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사적 제117호 경복궁 | ||
<colbgcolor=#bf1400> 경복궁 문경전 景福宮 文慶殿 |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사직로 161 (세종로) | |
건축시기 | 1867년 (창건) / 1904년 (철훼) |
<colbgcolor=#bf1400> 경회루에서 보는 이건되기전의 문경전 건물 |
<colbgcolor=#bf1400> 창덕궁으로 이건된 현재의 문경전 건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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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경복궁의 건물이다. 경복궁의 서북쪽 태원전의 남동쪽에 있었다.2. 용도
혼전(魂殿)이다. 혼전은 왕과 왕비, 대비가 죽은 후 3년상이 끝날 때까지 신주을 모시던 곳이다. 혼전은 국상 때 잠깐 사용하는 용도였기에 건물을 따로 짓지 않고, 편전이나 침전의 일부 건물을 활용했다. 그러다 1860년대에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아예 혼전 전용 건물을 따로 지었고 임금의 생전에 왕비가 죽은 경우에는 신주를 기존에 모시던 곳에 계속 두고 있다가 임금이 죽은 다음에야 종묘에 봉안할 수 있었기 때문에 줄초상에 대비하기 위해 2개의 혼전을 지었고 동쪽에 문경전(文慶殿)이, 서쪽에 회안전(會安殿)이 위치했다.3. 역사
임진왜란 이전에는 없었다. 1860년대에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처음 지었다. 지어진 이후 1890년(고종 27년) 대왕대비 신정왕후의 장례와 1895년(고종 32년) 왕비인 명성황후의 장례때 사용되었고 명성황후의 신주를 경운궁의 경소전으로 이건한뒤 비웠다가 1903년(광무 7년)에 명헌태후의 사망으로 문경전 서쪽의 회안전을 경운궁(지금의 덕수궁)으로 옮겨지어 혼전인 효혜전(孝惠殿)으로 사용했고 명헌태후의 삼년상이 끝나지 않은 1904년(광무 8년) 당시 황태자였던 순종의 첫 번째 아내 순명효황후 민씨가 사망하자 문경전을 경운궁(지금의 덕수궁)으로 옮겨 지어 혼전인 의효전(懿孝殿)으로 사용했다.보통 혼전이 되면서 생긴 이름은 상례가 끝나면 사라지고 원래 이름대로 돌아가나 순명효황후는 순종보다 먼저 죽었기 때문에 계속 신주를 의효전에 모시면서 그대로 이름이 굳어졌다. 1919년 고종의 승하 후 1920년 경에 일제가 현재의 창덕궁 신선원전 자리로 옮겼다. 즉, 경복궁, 경운궁, 창덕궁 3궁이나 거친 수난을 겪은(...) 건물. 1926년 순종이 승하하고 2년 뒤인 1928년 종묘에 부묘되면서 순명효황후의 위패 역시 종묘로 가게 되어 그제서야 의효전의 현판을 내렸다. 이후 잊히면서 한동안은 이름마저 '의로전(懿老殿)'으로 잘못 알려졌다. '효(孝)'를 비슷한 모양의 '로(老)'로 오독한 것. 2007년에 와서야 문헌 조사를 통해 정확한 실체를 확인했다. 의효전 현판은 현재 국립고궁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다. 2005년 태원전 복원공사때 터를 확인해 정비해 두었고 건물이 이건되었긴 해도 모습을 확인이 가능해서 경복궁 2차 복원 공사 4단계(2035년~2041년)에 걸쳐 복원될 예정이다.
현재는 발굴조사를 2024년 9월 30일까지 진행할 예정이다.
4. 구조
※ 현재는 없는 건물이기 때문에 《북궐도형》의 모습을 토대로 서술하였다.
<colbgcolor=#bf1400> 《북궐도형》의 문경전 및 행각 내부 구성도 |
창덕궁으로 이건된 뒤에는 행각은 변형되었고 현재의 본채의 구조는 기단 3벌대를 쌓고 그 위에 건물을 올렸으며 정면(남면)으로 나름 넓은 월대를 두었는데 기단보다는 조금 낮고 월대 앞에 2칸 반짜리 소맷돌 없는 계단을 3세트 씩 놓고 좌, 우 양 측면에도 같은 계단을 각각 하나씩 놓았다. 정, 측면 각각 3칸 총 9칸으로 지붕은 팔작지붕에 처마는 겹처마로 공포는 초익공 양식이다. 용마루와 추녀마루, 내림마루는 양성바름을 하고 취두와 용두, 6개의 잡상을 올렸다. 창호는 전부 정(井)자 살이며 중방과 교창 없이 문과 상방이 바로 붙어있다. 내부는 한 칸으로 통해 있다.
5. 부속 건물
원래의 경복궁 2차 복원 계획에선 아래의 건물들도 포함해서 복원될 예정이었으나복원계획 축소로 아래의 건물들은 미복원될 예정이다.
5.1. 회안전(會安殿)
<colbgcolor=#bf1400> 《북궐도형》의 회안전 및 행각 내부 구성도 |
문경전 서쪽에 있던 혼전이다. 실제로 혼전으로 사용된적은 없고 1903년(광무 7년)에 명헌태후의 사망으로 혼전인 효혜전(孝惠殿)으로 사용하기 위해 이건해서 경운궁(지금의 덕수궁)으로 가서 흥복전(興福殿)이 되었다. 그러나 흥복전도 경운궁의 선원전과 같이 헐려서 현재는 없고 회안전의 터는 잔디로 정비해 두었다. 남서쪽에는 문경전과 마찬가지로 회안전을 지키는 군사들이 머물던 수궁(守宮)이 있었다.
5.2. 혼전 원역처소(魂殿 員役處所), 제관방(齊官方)
<colbgcolor=#bf1400> 《북궐도형》의 혼전 원역처소 및 제관방 내부 구성도 |
원래는 제사 음식을 만드는 숙설소(熟設所)이나 1890년(고종 27년) 대왕대비 신정왕후의 장례때 개축공사로 제반관서에 딸린 구실아치인 원역들이 머무는 처소인 원역처소가 되었고 남쪽에 제관들이 머무는 제관방(齊官方)이 추가되었다. 이때 혼전 영역의 출입문인 청목문(靑穆門)도 문 좌,우로 월랑이 추가된다. 1907년(광무 11년)에 제작된 《북궐도형》에는 다른 혼전 권역 건물들과는 달리 존재해서 실내구조를 알수있지만 일제강점기에는 헐려서 현재는 없고 잔디로 터만 정비해 두었다.
5.3. 숙설소(熟設所)
<colbgcolor=#bf1400> 《북궐도형》의 숙설소 내부 구성도 |
원래는 혼전 영역의 동편에 있는 군인들의 처소인 병정처소(兵丁處所)이나 1890년(고종 27년) 대왕대비 신정왕후의 장례때 개축공사로 제사 음식을 만드는 숙설소로 개조되었다가 1907년(광무 11년)에 제작된 《북궐도형》에는 이미 헐려서 '금무(今無)' 즉 '현재는 없음' 으로 표시하고 빈칸으로 그려두었다. 현재는 잔디로 터만 정비해 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