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무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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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설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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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미술품 소장가인 '체스터 장'[1] 박사와 '완다 장'씨 부부가 한국 정부에 기증한 '천보총'으로 추정되는 '희귀 소총'의 실물 모습이다.[2] 출처 |
본래 핸드캐넌의 일종인 총통[4]을 쓰던 조선에서 화승총의 도입은 임진왜란 때, 일본군에서 조총을 노획하여 복제하면서부터 였다. 정유재란이 터지기 전에 이미 조총에 대한 적응을 끝마쳤고, 병자호란 이전에 일본제 조총의 마이너카피 제품을 생산하던 것을 넘어서 기존의 조총보다 뛰어난 조선제 조총을 생산할 수 있게 되었다. 천보총이 개발될 시기인 17세기 말, 청나라와 일본이 내부사정[5]으로 총기를 점진적으로 도태시키기 시작한 것에 반하여, 조선은 민간군수공업이 성장할 정도로 조총을 대량[6][7]으로 생산했고 당연히 여러가지 종류의 조총이 탄생했다.
정부에서 개발한 조총 중, 산성을 중심으로 방어 교리를 보편적으로 채택하고 있던 조선군이 최대한 활용할 수 있는 조총이 개발되었는데, 그 조총의 이름이 '천보총'이었다.[8] 초기에는 성벽에 거치하여 쓰는 거치형으로 개발되었으나, 후에는 개인화기로 발전했다. 다른 모든 조총처럼 전장식 화승총의 형태였으며, 기존 조총보다 긴 사거리를 가졌으나 정말로 천보[9]인 것은 아니고 그냥 '사거리가 매우 길다.'라는 비유이자 형용사로 '천보'라는 명칭이 붙었을 뿐 정말로 천보 앞을 유효사거리로 둔 총은 아니다.[10]
보통 서북지방에서 운영했다고 한다. 직접적으로 전해지는 공인된 유물이 없어서[11] 자세한 형태는 알 도리가 없다.[12] 다만 천보총을 대량 운용했던 기록이 있는 이상 분명 천보총이 존재하는 것은 확실하다.[13]
2. 설계에 대한 추측
2.1. 이동 거치식 설 - 장(長)총통 개념
유럽에서는 Wall Gun이라고 불리던 대형 전장식 총통(핸드캐넌)이었을 것이라는 추측이 있다. 월건은 성벽에서는 포루나 총안구에 거치해서 사용했고, 야전에서는 2인 1조로 운영되어 한 명이 서서 받치는 동안 한명이 발사하는 방식으로 사용되었다.영국의 월건을 예시로 보자#설계가 매우 간단해서, 중국[14], 서양, 인도를 가리지 않고 화약 병기을 운용했던 국가라면 전장에서 잘 써먹었던 무기였다. 2명이서 운용한다는 점 덕에 길이를 길게 늘리기도 쉬웠기에 소형 기준으로도 화승총에 비해서 긴 유효사거리가 나와서 저격하는데 쓸 수도 있었다. 실제로 조선 후기에 조선 영해에 침범했던 미국인들의 기록에도 조선군이 이러한 종류의 무기를 사용했다고 되어있다.
그러나 조선에서도 월건의 형식을 가진 무기를 운용하기는 했어도, 그게 천보총이라는 보증은 없다. 대한제국의 멸망과 함께 소실된 조선제 화약병기 정보는 천보총만의 이야기가 아닌지라, 정보가 유실된 무기가 매우 많기 때문이다.[15] 무엇보다 일본제국의 조선제 화약병기 기록 말소에도 기록이 남을 정도로 조선에서 대규모로 운용된 병기가 2인 1조로 운영해야하는 불편한 무기였을 확률은 매우 적다. 월건의 형식이었을 것이란 추측은 조선의 기술력으로 실제 천 보의 사거리를 확보하려면 월건의 형식이 아니면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16]
2.2. 개인 화기 설 - 장(長)조총 개념
초기형 천보총은 무겁고 불편하다는 기록이 있지만, 초기형 천보총에 대한 기록으로부터 30여 년 후인 영조시대에 수어청이 새로운 천보총을 개발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새로운 천보총은 수어청의 사령관인 수어사, 윤필은이 만들었다고 하며, 기존의 천보총과는 달리 하나의 쇠막대기처럼 가볍고 편리하다는 언급이 있다. 즉 천보총은 숙종에 개발되었지만, 영조에 이르러 극적으로 큰 성능향상이 된 상향 제품이 또 따로 개발이 되었다는 것이다.[17] 여기서 하나의 쇠막대기처럼 가볍고 편리하다라는 언급 때문에 기존 조총에서 총신의 길이를 늘려서 사거리를 늘린 장총 형식일 것이라는 추측이 있다.문제는 조선이 임진왜란 직후부터 사거리를 늘리려는 시도를 해왔었고, 그 결과로써 총신의 길이를 늘려서 사거리를 늘린 장(長)조총이라는 무기체계를 이미 보유했다는 사실이다. 장(長)조총은 천보총처럼 기록이 매우 많은 무기이고 장(長)조총의 실물로 보이는 유물 또한 한두가지가 아니기 때문에, 장(長)조총과 천보총이 다른 무기체계였다는 것 또한 이미 증명되었다. 그리고 이 장(長)조총은 1인이 운용하는 개인화기로써, 이미 서북지방과 5군영에서 널리 쓰이던 조총이었기에 천보총이 정말로 조총형식이었다면 똑같은 무기체계를 다른 이름으로 보급해야할 이유가 없다는 사실에 직면한다.
그래서 천보총의 장총설을 미는 사람들은 K2 소총에도 보병이 쓰는 것과 지정사수가 쓰는 것의 부장품 등이 다른 경우를 들어 천보총을 장(長)조총의 저격용 개량형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고, 다른 가설로써는 북한이 보병에게 보총을 들려주면서 저격수에게는 저격보총을 쥐어주는 것처럼 저격특화 병사를 위한 특화 장총을 따로 설계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천보총의 장(長)조총설을 미는 사람들은 전근대의 아프가니스탄이 영국에게 저항할 당시 사용했던, 제자일(Jezail)을 일례로 든다. 제자일은 일단 화승총의 일종이면서도 사거리가 무려 200~300m나 되는 저격소총이었다. 이러한 총기를 열악한 아프가니스탄의 상황에서 가내수공업으로 만들어 냈다는 것이다.[18] 화약병기에 능숙하지 못했고 중앙집권제도 부실했던 파수튠 족들도 이러한 총을 자체 생산하여 보급했는데, 조선이라고 그러한 총기를 못만들었으리란 법은 없다. 일본제국이 조선제 무기제조법과 천보총에 대한 기록을 완전히 말소한 것을 보면 하찮은 수준은 아니었을 것으로 추정부분에서 근거가 추가된다.[19]
천보총의 장총설은 신미양요의 기록 때문에 부정되고는 한다. 미국의 장교가 본국의 가족들에게 보낸 서신 중에는 조선군이 Wall-Gun형식의 총통을 동료 어깨에 거치해서 쏘는 것을 목격했다는 글이 있는데, 이것 외에 조선제 무기에 따로 관심을 가진 무기체계는 없다. 실제 이 당시 노획된 장신의 조총이 나중에 유물로 공개되기도 했는데, 장(長)조총과는 별개의 모습이었다. 만약 천보총이 그렇게 뛰어난 무기체계였다면 두 번의 양요에서 쓰이지 않았을 이유가 없을테니, 천보총의 실체는 거치형 총통이었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2.3. 주력병기에 대한 애칭설 - 별칭의 개념
총통이라는 설과 장총이라는 설이 보편적이지만, 구한말의 대일항쟁에 한하여, 천보총이란 명칭이 조선제 무기들에 대한 애칭(愛稱)으로 쓰였다는 설이 존재한다.천보총의 장(長)조총설에서 나온 제자일(Jezail)이 화승총을 극한으로 개량한 것처럼, 조선군도 기존 조총을 개량하는 것을 시도한 바[20]가 있고, 이런 개조법이 후장식 총기가 군용제식으로 보급되던 대한제국 시기에 민간으로 퍼져 훗날 의병들이 조총을 개량해서 사용하게 된 바가 있다.
천보총에 대한 기록은 대한제국말부터 일제강점기 초까지 의병들에 의하여 사용되었다는 기록이 있는데, 천보총 자체는 대한제국 정부와 일본정부에 통제되어 대부분 유출없이 폐기되었을 것[21]으로 추정되고 있으므로, 의병들이 천보총을 획득해서 사용했을 확률은 전무함에 가깝지만, 독립운동에 대한 기록에는 항일 의병들이 천보총을 사용하여 유격전을 펼치며 저항했다는 기록이 있으므로 기존 대한제국의 천보총과 의병들이 쓰던 천보총은 다른 것으로 여겨진다.
따라서 독립운동사에 나오는 천보총은 개항기에 들어서 무너진 조선의 민간군수공업이 16세기부터 19세기 중반까지 찍어냈던 구형 조총[22]을 근대 기술[23]을 사용하여 개조한 것으로 추정되는데링크, 구형 조총이라도 탄약의 추진체인 화약과 총탄이 바뀌면 사거리가 늘어나는 것은 당연지사다. 즉 이 사실에 따르면 의병들이 사용했다는 천보총은 조선군이 개발한 천보총과는 완전히 다른 물건이 된다.
즉 구한말쯤되면 천보총이란 총기명 자체가 조선군과 민간에서는 가장 좋은 총에 대한 보통명사화되었다고 볼 수 있다. 조선이란 나라 자체가 본래 병농일치제로 모든 (평민)남성이 병역을 지는 나라였다보니[24], 자연스레 '좋은 총'='천보총'이라는 인식이 박혔고, 군대해산 등으로 전투가 가능한 조선인들이 의병에 합류하면서 자신들이 사용했던 조선제 무기에 대한 애칭으로 천보총이라는 명칭을 붙인 것으로 추정되는 것이다.
참고로 조선군대가 개발해서 사용했던 '군용 천보총'의 실물은 그 얼개조차도 존재하지 않지만, 구한말 의병들이 사용했다는 '민용 천보총'은 실제 유물이 존재한다. 거의 사람 키만한 장총[25]으로 한때, '일본 조총'이라는 잘못된 명칭이 붙어 있었으나, 재미교포가 미국에서 입수해서 2005년에 기증했다고 한다. 다만 이 조총이 언제 제작되어서 어느 의병들이 사용했다가 노획되어서 미국으로 건너갔었던 것인지는 알 수가 없다고...
3. 총평
마지막 천보총에 대한 기록은 1871년에 어영청에 1기가 남아있다는 문헌이 마지믹이다.세도정치로 인한 국방력 약화로 인하여, 더이상 양산이 안되어 신규생산이 안되었다가 신무기 도입 등으로 인하여 도태병기 취급받고 사라진 것으로 추정된다.[26]
천보총을 포함한 조선제 무기는 모두 녹여졌다. 일제는 조선제 갑옷과 총기 그리고 대포까지 모두 폐기처분했다. 조선총독부가 조선제 병장기들을 폐기했다는 것은 실제 기록이 있다. 日帝, 조선 유물 1610점 녹여 무기 만들었다
4. 매체에서의 등장
한성별곡에서는 전장식 소총에 가까운 신형 천보총을 등장시켰다. 하지만 이쪽은 장총이랑 별로 구분이 안 되는 형상이다. 실제로도 최근 매체에서는 천보총과 장총을 같은 개념으로 언급하고 있다. 즉, 초기 천보총이 거치형 화기였던 개념을 생략하고, 초기형 조총에서 바로 천보총=장총으로 업그레이드되는 식으로 간략화하여, 두 가지 무기를 동일화하는 식이다.[27]
미니어처 게임인 Warhammer의 스케이븐이 사용하는 워프록 제자일은 2인 1조로 운용하는 거치형 무기라는 점에서, 숙종 시대의 박영준이 개발한 초기형 천보총의 크기나 운용법이 이와 비슷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네이버 웹툰 귀도호가록에서는 장용영에서 탈영한 사수 '장일량'이 천보총을 무기로 사용한다.
녹두꽃에서도 등장하며 안길강이 연기한 해승이라는 캐릭터가 사용한다. 한성별곡과는 달리 미국의 기록에 남아있는 미군에 피해를 입힌 조선군의 징겔포(Wall-gun)를 천보총으로 해석하여 고증한 것으로 보이는데, 거치식 형태로 드러나며 야전에서는 2인 1조로 사용하고, 성벽에서는 성벽에 거치해서 사용한다. 거치식 형태인 만큼 매우 큰 위력을 발휘하며 긴 총열 덕분에 장거리 사격도 가능하다. 다만 전주성에서 홍계훈(윤서현)의 경군을 공격하던 중 백이현(윤시윤)의 저격으로 천보총이 망실당한다.
[1] 재미교포이며, 친일파 매국노인 민영휘의 증손자다.[2] 장 씨 부부가 기증한 이 '천보총' 추정 '희귀 소총'은 1700년대 제작된 화승식 장총으로 조선 왕실의 근위병들이 사용하던 것이다. 아직도 왕실 문양이 뚜렷이 남아있다고 한다. 재질은 강철과 나무로 이루어졌으며 길이는 160cm 정도이다.[3] 조선의 화력병기 사랑은 동북아에서도 매우 유난했으나,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으로 나라가 망할 뻔한 이후에는 특히 화기 개발에 총력을 기울였다. 이러한 화기 개발은 세도정치가 시작되기 전까지 계속 되었으며. 이러한 화기 개발 덕에 조선 초에 개발된 천자총통과 지자총통이 도태되고 홍이포와 불랑기포가 조선군의 주력 화포가 되었다.[4] 양란 전까지 조선에서는 방아쇠와 손잡이 없이 발포하는 모든 화기를 총통이라고 불렀다. 따라서 양란 전에는 대포도 총도 전부 총통이었다. 천자총통과 지자총통으로 대표되는 대포형 총통이 명나라에서 들여온 불랑기포로 대체되는 과정에서 선제적으로 퇴출됨에 따라 대포들이 총통이란 명칭을 상실함으로써 총통은 핸드캐넌의 명칭을 갖게 되었다. 곧 조선이 조총의 국산화에 성공하면서 총통도 조총(화승총)에 대체되어 사라졌다.[5] 청나라는 만주족의 권력인 팔기군이 약화되는 것을 막을 필요가 있었고, 일본은 도쿠가와 막부가 성립한 직후, 다이묘들의 군사력을 제한할 필요가 있었다.[6] 당시 조선군의 70% 이상이 총병이었다. 조선의 연간 조총 생산량은 4자리수였으며, 심지어 일본과 청에 수출까지 했다.[7] 조선의 민간 군수공업은 세도정치를 맞이하며 휘청거리다가 개화기에 신식총기 생산법을 익히지 못하고 서양제 무기 직도입에 밀려 도태되었다.[8] 다만 장(長)조총의 일종인지, 아니면 장(長)조총과는 다른 종의 총기인지는 확인할 수가 없다. 대한제국이 망하는 과정에서 조선제 무기들 상당수가 일제에 의해서 녹여져 없어졌고, 세부제원과 제조법에 관한 기록이 말살되었기 때문이다.[9] 1000보는 약 1,386m 쯤이다. 이는 대포인 천자총통의 사거리보다 길다.[10] 공인된 유물이 없어서 실사격을 측정한 기록이 없다. 따라서 실제 사거리가 얼마인지 알 방법은 없다. 사거리를 대강 추측하는 근거는 장(長)조총의 유물 덕분이다.[11] 서북지방의 군영에서 쓰던 조총이 발굴된 바가 있지만 하필 장(長)조총 또한 서북지방에서 운영되었던 터라, 기록이 없는 지금 무엇이 장조총이고 무엇이 천보총인지는 알 수 없다.[12] 천보총이 장조총의 일종인지에 대한 논란이 생기는 것도 이 때문이다.[13] 현대에는 저격소총이나 지정사수소총의 개념으로 만들어졌을 것이라는 추측이 존재한다.[14] 이쪽은 청나라 시기 유럽 열강과 전쟁할 때도 심심치 않게 사용했으며 흔히 징겔포(Jingal, 鳌炮)로 불렸다. 신미양요 때 미국 측 기록을 보면 조선이 보유한 대형 조총을 징겔포라고 불렀다. 아편전쟁에서 서양 군대에게 맥 없이 작살나던 청나라 화기 중에선 그나마 꾸준히 적군에게 부상자를 만들었던 물건으로, 제자일처럼 먼 거리에서 기습 저격에 애용되었다.[15] 저 월건 형식의 무기에 대한 자료는 애초에 남아있지가 않아서, 청나라에서 수입해서 배치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16] 즉 천보라는 제식명칭이 정말로 비유적 수사라면 월건 형식의 무기였을 확률은 0%에 가깝다.[17] 천보총의 Wall-gun설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숙종시기에 Wall-gun 형식의 천보총이 개발되고 영조시기에 장총 형식의 천보총이 개발되어 동시에 운영되었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게 사실이라면 완벽히 다른 무기체계를 같은 이름으로 운영했다는 말도 안되는 전제가 필요하다.[18] 다만 제자일의 경우에는 성능이 워낙 들쭉날쭉한 데다가 순수 메이드 인 아프가니스탄말고도 노획한 영국제 소총을 개량한 사례도 있다.[19] 다만 대한제국 시기에 조선은 자체 화약병기를 도태시키고 외국산 무기를 직도입하는 결정을 했다. 일본이나 청나라도 기존 총기생산역량에 서방의 기술을 접목시켜서 자신들만의 신식소총을 만들었다는 부분에서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다. 하지만 이러한 실례로 인하여, 조선제 무기들이 더이상 근대전에서 가치가 없었다는 추측도 가능하다.[20] 기존 조총을 플린트락 화승총으로 개조하거나, 동화모 조총으로 개량하기도 했다.[21] 그 증거로 1700년대부터 대량으로 양산되었던 천보총의 실제 유물이 확인되지 않고 있다.[22] 행장총이라고 부르는데, 임진왜란시기부터 사용되었던 일반적인 조총들을 통칭하는 말이다.[23] 동화모를 사용한 뇌관식으로 개조한 것으로 추정된다.[24] 이런 병농일치제는 군제개혁 과정에서 국민개병제로 이어지지 않아서 붕괴되었다.[25] 이런 식으로 화승총을 개조한 유물은 일본에도 존재한다. 이 총의 경우도 오래된 화승식 조총을 뇌관식으로 개조한 것인데 세이난 전쟁때 사쓰마 반란군이 사용한 물건이라고 한다. 개조한 방법은 강철제 스프링과 해머를 새로 장착하고 화약접시를 제거 후 뇌관을 끼울 수 있도록 개조했다고 한다.[26] 단 천보총은 본래 수도권과 서북지방에서 사용하던 무기라서 기록과 별개로 실물은 많이 남아있었을지도 모른다. 일본군이 조선제 화기를 전부 파기할 때, 같이 사라졌을테니 의미는 없지만.[27] 등장인물들의 업적을 띄워주기 위해서 이런 방식을 쓰는 경우가 많다. 주로 영조, 정조. 당연하지만 이들 이전에도 조선의 조총이나 화포는 지속적으로 개량되어 왔다. 본 항목에서 천보총과 함께 여러 번 언급된 장총이 대표적인 예다.