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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복궁 · 창덕궁 · 창경궁 · 덕수궁 · 경희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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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사적 제117호 경복궁 | ||
<colbgcolor=#bf1400> 경복궁 광화문 景福宮 光化門 | Gwanghwamun | ||
경복궁의 정문 | ||
2023년 월대 복원이 완료된 광화문의 모습 | ||
현판(1867년 - 1951년), 임태영 作 |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사직로 161 | |
창건 | 1395년(태조 4년) 9월 | |
중건 | 1867년(고종 4년) 12월 재건 1927년 9월 15일 해체 이전[1] 1968년 12월 11일 재건[2] 2010년 8월 15일 재건[3] | |
설계 | 김사행[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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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광화문(光化門)은 경복궁의 남문으로, 궁의 정문 기능을 하는 문이다. 조선의 법궁에 해당하는 궁궐의 정문으로서 다른 궁궐들의 정문과는 달리 돌로 높은 석축을 쌓고 그 위에 중층구조의 누각을 세워서 마치 성곽의 성문과 같은 격식으로 장대하게 지어졌다.[5]2. 역사
2.1. 조선 전기
<colbgcolor=#bf1400> 1581년 〈기성입직사주도〉에 묘사된 광화문. |
1395년(태조 4년) 9월에 경복궁이 처음 지어졌을 때는 오문(午門, 현재의 흥례문)이 정문 구실을 하였다가, 이후 궁성을 추가로 두르면서 동문(건춘문), 서문(영추문)과 함께 1398년 ~ 1399년 사이에 창건되었다. 이 때의 규모는 현재와 같은 중층 3칸짜리였다.#[6] 1426년(세종 8년)에 광화문으로 이름을 고쳤다.
이에 관하여 태조 시기에도 이미 '광화문'으로 불렀다는 주장이 있으나, 이는 잘못된 것으로 '광화문'이라는 명칭은 세종 때 붙은 것이 맞다. 《태조실록》은 두 번에 걸쳐 찬집되었는데, 현존하는 《태조실록》은 1448년(세종 30년) 8월에 찬집된 본이기 때문에 편찬 과정에서 세종 재위기에 이미 쓴 '광화문'이란 이름을 그대로 삽입하였기 때문이다. 또 세종 전까지 쓴 이름은 '사정문(四正門)'이라는 주장도 있었으나, 당시를 다룬 실록에서는 이런 이름이 발견되지 않는다.
비슷한 이름으로 1395년(태조 4년) 10월 7일 기사에 정도전이 경복궁의 각종 전각들의 이름을 지은 뜻을 밝히면서, '남쪽의 문(午門)을 정문(正門)이라 하였다'고 한 것을 두고 광화문의 원래 이름으로 오해할 수 있으나 이 때에는 궁성을 착공하지도 않았기 때문에 사실 흥례문을 지칭한 것이다. 창건 당시 기사에서 실제로 흥례문을 "오문(午門)"이라 지칭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광화문의 경우 세종 8년 광화문이란 이름을 얻기 전에는 그냥 궁성 "남문(南門)"이라 한 것으로 보인다.
성종 때인 1474년(성종 5년) 3월 3일에는 경복궁을 수리하면서 광화문, 흥례문(홍례문), 근정문에 청기와를 덮으려 하였으나 정괄이 저지했다.[7] 훗날 중종은 "경회루에 청기와를 올리려 하면서 꼭 정사를 처리하는 곳만을 청기와로 덮을 수 있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라고 주장하였는데, 이러한 예시는 정사를 처리하는 곳 외에 청기와 건물이 존재했다면 들 수 없는 것이므로 경복궁의 청기와 건물이 근정전과 사정전 뿐이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8]
<colbgcolor=#bf1400> 1550년 〈비변사계회도〉에 묘사된 광화문의 전면부 모습. |
흥선대원군 섭정 시기에 중건된 현재의 광화문은 홍예문 구조로 이루어져 있지만, 조선 전기의 광화문은 평거식(平据式) 구조, 즉 입구가 사각형 모양으로 되어 있는 형태였을 가능성이 높다. 실제 발굴 조사를 통해 드러난 태조 연간 광화문의 지대석 배열 구조에서는 일반적인 홍예문과 달리 선단석(扇單石)이 입구 내부로 돌출된 흔적이 없었으며, 홍예문에는 굳이 사용되지 않는 문설주를 설치하는 홈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비변사계회도(1550)〉, 〈기성입직사주도(1581)〉 등 경복궁을 묘사한 조선 전기 회화에서도 광화문의 평거식 구조가 묘사되어 있다. #
조선 초기의 자료로 추정되는 도면을 살펴보면 광화문 양 옆에 전각이 있는 수문이 하나씩 설치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정면에서 보면 마치 천자의 5문제도와 제후의 3문제도롤 교묘히 섞은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조선 전기의 광화문은 1592년(선조 25년)에 발발한 임진왜란 당시 경복궁이 불타면서[9] 같이 소실되었다.
2.2. 조선 후기
<colbgcolor=#bf1400> 구한말 광화문 전경. |
임진왜란 당시 소실 이후 273년 동안 공터로 있다가,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다시 지으면서 1865년(고종 2년)에 재건했다. 이때 제작한 현판의 글씨는 당대의 서화가 정학교가 쓴 것으로도 잘못 알려져 있었으나, 《고종실록》에 따르면 무관 임태영의 글씨[10]인 것으로 밝혀졌다.
<colbgcolor=#bf1400> 1890년 ~ 1968년 사이의 광화문 변천사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
}}} |
2.3. 1920년대
<colbgcolor=#bf1400> [[경복궁 건춘문|{{{#gold 건춘문}}}]] 북측(현 국립 민속 박물관)으로 옮겨진 광화문(1927년경) |
일제강점기 때 일본이 경복궁 앞뜰을 파괴해 조선총독부 신청사를 지었고, 이 때 광화문도 조선총독부 건물을 가로막고 있어 헐 예정이었다. 그러나 이에 대해서는 조선인은 물론 일부 일본인들조차 반발할 정도라서(특히 일본인 야나기 무네요시[11]가 철거를 반대하여 상당한 반향을 일으켰다#) 광화문은 일단 무사히 살아남았다. 이에 대해 《헐려 짓는 광화문》이라는 수필이 존재한다. 하지만 그대로 두면 조선총독부를 가로막기 때문에 때문에 원래 자리에서 벗어난 건춘문 북쪽으로 해체 이전해버렸다. 그리고 조선총독부는 원래 광화문과 다르게 5도 가량 동쪽을 바라보도록 각도를 틀어 남산의 조선신궁 쪽을 바라보도록 만들었다.
2.4. 6.25 전쟁 이후 및 1968년 복원
<colbgcolor=#bf1400> 6.25 전쟁 당시 폭격으로 파괴된 광화문. |
이후 광화문 목조 문루 부분은 6.25 전쟁 때 포탄을 맞아 파괴되었고, 이로 인해 광화문은 석축만 남았다. 그러다 1968년에 남아있던 석축을 중앙청(구 조선총독부 청사) 앞으로 이전해 복원했다.
<colbgcolor=#bf1400> 1968년 복원된 광화문. |
<colbgcolor=#bf1400> 다른 각도에서 촬영된 복원된 광화문. |
박 대통령의 친필로 새겨진 한글 현판 광화문. 이 현판 하나를 제외한다면은 새로 세워진 광화문에서 나무라고는 한 토막도 찾아볼 수 없으며, 모든 자제가 돌, 시멘트 그리고 철근으로 되어 있습니다.
대한뉴스 제 705호 중
그러나 이 복원은 현대에 와서 다음과 같은 이유로 논란이 되었다. 우선 목조가 아닌 콘크리트 복원이었고(관련 링크) 폭격으로 인해 석축도 깨진 부분이 많아 전부 활용할 수 없었고, 남은 것은 기단부 안쪽에 넣어 가렸다.[12] 아울러 광화문을 새로 지을 때 위치와 각도를 중앙청을 기준으로 잡으면서 원래 자리보다 뒤에 지었고, 각도도 3.75도 가량 틀어졌다. 조선 정부에서 경복궁을 지을 때, 근정전, 근정문, 흥례문, 광화문을 일직선으로 놓아서 왕이 근정전에 앉을 때 육조 거리까지 볼 수 있도록 설계했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구도는 일직선이었으나 방어의 목적으로 정중앙으로 완전한 일직선으로 놓지는 않았다는 의견도있다. 옛 성들과 문의 방향을 보면 방어의 목적이 반영되어 오른쪽으로 살짝 치우친 것을 금방 확인할 수 있다.[13] 또한 복원을 주도한 박정희는 문루에 한자가 아닌 자신이 쓴 한글 현판을 걸어놨다.대한뉴스 제 705호 중
철근 콘크리트조로 복원한 자체는 1968년 당시에는 납득할 만한 결정이었을 지도 모른다.[14] 나무와 돌로 지어진 전통 건축물을 철근 콘트리트조로 복원하는 것은 당시만 해도 전통의 파괴가 아니라 현대적인 신공법을 동원한 바람직한 복원으로 받아들여졌던 것. 이 쪽으로 꽤 꼼꼼하다고 알려진 일본도, 1957~1963년 동안 시텐노지를[15] 복원하면서 목재를 쓰지 않고 철근 콘크리트로 쌓아 올린 바 있었다.
콘크리트 광화문 시기에는 조선총독부 정문 자리에 세워져 중앙청 정문 역할도 했고 통행량이 많은 세종로에 있다보니 국가적으로 중요한 일이 있을 때마다 기념 현수막이 여러 차례 걸리기도 했다.[16] 이는 중앙청이 국립중앙박물관으로 바뀐 후에도 마찬가지.
또한 자세히 보면 1968년 광화문 현판 제막 행사 사진에 드러난 한글 현판과, 2000년대까지 걸려있었던 한글 현판의 글씨가 서로 다르다. 둘다 박정희 글씨체이지만 전자는 정자체, 후자는 반흘림체이다. 정자체로 썼던 먼젓번 현판 글씨가 실제로 후자보다 다소 조악한 것을 알 수 있는데, 따로 현판 교체 행사를 갖지도 않고 며칠만에 슬그머니 반흘림체로 쓴 새 현판으로 교체되었다고 한다. 박정희 스스로 자기 글씨가 마음에 들지 않아 새로 써서 교체했다는 듯.
이와 관련하여 재미있는 일화가 있는데, 1968년 광화문 현판식이 있었던 날, 이름난 서예가 출신인 윤제술 국회부의장이 광화문 현판을 보더니 냅다 "아니, 어느 놈이 저걸 글씨라고 썼냐!!!"하고 버럭 소리를 질렀는데, 옆에 있던 동료 정치인이 식겁한 표정으로 박정희를 가리키자 윤제술은 다시 큰 소리로 "아, 그래도 뼈대 하나는 살아 있는 글이구먼!"이라고 했다고.
2.5. 2000년대
<colbgcolor=#bf1400> 2002년 경복궁 모습. 잘 보면 광화문과 나머지 경복궁 건물들의 축이 서로 맞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1995년에 문민정부로 들어서면서 김영삼 대통령의 취임 이후 일제강점기의 흔적이었던 조선총독부가 철거되며, 광화문의 복구는 빠른 물살을 타게 되었다.
결국 경복궁 복원 사업의 일환으로 2006년 12월 4일에 다시 철거되었다. # 이후 콘크리트 문루를 철거하고 다시 복원 공사를 진행했다.[17] 조선시대 원형대로 문루를 나무로 짓고, 현판을 한자로 바꾸며 틀어졌던 축까지 원래대로 되돌려 놓았다.
이때 광화문 앞의 월대도 함께 복원하기로 했으나, 서울시에서 교통 체증을 심화시킬 우려가 있다는 이유로 월대 복원에 반대하고 나섰다. 서울시에서는 광화문 자체가 남쪽으로 14.5m 내려오는 데다가, 광화문 앞 옛 월대의 길이가 40m나 돼, 차로를 55m나 줄여야 하기 때문에 불가능하다는 입장을 내놓았다. 결국 월대를 복원하는 대신 광화문광장에 월대의 위치를 알리는 표지석을 설치하였다.
광화문 월대
光化門 月臺
Gwanghwamun's Woldae
1395년(태조 4년)에 건립한 경복궁은 임진왜란 때 불에 탔다.
이후에 경복궁 대신 창덕궁과 창경궁을 중건하여 중심 궁궐로 사용하였다.
고종이 즉위한 후 흥선 대원군은 왕실의 권위를 회복하고자 경복궁을 중건하였다.
동시에 광화문 앞에 월대를 넓고 길게 사용하여 경복궁의 권위와 품격을 한층 높였다.
이제 경복궁 복원 사업으로 광화문을 원래 위치에 다시 세우면서 월대 일부를 복원하였다.
광화문 월대 터 안내표지판
이후 월대는 2021년 복원이 추진되고, 2023년 10월 15일 복원되었다.光化門 月臺
Gwanghwamun's Woldae
1395년(태조 4년)에 건립한 경복궁은 임진왜란 때 불에 탔다.
이후에 경복궁 대신 창덕궁과 창경궁을 중건하여 중심 궁궐로 사용하였다.
고종이 즉위한 후 흥선 대원군은 왕실의 권위를 회복하고자 경복궁을 중건하였다.
동시에 광화문 앞에 월대를 넓고 길게 사용하여 경복궁의 권위와 품격을 한층 높였다.
이제 경복궁 복원 사업으로 광화문을 원래 위치에 다시 세우면서 월대 일부를 복원하였다.
광화문 월대 터 안내표지판
2.6. 2010년대
2010년 8월에 완공했다. 같은 달 15일, 즉, 광복절에 현판식을 거행하면서 광화문 복원 공사는 모두 끝났다.[18]<colbgcolor=#bf1400> 2010년 복원 후 광화문. |
2010년 8월 15일 이후로 공개된 광화문의 모습. 상술했듯 현판이 조선시대처럼 한자로 바뀌고[19] 소나무와 화강암 등의 재료를 사용하여 복원한 것이 특징이다. 이와 함께 여장[20]의 색도 고증에 맞게 변경되었다. 기단의 돌 색깔이 어떤 것은 말끔하고 어떤 것은 지저분한데 그 까닭은 옛 돌과 새 돌을 같이 썼기 때문이다. 요즘 복원 추세는 과거에 사용된 자재를 최대한 유지하는 것이다. 숭례문 석축의 돌 색깔이 맞지 않는 것도 이 때문이다. 테세우스의 배 역설이 조금은 줄어드는 셈. 세월이 흐르면서 새 돌도 때가 타 옛 돌과 어우러질 것이다.
<colbgcolor=#bf1400> 광화문의 야경. |
모든 부분이 옛 광화문을 철저하게 고증해 전통 방식으로 지어졌지만, 기초만은 그럴 수 없었다. 대신 철근콘크리트로 기초를 만든 뒤 그 위에 석축을 쌓아 올렸다. 전통 방식으로는 인근 수도권 전철 3호선 터널의 진동을 막을 수 없기 때문이다.
<colbgcolor=#bf1400> 갈라진 광화문 현판. |
완공 이후 3달이 지난 2010년 11월 즈음, 갑자기 현판(혹은 편액)이 갈라져 버렸다.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자연적인 균열인지, 복원 기간 단축으로 인한 부실 복원으로 생긴 균열인지에 대해 한동안 설왕설래하기도 했는데, 일단 정부는 목재를 잘못 썼다는 쪽으로 결론을 냈다고 한다. 원래 이런 데 사용하는 목재는 몇 개월 이상 잘 말린 것을 사용해야 뒤틀리는 일이 생기지 않는다고 한다. 그리고 이 일로 인해 목재를 담당한 장인과 전각을 담당한 장인은 서로 남탓 하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다투기도 했다.
2.7. 2020년대
<colbgcolor=#bf1400> 월대 복원 조감도[21] |
직선에서 곡선으로 변경된 사직로 |
2021년에 오세훈 서울시장이 광화문광장 재구조화 공사와 함께 광화문 앞의 월대를 다시 복원하고 해태상도 원위치로 새롭게 옮기기로 결정하였다.
<colbgcolor=#bf1400><colcolor=gold> |
한편, 광화문의 기존 흰색 현판은 또다시 균열이 발생했다고 한다. 문화재청은 보수작업을 하고 새로운 현판을 2023년 하반기의 상징적인 날을 선정해 설치할 계획이었으며,# 이후 월대 복원공사가 마무리되는 일정에 맞추어 검은 바탕에 금색 글자인 현판으로 교체되는 것이 확정되었다. #
2023년 3월, 월대 복원공사의 일환으로 사직로의 이설과 함께 발굴이 시작되었다. 그런데 땅 속에서 일제가 월대를 훼손하고 그 위로 노면전차가 다니게 하려고 설치한 선로가 흙먼지를 뒤집어쓴 채 녹슨 모습으로 발견되었다.# 이 선로는 1966년까지 쓰이던 것으로, 월대 복원을 위해 경기도 의왕시에 있는 철도박물관으로 이전할 계획이라고 한다.#
발굴 조사 결과, 월대의 왼편은 선로로 인해 상당히 심하게 훼손된 상태였지만, 임금이 다니던 어도를 포함한 오른편은 계단이 비교적 온전하게 남아 있었다. 덕분에 왼편 또한 오른편의 형태를 통해 원형대로 복원할 수 있게 되었다. 월대의 폭은 남북 48.7m, 동서 29.7m로 확인되었으며, 또한 월대 왼편에서 삼군부 행랑터가, 오른편에서는 의정부 행랑터가 발견되었다.
또한 2022년에는 경기도 구리시에 자리한 조선시대 왕릉군인 동구릉에 광화문 월대의 난간석으로 추정되는 자재들이 있다는 연구결과가 나왔다.# 문화재청은 월대 난간석으로 판명되면 사용하겠다고 밝혔고 2023년 복원에 활용되는 것이 확정되었다.#
2023년 8월, 故 이건희 회장 유족들이 광화문 월대 서수상 부재를 기증하였다. 1982년 호암미술관 개관 당시부터 야외에 전시하고 있었던 것이라고 한다. 3월 문화재청에 들어온 제보 이후 조사결과 밝혀지게 되었다. #
서수상 발견 언론보도에 쓰인 광화문의 흑백사진(NO. 無 1082-2)은 광화문 월대훼손 3단계 즉 전차선로 개설에 따른 완전 철거 전의 모습이며, 광화문 뒤에 건축중인 조선총독부의 지붕 원형 돔이 보이고 건축용 비계가 설치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원래 월대의 중앙인 어도에 있어야 할 서수상이 양쪽으로 치워진 모습이다. 아마도 조선총독부청사 건설자재를 광화문으로 반입하려 어도를 없애고, 계단부분의 경사로가 크게 확장됐을 때로 추정된다.
그렇게 2023년 10월 15일, 광화문 월대 복원을 완료했다. 이와 함께 현판도 제 모습을 찾음으로써 158년 만에 조선시대의 광화문 모습을 다시 볼 수 있게 되었다.[22]
현재의 광화문과 월대는 원래 높이에 맞춘 것이 아니다. 2010년 월대를 제외한 광화문을 먼저 복원할 당시 광화문 밑으로 지나가는 수도권 전철 3호선의 터널이 있어 지정말뚝을 박아서 지반력을 강화하려던 계획은 무산되었다. 더해서 태조 때의 광화문 유구가 발견되고, 광화문복원자문위원회의 건축분야 자문위원이 "48cm 정도 높이는 것은 현대건축술로 얼마든지 풀어낼 수 있다"고 자문한 결과, 태조 때 유구 위에 콘크리트 매트 기초를 타설하여 보존하기로 결정이 되어, 고종 때의 지형보다 48cm 높게 복원되었다. 동아일보.2008.02.11 월대의 맨 윗부분인 어도와 좌우의 평탄한 황토를 깔은 면의 높이도 당시보다 48cm를 높였다.
<colbgcolor=#bf1400> 새로 만든 광화문 현판. 검은 바탕에 금색 글자이며, 가로가 길어지고 세로가 짧아졌다.[23] |
<colbgcolor=#bf1400><colcolor=gold> |
10월 15일, 복원 작업을 마치고 모습을 드러낸 새로운 모습의 광화문. |
<colbgcolor=#bf1400><colcolor=gold> |
복원 공사 영상 |
3. 논란 및 사건 사고
3.1. 현판 한글화 논쟁
2010년대에 광화문을 복원하면서 과거 박정희 정부의 광화문 복원 사업에서 사용했던 한글 현판은 철거되고, 조선 시대의 한문 현판이 복원되었다.이에 과거처럼 한글로 '광화문'이라 쓴 현판을 붙이자는 주장이 있었다. 특히 이를 위해 조직된 시민 단체 '광화문 현판을 훈민정음체로(대표 강병인)'는 한글을 아끼고 사랑하자는 뜻에서 한자 현판이 아닌 한글 현판을 써야 한다는 취지로 관련 모임과 행사를 수 차례 진행했다. 이 단체는 "광화문은 대한민국 수도 서울의 상징이자 문화 강국 코리아의 얼굴"이라며 "현판이 한자로 되어 한국인의 정신과 말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고 있다"고 그 이유를 밝혔다. # 이들은 스스로 '훈민정음체'[24]라는 폰트를 사용한 한글 편액을 예시로 들고 나와 홍보한 바 있다.
그러나 1960년대의 콘크리트 복원 방식이 아닌, 실제 조선시대의 광화문에 최대한 가까운 모습으로 복원하려는 정부 입장에서 이러한 주장은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그리스에서 파르테논 신전을 최대한 기존의 잔해들로 복원하려 노력하는 것이나, 한국의 숭례문 복원에서 돌의 색깔이 다른 것을 감수하면서까지 옛 기단부 석재를 재활용한 것, 미륵사지 석탑을 완전한 모습이 아닌 파괴된 모습으로 복원한 것 등의 사례는 가급적 본래 모습을 온전히 살리고자 하는 것이다.[25] 그런 관점에서는 처음 경복궁이 건립되었을 때도, 한글이 창제된 지 한참 지난 19세기에 재건될 때까지도 한자로 '광화문(光化門)'이라 쓰였을 문화재를 복원하면서 한글로 갈아치울 수는 없다. 아울러, 동아시아 전반적으로 사용된 공용 문자라는 인식 없이 단순히 한자는 중국 글자라는 일반화도 납득이 어렵다.
<colbgcolor=#bf1400> 흥례문, 근정문, 숭례문의 현판. 모두 한자로 쓰여 있다. |
또한 광화문은 경복궁의 정문이고, 광화문 복원 사업 역시 경복궁 복원 사업의 일환으로 추진한 것이기 때문에 경복궁 내 다른 한자 놔두고 광화문만 한글로 바꿀 당위성 역시 부족하다.
그런데 현판 복원이 끝난 지 1년도 안 된 2024년, 이번에는 유인촌 문화체육관광부장관이 한글 현판으로 교체를 주장하고 나섰다. 시민 단체 수준을 넘어서 정부 부처에서 교체를 주장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지난 5월 세종대왕 탄신 하례연 때부터 사견을 전제로 주장한 것인데, 그 근거가 세종대왕 동상 뒤에 한문 현판은 이상하다는 것이다. 당연히 국회에서도 반응이 좋지 않으며, 국가유산청도 심의 계획은 없다고 전했다. #
3.2. 현판 색상 논쟁 (종결)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한 19세기 광화문의 현판은 검은색 바탕에 금박 글씨였다고 한다.2016년 2월 29일 광화문 현판이 본래 검은 바탕에 흰색 혹은 금색 글씨였다는 주장이 2014년에 이어[26] 또 다시 제기되었다. 미국 스미스소니언 박물관을 통해 공개된 사진에는 광화문 현판의 바탕색이 어둡게 나타났던 것.[27]# 그리고 2개월 뒤에는 1906년 발행된 오원권 지폐 속 광화문 도안에 나타난 현판이 어두운 색으로 표현된 것이 발견되면서 복원 오류 의심은 커져만 갔다.#. 이와 더불어 궁궐 전각에 걸린 현판 가운데 4분의 1이 엉터리라는 조사 결과가 나와 논란이 되기도 했다. 기사
<colbgcolor=#bf1400> 문화재청에서 현판 위치에 여러 색조합의 光자를 놓고 실험하는 모습. |
그런데 뜻밖의 발견이 있었다. 2018년 12월 27일 발표된 논문 '경복궁 영건일기와 경복궁의 여러 상징 연구'에 따르면 위 논문의 저자 김민규가 일본 와세다대학에 소장된 경복궁 영건일기[28]를 분석한 결과 광화문의 현판이 현존하는 근정전의 현판처럼 검은 바탕에 동판을 글자 모양으로 자른 뒤 목판에 붙이고 금칠을 했다는 사실이 새롭게 밝혀졌고,# 묵질금자(墨質金字)라는 구절이 있었다고 한다.#
2023년 7월 기준으로 교체될 현판은 틀 제작, 각자(刻字) 작업과 단청까지 마무리되었다. 10월 광화문 월대 복원 완료 시점에 맞춰 교체될 것으로 예상되었으며#, 월대 복원이 끝나갈 무렵 교체를 시작해 10월 15일에 함께 대중에게 공개하였다. 또한, 새 현판은 크기 비율을 조정하여 기존 대비 가로는 좀 더 길어지고 세로는 약간 짧아졌다. 이로써 현판 색상 논쟁은 완전히 종결되었다.
3.3. 도로표지판 간체자 표기 논란
대한민국 표준 한자 표기인 '光化門'을 중화인민공화국에서 사용하는 간체자 '光化门'으로 표기하는 각종 도로 표지판과 시설 안내문이 입방아에 올랐다.[29]간체자는 20세기 중반 중국에서 한자를 간략화한 것인데, 2010년대 이후 중국인 관광객 유치를 위해 중국어 표기가 한국 내 각종 표지판에 보급되었고 그 과정에서 광화문도 光化门으로 표기된 것으로 보인다. 이에 대해 한자 사용에서 오랜 역사가 있는 한국에서, 중국과는 관련이 적은 시설에도 간체자 표기를 쓰는 게 맞느냐는 시선이 있었다.
2022년 들어 정자 門으로 바꾸었다가, 2023년 6월엔 갑자기 다시 간체자로 바뀌었다. 서울시청 홈페이지 회의록을 보면 친중 측과 반중 측의 항의가 쇄도하면서 불거지는 문제로 보인다.
4. 부속 건물
4.1. 광화문 동 수문장청(光化門 東 守門將廳)
<colbgcolor=#bf1400> 광화문 동 수문장청 |
광화문 동 수문장청 내부 구성도 |
광화문 안쪽 동편의 수문장들이 근무하던 곳이다.
4.2. 광화문 서 수문장청(光化門 西 守門將廳)
<colbgcolor=#bf1400> 광화문 서 수문장청 |
광화문 서 수문장청 내부 구성도 |
광화문 안쪽 서편의 수문장들이 근무하던 곳이다.
4.3. 초관처소(哨官處所), 영군직소(營軍直所)
<colbgcolor=#bf1400> 초관처소, 영군직소 |
초관처소, 영군직소 내부 구성도 |
광화문 안쪽의 경비를 담당한 친군영휘하의 장위영 병사들과 종 9품의 무관인 초관(哨官)의 처소이다.
동쪽 7칸은 초관처소가 서쪽 3칸은 영군직소가 사용했다.
4.4. 군사방(軍士房)
광화문을 여닫는 군사들이 있던 곳이다.
터를 찾을수 없어서 미복원 되었다.원래는 2채였던 광화문의 군사방
4.5. 위소(衛所)
광화문 바깥에 있는 초소이다.
장애인 경사로로 인해 미복원 되었다.
5. 교통
서울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과 180m로 가장 가깝다. 수도권 전철 5호선 광화문역의 경우 역명과는 달리 광화문과는 470m 정도 떨어져 있다. 경복궁역에서 내려서 가는 것보다 광화문역에서의 거리가 대략 2.6배 멀다. 실제 광화문역을 광화문광장역으로 바꾸자는 주장이 나오는 이유. 사실 두 역은 근접한 위치임에도 자체환승이 불가능한 역이라 GTX-A 광화문역 신설 계획이 나오면서 두 역의 통합이 검토된 적이 있으나 무산되었다.그러나 5호선에 있음에도 종로3가역에서 3호선으로 환승하여 경복궁역으로 가는 건 추천하지 않는다. 환승저항과 배차 시격까지 고려하면 오히려 더 실이 될 수 있다. 이럴 경우에는 폭염이나 한파 같은 부담스러운 날씨가 아니라면 광화문역에서 내리는 게 훨씬 낫다. 광화문역에서 내려도 광화문의 정면이 보인다. 5호선 광화문역에서 광화문에 가장 가까운 출구는 2번 출구이며, 광화문광장으로 나 있는 9번 출구로 나와도 된다.
세종대로 사거리 중앙(이순신 동상 앞)에는 서울과 다른 도시의 거리를 측정하는 기준점인 도로원표가 있으며, 이는 국내에서 도로가 시작되는 기점이라 할 수 있다. 다만 요즘 같이 자동차로 붐비는 세종로 한복판에 조형물을 만들 수는 없으니, 도로원표 조형물은 실제보다 151m 떨어진 코리아나 호텔 북쪽에 있다.
광화문 앞 삼거리에서 서쪽으로 계속 직진하면 성산대교와 서부간선도로를 지나 서해안고속도로로 이어져 1번 국도 종점인 목포 신항교차로까지 갈 수 있고 동쪽으로 계속 직진하면 한남대교를 지나 경부고속도로로 이어져 부산광역시 동래구 온천동 온천장교차로까지 갈 수 있다.[30]
6. 여담
* 광화문에 대응되는 고려왕조의 정궁 정문(남문)은 승평문(昇平門)이다.
- 고려왕조 만월대의 황성 정문 이름도 광화문이었다. 다만 한자는 다르다. 조선은 光(빛 광)화문인 반면 고려는 廣(넓을 광)화문이다. 또 조선 광화문은 궁성의 남문인 반면 고려 광화문은 황성의 동문이다.
- 화요일을 제외한 매일 10시, 14시에 수문장 교대식을 진행한다. 자세한 내용은 수문장 교대식으로.
- 서울에서 타 도시까지 거리를 잴 때, 서울의 첫 시작점이자 기준점이 되는 장소가 광화문이다.#
- 광화문을 딴 TV 프로그램도 있다.[31] 2017년에 방영했던 TV조선 프로그램 중에 〈정보통 광화문 640〉이 있었다. 이전 명칭은 생방송 〈광화문의 아침〉이었으며, 2015년 6월 8일부터 평일 아침 7시 30분에 신설되어 방송되었는데 이래저래 표류하다 2017년 7월 3일부터 여름 개편으로 평일 저녁 6시 40분으로 변경되어 1시간 10분간 방송되었다가[32] 이후 편성이 수요일 ~ 목요일로 단축되었다. 날씨, 체조, 각종 생활 정보, 정치 이슈 등의 주제를 다뤘다. 다만 오래 가진 못하고 2017년 12월 28일에 종영되었고, 1월 1일부터 〈야생의 왕국〉으로 대체되었다.
- 2023년, 광화문의 현판 교체를 두고 YTN에선 정보 전달보다 광화문의 현판을 입체적으로 표현하는데 중점을 뒀는지 '文化光'이라고 써서 두루 놀림감이 됐다. 이후 이 기사는 뭐가 잘못된 건지 모르고 '門化光'이라고 쓰면서 한 번 더 놀림을 받았다.#는 말이 많이 있으나, 김예나 기자는 광화문 현판의 원래 글씨는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써내려가고 읽는 방식임을 강조하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한자 배열을 현대의 읽는 방향으로 배열한 것뿐이라고 하였다.
7. 관련 문서
[1] 일제가 조선총독부 청사를 완공하면서 광화문을 해체해 이전하였다.[2] 6.25 전쟁으로 소실된 것을 박정희 정권 시절 콘크리트를 사용해 복원했다.[3] 조선총독부 청사와 콘크리트 광화문 철거 이후 발굴조사를 통해 본래 자리에 전통적인 목조건축 방식으로 복원하였다.[4] 고려 말 조선 초의 환관. 고건축에 뛰어났으며 경복궁의 설계를 담당했다. 흔히 설계자로 알려져 있는 정도전의 경우 도시의 전반적인 틀을 그리고 이름을 작명하기는 했으나 건축학적인 의미의 설계는 아니었다.[5] 문화재청 궁능유적본부 경복궁관리소 "궁성과 문." 공공누리 제1유형 '출처표시' 라이선스에 따라 발췌 인용.[6] 『태조실록』 4년 9월 29일 : "전문(殿門) 3간은 전(殿)(근정전)의 남쪽에 있고, 좌우 행랑 각각 11간과 동(東)·서각루(西角樓) 각각 2간과 오문(午門) 3간은 전문(殿門)의 남쪽에 있다. (중략) 뒤에 궁성을 쌓고 동문은 건춘문(建春門)이라 하고, 서문은 영추문(迎秋門)이라 하며, 남문은 광화문(光化門)이라 했는데, 다락(樓) 3간이 상·하층이 있고, 다락 위에 종과 북을 달아서, 새벽과 저녁을 알리게 하고 중엄(中嚴)을 경계했으며, 문 남쪽 좌우에는 의정부(議政府)·삼군부(三軍府)·육조(六曹)·사헌부(司憲府) 등의 각사(各司) 공청이 벌여 있었다."[7] 《성종실록》 1474년(성종 5년) 3월 3일 기사: "근래에 부역이 그치지 아니하였는데, 이제 경복궁의 근정문·홍례문·광화문에 청기와를 덮기 위하여, 백성을 역사시켜 구워 만들게 하니 그 공(功)이 갑절 내지 다섯 갑절이나 듭니다. 인군(人君)은 마땅히 검소한 행실과 덕(德)을 숭상(崇尙)하여야 하는데, 하물며 첫 정사(政事)이겠습니까?" (중략)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사치하고 화려한 것을 숭상함이 아니고, 또 백성을 고달프게 하려는 것도 아니다. 궁궐(宮闕)이 장차 무너지게 되어 부득이 수즙(修葺)하게 한 것이다." 하므로 정괄이 아뢰기를, "청기와를 구워 만드는 데는 물가의 비용이 적지 않으니 청컨대 이를 정지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가하다." 하였다.[8] 《중종실록》 1520년(중종 15년) 12월 18일 기사: 전교하였다. 경회루(慶會樓)는 바로 명나라 사신을 접대하는 곳으로, 이 누(樓)를 본 중국 사람들은 모두 웅장하고 화려하게 여겼다. 그런데 전부터 청와(靑瓦)로 이지 않고 있으니 어째서인지 모르겠다. 근정전(勤政殿)은 모두 청와로 이었는데 만약 ‘정사를 처리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하여 그렇게 했다면, 함원전(含元殿)·서현전(瑞賢殿)도 모두 청와로 이어야 한다.[9] 경복궁의 소실에 대해서는 일본군이 방화했다는 설도 있고, 국왕의 몽진에 분노한 민중들이 방화했다는 설도 있다. 전자의 경우 당시 같이 갔던 종군승이 경복궁을 보며 "여기가 용이 사는 곳이냐 아니면 신선이 사는 선계냐. 도저히 알지 못하겠다."라고 기록을 남겼는데, 이 말인즉슨 일본군이 한성에 들어왔을 때까지만 해도 경복궁은 온전했다는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후자의 경우 민중이 경복궁을 직접 불태웠다고 기록한 《조선왕조실록》과 류성룡의 《징비록》을 근거로 한다.[10] 《고종실록》 참조.[11] 일본의 민예 연구가, 미술 평론가로 한국 민속 예술이나 미술 쪽에도 상당한 관심을 가져 일본인임에도 조선에 대한 미술 서적을 발간했다. 연구에 대한 깊이나 정도가 훌륭해 야나기 무네요시에 대한 인물 연구 서적, 그의 연구에 대한 평론, 연구 서적 등이 현재에도 나올 정도다(다만 그의 주장 중 하나인 '조선의 예술은 억압과 탄압에서 비롯돼서 그에 따른 '한(恨)' 모티브가 존재한다.'란 부분만큼은 여러 학자에게 가루가 되도록 까였다). 그의 광화문 철거 반대는 동정표도 섞여있을지는 모르나 워낙 그 당시로서나 지금으로서나 꽤나 민예, 미술계에서의 그의 평가가 대단했고 그 당시 입지 역시 상당한 것으로(그러니 파문이 일었겠지만) 민예, 미술 연구가로서도 광화문만한 연구 소재가 사라지는 것 역시 바라지 않았을 것이다. 물론 그런 상황을 알든 모르든 언론이나 민중(일본이든 조선이든)이 당시 상황(일제 강점기 상황)에서 그가 발언한 광화문 철거 반대는 크나큰 떡밥이었으리라. 덧붙여 한자로 쓴 이름이 유종열(柳宗悅) 로 조선 이름처럼 들리는 이름이라 당시 조선 총독부에서 웬 조선인이 헛소리를 한다, 혹은 그 새끼 실은 조선놈 아니냐, 하고 대노했다는 이야기도 있다.[12] 《경복궁야화》 (탐구당, 1991년).[13] 1968년의 광화문은 중앙청에 맞춰서 지었기 때문에, 중앙청 철거 이후에도 근정전 앞 월대에서 앞을 바라보면 광화문이 틀어진 모습이 보였다. 반대로 광화문 광장에서 근정전을 보려면 세 문 중 가운데 문이 아니라 왼쪽 문을 바라봐야 일직선 축에 맞게 보였다.[14] 지금도 경복궁 서쪽 문인 영추문이 철근 콘크리트 식으로 남아있고, 멀리 떨어지지 않은 보신각도 철근 콘크리트 구조이다.[15] 곤고구미로 나름 유명한 절이다.[16] 1986 서울 아시안 게임이나 1988 서울 올림픽은 물론이고 박정희-전두환-노태우 대통령의 해외 순방 향발/귀국 때도 현수막이 걸렸다.[17] 서울역사박물관 외부에 철거 때 남겨둔 광화문 콘크리트 단면 조각이 남아 있다.[18] 12월 완공 예정이던 걸 G20 회의 때문에 9월로, 다시 광복절에 맞춘다고 8월로 앞당겨 부실 우려가 나오기도 했다. 보안과 형사들까지 현장에 전화질에 방문질을 해댔다고.[19] 옛 광화문의 사진을 바탕으로 디지털 복원하여 만든 것이다. 다만 이 현판은 서예 전문가들에게는 글씨 자체만 놓고 보면 썩 좋지만은 않다는 평가를 받았다. 아무래도 직접 손으로 쓴 글씨에는, 디지털 복원한 글씨에는 없는 특유의 '느낌'이 남아 있기 때문이란 것이 요지. 다만 광화문 현판은 예술성뿐만 아니라 역사 고증도 중요하기 때문에 디지털 복원은 불가피한 일이었다.[20] 석축 부분 위에 무늬가 그려져 있는 흰색 부분과 어두운 회색 부분이 번갈아 있는 부분을 여장이라 한다. 복원 전에는 모든 부분이 밝은 회색 바탕에 무늬가 더 두껍고 노란 색이였으나 복원 후에는 흰색과 어두운 색 벽돌로 교체되었다[21] 계획 수립 당시 만들어진 조감도이므로 발굴 조사에 의거한 최종 완공 결과와는 약간 다르다.[22] 단, 광화문 양쪽에 있던 위소는 장애인경사로를 설치하려고 복원하지 않았다.[23] 출처 - 문화재청[24] EBS에서 만들어 배포하는 것과는 달리 ㅇ 받침에 삐침이 있는 자체 제작하거나 수정한 글꼴이다.[25] 미륵사지 석탑의 경우 부서지지 않은 부분을 중심으로 대칭을 이루고 있는 형태임이 거의 확실하고, 실제로 석축만 남아 있던 동탑 자리에는 온전한 탑 형태를 복원했다가 '신생 사찰의 조각품 같다'는 비판을 받은 바 있다.[26] 기사 참조.[27] 사실 경복궁의 다른 문들을 비롯하여 각 주요 전각들을 보면 현판들이 검은 바탕에 흰색 혹은 금색 글씨다. 경복궁의 정문인 광화문의 대표성을 봐도 상당히 근거 있는 주장이라 할 수 있다. 다만 발견된 사진만으로는 완전하다고 할 수 없는 것이, 조선 초기의 경복궁을 반영한 것인지는 알 수가 없다는 점이다. 사진 속 광화문조차도 임진왜란 후 2백여 년 후에 복원된 건물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19세기 당시 기준의 본모습을 알 수 있어 의의는 크다.[28] 경복궁의 건설 과정을 자세하게 기록한 문건.[29] 2009년 기준으로는 정체자로 올라와 있었다.[30] 온천장교차로애서 온천장로가 일방통행이라 못 간다.[31] 다만, 광화문보다는 광화문광장까지 가리키고 만든 것.[32] 대신 기존 시간대에 방송되었던 행복한 저녁은 종영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