, 도대체 어딜봐서 비빔국수를 올바르게 평가했다는 것인가?[173] 신성로마제국 강역 안에서 전방위로 벌어진 농민전쟁은 결국 농민공화정부의 탄생, 자유시의 확대 등의 결과로 이어져 새로운 체제(시대)의 등장으로 볼 측면이 있다.[174] 한국 현대사학계의 주류가 진보 내지 좌파라서 북한의 영향을 받은 것 아니냐고 지적하는 부류도 있지만, 이미 1989년에 이이화 마저도 1894년 동학농민 전쟁이라는 명칭을 쓴 사례가 존재한다. #[175] 2009년 말일 활동 종료[176] 하지만 이 둘은 본관부터 다르다(...)[177] 전북 수당 관련 대표발의자 염영선 의원은 더불어민주당 소속에 정읍 2선거구 출신인데, 과거 새만금 잼버리 당시 대한민국 청소년들이 배가 불러서 해외 청소년들보다 불평 불만이 많았다는 식의 SNS 게시글을 올려 논란이 된 적이 있다. 해당 문단 참고.[178] 2024년 말 기준으로 가장 최근의 사례로는 4·16세월호참사 피해구제 및 지원 등을 위한 특별법10ㆍ29 이태원참사 피해자 권리보장과 진상규명 및 재발방지를 위한 특별법이 있는데, 전자(약칭 세월호 특별법)는 분명 참사가 맞지만 후자(약칭 이태원 특별법)는 사고에 대한 명칭부터 처벌 관련 조항의 포함 여부까지 논란이 많았다.[179] 원문 기사 말미의 정주(井州)시는 기사의 정읍과 함께 오늘날의 정읍시를 이루는 과거 행정 구역 이름이었다. 1995년에 일제시기 행정구역을 대대적으로 손보면서 도농통합이 이루어지며 정읍시가 되었다.[180] 1990년대까지만 해도 감나무 옆에는 예비군 면대 사무실이 위치해 있었다.[181]문화재청장을 역임하기도 했던 유홍준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에서 제13대 대통령 선거 당시 저 감나무에 김대중의 현수막이 걸려있던 것을 "한국 현대사의 굴곡진 모습을 대변"하는 명장면으로 호평하기도 했다.[182] (농민군들이) 앉으면 죽창이 산을 이루었고, 서면 흰 옷이 산을 이루었다고 해서 그런 말이 생겼다. 죽산과 백산은 동학 운동이 활발했던 부안과 김제 지역의 면 이름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