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초기에는 없었고 수정전 언저리에 그 유명한 집현전이 있었다.[2] 수정전 자체는 1867년(고종 4년) 경복궁을 중건할 때 처음 지었으며 사정전과 함께 편전의 용도로 사용되었다.## 때로는 이 곳에서 행사를 거행하고 어진을 잠시 모셔두기도 했다.# 이 때에는 주변에 200칸 가까운 행각들이 있었고 북행각과 수정전 본채가 복도로 연결되었으며 궐내각사에 해당하는 수많은 전각들이 경복궁의 서쪽 대문인 영추문까지 즐비해 있는 등 지금과는 많이 다른 모습이었다.
<colbgcolor=#bf1400> 건물 양 측면에 복도가 있는 수정전
1894년(고종 31년) 1차 갑오개혁 때에는 국사책에도 나오는 그 군국기무처가 들어섰다가 이후 의정부에서 이름이 바뀐 내각의 청사로 기능하였다.# 이 때 수정전과 북행각을 연결하는 복도는 사라지고 대신 좌우에 복도가 새로 생겼으며 가운데와 바깥 행각의 규모를 확장하는 변화가 있었다.#
<colbgcolor=#bf1400> 일제강점기 수정전
<colbgcolor=#bf1400> 전시실로 변한 수정전 내부. 중앙아시아의 유물을 전시하고 있다.
경술국치 이전에는 정문인 숭양문 주변 행각을 제외한 다른 행각들이 모두 헐렸고[3], 일제강점기에는 일제가 식민 통치 5년 째 되는 걸 기념한답시고 경복궁에서 개최한 조선물산공진회의 전시관으로 활용하면서 내부는 많이 훼손되었고, 부속 건물들은 전부 헐려 건물 하나만 남았다. 이후에도 미술품을 전시하는 공간이었고, 해방 이후 1966년부터 1975년까지는 한국민속관[4]으로 기능하였다.
경복궁 1차 복원공사 5단계(1997년 ~ 2001년)에 국가유산청에서 수정전의 행각을 복원할 예정이었지만 계획대로 하지 못했다. 이후 2차 복원 때 포함시켰지만 2차 계획을 축소하면서 다시 무산시켰다. 계속해서 복원을 무산시킨 이유는 상술했듯이 《북궐도형》작성 시 이미 건물이 철거되어 건물의 전체적인 구조만 알 수 있을 뿐, 상세한 구조는 모르기 때문이다.
정면 10칸, 측면 4칸의 1층[5]이다. 장대석을 높게 쌓은 6단의 기단 위에 주춧돌을 놓고 네모난 기둥을 세운 뒤, 겹처마 양식으로 지었다. 공포는 쇠서[6] 2개를 둔 이익공이고 기둥 사이마다 화반을 놓은 뒤 그 위에 운공을 설치하였다. 지붕은 팔작지붕으로 용마루와 내림마루, 추녀마루는 양성바름을 하고 취두와 용두, 6개의 잡상을 설치하여 장식하였으며, 단청은 모로단청[7]으로 칠하여 깔끔하면서도 화려한 모습을 뽐내게 하였다.
출입문은 남쪽 정면 가운데의 2칸이며 나머지는 전부 창문이다. 모든 칸의 외벽에는 윗부분에 빗살무늬 교창을, 창문의 아랫부분에는 머름을 두었다.
건물 남쪽 전면에 큰 월대를 두었다. 월대는 4단이고 월대 윗 부분은 박석으로 마감했다. 계단은 월대 정면에 3개, 측면에 2개, 총 5개가 놓여있고 그 중 임금이 다니는 정면의 가운데 계단은 소맷돌을 두어 다른 계단과 차별화시켰다. 가운데 계단과 그 왼편에 있는 계단 사이엔 무늬가 새겨진 댓돌이 있다.
기단 양 측면에 나무로 된 문이 보이는데 온돌에 불을 지피는 아궁이다. 불을 때면서 나오는 연기를 배출할 굴뚝을 수정전 건물 바로 뒤에 두 개를 놓았는데, 별다른 무늬없이 그냥 벽돌을 길이쌓기하고 그 위에 한옥처럼 기와지붕을 올린 뒤 흙으로 구워 만든 배출구를 올렸다.[9]
내부는, 가운데 정면 3칸, 측면 2칸을 대청으로 놓았는데 대청은 서쪽으로 치우쳐있으며, 칸을 나누지 않고 한 공간으로 뚫어 넓게 쓸 수 있게 하였다. 천장은 우물 반자[11]로 막고 마루는 우물 마루로 놓았다. 대청을 중심으로 서쪽에는 정면 2칸, 측면 2칸의, 동쪽에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온돌방을 두었으며 온돌방과 대청 주변을 전부 툇간이 둘러싸고 있는데, 남쪽의 툇간은 다른 면의 툇간보다 남, 북 축의 길이가 훨씬 길다.#
대청과 온돌방을 연결하는 문은 세살청판 문 모습으로 되어있다. 온돌방 내부는 완자 장지문으로 공간을 구분하고 있다.#
<colbgcolor=#bf1400> 《북궐도형》의 수정전 및 행각 내부 구성도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 행각은 수정전을 3중으로 둘러싸고 가장 남쪽의 남외행각에는 정문인 숭양문(崇陽門)과 남외행각 서쪽에 수정전의 음식을 만들던 곳인 대전 수랏간(大殿 水剌間)이 연결되어 있었으며, 중행각에는 중문인 영화문(永和門)이, 남행각에는 수정문(修政門)이, 수정전의 복도는 동쪽의 사정전 서행각과 서쪽의 각 관아의 서리(書吏)가 쓰던 대전장방(大殿長房)과 연결되어 있으며 마지막으로 북행각은 동쪽부터 융지문(隆智門),장원당(章元堂),협오당(協五堂),습회당(習會堂)이 있었다. 위에도 언급되다시피 2차 복원에서 수정전의 행각과 대전 수랏간(大殿 水剌間)을 복원하려 했지만 2차 복원 계획의 축소로 취소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