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홍집 내각 (갑오개혁 ・ 을미개혁)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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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colbgcolor=white,#2d2f34>어윤중(魚允中) |
자 | 성집(聖執) |
호 | 일재(一齋) |
본관 | 함종 어씨[1] |
출생 | 1848년 2월 15일[2] |
충청도 보은현 서니면 선곡리 (현 충청북도 보은군 삼승면 선곡1리)[3] | |
사망 | 1896년 2월 17일[4] (향년 48세) |
충주부 용인군 하동촌면 어비동 (현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이동읍 어비리)[5] | |
시호 | 충숙(忠肅) |
가족관계 | 고조부 어용빈(魚用賓)[6], 증조부 어재상(魚在象)[7] 조부 어명능(魚命能)[8] 아버지 어약우(魚若愚)[9], 어머니 여주 이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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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생애
1848년 2월 15일 충청도 보은현 서니면 선곡리(현 충청북도 보은군 삼승면 선곡1리)에서 아버지 어약우(魚若愚, 1818 ~ 1863.8.6.)와 어머니 여주 이씨(1817 ~ 1856.2.4.)[10] 사이에서 무녀독남으로 태어났다. 9세 되던 1856년 어머니를 여의고 이어 16세 되던 1863년에는 아버지를 여의는 등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어약우는 벼슬길에 오르지 못하고 사망했으나 사후 1883년 9월 어윤중의 공로로 이조 참판(종2품)에 추증되었다.그 뒤 20세 되던 1868년 지방 유생 50명을 뽑아 전시를 볼 자격을 주는 칠석제(七夕製)에서 장원으로 입격하였으며, 1869년(고종 6) 마침내 정시(庭試) 문과에 병과[11] 17위로 급제하였다. 같은 해 5월 승정원 가주서(假注書:정7품)에 제수되면서 관직생활을 시작했는데, 8년만에 전라우도(全羅右道) 암행어사(정3품)까지 승진한 후 9개월간 전라도의 탐관오리를 부지런히 징벌하고 돌아와서는 파격적인 개혁안을 내놓는다.[12] 개혁의 중심 내용은 세금 개혁이었는데 후에 본인이 직접 해버린다. 고종은 이 내용을 심도깊게 보았고 어윤중과 많은 이야기를 나누기는 했지만 당연하게도 채택은 안 했다.
이후 1881년 일본 조사 시찰단의 일원으로 가는데 담당 파트는 일본 대장성.[13] 당시 수행원으로 함께한 유길준과 찍은 사진이 남아있다.[14] 그 후 일본에서 청나라로 가서 미리 영선사로 가있던 김윤식을 만나고 중국의 정책을 견문한 후 이홍장과 회담을 하고 왔다. 이후 조미수호통상조약, 조독수호통상조약 등에 합의하였고 급기야는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까지 조인을 하였다. 이 때 이홍장이 '증서 다 만들어놨으니까 도장만 찍어'에 화가 나서 청나라에 냉담한 시선을 가지게 된다. 회담 내내 청나라는 종주국과 속국이라는 관계를 들어 각종 무리한 요구를 하였는데 어윤중은 그나마 끈질기게 요구하여 청나라 상인들이 상품을 쌓아놓고 장사를 하는 곳을 양화진으로 제한하는 등의 어느 정도 방어에 성공했다. 물론 그렇게 해서 완성된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도 썩 공평하지는 않았지만 1882년 임오군란이 발발했다는 것을 알고 김윤식과 함께 청나라군의 파병을 요청한 것도 이 시기에 있었던 일이다. 그 후 서북 경략사로 임명되어 경제 담당답게 북방 무역의 중요성을 알고 조선의 이익을 증진시키기 위해 중강 무역 장정, 회령 통상 장정을 협정했다. 이 때 어윤중의 활동 중 중요한 것은 지역 국경 지대를 조사한 것인데 국경을 보다 확고히 하였으며 이 공로로 종2품 병조참판(국방부 차관)과 호조참판(기획재정부 차관)을 역임하게 된다. 1883년 대담한 개혁안을 제출하였으나 무시당했는데 갑신정변에 참여하지는 않았으나 온건 개화파였던 탓에 명성황후 아래서 중용되지는 못하고 있었다.
1893년 어윤중의 고향인 충청북도 보은에서 농민 집회(동학농민운동의 서막이기도 했다.)가 열리자 '순무사'로 파견되었다. 당시 어윤중이 집회에 참가한 군중들의 성격을 기술해놓은 것을 보면 당시 조선 농민들의 모든 모습이 그 안에 담겨있다. 하여간에 그렇게 군중들을 달래서 집으로 돌려보냈으며 이후 어윤중은 당시 대신들 중 이례적으로 동학도들을 '민당(民黨 : 백성 모임)'으로 지칭해서[15] 많은 대신들의 빈축을 샀다. 1894년 김홍집 내각이 수립되자 자신이 그토록 원하던 탁지부 대신(기획재정부 장관)이 되어서 자신이 그렇게 건의하던 조세 개혁안을 자신의 손으로 행한다. 당시에 얼마나 어윤중이 긴축 정책을 강행하고 조세 개혁을 갈아엎어버렸냐면 당시 사람들이 어윤중을 '전(田)조림'이라고 불렀다. 성씨인 '魚'의 중간인 '田'를 따서 만든건데 이런 별명이 붙어있는걸 보면 얼마나 어윤중이 조세를 짜게 매겼는지 알 수 있다. 당시 잡세, 무토 궁방세를 혁파하고 엄격한 조세 법정주의에 의거한 수금은 많은 민중들이 어윤중에게 호감을 가지게 만들었다. 1895년 춘생문 사건이 터졌을 때 군사를 이끌고 고종을 탈출시키려던 친위대장들과 주모자들을 체포한 것이 다름아닌 어윤중이었다.
1896년 아관파천 사건이 터지고 김홍집, 정병하 등이 광화문 네거리에서 성난 군중에게 구타 후 몸이 찢겨나가는 와중에 어윤중은 망명을 하지 않고 고향인 충청북도 보은군으로 피신한다.[16] 그러다가 그해 2월 17일, 고향 보은군으로 피난하던 길에 충주부 용인군 하동촌면 어비동(현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이동읍 어비리) '어비울(魚肥里)[17]'에서 과거 산송(묘지) 문제로 원한을 품고 있던 향반 정원로(鄭元老)와 정원로가 동원한 임녹길(林彔吉) 등의 머슴들에게 살해당했다.[18] 향년 49세.
정원로와 함께 공모해 어윤중을 살해한 유진구는 정원로 집의 식객이였고 전직 궁내부 순사였다. 그는 춘생문 사건 당시 거사에 참여했다가 겨우 목숨을 건져 추격을 피해 정원로의 집에 숨어 있다가 어윤중의 소식을 접하게 되었던 것이다. 유진구는 이진호의 배신과 어윤중 때문에 춘생문 거사가 실패했다고 생각하던 참에 앙심을 품고 정원로를 꼬드겼다. 정원로 역시 산송 문제로 원한이 있던데다가 마침 용인군수가 관군을 풀어 어윤중을 추격한다는 얘기를 듣고 관군과 합세해 어윤중을 살해한 것이다.
3. 여담
- 원칙주의자다. 본성이 강직하고 담대하여서 조금이라도 법률에 어긋나면 고종이고 명성황후고 NO라고 말했던 양반이다. 심지어는 일본이 제안한 300만원의 차관을 "은이 아니면 안 받는다."라고 말해버렸던 인물.
- 독립유공자 권희목은 그의 외손자이다.
4. 대중매체
5. 둘러보기
고종의 경복궁 탈출 계획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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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양숙공파(襄肅公派)-양주(楊州), 보은(報恩) 문중 28세 允(윤) 항렬. 생몰년대에 비해 항렬이 아주 빠르다. 생년이 100년 가까이 차이 나는 어윤대, 어윤태와 같은 항렬이다.[2] 음력 1월 11일.[3] 선곡리 214-1번지에 있는 보은 최재한 고가가 바로 어윤중의 생가라고 한다.[4] 음력 1월 5일.[5] #[6] 1737년 ~ 1781년 1월 7일. 1771년(영조 47) 식년시 진사시에 2등 20위로 입격하고 조봉대부(朝奉大夫:종4품 문관의 품계) 행(行) 온릉 참봉(종9품)을 역임했다.[7] 1759년 ~ 1782년 10월 3일. 증손자 어윤중이 관직에 오른 뒤 1883년 사복시 정(司僕寺正:정3품)에 추증되었다.[8] 1795년 ~ 1840년 6월 19일. 손자 어윤중이 관직에 오른 뒤 1883년 이조 참의(정3품)에 추증되었다.[9] 초명 어도우(魚道愚). 1818년 ~ 1863년 8월 6일. 아들 어윤중이 관직에 오른 뒤 1883년 이조 참판(종2품)에 추증되었다.[10] 이용규(李容逵)의 딸이다.[11] 무과가 아니므로 아니라 3등급.[12] 당시의 문제를 매우 정확히 체계적으로 짚고 있다.[13] 현재의 재무성. 위에서 말한 어윤중의 개혁은 이미 이 때부터 시작되었다.[14] EBS 다큐프라임 <한국인과 영어> 편 참고.[15] 모든 대신들은 동학도들을 비도(匪徒 : 도적떼)라고 탄압했다.[16] 어윤중은 민중들이 자신을 지지하고 있으니 괜찮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불안했는지 여자용 가마를 타서 사람들의 시선을 따돌렸다.[17] '물고기가 살이 찌는 동네' 또는 '물고기가 슬피 운다'라고 해석된다. 어윤중의 성씨는 '魚'로 그야말로 기막힌 우연.[18] <맹꽁이 서당>에서는 어윤중이 '어비울'이라는 이름을 듣고 불안해서 떠나는 중 의심을 한 마을 사람들이 때려죽인 것으로 표현되었다.[19] 2000년 KBS 드라마 <태조 왕건>에서는 신숭겸 역, 2005년 MBC 드라마 <제5공화국>에서는 김재규 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