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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07 22:27:20

전주 화약

동학농민혁명
東學農民革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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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BS 금토 드라마 녹두꽃에서 묘사된 전주 화약

1. 개요2. 배경3. 전개4. 화약의 내용과 결과

1. 개요

동학 농민 혁명 당시 전주성을 점령한 동학군과 조선 조정이 1894년 6월 11일(음력 5월 8일)에 맺은 협정.

2. 배경

황토현 전투와 장성 황룡촌 전투에서 관군을 격파한 동학 농민군은 마침내 전주부성에 입성했다. 이에 놀란 조선 조정은 동학군을 진압하기 위해 청나라에 원병을 요청하고 이에 따라 청군이 아산만에 상륙하기에 이르자, 한편 조선의 상황을 예의주시 하던 일본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조선에서의 영향력을 늘리기 위해 톈진 조약에 의거, 제물포(현재의 인천)에 병력을 진주시킨다.[1]

이에 놀란 조정은 다급히 농민군과 화약을 맺어 청군과 일본군이 모두 물러가게 하려 했다. 톈진 조약에 의거하면 조선의 변란이 진정될 때 양국 모두 즉시 병력을 철수하여야 하며 잔류하지 못한다는 조항이 있었기 때문이다. 동학군 역시 사정은 마찬가지였는데, 완산 전투에서 홍계훈이 이끄는 경군에게 대패했고 대장 전봉준도 허벅지에 총상을 입어 더 싸우기 어려워졌을 뿐더러 동학군의 주력인 농민들에게 농번기가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3. 전개

전봉준은 황토현 전투에서 전라 감영군을 격파한 뒤인 음력 4월 19일, 경군을 이끌고 내려온 양호초토사 홍계훈에게 한 장의 정장을 보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호남 유생은 원한과 피를 머금고 백번 절하며 엄중한 위엄으로 밝게 살피시는 초토사께 편지를 올립니다. 삼가 생각건대, 저희들은 하늘과 땅 사이에서 교화에 참여하는 사람으로 어찌 감히 함부로 의롭지 않은 일을 하여 스스로 형벌에 빠지겠습니까?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고 근본이 견고하면 나라가 편안하다는 것이 옛 성인의 유훈(遺訓)이고 시무(時務)의 대강(大綱)입니다. 방백(方伯)과 수재(守宰)는 목민(牧民)하는 관리로서 선왕의 법으로 선왕의 백성을 다스린다면 비록 천년을 지난다고 해도 그 나라를 오랫동안 누릴 것입니다. 지금의 수령은 왕법(王法)을 돌아보지 않고 왕민(王民)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탐학이 일정하지 않아 군전(軍錢)은 때도 없이 함부로 배정하고, 환전(還錢)은 밑천을 뽑아 바치기를 독촉하며 조세는 명목이 없이 더 거두고 각종의 연역(煙役)은 날마다 중복하여 거두기를 마다하지 않습니다. 전운영의 균전관(均田官)이 전결(田結)을 농단하여 세(稅)를 걷으며 각사(各司)의 교례배(校隷輩)들의 토색과 지독한 탐학은 하나하나 견딜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백성들이 그 둥지를 잃고 10중에 8~9명이 옷과 먹을 것이 없이 길바닥에 흩어졌고 늙은이를 부축하며 어린애를 데리고 온 자가 연이어 골짜기를 메웠습니다. 살아갈 방도가 만에 한 가지도 없습니다. 가엾은 이 백성은 죽어도 서로 모일 수가 없습니다. 수 백명이 본관(本官)에 호소하면 난류(亂類)라고 하고, 영문(營門)에 호소하려고 하면 역류(逆類)라고 지목하여 막중한 친군(親軍)이 마음대로 발포하여 여러 읍에서 병사를 모아 칼로 도륙합니다. 죽이고 없애는 데에 거리낌이 없으니 교화를 펴고 백성을 기르는 사람이 참으로 이와 같을 수 있습니까?

저희들의 오늘 거사는 어쩔 수 없는 사정에서 나왔고 병기를 쥔 것은 단지 몸을 보호하는 계획입니다. 일이 이런 지경에 이르러서 억조(億兆)가 마음을 한가지로 하고 팔로(八路)가 논의하였습니다. 위로는 국태공(國太公, 흥선대원군)을 받들어 부자(父子)간의 인륜과 군신(君臣)간의 의리를 온전히 하며 아래로는 백성들을 편안히 하고 종묘사직을 보호하려는 바람을 죽어도 변하지 않을 것을 서약했습니다. 초토사께서 살펴주시고 처분을 내려주시기를 바랍니다.
전봉준이 홍계훈에게 보낸 원정 출처

정장을 요약하자면 흥선대원군이 돌아와서 탐관오리 때려잡아주면 해산할게요.

이후 4월 22일 이학승이 지휘하는 경군 별동대가 장성 황룡촌 전투에서 동학농민군에게 대패하고, 27일 농민군은 전주부성에 무혈입성한다. 충격을 받은 고종은 청나라에 파병을 요청하고, 여기에 일본까지 끼어들면서 외국군대가 조선에 진주하게 된다. 농민군을 추격하던 홍계훈은 4월 28일 전주성이 훤히 내다보이는 완산에 진을 치고, 이를 몰아내기 위해 농민군이 출성하면서 완산 전투가 벌어졌다. 그러나 이전의 싸움과 달리 고지에서 신식 무기로 무장한 관군의 압도적인 화력에 농민군은 참패를 거듭했고 총대장 전봉준이 부상을 입는 지경에 이른다.

그러나 조정은 조정대로 외국군이 연달아 진주하면서 위기에 처했기에 최대한 빨리 전주성을 탈환하여 봉기를 마무리지으려 들었다. 이때 전봉준이 먼저 화의를 청했고, 조정은 처음에는 거부했지만 머지않아 태도를 바꿔 신임 전라감사 김학진에게 전권을 부여하여 교섭에 나섰다. 이때 전봉준은 폐정개혁안 27개조를 내놓았고, 김학진이 무조건 수용함으로써 전주 화약이 성립되었다.

4. 화약의 내용과 결과

1940년 출간된 역사소설 동학사에 따르면 동학 농민군이 당시 내세운 폐정 개혁 12개조는 다음과 같다.

그래서 21세기 초 연구에서는 폐정 개혁안은 후대에 창작된 것이고 실제 존재하지 않았다는 학설이 세를 얻었으나, 최근 연구에 따라 폐정 개혁안이 실제 존재한다는 연구가 많이 이루어지고 있다. <동학농민전쟁과 갑오개혁에 대한 시민혁명적 관점의 분석>등 최근에 나온 논문이 많으니 참고해보자.
1. 도인(道人)[2]과 조정과의 사이에는 숙혐(宿嫌)을 탕척(蕩滌)하고 서정(庶政)을 협력할 것.
2. 탐관오리는 그 죄목을 사득(査得)해 일일이 엄징할 것.
3. 횡포한 부호배(富豪輩)를 엄징할 것.
4. 불량한 유림(儒林)과 양반배(兩班輩)는 못된 버릇을 징벌할 것.
5. 노비 문서는 불태워버릴 것.
6. 7종의 천인[3]의 대우는 개선하고 백정(白丁) 머리에 쓰는 평양립(平壤笠)은 벗어 버릴 것.
7. 청춘과부(靑春寡婦)의 개가를 허락할 것.
8. 무명잡세(無名雜稅)는 일체 거두어들이지 말 것.
9. 관리 채용은 지벌(地閥)을 타파하고 인재를 등용할 것.
10. 왜(倭)와 간통(奸通)하는 자는 엄징할 것.
11. 공사채(公私債)를 막론하고 기왕의 것은 모두 무효로 할 것.
12. 토지는 평균으로 분작(分作)하게 할 것.

동학군은 전주성에서 퇴거하고 자진 해산하여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동학군이 전라도를 휩쓰는 바람에 전라도 일대의 행정이 마비되는 지경에 이르렀고, 이를 수습하기 위해 김학진과 전봉준은 농민들의 자치기구인 집강소를 설치하기로 합의하였다. 농민군은 전주에 집강소의 총본부를, 전라도 53개 주읍에 집강소를 설치하여 폐정개혁을 서둘렀으나 나주[4], 남원[5] 등에서는 관군의 저항이 끊이지 않았으며 1894년 7월 여단장 오시마 요시마사(大島義昌) 및 2대대장 야마구치 케이조를 필두로 일본군이 경복궁을 범궐(犯闕)하여 고종의 신변을 확보하고 친일내각을 세우자 개혁은 수포로 돌아간다. 결국 이 때문에 2차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난다.


[1] 아산만에 진주한 청군은 정말로 동학군을 진압하러 온 것에 비해, 일본군은 아예 한성을 점령하려는 의도였다. 그렇지 않고서는 전라도에 있는 동학군을 진압하기 위해 한성 인근으로 상륙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2] 동학교도[3] 일명 칠반천역(七般賤役)[4] 나주는 양반의 세력이 강해 원래 동학교도에 대한 탄압이 극심한 동네였을 뿐 아니라 천혜의 지리적 요건을 가지고 있어 동학군이 쉽게 관군을 격파하지 못하고 있었다.[5] 결국 남원에서 저항하던 관군은 김개남이 지휘하는 동학군에 의해 강제로 진압당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